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흥미롭고, 조금은 따분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은 멍한 기분었다. <방문자>를 본 후에 경험했던 활화산처럼 피어오르던 감정의 폭발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는 없었다. 난 신동일의 2번째 작품이 데뷔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단정지었다. 이내 내 자신을 쓰다듬었다. 이건 <방문자>와는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 영화가 완전히 다르잖아. 그러니까 그다지 실망할 필요는 없는거야. 그리고 슬며시 꿈틀거리지만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었던 실망의 감정이 다른 영화에서 느꼈던 실망과는 차원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품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아서 느끼는 실망의 감정이 아니라 뭔가 나의 기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아쉬움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전혀 아닌데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봐야했다. 정확히 10여달이 지난 후, 난 처음 본 후에 느꼈던 내 실망의 감정이 실망이 아니라 실수였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감독에게 난 속아 넘어갔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내가 그렇게 감동적으로 보았던 <방문자>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난 이내 생각을 180도 돌려 이 작품을 논해야 했다. 이 작품이 가지는 다중적인 플롯에 대해서, 그리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사회의 계급과 관계를 보여준 작가의 의도에 대해서 난 힘든 고뇌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종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난 이토록 자아를 이데올로기적 무형체의 흐름으로 이입시키는 작품이 또 있었나 찾아보았다. 그런 다음에야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가지는 비상하리만치 아름다운 매혹에 정신없이 빠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묘한 관계와 이동할 수 없는 계급
신성한 결혼식이 끝나고 부부 재문과 지숙은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재문은 지숙보다 그의 오른쪽에 서있는 친구 예준에 더 붙어 서 있다. 좀 의심이 된다 싶더니, 화면은 지숙을 가려 놓은채 재문과 예준의 행복한 얼굴을 비춘다. 아내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는 없는것처럼 재문 역시 예준을 지숙보다도 더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재문은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태어난 것을 예준에게 알릴 때, 지숙이 파리에 가 있을 때 잡에 방문한 그를 바라볼 때 재문의 표정은 어딘 가 모르게 예준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영화는 그 이상 선을 넘지 않는다. 모든걸 예측하고 상상해야 하며, 절대로 결론짓지 않아야 한다. 그것만이 이 영화를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숙은 그런 관객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들의 관계를 질투하지만 과하게 표현하지 않으며 뭐라고 자기 스스로 결론 짓지도 않는다. 그냥 바라볼 뿐이다. 이 묘한 관계는 몇 번이나 엎어지고 회복되지만 끝내 파탄의 국면을 맞이하고 만다. 아기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재문은 기꺼이 예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것은 좀 급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죄까지 뒤덮은 재문은 심하게 떨고 있지만 난 그 초점에서 예준을 향한 눈빛이 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멍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물론 사건 전후를 따져봤을 때 그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전에 예준을 향한 재문의 눈빛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뭔가 그(예준)를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예준)에게 받은 것들을 보상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행한 것처럼 보여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재문이 사랑한 사람은 지숙이 맞다. 그리고 또 다시 난 지숙을 만나기 전부터 예준과 재문 사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심해 보았다. 도통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지점들이 산재되어 있다. 이런 지점들이 이 영화를 더 신비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닐까?
관계성과 함께 이 영화를 종단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계급성이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분한 감독의 특징이 이번 작품에도 때론 노골적으로, 그리고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재문과 지숙은 서민층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동네 미용실을 하는 지숙과, 공항 레스토랑의 요리사로 일하는 재문은 우리가 볼 때 지극히 평범하다. 그들이 서로 혹은 따로 자신의 계급에서 한단계 도약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chef'가 되려고 하는 'cook' 재문은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려 한다. 그것은 정말로 'chef'가 되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이민을 도우려하는 예준은 재문에게 넌 'chef'가 아니라 'cook'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니 애초부터 재문에게는 계급 상승 도약의 희망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당연히 그것은 실패하고 만다. 지숙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이민계획이 실패하고 아이까지 잃자, 지숙은 또한번 예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간다. 유학 후 다시 돌아와 강남에 큰 테라스가 있는 미용실을 오픈하며 상류 사회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니 재문과 지숙은 허상의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소비하고 점점 더 본질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재문'이라는 인물로 인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재문은 '허상의 욕망'을 대표한다. 그가 가지는 부와 명예, 지식과 능력은 보기에 좋지만, 허울뿐이고 주변 사람을 괴롭힌다. 그 욕망을 맛보는 순간, 혼란스러운 굴에 빠지게 되며 그 곳에서 다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달아도 삼킬 수는 없는 것,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은유한다.
