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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9월14일 아이크 해안으로 접근한 허리케인이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고 AP통신은 전하고 있다.
당시 허리케인의 위력을 수치로 평가하는 작업을 시행한 중간 발표에 의하면 수소폭탄으로 시간당 수백명이 사망하는 것과 유사한 힘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며,이는 시간당 36메가톤의 핵폭발 위력과 맞먹는 에너지 출력이 있다고 미국 "에릭 게이,AP통신(연합)이 보도하고 있다.

Galveston의 해안선을 따라 접근한 허리케인의 위력이 한눈에 들어오는 끔찍한 피해의 현장이다. www.seenews.kr

텍사스를 지나가면서도 폭우와 함께 강풍을 동반해 많은 피해를 남겼다.

2005년 10월24일 플로리다 반도 서쪽으로 처음 들어온 허리케인 윌마는 강력한 폭풍과 엄청난 폭우로 일시에 도시를 침수시키고 파괴하면서 지나갔다.
2005년 10월25일 필라델피아로 접근한 허리케인 윌마가 약 7시간동안 휩쓸고 지나간 뒤의 처참한 모습으로 주 전역의 피해가 약 215억 달러에 달했다.

2005년 9월22일 리타 해안에 접근한 허리케인으로 시내가 교통마비 상태로 빠져 들고 있는 모습이다. (릭 Bowmer,AP통신,연합) www.seenews.kr

2005년 9월24일,루이지에나 Lafit, 도시에 홍수와 화재로 118억 달러의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AP통신=연합) www.seenews.kr

2005년 뉴올리언스에 강력한 허리케인 접근으로 33세의 여성과 67세의 노인이 필사적인 탈출를 감행하고 있는 모습이다.(짐원/피지 미디어) www.seenews.kr

뉴올리언스의 주민들이 헬기를 비롯해 여러가지 수단으로 수백명이 구출되었다.
많은희생자와 부상자 그리고 피해액만 850억 달러에 달했다.(빈센트,Laforet,게티 이미지)

2005년 8월,뉴올리언스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의 슬픔을 보고 있다.(에릭게이,AP= 연합)

플로리다 해안으로 접근한 허리케인으로 자신의 집을 잃은 주인이 목놓아 울고 있다. 인근에서 수십채의 주택이 완파되었으며.25명이 사망했다.(필,AP통신,연합) www.seenews.kr

2004년 9월16일 허리케인이 지나가면서 플로리다 북쪽 지방의 거대한 다리를 잘라놓고 달아났다. (릭 Wilking/로이터) www.seenews.kr

2004년 8월22일,플로리다 찰리지역 에 허리케인의 피해로 교회가 무너진 모습. 당시 허리케인 피해액은 재산상 손실이 약 163억 달러에 달했다고,,(마리오 타마/케티 이미지) www.seenews.kr

2004년 9월5일 플로리다 해안에 상륙한 허리케인의 영향으로 바닷물이 육지로 차오르는 장면으로 3일동안 해수로 도시가 침수되었다. (크리스 Hondros/게티 이미지) www.seenews.kr

플로리다 프렌시스 젠슨 비치 해안 도로의 모습으로 지반이 약해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역시 허리케인이 남기고 떠난 것이다. (크리스,Hondros/게티 이미지) www.seenews.kr

2004년 9월2일,플로리다에 상륙한 허리케인으로 강한 바람과 폭우가 수일간 계속 되어 약 100억 달의 재산상 피해가 발생했다. (브르스 위버.연합/게티이미지)www.seenews.kr

1992년 9월1일 플로리다주 플로리다시에 덥친 허리케인 엔드류의 위력으로 산산이 부서진 자신의 집앞에서 정신나간 사람으로 보이는 맨발의 집 주인 모습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족 가축을 잃고 하루아침에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었다.(린 Sladky/연합) www.seenews.kr

1992년 8월26일,허리케인 토네이도 앤드류의 만행으로 조각난 건물의 잔해 모습. (폴 제이 리차드/AFP.연합/게트 이미지) www.seenews.kr

1989년 9월26일,사우스 캐롤라이나 해안에 상륙한 허리케인 우고의 영향으로 새우잡이 배를 비롯한 보트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많은 부분의 재산 피해가 발생해 135억 달러의 손실를 입어 국가재정이 스톱 될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제프 ,Amberg,/연합) www.seenews.kr

역시 사우스 케롤라이나 설리번 섬에 소재한 다리가 허리케인 우고에 의해 파괴된 모습이다. 당시 풍속이 135마일에 육박했다고,(웨이드 Spees/AP통신 =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www.seenews.kr

