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미술관련 일에 종사하였다. 미술과 관련하여 전혀 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보다 진지한 미술기획을 하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런 여러가지 실천중에 미술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을 공부하였다. 예를 들면 미술작품의 이해를 위한 현상학과 함께 도상해석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적이 있었다.
한동안 우리 정치사회에서 회자되고, 지금도 종종 거론되는 "코드정치"라는 것이 알고 보면 해석학의 일부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나 표시가 모두 기호학에 포함되고, 이러한 상징물 또는 상징적 표현이 어떻게 전달되냐하는 방법론 중의 하나가 미술일 것이다.
물론 미술만이 아니고 정치, 경제, 수학,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기호와 이미지 일 것이다.
미술에서도 어느 작가가 어떤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한 이해를 위해 공부한다. 그 중의 하나가 도상해석학 인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소통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한다. 소통의 상대들이 얼마나 많이 정보와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즉, 왔다 갔다 해야 이해의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굉장히 적극적인 소통방법 만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술작품을 생각하면 너무 일방적인 것이다. 미술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작가의 그림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일방소통인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람자를 수용자라고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일방적 소통구조임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극단적인 소통의 구조라고 해서 전혀 소통에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작가는 이미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치명적인 소통인 것 같고, 소극적인 소통구조인 것 같지만, 오히려 적극적이고 활발한 소통구조임에 틀림없다.
오히려 몇백년전에 그려진 세계적 명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수용자가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의 문제 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도상해석학의 문제는 해석만의 경우가 목표가 아니고, 수용자의 다양성에 따른 복잡다기한 해석의 가능성을 당연히 받아들이는데에 있는 것이다.
일주전에 이미지와 미디어를 통해서 소통의 정치를 표방한 전임대통령이 자살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의 소통력에 감복하고, 현재 정권의 사람들을 꽉 막힌 사람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주장한다. "소통의 정치"를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소통"이란 것이 그저 서로 마주 앉아서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주고 받아야 된다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주절주절 넋두리 같은 것이라도 사분사분 받아 주어야만 소통이 잘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늘 자기의 생각만을 잘 받아 주는 사람이 소통의 그릇이 크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겟다.
사실 자기들 자체는 소통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남에게만 소통을 해달라는 것은, 흔히 말해서 어린이가 칭얼거리는 정도의 생떼 이상이하도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자기의 배만 부르면 되고, 더러운 용변만 치워 주면 되는 유아적인 관점에서 유일한 소통구조는 울음뿐이 없을 뿐인 것이다.
이번에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본질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가공된 그의 이미지는, 그가 억지로 연출하지 않은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대중들에게는 가공되어 받아지고 있는 것이다.
가공의 가공, 변형의 변형을 통한 왜곡된 이미지를 가공의 가공, 변환의 변환을 통한 일방적 수용을 통해서 전달된 정보가 얼마나 무가치한 쓰레기였을 것이냐 하는 것은, 미루워 짐작해도 알 만하다.
최소한 이미지 정보만으로 본다면, 잘 못되도 한참 잘못된 소통구조를 통해 유통된 쓰레기 정보였음에 분명하다.
그러니 그의 지지자라고 해도, 한바탕 울고불고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허접하고 유치한 수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석굴암의 미소를 보고 마음의 평안과 우리들의 미소의 가치를 알 수 잇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소통인 것이다. 석굴암의 부처가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나라사람이 만든 종교의 가치라고 우습게 보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평민이 아닌 고귀한 승려들만의 가치라고 내팽겨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요즘 소위 자칭 진보세력들이 내세우는 노무현식 이미지 표현방식은 실패작이다.
최소한 미술과 같은 이미지 표현방식으로 치면 초등학교 수준의 유치한 작품이거나, TV드라마 정도의 별볼일 없는 것이다. 재미도 없고 감동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드라마 한편 봤다고 치부한다고 해도, 남는게 없는 일주일 이었다.
철종이라는 조선후기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흔히 강화도령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세도싸움의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자기 아들을 왕으로 올리고자 등극시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강화에서 아무 생각없이 편안하게 살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궁에 와서도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씨벌건 총각김치의 맛을 잊지를 못했습니다.
