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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5/29
 

[스크랩] 17세기 남양에서 맞붙은 왜구와 영국해적

2008.04.16 18:09 | 역사 | 윤munmu

http://kr.blog.yahoo.com/yunmunmu/5899 주소복사

원본 원본 : -울프 독-

 

17세기 남양에서

     맞붙은 왜구와 영국 해적


얼마 전에 카리비안 뭐 어쩌고 하는 제목의 해적 영화가 상영 되었었다.

이런 서양식 해적과 동양의 대표 해적인 일본 왜구는 동종 업계이지만

그 이미지들이 잘 겹쳐서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해상에서 격돌하여서 일본 왜구가 참패를 당한 일이

조선의 선조(宣祖) 때인 17세기 초에 실제로 있었다.


내막을 알아보자.

민족의 주력 산업중 하나가 강도질이라면 독자들은 놀라실 것이다.

그런 강도 민족들이 있었다.

서양의 북쪽 바이킹 족이 하나고 동쪽으로 오면 왜(倭)라고 불리던

족속들이 그들이다.

왜의 강도들, 해상 강도들은 역사에서 왜구(倭寇)라고 경멸스러운

명칭으로 불리던 불순한 산업 종사자들이었다.


노략질하는 왜구들

 

한민족(韓民族)이 해상 강도 집단의 바로 이웃에 잘못 위치한 덕분에
최대로 피해를 입은 민족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왜구에 관한 글이 우리 광개토 대왕(好太王)비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출현했을까?

이들 왜구는 그들이 전란의 시기였던 고려 말에 극심했었고
조선조까지도
끊이지를 않았었다.


왜구들이 한반도에 내습하면 싹쓸이식 도둑질을 했다.

모든 곡식이나 의류는 물론 농기구나 소 돼지 닭같은 가축까지도
사그리
배에 싣고 떠나서 왜구들이 한번 습격한 마을은 완전히
해일이 쓸고 간
페허가 되었다.


불교가 융성했던 일본에서 온 왜구들인지라 부처님의 독실한
제자들인
기특한 왜구들도 있었다.


왜구들은 부처님 모신 절은 즐겨 털었다.

그리고 불상이건 종이건 그리고 탱화건 몽땅 털어서 일본에 가져 가

자신들의 절에 봉납했다.


일본 승려들은 이런 장물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받아서 자기 절의

장식에 썼다.

졸지에 도둑들에게 보쌈당해 새로운 모심을 받으신 부처님의 기분이

어떠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왜구들이 싹쓸이 강도질의 한 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조선이 들어서고 대마도 토벌을 해서 조금 나아졌지만 왜구들은

지방 군벌로 변신하여 임진란 때 침략군의 앞장을 선다.


히데요시 부대의 선봉에 섰다가 남해안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골병이

들게 두들겨 맞았다.

등당 고호니 구귀 가륭이니 하는 너절한 잡패들이 왜구 가문
소속들이다.


왜구들은 물론 한반도만 아니라 더 넒은 중국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희한한 일은 피해국 중국에서 중국인들이 조직한 짝퉁 해적들이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짝퉁 해적들은 나중에 너무나 그 숫자가 많이 늘어나 명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먼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중국 짝퉁들은 자기 나라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자주 나타났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오리지날과 짝퉁의 양 해적들 사이에서 죽도록

고생해야 했다.


그러나 이상했던 것이, 이 정도로 왜구들에게 시달렸으면 삼면이
바다이고
해운 활동도 그런대로 해왔던 우리 한민족에서도 짝퉁
왜구가 나와서
중국이나 일본 등을 돌아다니며 돈벌이를 조금은
해먹었을 법했는데 ----그런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과 강도질에 그저 당하기만

했지, 따라서 하는 범죄적 배짱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한반도 안에만 죽자 붙어서 이놈들에게 당하고  저놈들에게

당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일본 왜구들은 중국의 짝퉁들과 업무 제휴를 했다.

왜구들은 중국 짝퉁들과 무역도 했고 정보도 교환했던 것 같다.


서양인이 그린 중국 정크-- 아래 일본 안택선과 선체가 비슷한
점이 보인다.

그러면서 왜구들은 동북아에서 주변 나들이만 하던 활동 반경을
넓혀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들 왜구들은 남쪽을 들락거리며 진귀한 남방 물건을 가져다 일본에서

정신이 아득한 폭리를 붙여 팔았다.

상품들은 무역으로 손에 넣기도 했지만 도둑질을 대부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반도 해안가 부락에서 싹쓰리 빈민형 강도 짓을 하던 왜구들은
세월이 변하면서 스타일이 기업형의 반도반상(半盜半商)의 해적으로 변한 것이다.


왜구가 앞장섰다고 믿어지지만 일본인들의 남방 경영은 일찌감치
발동을
걸었다. 

제일 큰 수확으로 사스마 번이 물산 풍부한 유구국을 집어 먹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부도나 모도니 팔장도니 유황도니 하는 태평양의 섬들을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들의 영토로 삼은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유럽인들이 이 해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 유일하게 출입하며 무역을 하게 허락 받은

네델란드와 이 일본의 범죄 조직과 교류가 있었던 것 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나가사키에 해변에 조그만 섬을 만들어 놓고

네델란드인들을 이 섬 밖으로의 출입을 금해서 일반 일본인들과의
접촉을
금해버렸다.

그런데도 이 금지된 장소가 있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 위에서
일본 배와의 접촉을 금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 접촉이 있었던듯하다.


왜구들뿐만이 아니라 보통 일본 상선들까지도 네델란드제 범포와 나침반과 망원경을 썼다는 사실은 유의해보자.


네델란드인들도 칼쌈 잘하는 일본인들의 전투력을 눈여겨 두었다.

그 무렵 향료가 나는 몰루카 제도를 두고 스페인, 포루투갈, 영국, 네델란드는 박 터지는 결투를 벌이고 말았다.


해외에 비교적 늦게 진출해서 짭짤한 식민지가 없었던 네델란드는

이 현금 덩어리로 보이는 몰루카 제도 점령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었다.


