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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가지 주제
개설일 : 2005/09/29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자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 고대 중국과 근대 일본에 의해 왜곡된, 사실과 전혀 다른 역사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 진상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진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독도, 일본(日本)땅 아니다" 1946년 대장성 법령 발견

2009.11.16 10:11 | ♣ 우리역사 바로보기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45360 주소복사


독도, 日本땅 아니다. 대장성 법령

의원실이 익명의 일본 고위관료를 통해 15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1946년 8월 15일 일본 대장성(大藏省)이 발표한 고시(告示) 654호에서 독도(竹島로 표기)는 조선, 대만,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과 함께 외국(外國)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박 의원실에 따르면 "일본은 패전 직후인 1946년에 일본 기업들이 부담할 배상 및 노무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 채무 등의 해결을 위해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을 제정해 회사가 실행 중인 사업 및 전후 산업 회복에 필요한 동산, 부동산, 기타 재산 등을 정했다"며 "이 법의 칙령에서 '재외(在外) 자산'의 범위를 규정하고, 대장성 고시에선 패전 전 점령했던 영토 중 외국으로 분류한 지역을 규정했는데 여기에 독도가 포함돼 있다"고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독도학회장)는 "1946년 1월 일본 도쿄에 설치된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677호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되는 곳으로 명시했다"며 "이번에 발견된 1946년 대장성 고시는 당시 군정하에 있었던 일본이 연합국 방침을 추인하고 실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광복 이후에 독도를 자국(自國) 영토가 아니란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법령 자료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지난해 12월 청와대에 보고한 1951년 6월 6일 공포된 ‘총리 부령(府令) 24호’와 1951년 2월 13일 공포된 ‘대장성령(大藏省令) 4호’ 등 두 개의 일본 법령이었지만, 이번 자료는 이보다도 5년 앞선 것이다. ‘총리 부령 24호’는 일본이 옛 조선총독부의 소유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장성령 4호’는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를 위한 부속 도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 등을 일본의 섬에서 제외했다.

박선영 의원은 “이 자료는 일본 정부가 패전 직후에 영토의 서쪽 경계로 독도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법령 자료”라며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런 법령·역사적 자료를 발굴하고 활용해서 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독도 전문가인 귀화 일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이 패전 이후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제외시킨 최초의 법령 자료로 보인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은 연합국과의 종전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회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이후부터는 태평양 전쟁 패배에 따라 반환해야 할 영토목록에서 독도를 삭제했는데, 그 시점 이후에도 독도를 자국영토에서 제외한 일본 정부 법령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했다.


홍영림 기자

"독도 원래 일본땅 아니다" 일본자료 쏟아져

2009.11.07 20:11 | ♣ 우리역사 바로보기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45324 주소복사


독도 원래 일본땅 아니다, 일본자료

한민족이라면 꼭 알아야 할 '홍산문화,요하문명'

2009.11.06 13:51 | ♣ 우리역사 바로보기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45319 주소복사


알아야 '홍산문화,요하문명'



KBS 역사스페셜[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요하문명 1
http://www.youtube.com/watch?v=Cn6FmBbW_Kk

요하문명 2 http://www.youtube.com/watch?v=8AWIZfyJGq0

요하문명 3 http://www.youtube.com/watch?v=Sr0ML3aaRCQ

요하문명 4 http://www.youtube.com/watch?v=yHaxnEdHodk

요하문명 5 http://www.youtube.com/watch?v=va-V4OuPpX8

요하문명 6 http://www.youtube.com/watch?v=7Y-1ZdFEoA8

요하문명 7 http://www.youtube.com/watch?v=_ep8FkbhoMw

요하문명 8 http://www.youtube.com/watch?v=wBpf9ZoILx0

역사스페셜 사이트 바로가기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04536_30885.html



MBC 위대한유산 74434 깨어나라 고구려의 후예들이여 편
"요하문명론"


http://www.youtube.com/watch?v=p3IMURNaECw



STB 역사특강 다시보기

http://www.stb.co.kr/program/review/115/


14회 일본고대사는 한(韓)민족의 이주사다 (김철수 박사)
13회 일본 고대 신화와 한민족 (김철수 박사)
12회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동이 (김선주 박사)
11회 우리는 왜 동이를 알아야 하는가? (김선주 박사)
10회 발해연안문명이 한국고대문화의 원류다 (이형구 교수편)
9회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 돌무덤과 동이민족 2부 (이형구 교수편)
8회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 돌무덤과 동이민족 1부 (이형구 교수편)
7회 홍산문화의 유적과 유물 (이형구 교수편)
6회 발해연안 문명의 빗살무늬 토기와 옥문화 (이형구 교수편)
5회 발해연안 문명은 고대 동방문화의 중심 (이형구 교수편)
4회 민족사의 맥을 이은 삼국 (박성수 박사 편)
3회 동방의 등불 코리아 (박성수 박사 편)
2회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 민족문화 (박성수 박사 편)
1회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 민족 의식이란 무엇인가? (박성수 박사 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 유네스코에서 발표

2009.07.15 16:20 | ♣ 우리역사 바로보기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45111 주소복사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미국인 여성 사학자에게 대한 헌사로 보인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고,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코벨의 한국문화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2권의 제목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이름도 낯선 서양 사학자를 뒤늦게 재조명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일고대사,한국미술,불교,도자기 등에 대한 1400여편의 칼럼을 썼고,‘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책을 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코벨만큼 정력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한 서양 학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코벨의 존재가 진정 빛나는 것은 연구의 양이 아니라 그 질 때문이다. 그녀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바로 한일 고대사 분야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되려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눈치채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국미술사에 집중되었고,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내는데 매진하게 된다.

