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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기사 (zbk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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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가지 주제
개설일 : 2005/11/06
 




명산 구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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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의 안악군, 은률군, 삼천군 등에 걸쳐 110여㎢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있는 구월산은 우리 나라 6대명산의 하나이다.

 

지난 시기 궁골산, 증산, 아사달산, 삼위산 등으로 불리워온 구월산은 높이 954m(사황봉)로서 황해남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오봉(859m), 주거봉(823m), 삼봉(615m), 아사봉(688m) 등 기묘하게 생긴 99개의 크고작은 봉우리들로 이루어져있다.

 

단풍든 9월의 풍경이 하도 아름다와 구월산이라 불리우는 이 산은 우람찬 봉우리들과 릉선을 누비고 겹겹이 들어선 푸른 계곡들, 기묘한 바위들과 우거진 숲, 기세찬 폭포들과 맑은 시내물이 한데 어울려 황홀한 절경을 이루고있다.

 

산성골, 오봉골, 운계골, 화장골, 원명골을 비롯한 깊은 골짜기들에는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물안개에 칠색무지개 령롱한 룡연폭포, 삼형제폭포를 비롯한 폭포와 담소들이 있다.

 

구월산의 북쪽비탈면으로 흘러내리는 한이천상류의 삼수동에는 부연, 마연, 요연 등이 있고 산허리에는 7년동안 왕가물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다는 이름난 석담이 있으며 서쪽비탈면에는 마당소, 가마소와 같은 소들이 있다. 산중턱에는 교요연이라는 깊은 늪이 있다.

 

황해남도 서부지대의 대표적인 산림지대인 구월산에는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단풍나무를 비롯한 수십종의 나무들이 무성하다. 구월산기슭에서는 갖가지 꽃들이 필뿐아니라 가을철에 밤, 대추, 감, 고욤 등의 과일들이 무르익는다.

 

지금 여기에는 600여종의 식물이 자라며 그가운데서 86종은 키나무이다. 산에는 산삼, 단너삼, 만삼, 당귀, 오미자, 천남성, 족두리풀 등 약초들도 많다. 범, 노루, 삵, 꿩, 꾀꼬리, 두견새, 부엉이와 같은 동물들도 있다. 구월산은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경치를 이룬다.

 

구월산에는 단군이 등산하였다고 전해오는 단군대를 비롯하여 단군과 결부된 전설이 많다.

 

한사람이 앉아있기 맞춤한 크기의 단군대(단군바위)에는 단군이 앉아서 공부하였으며 그가 천하를 굽어보며 담력을 키웠다는 전설이 깃들어있다.

 

구월산에는 9세기초에 세워졌다고 하는 패엽사를 비롯하여 월정사, 흥률사, 락산사, 달마사, 정곡사, 신원사, 묘각사 등 여러개의 옛 건물들이 있었다. 패엽사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폭격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였다. 또한 구월산에는 지난날 황해도 5대산성의 하나였던 둘레 5 230m에 달하는 구월산성의 옛터가 있다. 이 산에는 고려시기 푸른 자기를 구워내던 자리인 가마터도 있다.

 

 



이혜자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의 아나운서

2009.07.06 18:10 | 김희수의 잡글모음 | 흑마기사

http://kr.blog.yahoo.com/zbk216/2830 주소복사




리혜자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의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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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혜자아나운서는 텔레비죤프로그램에서 보던 익숙한 모습이여서

그런지 전혀 낯설어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때면
언제나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였는데 마주 앉아보아도 역시 달라짐이

없이
아주 편안하게 느껴지는 친절한 모습이였다. 그녀는 취재를 접수

하긴
했지만 정작 털어놓을 말이 별로 없네요. 30 아나운서생활을

면서
할말도 많을것 같았는데 입을 열자고 하니 딱히 떠오르는것도

구요
라고 하면서 풋풋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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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는
노력

 

1959년에 연길현 초양천진의 교원가정에서 출생한 리혜자는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로 되려는 꿈을 가지고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그녀는 소학교시절부터 특별하게 랑독을 좋아했다. 매일마다

문을
소리내여 읽고 라지오를 듣고 신문랑독을 하는것이 그녀의

이였다
. 그녀는 하학하면 집에 돌아와 처음 하는 일이 방송련습이였다.

밥을
먹을 때도 라지오를 들으면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모방했고 밥술

떨어지면 높은 소리로 신문을 읽군 했다. 그녀는 특히 신문랑독에

수했다
. 여러번이나 학교랑독대회에 참가하여 선생님과 동학들의 절찬

받았다.



    중학교시절에는
학교방송원으로 되였고 여가시간에는 조양천방송소

가서도 방송을 해주었다. 선생님과 동학들 그리고 방송소의 아나운서

리혜자의 방송을 듣고 발음이 똑똑하고 음질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모든것은 그녀가 후날 아나운서시험에서 순조롭게 통과될수 있은

초로
되였다.