대립적인 인물의 지속적인 등장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은 이 작품의 예준과 재문으로 변주된다. 그들의 관계나 특징은 정확히 이 작품으로 지속되는데, 그것은 몇 가지로 알 수 있다. 타락한 지식인을 대표하는 호준은 감정에 휩싸이는 법이 없다. 자신의 말을 분명히 하고 지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적잖이 퇴폐적이다. 순수 영혼을 대표하는 계상은 재문으로 이어진다. 그는 순전히 착한 마음을 지녔으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마음도 일관적이다. 그것이 무엇을 바라건 그렇지 않건. 전작에서 인물들이 티격태격 대립되고 갈등한 것에 비해서 이번 작품에서는 갈등이 별로 보여지지 않는다. 인물 속의 대립 속에서 감화되었던 호준과 계상과 달리, 예준과 계상은 이미 그런 사이로 시작되며 오히려 역으로 관계가 악화된다. 이런 지속되고 변주된 인물을 보는 것은 이 영화의 또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친구 이상의 관계는 여전하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사건의 발전 양식은 반대이기에 흥미롭다. 그러므로 신동일 감독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그들을 서로 맺고 흔들며 돌이켜 보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것은 앞으로 계속될 그의 영화에서 확장되고 또다시 변주될 것이다.
타고도 용서할 수 없는 욕망
다시 되돌아 온 재문과 지숙은 그들의 옷에 맞는 한적한 미용실에서 다시 삶을 살아간다. 허황된 욕망을 불로 태워버린 지숙은 선택은 현명했던 것일까? 하지만 모든 것이 재로 타 날아가 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그들을 흔들어 놓았던 허상의 욕망 '예준'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는 예준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편지가 배달됨을 끝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편지는 누구에게 온 것일까?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는 제목이 문뜩, 그리고 불현듯 생각나게 하는 결말이다. 그들의 욕망은 타고 없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 누구에게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 난 확실했다. 타고도 용서할 수 없는 욕망. 다시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와 평범한 본래의 옷을 입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욕망은 끝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 용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이 위대한 감독의 연출 앞에서 이렇게 깊이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 흔적을 남기려는 감독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감독의 그러한 치밀한 고민의 흔적이 온전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시대의 놓여진 깊은 사회 문제와 온전치 못한 기운들을 모든 사람이 방관한 채 다른 기류들로 편승할 때, 감독은 뚝심있게 자신의 할 말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범하게 건드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내가 깨달았던 실수는 이런 연유인 듯 하다. <방문자>가 겨울을 배경으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기온'을 가지는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은 대부분 여름을 배경으로 찍었는데도 '영하의 기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두 영화의 이질감은 곧, 기온의 차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물, 관계, 이야기의 흐름과 감독의 성향을 미루어 봤을 때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속았다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2번 이상은 봐야하며, 3번 이상은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론 이 영화에는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스산한 감정의 동요가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이다. 좀 더 오래 이 느낌이 전해질 것 같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는 기묘한 영화제목처럼 규정할 수 없는 감정들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것들이 내 안에서 잠전되는 데에는 아마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난 감독의 3번째 작품 <반두비>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 보다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지낸 한 해였습니다. 관객은 줄어들었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천만 영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1000만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재앙을 불러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2008년에 개봉된 영화가 다른 해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초대형 흥행작은 없었을지라도, 비록 할리우드에 자리를 많이 내어주었을지라도, 한국영화는 끊임없이 관객과 만나면서 그 성가와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고 또 더러는 새로운 영화문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했으며, 또 어떤 영화는 실망스러운 만듦새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2008년을 보내면서 한국영화 베스트5를 선정합니다. 네오이마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영화평론가와 영화기자 그리고 편집스태프와 독자 두 분까지 총 열 두 분이 질문에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공간을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네오이마주가 선정한 2008년 최고의 한국영화는,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입니다. 2위인 <밤과 낮>과 박빙의 접전 끝에 1위를 차지했습니다. 1순위에서는 <밤과 낮>이 앞섰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전 참여자의 고른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막판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이용철 평론가의 말처럼 “이 영화는 최고의 만듦새라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아쉽게도 2위에 머물렀지만 <밤과 낮>은 홍상수의 문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인 동시에 연초에 개봉되었음에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겨질 정도의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입니다. 또한 데뷔작으로 베스트5에 이름을 올린 나홍진, 이경미 감독은 올해의 성취 또는 발견이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멋진 하루>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어김없이 순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비록 정식 순위에는 빠졌지만,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날 그 길에서> <경축! 우리사랑> <연인들> <마지막 밥상> <나의 노래는>이 그것들입니다. 실망스런 많은 영화들과 영화계를 둘러싼 많은 사건 속에서 건진 이처럼 보석 같은 한국영화들이 있었기에 한국영화는 내년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한국영화는 그리고 네오이마주의 한국영화사랑은 계속됩니다. (편집장)
(백건영) 세대론 위에 쌓아올린 계급과 자본의 바벨탑,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영) 통속 드라마가 사회와 인간과 세상에 촘촘히 자리 잡을 때, 한낱 영화가 얼마만큼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 (하성태) 올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 만큼도 정치성을 띤 영화가 없다는 것이 개탄할 노릇. (강민영) 2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에 들어맞는 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서대원) 이런 영화가 이제 서야 나오다니 ㅜㅜ 오뉴월에 헛방귀 나오듯 허망하고 씁쓸하다 (이용철)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를 선택했다. (신태균) 인생사 GIVE & TAKE, 그 지리멸렬한 관계의 층위를 해부하다. (민용준)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빈장원) 계급성과 관계성 모두를 아우르는 뚝심 있는 연출의 힘이 넘치도록 느껴지는 소외작.
