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처음 입사하여 환경에 적응하기 까지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첫번째가 영어에 대한 것이다. 영어 덕분에 어렵사리 취직을 했지만, 일단 취직을 했기에 영어와는 담을 쌓아도 된다던 생각이 출근 첫날부터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 회사에서 전산부에 전공이 각각 다른 여러분들을 뽑은 이유는 회사가 여러분들에게 컴퓨터는 가르칠 수 있으나, 각자의 전공을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각각의 전공에 따라서 해당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향후 6개월 동안 공부만 해야 합니다."면서 컴퓨터 관련 영어 원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컴퓨터가 초창기였기에 관련서적은 무조건 영어로 쓰여져 있었고, 대학에서도 컴퓨터 관련 학과는 고사하고 주변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오직 영어책과의 씨름을 통하여야만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으니, 고생문이 훤히 열려 있었던 셈이다. 덕분에 회사에서 영어책을 보다가 졸기를 밥먹듯이 하면서 컴퓨터 기술을 습득하곤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익숙하여졌고, 베테랑이 되면서는 시간도 많이 남는 형편이었고 더군다나 취침시간을 2시간으로 줄인 후부터는 (참조: http://kr.blog.yahoo.com/xodmfwn9/6710.html?p=1&pm=l&tc=10&tt=1150089268) 여유시간을 활용할 생각으로 영어공부는 물론 성경책과 노스트라담스의 '대예언'이라는 책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결혼을 하여 딸만 둘을 두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차로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으며, 아들이 없다는 것이 커다란 핸디캡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던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인 종족보전이라는 임무를 완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다 덜컥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예언서들을 통하여 불안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에, 때마침 백호주의로 악명높던 호주에서 컴퓨터 경력 10년 정도면 충분히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아내가 전해 주었다. 처음에는 영어를 하지 못하니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그곳이야말로 전쟁의 위험은 없어 보였으며, 환경이 바뀌면 더 이상의 자녀를 갖기를 거부했던 아내가 아들을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민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영어를 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영주권 심사시에 영어로 인터뷰를 한다는 소식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영어에 대한 무기력증을 다시금 유발시켰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일단은 나 자신에 대한 소개를 영어로 표현만 한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각종의 이민 관련 서적들을 종합하여, 나와 관련하여 영어로 모범 질문지를 만들고, 모범 답안지를 만들어서 무조건 외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인터뷰 날짜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마조마함의 극치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영주권을 심사하는 심사관이 무엇을 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는지,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영주권은 받았지만, 더욱 어려운 관문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4대독자가 되었으며, 여동생들이 모두 출가하였기에 처음에는 무조건 반대를 고집하셨으나, 한국에서보다는 그런 곳으로 가서 빨리 잘 살아 보겠다는 끈질긴 설득으로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당시에는 하루 2시간의 수면이면 충분했기에,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호주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한다면 한국에서 어렵게 이루어야 할 성공을 빠른 시간안에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 한번 멋지게 해보는거다~"
다니던 회사에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자, 주변의 모두가 놀라워 했다. 내가 영어를 거의 못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걱정들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알려지자, 때마침 나보다 조금 먼저 호주로 출발한다는 지방에 근무하던 사람과 첫 대면을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주의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 마중을 나와 주었으며, 나를 위해서 아파트를 얻어 두었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니 말이다.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딸은 아직 '엄마, 아빠'도 말하지 못할 때였지만,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하기만 한 호주에서의 첫날.. 아니나 다를까 옆집에 기거하는 할머니의 고함소리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How are you today?'라는 인삿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today 라는 말만 들어왔기에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시겠지만, 호주에서는 그것을 '투다이'라고 발음한다. 앞말은 들리지 않고, 투다이 'to die' 즉 '죽으러 왔니?' 정도로 알아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발음과 관련된 일을 수없이 당하고 나서야, 차츰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호주에서 컴퓨터 인력이 많이 부족할 때였기에, 다행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금융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으며, 바로 그때로부터 '철인'의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던 기인의 행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거의 지칠줄을 모르고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서 빨리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는 꺾일 줄을 몰랐었다.
하루의 일과는 새벽 3시에 기상하면서 시작되었다. 집에서 약 40키로 정도 떨어진 호텔 겸 술집의 청소를 4시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호텔의 청소는 음식물 찌꺼기를 치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비위가 약했기에 코를 막고 치워도 어느 틈에 구역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아침 7시경이 되면 작업이 끝나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회사에 지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 시각부터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하버브릿지의 통행량이 많아져서 자칫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면 영락없이 지각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땀을 식히고 싶어도 차안에서 식힐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면 대부분 8시 정도가 되곤 했으며, 바로 양복으로 갈아입고 손가방을 들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시내 중심가에는 차를 가지고 출근할 수 없었기에 기차를 이용하곤 했으니 말이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군에서 제대를 한 후부터는 지금까지도 아침식사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회사 출근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회사에 도착하면 9시 10분전~ 9시경이 되었다.
일과가 시작되고, 컴퓨터 프로그램과 씨름을 하다보면 어느새 오후 5시. 보통 오후 3시경부터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트타임이거나, 가장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먼저 퇴근하고, 4시경에는 다음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나는 5시에 땡!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었으며, 7~8시까지 남는 사람들은 중역에 해당하고, 사장만은 꼭 9시 이후에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나서 회사 문을 잠그고 퇴근한다.
한국에서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었기에, 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이 5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사무실 청소에 시간에 맞추어 도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복을 입고 땀을 흘릴 수 없으니, 옷을 갈아입으려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며, 마땅한 교통편이 없었기에 항상 걸어다녀야 했으며, 대략 30분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사무실 청소는 보통 9시가 되어서야 끝마칠 수 있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기차를 타면 밤 10시경에 집에서 가까운 기차역에 도착되며, 집에 오자마자 씻고 밥을 먹으면 11시가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영어에 대한 부담때문에 그때부터 1시간 정도 TV를 보면서 영화나 연속극을 보아야만 했으며, 성경책을 30분 정도 보다가 30분의 기도시간은 도저히 빼먹을 수 없는 일과였다.
자칫 기도를 빼먹기라도 하면, 다음날 어김없이 회사에서 졸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회사와 사무실 청소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만 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텔 청소는 1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기에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은 변경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바쁜 생활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나중에 회사의 동료들이 그런 생활을 전해 듣고는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당시에 호주에서 철인이라 부르는 "Iron Man(아이언맨)' 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활에서도 아프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기도의 덕분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기도를 빼먹은 다음날은 반드시 불상사가 일어나곤 했으니 말이다. 내 스스로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는 신념으로 살았기에 말이다.
나는 지금도 의사와는 전혀 친하지 않다. 의사를 찾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민간지 5년쯤 경과하여 다른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때 심사관이 '가족담당 주치의' 이름을 물었는데, 나는 그런 것을 모르고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니, 오히려 그 친구가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어 보았다. '너희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어봐라. 그러면 병원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