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이없는 영화의 장르를 무어라 정의내릴수 있을까. 컬트 로맨틱 조폭 가족 코미디? 그러니까 온갖 잡다한 장르 영화들의 클리쉐를 '무늬만' 가져다 차용한 이 영화는 간만에 만나는 B급, 아니 C급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안드로메다에서 착륙했던 분위기의 <천사몽>을 계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랄까.
사실 기본 구조만 놓고보면 꽤나 전통적이다. 물론 <못말리는 결혼>이 벌써 김수미 카드를 들고 100만 관객을 훌쩍 넘는 의외의 성공을 보여줬지만 이질적인 두 집안의 결합이란 구조는 온지구 관객들에게 먹히는 소재다. 거기다 한국적인 '종가집'이란 설정은 장년층에게는 더 친숙하게 다가설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플롯은 온데간데없고, 에피소드의 나열은 애국가 시청률 드라마 보다도 못하고, 철없는 조폭 개그가 남발하며, 주인공들의 행봉은 당췌 매력도, 동기도 없다. 감정에 앞서는 음악은 지금은 울어야, 웃어야 할 시간이란 걸 친절하게 혹은 난폭하게 질러대는 수준이고, 카메라 앵글은 클로즈업을 남발도 모자라 이게 촬영을 한 건지 그냥 들이댄거지 모를 습작 수준이다.
아, 주얼리의 박정아? <박수칠때 떠나라>에서 일정정도 연기를 보여줬던 그녀지만 영화가 산으로 가는데 자신이 '개념' 영화로 만들 재주야 만무하지 않으랴. 게다가 이제 나이도 꽤 되는데, <궁>에서의 윤은혜 연기를 따라잡으려니 보통 당혹스러울수가 없다. 보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사람이나. 뭐, 소속사에서 민 영화라지만 감독이 여배우에게 그리 애정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건 분장이나 카메라 앵글이나 조명에서 모두 여배우를 예쁘게 만드는 능력이 전무하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하지만 이 고난의 110분을 참다 보면 느껴지는 바가 있으니, 그냥 닥치고 의식을 저 우주에 내려다 놓으라는 거. 종가집 앞에서 조폭들과 주민들과의 전투가 벌어질 때 조선시대식 대포가 터지는 상황에 다다르면 이 종가집은 <천사몽>의 미래 도시가 아닐까 하는 환각이 살짝 든다. 그렇다. 어쩌면 <날라리 종부전>은 작정하고 만든 B급 컬트 코미디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음모론이 느껴진다. 가수 출신 여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하고 한국 영화의 클리쉐들을 이리저리 끌어오면서도 이런 식으로 남의 돈 쓰면 안된다는 일종의 한국 영화에 대한 경고장.
더욱이 이 영화가 2년 동안 묵었다는 데에 더 큰 비애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한창 눈먼 돈들이 한국영화에 쏟아져 들어오던 바로 그때 완성됐지만, 정신차리고 보니 어이 없는 완성도 때문에 개봉하지 못하다 주얼리의 반짝 인기를 타고 <인디아나 존스>와 맞붙는 우리 한국영화가 바로 <날라리 종부전> 되겠다.
어쩌면 이 영화는 <여고생 시집가기>, <카리스마 탈출기>를 잇는 가수출신 주연배우의 무개념 영화로 폄하되거나 B급 컬트 영화의 만신전에 오르는 이중적인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상영 시간 110분은 하품과 실소와 폭소와 우려를 동시에 안겨준 진귀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 영화는 요즘 버라이어티계에서 '국민MC'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유재석을 앞세운 우리말 더빙을 내세우며 마케팅 포인트를 잡아갔는데, 많은 개봉관에서 우리말 더빙으로 공개된 상태고 이런 마케팅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유재석의 목소리는 10대 후반 정도로 설정된 주인공의 목소리로는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보이지만, 이 영화의 원래 목소리를 연기한 것 역시 장수 시트콤 <사인필드>의 제리 사인필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물론 그의 목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상태지만...) 그다지 어색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법정 드라마로...
