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룹에 오래있지 못하는 나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음악적인 열정이 강하다보면 한 밴드의 색채 속에서 때론 답답함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스웨덴 계와 시리아 계를 부모로 둔 혼혈아 토미 볼린은 1951년 8월 1일 미국 오하이오 주 스노우 시티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여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어서 기타와 오르간 등에도 손을 댔지만 끝까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기타였다. 혼혈아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토미는 스쿨밴드를 조직해 음반을 통해 고독을 풀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학교생활을 원만히 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장고 라인하르트, 칼 퍼킨스, 지미 헨드릭스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68년에 콜로라도의 로컬그룹 Zephyr에 가입, 프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그룹에서 1년간 활동하며 2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이어서 재즈록 그룹 Energy에 참가하지만 이 팀 역시 곧 해산되고 만다.
토미 볼린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제임스 갱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전임자인 도미닉 트로이아노가 그룹 게스 후(Guess Who)로 가버리는 바람에 토미는 조 월쉬의 추천을 받아 제임스 갱에 가입하였다. 그룹 제임스 갱에서 타미는 73년 앨범 [Bang]과 [Miami]를 녹음했다.
2장의 앨범에 참여한 토미는 제임스 갱을 탈퇴하고 이번에는 명 재즈 드러머 빌리 코헴의 앨범 [Spectrum]에 세션을 맡아 재즈퓨전 기타리스트로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다. 이후 토미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정리하는 솔로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LA, 뉴욕, 런던 등을 오가며 평소 함께 연주해보고 싶었던 뮤지션들을 만나 앨범제작을 함께 할 것을 제의한다.
이 즈음 리치 블랙모어가 그룹 딥 퍼플을 떠나자 존 로드는 토미에게 딥 퍼플과의 세션을 권유하였다. 약 20분에 걸친 세션이 끝나자 딥 퍼플은 토미를 리치 블랙모어의 후임 기타리스트로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토미는 딥 퍼플의 앨범 [Come Taste The Band]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타미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첫 솔로앨범 [Teaser]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음악적인 면에서나 멤버간의 유대에 있어서나 난항을 겪던 딥 퍼플은 결국 76년에 해산되고, 토미는 그해 9월 두 번째 솔로앨범 [Private Eyes]를 완성했다. 이 작품을 기화로 토미는 다시 노마 진 벨(색소폰), 마크 스테인(키보드) 등과 그룹을 결성했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마약중독 등으로 인해 밴드를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76년 12월 4일 토요일 밴드와 함께 마이애미 호텔에 머물던 중 약물중독이 악화됐고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린 토미의 여자친구가 급히 앰블런스를 불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토미는 6일 후 아이오와주의 Sioux에 묻혔다.
그는 재즈적 어프로치를 소유한 록 기타리스트이다. 한때는 제임스 갱이나 딥 퍼플 등 하드록 밴드에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으나 그의 진짜 면모는 재즈적 색채의 애드립에서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펜타토닉 스케일을 도리안 등 재즈적인 모드와 겸용해 쓰기 때문에 보다 퓨전적인 기타를 들려주며, 특히 빌리 코헴의 솔로앨범 [Spectrum]에서 이와 같은 재즈기타를 들을 수 있다. 이외에 그는 멜로디라인에 대한 착상도 뛰어나 'Savannah Woman', 'Gypsy Soul', 'Someday Will Bring Our Love Home' 등과 같은 감동적인 곡들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기타리스트이기 이전에 작곡가로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 셈이다.
