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어제는 역사, 내일은 비밀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 말한다. -Cocacola의 한 CEO가-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미소 (yokylee2607)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707)
미소 갤러리
세상에 이런 일이 새 글이 있습니다.
화폐, 우표 이야기
자연의 아름다움
건강백서
손님방
지구촌 문화와 역사 새 글이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역사
人物 探究
평화와 통일을... .
환경 이야기
연예가 소식
코디노하우
아름다운 패션
다이어트
요리조리 쿡쿡
좋은 글과 시
생활의 지혜
미소의 하루
기본폴더 새 글이 있습니다.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오늘 전체
방문자 21 46039
구독자 0 12
댓글 0 315
참조글 0 3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jbyie
- 박새
- 백만돌
- 마리짱
- 휴대폰1초요금제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최근 댓글 전체보기
너무나 신비롭습니다. ..
멋진 페인팅 감사하게 ..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편안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
68,669
최근 글
2차대전 여군들의 모습..
10월 가을~~계룡산 ..
가을 하늘~~
대전 엑스포 다리 야경..
한가위 보름달... &..
지난 글
2009년 1월
2009년 2월
2009년 3월
2009년 4월
2009년 5월
2009년 6월
2009년 7월
2009년 8월
2009년 9월
2009년 10월
2009년 11월
개설일 : 2008/03/31
 

[스크랩] 일제시대까지 잔존하였던 곤장제도 곤장제도

2009.11.05 16:41 | 사진으로 보는 역사 | 미소

http://kr.blog.yahoo.com/yokylee2607/1430 주소복사

일제시대까지 존재하였던 곤장제도

 조선시대 형벌제도는 크게 태형, 장형, 도형, 유형,사형의 다섯가지로 분류된다. 이것은 중국의 수,당 제도때 만들어진 오형제도를 기본바탕으로 한것으로 태형과 장형집행시 가해지는 형벌기구를 일반적으로 곤장이라 부른다.
 그밖에 사형은 목숨을 끊는다는 의미에서는 현재와 같지만, 그 방법은 신체 각 부위를 잘라내거나 찌르는등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였다.
 유형은 주로 고급관리들이나 세도가들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직접적인 고통은 덜하지만 자손에까지 출사길이 극도로 제한되는등 결코 가벼운 형벌이라 할 수 없다. 그 밖에 도형은 현재의 징역형과 비슷한 형벌로, 관아에 예속되어 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벌을 말한다.


  태형은 기본적으로 장형보다 무거운 형벌이며 연령도 10대부터 50대까지로 제한되었으며, 60대이후 부터 100대까지는 5등급으로 나누어 형벌을 가하였다. 다만 사대부양반의 경우 반역에 연루되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대당 얼마의 속전을 내면 대부분 형벌이 면제되었디.

김윤보 (金允輔: 19세기 말-20세기 초반)


태형과 장형
'행정도첩 (刑政圖帖)' 중에서


태형을 가할때는 길이 1.1m 지름 1mm정도의 회초리가 사용된다.
이 경워 남성의 경우는 아랫도리를 벗기고 볼기를 쳤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홑옷을 입힌채로 볼기를 첬는데, 물을 끼얹고 치는 물볼기도 있었다


 
 이런 태형의 고통은 매우 심각하여, 형집행도중 기절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형집행이 끝난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려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곤장형은 장형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장형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치사율이 높은 형벌이다.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들어지며 볼기와 넓적다리에 나누어 치게 되는데, 일반범죄자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군법을 집행하거나 현재로 말하면 특별범죄 가증처벌자등에게 가해지는 형벌이다.
 또한 관찰사 이상의 직급을 갖거나, 왕명을 받들어 도적때등을 긴급체포에 나서는 토포사등이 집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고을 수령이 이런 형벌을 가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직권남용이다. 매수 역시 한 번에 30대 이상 치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다.

