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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관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

2007.02.02 01:16 | ♣ 내가 선택한 길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36370 주소복사

교회관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


오랜 시간을 망설인 끝에, 아무래도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에 다시 자판을 두드린다. 다만, 이야기를 하지 않고 피하고 싶었던 마음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배경설명을 해야만 이해가 쉬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약 15년 전의 호주 사회에는 많은 한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있었다. 그저 호주가 좋아서 무작정 체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경제사범으로 몰려서 피해온 사람들도 많았었다.

그들 모두가 남들이 힘들어 하는 분야에서 땀을 흘리고, 혹시라도 호주 정부에서 불법체류자들을 구제해 주는 정책이 시행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슴졸이며 생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들은 대부분 영어에 자신이 없었기에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공장소인 교회에 몰리게 마련이었다.

어떤 교회는 교인들의 절반 정도가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어서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곤 했었고, 혹시라도 이민성에서 불심검문이 있을까를 항상 염려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당시에는 중국의 천안문 사태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있었지만, 유독 불법체류자들 중에서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이민성의 불심검문에 걸려서 Villawood 수용소에서 조사를 받고 한국으로 추방되곤 하였다.

그런데,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아시겠는가? 이민성 관리의 말에 의하면 자기들은 인원이 워낙 적기 때문에, 반드시 고발이 들어와야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고발이 들어오면 반드시 서류상으로 처리결과를 남겨야 하기에 철저하게 조사하는데, 그들로서는 도저히 한국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호주는 다민족 국가이다. 무려 150개국의 인종이 뒤섞여 살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통은 민족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그 분쟁의 여파로 상대방의 신분을 고발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아무래도 불법체류자들이 많은 민족이 걸려들게 마련이란다. 물론 당시에 가장 많은 불법체류자는 중국인들이었다.

서로들 자기 민족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상대방 민족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고 이민성 관리가 귀띔을 해주었는데, 유독 한국인 불법체류자를 고발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바로 한국인들이 고발한다면서 이상한 민족이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나중에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알아보니까, 한국인 고용주가 동포들의 신분을 악용하여 일을 시키고 차일피일 임금을 미루다가 그 금액이 많아지면 고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얼마나 잘 살겠다고~??

여기서 잠시 중국인들 얘기를 해야겠다. 이민성 관리의 얘기를 들어보면 유독 중국인들은 절대로 자기민족을 고발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현상이었기에 이곳에 소개할까 한다.

세계 곳곳에 워낙 많은 중국인들이 퍼져있으니, 호주 사회에서도 중국인들끼리의 분쟁으로하여 초창기에는 고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소문이 있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고, 급기야 누가 고발했는지 알아내어 재발방지 차원에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의했단다.

절대로 고발자를 알려줄 수 없다는 이민성 관리에게 거금을 주고 고발자를 알게 되었는데, 시범케이스로 죽여야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미국으로부터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여 그 고발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고발자의 등에 '동포를 고발하면 이렇게 죽는다'는 글귀와 함께.

물론 그 일이 중국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서 그 이후로는 감히 동포를 고발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으면서, 왜 우리 한국인들은 동포끼리 으르렁거리는가가 못내 아쉬웠었다. 그것도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떼어먹기 위해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하늘을 무서워하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천벌을 받는다"는 말을 두려워 했던 민족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동족들을 밟고 올라서려는 친일파들의 만행으로 하늘의 천벌에 자꾸만 눈감게 되었으며, 6.25 동란을 통하여 더욱 철면피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천벌을 받는다"는 말이 대수롭지 않은 말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가 친일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리라. 원래 우리민족에게는 없었던 더러운 악행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에 의하여 우리네 착한 사람들 속에도 무의식 속에 들어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도 동족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

아무튼, 각각의 소수민족들은 자기 민족의 구제를 위하여 여러가지 형태로 탄원을 하기도 하고, 단체를 결성하여 자기민족의 역량을 키우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래야만 더불어 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이제 지난번(http://kr.blog.yahoo.com/xodmfwn9/34274)에 이어서 얘기를 계속해볼까 한다. 당시에 시드니 교민사회에는 컴퓨터 학원이 2개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필자가 운영하고 있었기에 컴퓨터 관련 문의가 많았었다.

바로 그 무렵에 한국에서도 교회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붐이 일었기에, 시드니에 있는 큰 교회에서도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보통 5~10명의 신도를 보유했던 교회도 많았지만, 1,000명 가까운 신도를 보유한 교회가 큰 교회에 속했던 것인데, 그 교회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분이 불쑥 찾아왔던 것이다.

말인즉, 교회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면서 말이다. 물론 필자로서야 돈을 버는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재정상태도 넉넉한 교회였기에 제법 구미가 당기는 요청 아니겠는가? 그래서 프로그램의 범위와 금액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실제의 장부를 보면서 얘기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에 장부를 들고 다시 찾아온 그 재정을 담당하는 분과 얘기를 하다가 엉뚱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 교회관리 프로그램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는 2가지 장부를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 2가지 장부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목사님과 저만 알고있는 장부가 따로 있거든요. 그 내용은 다른 분들에게는 알리면 안되거든요."
"???"
~~~
"아니~? 그럼, 2중장부가 있다는 말인가요?"