 

 

부모님의 지지

리혜자는 1978년에 아나운서시험에 참가했는데 그때 그녀는 연길현
조양천
조양소학교의 음악교원이였던 어머니 리련희와 함께 연길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당시 조양천1 정치교원이였던 아버지 리근

중은
성격이 활달했는데 딸이 시험장소로 떠나기전에 아름다운 목소리

내라고 아침 대신 생닭알을 깨서 먹이였다. 그런데 리혜자는 기차간

에서
멀미를 하다가 생닭알을 통째로 토하고말았다. 후에 딸이 생닭알을
그대로
토했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몹시 아쉬워하면서 딸이 시험에

합겹되지
못할가봐 무척 근심했다. 그러다가 딸이 합격되였다는 통지서

받자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리혜자는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잊을수 없다, 아버

지가
그립다 말했다.


    리혜자에게
있어 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면서도 인생의 선배이며

구같은
분이였다. 어머니는 그녀의 인생, 사업과 생활에 있어서 사소한

일까지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주었다. 어느 한번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공공뻐스를
탔는데 만원이여서 서서 가다가 얼마후 자리가 하나 남게 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먼저 딸더러 앉으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양하

끝내 어머니를 자리에 앉게 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에 가슴이 뜨거

워나고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사랑을 너무

크게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머니한테 효도하고싶지만 어머니생

전에
하늘같은 사랑에 보답할것 같지 못하여 어깨가 무거워지군

했다
.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하늘같은 사랑을 딸에게 주려고

애쓰고있다
. 그녀에게는 이쁜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외국류학중이다.

 

 

선배님들에게 칭찬도 받고 배우기도 하면서


리혜자는 아나운서시험을 보고 통지를 기다리는 열흘사이가 일년맞

잡이로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연변인민방송국아나운서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가지고왔는데 그냥 가지고다니면서 들여다보군 했다. 심지어

밤에
자다가 깨여나서도 불을 켜고 식구들 몰래 이불밑에서 이불을

들고 아나운서들의 이름을 들여다보군 했다. 얼굴은 몰랐지만 방송을
통해
목소리만은 익숙히 알고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였

그녀는 아나운서를 그렇게도 숭배하였던것이다. 통지를 받고가던

그녀는
나도 이젠 아나운서가 되였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리혜자는 1978 11월에 연변인민방송국에 들어가 4개월동안의

습을
거치고 프로안내, 생활안내, 간단한 통신 같은 실험방송을 진행했

. 다음 선배아나운서들과 함께 정식프로그램을 맡아하면서 선배님

들에게서
발음, 소리, 감정 방면의 기초를 배우게 되였다. 처음에는

연변인민방송입니다라는 간단한 말도 되지 않아서 밥도 먹지 않고

여러번
반복하여 련습하군 했다. 사방흥을 비롯한 선배님들은 발음이

똑하고
음성이 부드러우며 억양이 자연스울뿐만아니라 감정표달이

실하다고
그녀를 칭찬해주는 한편 그녀에게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선배님들의
그런 칭찬이 그녀에게 힘이 되였고 선배님들의 가르침이

녀의
실무능력을 높여주는 계기로 되였다. 리혜자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선배님들의
사업열정, 정직하고 참답고 에누리없는 사업태도를 배운것

이후 성숙한 아나운서로 되는데 도움이 되였다고 말하면서 후배들도
선배님들의
그런 사업태도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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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에게 편안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며

리혜자는 1993년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들어가 동물세계, 연변뉴

, 요청무대, 진달래문예프로, 국내외뉴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했으며
9.3,  6.1 대형특집실황의 사회, 자치주창립30돐해설사 등을

아했다
. 그녀는 주급, 성급, 국가급 우수상을 수많이 받았지만 그런

적보다도
자신이 하고싶은 아나운서사업을 할수 있는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텔레비죤방송과 라지오방송은 아나운서다운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털레비죤방송은 청취자들한테 목소리만 남기는 라지

오방송과는
달리 아나운서다운 외모에서 나오는 표정 또한 중요하다.

혜자가
처음에 진행한 동물세계 같은 프로그램은 화면에 얼굴을 나타내

프로그램이 아니였다. 당시 많은 시청자들은 리혜자가 진행하는

동물세계프르그램을
듣고 너무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는 아나운서의

굴을
몹시 보고싶어 했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 화면앞에 나설 때는 분장

사가
따로 없어 자기절로 화장을 해야 했다. 카메라가 받을수 있는 색을

골라
옷을 입고 화장해야 했는데 그녀는 눈을 너무 시퍼렇게 그리고

크게 한다는것이 짙은 색을 너무 탓에 화면에 입이 너무 크게 나와

시청자들에게 주는 형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님들한테 욕을

먹기도
했다. 나중에 그녀는 선배님과 동료들한테 물어보고 자기절로

단히
실천한 결과 화장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수 있게 되였다.

리혜자는 처음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는 프러그램을 진행할 시청

여러분, 안녕하십니까?”하는 말이 제일 어려웠다. 아주 간단할것

같은
말이지만 자태, 표정, 어조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되기때문에

그만큼
힘들었던것이다. 그녀는 아주 간단한 말을 거듭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때까지 련습했다.

그녀가 텔레비죤화면을 통해 시청자들과 대면하게 되자 전주 시청

자들은
대뜸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단아한 용모에 기픔

있고 편안함이 느껴지는 아나운서가 나타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

.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친철하고 따뜻한 느낌이 시청자들에게 그날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준것이다. 모든것은 그녀가 시청자들이 편아하게

들을수
있게 적극적으로 노력한 모습이 화면을 통해 나타났기때문이다.

