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식상한 답인지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일기를 쓰는 일은 결국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행위다. 사춘기 시절, 그간 공을 들여 썼던 일기장과 작별 인사를 고하는 바로 그때는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순수함과 공식적으로 결별을 고하고 때 묻은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순간이리라. 그렇다고 일기를 쓰는 인간형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자기 성찰의 미덕과 긍정성을 올곧이 발현한다는 주장을 할 요량도 아니다. 특정한 어떠한 행위 하나가 복잡다단한 인간 심리를 모두 관장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만큼,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니까.
<맨 어바웃 타운>이 일기를 쓰는 행위를 바라보는 관점도 딱 거기까지다. 기본적으로 휴먼 코미디라 정의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무기력에 빠진 주인공이 나레이션의 형식을 동원하면서 일기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정조는 꽤나 묘한 구석이 있다. 분명 주인공을 위무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무턱대고 연민에 빠지진 않는다. 종종 등장하는 분할화면처럼 꽤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는 영화를 종종 블랙 코미디도 비추게 만든다. 스탭드업 코미디언 출신의 배우 겸 각본가이자 감독인 마이크 바인더는 그렇게 사람에 대한 통찰을 겸비한 드라마에 장기를 보여 왔다. 케빈 코스트너, 조안 알렌 주연의 <미스 언더 스탠드>나 아담 샌들러 주연의 <레인 오버 미>가 바로 그의 솜씨였다.
일기를 차근차근 써나가는 주인공은 거대 매니지먼트사를 이끌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당도한 잭 지아모로다. 먼저 미인대회 출신의 아내 니나가 가장 큰 고객인 시트콤 작가 필과 불륜을 저질렀다. 뇌졸중에 쓰러졌던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고, 일은 여전히 중압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설상가상으로 잭의 회사에 시나리오를 보냈다 수차례 퇴짜를 맞은 뒤 중국게 여인 바비 링은 앙심을 품고 사업상 불법 행위까지 적어놓았던 일기장을 도둑맞게 된다. 잭은 지금 도무지 웃을 일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될 겁니다." 영화의 오프닝, 맞춤법을 유난히 강조하는 교수는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한다. <맨 어바웃 타운>이 흥미로운 것은 이 일기의 의미를 거시적인 자기 성찰의 그 무엇에 가둬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내러티브 안으로 끌어 들였다는 점이다. 일기도 중요하지만 일기장이 플롯의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다. 그러나 마이크 바인더 감독은 시치미 뚝 떼고 잭을 일기장을 꼭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몰아넣음으로서 슬랩스틱 코미디도 도출해내고, 어렴풋한 서스펜스도 자아낸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잭이 일기장 때문에 위기에 빠진다는 상황은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소재를 적극적이고 재기발랄하게 사용하는 탁월한 각본의 승리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보여줄 수 있는 위트 있고 품위 있는 '중년 남성 위로담'이다. 잭은 꽤나 사랑에 있어 소심한 남자다. 영화는 그 기원을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찾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형에게 뺏긴 잭은 무능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 친구의 집에 사과를 하러 가게 만든다. 그때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뚱뚱했던 소년이 성인이 되어도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 과거의 사연을 관조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빤한 불륜극으로 빠지지 않는 영리함과 인물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는 셈이다.
코미디에 대한 감각 또한 꽤나 흥미진진하다. 예를 들어 후반부 잭이 공을 들였던 극작가의 아내가 오디션이랍시고 벌이는 <원초적 본능>의 취조실 장면 패러디는 배꼽을 잡게 만든다. 대사까지 빼다 박은 그 패러디 장면을 연출하는 시퀀스 안에 일기장을 되찾기 위한 아내의 고군분투와 잭과의 화해를 위해 찾아온 시트콤 작가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다. 꽤나 떠들썩한 소동극 안에서도 상황을 과장하지 않는 연출이야 말로 <맨 어바웃 타운>의 미덕이다. 그건 계속해서 LA 전경을 빠르게 훑는 카메라 워크를 종종 삽입한 것처럼 관조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려는 감독의 배려와도 맞닿아 있다. <맨 어바웃 타운>은 과장된 연출과 충분히 자극적인 소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도 충분히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잘 빠진 상업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 중 하나다. 그것이야 말로 벤 에플랙을 비롯해 레베카 로미즌, 지나 거손, 잭 클리즈, 제리 오코넬, 칼 펜 등 재능 있는 배우들이 이 영화에 떼거리로 출연한 이유일 것이다.