"예~ 이미 이 바닥에선 보편화 되었거든요. 그리고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러다가 말썽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관계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는 단 2사람만 알고 있거든요. 저하고 목사님하고."
"아니~? 언제부터 2중장부를 했는데요?"
"저야 임기가 2년이니까 현재 상태만 알고 있는데, 목사님만은 전부 아시지요."

말인즉, 교회의 2중장부는 보편화 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금액이 장부정리 되지 않은 채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알았다고 하고서 자세한 얘기는 장부를 들여다보고 나서 다시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당시에 필자는 낮에는 은행에 다니고, 밤에는 컴퓨터 학원을 운영하는 형편이었으며, 은행에서는 년간 $40,000 정도 받고 있었고, 나름대로는 중류 정도의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는데, 장부를 꼼꼼히 살피다가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회장이라는 사람이 겉으로는 년간 $100,000 정도의 금액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실제의 장부를 확인한 결과 무려 $300,000 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피아노 교습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뒷구멍으로 엄청난 돈을 쓰고 있었기에 말이다.

사람이 재력이 엄청나면 저절로 딴 짓을 하는 모양으로, 여자 신도들과 꽤 많은 금액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교회의 신도들 중에 불법체류자가 가장 많았으며, $30,000 정도면 불법체류자 신분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바로 그 불법체류자들이 헌금한 돈을 흥청망청 쓴 내역을 보면서 울화통이 치밀었으니 말이다.

그 재정담당이라는 분은 애꿏게도 필자로부터 화풀이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한국인들 불법체류자들이 많고, 당신네 교회에 가장 많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잘 알텐데, 목사 X이 쓰는 돈 10분의 1만 있으면 그 신도들 신분에 도움이 될텐데, 그렇게 많은 돈을 물쓰듯 하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안했느냐~!"고 질책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도 다른 큰 교회들로부터 교회관리 프로그램 관계로 여러번 문의가 왔었는데, 모두가 한결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분명 선량한 양의 모습인데, 속으로는 이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 어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말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처음의 그 당회장이라는 X은 그로부터 한 5년쯤 경과한 무렵에 남편이 있는 반반한 여신도와 밀월여행을 떠났다가 들통이 나서 결국 목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비리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필자는 잘 알고있다.

사실 교회를 비방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쓰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무척 망설였던 것인데, 선량한 목회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겉으로는 양의 모습인데 실제로는 이리라는 것이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바로 이 사건이 필자로 하여금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중대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다음에 계속)

♣ 꾸준히 성경공부를 하던 시절 ♣

2007.01.11 20:28 | ♣ 내가 선택한 길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34274 주소복사

♣ 꾸준히 성경공부를 하던 시절 ♣


그간 100일 정성수행을 하면서 글을 쓸 기회가 없었기에 오늘 다시 글을 시작하려니 어쩐지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본래 블로그를 만든 목적이 이러한 글을 쓰려는 의도였기에 무조건 다시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이다.

지난번 "백호주의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http://kr.blog.yahoo.com/xodmfwn9/8754)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하나님 사람이다"는 생각이 내 인생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도 컸었기에, 그 후로도 꾸준히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처럼 살고싶다'는 생각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컴퓨터에 성경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성경책의 모든 내용을 일일이 입력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내용이기에 틈틈이 시간을 내는 형편으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독수리타법으로 성격책의 모든 내용을 입력하여 그것을 마치던 날은 날아갈 듯이 기뻐했었다. 그러면서 느꼈던 사항은 왜 성경책의 군데군데 "(없음)"이라고 표시된 구절이 있는가? 과연 처음부터 없었는가? 아니면 중간에 지웠는가? 하는 점이었다.

어찌되었건 지금 현재는 사라진 내용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리라' 마음을 먹고는 본래 성경책을 컴퓨터에 입력한 취지를 이어가기로 작정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컴퓨터의 위력을 알고있는 나로서는, 내가 원하는 내용을 순식간에 찾아내 주는 기능과 아울러서 여러가지 통계수치등 성경을 연구하는데 절대적인 환경을 제공해 준다는데 있었으니 말이다.

점차적으로 입력된 컴퓨터 파일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필요한 단어들끼리 정리하기도 하는 작업을 통하여 성경 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말씀은 이해가 되었지만, 요한계시록 등의 예언서(豫言書)는 도저히 해석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했기에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기에 말이다.

그래서 일단 예언서는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만 나름대로 해석을 하면서 성경지식을 늘리기로 하였으며, 수십번을 완독하면서 점차로 예언서를 제외한 모든 성경말씀을 해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된 것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지 거의 30년이 되어서 였다.

예전에도 언급하였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를 알았으니(http://kr.blog.yahoo.com/xodmfwn9/6473) 그러한 자신감이 생기게 될 때까지 무척 많은 시간을 성경공부에 투자한 셈이었다.

어느날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예전에 함께 회사에 근무하던 후배로부터의 편지는 많은 감명을 주었는데, 그것은 기독교에 철저하게 반대입장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지독히도 배타적으로 저주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다.