[꿀벌 대소동]은 여러 가지 장르적 요소를 뒤섞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경향을 대변하듯 '법정 드라마'적 요소를 영화에 가져왔다. (지난 해 나왔던 소니의 <서핑 업>은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가지고 왔었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제 막 꿀벌 사회에 접어 든 주인공 벌이 인간 사회에 나와 인간 여성과 로맨틱한 친구 관계를 맺는데 할애되는데, 꿀벌이 인간들에게 판매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생산 독점 소유권을 소송하게 된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니만큼 복잡한 법정 드라마로서의 과정은 좀 더 단순하고 명쾌하게 넘어가는 편인데, 따지고 보면 미국 사회에서 흔히 재기되고는 하는 지적 재산권 소송의 꿀벌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영화의 재미는 이 지점까지라고 할 수 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약간 사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간 생산된 벌꿀들을 원생산자인 꿀벌들이 돌려받게 되면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 즉 생태계 활동이 정지되고 그래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된다는 해피 엔딩으로 나아간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주요 관객층의 연령대를 고려한 듯 이야기의 주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이고 사실 법정 드라마 파트의 경우에는 이 장르에 대한 뉘앙스를 알고 있는 고연령층의 관객들을 제외하면 이해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색감과 디자인은 화사해서 별 부담 없이 가볍고 즐겁게 볼 수 있다.
찬양되는 자본주의 윤리
물론 이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수준의 생태주의적인 철학과 테마를 느끼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꿀벌들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쯤 되는 공원에 거주하는 '뉴요커'들이고, 벌들이 살아가는 벌집 안 즉 주거 공간에 대한 묘사는 대도시의 중산층의 삶의 양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벌집 안에서 살아가는 꿀벌들의 사회는 전통적인 컨베이어 벨트 제조업의 산업 사회 즉 50년대 미국 산업 사회의 전성기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꿀벌 대소동>은 꽤나 보수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예찬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대변되는 서구 사회의 전통적인 노동 기능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따지고 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사회의 울타리 안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꽤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한 파이오니어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맨틱 코미디를 거쳐 법정 드라마로 시작해 강탈 모험 영화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은 궁극적으로 '자기 일에 충실하자'라는 꽤 오래된 할리우드의 테마를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Based on a true story.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만약 극의 출발에서 걸쳐진 자막이 없었다면 <아메리칸 갱스터>는 스토리텔링의 노하우와 작가적 재능으로 집필된 할리우드 각본의 새로운 양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선 문구처럼 <아메리칸 갱스터>는 실화에 기반한 진짜 있었던 이야기, 즉 실화라고 전한다. 물론 영화적 각색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이 반사회적 성격의 스토리가 지니고 있는 깊은 함의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실화에서 비롯된 사실이란 점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근래 뒷골목 갱들을 다룬, 번역하자면 조폭 영화들이 지참하지 못했던 어떤 품격을 드러내는 중후한 작품이며 동시에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적 재미와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1970년대 할렘가를 중심으로 마약상권을 장악하며 뉴욕의 암흑가를 주름잡은 전설적인 인물,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치밀하게 그를 쫓은 청렴한 마약 수사관 리치 로버트(러셀 크로우)에 대한 서사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도시를 기반으로 한 미국 사회의 과거를 들춘다는 점에서 샌프란시스코의 미해결 살인 사건를 소재로 한 <조디악>을 연상시키며 갱과 수사관의 이중 심리를 교차시키고 그것이 맞닿게 되는 클라이맥스를 절묘하게 연출한다는 점에서 <디파티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적 대칭에 대한 사유일 뿐, 본질적으로 <아메리칸 갱스터>는 앞의 작품들과 달리 실제 서사를 이야기의 기본 원형으로 하는 만큼 좀 더 직설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대칭형의 인물의 평행적인 서사를 통해 시선을 분산시키며 감상의 묘미를 입체적으로 부여한다. 극을 끌어가는 캐릭터는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사연을 확보하고 사건을 형성하며 극적 재미를 더한다. 특히나 개별적인 인물에게 할애된 극적 영역의 묘사로부터 발견되는 캐릭터적 대비는 <아메리칸 갱스터>의 특별한 묘미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두 인물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한 극단적인 사회적 신분을 취득했다는 점에서 대비적이지만 각자의 환경 안에서 자신의 룰을 엄격하게 준수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그리고 신뢰를 기반으로 마약 상권을 장악하는 프랭크 루카스와 청렴을 근본으로 공직을 수행하는 리치 로버트는 그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다른 인물이란 점에서 다시 한번 대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두 인물은 각기 다른 자신의 영역적 질서에 반기를 든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생산자와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 거래자를 거치지 않고 순도 100%의 마약, 블루 매직(blue magic)을 기존의 희석된 마약들보다 반값에 파는 프랭크 루카스는 상권을 독점하지만 동시에 상거래를 위반했다는 질서 위반의 비난을 산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마약 상권의 담합에 반기를 들고 질 좋은 상품을 판매한다는 상권의 경쟁 논리의 원칙에서 합당하다. 이는 동시에 범죄 거래용으로 포착한 수십만 달러의 검은 돈을 고스란히 증거로 제출한 리치 로버트의 청렴함이 부패가 만연한 경찰 내부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몰락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상을 부여한다. 결국 <아메리칸 갱스터>는 담합과 유착의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정의가 어떻게 몰락할 수 있는가를 대조적인 환경의 인물을 통해 드러낸다.