코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대담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코벨이라는 이름은 얼마 지나서 잊혀지고 만다.

죽은 코벨을 되살려낸 편역자는 김유경(59)씨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1980년대 초반 문화부 기자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후에 코벨을 다시 기억해낸 이유가 뭘까? 김씨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 학자라는 객관적 위치,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 형식 등 코벨의 미덕이다. 김씨가 코벨의 글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 출간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에서 신라 불교까지’(학고재)는 그 첫 결과물이었다.

이번 책은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다.

코벨은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 학자들을 동원한다. 미국의 그리피스,페놀로사,게리 레저드 등이 코벨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고,일본인 학자 중에도 에가미 나미오,기다 사다기지 등이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다.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최태영의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어준다.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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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를 일본것으로 기만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 미국학자 존 카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 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 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 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 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이다.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존카터 코벨이 말하는 일본의 뿌리는 한국

보천교 차경석의 손자 차길진 법사이야기

2009.07.12 20:15 | ♣ 우리역사 바로보기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45105 주소복사


보천교 차경석 손자 차길진 법사



차치구장군의 아들은 일제시대 시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자즉위식을 거행하고 독립자금의 대부부을 보낸 보천교 교주로
..........
그의 아들 차일혁 장군은 빨치산 토벌의 영웅으로 원한 맺힌
인민군 귀신에게 ..........
그의 아들은 원신해원의 프로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다.

이처럼 신은 있습니다.
신의 최고통치신은 증산상제님입니다.


匿名의 C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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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능력자로 다시 태어나다
海公 선생 急逝의 의문

 

차길진 영혼수첩 - 축제 DNA『당신은 이번에 국회의원이 될 것이고, 의원이 되면 초선의원답지 않게 요란법석하게 활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잘 되고 의원으로서의 생명력도 길어진다』

이 얘기의 주인공은 朴智元(박지원) 청와대 정책수석비서관이다. 在美 사업가 시절, 朴수석은 미국에서 한 점술가로부터 그의 「정치적 운명」을 들었다. 이 말대로 朴수석은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처음 금배지를 달았으나 다음 총선에서 낙선했다. 朴수석은 시사주간지 週刊朝鮮과의 인터뷰(1998년 1월22일자)에서 자신의 정치역정을 예언한 점술가가 「C법사」라고 밝혔다.

영문 이니셜 「C법사」라는 익명은 5·16 쿠데타에 가담한 백태하 장군의 회고록 「반역자의 고백」에도 나온다. 백태하 장군은 5·16 쿠데타 당시 張都暎(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권총으로 위협, 쿠데타를 지지하게끔 만든 주인공이며,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시절에는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경향신문사를 접수한 사람이다.

백태하 장군은 1996년에 출간된 「반역자의 고백」 서문에서 『내가 감히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던 용기를 가진 것은 C법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C법사님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을 상당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기아자동차 사태 직전인 1997년에 출간된 기아그룹 金善弘(김선홍) 회장의 자서전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의 서문에도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았다. 그 知人(지인)의 힘을 빌어 이 책을 발간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지인도 익명의 「C법사」로 거론되었다. 만화가 송창국씨가 1996년에 펴낸 「YS 나라 바로 세우기」란 책에도 『이 책을 기획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C법사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이 기록돼 있다.

도대체 C법사가 누구이기에 그의 익명이 회자되고 있는가.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

지난 8월3일 새벽,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위치한 소극장 「혜화동 1번지」. 극단 후암에서 기획한 영혼 연극 「救命施食(구명시식)」이 끝난 뒤, 배우들은 무대 해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극단 대표 차현석씨, 기획자 김한상씨, 배우 최승준·김태호씨 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연극 장면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살피던 기획자 김한상씨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김지나씨 다리가 하나밖에 안 나왔네』

순간, 극장 안에는 냉기가 흘렀다. 차현석 대표와 배우들이 사진을 확인해 보니 놀랄 일이 발생했다. 연극 「救命施食」에서 신부 역을 맡았던 배우 김지나(21)씨의 다리가 사진에 하나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 속 그녀가 입고 있는 치마도 연극에서 입었던 치마보다 세 뼘이나 길었다.

