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첨단 디지털 시대인데 여전히 아날로그적 사고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들은 현실감각이 뒤쳐진다는 이유로 세인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화만 봐도 그렇다. 화면가득 채워진 현란한 그래픽과 판타지로 덧칠한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관객에게 평범한 영상이나 예상을 깨버린 스토리 텔링이 외면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때로는 좀 더 깊게 성찰하고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법도 배워야 할 것이다. 서부개척 시대가 끝났음에도 목가적 낭만을 꿈꿨던 개츠비나, 사회와 인간의 기본 규칙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레보스키 앞에 ‘위대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뜬금없이 개츠비와 레보스키를 들먹이는 이유는 <맘마미아!>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볼만한 사람들은 얼추 다 본 영화를 이제야 본 것이 조금은 억울하고 그보다는 더 많은 관객들 속에서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시종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으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막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은,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한 기묘한 느낌이 장시간 지속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냥 좋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이 이러할까. 「예술은 해석하거나 설명될 수 없는 순수한 경험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수전 손택의 말은 그래서 여전히 참이다.
일찌감치 <맘마미아!>의 개봉을 알았음에도 기왕에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데다가 뮤지컬 영화가 큰 히트를 친 전례가 드문 일인지라 관심밖에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테고, 노래 또한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서 구성진 컨트리 실력을 유감없이 선사한 바 있으니 더 보여줄 특별한 게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있기도 하였다. 게다가 피어스 브로스넌과 건조한 캐릭터만 골라서 연기해온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춘다는 것은 별로 상상을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이마저도 미덥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한창 흥행몰이를 할 때도 인연이 닿으면 보겠지 하는 심정으로 밀쳐두었던 것이다. 건방지게도 흥행 뮤지컬에 기대어 쉽사리 돈 푼께나 만져볼 속셈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품었더랬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으니, 영화 내내 발을 구르는 등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밀고 올라오는 뜨거운 어떤 힘으로부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오판은 ‘몸으로 배우고 익힌 것은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간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아바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요, 70.80년대의 숱한 밤을 지새워 공부했던 지금의 40~50대들의 뇌리에 가장 많은 레퍼토리로 남겨진 주인공이 아바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20대라면 적당히 흥겨울 따름인 Dancing Queen과 Super Trouper유의 노래들이 중년들에게는 리시버를 귀에 꽂은 채 밤새워 공부하던 학창시절과 오버랩되며 기어이 가슴 뭉클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간과했다는 것이고, 이제는 60줄에 들어선 메릴 스트립와 두 친구의 혼신을 다한 노래와 춤 앞에서, 속절없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는 말이다. “관객의 정서적 참여를 통해 비로소 영화는 완성된다.”던 히치콕의 선언처럼 <맘마미아!> 역시 관객과의 호흡을 발판으로 그 가치를 선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충분해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맘마미아!>의 주인공은 I Have a Dream에서 Waterloo까지 장면마다 상황마다 이어지는 아바의 음악이다. 7080세대에게 ABBA라는 이름은 보통명사 이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아바의 노래는 저마다의 취향을 초월하여 70~80년대 팝의 입문서와도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어떤 이는 이글스를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존 덴버를 좋아하며 소수의 다른 이들은 섹스피스톨이나 혹은 예스, 핑크플로이드 유의 음악을 좋아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바는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늘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수였다는 것이다. 한 때나마 LP음반을 모은 사람치고 아바의 음반 한 장 안 가진 이가 있었던가? VOLVO를 제치고 77년도 스웨덴 수출 1위에 오른 상품이 ‘아바’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멋진 풍광과 어우러진 군무와 코러스 장면들은 영화의 감흥을 배가시켜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Dancing Queen이 흐를 때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도나의 모습과 결혼식 전야 파티 시퀀스에서 나는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단 하루만 공연합니다. 숨이 차서 장기공연을 못 하거든요”라는 소개와 함께 등장한 ‘도나 앤 다이나모스’가 Super Trouper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지금은 사라진 종로 피카디리극장 옆 SM커피숍에서 보았던 아바의 공연실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자신의 심정을 뒤늦게 전달하는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 이 노을 진 에게海를 배경으로 흐르는 장면 또한 백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바의 원곡에 비해 다이내믹한 느낌은 부족할 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추억이 제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동시대성과 정서적 일체감 없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노릇일 터. <맘마미아!