Pink Floyd는 환각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음악을 구사하는 영국 출신의 대표적인 4인조 Progressive Rock 밴드이다. Yes, King Crimson 등 동시대의 대표적 Progressive Rock 밴드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강한 개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의 음악적 특징이라면 먼저 표면적으로는 각 악기 파트의 뛰어난 연주 실력에 비해 결코 튀지 않으면서 다양한 악기, 각종 효과들과 함께 전체 사운드를 조화시키는데 주력하였으며, 음악 장르에 있어서는 다른 장르의 도입과 확대보다는 기존 British Rock의 뿌리 위에서 자신들의 색이 강한 음악을 계속 발전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배경 위에서 이들은 인간 내면의 광기를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에 가사, 음악, 연주 등의 모든 요소들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특히 가사 면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이러한 이미지를 마약에 의한 환각, 우주 등의 소재에서 찾다가 점차 일상의 소재로 전환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후기에는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 문제작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들의 음악과 함축적인 가사, 주제는 한 앨범 내에서 일관된 흐름을 갖는 컨셉트 앨범의 형식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을 통해서 어떤 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등 모든 앨범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다.
1. Pink Floyd의 결성과 광인 Syd Barrett (65~68)
1965년 런던 Regent Street Art School의 건축학도들이었던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b), 릭 라이트(Rick Wright, k), 닉 메이슨 (Nick Mason, d) 등은 Sigma 6란 이름의 밴드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Rhythm & Blues등의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세 사람 이외의 나머지 멤버들과 밴드 이름(Meggadeath, Abdabs, T-Set, 등..)은 계속 바뀌다가 역시 같은 학교 출신인 천재 광인 시드 배리트(Syd Barrett, g)가 가입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전환되어 버렸다.
그는 그룹의 리더로 부상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그룹 이름도 Blues 연주자인 Pink Anderson과 Floyd Council의 이름을 합쳐 Pink Floyd로 확정시켰다. 그리고 66년부터는 그가 집착하는 마약, Sex 등에 의한 환상을 음악으로 표현한 Psychedelic Rock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음악은 기괴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선 획기적인 시도로서 슬라이드 필름을 이용해 시각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나중에 그들의 매니저가 된 피터 제너(Peter Jenner)의 눈에 들어 UFO 클럽으로 연주 장소를 옮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967년 첫 싱글 'Arnold Layne'을 발표하였다. 특히 Pink Floyd의 초기 사운드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이 싱글은 지금도 전설처럼 알려져 있으며, Syd Barrett의 기이한 성격이 그대로 나타난 작품이다. 하지만 인기에 비해서 변태적이고 퇴폐스런 가사로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 해 5월에 발표된 싱글 'See Emily Play'와 8월에 발매된 데뷔 앨범 [Piper at the Gates of Dawn]의 성공으로 차트에도 진입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지만 Syd Barrett은 마약 과용으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 졌으며, TV show나 공연 등에 등장해서는 더욱 괴상한 행동만을 일삼아 1968년에는 결국 더 이상 밴드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Syd의 작품은 데뷔 앨범 한 장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멤버들의 그에 대한 동경과 추구는 이후 Pink Floyd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새로운 멤버 David Gilmour (68~69)
Roger Waters의 원래 의도는 Syd가 작곡을 하고 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 g)는 단지 연주만을 담당해 주는 5인조 체제였으나 Syd의 상태가 안 좋아져 결국 다시 4인조가 되었다. Syd의 탈퇴는 분명 아쉬운 일이었으나 David의 능력도 상당했으며, 이후 Pink Floyd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는 아직 Syd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기로, 실험성이 강하고 극도로 환각적인 난해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David이 참여한 첫 작품으로 그 해 4월 싱글 'It Would Be So Nice / Julia Dream'이 발표되었으며, 2개월 뒤 2집 [A Saucerful of Secrets]가 발매되어 Roger Waters가 주도하는 새로운 Pink Floyd의 음악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 영화 감독 Barbet Schroeder의 제의로 영화 [More]의 전곡 사운드트랙을 제작하였다.
1969년에는 실황과 멤버 각자가 주도한 곡들은 모은 스튜디오 앨범으로 구성된 더블 LP [Ummagumma]가 발표되었으며, 이 앨범은 가장 실험성이 강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후 Michelangelo Antonioni로부터 영화 [Zabriskie Point]의 사운드트랙을 제안 받았으나 감독은 이 중 세 트랙만을 사용하였다.
