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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에 대한 단상과 어린 시절
오래 전에 작고 하셨지만, 나의 아버님은 대한민국 경찰 1기생이셨다. 일제의 침략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절에 만주로 가셨다가 온몸에 동상이 심하게 걸리셔서 돌아오신 후로는 자나깨나 나라 걱정이셨다.
몸이 어느 정도 추스려지자, 대한민국 경찰에 투신하셨고, 자랑스럽게도 제 1기생이셨다. 나는 그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태극기가 집안의 가보 역할을 하였으니 말이다.
특히 붓글씨를 잘 쓰셔서, 내가 아주 어릴적에는 아버님 존함이 한석봉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다. 평생의 소원이 붓글씨 전시회를 갖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끝내 이루지 못하시고 작고 하시고 말았다.
아버님께서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동란이 터졌고, 근무지역의 특성상 지리산 지역의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오랫동안 활동하셨으며, 휴전 성립 후에는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어머님께서 지금도 아쉬워 하는 것은, 억울하게 빨치산으로 몰리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돈상자를 받아본 경험이 많으셨다고 한다. 보통 사과상자를 받으면 그것이 모두 돈이었다니...
하지만, 단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초창기의 결심이 있으셨기에, 그것을 일일이 돌려주신 것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의 사연을 일일이 듣고는 대부분 그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처리하시면서도 청렴을 강조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기에, 그때의 일들이 못내 아쉽게 느껴지시는 것이리라. 나 역시 어릴때에는 아버님에 대한 원망도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일이기에, 어머님이 느끼시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짐작 하시겠지만 나는 6.25 동란중에 태어났다. 그리고 아마도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라, 아이들의 지능은 꽤 발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지방의 도청소재지였지만, 국민학교는 가장 좋다는 곳엘 다녔었다.
물론 전교 1~2등을 도맡아 하던 나는 시골에서의 생활도 잠시, 서울로 이사를 온 후로 전혀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반에서 66등. 서울에서 처음으로 받아본 성적표는 너무 참담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는 한반에 100명이 넘었으며, 남자아이들만 7개 반이 있었으며, 여자 아이들이 5개 반이었고, 암튼 엄청난 경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기에 당시에 제일 좋다는 경기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반에서 30등 이내에 들어야 했다.
보통 전교에서 140명 전후로 경기중학교에 합격했던 것으로 기억되니, 그렇게 학생들이 많았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나의 학교생활은 아주 치열했으며, 그곳에서 '산수박사'의 칭호를 들었으니 내 머리도 꽤 좋은 편에 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학시험에서는 1개를 틀렸으니.. 중학교에서도 나는 가장 머리가 좋은 아이중에 하나였다. 150이 넘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성적은 엉망이었다. 영어를 '오랑캐 언어'라고 규정짓고 등한시했기에 전교 꼴등을 하였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도 영어는 항상 나에게 있어서 발목을 붙잡는 걸림돌이었다. 수학은 전교 일등인데, 영어는 꼴등. 그야말로 극과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영어가 이제는 쉽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것도 하나의 그냥 언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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