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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1/07
 

[스크랩] 日방위백서 또 독도를 자국영토로 표기

2009.07.17 23:37 | 우리의 독도. 일본인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1987 주소복사

日방위백서 또 독도를 자국영토로 표기
written by. 강치구
2005년부터 5년 연속 자국영토 표기..국방부 "'日 독도영토 주장' 용인못해"

 일본 정부가 17일 각료회의에서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담은 2009년 방위백서를 의결해 북핵실험후 새롭게 정립된 한일관계에 먹구름이 되고 있다.  일본이 방위백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표현을 넣은 것은 2005년 이후 5년 연속이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셔틀외교 차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제기된 문제로 한일 간 갈등이 또다시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주일 한국 대사관 측은 "오늘 통과된 방위백서에 독도와 관련한 표현이 전년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올해 일 방위백서의 독도 관련 내용은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대해 국방부는 17일 일본 방위성이 이날 발표한 2009년 방위백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기술한 데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국방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대한민국 국방부는 일본 방위성이 독도를 일본 고유영토로 기술한 것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며, 일본 정부의 즉각적인 시정 조치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국방부가 지난해 강력한 유감표명과 함께 관련 내용의 삭제를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일본 정부가 2009년 방위백서에서 또다시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힌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이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한.일 간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됨을 일본 정부가 깊이 인식하길 촉구한다"고 덧붙였다.(konas)

코나스 강치구 기자

[스크랩] [월드 리포트]‘난징대학살’ 중국만의 상처 아닌 ‘인류의 아픔’으로 승화

2009.05.04 04:53 | 우리의 독도. 일본인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1516 주소복사


[월드 리포트]‘난징대학살’ 중국만의 상처 아닌 ‘인류의 아픔’으로 승화

[세계일보] 2009년 05월 01일(금) 오후 09:18
 
중국 신세대 감독 루촨의 영화 ‘난징!난징!’ 대륙을 강타하다

영화 ‘난징(南京)! 난징!’의 태풍이 중국 대륙을 강타했다. 1937년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는 지난달 22일 개봉 이후 닷새 동안 무려 6800만위안(약 136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닷새 만에 제작비 7500억위안의 90%의 수입을 거둔 것. 중국 현대 전쟁영화로는 이례적인 성적이다. ‘난징! 난징!’ 태풍의 중심에는 38세의 감독 루촨(陸川)이 있다. 중국 신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루촨은 2004년 개봉한 커커시리(可可西里·Mountain Patrol)로 한국의 영화 마니아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 ‘난징! 난징!’이 주목받는 이유는 외형적인 성공에만 있지 않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루 감독의 새로운 시각이 투영됐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동안 최대 30만명이 ‘도살’됐다며 이 사건을 일본과 일본인의 야만성을 부각하는 무기로 사용해 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대체로 중국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 분위기다. 학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우익에서부터 사건 발생은 인정하더라도 피해자 숫자가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이론(異論)이 일본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난징! 난징!’을 만들어 중국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루촨 감독.
■일본군 시각 담은 첫 영화

루 감독은 영화에서 중·일 양국의 극단적인 입장차를 뛰어넘었다. 중국 영화로는 처음 일본 군인의 시각을 담았다. 그는 영화에서 가해자인 일본군과 피해자인 중국 민중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그동안 가해자로만 부각돼온 일본군도 군국주의의 희생자일 수 있음을 묘사했다. 상관의 명령으로 학살에 참여한 일본 군인이 죄의식에 고뇌하다 결국 포로를 도망시키고 자살한다는 내용이 영화의 주요 뼈대 중 하나다. 루 감독은 “일본군도 요괴가 아닌 사람이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우리 인류의 반성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중국에서는 중국대로, 일본에서는 일본대로 영화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일본군도 사람이며 우리와 같은 사고를 가졌음을 알았다”는 호평과 함께 “학살 가해자인 일본군을 미화한 친일영화”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본에서는 “처음 일본군의 시각이 반영된 영화”라는 관심과 함께 역시 “폭행, 도살 등 학살이 강조됐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장롄훙(張連紅) 난징대학살연구중심 주임은 “중국에서는 이제까지 피해자의 각도에서 일본의 잔학행위를 강조해 왔다. 이번 영화는 여기에서 탈피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가 되어서 전쟁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난징! 난징!’은 루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2002년 개봉한 ‘쉰창(尋槍·The Missing Gun)’이 최초 작품이고 ‘커커시리’가 두 번째 작품이었다. 총을 잃은 경찰관이 이를 찾아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쉰창’은 인간의 이야기를, 밀렵꾼으로부터 티베트 영양을 지키는 산악관리대원들을 그린 ‘커커시리’는 자연의 이야기다. 난징대학살을 다룬 이번 영화를 통해 루 감독이 인간·자연·역사 3부작을 완성했다는 평도 나온다.