네오이마주가 세상에 나온 것이 2005년 10월 31일의 일이니 3년 8개월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해 여름,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와 박광현 감독의 눈부신 데뷔작 <웰컴 투 동막골>이 숱한 화제를 불러왔고, 뒤이어 서극 감독의 <칠검>과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에 실망한 이들의 비판이 십자포화처럼 난무하던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2005년 가을의 일이었다.
이미 그때도 영화의 유효기간은 한 달을 넘기는 법이 드물었다. 1년은 고사하고 몇 달만 지나도 개별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평자들의 끝없는 담화와 재평가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는 것, 그리하여 오래도록 회자되고 언젠가는 다시 관객과 만나게 되는 것이 개별 영화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라면, 그 작업에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결국 이런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난 영화를 다시 꺼내어 이야기할 수 있는 마당과 기꺼이 이 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문가집단의 힘을 빌리기에는 바탕이 취약했고 붐을 일으키는 형태를 취하자니 글의 질적 저하가 우려되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은, 영화광들의 소환이었다. 그렇다! 영화광들이어야만 했다. 네오이마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순히 영화를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관객이 아닌, 소비해버린 영화를 다시 집어 들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재평가하고 고함치고 싶은 이들을 중심으로, 영화광들이 모여 영화를 이야기하고 비평하는 웹-진 네오이마주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와일드 번치>의 한 장면을 보면 훔친 자루에서 은이 아닌 쇠뭉치가 나오자 윌리엄 홀덴이 연기하는 ‘파이크’가 실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내뱉는다. "우리도 앞으론 머리를 써야 할 것 같아." 때는 서부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미 자동차와 비행기가 다니는데, 그들은 시대에 낙오된 퇴물 총잡이가 아니던가. 같은 맥락으로 영화가 개봉하고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을 정도로 관객들은 너무 많은 영화와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지금이야 말로, 영화광들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네오이마주가 21세기의 영화광과 90년대의 영화광의 평온한 조우와 겸허한 자존심을 소환코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90년대의 추억의 한 자락이나 붙잡자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역량과 열정이 지금 영화광보다 월등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 손에 《키노》나 《로드쇼》 《스크린》 유의 잡지를 들고 다니던 그때의 영화광들은 무언가 하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그 무언가는 반드시 영화적이었으며 영화로 세상을 배우고 영화를 매개로 소통했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광을 위하여!
60년대로부터 80년대를 관통하는 리얼리즘의 탐색과 90년대 코리안 뉴시네마를 재평가하는 것이 평론가나 영화학자들의 몫이라면, 적어도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주석은, 그 중심에 있었던 영화광들의 손으로 쓰여 져야 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영화의 조로현상은 비단 충무로의 감독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광들의 세대교체 역시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90년대에 학교를 다녔거나 갓 사회에 발을 디뎠던 영화광들이라면 현재 20대 후반에서 30대 중후반 일터인데, 이제야말로 영화가 보여준 세상을 몸소 체험하였고, 세상의 이치를 알 만한 나이니 영화에 대한 안목과 시각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좋은 영화 한 편이라도 더 보겠다던 순수한 꿈틀거림과 오랜 흑백필름 앞에서 눈물 적시며 영화의 선각자를 만나는 가슴 뜨거운 느낌이 사라졌을지라도, 거창한 고민과 열정의 시대에서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을지언정, 선뜻 앞서지 못하는 불안감과 평온함을 추구하는 게으름의 찌꺼기들을 벗어나야 할 때이다. 이 대열에 누구인들 끼지 못할까. 문화학교서울의 사당동 시절과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시절을 거쳐 지금의 낙원동까지, 시네필의 성지와도 같은 서울아트시네마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관객들이어도 좋고, 작은 영화와 독립영화에 매료된 관객이라도 좋다. 혹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관객이어도 무방하다. 