선배님들도
그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성과를 따내게
된데는
자신의 끝임없는 노력뿐만아니라 선천적재능과 사업에 대한

착심이
있었기때문이다. 리혜자는 무엇보다도 천부적인 목소리와 타고

아나운서의 기질이 있었을뿐만아니라 방송사업에 남다른 애착심을

가지고있었다
. 외모와 목소리는 아나운서의 필수조건이지만 이러한

연조건은
근근히 아나운서의 첫발자국을 내디딜수 있는 조건에 불과할

뿐이다
. 진정으로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는 아나운서가 되려면 시청자들

인정해줄수 있는 훌륭한 정신수양과 인격수양이 안받침되여야 하는

이런 수양은 하루아침에 쌓아지는것이 아니다. 리혜자는 사업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선배님들한테서 배우고 부단히

력하면서
한층한층 수양을 쌓아올렸던것이다. 리혜자는
자신의 장점을 살리

고 적극적인 자기계발을 통해 세련된 사회풍격을 보여주면서 점차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

는 성숙된 사회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특히 언어, 자태, 표정 등으로 화면속에 편안함과

친절을 보여주면서 조리있는 언변과 정확한 발음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정상급 아나

운서로 자리매김했다.

 

 

시청자들의 사랑을 담뿍 받는 아나운서

그녀에게 오늘과 같은 성과가 있게 된것은 청취자, 시청자들의 사랑

훌륭한 선배님들의 도움이 있어기때문이다. 아나운서의 자격은 청취

자와
시청자가 평가해주기때문에 청취자와 시청자가 가장 좋은 선생님

이다
. 리혜자는 청취자와 시청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리혜자의
청취자는 고향사람들이였다. 그녀가 어릴 살던 조양천의
고향집은
단층으로 줄집이였다. 그녀는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동네가 떠들썩하게 높은 소리로 신문을 랑독했는데 어떤 때는

웃들의
낮잠을 께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웃들은 조금도 시끄러워 하지

않고
혜자가 랑독을 하는구나. 에그, 목소리도 고운게 이후 방송

원이
될게다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녀가 아나운서로 된후 부모와 동네사

람들이
청취자였고 가장 열렬한 팬이였다. 리혜자는 처음엔 짧은

송을
했는데 동네사람들은 리혜자의 방송을 듣겠다고 시간을 고대하여

기다렸다가
제시간에 꼭꼭 듣군 했다. 리혜자는 지금도 생각하면 그런

마을사람들이
고맙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고향사람들은 그녀가 텔레비

죤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도 열렬한 시청자로 되여주었다. 이런

시청자들의
사랑은 그녀에게 분발할수 있는 힘이 되였다.

 

 

다시 태여난다고 해도

리혜자에게 도움을 잊지못할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당시 조양천

영화관에서
사업했던 리주남선생은 훌륭한 아나운서감 있다면서

녀를
적극적으로 방송국에 추천하여 주었다. 리광평선생님도 그녀에게

조양천방송소의
방송을 할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고 조양천방송소의

현순아나운서도
그녀에게 방송련습을 시키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모든 선배님들이 너무너무 고맙다고 말하면서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이 있을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리혜자는
작년에 연변대학신문방송학과에 가서 방송강의를 했고 사회

인들을
대상하여 랑독도 배워주고 교육프로그램도 배음하여 주었다.

혜자는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방송사업을 사랑했기때문에 열심히 할수

있었다
.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할수 있어서 기쁘며 방송할 때가 가장

복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다시 태여나도 아나운서로 되고싶단다.  

연변TV신문 김희수기자

 


 

주광현 분장예술을 꽃피워가는 사람

2009.07.01 15:05 | 김희수의 잡글모음 | 흑마기사

http://kr.blog.yahoo.com/zbk216/2829 주소복사



주광현 분장예술을 꽃피워가는 사람

 

연변TV방송국 분장사 주광현의 이야기






분장예술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생소하게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알쏭달쏭하게 여길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미용원에서

 

하는 화장이나 무대화장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분장은

 

미용원에서 하는 일반 화장보다 한차원이 더 높은

예술이다.

 

분장예술은 배우들을 극중인물의 성격과 모습에 맞게

분장하는

 

미술로서 얼굴과 몸매, 옷차림새 따위로 그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에 일반 화장보다 한단계 더 높은 기술이

필요한것이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분장실에는 이런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

 

분장예술에 몸을 담고 청춘을 불태워가는 40대의

사나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주광현분장사이다. 주광현은 무대미술,

조각, 서예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재간둥이일뿐만아니라

 

재능있는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분장실이 없는 분장사

 

 

 

2001년 7월 7일, 주광현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이날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저명한 사회자 최영원이

 

《사랑으로 가는 길》생방송프로에 10만원을

기부하기 위해

 

생방송현장에 찾아왔는데 그를 화장해줄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는

분장실이 따로

 

없어서 아나운서나 사화자, 특집프로에 초대된

배우나 귀빈들의

 

