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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1/07
 

[스크랩]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한 유언

2009.11.18 21:11 | 역 사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2463 주소복사

"그대의 재주는 조비(曺丕)보다 십배(十倍)나 월등하니 반드시 앞날에 천하를 안정하고 나라를 세운 후 마침내 대사(大事)를 이루리로다. 참으로 짐이 그대와 서로 잘 아는 까닭에 거침 없이 말하노라. 그대 앞으로 태자(太子)를 가히 도움직 하거던 도웁되 만일 태자가 그 자리에 앉을만한 재덕(才德)이 없거던 그대가 성도(成都)의 주인이 되라."
                                                 
  -'삼국지', 최영해 역, 정음사





그런데 유비의 유언은 제갈공명이 대권을 차지하란 말입니까? 자기 아들이 무능해도 잘 봐달라는 말입니까? 처량한 아비의 심정과 노련하고 현명한 정치가의 심정이 복합된 참으로 멋진 유언입니다. 아니 안타까운 유언입니다.

유비의 아들 유선은 정말 무능했습니다. 제갈공명은 과로로 천하를 안정시키지도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제갈공명이 대권을 차지했다면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安重根 義士가 없었다면

 

written by. 김동길

 

그가 있었기에 한국과 한국인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살고 그렇게 갔기 때문에, 비록 흉악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종이 되어 40년이라는

긴 세월 노예나 다름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한국인은 긍지를 가지고 그 시련의 도가니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한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그의 소중한 목숨을 과감하게 던짐으로

한국과 한국인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살리는 것은 정신입니다. 기백입니다.

꼭 100년 전 어제, 안중근은 하얼빈 역두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문기자를 가장하고 그 자리에 갔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멎고 작달막한 키의 이또가 차에서 내려

역 구내에 도열하고 서 있는 러시아의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나온 사절들과 악수를 하려는 순간,

 



하얼빈역의 이토히로부미

 

안중근은 그의 품에서 브라우닝 자동권총 한 자루를

끄집어내서, 명치 일본의 총리대신을 네 번이나 지냈고

두 차례나 한국의 통감을 지난 귀족 중의 귀족인

공작 이또의 가슴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3발이 이또에게 명중, 그 자리에 쓰러져

20분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안중근은 모든 심문에 당당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대한제국의 의병대의 참모중장이요.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 다만 대한의 독립을

짓밟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침략의 원흉,

우리의 적 이또를 해치운 것뿐이요.”

 

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무릎 꿇고 10분이나 기도했던

독실한 천주교 신자 안중근! 그는 틀림없이 하늘나라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지도층의 작태를 보고

얼마나 속상해 하시겠습니까.

 

김동길/www.kimdonggill.com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1902~1990)가 駐日 美극동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 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이다.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 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 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더낼 수 있을까 ?




포로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들이

제작해 걸어 놓은 선동 포스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똥통을

운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의 숙소. 난민 캠프를 연상케 한다.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다.
피가 튀고 뼈가 조각 나는 포연 자욱한 전장은

이들에겐 일장춘몽이었을까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취사장.

흡사 무슨 공장을 연상케 한다.
수만 명의 포로를 먹이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무장 경비병에 둘러싸인 채 뭔가

지시사항을 듣고 있는 인민군 포로들.




여유를 되찿은 인민군 여자 포로가 미소를 짖고 있다




아직도 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민군 포로.
탁발승처럼 모포를 가슴에 두른 것이 인상적이다.




수용소 연병장에 모여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포로들.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병이

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철조망을 뜯어 만든 사제 무기와 도끼,칼 등을

들고 있다.




가슴에 태극기와 양 팔뚝에 멸공,애국

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 포로.