루 감독은 최근 중국중앙방송(CCTV)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징대학살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욕망이 있었다. 많은 자료를 봤는데 모두 ‘부호화’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피살자) ‘30만명’이라는 숫자는 알지만 당시에 살해당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스토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전에 만들어진 수십 편의 난징 학살 관련 영화에서도 진정한 중국인의 스토리는 없었다. 나는 난징대학살을 통해 세계가 평화주의라는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영화 ‘난징!난징!’의 포스터.
■신세대 감독, 루촨

30대의 루 감독이 난징대학살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중국 영화계에서는 의문이 제기됐다. 과연 이 젊은 감독이 그렇게 무거운 역사 주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번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의 평균 나이도 35세 이하다.

1971년생인 루 감독은 해방군 국제관계학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이 군사대학이 바로 난징에 있다. 그는 1989∼1993년 4년간의 군사대학 생활 중 매주 2, 3차례 노천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그는 “어느 날 봤던 영화는 최악이었다. 그때 영화 속의 인물이 눈물을 흘리면 관객도 함께 우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영화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회상했다. 1998년 베이징영화(電影)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중국영화그룹(中國電影集團)을 통해 영화판에 발을 담갔다. 몇 개의 TV 드라마 각본과 TV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쉰창’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루 감독은 장양(張楊), 닝하오(寧浩)와 함께 중국의 6세대 감독과는 구별되는 ‘신세대 감독’으로 분류된다. 신세대 감독의 특징은 중국의 시각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역사의 매력을 세계에 소개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예술과 시장의 융합을 통해 중국 영화산업에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감독에 의해 중국 영화는 새로운 황금기에 진입했다는 평가도 있다.

루 감독은 ‘난징! 난징!’의 초기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작을 마무리할 때까지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처음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요컨대 중국인이 침략에 저항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루 감독은 난징의 대학시절 3차례 난징학살기념관을 참관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여름날 동생이 난징에 놀러와서 기념관에 데리고 갔다. 동생은 절반 정도 둘러보다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따라나갔더니 벽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이때의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난징 학살은 중국의 영광”

‘난징! 난징!’을 제작하기 위한 4년은 인간성과 전쟁의 본질에 다가서는 과정이었다. 시나리오를 수없이 수정하면서 항일 영화를 만들겠다던 생각은 인간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중국에 국한된 역사의 상처를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인류의 아픔으로 승화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루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대학살에 대해 울면서 호소하면서 일본군을 (인간과는 다른) 괴물로 묘사했다. 이런 식의 영화가 세계에 영향을 줬다거나 난징대학살에 대한 세계의 인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제 그들(일본군)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루 감독은 이 영화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처럼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포로에 대한 대량학살이나 군대위안부 강제징발 등 참혹한 장면은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사실감이 극대화됐다. 여대생들이 엑스트라로 자원했다는 전라(全裸)의 군대위안부 신에 대해서는 너무 선정적이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선지 ‘난징! 난징!’의 장면 하나하나에 큰 충격을 받은 중국 내에서도 많은 질문이 나온다.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느냐는 것이다. 루 감독의 대답은 명료하다. “그렇다. 모두 사실이다.”