 목봉(木俸)으로 만들어 죄인의 볼기와 허벅다리를 치는데 사용하며, 곤장은 곤과 장으로 나누어진다. 곤은 범죄의 종류에 따라 치도곤(治盜棍)·중곤(重棍)·대곤(大棍)·중곤(中棍)·소곤(小棍)의 5종류로 가려서 형을 가하며, 치도곤은 특별죄에 해당한다.

*치도곤->행용소곤->행용중곤->행용대곤->중곤
죄목에 따라 더욱 길고 두꺼운 곤을 쓰게 되는데,그 중에서 치도곤이 가장 치명적이어서 원칙적으로는 중대범죄에게만 쓰도록 제한하고 있다.

*1자: 약 30cm

   
   1839년 기해박해때 경기도 과천등지에서 천주교 신앙활동을 하던 최경환에게도 다음과 같이 잔혹한 태장형이 적용되었다.
 과천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물론 당시 조선사회로 볼때 최경환은 매우 특별한 중대범죄자였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라도, 고을 수령들에 의해  태장형이 임의적으로 적용되면서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곤장에 쓰이는 나무도 부드러운 버드나무가 아닌 딱딱한 박달나무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10대만 맞어도 살이 터져 나가며, 30대 정도만 맞아도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기절하거나 그 후유증으로 엉치뼈가 주저 앉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일반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치도곤으로 인해, '치도곤을 안긴다, 치도곤을 쳐야 정신을 차린다'등의 속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시대까지 잔존하였던 곤장제도

 조선의 형벌제도는, 같은시대 동서양 형벌제도에 비해 결코 과격하거나 무분별하지는 않았다. 가령 영국의 마녀재판제도의 경우를 보더라도 20세기 들어와서야 없어졌다. 즉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근대적인 형법이 적용되었는데, 곤장제도역시 1896년 고종 33년 제정된 형률명례(刑律名例)와 1905년 고종 42년 제정된 《형법대전(刑法大全)》에서 장형을 폐지되었다.

 이 태형과 장형은 조선시대를 지나 1910년 일제시대까지 존재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옛 관습을 존중한다는 이유를 들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으로 하여금 3개월이하의 징역이나 태형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물론 이 잔옥한 형벌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집중적으로 집행되었다. 또 태형에 쓰이는 회초리도 소가죽등에 납덩어리를 넣고 사용하는 등, 각가지 잔혹한 형태의 고문도구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조선태형령을 제정하여, 아예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형법을 적용하도록 공식화 하였다.하지만 1919년 일어난 3.1운동의 결과로 마침내 이 오래된 악법은 철폐되기에 이른다. 


약간 어지럽긴 하지만 입체로 보이게 하는 기묘한 사진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무렵에 사진작가 노부쿠니 에마니가 근대 사진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진으로 여겨집니다. 특이하게도 스테레오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이 많아서 이렇듯 스테레오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연속으로 보여주면 입체감이 남게 됩니다.

두 개의 눈이 하나의 장면을 보고 입체감을 느끼듯 렌즈 두개로 한번에 촬영하면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온 100년전 입체 카메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기술은 움직이는 3D 영상을 만들어낼 때 편광 필터를 이용, 서로 다른 두개의 영상이 각기 눈에 비추도록 하여 3D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다시피 사실 그 때 당시의 일본과 우리 나라는 큰 차이가 없는듯 보이긴 합니다.

























일렁일렁 정신없군요.


reference
http://www.pinktentacle.com/


 

[스크랩] 옛 장터, 옛 풍물 딸기 2009-07-21 17:52:31 댓글 3개 추천 1308 반대 4 .

2009.07.29 16:41 | 사진으로 보는 역사 | 미소

http://kr.blog.yahoo.com/yokylee2607/1192 주소복사

옛 장터, 옛 풍물

.dotted_img{margin-left:5px;padding-left:5px;background:url(http://img.yahoo.co.kr/n2o/2008/beauty/k_ulzzang_view.gif) -121px -79px no-repeat;}댓글 3개 추천 1308 반대 4


옛 서대문 사진

10여일 전에 야후에 구한말 풍속을 찍은 후릭커즈 사진들이
많이 올라왔었다.