2위 [밤과 낮] 홍상수
(백건영) 일상성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욕망의 구체화, 홍상수 영화 중 단연, 최고! (하성태) 목욕탕 창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앉은 돼지의 얼굴만으로도! 그러니까 이제 홍상수의 남자들은 집에 돌아와도 불안을 면치 못하는 게다. (강민영) 홍상수의 영화는 '2년'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용철) 예술적 완성도로 보면 올해 작품 중 단연 최고다. (민용준)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3위 [멋진 하루] 이윤기
(백건영) 우리도 꽤나 근사하고 실감나는 도시영화를 가지게 되었구나. (서유경) 멋질 수 없는 하루, 그 사이에서 바라본 윤기 있는 관계. (이용철) 감독의 주제의식이 계속 확장되고 심도 깊어지는 데 주목했다. (민용준)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빈장원) 메마른 도시를 가로지르는 여정에서 생의 향기의 그윽함을 깨닫게 되는 그녀의 하루.
4위 [추격자] 나홍진
(백건영) 장르영화에의 성취와 우려를 한 몸에 받고 우뚝 선 문제작 (서유경) 숨을 참았다. 그 시간도 아까워서. 몸이 오그라들게, 숨이 가쁘게, 그렇게 영화는 나를 추격해왔다. (박부식) 이 영화 자체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국의 현실'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 (서대원) 관람 후 강장제 한 병 피로회복제 두알 복용할 만큼 심신이 고단한 영화! 그러기에 인상적인 작품! (이용철) 그간 한국의 장르영화는 대중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부족했다. 그런 점을 극본한 중요한 사례다. (신태균) 언-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충격적 우화. (민용준)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정희승) 지독한 감독 지독한 배우 지독한 마무리 그러나 빼어나다.
5위 [미쓰 홍당무] 이경미
(이영) 기괴하고 놀라운 캐릭터의 영화. 화해, 화합, 이해하는 척하는 마음 따위는 걸러낸 까칠한 일방통행. 특이하다. (서유경) 삽질은 마음을 키우지 않고 팔 근육만 키웁니다. 삽질한 여자들만의 오덕스런 공유지점. (박부식)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올 때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다. (서대원) 여드름 땀시 불타는 미스터 고구마 불렸던 내 유년시절을 한방에 환기시킨 이경미 감독의 근사한 입봉작! (민용준)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5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백건영) 소재보다 사람에 집중한 임순례의 힘, 신파는 감동이 되고 추억은 눈물을 부른다. (이영)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무난함에 진심을 전달하는 핵심을 가진 영화 (하성태) 스포츠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과 내러티브에 여성과 핸드볼이란 타자성을 절묘하게 매치시킨 임순례 감독의 뚝심. (강민영) 기대했던 그녀의 작품에 2%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는 영화 (정희승) 빤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눈물의 도돌이표, 역시! 임순례
<6위 ~ 10위>
<순위권 밖 그러나 기억해야할 영화들>
- 참여자별 선정작 및 20자평
백건영(편집장/영화평론가) [밤과 낮] 일상성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욕망의 구체화, 홍상수 영화 중 단연, 최고! [멋진 하루] 우리도 꽤나 근사하고 실감나는 도시영화를 가지게 되었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세대론 위에 쌓아올린 계급과 자본의 바벨탑,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추격자] 장르영화의 성취와 우려를 한 몸에 받고 우뚝 선 문제작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소재보다 사람에 집중한 임순례의 힘, 신파는 감동이 되고 추억은 눈물을 부른다.
이 영(편집스태프) [이리]와 [중경] 절망을 응시하게 하고, 희망을 귀담아 듣게 하는 이방인 감독의 메시지. 괴롭거나, 외롭거나, 그렇지 않거나...세상을 떠도는 절망과 희망의 기운에 대해 말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무난함에 진심을 전달하는 핵심을 가진 영화 [고고70] 여전히 유효한 '닥치고 놀자!' 그들의 음악은 건물을 넘고, 그 때 그 시절의 억압된 열기는 시대를 넘는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통속 드라마가 사회와 인간과 세상에 촘촘히 자리 잡을 때, 한낱 영화가 얼마만큼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 [미쓰 홍당무] 기괴하고 놀라운 캐릭터의 영화. 화해, 화합, 이해하는 척하는 마음 따위는 걸러낸 까칠한 일방통행. 특이하다.