3. 음악의 진보적 발전 (70~72)
1970년 4집 [Atom Heart Mother]를 발표하면서부터 그룹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전작들에서 보여주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의 결과가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으며 그 첫 작품인 대곡 'Atom Heart Mother'를 시작으로 이듬해 5집 [Meddle]의 'Echoes' 등 거대한 명곡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이전까지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이상한 음향효과들은 이제 4사람의 연주와 완전히 융화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사운드, 구성 등에서 놀랍게 발전해 나갔다. 가사의 소재를 점차 가까운 일상에서 찾게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이 시기의 공연에서는 360도 Surround Sound System과 같은 진보된 음향효과를 선보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Relics]라는 초기의 히트곡들을 담은 베스트 음반을 발표했으며, 1972년에는 6집 [Obscured by Clouds]의 발표와 함께 뮤직비디오 [Pompeii Live]가 촬영되었다.
4. 상업적으로도 성공 (73~76)
1973년 발표된 [Dark Side of the Moon]은 그 동안 진행되어온 음악적 진보가 맺은 또 하나의 결실이다. 전작들에서 들려주던 대곡들은 점차 발전하여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트 앨범을 만들게 되었으며, 초기에 우주, 초자연 등에서 찾던 소재를 일상으로 전환하였던 것도 여기선 심오한 함축성을 띤 광기와 무의식의 세계 '달'로 수렴된 것이다.
음반 판매에 있어서도 처음으로 미국 차트에서 1위를 하는 등 이들을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해준 성공작이 되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에 741주나 올라 이 부분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들의 상업적인 성공은 음악이 지나치게 대중화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소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호소력이 생긴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975년, 이들의 무의식 속에서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미쳐온 Syd Barrett을 그리워하는 [Wish You Were Here]를 발표하여 연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의 공연에서는 시각적인 효과를 더욱 앞세워 관중들로 하여금 청각과 시각을 종합적으로 감동시키는 무대를 펼쳤다고 한다.
5. 사회적인 주제로 발전 (77~83)
70년대 후반, 디스코 음악의 물결로 Rock음악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시기였다. 특히 Progressive Rock 계열 거물 그룹들의 활동이 부진해져 가고 있던 시기였지만 Pink Floyd는 오히려 그 동안의 노력이 집약된 대작 [The Wall]을 발표하는 등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이 시기로 갈수록 그룹에서 Roger Waters의 역할은 너무나 강해지고 있었다. 특히 가사에서도 이전에는 상징과 함축성이 강하던 가사들이 사회적인 주제로 변하거나 자신의 얘기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7년 발표된 9집 [Animals]에서는 인간사회를 동물로 비유하여 신랄한 풍자를 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9년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감, 공포 등을 하나의 줄거리로 표현한 대작 [The Wall]을 발매하게 되었으며 수록곡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등에 나타난 반사회성 때문에 많은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이때의 공연에서는 무대에 높이 9m, 폭 50m의 대형 벽을 축조하였다가 무너뜨리는 쇼를 펼치기도 하였다(이 실황은 2000년 초에 발매된다). 82년 Alan Parker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어 (Gerald Scarfe의 애니메이션, Bob Geldorf 주연)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83년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을 비난하면서 2차 대전에서 전사한 Roger Waters의 아버지에게 바친다는 [Final Cut]이 발표되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이미 그룹 내에서 너무 강해진 Roger Waters의 독선을 견디지 못해 Rick Wright는 81년 완전히 탈퇴한 상태였을 정도였다. 앨범 발표 후 곧 그룹은 해체되었으며 각자 솔로 활동에 몰두하였다.
6. Roger Waters와 나머지 멤버들의 대립 (86~ )
86년 David Glimour와 Nick Mason은 Roger Waters를 제외하고 Pink Floyd를 재결성하였다. Rick Wright는 여전히 비공식 멤버로 참여하긴 했지만 어쨌든 Roger를 제외한 나머지 셋만 뭉치게 된 것이다.