나는 여기서 진귀한 보물같은 사진을 발견했다.

눈꼽만큼의 옛 건물 자취는 남기지 않고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그 이름 하나만큼은 풍성하게 남겼던 옛 서대문의 사진이
그중에 있었던 것이다.

도성 한양에 개설된 네개의 대문중에서 제일 컸다고
하니 대단히 웅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사신들을 의식해서 그렇게 크게 짓지 않았나 하는 
 추리도 해본다.독립문 자리에 있었던 영은문도 있었으니
 만큼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서대문은 1915년 일제가 마포로 가는 전차 선로를 까는데
방해가 된다고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진은 극소수만 전해온다.
내 평생 본 서대문 사진은 두서너장 밖에 안된듯하다.


전차가 통과하는 유일한 서대문 사진이다.
일제가 이 전차 철로를 복선으로 확장하면서 서대문을 없앴다.
------------------------------------------------
이번에 후릭커즈에 올라온 사진은 그 질이 아주 깨끗했다.

다음은 후릭커즈에 올라온 사진이다.
현판이 안보인다.현판은 대문 밖에만 거는 것이다.
사진은  성안에서 찍은 것이다.

행군하고 있는 병사들은 구한국군이다.
발에 의식용 흰 각반을 하였다.
이화여고 쪽에서[남대문에 병영이 있었다.]
나와서 궁궐로 임무 교대를 하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깨에 담요를 맨 것을 보니 야간근무를 하고
다음날 교대하는 팀으로 보인다. 


후릭커스의 서대문 사진. 성밖의 산을 보면 현재의 도로
진행 방향보다 약간 북쪽을 보고 서있던듯하다.
신식군대를 바라보는 성의 수문장이하 구식 군인들의
표정이 어쩐지 안 좋아 보인다.앞에 가는 두 사람은
양반계급이 아니라 중인계급 직업인들이다.
-----------------------------------------




동대문- 흥인문
--------------------------
귀한 사진을 본김에 서대문의 역사적 배경을 들여다보자

서대문은 이성계가 천도했을 때 건설한 한양의
여러 대문과 같이 건설되었다.

남대문 -숭례문
---------------

그러나 풍수지리설때문에 1413년 폐쇄하고 사직 터널위에
서전문을 건설해서 썼으나 너무 가파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여론이 드세서 1422년 이 문을 헐고 폐쇄한 돈의문을
수리해서 다시 쓰게 되었다.

한북문 - 홍지문, 다른 북문인 숙정문과 자주 혼동된다.
숙정문이 북대문이었으나 풍수지리설때문에
폐쇄하고 쓰지 않았다.
숙종때 홍지문을 건설해서 북대문으로 사용하였다.
---------------------------------------

그 뒤 문루가 파괴되어 볼품없는 상태로 오래
지내오다가 숙종 1711년 크게 개축하였다.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달리 서대문은 문루가 단층이다.

세간에서 통상 서대문이라 불렀지만 돈의문이 정식 명칭이다.

[한양 구 서울처럼 유교의 교리에 충실하게 지어진 도시는
 중국에서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유교의 다섯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한양의
 심벌들인 4대문
의 명명에 이용되었다.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한북문), 사대문에
 덕목들을 다 쓰고 마지막 남은 신(信)은 대문이
아니라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에 붙여서 균형을 맞추었다.]

숙종때 새로 짓다시피했던 서대문은 한양거주 백성들은
새문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도 불렀다.

서대문의 다른 명칭인 '새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며
그 명칭을  '서대문'이라는 명칭과 함께 남겼다.

오늘날 신문로라는 거리 이름은 새문을 한자로 쓴것이다.

새문안이라는 대문 안쪽 명칭도 남겼다.
새문안 교회라는 역사깊은 신문로의 교회가 새문을 이어
받은 이름이다.

서대문이 있던 자리- 성균관 의대 부속병원의 길 건너편에서
본 모습.
길건너 왼쪽은 기상대로 가는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오른쪽은
경향신문 건물 앞.
---------------------------------------------------------

많은 분들이 서대문이 지금의 서대문 네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계실듯하다.그러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대문은
비스듬한 오르막 길의 위에 건축되었다.현재 서대문 네거리는
그런 지형이 아니다.