하성태(편집스태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포츠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과 내러티브에 여성과 핸드볼이란 타자성을 절묘하게 매치시킨 임순례 감독의 뚝심. [밤과 낮] 목욕탕 창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앉은 돼지의 얼굴만으로도! 그러니까 이제 홍상수의 남자들은 집에 돌아와도 불안을 면치 못하는 게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올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 만큼도 정치성을 띤 영화가 없다는 것이 개탄할 노릇.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한 영화 안에서 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들과 장철(서극)의 외팔이 시리즈와 성룡의 활극을 한 꺼 번에 만나는 흥겨움. 류승완이여, 한국의 드 팔마가 되어주시라. [고고70] 부족한 구석이 차고 넘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큼의 완성도를 지닌 음악영화가 드디어 나왔다는 점에 한 표!
강민영(편집스태프) [밤과 낮] 홍상수의 영화는 '2년'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기대했던 그녀의 작품에 2%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는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2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에 들어맞는 건,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고고70] 누가 뭐라 하든, 여기서는 한 판 크게 벌리고 놀 자유가 있다! [영화는 영화다] 저예산 상업영화의 재미. 제법 잘 짜여 진 연출의 재미. 이만하면 충분히 즐기고 놀 수 있는 영화의 '기능성' 풍족함.
서유경(편집스태프) [비몽] 몸이 쓰라렸다. 정신도 욱신거렸다. 마음은 흐릿해졌다. [미쓰 홍당무] 삽질은 마음을 키우지 않고 팔 근육만 키웁니다. 삽질한 여자들만의 오덕스런 공유지점. [연인들] 알고도 손을 놓았고, 손을 놓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연인들]은 다가왔다. [멋진 하루] 멋질 수 없는 하루, 그 사이에서 바라본 윤기 있는 관계. [추격자] 숨을 참았다. 그 시간도 아까워서. 몸이 오그라들게, 숨이 가쁘게, 그렇게 영화는 나를 추격해왔다.
신태균(네오이마주 스태프평론가) [고고 70] 놀이판의 신명으로 답답한 세상에 맞장 뜨다. 데블스는 최루탄 가스 속에서 연주하며 노래했을 뿐이고, 난 박수 치며 환호할 뿐이고. [추격자] 언-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충격적 우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인생사 GIVE & TAKE, 그 지리멸렬한 관계의 층위를 해부하다 [사과] 농담 아니라 이 영화 보고 난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혼이란 걸 꼭 해야 되는 건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평원을 달리는 사내들에 대한 집착으로 만들어낸 가장 비싼 마니아, 혹은 오마주 영화
박부식(영화평론가) [미스 홍당무]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올 때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다. [사과] 결혼은 연애의 죽음, 그러나 삶의 새로운 시작임을 말해주는 영화 [영화는 영화다] 올해 한국영화가 거둔 가장 값진 수확 [마지막 밥상] 영화적 실험이 서사를 거스르지 않는 매우 독창적인 영화 [추격자] 이 영화 자체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국의 현실'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
서대원(무비스트편집장) [영화는 영화다] 노회한 충무로에 일침을 가한 애송이 장훈 감독의 멋진 데뷔작! [다찌마와 리] 이런저런 눈치 안 보고 지 꼴리는 대로 찍은 류승완의 대 첩보어드벤처액션로망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이런 영화가 이제 서야 나오다니 ㅜㅜ 오뉴월에 헛방귀 나오듯 허망하고 씁쓸하다 [추격자] 관람 후 강장제 한 병 피로회복제 두알 복용할 만큼 심신이 고단한 영화! 그러기에 인상적인 작품! [미쓰 홍당무] 여드름 땀시 불타는 미스터 고구마 불렸던 내 유년시절을 한방에 환기시킨 이경미 감독의 근사한 입봉작!
이용철(영화평론가)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를 선택했다. [멋진 하루] 감독의 주제의식이 계속 확장되고 심도 깊어지는 데 주목했다. [밤과 낮] 예술적 완성도로 보면 올해 작품 중 단연 최고다. [사과] 한국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전범. [추격자] 그간 한국의 장르영화는 대중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부족했다. 그런 점을 극본한 중요한 사례다.
민용준(무비스트기자) 편집장인 백건영평론가의 부탁으로 리스트를 작성하긴 했으나 순위를 뽑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여하간 올해 개봉했던 한국영화 리스트를 쫙 펼쳐놓고 작품을 걸러냈다. 인상적이라 생각했던 한국영화의 목록은 이렇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추격자> <밤과 낮> <님은 먼 곳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멋진 하루> <비몽> <영화는 영화다> <미쓰 홍당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과속 스캔들>까지, 순서는 대략 개봉 순이다. <우린 액션배우다>는 보지 못했고, 장률 감독의 <경계> <중경> <이리>도 못 본 관계로 리스트에서 누락됐다. 여하간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 5편을 선정했다. 지극히 사적이고 순간적인 선택으로 좌우된 리스트일지도 모르니 지나친 간섭은 자제를 요망한다. 이런 개인적인 리스트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니까, 누가 최고라고 부추겨주지 않아도 고유의 가치는 보존되는 법이다. 순위는 그저 사족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여하간 내년에도 좋은 한국영화를 여러 편 만나길 고대한다.