네델란드는 국력을 기우려 막강한 군사력을 이 지역에 투입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도 사생결단하고 덤벼드는 네델란드에 결국

손을 들고 물러났다.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 전체를 확보하고 설립된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식민지 경영을 하였다.


이 식민지 획득 전쟁에서 전투력에 목말라 하던 네델란드는
이들 일본인들 무뢰한들을 100여명이나 고용했다.

일본인들은 전투는 물론 포로로 잡은 영국인들이나 현지인 포로들이
참수형에 처해 졌을때 목을 치는 망난이 역할도 했다.


일본인들은 왜구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활발히 남방으로 진출하여
마닐라는 물론 태국 방콕항도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무역도 했다.

태국에는 이렇게  내왕하던 사람이 많다보니 일본인 촌까지도
생겼었다.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나갔다.

왜구들은 부지런히 오키나와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기한 물건들을

강도질했다. 


그러나 지구 저편에서 유럽인 상선들이 향료를 찾아서 이 남방까지

진출하자 파리 같은 존재들이 끼어들었다.

해골 깃발을 휘날리는 유럽 해적들이 나타 난 것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들은 돈이 되는 차(茶)나 도자기 또는 향료를 실은

무역선이었다.


‘나다니엘의 육두구’라는 책에 한 기묘한 전투가 소개되어 있다.


유럽 해적 무리에 이상한 배경의 인간이 한 명 끼어든다.

에드워드 미셀본이라는 경(卿)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영국 귀족이다.


이 사람은 줄을 놓아 영국 황제로부터 동남 시아 지역의 무역

허가까지도 확보한 사람인데 막상 인도네시아 쪽에 가보니까
별로 일이
잘 안 풀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해적으로 변신해서 일대 해역을 돌아다니며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강도질을  해댔다.


그가 해적질에 써먹은 배는 별로 크지도 않은 250톤짜리 범선이었고

정찰이나 심부름 등을 하는 작은 종선(從船)을 하나 달고 다녔다.

해적선의 이름은 타이거 호였다.



영국 해적왕 키드가 타던 해적선의 모형

타이거호가 해적질을 신장개업 했지만 성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말레이(Malay)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타이거호의

에드워드는 멀리서 넓은 돛을 두어 개 단 중국풍의 정크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


조선 판옥선에 대비되는 일본 안택선 -- 대형함이었으므로 먼 항해를
해야하는 왜구선은 이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가졌었을 것 같다.

때는 1605년이었다
선장 에드워드는 즉시 종선을 보내 정찰을 했다.

그 커다란 정크에서 80여명의 앞머리를 홀딱 밀어 버린 키 작은
인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영국선이 다가가서 검문을 하자 이들 키 작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본사람이라고 몸짓으로 대답했다.


배의 용도가 뭣이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대답을 흐렸다.

그러나 생긴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검문하는 영국인 해적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종선이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힘들게 털어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인건비만 낭비 할뿐이었다.

그는 그러나 사업이 신통치 않던 판이라 별 수가 없었다.

그는 기회를 보다가 이 배를 약탈하기로 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퇴시킨 드레이크의 겔리온 선 '골드 하인드'호
윗 사진의 해적왕 키드의 해적선과 다층의 덱크와 높은 고물과 이물의
특징이 보인다. 복제한 것이다.


일단 습격하기로 결심했지만  에드워드는 배를 그 쪽 배에 붙이고

한 번 더 정찰대를 보내서 그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정밀 조사를

하기로 했다.

일본인들은 다시 찾아온 영국인들에게 예의 친절함으로
정중하게 대했다.

그들은 시종 겸손한 태도로 배안을 다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값비싼 물건까지도 숨기지 않고 다 보여 주었다.


감동스럽게 친절을 다한 이들은 배를 다 조사하고 떠나는
영국인들에게
다시 정중하게 자기들도 영국 배를 방문해서
구경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즉 답례 방문을 해도 되냐는 의전상의 부탁을 한 것이다.


너무도 친절한 응대에 완전히 속은 영국인들은 거절한 명분이 없었다.

그들은 그러라고 허락을 하고 말았다.

선장 에드워드는 상대 배에 타고 있는 인간들이 뭔지 전혀 모르고

피의 격투를 스스로 부르는 실수를 한 것이다.


먼저 머리를 면도질하고 훈도시만 입은 윗몸에 긴 옷을 입은
이 인간들이 전부 칼을 차고 있는 사실을 그냥 넘겨버렸다.

일본에서는 오로지 무사들만 칼을 차도록 허가가 되어 있었다.

배를 모는 뱃사람들을 칼을 찰 수가 없었던 것인데 이들은
전원 칼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이 들이 범죄자 집단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더해서 영국인들은 칼을 찬 일본인들이 전부 새 짚신을 신고 가는
새끼로
두어 곳을 위 아래로 동여 맨 것이 무었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칼싸움에 대비해서 미끄러운 갑판 위에서 안 미끄러지도록 준비를 단단히 한 것이다.

그 시대의 보통 일본인이 보았더라도 이들이 영국인을 도륙 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금방 한 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더해서 에드워드는 동남 아시아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원체 흉포해서

평판이 안 좋았으며 몇몇 항구에서는 이들이 기항하면  

허리에 찬칼을 출항 때까지 압수해두기도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타이거 호가 상대하고 있는 이 일본 배는 해적선이었다.

이 왜구들은 일본을 출항하여 중국 해안을 따라 약탈을 해오며

동남아 일대로 진입해왔다.

캄보디아도 약탈했고 보르네오 연안에서 여섯 척이나 되는

배를 습격해서 약탈을 하였다.


이제 집을 나온 지 오래되었고 창고도 다 찼으므로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중에 이 괜찮아 보이는 부자나라의 배를 발견하고 마지막

한탕을 노리는 중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에드워드는 예의와 겸손으로 위장한 이 흉악한

도둑들이 칼을 차고 타이거 호에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자기들을 환대했듯 배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했고
배의 타륜을 움직여 보게도 했고 선원들과 럼주도
한잔씩 마시게 했다.