서대문은 지금 그 이름을 물려준 서대문구가 아니라 종로구
인 신문로 중간의 오르막 고개 마루에 있었다.

지금 구 문화방송 빌딩인 경향 신문사 바로 앞 신문로의
대로 중간에 있었다.문 양쪽은 동서쪽으로 가는 내리막길이다.

서대문이 있던 추정자리에서 비스듬히 본 경향신문 건물
- 구 문화 방송-
--------------------------------------------


이곳은 북쪽에서 인왕산을 타고 내려오던 성벽이 지나가던
곳이었고 여기 서대문을 지난 성벽은 다시 서소문으로
이어졌다. 


서대문 네거리- 일반인이 생각하는바와 달리 서대문은
이곳에 없었다.
-----------------------------------------------


서대문 자리에서 본 길건너 기상대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옛날 성벽 안쪽에 났었던 길이 발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에서 이화여고로 향하는 길은 북쪽의 성벽길보다는
좀더 성안으로 들어와서 형성되어있다.

이것은 평지인 도성안이라 성벽을 따라 일찌감치 민가들이
들어섰었고 그 앞으로 도로가 있었기 때문인듯하다.   
 






 

1955년 서울 여의도 비행장이다.

오늘날 여의도는  고층빌딩과 국회등이 자리잡고 있지만 1955년도엔  군용 비행장외엔 아무것도 없던 곳이다.

현재 KBS앞의 대로가 과거의 비행장 활주로였다.  그곳에서 1980년대에만 해도  국군의 날 행사와 시가행진의 출발점이

바로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 터였다. 


1955년 여의도 비행장 사진을 감상해 보자.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다음사진은 한강형태와 활주로로 봐선  현재의 서강대교 북단쪽에서 촬영한 듯 하다.  활주로 왼쪽 부대터가 오늘날  국회와 KBS등이 자리잡은 자리로 추정된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여의도 비행장은 당시 K-16비행장으로 불리웠다.   이륙을 준비중인  C-124 수송기.  예전에 여의도 전시장에 전시되었던 기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여의도 비행장에서의 이승만 대통령, 당시 여의도 비행장은 서울 공항으로 불리웠고 서울의 관문이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1955년  맥스웰 테일러 대장의 한국방문때의 여의도 비행장 모습이다.  뒤의 비행기는 C-121 콘스텔레이션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House Boy Lee at K-16 (Youido Island) Seoul, Korea 1955
사진설명 원문이다.  하우스 보이 "리"  모자의 모표가 高 인걸로 봐선  고등학생인가 보다.  글자그대로 하우스보이다.
당시 워낙 먹고살기 힘든때인지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당시엔 고아가 하우스 보이를 하기도 했는데  아마  이 사진의 주인공도 전쟁기간동안 고아로서 하우스보이였다가
1955년엔 고교생인이 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을 해 본다. 

오늘날 개념에선 "알바"라고 해야 하기도 뭐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관련 일을 하는 건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유명한 원로 가수, 예를 든다면  패티 킴, 조영남, 신중철, 현미,등 많은 이들이  미8군 클럽 무대 출신 가수들이다. 당시로선 최고의 수입원이 미군부대였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여의도 비행장에서 본   북한산과 삼각산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1955년만해도 아무것도 없는 여의도 비행장이다.

최근 군용비행장 소음문제로  주민들이 소송을 재기하는데  내가 볼땐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허허벌판에 일제시대부터 있던 비행장이었고  그후  비행장 근처에  민간인들이 슬금슬금 들어와 산 것인데

이제와서  시끄럽다고 소음피해 소송이라는 것이 참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더욱 가관인 것은  비행장을 이전하란다. 시끄럽다고.....  아니 누가 먼저 있었는데.... -헐.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돌 빼 낸다는..... 9

[ 1 | 2 | 3 ]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