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제 막 영화를 찍기 시작한 신출내기 감독들의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말이 필요 없는 거장들의 숨 막히는 걸작을 보며 느끼는 감동에 비할 바 아니지만, 때론 세공되지 않은 거친 원석에 가까운 그들의 작품을 보다보면, 이 감독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여주게 될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퀼리티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이런 패기어린 신작들을 즐겨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영화판이 워낙 체계화되어서 그런지 갓 영화를 찍기 시작한 초짜들의 영화가 기성 영화에 못지않은 나름 준수한 매무새를 자랑해 보이지만, 반면에 신인 특유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관습적인 장면만을 반복하며 내게 실망스러움을 안겨주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여기 최근의 이런 기류를 거스르고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심어준 단편이 하나 있다. 바로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여놓은 초짜 감독 조성희의 <남매의 집>이란 영화이다.
<남매의 집>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벌써 화려한 수상 족적을 새기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단편 부분에 주어지는 이스타항공상-최우수상을 시발점으로 시작된 이 영화의 수상 행진은 칸느 시네파운데이션 부분 3위 입상으로 이어졌고, 또 바로 귀국하여 그 콧대 높은 미장센 영화제에서 7년 만에 대상을 배출하게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사뭇 높아진 기대감에 이 영화를 보고자한 나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고, 드디어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먼저 지극히 주관적인 소감을 피력해보자면,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뛰어난 재능이 엿보인 단편이었다.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재능은 그의 향후 미래를 확실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다만 그가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감독의 위치에 오르게 되겠다는 정도만은 예상 할 수 있었다.
<남매의 집>은 43분 동안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포영화다. 남매만 살고 있는 이 집에 어느 날 괴한이 찾아오고, 그 괴한이 이 집을 빠져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서 등장하는 그 흔한 괴기한 이미지나 잔혹한 장면도 없이 순전히 상황 설정과 특정한 대사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적인 공포감 속에 밀어 놓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집 밖으로 한 치의 발도 내어놓지 않는 폐쇄적인 영화의 배경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영화에서 보여 지는 집안 내부의 상황이 외부에서 벌어지는 어떤 막연한 미지적인 공포를 강하게 자극 하게 된다. 그러한 방식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사용된 장치들이 굉장히 일반적인 사물과 경험이며, 이를 약간씩 뒤틀면서 오히려 굉장히 상이하고 감각적인 방식을 전시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의 현시는 어떤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 이 대상이라 함은 외부의 세계에서 이 내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대립의 대상이며, 직접적인 설명을 하자면 영화에서 괴한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일종의 마스터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이 절대적인 권력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우리에게 극복 할 수 없는 일종의 좌절감을 선사한다.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은 대립적인 대상. 즉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또한 그 실체도 불분명한 대상을 적으로 둔 나약한 어린이의 관점을 굉장히 밀도 높게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의 표현력은 기성 감독들과 비교해도 거의 최정상급의 수준이다.
생각해보면 <지리멸렬>, <심판>, <빵과 우유>, <열일곱>과도 같은 일련의 단편 영화에는 각기 봉준호, 박찬욱, 원신연 그리고 김태용 감독이 이후에 만들 뛰어난 장편 영화들의 잠재력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내가 평론가 하시미 시게히코와 같은 엄청난 감식안을 가졌다고 자평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신출내기 감독의 단편을 보면 그 감독이 보여줄 영화의 세계에 대하여 어느 지형도를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43분짜리의 짧은 중편에서 보여준 어느 초짜 감독의 재능이 지금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단한 기대감을 느끼게 해준 것은 분명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단한 재능은 오로지 필자만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누구나가 공감 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라고 본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어떻게라도 이 영화를 접해보라. 이런 대단한 기대감을 앉고 살아간다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놓칠 수 없는 힘든 큰 행운이다.
개인적으로 이제 막 영화를 찍기 시작한 신출내기 감독들의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말이 필요 없는 거장들의 숨 막히는 걸작을 보며 느끼는 감동에 비할 바 아니지만, 때론 세공되지 않은 거친 원석에 가까운 그들의 작품을 보다보면, 이 감독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여주게 될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퀼리티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이런 패기어린 신작들을 즐겨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영화판이 워낙 체계화되어서 그런지 갓 영화를 찍기 시작한 초짜들의 영화가 기성 영화에 못지않은 나름 준수한 매무새를 자랑해 보이지만, 반면에 신인 특유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관습적인 장면만을 반복하며 내게 실망스러움을 안겨주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여기 최근의 이런 기류를 거스르고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심어준 단편이 하나 있다. 바로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여놓은 초짜 감독 조성희의 <남매의 집>이란 영화이다.