[밤과 낮] 홍상수의 남자들은 언제나 비루하게 흔들리고 홍상수의 여자들은 그 흔들리는 남자에게 마음을 잘도 열었다 닫곤 한다. 밤과 낮이라는 차별적 서사 안에서 파리와 서울이라는 이질적 공간이 반대편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동시간에 놓인 반대의 영역적 공간이 물리적 시간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서로의 차이를 동일하게 보존하고 있음이 체감될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신비롭다. 무덤덤하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되풀이 되는 순간들이 경이롭게 발견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말하는 쿠르베의 그림처럼 일상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영화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밤과 낮>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실로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이 아닐까. 현실에서 곧잘 보지 못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미쓰 홍당무] <미쓰 홍당무>는 올해의 발견이다. 물론 <추격자>도 발견이라 말해야겠지만 <추격자>는 그보단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추격자>가 문법적 응용이라면 <미쓰 홍당무>는 문법의 창작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자 박찬욱 감독의 영향력이 종종 엿보이긴 했지만 <미쓰 홍당무>는 분명 이경미감독의신선한재능이앙칼지게드러난수작이다.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태도로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동시에 생경한 드라마로 호응을 이끌어내고 종래엔 동감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이경미감독만큼이나공효진과서우도발견이라할만한재능을드러냈다. 여성 감독이 빈곤한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스토리가 먹혔다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이한 창의력으로 말이다.
[멋진 하루] 오래 전 헤어졌던 전처가 찾아왔다.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 이상한 만남에 이어 이상한 동행이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이상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동선과 감정의 궁극적 종착지는 낭만을 통한 치유에 있다. 서울 곳곳의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드넓다. 카메라의 탁월한 구도 감각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행하는 두 사람의 심리 변화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되는 인상이다. 단 하루 동안 지속되는 동행엔 지난 로맨스의 낭만이 깃들기도 하고, 삭막한 현실의 암담함이 그늘지기도 한다. 그 만남은 결국 도피적 일탈이 아닌 치유적 여행이 된다. 350만원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의 금액은 희수의 태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넘치는 병운의 낙관적 태도는 그 예측불가능한 동선을 그린다. 삭막해서 무료한 삶에 생기가 돈다. 지난 로맨스에서 비롯된 채무관계가 추억을 복원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따뜻하다. 해프닝 같은 사연으로 깊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깊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이다. 지극히 사소한 방식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선사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골목을 빽빽하게 메운 차량들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퇴근하고 나서도 상사의 복귀 명령에 다시 회사로 달려가야 할지 모를 불안감에 떨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이 영화는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을 실감하게 한다. 물론 그런 비극 같은 상황을 엮어내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극적인 재미가 충분하다. 관계가 뒤엉키는 찰나가 파국으로 빚어지는 여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지고 펼쳐진다. 정치적인 메타포들이 하나같이 극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때때로 시치미 뚝 떼고 제 얘기를 한다. 가볍게 유희적이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게 엄숙하다. 소심한 척은 다하면서 극단적인 세기를 보여준다. 2년 만에 개봉했다는 게, 그리고 고작 4개관에서 개봉됐다는 게 아이러니할 정도의 수작이다.
[추격자]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 됐다. 하지만 <추격자>는 분명 중요한 영화다. 날것의 기운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기운이 장르적으로 밀착해서 완전한 몰입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적인 영역을 넘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범한 재능을 지닌 신인 감독의 성공이, 탄탄한 내공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의 성공이, 그리고 그런 영화를 지지한 관객들의 움직임이, <추격자>의 진면목이다. 정서적으로 암울하고 지독하게 잔인한 이 영화의 악랄함이 끌어낸 호응의 수치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솔직한 정서에 가깝다. 수많은 시상식이 이미 이 영화의 가치를 지겹게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영화에서 부족한 어떤 요소가 분명 <추격자>에 존재한다. 물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든 영화에 속한다. 우린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 영화가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배경에 대해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추격자>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정희승(독자) [영화는 영화다] 마지막 한 방을 위한 장훈의 김기덕식 간지 퍼레이드 [어느 날 그 길에서] 진정성이란 이런 것. 다큐멘터리의 처연한 매혹 [추격자] 지독한 감독 지독한 배우 지독한 마무리 그러나 빼어나다 [사과] 사랑에 관한 쓰디쓴 필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빤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눈물의 도돌이표, 역시! 임순례
빈장원(독자) [멋진 하루] 메마른 도시를 가로지르는 여정에서 생의 향기의 그윽함을 깨닫게 되는 그녀의 하루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계급성과 관계성 모두를 아우르는 뚝심 있는 연출의 힘이 넘치도록 느껴지는 소외작 [경축, 우리사랑] 불륜과 욕망을 시원한 바람처럼 유쾌하게 가로지르는 대범성을 가진 작품 [이리] 낯선 이들의 낯선 공간과 시간을 천사 같은 소녀를 통해서 어루만지는 장률의 솜씨 [나의 노래는] 확실한건 그래도 희망은 존재함
이해할 수 없다. 순응하지 않는 자가 쓴 맛을 보는 세상이다. 국가에서 실시한 학력성취도 평가를 거부한 교사들이 파면 혹은 해임되었다. 단지 아이들을 위해서 그들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었을 뿐인데, 국가는 복종의 의무, 성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얼토당토아니한 이유를 대어서 전례가 없는 중징계를 내렸다. 옳거니! 그들은 아마 본보기로 자신들이 의도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지를 과감하게 실행한 것이리라. 큰 일을 결정할 때는 그렇게도 우유부단 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존심과 관련된 일 앞에서는 한 순간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파면·해임된 교사들이 방송에 나와서 울부짓으며 말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말도 안되는 불합리가 몇 천만의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행되고 있다. 물론 그것을 집행하는 이의 손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을 순순히 받아들인 교사들보다 중징계를 받은 이들이 행한 일의 값어치가 더 큼에도 불구하고, 법의 처벌 앞에 단 한순간에 심신은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다. 변화는 가능할까?