그러나 일본 배에서 영국 배로 넘어오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에드워드나 다른 선원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동양과 서양의 해적들이 이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갑자기 칼을 빼든 일본 해적 두목이 곁의 영국인을 후려치는 것을 신호로 일본 해적들은 미친개처럼 주변의 영국인들을 마구 베기 시작했다.


선상은 삽시간에 도살장처럼 변해버렸다.


일본인들은 기합을 지르며 되는대로 베고 찔렀다.

순식간에 갑판은 영국인 시체들이 쌓여갔다.

앞 간판의 영국인들을 대충 처리한 일본인들은 무기실로 난입했다.


무기실에서는 일등 항해사 데이비스가 필사적으로
총에 장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남 아시아를 여러 번 항해했었기 때문에 영국 제일의 항해사로 명성이 높았으며 에드워드가 이번 항해를 위해서 특별 초빙한
인물이었다.


해도와 나침반이 정확하지 않았을 당시 인도네시아의 복잡한 해로를

잘 아는 능력 있는 항해사의 역할은 무척 컸다.


이 보물 같은 항해사를 일본인들이 알아볼 리가 없다.

그는 열 번 가까운 난도질을 당하고 간신히 갑판으로 올라왔지만

다량의 출혈로 죽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일본인들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귀신같은 꼴로
다른 목표를 찾아 선교로 몰려왔다.

영국인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배의 탈취는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위기 상황을 돌파 한 것은 선장 에드워드 미셀본이었다.

그는 성한 선원들을 불러 모아 창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매섭게 반격에 나섰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칼을 잘 쓴다 해도 칼은 창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 사실은 일본 역사 제일의 검사(劍士)라고 불리는 미야모도 무사시

(宮本 武藏)가 그의 저서 오륜서에서도 서술된 것이다.

우리 전쟁 사극에서 병졸들이 서로 어울려서 병정놀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것은 실전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전장에서 활과 창이 주역이고 칼은 현대 군대의 권총과 같이 제한적인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더구나 좁은 배안에서 집단으로 창을 내지르는 집단에게는 칼질을

잘한다 해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창 부대는 날뛰는 서 너 명의 일본인을 죽였다.

창을 휘 두르는 영국인 부대가 수적(數的)으로 일본인들을 압도하고

일본인들에게도 기습의 효과가 다 없어지자 전투의 주도권은

영국인 쪽으로 돌아왔다.


일본인들은 기합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배로 돌아가고자

돌진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선실로 다시 내몰렸다.


에드워드는 선실로 일본인들을 다 몰아 넣은 뒤 바다를 향해있던

대포 두문을 이 선실로 돌려 수백발의 산탄을 장탄하고 주저 없이

발사했다.

굉음과 함께 배의 나무 벽에 수 없는 구멍이 나고 연기와 함께 여러 명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다가 곧 조용해졌다.


화약연기와 먼지가 살아진 뒤 선실로 들어가 보니 두 발의

산탄 포격에 스물 두 명이 전부 몰살당하고 한명의 부상자만이

살아남아 신음하고 있었다.

선실은 갈가리 찢어진 시체 토막과 핏자국으로 지옥도를 상상케 했다.

단 두발의 산탄 사격이 만든 전과치고 끔찍했다.

일본인 생존자는 살기가 등등하게 오른 영국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타이거 호에 올라와서 공격을 했던 일본인들이 전멸을 해버리자

에드워드는 복수에 들어갔다.

그는 모든 포를 일본 배에 돌리고 지근거리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정크선의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갑판에 꿇어 앉아 살려주기를
애걸했지만
에드워드는 다시 속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다.

계속된 산탄 포격에 일본 정크의 일본인들은 모두 죽고 배는
거의
완파 수준이 되었다.

일본인 한 명이 포격을 피해서 바다에 뛰어들어 타이거까지 헤엄쳐

건너와서 항복을 했다. 


에드워드는 그를 심문했다.

“왜 공격 했는가?”

“이 배를 빼앗고 선원들을 모두 목을 베어 죽일 계획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그가 비록 항복했지만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자기의 운명을 깨달은 일본인이 목을 베어 고통 없이 죽여주기를

바랐지만 에드워드는 그를 돛대에 목을 매달아 교수형에 처했다.

해적이 해적을 교수형에 처하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 된 것이다.

교수형은 영국에서 해적들을 사형집행 할 때 쓰는 방법이다.


처형 과정에서 목을 맨 줄이 끊어져 그는 바다에 떨어졌다.

아마도 목이 부러져 죽었을 것이다.

배 주인들이 다 죽어버린 일본 해적선도 약탈하고 불을 질러서

격침시켰다.


이 사건이 있던 해는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던

국토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여념이 없던 때였었다.

그런 시대 한반도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머나먼 바다까지
와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는 한 수 위인 영국 해적에게 이렇게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동남아시아까지 내려가서 활동을 하던 왜구들이나
다른 일본인들이 이 동남아시아 진출로 유럽의 여러 문명이나 문화의 정보에 접 할 수 있었던 사실을 주목하자.


더 해서 일본은 세계를 향해  바늘구멍처럼 뚫어놓은 나가사키에서
여러
정보를 오랫동안 접할 수가 있었다.


일본이 대담하게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연 개혁인 명치유신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유럽의 선진 문물에 대한 수 백 년의 정보가 축적된 정보가
판단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조선 대원군의 수구 정치를 비난하지만 이런 유럽 정보의 축적이

극히 미약했었던 조선에게는 일본 같은 대 개방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신으로 건설한 강대한 일본 해군은 자기들 선조 해적들이

드나들던 남방에 대한 유전적인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남진 정책을

추구 하다가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세계는 이미 피정복 민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해적근성이나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시대는 끝이 났던 것이다.

  





[스크랩] 4천년전 '귀족'이 사용하던 금 목걸이 발견

2008.04.04 18:17 | 역사 | 윤munmu

http://kr.blog.yahoo.com/yunmunmu/5758 주소복사


뉴스 :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금세공품인 4천년 된 목걸이 발견'미국 애리조나 대학 인류학 교수인 마크 알덴데퍼가 이끄는 발굴팀이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 주변 지스카이루모코의 유적지에서 4천년 된 금 목걸이를 발굴했다고 3월 ..

