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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조선은 구미 제국 중에 최초로 미국과 수호 조약을 체결 한 후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탈피하고 신생 자주 독립국가로 세계 사회에 일원이 되어 국호를 대 조선국(大朝鮮國) 이라 선포하였다
미국과 상호 수도에 전권 공사를 상주 시킨다는 협약에 따라 미국은 서울 정동에 상주 공사관을 세웠으나 조선은 청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문제였지만 워싱턴에 상주 공사관을 운영할 재정적 능력이 없어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절단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워싱턴에 간 보빙사는 한국 전통의 의식으로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였는데 서양인의 눈에는 색다른 모습으로 비춰지었다
이 사절단을 보빙 사절단이라고 하는데 단장은 당시 조정 안에 실세였던 민영익이 되었고 그를 따라 간 수행원들 중에 첫번째 미국 유학생이 태어 난 것이다
 미국으로 떠날 때 일본에 들려 기념 사진을 찍었다 뒤에 좌측 부터 현홍택 ,궁강 항차랑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앞줄 좌측 부터 퍼시발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개화파로 지칭되는 이들은 이렇게 함께 미국길을 떠났으나 급진 개화를 원하는 젊은 층과 후에 청나라로 기운 단장 민영익과 정치 색갈이 서로 달라 일년 뒤 갑신 정변이라는 서로 목숨을 앗아가는 참극을 벌이게 된다 뒷줄 왼쪽 네번째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
유학길을 떠날 때는 조선의 국민으로 떠나 왔으나 국호는 대한 제국으로 바뀌었고 대한 제국의 국민으로 떠난 유학생들의 귀국길에는 돌아 올 내나라가 없어 진 것이다
유학생 일부는 없어진 나라에 돌아 와 일본인들의 통치 속에 적당히 어울려 살았지만 대다수의 신 문물을 접하고 배운 유학생들은 조국을 잃은 무지한 한국인 미국 이주 노동자들을 깨우쳐주고 이끌며 함께 조국을 찾기 위한 험하고 긴 여정의 애국의 길을 걸었다
유길준(1856-1914)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1856-1914) 1882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유길준은 민영익을 수행하여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여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훗날 유럽을 방문하고 서유 견문이라는 책을 썼다
 보스턴 대학
변수
 변수의 묘비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행으로 미국으로 간 변수(1861-1891)는 갑신 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91년에 매릴랜드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졸업자가 되었지만 안타갑게 졸업 4개월 후 1891년 교통(열차)사고로 숨졌다.

메릴랜드 대학
이강
 1900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 이강은 2명의 시종을 대동하여 버지니아주의 로아노크대학에서 수학중 의친왕에 책봉되고 1905년 귀국하여 적십자총재를 역임하였다
 버지니아 로아노크 대학의 옛사진
하워드 대학의 유학생들 1896년
 가운데 뒷줄에 여학생도 보인다
임병구, 이범수, 김현식, 안정식, 여병현 등이 서광범 공사의 도움으로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에 유학.

하워드 대학
서광범
 서광범은 보빙사절단 종사관 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유럽등지를 시찰한 후 돌아가 개화파에 가담하여 주동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계속된 정부의 추적을 피해 1885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정부 기관지에서 글을 쓰며 어렵게 살았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받고 연방정부 공무원이되어 교육국 인종 학과에 번역관으로 일하기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연루자 사면령이 내려지고 그의 능력을 인정한 조정에 발탁되어 법무대신이 된 그는 박영효와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에 밀려 미국 워싱턴 주재 전권공사로 나오게 되었다 결국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 앉아 망명생활로 일생을 마치었다
윤치호

윤치호 는 일본에 유학 중 영어를 배워 초대 미국 주한 공사 후트의 통역으로 1883년 귀국하였다가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도미 유학하여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년간 수학하였다
 에모리 대학
 밴더빌트 대학
서재필
1884년 김옥균과 시도한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9년 워싱톤대학에 입학하고 1892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의사 가 되었고 1890년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독립운동가
 조지 워싱턴 대학
김규식
1896년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버지니아의 로아노크대학(BA)과 1904년 프린스톤대학원(MA)을 마치고 귀국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프린스턴 대학
안창호
 오랜지 농장에서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미국 선교사 밀러의 주례로 결혼하고 다음 날 부인 이혜련과 같이 1902년 도미유학. 도산 선생의 학력은 특이 하다 미국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고 성년의 나이에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무지한 한국 이민 노동자들 속에 직접 들어가 정신적인 교육을 시켰다
이대위
 1903년 도미하여 오래곤의 포트랜드학교와 UC Berkeley, 태평양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로서 안창호와 같이 친목회, 공립협회, 흥사단, 국민회 창설에 이바지하고 상항감리교회 목사, 신한민보 편집국장 역임, 한글 인터타입식자기 발명,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청원하여 한일합방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한국 망명객 451명을 미국에 망명 유학생 자격으로 여권도 없이 오도록 하였다. (미주 100년 주년 발자취에서 발췌)
 UC Berkeley
이승만
특별히 설명이 필요 없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1904년 유학, 1907년 죠지와싱톤대 졸업 1910년 하바드대 석사, 1910년 프린스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화려한 경력을 소유하였다 두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의 정치 철학이 서로 다른 것 처럼 학력도 정 반대이다
 하버드 대학
박용만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이 세운 상동교회의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5년 도미하여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군사학(BA)을 전공하고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시키며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북경에서 암살 당했다
 네브라스카 대학 옛 건물
신흥우
 신흥우는1904년 USC재학 중 LA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졸업 후 귀국하여 배재교장 역임.