<아메리칸 갱스터>가 지칭하는 대상의 궁극적 함의는 결말부를 통해 드러나며 그 과정에서 제목의 의미는 시대와 제도에 대한 역설로 되새김질된다. 마약이 지배하던 미국의 어두운 이면은 그것이 어둠에 기생하는 갱들의 순도 100% 반사회적 생산성으로만 채워진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숙주로 기생하는 공권력의 탈을 쓴 수혜자들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불순하다. 그 현실에서 진정한 갱스터-영화적 캐릭터로서 호감을 주는 캐릭터의 의미가 아니라-, 즉 거리의 불온한 현실을 방관하고 이를 이용하는 배후 세력의 인상을 확인한다. 게다가 베트남전에 파병된 미공군 수송기를 통해, 그것도 그들의 불명예를 자극할만한 방식으로 마약이 운송됐음을 묘사하는 <아메리칸 갱스터>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길 서슴지 않으며-5만 명의 죽음이 마약 밀수로 활용됐다는- 부패와 유착이 만연했던 시대에 대한 반성을 통해 종언을 독려하는 미국적 양심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는 동시에 그들의 현실을 겨냥한 어떤 목소리이기도 하다.
단순히 범인을 쫓는 형사의 수사물로써 <아메리칸 갱스터>에 대한 기대감을 품었다면 그 끝에 걸리는 예상 밖의 수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한 수사물의 장르적 원형으로도, 혹은 인물 중심의 서사적 범죄물로써도 <아메리칸 갱스터>는 탄탄한 이야기적 완성도를 통해 장르적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동시에 탁월한 연기력으로 극의 양면을 제각각 지배하는 러셀 크로우와 덴젤 워싱턴의 원숙한 연기는 깊은 호감을 부른다. 중후한 매력을 적절히 유지하는 캐릭터와 함께 군살 없이 탄탄한 이야기의 근력을 과시하는 <아메리칸 갱스터>는 시대적 진실을 관통하는 세련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격한 영화적 가치를 품었다.
한편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라고 금배지 달아주니 국가대표 격투기 선발전에 출전한 것으로 착각한 양인지 국회 의사당을 쑥밭으로 누비는 대한민국의 꼴사나운 풍경 속에서 <아메리칸 갱스터>의 본질은 더더욱 간절해지는 것만 같다. 동시에 도덕성에 커다란 흠집을 안고도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이 땅의 미래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게 만든다. 물론 갱스터든 도둑놈이든 어둠을 먹고 사는 존재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존재가 백주대낮을 당당히 누비고 다닐 수 있는 사회는 그것을 박멸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다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퀴벌레도 먹이가 방치된 지저분한 곳을 누비고 다니는 법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메리칸 갱스터>를 통해 전해 들어야 할 복음일 것이다.