그 후배는 교회에 다니던 Wife로부터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고 이혼한 후부터, 교회라면 머리를 흔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던 인물이었기에, 호주로 이민을 가기 직전에 여러가지 얘기를 해 주었는데, 사사건건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며 교회를 비난하던 그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불쑥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자기도 이제는 하나님을 믿으며 교회에 나가고 있는데 그 모두가 나때문에 마음을 돌리게 되었으며, 그것을 깨닫는데 거의 5년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가 자기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면서 불쑥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참고로 그 후배는 나에게 편지를 보낸 후로, 이미 상당한 지위도 있었기에 주변에서 극력 만류하는데도 거의 20년의 회사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신학대학에 다녔으며 졸업한 후 목회활동을 시작한지 벌써 10년인데, 설교할 때 가끔씩 내 얘기를 한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었던 당시에는 얼마나 뿌듯하던지..

하지만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예언서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높아만 갔고, 도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고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은 한국에 있을 무렵에 읽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책이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곳에 쓰여있는 무시무시한 얘기들은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정도로 표현되어 있었기에, 앞날에 우리 인류가 겪어야 할 엄청난 사건들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당시에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나름대로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날 불쑥 찾아온 사람으로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에 계속)

♣ 지독히도 지기 싫어하던 성격이었다. ♣

2006.10.13 10:16 | ♣ 내가 선택한 길 | 살리자

http://kr.blog.yahoo.com/xodmfwn9/25094 주소복사

♣ 지독히도 지기 싫어하던 성격이었다. ♣


내가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를 여러 독자들에게 설명하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막연하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개인적인 특성을 운운하는 것은 나중에 최종적으로 말하려는 한가지를 위해서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무척 중요하기에 굳이 치부를 드러내려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하더라도 과연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를 고심하다가 전반적으로 고루고루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오늘은 잡다한 얘기를 하려한다.

학창시절엔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도무지 내 의견이라고는 내세울 줄 몰랐던 수동형의 삶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누가 일을 시키면 그것을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중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라도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척 가난하였기에,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는, 길거리에서 아무리 사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단 한 차례도 군것질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한번 내 손에 용돈이 주어지면, 한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그것을 쓰지 않고 모았던 것이다.

내 전 생애에서 거의 예외란 없었다. 항상 그 자리에 동일한 모습으로 언제까지라도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어릴 때 가지고 있던 꿈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가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주 지독한 고집쟁이라고 할까?

따라서 내 생각이 틀렸다고 느끼기가 무척 힘든, 그러나 일단 방향을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사람이다. 변명이지만, 중학교때 영어를 '오랑캐말'이라고 규정짓고는 결국 전교에서 꼴등을 해도 어쩐지 영어 배우기가 무척 싫어서 꼴등의 수모를 묵묵히 견디며, 다른 모든 과목으로 영어 성적을 보충할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반면에 수학이나 과학계통은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예를든다면, 요 근래에 조카들이 입시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듣고, 고등학교 2학년 수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허~? 그간 한번도 수학책을 들여다 보지 않았는데~?' 따져보니 그간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내가 배울때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과목도 아니고 수학인데? 싶어서 선뜻 응했는데, 처음 며칠은 용어 등으로 해서 군데군데 막히는 부분이 있었지만, 곧 익숙해 졌으며, 무리없이 가르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40년 전의 미적분이, 그간 한번도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음에도, 아직도 어려운 학문이 아니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나 웬지 아시겠는가? 그것은 바로 임시방편으로 외우지 않고, 이해를 하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이해를 하여 알아진 사항이기에, 조금만 들여다보면 왜 그렇게 이해를 했는지가 40년의 시간을 넘어서 기억이 되살아 난다면 믿으시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반면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특성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지 남보다 잘하려는 것에서 벌어진 에피소드가 얼마든지 있었다.

바둑왕 이창호를 무척 좋아하지만, 내가 바둑을 배웠던 얘기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회사에 처음 입사하여 첫날, 점심시간의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간 학교공부에 바둑을 전혀 몰랐던 나는,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휴게실로 많은 동료들이 몰려들고, 죽~ 늘어선 바둑판을 보면서,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매일 남들이 두는 바둑에 정신을 팔았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몇달을 계속하여 뒤에서 구경을 한 결과가 엉뚱한 곳에서 의외의 형태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하루는 '강 1급'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회사의 바둑반을 맡은 선배가 "내가 그간 멸달을 죽 지켜 보았는데, 바둑반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펄쩍 뛸 소리를 거리낌없이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예~? 저는 바둑을 전혀 못두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바둑반을 맡아달라고 하였지, 바둑 두라고는 안하쟎아요~!"
"그래도 바둑을 둘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바둑반을 맡아요~?"
"그냥 시합이나 주관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면 되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선배님은 바둑을 잘 두니까 그렇겠지만, 전혀 모르는데 그게 가능 하겠습니까~?"
"내가 눈여겨보니까, 하루도 빠지지 않던데, 그 열정이면 충분해요~!"

이렇게 하여 본의아니게 바둑반을 맡았는데, 바둑을 두지 못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예 이 기회에 바둑을 배우면 될 것 같아서 그 선배를 다시 찾아가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바둑을 배우고 싶은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그냥 남들 두는 것 보고 배우세요~! 지금 업무가 바빠서 바둑반도 손을 놓았는데, 시간이 없네요~!"
"책을 보면 되나요? 추천해 줄 수 있는 책이라도 알려주세요~!"
"어떤 책이든지 비슷비슷해요. 아마 1년 정도면 9급은 될 수 있겠죠~!"