밤마다 親共(친공)포로와 反共(반공)포로들의

살육전에
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태극기를 들고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마을 주민들.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살아나고,


운이 다한 사람들은 한 점 흙으로 돌아갔다

[스크랩] 진시황 병마용 제1호 갱, 발굴 현장모습

2009.10.31 18:41 | 역 사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2381 주소복사







2009년 6월 13일, 진시황 병마용 제 1호갱의 고고발굴 현장이 공개 되었다.
진시황 병마용은 1974년 발견된 이래 2회의 발굴이 끝난 후, 무려 20년 만에 제 3차 발굴에 착수한 것이다.

진시황 병마용 1호 갱은 길이가 230m 이고 폭은 62m에 넓이는 1만 4천여 제곱미터디다.
갱도는 동서 양 끝에 긴 연결통로가 있다.
중간에는 9개의 굴이 뚫렸으며 동간에는 흙담을 세웠는데, 이곳에는 약 6,000여 개의 크고 작은 병마용(陶傭)이 있다.

관련 자료= http://kr.blog.yahoo.com/savinayoo/16777.html?p=1&pm=l&tc=531&tt=1244900164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현장에서 발굴하는 발굴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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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장 인수 인터뷰를 하는 고고학자 袁仲.




[스크랩] 진시황 병마용에서 소년병사용 발굴

2009.10.31 18:39 | 역 사 | 유비

http://kr.blog.yahoo.com/yb01112000/12380 주소복사










2009년 10월 19일, 진시황병마용 전문가인 秦兵馬俑박물관 명예관장 원중(袁仲)은
"병마용들 중에는 소량의 소년전사의 俑도 있다."고 발표하였다.

진시황병바용이 발견된 이래 여러가지 모양의 병마용이 발굴 되었지만
이렇게 소년전사의 병마용이 발굴 된 것은 처음이다.


그는 말하기를 "진황병마용 발굴 이래 천여건의 俑이 발굴 되었으나
그중에 아이의 얼굴로 보이는 천진한 용모의 소년전사들도 있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년전사용이 몇명이나 있느냐?"는 질문에는
"후에 정확한 통계가 나오면 답변 하겠다" 라고 하면서
현재 비공식적으로는 10개 정도 라고 하였다.


중국고대에는 턱수염이 성인의 기준이었는데 발굴자들은 1호갱에서는
턱수염이 있는 병마용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병마용에 턱수염이 있는 병사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라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알수가 없다고 한다.



  











진병마용 중에 소년전사용은 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병사들 사이에 분산되어 있다.
"그들은 독자적인 소년전사인가?"의 질문에는 전문가도 답변하지 못했다.

중국 인민대학의 王교수는 "고대로부터 15세 이상의 소년을 일정범위 안에서는 징집할 수
있었으며 그 관습이 秦나라에도 이어진 것으로 본다." 고 말했다.

   








참고로, 시안(西安)에 있는 진시황릉은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당시에 발굴로 4개의 갱이 발견되었는데
이중에 1호갱에 대한 발굴이 2009년 6월 13일에 착수 되었다.


발굴 4개월 만에 많은 성과가 있었으나 병사용들 중에서
소년전사용이 발굴 되었다는 발표는 병마용 발굴 이래로 처음이다.


진황병마용이 묻혀있는 갱들에 대해서 간략히 기술하면, 진시황병마용에는 총 4개의 갱이 있다.
그중에서 4호갱은 무슨 이유인지 완성되기 전에 매몰하여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 빈 갱이고
2, 3호 갱은 1985년에 발굴에 착수하여 중군용등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었으나 
작업 중의 실수로 출토된 장군용의 머리부분이 부서지고 채색된 병마용은 햇빛에 노출되자
변색되어서 유물의 보존을 위해 발굴이 중지 되고 다시 묻었다.


그런 이후로 1호갱은 무려 20년 만에 발굴이 재개되어서
병마용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발굴 현장의 모습들

http://kr.blog.yahoo.com/savinayoo/16780.html?p=3&pm=l&tc=565&tt=1256082941

http://kr.blog.yahoo.com/savinayoo/16777.html?p=3&pm=l&tc=565&tt=125608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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