 남가주 대학USC
 당시 유학생들은 유학을 떠나고 나니 을사 보호 조약과 뒤이어 한일 합방등 급변하는 세월 속에 내 나라가 없었졌다 그들에게는 그저 태어 난 강산 만 있었을 뿐이었다
 갑신 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을 떠난 젊은이 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그들의 모습은 무슨 비밀 결사대 같이 보인다)
  대한제국의 여권과 나라가 없어진 후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한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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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허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허경영. 이 이름이 이슈가 된 것도 희안한데 그의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큰 오류를 펼쳐가고 있는지 방송을 통해 보고 나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으로 나왔다. 심지어 담당 pd를 협박까지 하는 치졸하고 옹졸한 모습까지 보여주고, 취재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게하여 옆에서 인터뷰를 취소해달라고 따라 말하라 하는 모습은 황당 그 자체였다.
허경영.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에게 열광했는가? 과연 열광했는가? 아마도 다들 재미삼아 한번 호응을 해 본 것일거다. 일전에 소리나눔콘서트에 2PM 대신 허경영이 나와서 콜미를 부른 적이 있었다. 현장에 있던 나는 허경영 열풍의 허상을 볼 수 있었는데, 허경영이 나오자 모두들 열광하였고, 심지어 콜미를 따라 부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자 다들 한심하다는 듯한 소리를 한마디씩 하고 헛웃음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허경영은 이런 재미삼은 호응을 발판으로 박차를 가한다. 각종 강연을 다니고, 대학생들을 선도한다. 얼마 전에는 티셔츠를 만들어 한장에 몇억하는 건데 특별 할인을 하여 몇만원에 팔겠다고 올렸고 실제로 판매가 되었다. 콜미는 벨소리로 판매가 꽤 된 것으로 알고 있고, 요즘은 약까지 팔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요즘 시대가 이러하니만큼 허경영같은 사람이 나와 환기를 좀 시켜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허경영에 대한 열광으로 대리만족을 하려는 마음이 깔려있다. MB정부가 아니었다면 허경영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지금과 같은 활동을 꿈도 못꾸었을 것이다. 우연히 이런 시대적 환경과 그의 기이한 행동들이 잘 맞아 떨어져 대중의 열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았다면 더 이상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열광하는 사람들을 말리고 다닐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그는 사기꾼이다. 사기꾼으로 감옥까지 갔다왔지 않는가. MB의 보복이 아니라 그는 사기꾼 그 자체다.
그는 합성한 사진들로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수억원의 돈을 뜯어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왔던 사람은 10년 전에 1억 5천을 빌려주었는데 사채까지 끌어다 빌려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의 불찰이 대부분이겟지만, 사채까지 끌어다 쓰게 만든 허경영의 사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사람들은 이를 수완이 좋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완벽한 사기꾼이다. 나도 수천만원짜리 사기를 2번이나 당해보았기에 사기에 당해 잘 알고 있다.
나는 안당하겠지 하지만, 사기꾼은 기가막히게 사기를 친다. 그래서 사기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 할아버지는 5억원을 뜯긴다. 1억 5천을 뜯긴 사람의 아버지도 최근 3천만원을 뜯기고 가출한 후 요양원에 가 있다. 그가 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기를 치기 위해서 강한 사람을 등에 없는다. 부시, 박근혜, 박정희, 이병철 등등 말이다.
한 심리학자는 그의 상태를 보고 어릴적 가난했던 것이 어릴적 자존감이 너무 낮아져 반대급부로 자신이 최고라 여기며 유명인을 자신의 등에 업으려 한다고 했다. 그의 말에도 동의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건 사기꾼들이 하는 수법이라 말하고 싶다.
