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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난징! 난징!’을 만들어 중국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루촨 감독. |
루 감독은 영화에서 중·일 양국의 극단적인 입장차를 뛰어넘었다. 중국 영화로는 처음 일본 군인의 시각을 담았다. 그는 영화에서 가해자인 일본군과 피해자인 중국 민중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그동안 가해자로만 부각돼온 일본군도 군국주의의 희생자일 수 있음을 묘사했다. 상관의 명령으로 학살에 참여한 일본 군인이 죄의식에 고뇌하다 결국 포로를 도망시키고 자살한다는 내용이 영화의 주요 뼈대 중 하나다. 루 감독은 “일본군도 요괴가 아닌 사람이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우리 인류의 반성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중국에서는 중국대로, 일본에서는 일본대로 영화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일본군도 사람이며 우리와 같은 사고를 가졌음을 알았다”는 호평과 함께 “학살 가해자인 일본군을 미화한 친일영화”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본에서는 “처음 일본군의 시각이 반영된 영화”라는 관심과 함께 역시 “폭행, 도살 등 학살이 강조됐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장롄훙(張連紅) 난징대학살연구중심 주임은 “중국에서는 이제까지 피해자의 각도에서 일본의 잔학행위를 강조해 왔다. 이번 영화는 여기에서 탈피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가 되어서 전쟁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난징! 난징!’은 루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2002년 개봉한 ‘쉰창(尋槍·The Missing Gun)’이 최초 작품이고 ‘커커시리’가 두 번째 작품이었다. 총을 잃은 경찰관이 이를 찾아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쉰창’은 인간의 이야기를, 밀렵꾼으로부터 티베트 영양을 지키는 산악관리대원들을 그린 ‘커커시리’는 자연의 이야기다. 난징대학살을 다룬 이번 영화를 통해 루 감독이 인간·자연·역사 3부작을 완성했다는 평도 나온다.
루 감독은 최근 중국중앙방송(CCTV)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징대학살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욕망이 있었다. 많은 자료를 봤는데 모두 ‘부호화’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피살자) ‘30만명’이라는 숫자는 알지만 당시에 살해당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스토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전에 만들어진 수십 편의 난징 학살 관련 영화에서도 진정한 중국인의 스토리는 없었다. 나는 난징대학살을 통해 세계가 평화주의라는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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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난징!난징!’의 포스터. |
30대의 루 감독이 난징대학살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중국 영화계에서는 의문이 제기됐다. 과연 이 젊은 감독이 그렇게 무거운 역사 주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번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의 평균 나이도 35세 이하다.
1971년생인 루 감독은 해방군 국제관계학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이 군사대학이 바로 난징에 있다. 그는 1989∼1993년 4년간의 군사대학 생활 중 매주 2, 3차례 노천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그는 “어느 날 봤던 영화는 최악이었다. 그때 영화 속의 인물이 눈물을 흘리면 관객도 함께 우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영화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회상했다. 1998년 베이징영화(電影)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중국영화그룹(中國電影集團)을 통해 영화판에 발을 담갔다. 몇 개의 TV 드라마 각본과 TV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쉰창’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루 감독은 장양(張楊), 닝하오(寧浩)와 함께 중국의 6세대 감독과는 구별되는 ‘신세대 감독’으로 분류된다. 신세대 감독의 특징은 중국의 시각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역사의 매력을 세계에 소개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예술과 시장의 융합을 통해 중국 영화산업에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감독에 의해 중국 영화는 새로운 황금기에 진입했다는 평가도 있다.
루 감독은 ‘난징! 난징!’의 초기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작을 마무리할 때까지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처음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요컨대 중국인이 침략에 저항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루 감독은 난징의 대학시절 3차례 난징학살기념관을 참관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여름날 동생이 난징에 놀러와서 기념관에 데리고 갔다. 동생은 절반 정도 둘러보다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따라나갔더니 벽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이때의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난징! 난징!’을 제작하기 위한 4년은 인간성과 전쟁의 본질에 다가서는 과정이었다. 시나리오를 수없이 수정하면서 항일 영화를 만들겠다던 생각은 인간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중국에 국한된 역사의 상처를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인류의 아픔으로 승화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루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대학살에 대해 울면서 호소하면서 일본군을 (인간과는 다른) 괴물로 묘사했다. 이런 식의 영화가 세계에 영향을 줬다거나 난징대학살에 대한 세계의 인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제 그들(일본군)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루 감독은 이 영화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처럼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포로에 대한 대량학살이나 군대위안부 강제징발 등 참혹한 장면은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사실감이 극대화됐다. 여대생들이 엑스트라로 자원했다는 전라(全裸)의 군대위안부 신에 대해서는 너무 선정적이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선지 ‘난징! 난징!’의 장면 하나하나에 큰 충격을 받은 중국 내에서도 많은 질문이 나온다.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느냐는 것이다. 루 감독의 대답은 명료하다. “그렇다. 모두 사실이다.”
그는 객관에 접근하기 위해 엄청난 자료를 수집했다. 당시 학살에 참여한 일본군이 쓴 일기 등 일본이나 대만의 자료를 닥치는대로 손에 넣었다. 그의 친구는 일본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2억위안(약 400억원)이라는 거금을 썼다고 한다.
중국인에게 그동안 난징대학살은 ‘섬나라’ 일본에 짓밟힌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루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 사건이 중국의 굴욕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당시 난징의 (국민당군) 지휘부가 도주했지만 저항은 계속됐다. 일본군은 난징에서 일보 전진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됐다. 왜 대학살이 일어났을까. 이는 우리의 저항이 그만큼 끈질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굴욕이 아닌 중국인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베이징=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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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마루타’란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된 중국 영화 ‘흑태양 731’은 일제 731부대에 의해 자행된 인간 생체실험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소년병을 모집해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냉동실험을 비롯한 온갖 잔혹한 실험을 한다. 소년병들은 내심 곤혹스럽지만 비인간적인 부대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세균폭탄이 완성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퇴각명령이 내려진다. 비밀 유지를 위해 실험 대상자들이 살해되고 마지막 생존자인 중국인 소년이 부대장에게 칼을 휘두르지만 그도 결국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실제로 2차대전 당시 세균병기의 위력을 확신한 일본군은 만주에 주둔하던 731부대에 세균전을 준비하도록 했다. 731부대는 1936년부터 종전 직전까지 9년 동안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러시아인 전쟁포로 등 3000여명을 대상으로 천인공노할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실험대상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실험용 인간 통나무라는 뜻으로 흔히 마루타라고 불렸다. 이들은 산 채로 세균을 투입하는 세균실험이나 혹독한 겨울에 발가벗겨진 채 실외에 방치되는 동상실험의 대상이 됐다. 진공실험이나 가스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대부분 생체해부 실험을 받고 소각돼 연기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일제는 이렇게 개발한 세균무기를 실전에 투입했다. 우물에 콜레라균을 타거나 음식물에 세균을 섞었다. 종전이 임박해서는 세균폭탄을 마구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 자료에 따르면 생체실험과 세균전 희생자는 확인된 것만 58만명이고 전체는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는 패전 직전 731부대의 핵심 자료를 빼돌리고 나머지 건물과 시설을 파괴했지만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만행을 폭로하는 자료와 증언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