드디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태조의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되는 나하추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가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런 것치고는 좀 싸움이 싱겁다.

二月, 趙小生誘引元瀋陽行省丞相納哈出, 入寇三撒、忽面之地。 都指揮使鄭暉, 累戰敗績, 請遣太祖, 乃以太祖爲東北面兵馬使遣之。

2월, 조소생(趙小生)이 원(元)나라 심양 행성 승상(潘陽行省丞相) 나하추(納哈出)를 유인(誘引)하여, 삼살(三撒)·홀면(忽面)의 땅에 쳐들어오니, 도지휘사(都指揮使) 정휘(鄭暉)가 여러 번 싸웠으나 크게 패전하여 태조를 보내기를 청하므로, 이에 태조로써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보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B면
【영인본】 1책 4면


여기서부터 의도적인 오류가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하추를 원나라 심양행성승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고려사절요를 보면 또 내용이 약간 다르다.

二月,趙小生,誘引納哈出,入寇三撒忽面之地,東北面都指揮使,累戰敗績,遣我 太祖,時,元亂,納哈出,據有瀋陽之地,稱行省丞相。
2월에 조소생(趙小生)이 나하추(納哈出)를 꾀여서 삼살(三撒 함남 북청(北靑))ㆍ홀면(忽面 함남 홍원(洪源)) 지방을 침범하였는데, 동북면 도지휘사가 여러 번 싸웠으나 패하니, 우리 태조(太祖)를 보냈다. 이때 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나하추가 심양(瀋陽) 땅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일컬었다.

한 마디로 말이 원심양행성승상이지 원조정으로부터 직접 제수받은 것이 아니라 원조정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임의로 심양을 점령하고 행성승상의 관작을 참칭했다는 것이다. 하긴 원래 동아시아적인 질서에서 반란을 일으켜 특정 지역을 점령해 근거로 삼게 되었어도 바로 왕을 칭하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는 먼저 기존의 관작을 스스로 칭함으로써 기존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그런 반란세력을 실제 벼슬을 주어 회유하거나, 회유에 응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것으로 대응했었고. 나하추의 경우도 그런 예라 할 수 있겠다.

원래 나하추는 원나라 공신의 자손으로 요동 일대에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던 토호였다. 이성계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결국 이자춘이 그러했듯 그 또한 요동에서의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반란을 일으켜 심양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때 고려인 조소생의 꾀임에 넘어가 - 이괄의 난이 진입된 뒤 그 잔당들이 청으로 넘어가 조선의 내정을 낱낱이 고해바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보면 되겠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고려로서는 사실 나하추의 그러한 공격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실제로도 고려군은 그를 막지 못하고 이성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 고려의 특히 이성계의 근거지랄 수 있는 함경도 일대를 공격해 옴으로써 이성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七月, 納哈出領兵數萬, 與趙小生、卓都卿等屯于洪原之??洞, 遣哈剌萬戶那延帖木兒, 同僉伯顔甫下指揮, 率一千餘兵爲先鋒。 太祖遇於德山洞院平, 擊走之, 踰咸關、車踰二嶺幾殲, 委棄鎧仗, 不可勝數。
7월, 나하추(納哈出)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소생(趙小生)·탁도경(卓都卿) 등과 함께 홍원(洪原)의 달단동(??洞)에 둔치고, 합라 만호(哈剌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를 보내어 여러 백안보하 지휘(伯顔甫下指揮)와 함께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는데, 태조는 덕산동원(德山洞院)##의 들에서 만나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고, 함관령(咸關嶺)·차유령(車踰嶺) 두 재[嶺]를 넘어 거의 다 죽였으나, 군기(軍器)를 버린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초전은 나하추의 선봉을 격파하면서부터였다.

是日, 太祖退屯答相谷, 納哈出怒, 移屯德山洞, 太祖乘夜襲擊敗之。 納哈出還??洞, 太祖屯舍音洞。 太祖遣斥候至車踰嶺, 賊登山樵蘇甚衆。 候卒還白, 太祖曰: “兵法當先攻弱。” 遂令擒斬殆盡, 自以精騎六百繼之, 踰嶺至嶺下, 賊乃覺欲逆戰。 太祖率十餘騎衝賊, 射?其裨將一人。 初太祖至, 問諸將累敗狀, 諸將曰: “每戰?, 賊將一人, 鐵甲飾以朱?尾, 揮?突進, 衆披靡無敢敵者。” 太祖物色其人, 獨當之, 佯北走, 其人果奮前注?甚急。 太祖飜身着馬?, 賊將失中, 隨?而倒。 太祖卽據鞍射, 又?之。 於是賊狼狽奔北, 太祖追擊至賊屯, 日暮乃還。 納哈出之妻謂納哈出曰: “公周行天下久, 復有如此將軍乎? 宜避而速歸。” 納哈出不從。
이 날에 태조는 답상곡(答相谷)에 물러와서 둔치니, 나하추가 노하여 덕산동(德山洞)으로 옮겨서 둔쳤다. 태조는 밤을 이용하여 습격하여 이를 패퇴(敗退)시키니, 나하추가 달단동(??洞)으로 돌아가므로, 태조는 사음동(舍音洞)에 둔쳤다.

태조가 척후(斥候)를 보내어 차유령(車踰嶺)에 이르니, 적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지라, 척후병(斥候兵)이 돌아와서 아뢰니, 태조는 말하기를,
 
“병법(兵法)에는 마땅히 먼저 약한 적을 공격해야 된다.”
 
하면서, 드디어 적을 사로잡고 목 베어 거의 다 없었대. 스스로 날랜 기병(騎兵) 6백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가서 차유령(車踰嶺)을 넘어 영(嶺) 아래에 이르니, 적이 그제야 깨닫고 맞아 싸우려고 하였다. 태조는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과 맞붙어 그 비장(裨將) 한 사람을 쏘아 죽였다.