주인공 은수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도중 그만 교통 사고를 당한다. 정신을 차린 그가 본 건 정체모를 여자 아이. 그 아이에게 이끌려 들어간 숲 속 외딴 집은 부모와 아이들 셋이 사는 어딘가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곳. 은수는 이 곳을 나가려 하지만 미로 같은 숲 때문에 번번히 실패하고 아이들의 부모는 은수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쪽지만 남긴채 사라져 버린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미로 같은 숲과 그 숲 한가운데 있는 장난감이 가득찬 집이다. 감독은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이 집 안에서 인물들의 끊임없는 클로즈업을 통해 여기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 어딘가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 인물들을 배경으로 다소 굴절된 화면을 통한 집 안의 배경과 각종 장난감을 통해 더욱 긴장감을 높혔다. 이는 감독이 스스로 밝힌대로 이 영화가 공포를 준다기 보다는 더욱 기괴한 판타지에 가깝게 하는데 일조를 하는 부분이다. 마치 오래된 동화책에서 따온 듯한 배경은 [헨젤과 그레텔]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자 이 집에 살고 있는 세 아이들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감독은 이렇게 강화된 아이들의 캐릭터를 이용해 우연히 이 집에 들어온 한 착한 청년과 역시 우연히 들어온 악한 두 남녀의 대비를 통해 어른들이 아이에게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역시 이 사건에서 아이들의 존재가 가부장 폭력에서 기인한다고 보면 감독의 전작인 [남극 일기]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남극 일기]에서 임필성 감독은 인물들을 어디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늪에 몰아 놓고 외적인 억압에서 오는 인물들의 내적인 갈등을 증폭시켜 가부장과 폭력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냈다. [남극 일기]가 실패한 이유는 장르 영화의 모양새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채 작가 의식을 너무 갑작스럽게 드러냄으로서 야기되는 부조화에서 기인한다고 봐야한다. 적어도 [헨젤과 그레텔]은 전작 [남극 일기]의 포맷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작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 의의가 있다. 거대한 설원은 처음과 끝을 알수없는 미로 같은 숲으로 대체되었고 대원들이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도달블능점은 역으로 숲을 빠져나가는 길로 바뀌었다. 다만 인간 군상의 갈등을 보여주었던 [남극 일기]와는 달리 [헨젤과 그레텔]은 외딴 집에 머물고 있는 세 아이들과 이 집에 우연히 찾아오게 되는 사람들과의 갈등에 그 포인트를 맞추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렇게 인물의 수가 줄고 집을 빠져나가려는 사람과 막으려는 아이들간의 이야기가 중첩될수록 이야기는 더욱 단순해졌다.
그러므로 [헨젤과 그레텔]의 약점은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했던 전작과는 달리 인물과 사건의 지나칠 정도의 정형화에서 나온다. 물론 이런 인물과 서건의 정형화는 이야기의 흐름이 제법 매끈하게 흐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숨겨진 비밀과 그로 인한 슬픔도 그런면에서 공감이 된다. 하지만 지나친 인물들의 도식화는 이 영화의 시선이 숨겨진 이면의 것들을 다루기보다 지금 현재 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즉 아이들을 지켜주는 혹은 지켜야만 되는 착한 주인공과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하려는 악당의 이분법적 대결로 귀착 된다는 것이다. 영화가 잔혹 동화라는 카피를 들고 나왔다고 이야기 구조 자체가 단순한 동화의 구조로 흘러갈 필요는 없다는 것.
여기에 아이들이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계속 찾으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라는 설정과 가부장 폭력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의 생성에서 착지한다는 결말은 영화 전체에 흐르던 마치 악몽 같은 이미지들을 미루어 볼 때 다소 의외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은 이 영화가 '잔혹 동화'에서 '잔혹'이 아닌 '동화'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반증이며 한국의 가족 영화가 갖고 있는 한계로 보인다. 한국 영화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가족이야기는 결국 행복한 결말로 귀결되지 않는가. 행복한 것도 좋지만 제법 강한 가부장 폭력을 다루는 [헨젤과 그레텔]을 보고 대한 민국 가족 주의의 시원한 일탈을 기대한 건 한국의 상업 영화 판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들을 기대했다는 뜻일까.
결론부터 말해보자. <색즉시공 시즌2>는 전편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일반적인 속편의 운명을 온몸으로 떠안는다. <스크림2>의 공포영화광 랜디의 말을 ‘섹시코미디’ 버전으로 살짝 비틀어 보면 “원본보다 노출은 더 많고, 더 자극적이며, 살이 더 난무하고, 내러티브는 더 꼬인다”라고 바꿀 수 있겠다. 예산과 볼거리로 승부하는 상업 영화 속편의 법칙은 여전히 공고하지만 “속편은 전편보다 항상 별 볼일 없다”는 결과물이 상당수 아니었던가.