이 사진 외에 총 80장의 사진 중 예닐곱 장에서 누가 봐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靈駕(영가·영혼)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작지만 윤곽이 또렷하고 창백했다. 다음 날 아침, 차현석 대표는 사진을 찍은 연상민(25·사진 촬영기사)씨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으나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연극 「救命施食」은 厚岩精舍(후암정사) 會主(회주)인 車吉辰(차길진·54) 법사가 자신이 행하고 있는 招魂(초혼·죽은 사람의 혼을 부름) 의식의 실례들을 연극으로 再구성한 작품이다. 이 연극의 대본은 귀신을 부를 줄 알고, 귀신과 대화가 가능한 靈(영) 능력자로 알려진 車吉辰 법사가 직접 썼다. 앞에 언급한 익명의 C법사가 다름아닌 車법사다.

車법사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산 자와의 恨(한)의 고리를 풀어 주는 救命施食을 14년째 해오고 있다. 救命施食은 본래 불가에서 靈駕를 薦度(천도·영혼으로 하여금 정토나 천계에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법식)하기 위해 올리던 救病施食(구병시식)에서 유래한 것인데, 車법사가 「病」자 대신 목숨 「命」자를 넣어 「목숨을 구한다」는 뜻의 救命施食으로 바꾸었다.

연극 「救命施食」에서는 車법사로부터 救命施食을 받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초대되었다. 입장권에 位牌(위패)를 디자인한 靈駕 초대장을 만들어 관객들 스스로 자신이 초대하고 싶은 靈駕들의 이름을 쓰게 했는데, 이 때문에 「초대받은」 靈駕들이 연극에 출연하는 해프닝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들은 공연 도중 괴이한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고 말했다. 「외다리 사진」의 주인공 김지나씨는 『사진에 나온 한 쪽 다리 역시 내 다리가 아니다. 연극 도중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냉기를 느꼈다』며 몸을 떨었다. 車법사 역을 맡은 배우 김태호씨는 공연 기간 내내 밤마다 가위눌림에 시달리며 출연한 모든 靈駕들을 꿈속에서 만났다고 했다. 어떤 배우는 공연 내내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달려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벽뿐이었다고 말했다.

이 괴이한 사진들에 대해 사진 전문가들은 『조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사진들은 지난 8월7일 스포츠조선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여름 극장가에 엽기적인 「귀신 소동」을 일으킨 車吉辰 법사는 누구인가.

첫 만남

필자는 東亞日報 편집국장을 지낸 朴權相(박권상) 現 KBS 사장 자택에서 車법사를 처음 만났다. 朴사장의 伯氏이며 전라북도 언론계에서 이름을 날린 朴龍相(박용상) 선생과 車법사 선친인 故(고) 車一赫(차일혁) 총경이 막역한 친구여서 두 집안은 世交(세교)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車一赫 총경은 6·25 전쟁 휴전 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설치된 서남전투사령부 2연대장 재직중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였던 남부군 총사령관 李鉉相(이현상)을 사살한 사람이다.

필자는 朴權相 사장의 소개로 車법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新東亞와 女性東亞에서 5년 간 기자생활을 했던 필자는 국내의 수많은 기인과 도사, 술객들을 취재할 기회를 가졌는데, 세계적인 靈능력자라는 車법사의 첫 인상은 지극히 수더분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그를 만나면서 그 깊이와 폭이 가늠하기 힘든 妙(묘)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영혼을 불러내는 靈능력가인가 하면, 미래를 예시하는 예언가로, 때로는 벤처사업을 하는 사업가로, 또 「애정산맥」을 비롯한 수많은 소설의 작가로 다양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광고, 언론, 멀티미디어 등의 분야를 강의하고 있는 지금의 필자에게 있어서 車법사는 취재원이자 영원한 관찰 대상이었다.

車법사를 잘 아는 조선일보 논설주간 柳根一(류근일)씨는 『車법사를 靈능력자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우수한 논픽션 작가이면서 동시에 소설가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평했다.

車법사는 문단에 정식 데뷔한 작가다. 그는 선친 車一赫 총경이 지리산 빨치산 토벌 시절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록한 「陣中기록」과 「작전일지」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이란 책을 써, 1989년 월간중앙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었다.

多作

그 이후 그는 끊임없는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과 빨치산 여인 신정하와의 이념을 넘나드는 사랑을 현대사의 비극 속에 그려낸 「애정산맥」을 중편소설로 발표했고, 救命施食과 靈的 체험을 소설로 쓴 최초의 영혼세계 안내서 격인 「영혼의 목소리」와 「영혼의 X파일」, 「영혼은 비자가 없다」는 책은 영혼세계를 불신하는 선입관에 경종을 울렸다.

「救命施食」 경험자들이 겪은 놀라운 영혼의 기적을 담은 책 「영혼을 다스리는 마흔 아홉 가지 이야기」, 각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었던 「영혼을 팔아먹는 남자 이야기」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 중 1994년에 출간된 「한 마리 까치 되어」라는 책은 7만 부 이상이나 팔렸고, 영혼세계에 대한 깊은 체험을 바탕으로 쓴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신문연재도 저서만큼이나 많다. 1991년 월간 「직장인」에 「車박사의 석세스 프로모터」를 연재, 직장인들에게 삶의 재미와 지혜를 안겨 주었고, 1991년 3월에는 토요신문에 6·25 전후 빨치산 전투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 「미완의 약속」을 발표했다. 前生(전생)에 관해 사회적 관심이 대단했던 1998년에는 스포츠서울에 「쇼킹 前生의 X-파일」을 연재, 스타들의 前生을 밝히기도 했다. 1999년에는 일간스포츠에 「靈媒(영매)의 고백」이라는 코너를 담당, 평범하게 살아가고픈 靈媒의 고뇌를 흥미롭게 털어 놓았고, 올해 초부터는 스포츠조선에 「고스트버스터 車吉辰의 영혼 이야기」를 인기리에 연재중이다.