>가 한국관객에게 어필한 이유 또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딸의 결혼식이라는 집안 공적행사에 끼어든 엄마의 비밀스런 과거담으로 인해 흥미진진해진다는 설정. 게다가 추억의 음악까지 한몫 거드는 데야! 그런 점에서 <맘마미아!>가 보여주는 가족이야기는 일견 특별해보일 수 도 있겠으나 기실 우리 정서와 별다를 게 없음이 발견된다. 그러니까 소피의 결혼식에 모여든 세 명의 옛 연인과 하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게 한국의 집안대소사에서 보여 지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힘든 시절, 절망 가득한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따뜻한 가정과 가족이야말로 힘든 어려운 시대를 버텨내는 힘이자 원동력이 아니던가. 또한 고난의 시절을 극복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로써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의 추억이 한 축을 담당한다는데 이의가 없다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대에서 탈주하고 싶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는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야하는 첫 번째 세대인 7080의 피로감은 극에 달한 지경이다. 이제야말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시기임에도 너무 일찍 격전장에 뛰어들었던 386은 무능의 상징으로 추락했고, 정권교체를 통해 복귀한 50대들은 구태와 보수의 이미지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보편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줄곧 정치 사회 문화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물러온 이들에 국한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터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중년들은 여전히 순수한 사랑의 힘을 믿고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며 문화와 자유를 사랑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맘마미아!>의 힘은 중년관객들을 20여 년 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시절로 데려다줌으로써 힘든 현실을 잊게 하는 최면효과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영화가 그 사회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맘마미아!>의 성공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공허한 마음을 어루만져줄 그 무엇이 필요한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맘마미아!>는 상당한 미학적 고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아니요 놀라우리만치 빼어나다고 보기 힘들지는 몰라도, 적어도 근래 우리에게 찾아온 영화들 가운데 중년 관객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요컨대 어떤 세대보다 정치적이면서 낭만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제는 현실의 삶으로 삼투했으나 여전히 존재증명에 목말라하던 중년들에게 찾아온 <맘마미아!>는, 그래서 더욱 각별하고 특별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때론, 영화에서 이것 말고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주노동자 직업 소개회사에서 일하다 해고당해 졸지에 실업자가 된 싱글-맘 앤지는 룸메이트 로즈와 함께 ‘앤지 앤 로즈’ 직업소개소를 차리고는 값싼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수용을 경쟁력삼아 틈새시장을 노린다. 일감도 제법 잘 들어오니 그만하면 출발치고는 괜찮아 보이는데, 한편으로 저임금에 불법마저 서슴지 않는 앤지. 하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열악한 노동환경에 임금체불까지 견딘다는 건 한계가 있을 터. 과연 그녀는 이 자유로운 그러나 살벌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좌파리얼리즘의 대명사, 켄 로치의 <자유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자유로운 세계>는 피고용인에서 고용인으로 신분상승한 평범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다. 하지만 켄 로치라면 여기서 그칠 리가 만무할 터. 다시 말하자. <자유로운 세계>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 한 인간이 내부구조의 모순을 돌파하지 못한 채 이를 악용했을 때 벌어지는 비극적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회구조가 어떻게 한 여성을 괴물로 만들어버리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병폐를 직설화법으로 비판하는 켄 로치식 노동백서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다.
알려졌다시피 켄 로치의 영화는 말랑말랑하고 속살대는 보편적 삶의 양태와는 궤를 달리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급진좌파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될 일이다. 적어도 켄 로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류되기 이전에 휴머니스트로 불려야 마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비록 그의 영화는 언제나 서슬 퍼런 목소리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눈은 한 없이 따뜻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한 세계와 그늘진 세상을 고발하는 광야의 소리를 자처했음에도 언제나 자신의 영화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빠뜨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노동자와 노동환경은 켄 로치 영화의 단골소재였으니, 이주노동자 이야기에 국한시켜놓고 보더라도 2000년 할리우드로 건너가 만든 <빵과 장미>에서 인간사회의 먹이사슬에 대한 눈부신 통찰을 보여준 그였다. 당시 시카고 선타임즈의 평자들이 “오스카 투표자들이 말끔히 청소된 건물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카데미상을 선사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영화는 신자유주를 신봉하는 미국에서마저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켄 로치의 영화를 견인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마다 어김없이 드러나는 인간애이다. 살육의 격전장에서도 생존투쟁의 노동현장에서도 그의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은 언제나 다툼과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길어 올린 끈적끈적한 인간애였다. 그러니 때로는 샘솟는 감동으로 또 때로는 유머와 눈물로 악다구니 가득한 이 세상을 그려내곤 했음을 기억하자.