1972년 6월23일,펜실베니아에 덥친 허리케인 아그네스의 상륙으로 강기슭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동시키고 있는 모습이며,당시 재산상 손실 피해는 124억 달러에 달했다.(필 버틀러/스크랜슨 타임스,AP통신이 보도)

1972년 6월23일 역시 허리케인 아그네스가 몰고온 폭우로 침수된 펜실베니아, 주택의 모습으로 당시 122명이 사망했다.(AP통신,연합뉴스 보도)

역시 펜실베니아 피해 지역의 모습이다. (폴 Vathis/AP통신=연합뉴스 보도) www.seenews.kr

1972년 6월23일 펜실베니아 지역 고립된 주민들을 안전지대로 이동시키고 있는 모습. (폴 Vathis,AP통신/연합뉴스 보도) www.seenews.kr

미시시피의 빌록시에 덥친 허리케인 카밀의 위력으로 바다에 정박 중이던 보트가 육지로 이동한 모습이다.
당시 바닷물이 육지로 100야드 까지 밀려 들어오면서 발생한 모습이라고 조 헐러웨이 주니어,AP통신 및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세계는 지금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면서 태풍의 위력은 날로 커져 약 36 메가톤의 핵폭발의 위력과 맞먹는 가공할 재난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TOPNEWS,가 지난 7월30일 보도하고 있다.
몇 년 전 카자흐스탄 출장시 알마타에서 만년설이 쌓인 천산으로 일요 등산을 간적이 있는데 골짜기에 물없는 이상한 빈 댐을 본 적이 있다. 처음 생각엔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는 댐을 많은 비용를 투입해서 건설했는지 이해가 못했으나 사유를 듣고 고개가 끄떡여 졌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였다. 키르키스탄,카자흐스탄은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나는 것 보다는 여름철 기온이 금상승하며 설산에 쌓인 눈이 갑자기 녹으면서 홍수가 발생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평소엔 물이 없는 빈 댐이 홍수를 막아주는 물의 저장고 역활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년 자주 발생하는 것도 아니지만 100년 대계를 바라보고 만든 것이다. 이런 뚱단지 같은 제안으로 적지않은 비용을 투입해서 빈 댐을 건설한 사람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고려인으로 그는 훗날 카자흐스탄 정부와 국민들로 부터 영웅칭호까지 받았다.
그 연유는 평소엔 무용지물인 빈 댐을 건설한 이 후 부터 바로 아래 수도 알마타는 한번도 홍수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한국은 4대강 정비사업이 찬반 논란속에 막대한 국고을 투입해서 재정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소개한 바와같이 허리케인의 위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 역시 커지고 있음은 우리나라 역시 예외 일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서 시공하는 대 역사의 최 우선 순위는 재해 예방 차원에 입각해서 설계 시공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그리고 대체적으로 7,8,9월에 집중되고 있는 태풍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예방차원의 준비가 필요한 시기다.
http://kr.blog.yahoo.com/leesa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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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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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댐도 한번은 유용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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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자료까지 제시하며 '일본군 40% 한국인' 주장 韓·中 학자, 난징 기념관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 1937년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 포로를 살해하려 하고 있는 일본군.
"난징 대학살(南京大虐殺)을 자행한 일본 군인 중 40%가 한국인이었다." "상투머리를 한 조선인들은 아이들조차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 대표적인 웹 사이트에 황당무계한 글들이 뜨고 있다. 일본군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 30만 명의 중국 포로와 시민을 학살한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 중 상당수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바이두(Baidu), 신랑왕(新浪網), 구글차이나 등 포털에는 이런 내용을 실은 글이 수십 건이다. 대표적인 게 '중국인이 잊지 말아야 할 역사, 난징 대학살의 한국인'(바이두 2006년 10월 17일) '역사 사실: 난징 대학살 중 일본군보다 더 잔인했던 한국인'(구글차이나 2008년 10월 3일)이다.
이 글들은 ▲당시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가 이끄는 15사단 소속 '조선인 부대'가 학살에 앞장섰는데 이들은 일왕에게 표창까지 받았고 ▲마쓰이는 훗날 도쿄(東京)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이 사실을 증언했으며 ▲중국 침략에 가담한 일본군 250만명 중 한국 국적이 160만명이고 ▲재판 결과 한국 출신 148명의 전범이 유죄를 선고받아 23명이 사형당했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한국인은 일본인보다도 더 잔혹하게 민간인을 학살·강간했다는 현지인들의 증언이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적극적인 저항도 하지 않았고 사냥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일본이 패전한 후에 10만 명의 조선인이 이를 비관해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내용이 엇비슷한 이 글들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원래 행실이 비슷한 종자들" "과연 가오리방즈(高麗棒子·중국인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쓰는 말)"라는 댓글까지 달리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정책기획실의 남상구 연구위원은 "한마디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이자 역사날조"라고 했다. 우선 시대적 상황이 전혀 맞지 않는다. 한국인이 일본군으로 동원된 것은 1938년 4월(육군)과 1943년(해군)의 지원병 제도를 통해서였고 징병제는 1944년에야 실시됐다는 것이다. - ▲ 남상구 동북아연구재단 연구위원이‘난징 대학살의 주범인 당시 일본군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이라는 허위 사실을 담고 있는 중국 웹사이트의 문서를 가리키고 있다.