처음에 태조가 이곳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에게 여러 번 싸워서 패배(敗北)한 형상을 물으니, 여러 장수들은 말하기를,
 
“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에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쇠갑옷[鐵甲]에 붉은 기꼬리[朱?尾]로써 장식하고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니, 여러 사람이 무서워 쓰러져서 감히 당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태조는 그 사람을 물색(物色)하여 혼자 이를 당적하기로 하고,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니, 그 사람이 과연 앞으로 뛰어와서 창을 겨누어 대기를 심히 급하게 하는지라, 태조는 몸을 뒤쳐 말다래에 붙으니, 적의 장수가 헛찌르[失中]고 창을 따라 거꾸러지는지라, 태조는 즉시 안장에 걸터앉아 쏘아서 또 이를 죽이니, 이에 적이 낭패(狼狽)하여 도망하였다.

태조는 이를 추격하여 적의 둔친 곳에 이르렀으나, 해가 저물어서 그만 돌아왔다. 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래 되었지만, 다시 이와 같은 장군이 있습디까? 마땅히 피하여 속히 돌아오시오.”
 
하였으나, 나하추는 따르지 않았다.

그냥 소설 읽듯 읽으면 되겠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다 하더라도 정말 대단한 활약인데, 사실 싸움 자체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작은 싸움에 불과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먼저 덕산동에 진을 친 나하추를 야습하여 달단동으로 쫓아보내고, 달단동에 주둔하면서 차유령에서 나무를 하던 적병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는 정도다. 그래도 역시 역시 뭇 장수들이 달려들었어도 매번 패해 쫓겨 오던 붉은 깃꼬리를 단 쇠갑옷의 장수를 제압하는 장면은 흥미진진하다. 싸우다 말고 거짓퇴각을 하고, 그 뒤를 적장이 쫓다가 창으로 찌르자 말의 옆구리로 붙어 피하고는 활로 쏘아 죽인다. 삼국지에서도 이런 멋드러진 장면은 거의 없다. 아무튼 대단하다 하겠는데...


後數日, 太祖踰咸關嶺, 直至??洞。 納哈出亦置陣相當, 率十餘騎出陣前, 太祖亦率十餘騎, 出陣前相對。 納哈出?曰: “我之初來, 本追沙劉、關先生、潘誠等來耳, 非爲侵犯貴境也。 今吾累敗, 喪卒萬餘, 亡裨將數人, 勢甚窮蹙。 乞罷戰, 惟命是從。” 時賊兵勢甚盛, 太祖知其詐, 欲令降之。 有一將立納哈出之傍, 太祖射之, 應弦而倒。 又射納哈出之馬而斃, 改乘, 又斃之。 於是大戰良久, 互有勝負。 太祖迫逐納哈出, 納哈出急曰: “李萬戶也, 兩將何必相迫!” 乃回騎, 太祖又射其馬斃之。 有麾下士下馬, 以(授)〔援〕納哈出, 遂得免。 日且暮, 太祖麾軍以退, 自爲殿。 嶺路盤紆數層, 宦者李波羅實在最下層急呼曰: “令公救人! 令公救人!” 太祖在上層視之, 有二銀甲賊將逐波羅實, 注?垂及。 太祖回馬射二將, 皆斃之, 卽連斃二十餘人。 於是更回兵擊走之, 有一賊逐太祖, 擧?欲刺, 太祖忽側身若墜, 仰射其腋, 卽還騎。 又一賊進當太祖而射之, 太祖卽於馬上起立, 矢出?下。 太祖乃躍馬射之, 中其膝。 又於川中, 遇一賊將, 其人甲胄, 護項面甲, 又別作?甲, 以便開口, 周護甚固, 無隙可射。 太祖故射其馬, 馬作氣奮躍, 賊出力引?, 口乃開, 太祖射中其口。 旣斃三人, 於是賊大奔, 太祖以鐵騎蹂之, 賊自相蹈藉, 殺獲甚多。
그 후 며칠 만에 태조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洞)에 이르니, 나하추도 또 진을 치고 서로 대하여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므로, 태조 또한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가서 서로 대하였다. 나하추가 속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귀국(貴國)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비장(裨將) 몇 사람을 죽였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窮地)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적의 병세(兵勢)가 매우 강성하므로, 태조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그들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하였다.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태조가 이를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서 죽이니 바꾸어 타므로, 또 쏘아서 죽였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勝負)가 있었다. 태조가 나하추를 몰아 쫓으니, 나하추가 급히 말하기를,
 
“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이에 말을 돌리니,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나하추의 휘하(麾下) 군사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드디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해가 또한 저물었으므로, 태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데, 자신이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막았다. 영(嶺)의 길이 몇 층으로 꼬불꼬불한데,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맨 아랫층에 있다가 급히 부르기를,
 
“영공(令公),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영공,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하매, 태조가 윗층에서 이를 보니, 은갑옷[銀甲]을 입은 두 적장(賊將)이 파라실을 쫓아 창을 겨누어 거의 미치게 되었는지라 태조는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죽이고, 즉시 20여 인을 연달아 죽이고는, 이에 다시 군사를 돌려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한 적병이 태조를 쫓아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므로, 태조는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돌려 떨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그 겨드랑을 쳐다보고 쏘고는 즉시 다시 말을 탔다. 또 한 적병이 앞으로 나와서 태조를 보고 쏘므로, 태조는 즉시 말 위에서 일어나 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는지라, 태조는 이에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적병을 쏘아 그 무릎을 맞혔다.