『저 사람은 오래 못 산다』

1998년 6월 초, 서울 용산의 캐피탈 호텔 한식당에서 필자의 주선으로 車吉辰 법사와 풍수지리가 孫錫佑(손석우)옹, 그리고 某 고위 경찰 간부가 자리를 함께 했다.

[차길진의 영호수첩] 진실게임上通天文(상통천문)한다는 車법사와 下達地理(하달지리)한다는 孫도사의 만남은 우주와 철학을 논하는 선문답식 高談峻論(고담준론)으로 시종일관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래된 道伴(도반)을 만난 것처럼 談論(담론)이 풍성했다. 이날 자리가 끝날 무렵 필자는 孫옹에게 이런 제의를 했다.


『오는 6월20일 오후 3시 지리산 화엄사에서 車법사의 선친 車一赫 총경을 위한 공적비 제막식이 열립니다. 車一赫 총경은 6·25 전쟁 때 빨치산의 온상이라는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지만 문짝만 불태워 국보인 화엄사 각황전을 보존시킨 분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한 제막식에 같이 가면 어떻겠습니까』

孫옹은 『마침 화엄사에 가고 싶었다』며 『내가 그 자리에 꼭 참석하겠습니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車법사가 느닷없이 『아마 가지 못할 겁니다』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며칠 뒤 車법사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두고 보십시오, 저분은 살 날이 별로 안 남았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6월20일 화엄사에 도착하니 孫옹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무렵 갑자기 쓰러져 두 달 뒤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화엄사에서 열린 故 車一赫 총경 공적비 제막식에는 宋月珠(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공적비의 비문은 詩人 고은이 썼다.

필자가 전남 나주의 동신대학교에 재직할 때, 지방 여행중이던 車법사가 들렀다. 車법사와 함께 학교 근처 경원유원지 부근의 음식점에 갔다가 항상 비치돼 있는 화투가 있어 車법사의 신통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화투를 뒤집어 놓고 맞춰 보라고 했다. 세로가 아닌 가로로 화투를 섞은 車법사는 화투장을 한 장씩 뽑아내면서 무슨 패인지를 모두 알아 맞췄다.

미심쩍어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동행한 여교수의 속옷(?) 색깔까지 정확하게 말해 여교수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靈 능력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면서 다시는 자신을 시험하는 장난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와의 시간은 이처럼 흥미진진하다. 작게는 화투장 놀이부터 크게는 인류의 미래까지 들려 주며, 사람을 편하게 해줌과 동시에 끊임없이 샘솟는 지혜를 안겨 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겪어온 험난한 세월들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유년 시절

車吉辰 법사는 1947년 전주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특이한 아이였다고 돌아가신 그의 모친은 필자에게 술회했다. 만 세 살 때, 6·25가 발발하면서 어린 吉辰은 갑자기 실어증에 걸렸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남쪽으로 피란민이 몰려오던 무렵, 吉辰은 어머니 팔을 끌고 전투가 치열한 북쪽으로 가자고 했다. 逆피란이었다. 당시 그의 부친 車一赫은 육군 7사단 소속 대위로서 소백산에서 전투중이었다.

그 도중에 생긴 일화 하나. 피란 길에 水原 근교의 民家에서 잠을 청하던 중, 어린 吉辰이 옥수수가 먹고 싶다며 어머니를 졸라 근처 옥수수 밭으로 나갔다. 먹을 만한 걸 구하려고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民家(민가)로 돌아왔더니 이게 웬일인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民家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母子가 옥수수를 따러 나간 사이에 民家에 폭탄이 떨어져 그곳에 묵고 있던 피란민들이 몰살당했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한쪽 팔 부상으로 軍에서 제대하고 18전투경찰 대대 대대장(경감)으로 특채되어 전북 任實(임실) 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때 吉辰은 동네 아이들과 숨박꼭질하다 방공호 안에서 남녀노소가 뒤섞인 한 무리의 영혼들을 보게 된다. 이 말은 들은 그의 부친은 방공호에 얽힌 사연을 수소문해 보았다.

문제의 방공호는 6·25 전쟁 초기 북한군 치하에 있을 때, 軍警(군경) 가족과 우익 성향의 양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아들의 부탁을 받은 부친은 죽은 영혼들을 위한 천도제를 올려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任實 경찰서장으로 재임하던 車一赫 경감은 「抗美(항미) 연대 연대장」격인 외팔이 빨치산 李相允(이상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총경으로 진급, 서남지구 제2연대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영혼을 보기 시작한 후, 吉辰은 큰 비극을 겪게 된다. 1958년,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밤마다 아버지가 물 속에 잠기는 영상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경찰서장 관사 마당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靈駕가 무언가 말하고자 했던 애처로운 눈길도 잊혀지지 않았다 한다. 그러다, 기어코 사건이 터졌다.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吉辰은 公州(공주) 경찰서장이던 부친을 따라 금강으로 물놀이를 갔다. 엉덩이에 큰 종기가 났던 그는 왠지 가기 싫었지만 어른들 손에 끌려 따라갔다고 한다.