검색 포탈보다 정보량이 적다고 영화 전문사이트를 외면하고, 상업영화보다 지루하다고 독립영화를 외면하고, 할리우드 영화보다 스펙터클이 약하다고 한국영화를 외면하다 보면, 한국 영화와 영화담론이 실종 될 런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광은 어떤 영화가 언제 어느 극장에서 개봉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름지기 영화광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혹여 놓칠세라, 한달음에 달려가 구매한 표를 소중하게 쥐고 영화 상영 직전까지 요동치던 그 설레던 마음을 기억하고 자랑스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진실로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비아 크리스텔이 <마타하리>에서 무슨 옷을 입고 나왔는지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접속>의 수현과 동현이 만나는 피카디리 극장 앞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긴 줄도 마다 않던 열정과, 열화같이 피어오르던 뜨거운 가슴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열정이 다시금 하나 될 때, 한국영화를 위한 또 다른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이제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고마운 이들을 기억하며
네오이마주가 4년을 달려오면서 세상에 펼친 많은 영화이야기들을 자양분삼아 『네오이마주 오프라인 판』 을 펴낸다. 16면 국배판에 격월간 발행이다. 모두들 이미지와 비주얼에 집착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지를 과감하게 제거하고 타이포그래피로 채워놓았다. 더러는 생소하고 낯설지도 모른다. 때문에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도록 미려한 타이포그래피를 더하고 여백의 미를 살려 편집했다. 시간이 흐를 수 록 편집과 글의 완성도가 더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창간호의 특성상, 독자의 글을 싣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다음 호부터는 온라인 웹진에서 선택된 독자의 글도 실리게 될 것이다. 네오이마주 오프라인 판은 25일 오늘!, 영화관(서울아트시네마, 인디스페이스, 씨네큐브, 아트하우스모모, 미로스페이스, 시네마상상마당)에서 만나실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간 동안 많은 필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모두 열정적으로 글을 써주었고 나름의 위치에서 기여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오프라인 판 출간을 계기로 그들을 다시 소환코자 한다. 또한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글을 보내준 객원필자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추천사를 내어준 김영진 평론가와 민병훈 감독의 후의에 각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네오이마주가 오늘까지 달려올 수 있도록 산파는 물론이고 인큐베이터를 자처하여 물심양면 지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은 (주)렉시테크의 장주식 선배와, 힘든 시절임에도 발행비용 고민을 해소시켜준 (주)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독자의 성원이 없었다면 오늘을 맞이하기 힘들었을 터이니 어찌 잊을 것인가.
이제, 창간호를 지난 시간 변함없이 네오이마주를 기억하고 응원을 보내준 독자에게 바친다. 네오이마주는 변함없이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다.
한결 경쾌해졌다. 이제 갓 세 편의 장편을 통과한 신동일 감독이지만, 그의 전작들과 비교해보자면 유머 코드는 한층 강화되었다. 보고 있노라면 영화 상영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물론 그 웃음은 전적으로 현 정부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일종의 비웃음에서 시작한다. <반두비>는 은유보다 직접적인 상징으로 대담하게 관객을 유혹한다. 남대문, mb, 촛불소녀, 쥐새끼, 수입소고기, 조. 중. 동, 이건희, (강)만수, 심지어 직접적으로 이명박을 ‘쥐새끼’라고 부르기 까지 한다. 실컷 웃기야 했지만, 시국이 하 수상하다보니 이거이래도 되는 건가 슬쩍 걱정스럽긴 하다. (이 걱정은 기우에 그치지 않고, 등급 심사에서 15세 관람가로 제출한 영화를 청소년 관람불가의 차원을 달리하는 영등위의 멋진 심사로 대응해주셨다.)
그렇다고, 그가 천착했던 영화의 사회적인 주제까지 가벼워지진 않았다. 여전히 신동일은 그 방면의 논점을 영화화 할 수 있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소중한 사회파 감독이다. <반두비>는 한국의 당찬 여고생과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 노동자 간의 우정을 그린 영화이다. 여기서 한국의 여고생은 영화 곳곳에서 상징하는 것처럼 ‘촛불 소녀’로 읽힌다. 영화의 외피는 이 촛불 소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간의 친목이 애정과 우정사이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에 어떤 욕망이 스며들고 있는지 서슴없이 까발린다. 하지만 영화의 실질적인 주제는 세대론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촛불 소녀 세대가 이주 노동자라는 소외 계층과의 연대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 사회에 대응하고 있는가를 직접적으로 조명하고, 그곳에서 희망을 찾기에 이른다.