화장은 모두 미술도구창고에서 해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성망이

 

높은 최영원사회자를 또 어지러운 미술도구창고에서

화장을

 

해주자니 몹시 난처했다. 4년전인 1997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창립

 

20돐기념행사때 최영원을 화장해준적이 있는

주광현은 이번에도

 

4년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곳에서 최영원을

화장해주면서

 

얼굴이 뜨거워났다. 최영원이 “이처럼 간고한

환경에서도 조선족

 

예술인들은 전국적으로 최고의 정품예술을

창작해내고있으니 정말

 

대단합니다”라고 탄복하면서 주광현이 해준 화장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지만 주광현은 루추한 곳에서 최영원을

분장해준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은 조선족을 대표하는

전파매체인데 분장실

 

하나 갖추지 못하여 최영원 같은 명인들을 지저분한

미술도구

 

창고에서 화장해줘야 하다니? 이는 우리 민족의

얼굴이 깎이는

 

일이다. 앞으로도 최영원같은 수많은 명인들이

연변텔레비죤

 

방송국을 방문하거나 프로에 동참할것은 불보듯

뻔한 일인데 그냥

 

분장실이 없어서 루추한 미술도구창고를 사용해야

된단 말인가.

 

또 연변텔레비죤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분장실은 꼭

필요한

 

것이다.)

 

주광현은 지도부를 찾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면서 분장실을

 

내올것을 제기했다. 지도부에서는 경제형편이

어려웠지만 주광현이

 

제기한 분장실문제에 대해 중시를 돌리고 분장실을

내오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력사에서 처음

자체의 분장실이

 

있게 되였다. 주광현은 개인이 거둔 성과보다도

분장실을

 

내온것을 가장 큰 자호감으로 여기고있다.

 

 

 

 

 

분장예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63년 9월,연길에서 출생하여 줄곧 연길에서 자란

주광현은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연변주공예미술공사에서

조각예술사업에

 

종사했다. 나무, 돌, 금속따위를 깎거나 새겨서

립체형상을

 

만드는 조각은 산을 깎아서 거대한 물체를 만들기도

하고
바늘구멍안에 미형의 립체형상을 새겨넣기도

하기때문에 비범한

 

재주와 섬세한 기술을 요구하는 마법과 같은 예술이다.

주광현은
비록 달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가 조각한 작품은

 

살아서 숨쉬는듯했다.

 

1983년부터 1986년 7월까지 연변방송예술단에

들어가 서기원
사업에 종사한 주광현은 사업여가에

원래부터 취미를 가지고있던

 

무대미술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다가 1986년 8월부터

텔레비죤
방송국의 무대미술사업에 종사했다.

무대미술은 무대장치와

 

의상에만 한정하는것이 통례이며 무대효과를

예상하여 설계하지만

 

조명에 의한 색채변화까지도 고려하여 무대의 정경과

분위기를
꾸미거나 살려야 하기때문에 일반

미술과는 다른 감각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다시 말해서 무대를 일정

공간으로 하여

 

무대에 존재하는 대상물 즉 넓은 의미의 무대장치

전반에 주는

 

미적표현을 보여주는것인데 여기에는 무대장치,

무대의상, 무대

 

조명, 무대화장, 소도구 더 나아가서 배우의 자세,

군상의
구성까지도 세심하게 살펴야 하기때문에

미술을 바탕으로 하는

 

종합지식이 필요되는것이다.

 

주광현은 처음에는 텔레비죤프로의 무대미술을

맡아하다가

 

1987년에 텔레비죤극 《우리 선생님》의 미술담당을

하면서부터

 

 《갈꽃》, 《외로운 넋》, 《별찌》, 《황혼빛갈》

 

등 텔레비죤련속극의 미술담당을 맡아했다. 주광현은

여러편의

 

련속극 미술담당을 맡아하면서 연변에 분장예술이

공백이라는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무대미술을 맡아할 때도

사회자나 가수,

 

소품배우들이 미용원에 가서 화장을 하고

출연하는것을 보고

 

자체의 분장사가 있어야 하겠는다는것을 느꼈지만

이때처럼

 

절실하게 느껴본적은 없었다. 매편의 련속극을

찍을 때마다

 

분장사가 없다보니 배우들은 여러곳에 널려있는

미용원을

 

찾아다니면서 화장을 하느라고 촬영시간에 늦게

도착하거나

 

촬영현장으로 오는동안 화장이 일부 지워져서

다시 미용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페단이 늘 발생하군 했다. 이런 정경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그는 (중앙이나 다른 성, 시의

텔레비죤방송국에는

 

모두 분장사가 따로 있는데 연변에는 아직

분장예술이 공백이구나.

 

텔레비죤련속극까지 촬영제작하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분장사가

 

없어서야 될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분장을 배워서

 

분장예술이란 이 공백을 메우기로 마음먹었다.

 

 

 

 

 

분장예술에 혼신을 불태우며

 

1989년에 김희자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있던 주광현은 1994년부터 사랑하는 가족들과

잠시 떨어져서

 

장춘영화촬영소, 북경영화촬영소 등 전문업체에 가서

배우분장,

 

특수분장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미술기초가 있고 또 꾸준히

 

배운덕에 주광현은 사회자분장은 물론 련속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분장까지 재치있게 할수 있는 분장사로

되였다.