이날 금강에서 수영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곧이어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공주경찰서 직원과 소방대원들이 동원돼 실종된 車一赫 서장을 찾았지만 옷조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울다 지친 吉辰은 잠시 꿈을 꾸게 된다. 물 속에서 가라앉은 탱크를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탱크 있는 데 아버지가 계세요!』

수소문해 본 결과, 현장에서 2㎞ 떨어진 곰나루 부근에 渡江(도강)하다 가라앉은 북한군 탱크가 있었는데 차갑게 식은 車一赫 총경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吉辰은 아버지의 시신을 대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시신의 다섯 군데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반가운 사람이 오면 터진다는 피였다. 吉辰은 죽은 아버지의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죽다니 억울하구나. 통일만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알류강(압록강)에 있겠다』

「시한부 인생」 선고받다

吉辰의 유년 시절은 충격적인 아버지의 죽음 등 아픈 추억으로 남았다. 그 뒤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와 지내는 한동안 영혼과의 어떤 접촉도 없었다.

吉辰이 덕수중학교 1학년 재학중 4·19가 터졌다. 그는 시위현장에서 또 한 번의 靈的 체험을 갖는다. 소방차 위에서 『타도! 이승만』을 외치던 선배가 바로 옆을 지나던 전동차용 고압선에 감전돼 그대로 추락사하는 장면과 함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서울 경신고 2학년 재학중에는 옆집 대문에 弔燈(조등)이 걸려 있는 幻影(환영)이 보였고, 그 다음날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옆집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吉辰이가 차돌을 쥐면 차돌에 손자국이 깊이 패고, 화가 나면 吉辰이 차고 있던 시계가 갑자기 멈춰 버리는 이상한 사건들이 잇따라 터졌다.

[차길진 영혼산책] (60) 왕의 남자가 흘린 눈물고등학교 3학년이 된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동국대 경찰학과를 지망할 것인지,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다 동국대 경찰학과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이내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준비해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한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원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68년, 그는 건국대 야간 법경대학에 응시해 전체 차석으로 입학하고, 당시 서울 을지로3가 한일은행 빌딩에 있던 경부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취직했다. 도로공사의 前身(전신)이었던 이곳에서 그의 靈 능력이 시도때도 없이 일어났다. 함께 일하던 총무과 직원 某씨가 곧 감옥에 가게 될 인데, 얼마 후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했고, 사무소 관리과장이 소개해 준 어떤 부인에게는 남편의 승진 사실과 승진 날짜를 알려 주었다. 그가 예언한 날에 그 사람은 공병감으로 승진했다.

이 일이 소문나자 청소부 아줌마에서부터 사무소 全직원의 부탁이 줄을 이었다. 밀려드는 면담 요청에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 법학연구실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중 그는 심한 독감에 걸려 괴로워하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결핵성 관절염에 폐결핵으로 폐 한쪽이 모두 썩은 상태입니다. 젊은 나이에 유감입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시한부 판정」이었다.

대학시절엔 미팅에서 만난 여자 파트너의 속옷 색깔을 맞춰 퇴짜도 맞고, 등록금 때문에 걱정하던 친구에게 시험문제를 찍어 줘 장학금까지 받게 해줬던 그였지만, 폐결핵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상, 그는 세 발자국만 걸어도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임종을 앞둔 「말기 폐병 환자」였다.

내일이 불투명한 그는 투병을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났다. 발길이 머문 곳은 충남 공주의 마곡사. 그는 마곡사 부근의 토굴에서 기침을 할 때마다 각혈을 하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필사적인 투병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前生에 불(火)로 운명한 아버지와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참선을 하는 前生의 자신을 본 이후,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대화할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6개월여의 목숨을 건 수도생활 끝에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후 그는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며 자신을 숨기고 여기저기 떠돌며 온갖 궂은 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부산까지 내려갔다. 1969년이었다. 그는 부산역 광장 근처 목욕탕에 때밀이로 취직했다. 1971년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그는 때밀이 생활을 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목욕탕집 안주인의 죽은 남편은 남로당 경남지부 문화부장으로 있다가 총살당했다. 금년 7월 車법사는 부산에 내려가 목욕탕집 안주인을 위해 팔순 잔치를 베풀어 보은했다.

시시때때로 발휘되는 靈능력을 애써 숨기며 열심히 때를 밀었던 그는 그를 알아보는 동창들이 목욕탕에 찾아오자 때밀이 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그 뒤 車법사는 평범하게 살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고 부산에 정착했다.