<남매의 집>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벌써 화려한 수상 족적을 새기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단편 부분에 주어지는 이스타항공상-최우수상을 시발점으로 시작된 이 영화의 수상 행진은 칸느 시네파운데이션 부분 3위 입상으로 이어졌고, 또 바로 귀국하여 그 콧대 높은 미장센 영화제에서 7년 만에 대상을 배출하게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사뭇 높아진 기대감에 이 영화를 보고자한 나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고, 드디어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먼저 지극히 주관적인 소감을 피력해보자면,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뛰어난 재능이 엿보인 단편이었다.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재능은 그의 향후 미래를 확실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다만 그가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감독의 위치에 오르게 되겠다는 정도만은 예상 할 수 있었다.
<남매의 집>은 43분 동안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포영화다. 남매만 살고 있는 이 집에 어느 날 괴한이 찾아오고, 그 괴한이 이 집을 빠져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서 등장하는 그 흔한 괴기한 이미지나 잔혹한 장면도 없이 순전히 상황 설정과 특정한 대사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적인 공포감 속에 밀어 놓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집 밖으로 한 치의 발도 내어놓지 않는 폐쇄적인 영화의 배경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영화에서 보여 지는 집안 내부의 상황이 외부에서 벌어지는 어떤 막연한 미지적인 공포를 강하게 자극 하게 된다. 그러한 방식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사용된 장치들이 굉장히 일반적인 사물과 경험이며, 이를 약간씩 뒤틀면서 오히려 굉장히 상이하고 감각적인 방식을 전시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의 현시는 어떤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 이 대상이라 함은 외부의 세계에서 이 내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대립의 대상이며, 직접적인 설명을 하자면 영화에서 괴한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일종의 마스터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이 절대적인 권력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우리에게 극복 할 수 없는 일종의 좌절감을 선사한다.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은 대립적인 대상. 즉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또한 그 실체도 불분명한 대상을 적으로 둔 나약한 어린이의 관점을 굉장히 밀도 높게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의 표현력은 기성 감독들과 비교해도 거의 최정상급의 수준이다.
생각해보면 <지리멸렬>, <심판>, <빵과 우유>, <열일곱>과도 같은 일련의 단편 영화에는 각기 봉준호, 박찬욱, 원신연 그리고 김태용 감독이 이후에 만들 뛰어난 장편 영화들의 잠재력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내가 평론가 하시미 시게히코와 같은 엄청난 감식안을 가졌다고 자평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신출내기 감독의 단편을 보면 그 감독이 보여줄 영화의 세계에 대하여 어느 지형도를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43분짜리의 짧은 중편에서 보여준 어느 초짜 감독의 재능이 지금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단한 기대감을 느끼게 해준 것은 분명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단한 재능은 오로지 필자만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누구나가 공감 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라고 본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어떻게라도 이 영화를 접해보라. 이런 대단한 기대감을 앉고 살아간다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놓칠 수 없는 힘든 큰 행운이다.
개인적으로 이제 막 영화를 찍기 시작한 신출내기 감독들의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말이 필요 없는 거장들의 숨 막히는 걸작을 보며 느끼는 감동에 비할 바 아니지만, 때론 세공되지 않은 거친 원석에 가까운 그들의 작품을 보다보면, 이 감독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여주게 될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퀼리티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이런 패기어린 신작들을 즐겨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영화판이 워낙 체계화되어서 그런지 갓 영화를 찍기 시작한 초짜들의 영화가 기성 영화에 못지않은 나름 준수한 매무새를 자랑해 보이지만, 반면에 신인 특유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관습적인 장면만을 반복하며 내게 실망스러움을 안겨주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여기 최근의 이런 기류를 거스르고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심어준 단편이 하나 있다. 바로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여놓은 초짜 감독 조성희의 <남매의 집>이란 영화이다.
<남매의 집>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벌써 화려한 수상 족적을 새기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단편 부분에 주어지는 이스타항공상-최우수상을 시발점으로 시작된 이 영화의 수상 행진은 칸느 시네파운데이션 부분 3위 입상으로 이어졌고, 또 바로 귀국하여 그 콧대 높은 미장센 영화제에서 7년 만에 대상을 배출하게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사뭇 높아진 기대감에 이 영화를 보고자한 나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고, 드디어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먼저 지극히 주관적인 소감을 피력해보자면,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뛰어난 재능이 엿보인 단편이었다.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재능은 그의 향후 미래를 확실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다만 그가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감독의 위치에 오르게 되겠다는 정도만은 예상 할 수 있었다.