 

분장사란 배우를 등장인물의 특성에 맞게 꾸며주는

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방송, 연극, 영화, 가극,

광고 등

 

작품의 내용과 인물의 성격에 따라 직업, 지위,

년령, 기질 등에

 

맞게 배우를 분장시키는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직업을 말한다.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하는 미용원의 화장사와

혼동하거나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격한 의미에서는

구분이 된다.

 

분장사는 제작팀과 함께 현장을 지키며 시시각각으로

분장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배우의 성격과 극의 내용이

일치할수 있도록

 

표정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등

성실함과 꼼꼼함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처음에는 숙련된 분장사를 보조하면서 기술을

전수받는 형태를

 

취하다가 3~5년이 걸려야 독립적으로

분장사업무를 수행할수

 

있지만 주광현은 1년이란 단기학습을 마치고서

직접 텔레비죤련속극

 

 《초연속의 수리개》의 분장을 맡아하게 되였다.

1995년에 연변

 

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장춘영화촬영소와 합작하여

텔레비죤련속극

 

 《초연속의 수리개》를 찍기 시작했는데 자금문제로

장춘영화

 

촬영소에서 철회하는 바람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자체로 촬영하게 되면서 주광현이 독립적으로

분장사업무를

 

맡아하게 되였다.

 

이 련속극은 전쟁장면이 많아서 분장사의 업무량이 많고

 

난이도가 높았다. 하지만 주광현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등장인물

 

들의 특성에 맞게 화상흉터, 칼자국, 파편자국,

피자국 등

 

부상을 입은 장병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비록 피로했지만

 

 촬영이 순조롭게 끝나고 련속극장면이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더없는 보람을 느끼군 했다. 그후 주광현은 《야명주》,

 

《녀자는 무엇입니까》, 《하얀꽃》 등

텔레비죤련속극의 분장을

 

맡아하면서 분장예술에 정력을 몰부었으며 그 재능을

 

충분히 과시했다.

 

어느 한번 주광현은 이름난 연극배우 “떼떼” 리동훈에게

 

부상당한 극중인물의 분장을 해주었는데 리동훈은

분장을

 

지우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누구한테 얻어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가족들은 피자국과 멍이 진 얼굴을

보고 정말로

 

심하게 맞았는가 해서 리동훈을 병원에 호송하려고

까지 했다.

 

또 어느 한번은 맹장수술자리가 보기 흉하다고

그 자리에 문신을

 

한 처녀가 미용원에 갔다가 소문을 듣고 주광현을

찾아왔다.

 

그 처녀는 딱한 사정이 있어서 잠시 문신을

가리우려고 하는데

 

본래의 살가죽처럼 해달라고 애원했다.

주광현은 하도 간절하게

 

청하는지라 거절할수 없어서 알심들여 분장을 해주었데

 

수술자리인지 문신자리인지 알아볼수 없게 본래의

피부모습대로

 

재현되여서 처녀는 무사하게 고비를 넘기게 되였다.

그리고

 

또 한번은 출국을 하겠는데 자신의 얼굴을 늙어보이게

 

분장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주광현은

 

안된다고 딱 잘라서 거절했지만.

 

 

 

 

 

 

분장사이면서도 영화배우인 주광현

 

주광현의 분장솜씨는 날로 늘어나서 영화감독의

초청을 받아

 

영화분장까지 맡아하게 되였다. 영화는

텔레비죤련속극보다

 

한차원이 더 높은 종합예술이기때문에 분장사에

대한 요구

 

또한 더 높았다. 주광현은 기회를 소중히 여기면서

열심히

 

잘해보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처음 분장을 맡아한 영화는 《망종》이였다.

그런데

 

영화촬영현장에 간 그는 깜짝 놀랐다. 감독은 그더러

분장을

 

맡아하면서 영화의 남주인공역까지 맡아하라는것이였다.

 

연기경험이 하나도 없는 그더러 보조역도 아니고

주인공역을

 

맡아하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주광현은

 

용감하게 주인공역에 도전해나섰다. 그는 비록

연기경험은

 

없었지만 수많은 련속극의 분장을 맡아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현장에서 지켜보았기때문에 파악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김공정사역을 맡은 그는 조선족김치장사 최순희역을

맡은

 

류연희와 호흡이 잘 맞아 성공적으로 영화촬영을

마무리지었는데

 

이 영화는 제32회 시애틀국제영화제,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20여개 국제상을 받았다. 또 《망종》은

2007년 9월 23일에

 

한국 KBS의 추석특집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주광현은 영화 《망종》외에 영화 《중경》에서도

분장사 겸

 

제2호인물인 류학생역을 맡았다. 주광현은

연기에도 분장 못지

 

않게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진실한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옷을 몽땅 벗기까지 했다.

 

주광현은 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제작한

김광호감독의

 

영화 《궤도》의 분장을 맡아했는데 이 영화는

두팔을 잃은

 

남자와 벙어리녀자가 한집에서 살며 벌어지는

이야기로서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제37회 로떼르담국제영화제 “타임 앤드 타이드”

부분에 진출했다.