<색즉시공 시즌2>는 전편의 감독 윤제균의 빈자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증명한다. <두사부일체>와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으로 흥행성을 인정받았던 윤제균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이름을 올렸으니 일단 안심은 하시라. 몸 개그를 위한 차력동아리는 볼거리를 위해 K-1 동아리로 배를 갈아탔고, 볼륨감 넘치는 여배우들의 몸매는 전편의 에어로빅 동아리에서 수영부란 설정으로 바톤 터치 했다. 하지원의 섹시미가 아쉽다는 팬들도 있겠지만 ‘엽기적인 그녀’로 변신한 송지효의 매력도 쏠쏠하다. 올 해만 4편을 개봉시켜서 그렇지 임창정의 순정남 연기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출? 진재영의 두 번의 정사신을 제외하고 가슴의 직접적인 노출을 피했던 전편과 달리 <섹즉시공 시즌2>는 속편답게 화끈하기 그지없다. 수차례의 노출을 불사하는 이화선이 안쓰럽게 보일정도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수영부로 출연하는 두 조연 여배우도 가슴쯤이야, 라는 바람직한(?) 자세로 노출을 불사하니 걱정 마시길. 하지만 <색즉시공>의 성공전략은 노출 자체가 아니라 그간 한국 영화에 없었던 성에 대한 솔직한 대사와 야릇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에피소드의 감칠맛이었다는 점을 복기해 보라.
그러니까 관건은 노출 수위와 횟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전편의 뼈대를 고스란히 가져온다는 점에서 기본은 하지만 전편의 답습하는 수위가 아슬아슬하다. 은식(임창정)의 이별과 경아(송지효)와의 첫 만남을 개괄하는 오프닝 이후 수영장 신, 나이트에 이은 모텔 시퀀스, 생일파티, 바닷가에서의 엠티, 수영대회와 삼각연애의 갈등, K-1 대회로 이어지는 마무리 등 에피소드별 전개는 전편과 판박이다. 팬션에 잠입한 2인조 도둑의 등장도 그대로며, 송지효와 신이는 술 취해 외계어를 지껄이던 전편의 임창정, 최성국 짝패의 포장마차신을 패러디하는 수준이다. 익숙함으로 승부하는 전략은 관객들에게 물론 편안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 여자친구를 위해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는 순정남의 순애보도 그대로고,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삼각관계도 대중 영화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색즉시공 시즌2>의 아쉬움은 새로운 출연진의 캐릭터와 설정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진재영과 하지원의 경쟁구도를 큰 틀로 삼았던 전편에 비해 새로 등장한 이화선이 맡은 수영부 코치 캐릭터는 노출을 위해 쓰이는 도구, 딱 거기까지다. 경아 캐릭터 또한 전편에 비하면 그 밀도가 한참이나 떨어진다. 과거를 이해해 준 은식과 옆집 오빠였던 젠틀남 검사와 고민하는 삼각 로맨스 주인공에 더도 덜도 아니다.
K-1 동아리나 수영부 설정도 효율성 면에서 낙제점이다. K-1은 데니스 강을 모셔와 록키를 패러디하는 후반부 볼거리를 위해 기능하며 수영대회 장면도 기계적인 컷의 연속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다. 더불어 18세 이상 관람가 <엽기적인 그녀> 버전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경아와의 로맨스도 철지난 성폭력 클리쉐로 인해 식상함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전편이 중반까지 웃기고 후반부 울리는 한국영화 공식에 충실한 가운데 낙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노력한 바 있다. 하지만 2편에서 경아가 혼전순결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은식이 경아와의 첫 날밤에 목매다는 둘의 관계가 코미디이었을 때는 유효하지만 그들의 과거가 짧은 회상신으로 갈무리되면서 그야말로 퇴행적이고 무성의한 상업 영화로 전락한다.
1편의 후반부. 낙태 수술을 받은 은효(하지원)를 위해 차력으로 웃음을 짓게 하던 은식을 슬로우 모션으로 절묘하게 잡아냈던 그 장면을 기억하는가? <색즉시공 시즌2>는 노출과 화장실 개그는 더 ‘하드’해졌을지 모르지만 관객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영화적 재미는 현저히 줄었다. 기본은 하지 않느냐고? 섹스 코미디에 많은 걸 바라는 것 아니냐고? 그럼, 뭐 420만 관객 동원에 빛나는 전편의 흥행도 딱 기본만큼만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랜디가 빼 멋은 것 한 가지는 흥행 또한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의 흥행 성공도 그다지 없다는 점이다. 왜? 제작비와 마케팅비는 계속 널뛰는 상승하고 있으니까. 요건 ‘슈렉’이건 ‘스파이더맨’이건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란다. 속편의 길은 안전하지만 또 그 만큼 험난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