또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甲]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는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이미 세 사람을 죽이니 이에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태조는 용감한 기병[鐵騎]으로써 이를 짓밟으니, 적병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았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앞서는 활극이라면 이번은 지략의 싸움이다. 지략의 싸움이라기에는 우스운 것이, 나하추가 거짓항복을 하려 하자 이성계가 유인해서는 활로써 그 측근이며 나하추를 쏘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전투. 이미 이성계의 화살에 몇 번이나 말이 죽어 나자빠진 터라, 기세에서 밀린 나하추는 패배하여 쫓겨가니, 이제는 아주 사정까지 하고 있다. 그래도 대꾸 한 번 않고 말을 쏘아버린다는 게... 하지만 진짜 활약은 그 다음부터다. 거의 삼국지에서의 조자룡급의 활약, 아니 여포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일단 적장 둘을 활로 쏘아 죽이고, 그리고 다시 적병 20여 명을 연달아 죽여 적을 쫓아버리더니, 이번에는 적의 공격을 말위에서 몸을 아래로 젖히며 피하고는 활로 쏘아 사살, 또 다른 적병이 화살을 쏘니까 그건 일어나서 피하고는 화살을 쏘아 무릎을 맞히고, 아예 턱까지 보호하는 갑주를 걸친 적장에 대해서는 말을 쏘아 날뛰게 하고는 입을 쏘아 맞추고 있다. 그야말로 일기당천, 원맨쇼인 셈인데... 믿거나 말거나이므로 역시 그냥 소설 읽듯 읽으면 되겠다. 이성계의 기록은 이래서 재미있다. 정말 흥미진진하거든. 삼국지니 수호전이니 다 저리가라다.

還屯定州, 留數日休士卒。 先設伏要衝, 乃分三軍, 左軍由城串, 右軍由都連浦, 自將中軍, 當松豆等。 與納哈出, 遇於咸興平, 太祖單騎?勇, 突進試賊。 賊驍將三人, 竝馳直前, 太祖佯北走, 引其?策其馬, 爲促馬狀, 三將爭追逼之。 太祖忽又出, 三將馬怒未及控, 直出於前, 太祖從後射之, 皆應弦而倒。 轉戰引至要衝, 左右伏俱發, 合擊大破之。 納哈出知不可敵, 收散卒遁去。 獲銀牌銅印等物以獻, 其餘所獲之物, 不可勝數。 於是東北鄙悉平。
돌아와서 정주(定州)에 둔치고 수일(數日) 동안 머물면서 사졸을 휴식시켰다. 먼저 요충지(要衝地)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이에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은 성곶(城串)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右軍)은 도련포(都連浦)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송두(松豆) 등에 나아가서 나하추와 함흥(咸興) 들판에서 만났다.

태조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내어 돌진(突進)하면서 적을 시험해 보니,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 곧바로 전진하는지라, 태조는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면서 그 고삐를 당겨 그 말을 채찍직하여 말을 재촉하는 형상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뒤쫓아 가까이 왔다. 태조가 갑자기 또 나가니, 세 장수의 말이 노(怒)하여, 미처 고삐를 당기기 전에 바로 앞으로 나오는지라, 태조는 뒤에서 그들을 쏘니, 모두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유인하여 요충지(要衝地)에 이르러, 좌우(左右)의 복병이 함께 일어나서 합력해 쳐서 이를 크게 부수니, 나하추는 당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해 갔다.
 
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얻어서 왕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 얻은 물건들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었다. 이에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드디어 결전이다. 몇 차례의 싸움 끝에 함흥에서 본격적으로 함흥평야에서 나하추의 주력과 이성계가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역시 이 운명을 건 싸움에서도 이성계의 무용을 빛을 발한다. 마치 소설처럼 필마단기로 나하추의 진으로 돌진하더니, 나하추의 장수 셋이 달려나오자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 하다가 활로 쏘아 모두 쓰러뜨리고 있다. 그리고는 달려드는 적을 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섬멸하니, 그야말로 지용겸전, 전술에 있어서도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라 하겠다.
 
後納哈出遣人通好, 獻馬于王, 且遺??一、良馬一匹于太祖, 以致禮意, 蓋心服之也。 納哈出之妹, 在軍中見太祖神武, 心悅之, 亦曰: “斯人也, 天下無雙。” 桓祖嘗入朝元朝, 道經納哈出, 稱道太祖之才, 至是納哈出敗歸曰: “李【桓祖諱。】嚮日言我有才子, 果不誣矣。”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화호(和好)를 통하여 왕에게 말[馬]을 바치고, 또 비고(?鼓)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주어 예의(禮意)를 차렸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복종[心服]한 때문이었다. 나하추의 누이[妹]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태조의 뛰어난 무용[神武]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
 
하였다.

환조(桓祖)가 일찍이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도중에 나하추에게 지나가면서 태조의 재주를 칭찬하여 말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하추가 패전하여 돌아가서 말하기를,
 
“이자춘(李子春)이 지난날에 ‘내가 재주 있는 아들이 있노라.’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였다.

결국 이 싸움의 결과로 나하추는 이성계의 실력을 인정하고 고려와 화친하게 된다. 고려를 두려워했다기보다는 이성계의 실력을 인정한 셈인데, 사실 이후로도 기새인첩목아를 공격하던 와중에 한 번 충돌할 기회가 있었었다. 그러나 그때도 이성계는 탁월한 전술적 식견으로 나하추의 공격의도를 무산시키고 있다.

翌日, 師次城西十里。 是夜, 有赤氣射營, 熾如火, 日官曰: “異氣臨營, 移屯大吉。” 遂班師野宿, 令士卒各作??、馬廐。 納哈出?後行二日曰: “作?與廐, 師行整齊, 不可襲也。” 乃還。
이튿날 군대가 성 서쪽 10리(里)에 유숙했는데, 이날 밤에 붉은 기운[赤氣]이 군영(軍營)을 내리쏘는데 성하기가 불길과 같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내리쏘니 옮겨서 둔치면 크게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돌려 들에서 유숙하고, 사졸(士卒)들로 하여금 각기 변소(便所)와 마구(馬廐)를 만들도록 하였다. 나하추가 뒤를 쫓아 온 지 2일 만에 말하기를,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었으니 군대의 행진이 정제(整齊)할 것이므로 습격할 수 없다.”
 