배우고는 싶은데, 바쁘다는데 어쩔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둑책을 보고 배우기로 결심하고, 그 날부터 바둑책과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보통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것을 걸어다니기로 하였으며, 출퇴근 시간에는 언제나 내 손에는 바둑책이 들려있었다. (사실 그러다가 차사고 위험이 여러번 있었다. 바둑책만 보고 걸어다녔으니 말이다.) 식사중에도, 화장실에서도 내 주변에는 항상 바둑책이 있었다.

그렇기에, 1년 후에는 내 스스로 3급이라고 남들에게 소개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1년 전에는 전혀 바둑을 모르던 사람임을 잘 아는 회사의 동료들이 내 급수가 엉터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두들 믿지 않기에, 정식으로 3급으로 시합에 출전하여 준우승을 하고 공식적으로 2급이 된 순간, 동료들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잊을 수 없다.

사실 회사의 바둑시합은 3개 부문으로 나누어 치루어졌으며, 7급 이하와 4급이하는 따로 시합을 치루었고, 3급 이상은 모든 실력자들이 망라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몰론 당일의 운도 있었겠지만, 회사의 실력자들이 너무나 쟁쟁했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 내가 바둑반을 이끌고 회사대항 시합에 나가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했었다. 1급만 약 40명이 되었는데, 그중에는 국내의 최고수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입사동기였던 친구는 당시 국내의 최고수인 서봉수와 같이 바둑을 배웠던 사람으로 지금은 입신의 경지인 프로9단으로 당시에 우리나라 아마추어 1인자였던 7단의 임선근과 시합하여 반집을 졌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쟁쟁한 실력자들이 7명이 있었다. 같은 1급끼리도 5점을 깔게 하는 고수급이었으니, 그 실력을 알만 하지 않겠는가? 그런 쟁쟁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야말로 햇병아리가 일을 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ㅎㅎ 그런데 그 후에 어찌 되었을까? 그만, 더 이상은 바둑에 흥미를 잃었다. 너무 쉽다고 느껴졌으며, 아니, 막상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바둑반을 다른사람에게 인계하고 바둑계를 떠났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가 내 급수를 물으면 2급이라고 말한다. 몇십년동안 바둑을 두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또 다른 얘기로 볼링도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나보다는 윗분으로 시간만 나면, 내 후배와 볼링 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던 과장님이 있었다. 당시에 국내에 처음으로 볼링이 보급되던 시절이었으며,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2사람이 볼링 재미에 흠뻑 빠져서 거의 매일 볼링장에 다니면서 실력을 배양하는 재미로 회사생활이 즐겁다고 희희낙락하던 2사람이었다.

워낙 초창기였던 관계로, 주변에는 볼링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에, 그들이 하는 얘기만 들어도 흥미가 있었을 무렵이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서있는 핀을 공으로 치는 일이 결코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끔씩 얘기에 끼어들곤 했었는데...

하루는 일과가 끝날 무렵에 제안이 왔다. 나도 이번 기회에 볼링을 같이 쳐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은 잘 치는 형편이었기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무료로 가르쳐 주겠다'는 꼬임에 빠져서 따라 나섰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냥 생각으로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쳐보니 첫 점수가 78인가? 아무튼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고, 2번째 게임에서는 100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다.

옆에서는 연신, "가르쳐 주는데도, 폼이 너무 엉망"이라는 핀잔이 이어졌으며, 그래서는 볼링을 배우기 힘든다는 둥, 가르쳐주어도 따라하지 못한다는 둥, 원래 운동신경이 없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은근히 부아를 돋우는 얘기로 기분이 상할 무렵에, 2 게임을 쳐보니 만만해 보였는지, "사실 배우려면, 돈을 들여서 배우는 것이다. 우리 시합을 하자~!"

"내 실력을 알면서 시합을 하자고 하느냐"는 항의는 아예 처음부터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처음에 나를 꼬실 때 이미 계획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야 볼링을 제대로 배운다는데 어찌하겠는가? 3명중 2명이 미리 계획했던 일이니, 내가 싫으면 그만 집에 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러다가는 윗사람에게 찍힌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동의를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헌데, 시합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성적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들도 처음에는 170, 160 정도를 치더니, 2번째에는 120, 140 정도의 실력인 것을 생각해서 내가 최소한 130 정도만 치면 술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꼴찌가 모두 내기로 하였으니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해보자~!!'

첫 프레임을 던지고나자, 또다시 내 폼에 대해서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가르쳐준 대로 치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입에서 다른 얘기가 나왔다. "지금 시합하는데, 계속 핀잔 줄꺼야? 일단 시합이니까 지금부터는 아무 말 말아라~!"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이 얘기하는 정 반대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그런 엉성한 폼으로 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들 눈에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킥킥거리고 웃느라고 즐거워들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시합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땟을 것 같은가? 한사람은 120 언저리, 다른 사람도 140 언저리를 쳤는데, 나는 154를 쳤던 것이다. 결국 내가 1등을 한 셈이다. 120 언저리로 꼴등을 하여 술값을 지불하게 된 동료가 약이 바짝 올랐다.