<남매의 집>은 43분 동안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포영화다. 남매만 살고 있는 이 집에 어느 날 괴한이 찾아오고, 그 괴한이 이 집을 빠져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서 등장하는 그 흔한 괴기한 이미지나 잔혹한 장면도 없이 순전히 상황 설정과 특정한 대사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적인 공포감 속에 밀어 놓는다. 이 영화의 장점은 집 밖으로 한 치의 발도 내어놓지 않는 폐쇄적인 영화의 배경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영화에서 보여 지는 집안 내부의 상황이 외부에서 벌어지는 어떤 막연한 미지적인 공포를 강하게 자극 하게 된다. 그러한 방식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사용된 장치들이 굉장히 일반적인 사물과 경험이며, 이를 약간씩 뒤틀면서 오히려 굉장히 상이하고 감각적인 방식을 전시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의 현시는 어떤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 이 대상이라 함은 외부의 세계에서 이 내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대립의 대상이며, 직접적인 설명을 하자면 영화에서 괴한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일종의 마스터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이 절대적인 권력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우리에게 극복 할 수 없는 일종의 좌절감을 선사한다.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은 대립적인 대상. 즉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또한 그 실체도 불분명한 대상을 적으로 둔 나약한 어린이의 관점을 굉장히 밀도 높게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의 표현력은 기성 감독들과 비교해도 거의 최정상급의 수준이다.
생각해보면 <지리멸렬>, <심판>, <빵과 우유>, <열일곱>과도 같은 일련의 단편 영화에는 각기 봉준호, 박찬욱, 원신연 그리고 김태용 감독이 이후에 만들 뛰어난 장편 영화들의 잠재력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내가 평론가 하시미 시게히코와 같은 엄청난 감식안을 가졌다고 자평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신출내기 감독의 단편을 보면 그 감독이 보여줄 영화의 세계에 대하여 어느 지형도를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43분짜리의 짧은 중편에서 보여준 어느 초짜 감독의 재능이 지금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단한 기대감을 느끼게 해준 것은 분명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단한 재능은 오로지 필자만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누구나가 공감 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라고 본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어떻게라도 이 영화를 접해보라. 이런 대단한 기대감을 앉고 살아간다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놓칠 수 없는 힘든 큰 행운이다.
안경테가 박살났다. 발밑에 있는 것을 모르고 그만 밟아버린 것이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라고 느끼는 순간 안경테는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어젯밤 영화 한 편을 본 후 책을 읽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들었으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절대로 바닥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다행이 알은 그대로였지만 테 없는 안경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박살난 건 안경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회도 박살이 났다. 그러니까 미디어법 이야기다. 어떤 이는 ‘돔구장의 결투’이라고 표현했으니 그 재치가 놀랍다. 방송 때문에 찾은 돔구장 옆에 위치한 KBS 본관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업선언을 알리는 대형현수막이 입구계단을 휘감고 있었고 로비에서도 집회가 열리는 중이었으나, 아직 비장함이 감돌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격한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는 단단히 작심하고 시작한 파업임을 알려주었고 삼삼오오 모인 이들의 눈빛과 입가에서 다부진 각오와 무거운 침묵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일보》는 날치기 법안통과의 일등공신 중 하나로 쇠줄로 묶인 본회의장 문을 열고 야당의원 3~4명을 한 번에 메쳐버렸다는(국회의원의 괴력이 특종처럼 다뤄질 수도 있다니) 전직 대령 출신 국회의원 김성회를 띄워주면서 애써 기쁨을 감추는 모습이다. 아마도 그들은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처럼 어느 후미진 계단에서 브이 자를 내밀며 사진을 찍었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 지루했던 2008년의 초여름을 떠올리면서 연신 독주를 들이켰는지도 모르겠다.