좋은 제품이 있다. 더 많이 팔려고 홍보를 하면 사업 수완이 좋은 것이다. 제품이 없다. 그런데 더 많이 팔려고 홍보를 하면 그건 사기다. 허경영은 아무 것도 없는데 더 많이 팔려고 홍보를 한다. 무중력춤, 공중부양, 축지법, 부시, 판문점, 이병철의 양아들 등 이 모든 것은 사기를 치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열광하면 그는 더 큰 사기를 치려 한다. 그 사기는 우리가 당하지 않는다. 그 사기는 사회적 약자가 핵폭탄급으로 맞는다. 우리가 그에게 열광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열광하면 할수록 우리도 사기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아무리 어수선해도 국민 모두가 사기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말은 진짜와 거짓이 절묘하게 섞여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그의 사기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건 사기꾼의 기본 중 기본 스킬이다. 거짓만 말한다면 그건 사기꾼이 아니라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사기꾼은 진실처럼 거짓을 말한다. 옷장사를 했을 때 동대문에 가면 가품과 진품을 섞어파는 점포들이 있었다. 디스플레이는 진품으로 해두고, 구석에 가품을 숨겨둔다. 80:20의 비율 정도로 섞어 팔면 손님들이 모른다고 한다. 이것이 사기이다.
더이상 그의 사기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재미로 열광하는 것도 이제는 멈춰야 할 것이다. 허경영! 그에게 말해보았자 소 귀에 경 읽기다. 방법은 우리가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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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第一夫人互외泡菜 -배추김치를 서로 먹여주는 韓日제일부인]
중국사이트에 위 제목으로 한일 퍼스트레이드의 김치담그기 행사가 소개되었다. 이는 국내에는 잘 알려진 소식이니 새삼 이에 관한 언급은 접고 중국사람들은 퍼스트레이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적어 보겠다.
중국 개국 60주년 경축행사 역시 잘 알려졌는데 방영된 화면을 보면 천안문관장에서 행해진 행사에 중국의 국가원수인 후진타오를 위시한 각료들은 천안문 누각에 설치된 관람대에서 다과를 즐기며 경축식 축하행사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이곳에서는 후진타오나 원자바오의 옆에 그들의 부인은 입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안문관람대에 여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여성들 중에 누구도 남편의 직위와 연계해서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관해서 중국인에게 물어보았다. "후진타오는 국가주석인데 당연히 제1부인은 그 옆에 앉아서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자 그들은 말도 않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중국에서는 누구도 남편의 지위를 이용해서 저 자리에 함께 할수 없다. 저곳은 자신의 능력으로 공산당 서열이 높거나 관직이 높아야 올라갈수 있다. 국가주석의 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공작성과가 낮으면 우리와 똑같이 이곳에서 관람한다."
이것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않는 중국인들의 사회통념이다.
이런 그들을 보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리나라의 대통령 부부일신의 관행에 대해서 한 번 되돌아 보게 되었다.
최고통수권자의 행보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참으로 해외순방이 잦고, 임기말이 되면 더욱 바빠지는 경향도 보였다.
그리고, 부부여행도 아닌데 해외순방 때마다 부인을 동반 하고 이에 남편따라 동행한 부인 역시 자신도 최고위층 인양 휘둘러 보며 손 흔들고 레드카펫을 밟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는 것을 뉴스에서 볼 때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역대 퍼스트레이디 전부가 이랬던 것은 아니다.)
부인이 대통령을 따라서 함께 해외순방 길에 올랐다면 그녀 역시 퍼스트레이디의 직함으로 타국가를 방문했으므로 그에 걸맞는 활동이 있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성과도 있어야 한다.
이 성과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국의 퍼스트레이디와 문화적 공감대를 이룰수 있어야 하고 해외교민들에게 초대받아 대접받는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상을 살펴 볼 줄 아는.., 이래야 진정한 퍼스트레이디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회주의 국가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평가된다.
그것이 최상은 아닐지라도, 기회를 놓질새라 누릴 수 있는 것은 전부 찾아서 최상으로 누리고 당연히 해야 하는 활동은 외면하는 우리나라의 무지했던 퍼스트레이디님들은 뒤늦었지만 반성을 해야 한다.
*위 제목의 <외>는 입구(口)변에 두려워 할 외(畏) 입니다. <부르는 소리 외>라고 하며 여기에서는 <음식을 먹이다>의 뜻으로 풀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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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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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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