<자유로운 세계>의 후반부, 그러니까 이주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고도 모자라 더욱 탐욕을 부리는 앤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제 아무리 켄 로치의 영화라 해도 이쯤하면 그녀에게 도덕적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때 자신이 은혜를 베푼 이란인 가족을 포함한 불법이민자의 트레일러를 당국에 고발하는 장면에서 “네가 못할 짓이 뭐니?”라고 묻던 로즈의 넋 나간 표정에서, 무엇보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짐을 싸라던 앤지의 냉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소름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과연 무엇이 이 여자의 삶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인생이지만, “30년 동안 한 직장만 다닌” 앤지의 아버지가 “서른 번도 넘게 직장을 바꾼” 그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일흔 두 살의 거장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앤지가 직업소개소를 차린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함이었다. 그녀 말대로 스물네 살에 실직한 이후 집에 처박혀 TV만 보는 남편에게 자신과 아이의 인생을 맡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뒤늦게 뛰어든 노동시장의 시스템은 그녀를 도덕불감증으로 이끌고 만다. 일에 대한 경험은 많았으되 시장 환경과 노동시스템에 대한 속 깊은 이해가 없었던 탓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회시스템에 복속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켄 로치의 날선 목소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노동생산성 향상 사이의 함수관계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든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노동생산성 향상에 일차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작업환경이라는 것이다. 앤지의 소개소를 통한 노동자들은 언제나 최악의 사업장으로 송출되었고 당연하게도 최저임금을 감수해야했다. 박리다매로 인한 외형의 증가만큼, 그로인한 부작용 역시 동반상승했으며, 결국 그녀는 양날의 검 위에서 춤추듯 위태로운 게임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것은 애초부터 부메랑이 되어 사용자 자신을 향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왜곡시킨 노동경쟁력은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에게 독배가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질 낮은 근로자가 상품경쟁력을 증대시킬 리 만무하고 악덕기업에 우수한 근로자가 남아있을 턱이 없으니, 결과는 기업도산으로 이어지고 임금은 체불되며 기어이 가계파산으로 귀착되기 일쑤다.
<자유로운 세계>가 전하는 이야기는 비단 영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민족사회로 접어든 오늘의 한국사회가 귀기울여야할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불법이민자를 고용하면 숨소리하나 내지 않기에 일시키기 편하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 범법을 서슴지 않는 앤지의 모습 위로 탐욕과 야만으로 가득한 이 땅의 악덕기업주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희망찬 미래를 위한 오늘의 희생’이라는 대명제를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에게 부여한 후, 개인의 노력만으로 진정한 자유로운 세계를 도모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 하더라도 먹이사슬처럼 엮인 노동시장 환경은 그들에게 최저임금마저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점에서는 앤지의 처지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고통을 감내한다하더라도, 앤지가 제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기회불균등과 시장진입장벽이 개선되지 않고서는 자유로운 세계란 영원히 도래할 수 없다는 것을 켄 로치는 역설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빵과 장미>에서 “언제 장미를 얻는 줄 아십니까?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라고 말하던 노조원의 대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유럽에서 끌어 들여온 오백만 불이 채 되지 않는 적은 제작비와 열혈동지들과 함께 게릴라처럼 미국에 입성한 켄 로치가 1990년대 초 미국 내 유색인종 노동자들의 연대 투쟁을 모델로 미국 자본주의의 폭압을 고발한 영화 <빵과 장미>를 보았다면, 아니 보지 못했을지라도 <자유로운 세계>는 반드시 보기를 강권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자유로운 세계>는 켄 로치가 <빵과 장미>를 통해 상정한 내부의 구조적 문제, 즉 계급적, 인종적, 성적 맥락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백인 자본가가 아닌 그들과 동일한 쁘띠 부르주아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내부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논제에 대하여 가장 멀리 밀고 나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건조하고 분노를 자아내는 동시에 이 동정 없는 세상의 구석진 삶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짚고 넘어갈 것은, <자유로운 세계>가 비록 <하층민들>이나 <빵과 장미>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처연하고 암울한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빵과 장미>에서 L.A에 거주하는 중남미 이주노동자들의 “We need Bread. But Roses, too.”라는 외침 속에는 선택적 희망이라도 있어보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세계>에 이르면 빵만 구하기도 힘겨워 보이는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장미까지 얻겠다는 말은 공허해진다. ‘빵과 장미’가 단어의 상징성에서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앤지와 로즈’가 결국 한 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골이 너무 깊은 까닭이다. 그래서 더욱 공허하고 스산하다. 영화의 마지막, 체불임금을 갚기 위해 동구권노동자 직업알선에 나선 앤지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자력으로 일을 그만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빚을 갚는 만큼 또 다른 빚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희망을 부여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무섭고 섬뜩하다.