이번에는 안주내기를 하자고 몰아세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도 엉성하게 춤을 추는데, 그런 성적이 나오냐~?"고 하면서, 다시 시합하면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다면서 막무가네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시합을 했고, 이번에는 내가 2등을 했기에, 결국 볼링도 공짜로 치고, 술도 푸짐하게 대접을 받는 그야말로 즐거운 날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들이 타도해야 할 목표가 되었으며, 거의 매번 그들이 게임비를 지불하고, 술도 대접해 주는 나날이 이어졌다. 한달 쯤 후에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며칠동안 둘이서 연습을 하고 잘 맞는다 싶으면, 어김없이 시합을 제안하였으며, 그때마다 승률 9할 정도로 내가 우세했었기에, 6개월쯤 후에는 아예 치러가자는 제안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새롭게 발족한 회사의 볼링반 조차도 나는 출입금지를 당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1년쯤 후에, 제 1회 사내대항 볼링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때에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그간 열심히 연습들을 한 관계로 그들도 실력이 늘었으며, 그간 나는 전혀 볼링장에 들락거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여 제안이 왔다. "제 1회 대회이고, 우리들도 그간 실력이 엄청 늘었으니, 시합에 참가하여 우승을 해보라~!"

그야말로 예전 실력은 고사하고, 볼링공을 잡아본 기억도 가물가물 했었지만, 제 1회 시합이라는데 참가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예전의 기억을 되살릴 연습을 해보니, 워낙 독특한 예전의 그 엉성한 폼이 그대로 되살아나서 그런대로 시합을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두사람을 제외하곤, 모두들 처음 대면하는 얼굴들로 실력들이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그 두사람만 꺾는다면 무엇인가 좋은 성적을 거둘 것도 같았기에 미리 그들의 실력을 물어보았다. 두사람 모두 평균 180~190을 때린다고 자랑이었다. "허~? 그정도야? 그럼 힘들겠는걸?" 1년 전에 내 최고 성적이 180 언저리였던 것을 기억하고 한 말이다.

하지만(예전부터 그랬었지만), 일단 시합에만 들어가면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하기에, 믿는 구석도 있었다. 오직 정신력으로 한다면 내가 최고라는 생각 말이다. 급기야 1년동안 볼링공을 잡아보지 않은 것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에 나도 놀라고 만 것이다. 3게임 평균 194가 나왔으니 말이다. 바로 그 성적이 내 평생의 가장 좋은 성적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시합을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결국 제 1회 사내대항 볼링대회는 월등한 성적으로 내가 우승하면서 끝났다. 그리고는 "당신은 볼링반에서 영구 추방이야~! 다른 사람들이 당신하고 시합하면 다들 안하겠데~! 못하는 사람들끼리 그냥 1~2등 하게 제발 볼링장에는 나오지 마~!" 그리곤 이후에 바로 호주로 이민을 갔었기에 벌써 20년이 넘은 얘기이니 말이다.

그때 후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 실력이 어땠거나 나를 이길 수 없었던 이유로, 가장 어려운 스플릿인 7번핀과 10번핀을 잡은 사람을 평생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일이 있었던 날은 주변에서 볼링을 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들 박수를 쳐주고 놀라워 했었다. 아마 다시 해보라고 하여도 못할테지만, 유난히도 스페어를 잡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보통 핀을 10등분하여 내가 원하는 지점으로 때릴 수 있었는데, 그 날은 20등분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그대로 들어갔기에 가능했었으니 말이다. 볼이 레인을 타고 중간쯤 가는 도중인데, 본대로 들어가는 모양이 흡족하여 약간 큰 소리를 내었고, 뒤에서는 탄성이 들려왔기에 볼링장의 대부분이 스페어를 잡는 광경을 직접 목도하였으니 말이다.

그들 입에서 86 아시안 게임에서 볼링 국가대표로 뛰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아마도 내가 호주로 이민을 가지 않았다면, 그리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옆에서 스트라이크를 잡으면, 어김없이 나도 해내며, 더블이나 트리플을 잡아도 나는 항상 그들보다는 하나 이상 나았기에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민을 간 후에도 볼링을 칠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는 잔디밭에서 하는 것을 볼링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노인들의 게임이었고, 우리나라와 같은 볼링장은 시드니 전체로 단 3군데 밖에 없었기에 거의 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이 인생인 것처럼 말이다.

(다음에 계속...)

♣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 옳은 것인가? ♣

2006.09.13 18:35 | ♣ 내가 선택한 길 |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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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엇이 진정 옳은 것인가?


우여곡절 끝에 이민 심사관과의 영어 인터뷰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호주의 영주권을 받기는 했지만, 막상 호주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서툴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가도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을 옥죄었던 것이다.

내가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에는 못하는 영어지만, 상대방이 팔아야 하기 때문인지,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모르는 단어에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의사소통을 위하여 상대방이 적극적이었기에, 그럭저럭 대화가 가능했으나, 내가 아쉬운 입장이어서 상대방에게 설명을 해야할 형편이 되면, 여간 고통스러운게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영어학교에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바로 취직을 하려 했던 계획을 중단하고 영어를 다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살던 Burwood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인 불법이민자 수용소 근처에 Lightonfield(라이톤필드)라는 곳까지 영어를 배우러 다녔었다.