수오 마사유키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굉장한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다. 여기서 '나'에 해당하는 텟페이를 쫓아가는 관객들은 마치 텟페이의 편에 서서 촛불집회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억울함을 공유하게 된다. 법정에서 텟페이의 재판을 지켜보는 방청객은 곧 영화를 보는 관객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재판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텟페이가 겪는 고통과 형사재판집행의 모순들의 실체를 보게된다. 그런 후에 비로소 왜 텟페이가 그토록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묵묵히 내뱉는지를 알게 된다. 단 0.1%의 승리할 수 있는 확률에도 텟베이가 법정에 나갈 것을 선택한 이유는 당연해 본다. 왜냐하면 거의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장벽처럼 보이는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그것이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99.9%의 사람들은 권력에 순복하고 마는 것이다. 텟페이는 그런 사람들 속에 숨겨진 목소리, 양심을 끄집어 내게 하는 캐릭터이다.
비전형성의 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철저히 전형적인 흐름을 벗어난다. 우리가 재판을 다루는 영화를 볼 때 보통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 작품은 피고인에 입장에 서서 진실을 규명하려 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피고자는 범죄를 저지른 극악한 인물, 냉혈인데 반해, 여기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인물을 보여준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피고인 자체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은 텟페이, 그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지만 우리들이 생각하고 그 자신이 느끼는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피고인이라기 보다는 또 한 명의 피해자라고 해야 옳다. 더불어 비전형성의 힘으로 작품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부분은 '결말'이다. 텟페이와 가족,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 거의 누명을 다 벗은 것처럼 보였는 데도 불구하고, 결국 텟페이는 유죄판결을 받는다. 출근 길 전철에서의 10여분 동안 있었던 일들의 오해가 오랜 기간 그를 피말리게 했음에도, 변명조차 제대로 늘어 놓지 못하고 패소하고 만다. 우리 또한 그 마지막에서 어느 정도의 답답함이 풀릴거라 믿었건만, 오히려 지독한 공포를 맛보게 된다. 전혀 해결되지 않는 막막함. 불가능한 변화들.
그래서 이 영화는 지독하게 어둡다. 어두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데 안개에 휩싸인 마음처럼 어두워 막막한 심정이다. 불합리라는 것은 생의 지옥에서 다시 불구덩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힘을 가진다. 그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작품은 여러군데서 보여준다. 그 중 중간에 갑자기 판사가 바뀌는 대목은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 전까지 재판장을 지키던 판사는 피해자와 피고인 그리고 그들의 변호사들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듣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갔는지, 누가 보냈는지 어느 순간 나타나지 않는다. 갑자기 교체된 판사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로지 피해자 편에 선다. 그래서 그는 경찰과 국가의 권력의 한 대리인의 표상처럼 보인다. 만약, 한 쪽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어리석게도 남들이 하지 않는 한 쪽을 선택하면 자신이 편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 다시 텟페이가 항변할 수 있는 존재는 피해자측도 판사쪽도 아닌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둡고 막막한 현실인가?