왕으로 재임중에 그리 한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기야 서른초반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데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물론 약간의 평민을 위한 빈민구제정책을 펴고자 했다고는 하지만, 열매를 맺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궁의 생활 관습을 조금 평민스럽게 바꾼 것이 업적이라면 업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그는 매일매일을 막걸리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인생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 드문 격동기를 눈 앞에 둔 중차대한 시기에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시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후일 강화도령을 둘러싸고 서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동정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그가 사실 우리나라 이씨 왕조 역사상 유일한 평민출신이기 때문에 생긴 애증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사를 덮어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부실한 허수아비 정권이 유지된 시절이기도 했을 겁니다.
조금 다른 비유이긴 하지만, 저는 고노무현 전대통령을 생각하면 강화도령 철종이 생각나곤 합니다.
따지고 보면 노 전대통령은 민주화 운동권으로 분류하긴 우스운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운동권과 함께 호흡한 구석도 있었지만, 일신영달을 위해 판사. 변호사의 길로 들었었고, 아파트 재개발 등기대리인으로 돈을 벌던 사람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본인에게 직접물었다면, 본인 역시 운동권으로 투신되던 동기 역시 별다른 준비없이 뛰어 들었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대원군이 철종을 발탁한 것 같이 운동권이 노무현을 내세운 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 역시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들은 이뤄질 수가 없었을 것니다. 왜냐하면, 본인 스스로 뭘 해야 좋을지에 대한 확고한 마일스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가 생활했던 대로- 스스로는 옳게 살았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말 그대로 느낌대로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실 뭘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자기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거죠. 본인은 정치와 언론, 보수단체의 탓을 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할 수 있을 만한 구체적 상황은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이유들이 보수와 진보간의 대립으로 포장되어 부각되었을 뿐이고, 어의 없게도 자신을 진보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얼마나 아쉬우면, 퇴임해서도 대통령으로서 못한 일을 붙들고 있고 싶어서,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을 까요. 사실 갑자기 대통령을 물러서고 보니, 자기의 부족한 부분이 안 보일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새로이 역사도 공부해야 하고, 정치사상도 공부해야 하고, 경제체제도 공부해야 하고, 사회구조도 알아야 했을 겁니다.
마치 우리가 운동권 초기에 의식화교육을 했던 추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결국 본인 스스로 허수아비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무함은 엄청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민과 동일하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퇴임 후에 알았다는 겁니다. 모든 조직의 리더는 권위주의를 숭상하기 때문에 권위적인 것이 아니고,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하기 때문에 권위적일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강뭐시기 라고 하는 농민출신의 국회위원이 반드시 농민정책을 세우는데 최선의 해답 이 아닌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노무현 전대통령을 궁지에 몬 사람들은 어의 없게도 386운동권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능력이 안되는 사람을 대리자로 선정하여, 끝임없이 자기의 요구를 강요하던 그 사람들이 바로 원인제공자 였을 겁니다.
그래서 아직도 노무현을 서민적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 나고 있는 겁니다. 애증어린 드라마 한편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모르겠지만, 국가의 정체를 가지고 하기에는 너무 큰 각본과 각색이었습니다.
힘들지만 그와 같은 낭만적이고 한가로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기 싫어도 미국과 일본과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주고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이 집에서 저녁 밥상머리에서 말하듯이 반미와 반일을 서슴없이 말하는 대통령은 안된다는 겁니다.
싸우기 싫고, 죽기 싫어도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막아서기도 해야 하는 겁니다. 때론 폭군처럼 보일 지라도 주먹을 불끈 쥐고 버릇없이 구는 북한에 대해서 준엄하게 꾸짖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말이 좋아 평화를 위한다지만, 평화체제 유지를 위한 구체적 준비 없는 통일정책은 지양해야 됩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일반 시민의 아무 생각없고 책임없는 통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정책에 옮기는 초보 대통령을 사랑하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낭만적으로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폐혜를 지역주의라고 생각하고, 탈 지역주의 한다며, 기업과 도시 전체를 뒤 흔들고, 거침없이 국가의 예산을 이리저리 흩뿌리면 안되는 겁니다.