처음에는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였으나, 길이 멀고, 한국에서처럼 기차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어서, 상당히 불편을 느끼다가 차를 구입하여 운전한 후에는 시간도 단축되고 여러가지로 잇점이 많았다. 하지만 비교적 먼 거리에 있었기에 비록 초보 운전이었지만, 곧 운전에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한국에서와 다른 특이한 점도 발견 하였는데, 아침 출근 시간에는 특히 여성 운전자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신호대기 시간이면 많은 여성들이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였다. "에이~ 화장은 집에서 하고 나오지~?"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그것도 자주 보게되니 일종의 문화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뭔 여자들이 하나같이 다들 예쁜거야~??"

맥주를 너무 좋아한다는 영국 출신의 영어선생은 마치 올챙이와 흡사한 배를 뒤룩거리며, 뛰는 것은 고사하고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40대 후반의 독신 남성이었지만, 열성적으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는 열성파였다. 매일 직접 교재를 써서 그것을 복사하여 나눠주곤 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었을 듯 싶은 사람들로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란, 이라크, 레바논 등지의 서구형 사람들과 동양인으로는 대부분, 우리나라, 일본, 중국, 베트남, 스리랑카 인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난생 처음으로 다양한 인종을 만난 셈이다.

첫날 나를 영어학교에 안내해준 같은 회사에 다녔던 선배가 잠시 쉬는 시간에 "여기 와 보니까, 북한사람이 있데~!! 한번 만나볼테야?" 당시만 해도, 북한사람을 만나는 것은 얼핏 간첩을 연상하던 교육 탓에 먼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한국이 아니라 호주인데 어떠냐는 다그침을 듣고서야 살짝 호기심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만나보기 전까지는 비슷한 나이라는 것이 한가닥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북한 사람이 호주엘 올 수 있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한 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냥 만나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억센 북한 사투리에 간혹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섞여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친밀감 있게 북한말을 쓰던 그 친구는 사라예보에서 이에리사를 만났었고, 현역을 은퇴한 후로는 북한의 탁구코치를 맡았으며, 외화벌이에 동원되어 이집트에서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던 중, 영국에 유학중이던 남한 여인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유학을 마치고 영국에서 이집트를 거쳐서 귀국하려던 남한의 여인과 쇼핑센터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되고, 두사람이 서로 첫눈에 반하여 정치보위부원의 눈을 피해서 데이트를 즐겼으며, 급기야는 그리이스로 잠적할 결심을 해서 실행하는데 걸린 시간이 전부 합하여 3일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리이스로만 피신하면 마음놓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리이스에서 움쩍달싹 못하고 6개월을 숨어 지내면서 제 3국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잡힐 것이라는 불안감에 호주로 정치적인 망명을 신청하였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북한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호주 영주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얼마나 이에리사의 쾌거에 기분이 좋았었던지, 그 친구가 이에리사를 잘 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벌써 친구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같았으니 영어학교를 다니는 동안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친구에게 누를 끼칠것을 우려하여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야~ 넌 참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어떻게 북한에서 호주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데~?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를 한 셈이네~!! 아마 앞으로도 북한 사람은 호주에 올 수 없을테니까, 네가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꺼다~!! 이젠 마누라 따라서 남한에도 가끔씩 다녀오고~ 그러면 네 인생은 완전히 펴진거네~!!"

"너~ 그간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니~!! 이젠 그 힘들었던 순간을 잊어라~!! 그야말로 마음 편히 살게 되었으니 한번 멋지게 살아봐라~!! 너는 탁구를 잘한다니까, 여기서도 국가대표 애들이나 가르치고 하면 살 걱정은 없겠네~!! 너 참, 잘 되었구나~!! 정말 잘 되었다. 우리 계속 친구하자~!!"

내가 그 친구에게 하고싶었던 말은 대충 위에 적은 그런 말들이었다. 외화벌이로 외국에 나가기 위해선 지옥훈련을 거쳐야만 한다는 얘기를 듣고 고생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하였기에, 북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한국에서 들었던 내용을 상기하며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어긋났던 것이다. "야~ 내가 미쳤나~? 남조선엘 왜 가는데? 난 안간다~!!" 로 부터 시작하여, 도무지 내가 예전에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시각을 얘기하는데,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정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걸까?'

자주 만나서 여러가지 얘기를 하는 동안, 그 친구가 주장하는 얘기가 전혀 터무니 없는 내용은 아니라는 사실과, 우리가 일방적으로 받았던 교육에도 많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아~!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어느 한쪽만의 얘기였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무슨 생각을 할지 전혀 짐작을 못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지식을 신봉하고 있었구나~!"

여기서 굳이 그 친구가 주장했던 내용을 나열하고 여러분들에게 검증을 받고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내가 북한출신이 아니기에,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많은 사항에 대하여 도외시하고 있었던 탓에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에 무방비 상태였다는 것만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본업인 프로그램을 다루면서도 여지없이 부각되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으며,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도 자기가 알고있는 사실만이 옳고, 그와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은 무조건 틀렸다는 자세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싶다.