87년 [A Momentary Leapse of Reason]이 발표되면서 Roger 없는 Pink Floyd 당사자들의 경우는 그룹 이름의 사용문제로 법정까지 가게 되었으며, 음악적인 면에서도 팬들간에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Roger Waters의 주장은 Pink Floyd의 음악에는 Syd Barrett의 정신과 2차 대전 때 전사한 자신의 아버지의 영혼이 흘러야만 한다는 것이었으며, 나머지 멤버들의 주장은 그가 지나친 독선으로 그룹 활동 및 재결성에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재판은 결국 점차 Roger에게 불리하게 흘렀으나 법정 밖에서의 대립은 서로 자신이 원조임을 과시하는 화려한 쇼를 펼치게 되었다.
88년 Roger 없는 Pink Floyd는 화려한 조명과 대규모 연주인을 거느린 공연 실황을 담은 [Delicate Sound of Thunder]를 발표해 앨범과 비디오 모두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Roger Waters는 90년 여러 유명 가수들과 함께 한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공연에서 [The Wall]을 재현하였다(물론 이때도 무대에 대형 벽을 설치했다가 무너뜨렸다).
이 후 잠잠하던 Pink Floyd 측에서는 94년 [Division Bell]과 더욱 화려한 실황 [Pulse]를 크게 히트시켜 표면적인 인기에서는 Roger Waters를 앞지르게 되었지만, Roger의 팬들은 어딘가 알맹이가 빠졌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여전히 갖고 있게 되었다.
이들이 지금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대작들이 남긴 막대한 영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친 영향에 비해서 아류 밴드가 극히 드물다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함부로 모방될 수 없는 강한 개성과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향은 표면적인 기교보다는 내면에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와 의미 그리고 이미지의 성공적인 조합, Pink Floyd , 초창기 핑크 플로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약한 시드 배릿(Syd Barrett)의 작품이었던 이 곡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더불어 변태 성욕적인 가사 내용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 약물 중독 증세가 심해진 그의 자리를 메운 새로운 세컨드 기타리스트가 바로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re)였다. 베이시스트 로저 워터스(Roger Waters)가 주도한 1968년의 [A Saucerful Of Secrets] 역시 우주 지향적인 사운드 구성과 함께 크게 히트했다. 그 후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펼쳐 보인 것은 물론 뛰어난 무대 장치와 조명, 음향이 조화를 이룬 대규모 라이브 공연을 통해 각광받았고 알란 파슨스(Alan Parsons)와 작업한 1973년의 명반 [Dark Side Of The Moon]을 완성했다. 1979년에는 그들의 대표작으로 기록되는 더블 앨범 [The Wall]를 내 놓았고 1983년에는 동명의 영화 또한 제작되었다. 같은 해 로저 워터스의 탈퇴로 팀이 와해되었지만 1986년 데이비드와 드러머 닉 메이슨(Nick Mason)은 게스트 뮤지션들을 초빙해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으로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을 내 놓기도 했다.
14년간 차트에 있으면서 총 3515만장 판매.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순위 7위입니다.
영감 (Inspiration) -"Eye in the sky" written by Philip K. Dick.
Eye in the sky는 미국 출신의 SF소설가 Philp K. Dick (1928-1982)의 1957년작 "Eye in the sky"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이미 APP는 전작이었던 5집-The turn of a friendly card(1980) 의 앨범 타이틀을 이 작가의 63년작 Game-players of Titan으로 정하려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이 작가의 작품에 강한 집착을 보여왔었다.