그는 객관에 접근하기 위해 엄청난 자료를 수집했다. 당시 학살에 참여한 일본군이 쓴 일기 등 일본이나 대만의 자료를 닥치는대로 손에 넣었다. 그의 친구는 일본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2억위안(약 400억원)이라는 거금을 썼다고 한다.

중국인에게 그동안 난징대학살은 ‘섬나라’ 일본에 짓밟힌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루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 사건이 중국의 굴욕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당시 난징의 (국민당군) 지휘부가 도주했지만 저항은 계속됐다. 일본군은 난징에서 일보 전진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됐다. 왜 대학살이 일어났을까. 이는 우리의 저항이 그만큼 끈질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굴욕이 아닌 중국인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베이징=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스크랩] 이것이 일본의 실체 입니다(임시정부수립 90주년을 맞아~~)

2009.04.28 04:21 | 우리의 독도. 일본인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1453 주소복사

이것이 일본의 실체 입니다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일본은 1880년경 부터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각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았아 점령 하드니
그래도 모자라 다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점령 할려고 합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일본의 잔인함을 전세계에 고발 합시다.
 
끔찍한 사진이 많으니 심장이 약한분은 주의가 필요 합니다.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을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군인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일본병사 근무지에도 불려간 종군 위안부



1910년대에 불려진 독립군의 대표적인 군가 "독립군가"

누구나 이 메일을 자기 블로그,카페에 올리고

이 사진을 메일로 의무적으로 다른 여러분에게 발송해

일본의 잔인함을 알게합시다.
 
  


 

미아찾기 캠페인


 

[스크랩] 위안부 할머니 1000만원 기부

2009.04.10 12:15 | 우리의 독도. 일본인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1322 주소복사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생활비를 아껴모은 돈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에 써달라고 기부했다.

6일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대협)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인 김복동씨(83·사진)는 지난 4년여간 정부에서 받은 생활지원비 중 일부를 떼어 모은 1000만원을 박물관 건립을 위해 내놓았다.

정대협은 지난달 8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한 박물관 착공식을 하고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1992년 위안부 생존자로 정부에 신고한 뒤 세계인권대회 등에서 피해자 증언활동을 했으며 99년 고향인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90년 ‘마루타’란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된 중국 영화 ‘흑태양 731’은 일제 731부대에 의해 자행된 인간 생체실험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소년병을 모집해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냉동실험을 비롯한 온갖 잔혹한 실험을 한다. 소년병들은 내심 곤혹스럽지만 비인간적인 부대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세균폭탄이 완성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퇴각명령이 내려진다. 비밀 유지를 위해 실험 대상자들이 살해되고 마지막 생존자인 중국인 소년이 부대장에게 칼을 휘두르지만 그도 결국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실제로 2차대전 당시 세균병기의 위력을 확신한 일본군은 만주에 주둔하던 731부대에 세균전을 준비하도록 했다. 731부대는 1936년부터 종전 직전까지 9년 동안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러시아인 전쟁포로 등 3000여명을 대상으로 천인공노할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실험대상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실험용 인간 통나무라는 뜻으로 흔히 마루타라고 불렸다. 이들은 산 채로 세균을 투입하는 세균실험이나 혹독한 겨울에 발가벗겨진 채 실외에 방치되는 동상실험의 대상이 됐다. 진공실험이나 가스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대부분 생체해부 실험을 받고 소각돼 연기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일제는 이렇게 개발한 세균무기를 실전에 투입했다. 우물에 콜레라균을 타거나 음식물에 세균을 섞었다. 종전이 임박해서는 세균폭탄을 마구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 자료에 따르면 생체실험과 세균전 희생자는 확인된 것만 58만명이고 전체는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는 패전 직전 731부대의 핵심 자료를 빼돌리고 나머지 건물과 시설을 파괴했지만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만행을 폭로하는 자료와 증언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731부대 위생병을 지낸 오가와 후쿠마쓰씨가 최근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이 부대가 자식 앞에서 군대 위안부를 해부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부정한 것을 확실히 사회에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증언 배경을 밝혔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부끄러운 과거사를 숨기는 데 급급해하는 일본 우익 지도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articleid=2007041121403673747&newssetid=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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