다음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얘기와는 다른 사항이지만, 연관이 되기에 적어본다. 그것은 내 본업인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워낙 각 부서에서 프로그램 요청이 많았던 터라, 긴급을 요하는 사항이면 거의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머릿속에서 시스템을 설계하고 대충의 프로그램 윤곽을 잡은 후에 바로 프로그램을 짰던 경험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스템 설계를 마치고, 프로그램 스펙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의 일주일 이내에 개별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다. 때문에 각각의 프로그램 스펙이 형성되면 개별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후의 과정을 일일이 여기서 설명해야 하지만, 얘기하고자 하는 골자는 프로그램 스펙과 개별 프로그램의 완성과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주에서 내가 처음 받아본 프로그램 스펙은 놀랍게도 1년 전의 프로그램 스펙이었다. 그런데, 내용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스펙을 만든 사람에게 문의를 했더니, 1년 전의 일이라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한국에서라면 모두 사표를 써야 할것이다. 호주에서는 도무지 일을 하지 않는구나~!!"하고 호주의 업무 방식을 비웃었던 것이다.

무조건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프로그램 스펙을 만드는 지를 알고 싶어졌으며, 뻔히 눈에 보이는 경우의 수를 가지고도 이리저리 생각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저러한 모습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비슷한 일이 주어졌을 때, 본때를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는데,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바람 나게 일처리를 하고 완성된 시스템을 상부에 보고하고는 뿌듯한 느낌을 가지려 했는데, 다음날, 시스템이 약간 이상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확인한 결과, 아주 간단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관계로 이상한 결과를 내는 시스템이 되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얼른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작업을 마치고는, "내가 비록 실수를 했어도, 너희들이 걸렸던 시간보다 훨씬 빨리 끝냈쟎아~!!" 하면서 자위를 했었다.

오랜 세간이 흘러서, 그럭저럭 다른사람의 시스템도 완성이 되었으며, 아직도 우쭐한 기분에 거들먹거리던 나에게 어느날 연락이 왔다. 오래전에 내가 완성한 시스템에 아주 이상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며, 자칫 회사에 큰 불이익이 올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일선에서 프로그램을 직접 사용하는 부서에서 우연하게도 여러가지 잘못된 자료를 입력하다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 어떤 멍청이가 그런 이상한 자료를 넣는단 말인가? 이건 처음부터 사용자를 멍청이로 취급하고 시스템을 설계하라는 말인데~??"하고 반발심이 먼저 일었었다.

그런데, 상사로부터 "자네는 내가 뻔한 일에도 망설이고 쉽사리 프로그램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굼뜨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나는 그런 갖가지 경우의 수를 미리 발견하기 위해서 무척 심혈을 기울이기에 그런 것이라네~!! 자네도 실력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내가 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따라해야만 이 회사에서 인정을 받을 것이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리고나서 곰곰히 생각하니,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에서는 비록 오래 걸리기는 하였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거의 수정이 필요없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단지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지레 그들이 실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그것은, 실제로는 내가 실력이 모자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까 처음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한 1년쯤 지난 후에, 그 친구는 아내의 임신으로 처갓집 식구들과 인사를 해야했던 관계로 억지로 한국엘 다녀왔다고 했다. 그래서 대뜸 물었다. "어때~? 자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지?" 내 딴에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그런데, 뭐라 답했는지 짐작하시겠는가~??

"내 다시는 남쪽에 안간다. 마누라한테도 그리 말했다. 처갓집하고 인연 끊고 살으라고 말이다. 모두들 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하니~!!~~~" "허~!?? 그랬는가~??" 뚜껑을 열고보니, 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알고있는 것만이 옳다는 생각으로는 천국은 요원하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과연 어디에서 천국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을 찾기 위한 나의 여정은 계속된다.

♣ 백호주의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 ♣

2006.06.12 14:36 | ♣ 내가 선택한 길 |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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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주의를 넘어 미지의 세계로... ♣


 

회사에 처음 입사하여 환경에 적응하기 까지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첫번째가 영어에 대한 것이다. 영어 덕분에 어렵사리 취직을 했지만, 일단 취직을 했기에 영어와는 담을 쌓아도 된다던 생각이 출근 첫날부터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 회사에서 전산부에 전공이 각각 다른 여러분들을 뽑은 이유는 회사가 여러분들에게 컴퓨터는 가르칠 수 있으나, 각자의 전공을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각각의 전공에 따라서 해당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향후 6개월 동안 공부만 해야 합니다."면서 컴퓨터 관련 영어 원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컴퓨터가 초창기였기에 관련서적은 무조건 영어로 쓰여져 있었고, 대학에서도 컴퓨터 관련 학과는 고사하고 주변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오직 영어책과의 씨름을 통하여야만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으니, 고생문이 훤히 열려 있었던 셈이다. 덕분에 회사에서 영어책을 보다가 졸기를 밥먹듯이 하면서 컴퓨터 기술을 습득하곤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익숙하여졌고, 베테랑이 되면서는 시간도 많이 남는 형편이었고 더군다나 취침시간을 2시간으로 줄인 후부터는 (참조: http://kr.blog.yahoo.com/xodmfwn9/6710.html?p=1&pm=l&tc=10&tt=1150089268) 여유시간을 활용할 생각으로 영어공부는 물론 성경책과 노스트라담스의 '대예언'이라는 책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결혼을 하여 딸만 둘을 두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차로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으며, 아들이 없다는 것이 커다란 핸디캡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던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인 종족보전이라는 임무를 완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다 덜컥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예언서들을 통하여 불안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에, 때마침 백호주의로 악명높던 호주에서 컴퓨터 경력 10년 정도면 충분히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아내가 전해 주었다. 