 

주광현은 분장예술에 혼신을 바치면서 특수분장에도

도전했다.

 

화면에 보여질 배우의 얼굴을 최대한 자연스럽고

상황에 맞게

 

다듬어주는 역할이 일반분장이라면 특수분장은

말그대로 배우의

 

특수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기술을

표현하는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성형과 관련된 설정, 흉한 상처나 잘려진

 

신체부위 등 인위적설정으로 인해 배우의

신체훼손을 가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때 필요한것이 특수분장이다.

주광현은 아주

 

간단한 특수분장을 할수는 있었지만 특수분장사에

비해 그

 

수준차이가 있었다. 그는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는 보다 많은 일을 해보려는 꿈은 가지고있지만

 

자금난때문에 그 꿈을 마음대로 펼수 없는것이

유감이라고

 

말하면서 연변의 분장예술을 더욱 꽃피우기 위해서 계속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연변라지오TV신문   김희수기자

 

 


 
 

허련순 한국문인들과 나란히 선 소설가

2009.07.01 15:01 | 김희수의 잡글모음 | 흑마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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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순 한국문인들과 나란히 선 소설가




작가는 연예인에 비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못하고있다.

 

연예인을 손꼽으라면 자신있게 단숨에 10~20명씩 줄줄

 

외우는 분들이 많지만 작가이름을 말하라면

1~2명도 말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 중국조선족가운데는

 

우수한 연예인도 많지만 우수한 작가들도 많다.

 

그중에는 허련순도 있다.

허련순은 누구인가? 허련순은 소설가이다.

 

허련순은 어떤 소설가인가? 허련순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소설가이면서도 한국의 유명한 문인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소설가이다.

 

중국조선족이라면 우리에게도 허련순처럼 우리 민족을

 

빛내고있는 유명한 소설가가 있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여기서 그녀를 녀류소설가라고 특별히 지칭하지

 

않은것은 그녀가 남성작가들에 비해

 

조금도 짝지지 않기때문이다.

 

 

 

밥짓는 남편과 글쓰는 안해





허련순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마친후 습관적으로

 

컴퓨터앞에 마주앉아 메일함부터 검사해본다. 날마다

 

이역만리에 가있는 딸 홍예화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보는것이

 

그녀에게는 글쓰는것과 마찬가지로 하루일과였다.

 

엄마, 안녕?”으로부터 시작되는 딸의 편지는 날마다

 

새로운 정보를 전하고있는데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심도있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자신의 독특한 견해까지 상세하게 밝히고있어

 

한편의 론문같기도 하고 한편의 수필같기도 했다.

 

과연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하고있는

 

류학생이 다르긴 달랐다.    


딸의 편지를 다 읽고나서 허련순은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가족과 주위에서 생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나서

 

딸과 엄마만이 주고받을수 있는 화제를 편지에 담았다.

 

그녀가 부지런히 컴퓨터건반을 두드리고있는데

 

주방에서 밥을 짓고있던 남편 홍성빈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어서 와서 아침식사를 하오!”

“네,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허련순은 답장에 종지부를 찍고 보내기를 클릭하고서야

 

일어나 밥상으로 다가갔다. 남편은 벌써 밥상을

 

다 차려놓고 수저까지 받쳐놓고서 그녀가 와서 식사하기를

 

기다리고있었다. 허련순의 가정은 여느 가정과는 달리

 

남편이 가정주부(家庭主夫)로 되여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서 꾸려가고있었다. 허련순의 남편 홍성빈은

 

원래 기자생활을 하던 청년시절에 시인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시를 썼다. 그런데 허련순은

 

두 사람이 모두 글을 쓰면 살림살이를 돌볼 시간이

 

없다면서 남편이 시를 쓰는것을 반대했다.

 

홍성빈은 안해의 재주를 미리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던지

 

자신을 희생하고 안해의 문학을 지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수십년간 소설가인 안해를 위해

 

쌀과 남새를 사들이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등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집안일뿐만아니라

 

안해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아서

 

허련순은 창작한 소설원고를 우편으로 부치군 했는데

 

매 원고마다 남편이 직접 가지고가서 부쳐보내군 했었다.

 

허련순이 장편소설 《바람꽃》을 흑룡강신문에

 

련재하고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허련순은 완고된

 

소설을 보낸것이 아니라 쓰는족족 련재하고있었는데

 

한번은 우편으로 부치면 제시간에 편집부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였다. 안해가 안달아하고있는것을 본

 

홍성빈은 직접 기차를 타고 할빈에 있는 흑룡강신문사까지

 

찾아가서 원고를 전해주었다. 이렇게 3개월간

 

련재된 장편소설 《바람꽃》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였는데 중국조선족작가가 쓴 책중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으로 되였으며 한국에서도

 

출판되여 대인기를 끌기도 했다.