육군 지원병제도에 의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동원된 전체 한국인은 1만7364명에 불과했다. 일본 군부는 반란을 우려해 한국인을 주력으로 한 부대를 편성하지 않았고 일본인 부대에 분산 배치했다. 따라서 한국인이 40%를 점하는 부대나 한국인 3만 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1937년 12월의 난징 대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남 위원은 "군사재판이나 난징 전범재판에서 한국인이 난징 대학살 전범 판정을 받은 사례는 한 건도 없다"고 했다. 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판결받은 한국인은 148명인데 이들은 1942년 8월 이후 강제 동원돼 동남아에서 근무한 포로감시원(129명)과 통역 16명, 필리핀 방면의 군인 3명뿐이었다.
1925년부터 1938년 4월까지 일본군 '15사단'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10만 명 비관 자살' 역시 사실무근이다. 동북아역사재단측은 "중국 학자들 중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며 "난징의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 이 얘기를 했더니 그들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 글들이 구체적인 듯한 가짜 자료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조선인 명단'이라는 첨부문서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일본군 내 조선군 명단' '난징 대학살에 참여한 조선 군관 명단'으로 둔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명단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서 난징 대학살과는 관계가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조작해서 올리고 유포한 것일까? 바이두에 게재된 글에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자랑할 것이 없는 이 민족(한국인)은 세계에 공헌을 한 것도 없다." "한국은 가장 성공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기업에 값싼 노동력뿐 아니라 잠재력이 큰 수출시장을 제공했으며, 한국은 한류(韓流)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 됐다."
남 위원은 "글을 쓴 사람은 역사에 대한 지식은 약간 있지만 전공자는 아니며 한국 기업 진출과 한류에 대한 반발로 혐한(嫌韓) 감정을 갖고 있는 인터넷 이용자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 네티즌들의 혐한 정서 확산을 통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일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이런 글들은 일본 우익에게 '많은 책임이 한국인에게 있었다'는 엉뚱한 면죄부를 줄 수 있으며, 인터넷에서 확대 재생산될 경우 실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있다고 남 위원은 지적했다. 한·중 관계에 지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WHY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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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다음뉴스에서 기사를 한 건 봤다.
티백 3개 들고 출근하는 '삼성맨'
내용인즉슨, 국내 굴지 기업인 삼성에서 절약을 위해 사내에 무료로 비치하던 커피, 음료 등을 없앴다는 이야기.
그러고보니 한국 상황이 많이 안좋아진것 같다. 물론, 모든 기업이 절약을 위해 삼성처럼 행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불경기에 돈줄을 단단히 조이는 듯한 모습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다.
회사 다닐 때 음료수나 커피 등을 무료로 먹던 것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회식비도 짤렸을까? 그나마 회사 다닐 때 좋았던 것이라면 평소 비싸서 못먹는 음식, 회식자리를 빌미로 잔뜩 먹어치우곤 했던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지난 주 일이다. 아내가 회사 출근하면서 비닐 봉투에 커피를 담는 모습을 봤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회사에 직원들을 위해 무료 커피나 음료수가 전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오차(차 종류)나 오유(더운 물)도 돈 내고 마셔야 한다고 한다. 커피는 자판기로 30엔, 오차나 오유는 20엔이라고 한다.
사실, 커피를 싸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카페인 없는 커피가 회사에 없기 때문. 아내가 임신중이라 가급적 카페인 없는 것을 마시려한다. 물론, 카페인 없는 커피 자체도 약간의 카페인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본 회사에서 경비절감과 같은 이유로 커피나 음료수의 존재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 자판기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회사내에 비치된 것을 마시던가, 아니면 집에서 티백 등을 들고와 마셔야 한다.
왠지 정 없어 보이면서도, 경비절감 차원이라고 하니 별 할말이 없어진다. 그래도 난 무료 커피 공짜로 마실 수 있었던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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