고 하면서 그만 돌아갔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1장 A면
【영인본】 1책 6면


당시 기새인첩목아가 머물고 있던 요동성은 나하추의 근거지인 요동에 있었다. 다시 말해 기새인첩목아나 이성계나 나하추 입장에서는 자신의 근거지를 침범한 침입자에 불과했는데, 이성계를 공격할 틈을 노리던 나하추는 행군중에도 엄정한 군기를 보이는 이성계의 군대 앞에 공격할 생각을 포기하고 만다. 말 그대로 싸우지 않고도 나하추를 굴복시킨 것이다. 이후로 나하추는 이성계를 무척 존경하게 되었다는데,

納哈出,遣使來,獻土物,仍求官,且以黃金八兩,求婦人腰帶,授納哈出三重大匡,司徒,賜細布二匹,婦人金帶一腰,還其金。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는 관직을 요구하였으며, 또 황금 8냥으로써 부인의 허리띠를 구하였다. 나하추에게 삼중대광 사도(三重大匡司徒)의 관직을 주고 올이 가는 베 2필과 부인의 금띠 하나를 하사하고, 황금은 돌려보내었다.

【고려사절요 29권】공민왕4 경술 19년


여러차례 고려 조정에 말이며 공물을 보내 호의를 보이다 마침내 고려조정에 벼슬을 청하고 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외교질서대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청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고려조정이 내린 벼슬이 삼중대광사도, 고려조정에서도 정 1품에 달하는 높은 관직이다. 당시 고려 조정이 나하추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후로도 나하추는 여러 차례 고려 조정에 말을 바쳐 온다.

至大明洪武九年丙辰冬, 辛禑遣開城尹黃淑卿往聘, 納哈出曰: “我本非與高麗戰, 伯顔帖木兒王, 遣年少李將軍擊我, 幾不免。 李將軍無恙乎? 年少而用兵如神, 眞天才也。 將任大事於爾國矣。”
명(明)나라 홍무(洪武) 9년(1376) 병진 겨울에 이르러 신우(辛禑)가 개성 윤(開城尹) 황숙경(黃淑卿)을 보내어 가서 교빙(交聘)하니, 나하추가 말하였다.
 
“내가 본디 고려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이 나이 젊은 이 장군(李將軍)을 보내어 나를 쳐서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소. 이 장군께서 평안하신가? 나이 젊으면서도 용병(用兵)함이 신(神)과 같으니 참으로 천재(天才)이오! 장차 그대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B면
【영인본】 1책 4면

그러나 역시 나하추와 고려 조정의 의리란 딱 그런 정도라, 어차피 나하추가 고려 조정에 충성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왕에 관작을 받고 줄을 서자면 조금이라도 크고 강한 쪽이 좋은 터라 나하추는 새로이 일어나는 강대국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의 작위를 받고 있다. 나중에 운남원정에 참가했다가 병사하고 마는데, 위 기사는 나하추가 아직 명 조정에 남아 있던 때의 이야기다. 여기서 백안첨목아는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으로, 함경도에서 이성계와 맞서 싸우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 이성계가 끝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될 것을 알았다면 나하추의 입장도 약간은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는데... 사람 일이라는 게 워낙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법이라.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나하추에 대해 무려 23건의 기사가 검색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이성계의 대표적인 치적으로서 다루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성계로서는 처음으로 직접 군을 이끌고 대규모의 적과 맞선 싸움이라 그 의미가 남다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알겠지만 정작 싸움의 의미로 보자면 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조소생의 꾀임에 넘어가 국경을 침범해 온 나하추와 싸워 국경 밖으로 내쫓았다는 정도이니. 그래도 일단 고려의 국경을 지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더불어 이성계의 믿기지 않는 무용도. 아마 삼국지의 여포나 조자룡이라 해도, 아니 항우라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문득 누군가 용자가 있어 이것을 드라마로 제대로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군중을 누비며 절묘한 기마술로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신기에 이른 활솜씨로 적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는 그 모습들을 드라마로 재현해 낼 수 있으면 무척 재미있을 텐데... 하긴, 그랬다가는 판타지가 되려나? 하지만 이미 역사드라마의 탈을 쓴 판타지 드라마들은 얼마든지 있잖아? 어차피 내가 돈 내서 만들 것도 아니니 그저 망상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역시 욕심일까?


오늘은 여기까지. 그래도 오늘은 시간을 단축했다. 역시 기사 단 두 개 가지고 늘려쓰느라 그런 것일까? 나하추와의 싸움 자체에 대해서는 고려자설요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거의 같다. 따라서 둘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어 제끼기로 했다. 요즘은 고려사절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한데... 고려사도 보고는 싶지만 아무래도 회원제이다 보니 조금 그렇다. 참고로 고려사절요는 한국고전번역원(http://www.minchu.or.kr)여기에 있다. 한 번씩들 들어가서 읽어보시라.

[스크랩] 외계 생명체가 지구 생명 탄생의 기원?

2008.02.16 01:26 | 역사 | 윤munmu

http://kr.blog.yahoo.com/yunmunmu/5283 주소복사


뉴스 :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해 지구에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단세포 생물에서 비롯됐다.하지만 지구 생명체들의 모태인 이 최초의 원시 생명체가 과연 유기물과 무기물이 뒤섞인 바다에서 ‘저절로..

[스크랩] 동양의 마타하리, 카와시마 요시코

2008.02.16 00:30 | 역사 | 윤munmu

http://kr.blog.yahoo.com/yunmunmu/5282 주소복사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라고 하면 흔히 1차 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마타하리를 떠올리게 된다. 프랑스의 고위 정보를 자신의 매력으로 빼돌려 독일 정보부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희대의 악며, 배신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사실 그녀가 어떤 정보를 빼돌렸으며, 그로 인해 프랑스가 어떤 위험에 빠졌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미모의 여성, 그리고 댄서라는 면에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서양에 마타하리가 있었다면 동양권에는 남장의 미인이며 스파이였던 카와시마 요시코라는 여성이 있다. 청조의 왕녀로 태어났은 일본군 스파이로 활동한 그녀. 그녀의 일생을 잠깐 들여다보자.

우선 당시의 사정을 잠깐 설명하자면,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조는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그 후 차기 정부를 담당하게 된 것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이었다.