지역주의라는 것이 우리나라 만의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본인 스스로 상당히 당황했을 겁니다. 역사적이고 정치.경제적이며, 유적학적이며, 사회적인 총체적 고찰을 통해서 큰 모양을 바꿔 나가는 지속적인 노력만이 사회통합을 이뤄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겁니다.
우리가 또 다른 허수아비 철종인 바보 노무현을 보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나는 일본 출장중에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소식을 접했다. 잘 하지 못하는 일본어 실력으로 요미우리석간을 통해서 접한 자살소식에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분명히 한국에서는 노무현추종세력들이 억울하다며 들이댈 것이고, 촛불시위에 곤혹을 치뤘던 여권은 전전긍긍할 것이고, 이러는 사이에 무엇이 원인이고 누구책임인지에 대해서 촛점이 흐려질 것이다.
위와 같은 예측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예상대로 차분했던 외국에서의 상황과는 달리, 격정의 코리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으로 일을 보기 위해 갔던 일주일전의 상황과 완전히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 국민자의 영결식이 있었다. 말 그대로 비이성적이고 전근대적인 왕조시대에나 볼 수 있는 장면이 하루종일 TV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우리가 그를 그토록 존경했는지도 궁금했고, 그의 행적을 모두 용서했는지도 의아했다. 죽음으로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야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부정한 처신까지 수습이 되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죽음으로 용서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덮고 갈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부정한 돈을 거래한 그의 부인과 아들 등 가족과 그 주변인물들이 떵떵거리고 행세하는 모습은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마지막 까지 한마디 사과없이 마무리해도 되는지, 그들의 양식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작년의 촛불시위와 이번 국민장을 보면서, 우리 사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비이성적인 사고구조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명백히 잘못된 사실에 근거함에도 국민이나 대중의 이름으로 덮어버리고 마는 무모함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고인의 추모야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차피 역사 속에 묻혀버린 고인의 평가에 대해서 그리 조급해할 이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떼거리로 나서서 해본들, 역사는 냉정하게 판단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몇백만명이 아니라 온국민 전부다가 노무현의 자살을 웅호하고 애도한다고 해도, 후일 역사는 분명히 객관적으로 파헤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하고 와~한다고 해서 덮어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본질은 우리나라 지배구조의 뿌리깊은 부패구조의 이중성이고, 386민주화운동세대의 덜성숙된 의식구조이며,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말만의 잔치로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해야할 역사적과제는 우리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해서 미뤄지거나 피해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야하는 방향이라면, 하루빨리 또 다시 한발짝 한 발짝 옮겨야 할 것이다.
또다시 다음주에 일본에 출장을 간다. 돌아오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믿음으로 일본출장길을 나서려 한다.
그 중에 압권은 진중권의 종횡무진이다. 이 사람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 치기어린 말들을 내 밷으는 것이야 다들 아는 이야기인데, 요즘 여기 저기 치받고 들받는 것을 보고 있다 보면 가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막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김지하를 향해 내 뱉은 최근의 언행은 그의 가볍고도 유치찬란한 수준을 마음껏 내밷고 있는 것 같다. 김지하가 예술과 문화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진중권이란 사람이 황석영의 행동에 대해 그리 말 할 수 있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기억에 대해서 비유를 하였다.
그랬더니 모든 문인은 물고기냐고 들이댄다. 조그마한 기억도 못하는 물고기쯤으로 비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 공방하는 것이 이 정도이니, 진중권에게 섣부리 대들었다간 날벼락을 받을 게 분명하다.
뭐, 사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야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김지하나 황석영 같은 대가들에게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진중권이란 사람은 서울대 미학과까지 나오고, 대학교 교수까지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이해력과 통찰력, 안목이 부족해서 어떻게 살아 나가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하기야 이런 퍼러디물이나 양산해내는 작자의 말에 농락당하고 흥분하는 하쟎은 사람들이 주요 소비처이기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계속적으로 이런 너저분한 말꼬리 물기에 집착하는 사람을 진보지식인인양 치켜 세우는 사회에 진저리가 난다.