그러나 車법사는 자신이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밤마다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빨치산 靈駕들, 선친과 인연을 맺은 靈駕들의 울부짖음에 괴로워하며 이들의 영혼을 달래야 하는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문을 거듭했다. 그는 집안 살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의 사찰과 암자를 돌아다니며 불법에 정진했고, 주변에 초상이 나면 殮襲(염습·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 정부는 故 車一赫 총경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하고 공덕비를 세우라며 유가족에게 300만원을 전달했다. 車법사는 이 돈을 지리산 부근의 9개 사찰에 보내 빨치산 薦度(천도)를 위해 佛事를 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를 마친 정보부는 車법사가 朴대통령의 만수무강을 위해 佛事를 했다고 보고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具滋春(구자춘) 서울특별시장 시절에 국가 유공자에게 주는 용달차 면허 허가를 받아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귀신은 공짜밥을 먹지 않는다」는 말을 車법사 스스로 실감한 셈이 되었다.

1979년 10월17일, 維新(유신) 기념파티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앙정보부의 고위 간부가 『朴正熙 대통령과 저녁을 하기로 했다』며 자랑했다. 그런데,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한 청년이 『朴正熙 대통령은 10월26일 이후에 밥숟가락을 들지 못하니, 댁에서 저녁 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고 핀잔을 줬다. 고위 간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하면서도 평소 버릇대로 수첩에 그 말을 메모했다.

「車모 법사, 10월26일 이후 朴대통령 밥숟가락을 못 들게 될 것이라 언동」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朴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면서 수첩의 메모가 문제가 되었다. 『암살이 사전에 계획된 것 아니냐』는 수사관들의 집요한 추궁에 車법사는 곤욕을 치렀지만 神力(신력)의 도움이 있었던지 무관함이 증명되었고 「車씨 성을 가진 예언가」 얘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그 직후 車법사는 몸을 숨기고 칩거하면서 그를 찾는 정계 인사들의 측근에게 「국가 중대사」에 대해 「암시」를 던져 주며 영계와 통하는 堂上卜者(당상복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靈능력자로 다시 태어나다

자신의 靈능력을 「종교」로 발화시키고자 결심한 車법사는 조계종 포교사가 되어 법당을 설립한다. 최초 법당이 서울 남산의 후암동 가정집에 설립한 「厚岩精舍(후암정사)」다. 이 집은 日帝 때 경무국 국장의 관사였고, 그 뒤 영화배우 김지미씨와 前 법무부 장관 李모씨가 살았다. 평소 車법사를 존경하던 사람이 이 집을 사서 마음놓고 쓸 수 있게끔 빌려 준 것이었다.

땅의 기운이 대단해 법당으로 쓰기에 適地(적지)였던 이 집에서도 해프닝이 있었다. 법당을 차린 직후의 어느 날, 쏟아지는 폭우로 집에 빗방울이 새기 시작했는데 법당에 모셔 놓은 부처님 상 뒤에서 『어서 오십시오』라는 일본 여성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두리번거리는 車법사 앞에 백색 기모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천하 절색인 이 모녀 靈駕는 車법사에게 『부디 저희들의 恨을 풀어주세요』라고 절하고는 사라졌다 한다.

이 靈駕는 일제시대 경무국장의 아내와 딸로 그 집에서 전염병으로 숨졌는데, 수 십 년이 지나도록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車법사는 집주인과 함께 연탄 아궁이가 있던 지하실에 팥죽을 떠놓고 靈駕들을 위로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집주인은 某 자동차 회사의 서울총판권을 따내 벼락부자가 되었다 한다.

이런 類(유)의 입소문이 퍼져 그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車법사는 혼자 공부하고 정진할 장소가 필요해 서울 잠실로 厚岩精舍를 옮겼다. 이곳은 마라난타(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했다는 인도의 승려)가 최초로 불법을 전파시킨 자리로 알려져 있으며, 근처 백제고분은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한다.

법당을 옮긴 뒤, 그는 특정한 날에만 법당 문을 열었다. 厚岩精舍가 문을 여는 날은 救命施食과 車법사와의 면담이 있는 날 뿐이다. 잠실로 이사한 뒤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車법사는 미국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1990년 미국 뉴저지에 정착한 그는 교포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라디오 1480」이라는 在美교포 라디오 방송국 설립에 나섰다. 그 당시 뉴욕에는 FM 라디오가 잘 나오지 않았고 나온다 해도 대부분이 미국 현지 라디오 방송으로 교포사회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에 車법사가 『在美교포만의 라디오 방송국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교포사회의 파워가 약해 설립 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라디오 1480」이라는 在美교포 라디오 채널이 탄생했다. 동아방송 출신 김병오씨와 고려대학교 출신의 여걸이었던 김혜련씨의 합작품이었다.

「라디오 1480」을 운영하던 시절, 車법사는 방송의 위력을 십분 활용, 마피아와 담판 승부를 지었다. 뉴욕 사회에서 在美교포가 성공하는 지름길은 델리 가게나 슈퍼마켓 경영이었다. 이 경영에서 가장 이윤이 많은 장사가 꽃 장사인데, 불행히도 꽃시장 독점권을 마피아 조직이 쥐고 있었다.