1928년 무렵 중국 내부의 세력 관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는데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그리고 장작림 세력이었다. 이들은 각기 장개석은 구미열강 쪽, 모택동은 소련 장작림은 일본에 연줄을 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이 장작림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것은 굳건한 만주, 화북 지역에서의 영향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작림은 반일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결국 장개석과의 싸움에서 지고 장개석을 피해 만주로 피난오게 되는데 일본군 쪽에서는 장개석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 만주로 오는 장작림을 열차채로 폭사시켜버렸다.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은 그들(일본 관동군)은 1931년 만주철도를 스스로 폭파시키고 이를 중국군이 한 것으로 몰아붙여 공격을 개시, 5개월도 지나지 않아 흑룡강, 길림, 요녕 지역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운다. 바로 만주 괴로 정부의 수립이었다. 만주국의 초대 황제가 바로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일본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공격에 대해 세계 여론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곧 조사단이 파견되었고 만주철도 폭파사건은 자작극이었음이 드러나 세계의 비난을 받게된다. 일본군은 이러한 비난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는데 이 때 마침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인 승려가 중국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로 중국과 일본은 강하게 충돌, 이 과정에서 중국은 크나큰 피해를 입고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길게 설명을 하게 된 것에는 위에 열거된 사건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가 카와시마 요시코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카와시마 요시코는 청조 황족 중 하나인 숙친왕의 딸로, 1906년 출생한다. 숙친왕은 북경에 거대한 궁전을 가지고 있는 명문 세도가로 시중드는 하인만 200명에 그가 가진 영토는 한반도에 필적할만한 크기였다. 하지만 청조가 망하며 그의 권세도 급격하게 줄어드는데 이를 지키기 위해 당시 동아시아의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일본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일본의 창구 역할을 하던 카와시마 나니와의 친분을 쌓은 이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딸 14번째 왕녀 금벽휘를 카와시마 나니와의 양녀로 삼게 한다. 금벽휘는 그렇게 하여 일본이름 카와시마 요시코를 얻게 되었다. 물론 일본군으로서도 중국의 진출을 원활히 하려면 숙친왕과 같은 거대 세력가와 결탁하여야 했고 흔쾌히 받아들이게 된다.


금벽휘, 아니 카와시마 요시코는 그로인해 일본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웠다. 칠흑같은 머릿결과 백옥같은 피부 하지만 의지를 담은 두 눈에는 황족으로서의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또한 수업 중에 중국에 대한 욕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뛰쳐나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하지만 그녀에게 중국이란 청조왕조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일본에서의 생활 역시 매우 윤택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그녀는 거의 공주님과 같은 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니와가 지원하던 만주와 몽고 독립이 원활하지 않아 자금 회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대저택은 회수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나니와의 고향 신슈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이때 당시부터 그녀는 상당히 남성적인 취미를 즐기기 시작했다. 말을 좋아해 공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말을 타고 학교를 가는 등 상당히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동경하는 여학생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뤼순에 있던 그녀의 친아버지 숙친왕이 사망하게 되고, 이 때문에 장기간 휴학하여 중국에 다녀온 이후 그녀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장기간 휴학에 대하여 학교 측에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나니와의 통제 아래 독자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


17세가 되었을 당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큰 심경의 변화를 겪으며 권총자살 미수에서 돌연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여성을 버리고 남성으로 살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양부였던 나니와는 그녀에게 '관계'를 요구했고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의미로 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튼 그 이후로 나니와는 그녀에게 어떤 애정적 접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친아버지 숙친왕의 재산 관리 등을 위해 나니와의 비서 역할을 겸하며 중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더욱더 간섭받지 않는 상황에서 더더욱 남성적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그녀는 어린시절 친구였던 몽고 왕족과 결혼하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해 결혼생활은 3년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관동군의 육군소좌 타나카 타카시를 만나면서부터이다. 정보국 소속이었던 그와의 교제가 시작되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관동군의 첩보원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권총의 사용법, 기밀서류 입수방법, 암호, 변장방법을 비롯한 갖가지 스파이 기술을 섭렵한 그녀는 만주어, 일본어, 영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하는 등 정보부로서는 매우 활용도 높은 인재였다. 또한 그녀가 청조왕조의 왕녀라는 점 역시 큰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에게 임무가 떨어졌는데, 그 임무가 바로 상해사변을 일으키는 것이였다. 군부로부터 전해진 1만엔의 자금으로 중국인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여 상기에 소개한 상해사변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단신으로 적의 포대에 잠입, 전력을 정탐하여 알려주는 등 상당한 임무수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청조왕녀로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때로는 기밀서류 탈취 등과 같은 스파이 활동을 하는 등 현대판 여성 제임스본드와 같았다고 말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이 계속 될 수록 생활이 바탕해지고 군부로서는 제어하지 못할 정도의 돌발행동을 하는 등 점점 관동군의 미움을 사기 시작하며 그녀를 처분하자는 의견까지 오가게 된다. 결국은 이를 총수였던 사사가와 료이치에게 고하고, 료이치는 요시코를 불러 대강의 전말을 이야기한 후 그녀를 근신처분하게 이른다.

그 이후로 그녀는 활약(?)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중국 국민정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일본의 손발이 되어 동포를 배반한 그녀는 지리한 재판 과정 속에서도 재판관들을 휘두르는 등 부러지지 않는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긴 재판 과정 속에서도 그녀를 스스로를 구명하기 위해 친분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었으나 결국 사형판결이 내려지게 된다.

1948년 3월 26일, 그녀가 사형집행 되던 당시의 그녀의 모습은 기나긴 옥중 생활과 오랜 시달림으로 인해 아름다웠던 옛모습을 찾기가 힘들었다. 백발이 되어 버린 머리칼과 텅빈 눈동자는 그녀의 최후를 말해주는듯 했다. 총살로 생을 마감한, 남장을 즐겨하던 미인, 청조의 왕녀로 태어나 일본인의 이름을 갖고 동포의 배신자라 불렸던 그녀. 파란만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그보다 더욱더 파란만장한 시간을 살다간 그녀의 이름은 금벽휘라고 해야할까 카와시마 요시코라고 해야할까.


reference
http://ja.wikipedia.org/wiki/%E5%B7%9D%E5%B3%B6%E8%8A%B3%E5%AD%90
http://members.jcom.home.ne.jp/fw190/works/works_13_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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