Philp K. Dick은 우리나라에서 그리 유명한 SF소설가는 아니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상당한 인기 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Blade Runner(리들리 스콧감독)와 Total Recall (아놀드 슈왈츠네거 주연)같은 영화가 직,간접적으로 P.K. Dick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 다. APP가 영향을 받은 Eye in the sky란 작품은 인간의 지각과 세계관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를 담지하고 있으며 "누가 무엇이 진짜(real)인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단지 그것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거기에 있는 것일까?"와 같은 지각할 수 있는 현실(perceptive reality) 과 인간단절(human disconnectedness)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SF소설가인 Isacc Asimov의 소설, I Robot(1950)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2집 앨범이후 두 번째로 SF소설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I Robot이 "기계문명의 급속 한 발전으로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며 인류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반면 역설적으로 인간 들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로봇에 의해 정복당할지 모른다는 미래 사회의 경고"를 아주 잘 콘셉트화 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반면, 이 앨범 Eye in the sky는 그런면에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5집 -The turn of a friendly Card에서 살짝 맛본 대중적 인기의 달콤함 때문이었 을까, 제목만 빌어왔을 뿐, 주제의식을 야무지게 파고들지 못한점이 아쉽다.
그것은 Alan Parson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는 느꼈지요. "그저 스튜디오로 가서 앨범을 만들자, 그리고 무엇이 만들 어졌는지는 그때가서 결정하자."라구요. 그래서 "Eye In The Sky"앨범이 결론적으로 콘셉트 앨범 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앨범들과는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지요.) Alan Parson은 이렇게 만든 이유를 계속적인 컨셉트 앨범 발표로 현학적이라는 (잘난체 한다), 는 부정적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라는 데, 어쩐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린다
포스트 그런지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유망주로 화려하게 데뷔한 후바스탱크의 2집 앨범이다. P.O.D.와 The Crystal Method의 프로듀싱을 맡았던 '하워드 벤슨'의 참여로 보다 그루브감과 리듬감이 충만해지고 헤비해졌으며, 감성적인 락 발라드도 곳곳에서 흐름의 완급을 조절해주고 있다. 미국 포스트 락 씬에 많은 밴드들이 명멸을 반복하는 이 와중에, 무수한 얼터 밴드들 스스로 터득해야 함은 '주관적인 변화'와 '끊임없는 개척'이 아닐까 한다.
The Reason
I'm not a perfect person.
As many things I wish I didn't do
But I continue learning.
I never meant to do those things to you.
And so I have to say before I go,
That I just want you to know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원했던 많은 것들을 하지 못했던것 처럼 말야
하지만 난 계속 배워나가고 있어
결코 네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말인데, 가기 전에 이말은 꼭 해야겠어
그냥 네가 좀 알아줬으면 해
I've found a reason for me,
To change who I used to be
A reason to start over new,
And the reason is you
난 계속 이유를 찾아왔어
예전의 나를 바꾸어 줄 이유를..
새롭게 시작할 이유를 말야..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너야
I'm sorry that I hurt you,
It's somthing I must live with everyday
And all the pain I put you through,
I wish that I could take it all away
And be the one who catches all your tears,
That's why I need you to here
널 아프게 했다면 미안해.
나는 매일매일을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어
그 모든 고통들 때문에 너를 힘들게 했어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리고 이젠 너의 슬픔을 나눌수 있는 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런 이유로 나 니가 여기 있어줬으면 해
I've found a reason for me,
To change who I used to be
A reason to start over new,
And the reason is you,
And the reason is you,
And the reason is you,
And the reason is you
난 계속 이유를 찾아왔어
예전의 나를 바꾸어줄 이유를..
새롭게 시작할 이유를 말야..
그리고 그 이유는 너야!
그 이유는 너야!
그 이유는 너라구!
바로 너야!
I'm not a perfect person,
I never meant to do those things to you
And so I have to say before I go
That I just want you to know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결코 네게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나 가기 전에 이말은 꼭 해야겠어
그냥 네가 좀 알아줬으면 해
I've found a reason for me,
To change who I used to be
A reason to start over new,
And the reason is you
난 계속 이유를 찾고 있었어
예전의 나를 바꾸어 줄 이유를
새롭게 시작할 이유를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 이유는 너야.
I've found a reason
To show a side of me you didn't know
A reason for all that I do,
And the reason is you
난 계속 이유를 찾고 있어
니가 모르는 나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의 이유를 말이야
그리고 그 이유는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