불가능한 변화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텟페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내 마음 속, 나는 아니면 된다. 난 그말이 엄청난 희망처럼 들렸다. 영화는 그 이후의 일은 전혀 보여주지 않고, 항소 후 재판이 이루어질 장소만 비추면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그곳에서 텟페이가 전과는 다른 그 무언가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기가 굳고 하게 처음부터 지켜왔던 신념, 그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실을 밝혀줄 사람이 자기 주변에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이 작품은 우리가 이 사회에서 안고 살아가는 모순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고 어지럽게 하는지를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진지함이 이 영화를 끝까지 바라보게끔, 다시 반추하게끔 하는 동력인듯 하다. 그 끝무렵, 파면 그리고 해임된 우리 교육 현장의 텟페이와 같은 교사들은 과연 희망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불가능한 변화를 '가능'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진 초심, 그리고 신념을 잃지 않는다면 난 어쩌면, 가능하리라고 본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을 보고 나오면서 티켓을 매만졌다. 각각의 영화들에 대한 명사적인 이름은 넘겨두고, 그 영화들이 제시한 형용사적인 느낌은 잠시 증발시키고, 그저 나는 영화를 '봤다'는 동사 행위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쓸 글과 맥락을 같이 하는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된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독립영화라고 불리는 것을 봤을 뿐이니,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나는 장기하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라는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장기하 노래가 좋다. 그는 달이 차오르니 어딘가로 가자는 권유를 해준다. 비워진 달이 채워진다는 아주 기하학적인 발상, 그리고 머물러있는 곳에서 가자는 것. 빈 것에서 채워진 것으로 달의 심상이 변하는 동안 나의 동선까지 고려해주고 있다. 개인의 생활 안에 달의 움직임을 넣어주는 셈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사실상 그 목적지는 말하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자는 말은 피상적인 것이고, 실상은 내가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내가 '싸구려'를 마시는 생활을 하고 있고, '가자'는 권유를 들으니 '머물러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가는 셈이다. 이런, 그에게 공감적인 지지를 보내는 심리적인 근거가 다 있었다.
그렇게 인간은 합의들을 했나보다. 사랑과 관심은 피상적인 언어로서 치유를 해준다. 그래서 결국에는 원초적으로 갖는 욕망과 생각들이란 공유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걸로 상처를 받는 동시에 치유를 할 요량으로 이야기들을 생성해낸다는 것. 그것들을 유려한 재능과 솟구치는 희망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다시 사랑과 관심에 대한 피상적인 언어들로 돌아올런지 모른다. 아주 진솔했던 경험들은 개인의 필터링을 거쳐 스크린에 상영된다. 내 외피를 겉돌며 내 안의 불안과 마주할 것을 권유해낸다. 피상성은 그렇게 내 안으로 다가와 공유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유의 촉매제는 시련에 대한 공감형성이다. 그것은 나의 가치가 짓밟히고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들에 의해 나의 가치들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시련의 씨앗이 어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마음에 있던가. 외적인 상황이 그 씨앗이 되는 것이라면, 그 씨앗이 '외부'에 있다는 인식을 한다는 것이 '내'가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여기에서 독립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개별성이다.
내적인 주관을 옹호한다는 건 그것을 억눌러버린 것과 관련지어지는 자연스런 운명일 것만 같다. 억눌러지지 않았더라면 다른 표출법에 의해 제기되었을 개별성. 그러한 흥미로운 개별성에 대한 실험들은 젊은 순환이다. 달은 차오르고 기운다. 밤도 깊어지고 날이 샌다. 독립 안에서 개별성은 은근히 공유성을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서독제 관람 티켓을 매만지면서 그런 생각에 빠졌다. 각자의 개별성 끝에 완전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특히나 가장 무시당했던 욕구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고양된 의식의 영역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따라서 파괴와 야만성을 주었던 시련의 맥락은 개별의 필터링을 거치며 이겨내야 할 시련으로 거듭난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감흥은 비록 피상적이어서 곧 잊어버리는 것이라 하더라도 재생으로 수렴할 수 있는 순환구조라는 것에 이르기 까지. 어디 독립이 괴리와 유사한 뉘앙스였던가. 나는 남과 다르다고 외치는 구호 중의 하나였던가. 독립이란 정체성으로 영화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할 수 있으면 된다. 소홀하게 여겨졌던 개인을 되살리는 힘이 자신의 주관이고 독립인 셈이다.
생에 적응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다. 그 중에서 현명하게 여겨지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갈망들을 변덕스러움, 감정, 미신 등의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혹은 그것들을 조율을 해내야 하는 것이 과거(라고 믿고 싶은 시대)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다소 맥락이 바뀌기는 했으나 여전히 내적인 관심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것과 눌러버려야 하는 것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갈망들은 자아가 아니라 부추겨지는 충돌인 셈이다. 그게 본질이었겠나 싶은 생각에 회의가 들 즈음 떠올랐던 생각은 그 자체로서 구별하려는 잣대로 하여금 자신의 개별성들을 발견해가는 것에 의미가 있겠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배제됐던 주관성들은 다시금 고려될만큼 너무도 중요했고, 중요했던 것들은 다시금 드러날 양태를 닦고 있었던 셈이다. 건물이 지어지지 않은 땅들이 건물들에 의해 길로 만들어진 셈이다.
빛없는 어둠은 있어도 어둠없는 빛은 없다고 했다. 본능으로부터 유발된 세계에 명암의 호오가 뚜렷한 빛줄기가 형성되면 내면세계는 희미한 지각을 해내간다. 그 빛이 연약하다면 윤곽을 잡을 것이고, 강렬하다면 형태의 색채와 표면의 그늘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독립 안에서 개별성은 은근한 매력으로 공유된다고 서술해놓고는 조심스럽게 공유해야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싶다. 각 개인들의 방정식들은 끝내 항등식으로 수렴할 것이다. 가장 복잡다단한 것은 단순한 매커니즘이 엉키는데서 유발된다. 지엽적인 설화와 부분적인 상처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설명해낼 수 있겠다. 주관적인 상황과 독립이라는 매력이 현대인들을 설명해내는 신화요소를 담고 있을지 모르겠다. 각개가 얼마나 동의하든, 각개가 얼마나 홀로 있든, 각개가 얼마나 멀리 위치하고 있든.