처음에는 영어를 하지 못하니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그곳이야말로 전쟁의 위험은 없어 보였으며, 환경이 바뀌면 더 이상의 자녀를 갖기를 거부했던 아내가 아들을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민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영어를 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영주권 심사시에 영어로 인터뷰를 한다는 소식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영어에 대한 무기력증을 다시금 유발시켰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일단은 나 자신에 대한 소개를 영어로 표현만 한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각종의 이민 관련 서적들을 종합하여, 나와 관련하여 영어로 모범 질문지를 만들고, 모범 답안지를 만들어서 무조건 외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인터뷰 날짜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마조마함의 극치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영주권을 심사하는 심사관이 무엇을 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는지,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영주권은 받았지만, 더욱 어려운 관문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4대독자가 되었으며, 여동생들이 모두 출가하였기에 처음에는 무조건 반대를 고집하셨으나, 한국에서보다는 그런 곳으로 가서 빨리 잘 살아 보겠다는 끈질긴 설득으로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당시에는 하루 2시간의 수면이면 충분했기에,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호주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한다면 한국에서 어렵게 이루어야 할 성공을 빠른 시간안에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 한번 멋지게 해보는거다~"


다니던 회사에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자, 주변의 모두가 놀라워 했다. 내가 영어를 거의 못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걱정들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알려지자, 때마침 나보다 조금 먼저 호주로 출발한다는 지방에 근무하던 사람과 첫 대면을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주의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 마중을 나와 주었으며, 나를 위해서 아파트를 얻어 두었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니 말이다.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딸은 아직 '엄마, 아빠'도 말하지 못할 때였지만,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하기만 한 호주에서의 첫날.. 아니나 다를까 옆집에 기거하는 할머니의 고함소리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How are you today?'라는 인삿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today 라는 말만 들어왔기에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시겠지만, 호주에서는 그것을 '투다이'라고 발음한다. 앞말은 들리지 않고, 투다이 'to die' 즉 '죽으러 왔니?' 정도로 알아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발음과 관련된 일을 수없이 당하고 나서야, 차츰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호주에서 컴퓨터 인력이 많이 부족할 때였기에, 다행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금융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으며, 바로 그때로부터 '철인'의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던 기인의 행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의 지칠줄을 모르고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서 빨리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는 꺾일 줄을 몰랐었다.


하루의 일과는 새벽 3시에 기상하면서 시작되었다. 집에서 약 40키로 정도 떨어진 호텔 겸 술집의 청소를 4시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호텔의 청소는 음식물 찌꺼기를 치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비위가 약했기에 코를 막고 치워도 어느 틈에 구역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아침 7시경이 되면 작업이 끝나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회사에 지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각부터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하버브릿지의 통행량이 많아져서 자칫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면 영락없이 지각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땀을 식히고 싶어도 차안에서 식힐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면 대부분 8시 정도가 되곤 했으며, 바로 양복으로 갈아입고 손가방을 들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시내 중심가에는 차를 가지고 출근할 수 없었기에 기차를 이용하곤 했으니 말이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군에서 제대를 한 후부터는 지금까지도 아침식사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회사 출근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회사에 도착하면 9시 10분전~ 9시경이 되었다.


일과가 시작되고, 컴퓨터 프로그램과 씨름을 하다보면 어느새 오후 5시. 보통 오후 3시경부터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트타임이거나, 가장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먼저 퇴근하고, 4시경에는 다음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나는 5시에 땡!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었으며, 7~8시까지 남는 사람들은 중역에 해당하고, 사장만은 꼭 9시 이후에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나서 회사 문을 잠그고 퇴근한다.


한국에서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었기에, 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이 5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사무실 청소에 시간에 맞추어 도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복을 입고 땀을 흘릴 수 없으니, 옷을 갈아입으려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며, 마땅한 교통편이 없었기에 항상 걸어다녀야 했으며, 대략 30분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사무실 청소는 보통 9시가 되어서야 끝마칠 수 있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기차를 타면 밤 10시경에 집에서 가까운 기차역에 도착되며, 집에 오자마자 씻고 밥을 먹으면 11시가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영어에 대한 부담때문에 그때부터 1시간 정도 TV를 보면서 영화나 연속극을 보아야만 했으며, 성경책을 30분 정도 보다가 30분의 기도시간은 도저히 빼먹을 수 없는 일과였다.


자칫 기도를 빼먹기라도 하면, 다음날 어김없이 회사에서 졸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회사와 사무실 청소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만 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텔 청소는 1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기에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은 변경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바쁜 생활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나중에 회사의 동료들이 그런 생활을 전해 듣고는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당시에 호주에서 철인이라 부르는 "Iron Man(아이언맨)' 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활에서도 아프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기도의 덕분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기도를 빼먹은 다음날은 반드시 불상사가 일어나곤 했으니 말이다. 내 스스로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는 신념으로 살았기에 말이다.


나는 지금도 의사와는 전혀 친하지 않다. 의사를 찾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민간지 5년쯤 경과하여 다른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때 심사관이 '가족담당 주치의' 이름을 물었는데, 나는 그런 것을 모르고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니, 오히려 그 친구가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어 보았다. '너희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어봐라. 그러면 병원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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