車법사는 이를 지켜볼 수 없어 마피아를 향한 기상천외의 테러를 구상한다.
『동부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리는 애틀랜틱 시티의 카지노를 대부분 마피아가 소유했는데, 主고객이 우리 한국인이었습니다』
이 점에 착안, 그는 「라디오 1480」을 통해서 카지노 출입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덕분에 애틀랜틱 시티의 카지노에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겨 마피아의 수입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마피아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그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카지노에 출입하지 말라는 권고 방송을 중단하는 대신, 마이애미 직판장과 꽃을 직거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교포 분들이 카지노에 가지 않아 마피아들은 적자를 보고 말았습니다』

1991년 9월4일자 주간지 토요신문에는 前 주한 미군사령관 고문 제임스 H. 하우스만 최초 인터뷰란 기사가 실렸다. 하우스만은 35년 간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군 총참모장의 특별고문, 美 육군성 한국담당관, 주한 美8군사령관 특별고문 등을 역임한 한국 정보통이다. 인터뷰어는 토요신문 비상임 편집위원이었던 車법사였다. 입 안 열기로 소문난 고집불통 미국 노인을 설득해 특종 인터뷰를 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하우스만은 대한민국 건국에서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의 성격을 이렇게 분석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한 분이며, 朴正熙 대통령은 즉흥적인 성격이라 껄끄러운 사이였고, 全斗煥 대통령은 우회할 줄 모르는 정통 군인이며, 盧泰愚 대통령은 德이 있는 사람이라 평가했다. 車법사는 하우스만을 이렇게 평가했다.

『하우스만은 아주 치밀한 인물이다. 장시간의 인터뷰 중, 한국어에 능통하면서도 영어를 구사했고 한국에 익숙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한국적 습관을 드러내지 않았다』

車법사는 1996년 봄, 햇수로 6년 만에 서울 성파구 잠실의 후암정사로 돌아왔다.

차길진 영혼수첩 - 축제 DNA救命施食

1998년 10월30일 밤 11시15분, MBC TV는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車吉辰의 영혼탐험」을 방영키로 예고했다. 救命施食 사례들을 취재한 이 프로그램은 그러나 방송이 되지 않았고, 그 한 달 뒤에 「車吉辰의 영혼탐험」 일부분만 방송되었다. 이 방송도 본래 50분 분량이었으나 대량 삭제당한 뒤 15분짜리 에피소드 중심으로 방송되었다. 장장 7시간 동안 救命施食 장면을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카메라에 화면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10년 경력의 카메라맨은 『이런 일은 처음이다』고 말했다.

삭제당한 내용은 救命施食 후 살아난 뇌사자의 증언과 우리나라 연극계의 중진인 밀양연극촌 대표 李潤澤(이윤택)씨의 前生 체험담 등이다.


MBC 측은 『救命施食은 과학적인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부득이 방송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일간지를 통해 해명했다. 車법사는 『한국은 영혼세계에 대해 상당히 닫혀 있지만 언젠가는 영혼세계가 증명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救命施食은 車법사의 특허품이다. 목숨을 구한다는 救命施食은 한밤중에 이뤄진다. 불이 꺼지면 鬼哭聲(귀곡성·귀신의 울음소리)에 맞춰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춤과 곡조마다 절절한 恨이 배어 있는 巫歌(무가)가 참관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車법사의 짧은 법문이 끝나고, 한 차례 영혼의 마음을 풀었다 죄고 나면, 그날 오는 靈駕들을 招魂하는 순서가 기다린다. 이 순서에서는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가 연출돼 책을 내도 끝이 없을 만큼 구구절절하고 기가 막힌 사연들이 넘쳐난다. 조선대 의대 전홍준 교수는 『구명시식은 훌륭한 종합예술이다』고 평했다.

필자는 1980년 광주사태와 관련해 해직되고 투옥되었다. 이 일로 필자의 어머니는 心火病(심화병)을 얻어 뚜렷한 병세도 없이 쉰네 살에 돌아갔다. 어머님을 천도하기 위해 필자도 車법사로부터 구명시식을 받았다.

필자는 車법사를 통해 어머니와 영혼 대화를 하고 나서 半信半疑(반신반의)하던 영혼의 문제에 대해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귀신을 불러내 대화한다는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는 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海公 선생 急逝의 의문

산 자와 죽은 자가 交通(교통)하는 救命施食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현장이다. 까닭에 車법사는 역사 속에서 의문사 당한 한국의 위인들을 救命施食에 초청, 그들의 恨을 달래 주곤 했다. 대통령 당선을 눈앞에 두고 急逝(급서)한 海公 申翼熙(신익희) 선생 靈駕를 부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 홍차를 즐겼다. 당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자리를 잡았을 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홍차를 한 잔 마셨을 뿐이다. 그런데, 마시고 난 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죽은 것이다』

海公 선생 靈駕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海公 선생은 걸물답게 자신이 암살당한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원망하거나 저주를 내리는 언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헌국회 의원이었던 趙漢栢(조한백)씨는 海公의 죽음에 대해 『홍차를 마신 뒤, 병원으로 가기 전 사망했다. 심장마비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車법사는 4·19 직후 발생한 李起鵬(이기붕) 부통령 일가족 자살 사건에 대해서도 『그들처럼 묘한 죽음은 없습니다』며 死因(사인)에 의문을 제기했다. 李起鵬 일가의 구명시식에 나타난 李起鵬 靈駕는 車법사에게 『강석이가 죽인 게 아니라, 외부인에 의한 일가족 몰살사건이다』고 주장했다 한다.