영화는 곧잘 인물들이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비추곤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이주노동자인 카림(마붑 알엄 분)이 진입 금지가 새겨져 있는 일방통행 도로를 거꾸로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나 원어민 영어 강사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사지업소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여고생 민서(백진희 분)가 휘항 찬란한 네온사인이 밝혀진 도시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과 이제 막 서로가 친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이 서먹하게, “이제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둘 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하는 모습 그리고 미국인 영어 강사와 만난 후, 카림과 민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각 자의 길을 걸어간다.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장면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함축적으로 잘 담고 있는 상징적인 장면들이다. <반두비>는 한국 사회에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가를 살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말들이 많다. 한마디로 불순하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사회적으로 대두된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미화하고 여고생을 이주노동자의 성적대상으로 비하할 뿐 아니라 원조교제를 부추긴다고 격분한다. 상영을 못하게 막아야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개봉이 확정되었지만 어떻게든 전국으로의 확대상영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25일 개봉 예정인 <반두비>에 관한 얘기다. 물론 이 영화에 일부 관객층과 집단에게 불쾌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장면이 없지 않다. 관람자에 따라서는 뜨악할 만한 장면과 대사가 횡횡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위험하다거나 선동적이라고 매도해서는 곤란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사람들. 현실과 판타지를 혼동하는 사람들, 대중문화의 불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혹자들을 위한 것이다.
<반두비>는 정직하고 현실적이면서 환상적이기까지 한 영화다. 아, 여기서 환상이란 이주노동자나 중년남성의 판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본시 영화란 기본적으로 환상(fantasy)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는 문화가 대중과의 접점을 획득하는 도구인 핍진성과 무관치 않다. 이를테면 ‘한 발만 앞서 간다’는 대중문화의 속성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반드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되 절대로 두 발 세발 무턱대고 앞서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이주노동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하여 다문화가정을 이룬 예가 적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간주할 정도는 아니다. 섣부른 일반화는 금물이라는 것이다. 이때 드러내기 힘든 사회정서를 감안해 감추거나 드러내더라도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 그러면서 대중의 욕망전선에 침투하는 것. 이것이 ‘한 발만 앞서가기’의 전략이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사회적 코드를 놓치지 않아왔다. 그것을 가장 먼저 간파하여 상품화하는 것은 드라마와 영화이다. 이때 개별 작품들은 현실을 조금 과장하고 앞서 나가면서 이를 통해 대중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게 된다. 다만 특정 영화나 드라마가 대책 없이 끝도 없이 현실을 앞서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쓰는 말이 '막장'이다.
이렇게 볼 때, 신동일은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 여기에 상존하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한 발 앞서 그려냄과 동시에, 그의 짝으로 예의 정치사회적 코드의 전달자인 당찬 여고생을 내세웠을 따름이다. 요컨대 영화 속 소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감독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까지를 올곧이 품고 있는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다.
모름지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인물을 다룸에 있어 거침없어야 한다. 자기의 배우를 온전히 주체로 인식하되 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동일은 적어도 자기 확신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되지도 않는 도덕심에 발목 잡혀 말더듬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감독 자신이 딸 가진 아비이면서도 불온하고 당혹스러운 장면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쿠르베 식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의 근원’으로부터 막 탄생하는 새 생명의 코앞까지 카메라를 밀고 들어간 그가 아니었나. 그러니 이 영화가 이주노동자의 성범죄를 부추긴다던지, 청소년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던지 하는 식의 황당한 주장은 그만 하라. 이는 곧 “난 대중문화의 속성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요, 편협한 국수주의자”라고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일찍이 전후 독일사회에 피어오르는 ‘일상의 파시즘’을 경계했던 파스빈더 R.W. Fassbinder의 목소리가 <반두비> 개봉을 앞두고 다시 들려오게 될 줄이야. 고작 영화 한편 씹어 먹을 궁리에 불철주야 골몰하는 그대들이여. 마음을 열어, 마음을! 그래도 싫으면 말고!
드디어 한국영화에서도 인종 문제를 통해 휴머니티를 성찰하게끔 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봉할 <로니를 찾아서>, <처음 만난 사람들>, <반두비>가 그 범주에 해당한다. 이들 영화가 반가운 것은 일차적으로 현실을 쫓아가지 못하는 편견과 제도가 여전히 득세한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 더 나아가 인종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 중 <로니를 찾아서>는 가장 대중적인 화법과 캐릭터를 가지고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주인공은 안산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평범한 중년 남성 인호(유준상)다. 그가 애타게, 절망적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싶을 정도로 로니를 찾아 헤매야 할 이유는 간단하다. 한낱 이주노동자 따위가 자존심에 크나큰 생채기를 냈기 때문이다. 1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준비했던 시범대회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이주노동자 로니와의 대련에서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 그 후 시범대회 이후 폐인의 나날을 보내던 인호를 일어서게 한 건 어떤 결과를 내든 로니를 한 번 봐야겠다는 일념 하나. 그 와중에 인호는 로니의 친구인 뚜힌을 만나며 또 다른 국면을 접하게 된다.