미디어법이 통과된 다음 날, 류근일은 대표적 보수매체 《뉴데일리》에 기고한 칼럼에서 「정권이 교체 된지 1년 반 만에 진짜로 정권이 바뀌었다는 실감을 한 2009년 7월 22일이었다. 미디어법 통과가 그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이 구사해 온 기만적 국민선동의 나팔수들이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당하기 시작한 미디어계의 지각 변동이었다.」고 스스로 미디어법의 결사통과 목적을 자복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이틀 전만해도 매년 방송 인력이 3,000~4,000명이 배출되는데도 방송사가 3개뿐이라서 조속히 미디어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방송인력 적체현상을 해소시켜야한다고 주장한 그들이었다. 그렇지. 언론을 장악해야 진짜 정권이 바뀌는 것이지. 군부야 이미 93년 김영삼이 하나회 숙청 등, 군내 사조직을 발본색원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고. 언론만 휘어잡으면 광우병 촛불집회 같은 곤혹스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테고 나아가 3년 반 뒤 대선에 큰 역할을 할 터인즉, 오랜 세월 조선일보의 충복이었던 류근일 입장에서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인가. 어차피 세상사 그렇고 그런 것이고 이 바닥에서 뭘 기대하느냐는 자조감이 팽배한 시절이니 더 따져봐야 나아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박살난 테를 잡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려 보지만 복원시킬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안경알만 가지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법. 박살난 국회, 벼랑으로 치닫는 민주주의가 깨진 내 안경만큼이나 참혹하다. 이제 나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 적어도 안경을 다시 맞추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내 눈도 점점 나빠지고 있고 정신 차려 눈을 부릅뜨지 않고서는 작은 글씨 보기가 어림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안경을 맞춰 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에서 답답함은 더해진다. 안경테 부숴먹은 날 쓰는 시답지도 않은 editorial. 평론가의 글이 정치사회부기자의 그것과 차이가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안경테가 박살났다. 발밑에 있는 것을 모르고 그만 밟아버린 것이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라고 느끼는 순간 안경테는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어젯밤 영화 한 편을 본 후 책을 읽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들었으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절대로 바닥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다행이 알은 그대로였지만 테 없는 안경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박살난 건 안경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회도 박살이 났다. 그러니까 미디어법 이야기다. 어떤 이는 ‘돔구장의 결투’이라고 표현했으니 그 재치가 놀랍다. 방송 때문에 찾은 돔구장 옆에 위치한 KBS 본관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업선언을 알리는 대형현수막이 입구계단을 휘감고 있었고 로비에서도 집회가 열리는 중이었으나, 아직 비장함이 감돌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격한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는 단단히 작심하고 시작한 파업임을 알려주었고 삼삼오오 모인 이들의 눈빛과 입가에서 다부진 각오와 무거운 침묵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일보》는 날치기 법안통과의 일등공신 중 하나로 쇠줄로 묶인 본회의장 문을 열고 야당의원 3~4명을 한 번에 메쳐버렸다는(국회의원의 괴력이 특종처럼 다뤄질 수도 있다니) 전직 대령 출신 국회의원 김성회를 띄워주면서 애써 기쁨을 감추는 모습이다. 아마도 그들은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처럼 어느 후미진 계단에서 브이 자를 내밀며 사진을 찍었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 지루했던 2008년의 초여름을 떠올리면서 연신 독주를 들이켰는지도 모르겠다.
미디어법이 통과된 다음 날, 류근일은 대표적 보수매체 《뉴데일리》에 기고한 칼럼에서 「정권이 교체 된지 1년 반 만에 진짜로 정권이 바뀌었다는 실감을 한 2009년 7월 22일이었다. 미디어법 통과가 그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이 구사해 온 기만적 국민선동의 나팔수들이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당하기 시작한 미디어계의 지각 변동이었다.」고 스스로 미디어법의 결사통과 목적을 자복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이틀 전만해도 매년 방송 인력이 3,000~4,000명이 배출되는데도 방송사가 3개뿐이라서 조속히 미디어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방송인력 적체현상을 해소시켜야한다고 주장한 그들이었다. 그렇지. 언론을 장악해야 진짜 정권이 바뀌는 것이지. 군부야 이미 93년 김영삼이 하나회 숙청 등, 군내 사조직을 발본색원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고. 언론만 휘어잡으면 광우병 촛불집회 같은 곤혹스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테고 나아가 3년 반 뒤 대선에 큰 역할을 할 터인즉, 오랜 세월 조선일보의 충복이었던 류근일 입장에서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인가. 어차피 세상사 그렇고 그런 것이고 이 바닥에서 뭘 기대하느냐는 자조감이 팽배한 시절이니 더 따져봐야 나아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박살난 테를 잡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려 보지만 복원시킬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안경알만 가지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법. 박살난 국회, 벼랑으로 치닫는 민주주의가 깨진 내 안경만큼이나 참혹하다. 이제 나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 적어도 안경을 다시 맞추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내 눈도 점점 나빠지고 있고 정신 차려 눈을 부릅뜨지 않고서는 작은 글씨 보기가 어림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안경을 맞춰 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에서 답답함은 더해진다. 안경테 부숴먹은 날 쓰는 시답지도 않은 editorial. 평론가의 글이 정치사회부기자의 그것과 차이가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