영화의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나는 기영은 “어둠이 깊다는 것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고 독백한다. 그 시간, 그를 사랑했기에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다방 여급 영숙은 경찰차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물론 관객과 감독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사 피치 못 할 사정 때문에 역에 나타나지 않아 혼자 떠날 수밖에 없을 지라도, 기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독백에 최소한 “기다렸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떠나게 되서 미안하다”라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민주화와 민족을 앞세워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짓는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며 내레이션토록 만드는 장면에서 정말이지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한 여자의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 이미 바닥에 떨어져 탄광촌이라는 막장까지 흘러들어온 티켓다방 여급을 살인자로 만들면서까지 민주화로 상징된 남성이데올로기가 그렇게 숭고한 것이었냐는 말이다. 1990년대 코리안 뉴시네마의 씨를 뿌렸다는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전 영화가 떠오른 것은, 이충렬 감독의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에서 유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 보였고 2008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내년 1월 열리는 선댄스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국제경쟁부문에 출품되기도 한 <워낭소리>는, 평생을 밭에서 살아온 촌로와 30년을 한 결 같이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늙은 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노인은 일흔 아홉 평생 동안 소를 도구삼고 벗 삼아 일만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소에게 해가 될까봐 농약도 안치고 우직하게 전근대적 농업방식을 고집한다. 소의 도움으로 9남매를 키워냈고, 평생을 함께했으니 자식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터이다. 영화 내내 할머니는 “시집 잘 못 와서 고생만 죽도록 하고 살았다”며 “소가 없어야 내가 고생을 안 할 텐데”라고 푸념해댄다. 그도 그럴 것이 소가 없다면 할아버지가 밭에 나갈 일도 없을 테고 그래야 할머니의 힘든 일상이 종지부를 찍을 것이기 때문이다. 젓가락처럼 가늘어진 왼쪽 다리에 발가락 탈골이 생겨도 몸에 밴 부지런함 때문에 노인은 쉼이 없다. 어김없이 소에게 꼴을 먹인 후 밭으로 끌고 나가니, 사람이나 소나 못 할 짓이다.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수의사에 말에도 아랑곳 않고 소를 부리는 노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지는 소의 죽음.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땔감을 지어 나른 녀석이었다. 죽음 직전에서야 평생을 옭아맨 코뚜레를 풀어주는, 클로즈업 된 노인의 거친 손은 둘의 지나온 시간을 말해준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해방되는 기구한 운명이 여기에 있다.
<워낭소리>는 보는 이의 가슴을 한 없이 요동치게 만들다가 기어이 눈물짓게 만드는 놀라운 다큐멘터리다. 영상과 편집, 관객의 정서적 동참을 끌어내는 흡인력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어찌 이토록 매몰차게 일을 부린다는 말인가.
소를 좀 쉬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까? 영화적으로 보자면(노인은 곧 소라는 점에서) 논점에서 빗나갔음을 잘 알고 있고 노인을 비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계화영농을 거부한 채 유기농에 매달리는 노인의 고집스러움과 농사로 아홉 남매를 키우자니 소의 희생이 요청되었다는 점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차피 소의 역할이란 것이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제공하거나 품종개량에 이용되는 정도에 국한되지 않던가.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한국적 정서와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진정성 넘치게 빚어낸 것과는 다른 차원의 논란거리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달리 보면 영화 속 소의 일생은 분명히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비극 그 자체일 수 있고 해외상영의 경우 동물학대 차원으로 확대 해석될 여지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들과 할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소를 팔러간 우시장에서 소가 눈물을 흘릴 때 <식객>에서 대령숙수 경연의 최종 심사를 앞둔 성찬을 위해 도살장으로 들어가던 소의 눈망울이 오버-랩 된다. 소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자, 노인은 “좋은 곳으로 잘 가”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저 놈이 노인네 겨울 따뜻하게 보내라고 나무를 다 해놓고 갔다”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다큐멘터리가 창작자의 의도와 주관에 따라 편집된다는 점에서 영상화된 완성판에 담기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소의 죽음이후 누워버린 노인의 뒷모습에서 차마 입으로 전하지 못한 그리움과 슬픔의 무게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돌아누운 노인의 신음소리가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넨다는 것,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사실이지 너무 미안한 지경에 이르면 미안하다는 말조차 잘 안 나오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Sorry Seems To Be The Hardiest Word 라는 노래가 나왔을라고. 그래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재문은 말한다. “빈말이라도 미안하단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그렇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기영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도,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것은 자신으로 인해 인생을 담보 잡힌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담아 놓은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입으로 소리 내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때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미처 말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말하자. 미안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