4·19 당시 1군 부사령관이었던 민기식 장군은 『이기붕 일가족 자살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심증만으로는 부족하나 절대로 이기붕씨가 자결할 생각으로 아들에게 총을 쏘게 할 인물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법무관으로 현장을 지켜본 李宅敦(이택돈) 前 국회의원 역시 車법사에게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이라는 심증이 간다』고 증언했다.

車법사가 靈駕로 만나본 이기붕씨는 상당히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감리교 신자라 자살할 분이 아닌 듯했다고 말한다. 車법사는 더 이상의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진실은 죽은 자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救命施食에는 섬뜩한 엽기괴담도 있지만, 훈훈한 미담도 많다. 지난 1월호 某 월간지에는 車법사가 주관한 救命施食에서 효험을 본 「경주 최 부잣집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3代도 힘들다는 부자를 12代까지 잇게 한 경주 최 부잣집에는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家訓(가훈)을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가훈은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 것,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말 것.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가훈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집의 장남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열 번이나 사법고시에 낙방한 것이다. 그 어머니가 찾아간 사람이 車법사였다. 車법사는 돌아가신 최씨집 증조부께서 손자가 판사되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이는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車법사는 救命施食에서 증조부를 설득,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가훈을 어기지 않겠다 맹세하고 검사가 아닌 변호사로 활동하겠다 약조한다. 이듬해, 손자는 열한번째 도전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니 救命施食의 영험함을 직접 체험하고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한다.

車법사는 救命施食의 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地藏經(지장경) 제7품에 「죽은 자를 위해 제를 베풀면 죽은 자는 그 은공의 7분의 1을 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 자가 7분의 6을 갖는다는 말이나, 엄밀히 따지면 죽은 자는 100% 중 단 1%만 가져가고 나머지 99%는 산 자의 차지입니다. 救命施食은 죽은 자를 위한 천도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천도의식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孝가 중요합니다. 조상에게 잘하면 내게도 복이 오니까요』

그래서일까. 그는 유달리 돌아가신 아버지 車一赫 총경과 어머니 진복희 여사에게 최선을 다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행했던 이벤트는 모두 부모님을 위한 효도였다. 車법사는 후암정사 법당에 나란히 모셔놓은 부모님 영전에 매일 기도한다. 두 분은 車吉辰 법사에게 있어서는 부모님임과 동시에 그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다. 강력한 아버지 靈駕가 있었기에 그동안 숱한 靈駕들의 공격에 버텨낼 수 있었고, 어머니의 무서운 모성애로 救命施食에서 「한 생각」도 놓지 않고 매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중 예언을 쏟아내는 車법사는 『예언은 틀려야 한다』는 아이러니컬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예언을 쉽게 던지지 않는다. 자신은 셀 수 없을 정도의 크고 작은 예언들을 적중시켰지만, 불행한 예언들은 맞지 않았으면 한단다. 그런 그에게 現정국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물어 보았다.

한국의 미래는 밝다

─한국의 미래는 어떤 모습입니까.

『2024년에 한국은 최고의 브레인을 보유한 국가가 됩니다. 全세계에 유학중인 한국 人材들이 우리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21세기 한국은 몽골과 하나가 되어 全 세계에 國運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중국령이 된 내몽골을 뺀 현재의 몽골은 반도체를 만드는 희귀한 광석이 무진장 매장된 지하 자원국으로 국토는 한반도의 일곱 배이지만 인구는 200여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全 세계 구리 매장량의 70%를 차지하는 자원 부국 몽골과 「넘치는 인구와 기술대국」인 한국이 손을 잡아 몽골리언 벨트를 구축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아주 밝습니다』

─요즘 정국은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과연 밝은 미래가 보장될지 걱정입니다.

『한국은 다소의 시차는 있지만 20년 주기로 큰 변혁이 반복돼 왔습니다. 1900년대 들어 조선 왕조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해 그 20년 뒤인 1919년 3·1 운동으로 일본은 문화정치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실질적인 의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1940년에 일본이 中日전쟁을 벌였고, 이듬해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1945년 광복이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 그 누구도 일본이 전쟁에 지리라고는 생각을 안 해 이광수·최남선 같은 민족지도자들도 훼절해 창씨개명에 앞장설 정도로 광복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지요.

李承晩 정권이 1960년 4·19로 붕괴되고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국가적 변혁이 이뤄졌습니다. 그 20년 뒤 영원할 것 같던 朴正熙 정권도 1979년 10·26으로 막을 내리고 1980년 5·17로 全斗煥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2000년대 초가 바로 이 20년 주기에 해당합니다. 조만간 1980년대 초보다 더 강력한 변화가 와서 혁신을 이룰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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