허련순은 “우리 남편은 나의 문학을 100%가 아니라

 

150%로 지지해주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남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여 미안하단다. 허련순은

쌀가격이 얼마인지,

 

야채가격이 얼마인지, 두부값이 올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얼마인지도 모른다. 그런것은 응당 남편의 몫으로만

 

생각했다. 허련순은 퇴직후 할일이 없는 남편이 할일이

 

많은 안해를 위해 헌신하고있는데 자신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만 하기때문에 리기적이라고 말하면서

연길시조선족장기협회

 

회장으로 있는 남편을 위해 뭔가 좀 해주고싶어 한국으로

 

나갔을 때 적극적으로 뛰여다니면서 후원을 받아다가

 

남편이 4년동안 한해에 평균 2차씩 국제장기대회를

 

열수 있게 해주었다.

 

 

 

소설을 쓰면서 소설속에 사는 소설가

 

허련순은 문학속의 현실을 자신의 삶이라고 여기고 문학을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하는 소설가이다. 허련순은 집안일은

 

나몰라라 하고 글만 쓰는 소설가이다. 그녀는 출판에 교부할

 

소설을 제때에 완고하기 위해 친척들의 음력설모임에는

 

물론 시부모가 사망됐을 때도 가보지 못했다.

 

이렇게 가정에서 문학이 중요한 위치이기때문에

 

남편 홍성빈도 식사가 끝나면 설겆이를 마치고 집안청소를

 

하고나서 안해가 글쓰는데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집에서 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은 저녁에 돌아와서는 늘

 

“오늘은 또 뭘 썼소?”라고 물어보는가 하면 안해가

 

컴퓨터앞에 마주앉아있지 않고 휴식하고있으면

 

“왜 쓰지 않소? 이제 또 뭘 쓰려고 하오?”라고

 

물어보군 한다. 그리고 또 어느 작가는 무슨 소설을

 

쓰고있는중이고 어느 작가는 새로운 장편을 련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안해더러 빨리 쓰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안해의 글쓰는 모습을 보는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여기고있는 남편이기때문이다.

 

그러나 허련순은 남편의 이런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그녀는 온종일

 

글을 쓰느라고 지쳐있는 자신에게 왜 쓰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더 쓰기를 바라는 남편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면서 “남편은 그저 쓰면 되는줄 아는 모양”이

 

라고 말했다.

1975년부터 시, 희곡, 가사를 쓰던 허련순은

 

1986년에 첫 소설 《안해의 고뇌》를 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창작에 들어갔다. 허련순은

중국조선족작가중에서

 

한국에 제일 먼저 나갔고 한국문단에 제일 먼저

진출한 작가이다.

 

1989년에 처음 한국에 나갔을 때 허련순은 한국의

대형서점인

 

교보문고에 가보고 한국문인들과 접촉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였으며 자신은 여태껏 우물안의 개구리였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단편소설 몇편을 써서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학이 살아남으려면

 

국제적인 시각을 가지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느꼈다.

귀국후 우물안에만 갇혀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허련순은 즉시 사직서를 냈다. 당시 그녀가 몸담고있던

 

연길시문화관의 책임자는 철밥통을 버리려고 하는

 

그녀의 결정에 깜짝 놀라면서 나가더라도 적을 남겨두고

 

나가라고 권고했다.

그후 허련순은 2년동안 석사공부를 하면서 한국문학을

 

연구했으며 자기만의 개성있고 독특한 문학을

확립하게 되였다.

 

1991년에 한국 동아일보사에서는 허련순의 중단편소설집

 

《사내 많은 녀인》을 출판했다. 그리고 허련순은 륙속

 

한국에서 《바람꽃》, 《바람을 몰고 온 녀인》,

 

《뻐꾸기는 울어도》,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등 책을 출판하여 한국에서 소설을 가장 많이 출판한

 

중국조선족작가로 되였다. 금년에 54세인 허련순은

 

1년에 적어도 두번정도는 한국으로 나간다.

 

꼭 무슨 일이 있어서만 가는게 아니다. 작품 한편을 끝내면

 

허전해서 다시 한국으로 가고싶어 견딜수가 없다고 한다.

 

어느 한 평론가는 “한국에 한번 갔다오면 허련순의

 

소설은 달라진다”고 말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글을 담아가지고 왔기때문이다.

 

 

 

가족이 함께 쓰는 소설




허련순은 남편에게는 훌륭한 안해가 못되여 미안하지만

 

딸에게만은 좋은 어머니로 되려고 애쓰면서 딸에 대한

 

교양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딸이 대학공부를 할 때에는

 

영양보충을 위해 최소 4가지 반찬은 보장했다. 어머니를

 

닮아 총명하고 글도 잘 썼던 딸 홍예화는 연변대학에서

 

비교문학석사공부를 끝내고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대학에서

 

사회학을 연구한지 벌써 3년철을 잡고있다. 홍예화는

 

연변대학에서 석사론문을 발표할 때도 쉬운 조선어를

 

포기하고 어려운 중국어로 론문을 발표했는데

 

론문을 읽는것이 아니라 원고를 보지 않고도

 

줄줄 내리 외우기도 했다. 홍예화는 낯선 뉴질랜드에

 

가서도 이악스레 달라붙어 영어관부터 넘은후

 

오스트랄리아에서 론문을 발표했는데 저명한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그번의 론문발표회에서 전례가 없던

 

최우수론문발표자상을 수상받기도 했다.