핵심은 인호의 심리적 궤적이다. 인호는 피부와 눈동자 색이 다른 남자들이 득시글한 우리 동네에서 엉겁결에 방범대 대장으로 잠시 활동한다. 처자식 먹여 살리며 나름 성실하고 모나지 않게 살아왔던 인호는 물론 대한민국 보통 중년 남성의 의식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와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음식점, 오락실 사장이 주요한 조연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도 이에 다름 아니다. 안산이란 공간적 특수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겠지만 <로니를 찾아서>가 가리키는 바는 별다른 정치의식 없이 당연히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인 평범한 남성이 이주노동자와 갈등을 빚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보편의 드라마투르기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당연히 예상치 못한 사건에 부딪친 영호가 어떻게 반응하고, 또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는 감정의 변화에 좀 더 관심이 많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로니의 친구 뚜힌 캐릭터다. 인호와 띠동갑 범띠 사이인 뚜힌은 그간 우리가 지녔던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살짝 벗어난 인물이다. 뚜힌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반말을 일삼고 게다가 이슬람권 특유의 낙천성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산하기까지 한다. 나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인호의 체육관 후배나 다를 것이 없다. 실제로 인호보다 계급적으로 하층인 두 사람이 친구처럼 지낸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사라진 로니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뚜힌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던 인호는 몇 번의 육체적 감정적 갈등을 벌이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나이와 인종을 넘어 오히려 그와 친구가 된다.
물론 그건 예정된 수순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호는 뚜힌과 얽히면서 여러 층위의 이주노동자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술자리 시비로 묘사됐지만 인호는 뚜힌 보다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일군의 이주노동자 무리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그건 로니와의 대련과 마찬가지로 그들과의 싸움도 인호가 방범대장으로 활약했을 당시의 폭력과 맞닿아 있다. 이건 꽤나 단순하지만 명쾌한 상징이다. 우리가 먼저 자위적이면서 맹목적인 폭력을 휘둘렀을 때 되돌아오는 것은 어떤 유형이든지 비슷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인호가 친구가 된 '개인' 뚜힌과 대립하게 되는 '다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자세는 전혀 다르다. 결국 <로니를 찾아서>는 타자와 소수자라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시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을 우리의 울타리에 집어넣는 것과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것에 대한 차이 말이다.
결국 인호는 수치심을 참치 못하고 이주노동자들을 불법체류자로 고발한다. 사실 그건 못 사는 나라에서 온 피부 다른 '미개인'들은 전화 한 방으로 내쫓을 수 있다는 우리의 우월감과 오만,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모두 잠재적 불법체류자로 규정하는 우리의 무의식을 스스로 고발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고발은 며칠 사이 인호가 유일하게 한국인의 띠동갑과 다르게 소주를 까며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뚜힌을 또한 추방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하자면, 인호의 법적 고발은 우리 안의 배타적 폭력성과 비상식적인 인종적 우월감에 대한 고발인 셈이다.
그렇다고 <로니를 찾아서>를 심각한 사회고발 영화로 오해는 마시라. '휴먼드라마' 장르를 표방한 만큼 영화는 인호의 관점을 그대로 쫓아가는 편안한 드라마다. 게다가 확 깨는 뚜힌 캐릭터를 비롯해 인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서 오는 웃음을 통해 간간이 코미디와 유머를 전달해 준다. 그러한 영화의 화법은 <로니를 찾아서>를 좀 더 쉽게 인호의 성장담으로 읽게 해 준다. 특히나 감독과 촬영 감독, 배우와 제작 부장, 이렇게 다 네 명이서 방글라데시 로케를 감행했다는 클라이맥스 부분은 그러한 독해를 좀 더 강화시킨다. 그렇기에 더욱 더 뚜힌을 떠나보낸 인호가 과연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깰 수 있을까 하는 논리적 물음이 남는다. 그러나 분명 영화의 엔딩, 문을 열고 서 있는 인호, 유준상의 환한 미소는 이 모든 물음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강력한 정서적 휘발성을 탑재하고 있다. 그것이 단순히 영화적 결말로 인식될지, 인호의 진정한 변화를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