진작에 김지하가 한 말이 어느 말인지야 문맥과 글귀를 보면 알 것이다. 김지하가 문인은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겠다고 했겠냐. 과거의 집착을 버리고 자유스러운 영혼으로 자유롭고 다양하게 이 세상 저 세상을 섭렵할 수 밖에 없는 문인의 세계를 애둘러 말했을 것이다. 물론 황석영의 변신을 웅호하고 싶은 동지애도 한 몫했겠고.
우리는 그런 김지하의 마음은 황석영을 웅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경직되어 있는 진보지식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에게도 의견을 제시하고픈 입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실 진중권을 진보지식인으로 분류하는 것 조차 우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진중권이는 본 인 스스로 너무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 같다.
마치 자기가 진보지식인을 대변하는 양, 마치 진보세력에서 변신한 황석영을 웅호하는 김지하에게 서운한 감정을 퍼붓는 졸렬함을 보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배반한 동지라 해도, 하기 힘든 미천한 동물을 비유하면서 까지 내팽겨 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의 졸렬함과 함께 잔인한 속성까지 보는 듯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이와 같은 막가파식 언행을 언제까지 내버려 둬야 할 지 답답하다. 누군가 준엄하게 꾸짖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워낙 더러운 성품의 소유자라 그런지 아무도 고양이 방울을 매려 하지 않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지나갔다. 80학번이 나로서는 늘 5.18이 죄스럽고 부담스러운 만큼, 그 역사의 시대에 버티고 살았다는 것이 자랑이기도 했던 시간들이다. 5.18이 일어난 이듬해부터 끊임없이 광주의 상처를 생각하면서, 5월만 오면 분노와 회한으로 보내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힘들이 역동화되어 바라던 민주화도 이뤄 냈다고 생각한다.
그 5.18을 맞아서, 대학 학보사의 기자인 나의 아들녀석이 취재차 다녀왔다고 한다.
이틀간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녀석과 아침상을 마주하면서, 넌지시 물었다. "광주 어떠냐?"
이번 만이 아니고 대학 3년간 이맘때면 늘 광주를 다녀왔던 녀석에게 보여진 광주의 모습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런 저런 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 나를 보기 좋게 물리치며, 묵묵부답 밥만 먹고 있는 아들녀석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전야제는 보고 왔어?"
아들녀석으로 부터 돌아온 말은 나보다 더 의젖했다. " 전야제 보러 간 것은 아니니까요! 광주의 요즘을 알고 싶어서 갔는데.."
더 이상 물어 받아 속시원한 답이 없을 것 같아서, 밥상머리에서 나 혼자 규정내린 5.18에 대해서 주절주절 읊는 것으로 아침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대단했고, 나 뿐만 아니라 동시대 모두의 젋은 가슴을 타오르게 했던 광주의 뜨거움은 어디갔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나는 특별히 어느 지역을 선호하진 않지만, 광주에 대한 빚 때문에 광주가 잘되기를 하는 마음은 늘 갖고 있는 편이다.
비록 공적인 일이었지만, 광주비엔날레의 위원장을 수행하면서 세계에 알릴 수 잇는 내용있는 광주문화행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인 광주비엔날레도 여러가지 구설수에 휘말려, 초기의 엄청난 문화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지역미술전람회 수준으로 떨어진 것을 보고 많은 실망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한참 비엔날레가 잘 나갈 때, 광주 지역미술인들이 광주만을 위한 행사를 해야한다고 고집피우던 일이 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광주만을 위한 미술행사에 집착한 것이 10년도 안되어 잊혀져 가는 비엔날레로 되버린 것이, 오늘날 우리 사람들의 뇌리에 5.18이 잊혀져 가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유야 어떻든 광주 5.18은 어는 순간 부터 우리에게는 잊어 버리고 싶은 부담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또는 광주만의 아픔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 같은 분위기 이다.
이에는 광주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뜨거운 민주화의 열망이 어느덧 퇴색하여, 아들녀석에게 똑바로 말한마디 할 것 없이 만들어 버린 지금 우리의 행색이 남루할 뿐이다. 역사적 조망을 둘째치고서라도, 광주를 지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빛나는 순간으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을 지내왔던 우리의 몫이기도 한 것이다.
민주화로 떨쳐 버렸을 것 같던 광주의 부담이 또다시 무게를 더해 어깨를 짖누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