낯선 고장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홍예화는

 

매일 엄마와 편지로 대화를 하는것이 하루일과중의

 

중요한 부분이였다. 조선족결혼이민의 총체성을

 

연구하고있는 홍예화는 연구가 깊고 사유가 새로와서

 

엄마한테 보내온 편지마다 한편의 론문이면서도 따분하지

 

않아서 아름다운 수필이라고 할수 있었다. 홍예화는

 

“엄마는 소설로 조선족총체성문제를 다루고 딸은

 

론문으로 조선족총체성을 연구하기때문에 엄마는 뿌리고

 

딸은 거둔다”고 하면서 자신의 연구와 엄마의 창작을

 

아주 재치있게 비유했다. 허련순은 남편은 후원자이고

 

딸은 동반자라고 말하면서 가족이 함께 소설을

쓰는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허련순은 딸한테서 온 편지를

 

《연변녀성》잡지에 련재중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책으로

 

출판하여 딸의 졸업선물로 주려고 한다고 했다.

 

허련순은 딸은 늘 새로운 견해로 세계적인 추세와

 

세계적인 흐름을 관찰하면서 가치있는 정보를

 

보내주기때문에 자신의 소설에 힌트를 주기도 하고

 

무게의 깊이를 더해주기도 한다고 하면서

 

문학이란 영원히 변화과정에서 창조되기때문에

 

내 문학이 살아남자면 한곳에 영원히 머물지 않고

 

부단히 새로운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한국으로 밀항을 시도한

 

조선족동포들의 실패한 도항얘기이다.

 

허련순은 한국에서 문학팬들을 가지고있는

 

유명한 문인들만 가능한 싸인회까지 가졌는데

 

1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 싸인회에서 400권이나 팔았다.

 

한국의 유명한 문인들도 보통 200권정도 나가면 표준인데

 

독자권을 가지고있지 못한 연변작가가 400권을

팔았다는것은

 

기적이 아닐수 없었다. 허련순의 책은

 

인기판매도서매대에 진렬되기도 했다.

녀성문제와 중국조선족의 총체성을 주로 다루고있는

 

허련순은 문학인생을 살면서 “문학에는 정상이 없고

 

부단히 새로운 글을 창작하는것”이라고 말하면서

 

“문학은 남과 비기지 말아야 한다. 남과 비기는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하여

 

내가 나를 넘어서는것이 문학의 성공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허련순은 한국문학의 우수성과 연변문학의 전통성을

 

결합하여 한국에 발을 붙이고 자신의

 

문학세계를 넓혀가고있다.

연변대학교 조선어학부를 졸업한 허련순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고 국가1급작가이며 연변녀성문인협회

 

회장이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잃어버린 밤》,

 

《바람꽃》, 《뻐꾸기는 울어도》,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등과  소설집 《사내 많은 녀인》, 《유혹》,

《우주의 자궁》,

 

《바람을 몰고 온 녀인》 등외에 텔레비죤련속극 《갈꽃》,

 

 《녀자란 무엇입니까》,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6막 장막극 《과부골목》 등이 있다. 중국소수민족문학상,

 

길림성정부소수민족문학상, 동북3성금호상,

 

연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신춘문예상,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대상, 제8회작가협회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한국에 가서 한국문학을 전공했으며 중국조선족작가로서는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낸 허련순은 한국의 유명한

 

문인들과 동등하게 선 소설가이며 새로운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항상 사유가 열려있는 소설가이다.

 

그녀에게서 앞으로의 타산같은것은 물어보나마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소설을 쓸것이기때문이다.

 

어떤 소설을 쓰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건강이 허락되는 한 언제나 자신을 넘어서고 앞서가는

 

문학을 하려고 하는 자세가 갖추어져있는

 

소설가이기때문이다.      

 

 




백년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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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절밝고 문명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한가정을 이루면

일생 변함없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훌륭한

미풍량속을 지켜왔다.

 

백년가약은 부부가 되여 일생토록 변치 말고 화목하게

살자고 굳게 다지는 언약을 말한다. 이 언약을 평생토록

늙을 때까지 굳게 지켜가는것이 《백년해로》이다.

 

세나라시기의 설화 《도미의 안해》,

《설씨의 딸》 등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같이 살자고 한번 언약하면 끝까지

변함없이 부부간의 의리를 소중히

지켜왔다는것을 전하고있다.

 

지난 시기 혼례식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에

기러기를 드리고 청실, 홍실로 장식한

조롱박잔으로 술을 교환하여 마셨는데

그것은 기러기와 같이 한번 짝을 무으면

절대로 다른 짝을 얻지 않겠다는 절개,

두개의 조롱박잔을 합치면 하나의 박이 되듯

부부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려는 순결한 감정이 담겨져있었다.

 

우리 민족이 백년가약을 통한 부부의 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지켜왔는가 하는것은 파혼,

리혼자체를 수치로 여기고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은데서 나타난다.

 

백년가약으로 결합된 부부는 호상

신뢰와 믿음이 매우 두터워 아무리 어렵고

곤난해도 고생을 같이하며 일생 백년해로해왔다.

 

오늘도 우리 민족은 조상대대로 전해온

이 미덕을 귀중히 여기며 지켜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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