<자유로운 세계>는 다수가 좌초한지 오래라고 믿는 사회주의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과 초 자본주의로 재편을 거듭하는 현 세계에 대한 신랄하고 실천적인 비판 의식, 노동 계급에 대한 충직한 온정으로 의식의 굳은살을 키워온 켄 로치가 아니면 흉내 내기도 힘든 강력하고 소중한 영화이다. 자신의 신념을 영화적으로 승화시켜온 거장의 솜씨가 눈부시다.
안녕하세요. 네오이마주 입니다. 오는 11월 1일은 2005년 가을 첫 발을 디딘 네오이마주의 3번째 생일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네오이마주와 함께한 독자여러분과 객원필자를 비롯한 영화인들을 모시고 3주년을 자축하고자 조촐한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바쁘시더라도 꼭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행사의 주빈은 누구보다 독자여러분이 되어야 마땅하므로, 네오이마주에 오시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서먹서먹할 것이라는 걱정은 붙들어매셔도 좋습니다.
사전 준비 관계로 참석하실 분들은 덧글로 의사를 남겨주시면 행사진행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울러 네오이마주의 재정 관계상 송구스럽게도 소정의 회비를 후원금형식으로 접수하려 하니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일시: 2008년 11월 1일(토) 저녁 7시 ~ 밤 12시(공식행사) * 장소: 마포구 서교동 소재 ‘쪼끼쪼끼’ * 일정: 7시 ~ 7시 30분 (간단한 저녁식사) 7시 30분 ~ 9시 20분 영화 <아스라이> 상영 후 김삼력 감독과의 대화 9시 30분 ~ 음주 및 야단법석 * 후원: 1인 1만원 (입장 시 접수대 초대형 돼지저금통 투입) +a
가. 7시 30분부터 영화상영 예정이오니 도착시간을 지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 기타문의 (이영) TEL (010)8384-5494 다. 찾아오시는 길 : 추후 자세한 약도를 올려드리겠습니다.
※ 3주년 특집행사 관계로 10월 세미나는 11월로 순연되며, 11월 21일(금) 저녁 8시 전순영씨의 발제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몇 년간 뉴욕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삭막한 도시에서 자발적 외톨이가 되어가던 내게 외로움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무료함이었다. 천성이 나대거나 변죽이 좋지 못한 탓에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숙소로 들어가 하릴없이 밤 시간을 소비하였으니, 낙이라고는 TV를 켜놓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화를 보는 일이 전부였다. 말도 어눌하고 지리도 어두운 처지에 무료함을 해소하기위한 몸부림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그러기를 몇 개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무료함을 참지 못해 겁도 없이 뉴욕의 밤거리를 쏘다녔는데, 마치 그것은 <택시 드라이버>의 불면증환자 트래비스가 뉴욕의 뒷골목을 배회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울과 몽상에 젖어 한 참을 걷다가 낯선 곳에 다다랐음을 깨닫고는 부리나케 아파트로 돌아오곤 했다. 오래지않아 한국에서도 뉴욕의 한 구석과 빼닮아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LP를 틀어주던 재즈 바 ‘블루 노트’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발걸음을 한(데킬라와 카멜담배와 존 콜트레인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던) 홍대거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뉴욕의 풍경을 서울에서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복제가 아닌 필사에 가까웠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실종된 ‘따라 하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작 내가 놀랐던 이유는 문화의 권력지향성 때문이었다. 즉 홍대문화의 이면에 드리운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하나의 트렌드가 창궐하며 신드롬을 일으킬 때면, 이를 구실 삼은 한탕주의 문화정책과 맞물리면서 그것은 문화 권력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문화와 권력의 이질적 결합은 언제나 이러한 수순을 밟으면서 이데올로기가 되곤 했다. 마찬가지로 홍대문화 역시 저항과 자유의 산실이라는 미명하에 언더그라운드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등에 업고는 자본주의와 합궁하여 거창한 담론의 주체가 되었다. 젊은이들의 안식처이자 예술가들의 피난처로 십 수 년 동안 각광받아 온 홍대가 그 자체로 거대한 기호의 총합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데는 세계화와 문화강국이라는 정치사회적 이슈도 한 몫 했다. 때문에 문화 혹은 대중문화가 지배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문화상품이고, 오로지 재미를 구하려는 소비자와 이를 빌미삼아 활개치는 자본의 득세가 빚어낸 오늘의 대중문화이다. 이것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무엇보다 스크린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까지, 정확히는 <쉬리>가 당도하기 전까지 한국영화는 할리우드를 모방하는 데 진력을 다해왔다. 한국영화도 할리우드를 (거의 똑같이)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영화 <쉬리>이후, 관객들은 속칭 한국형블록버스터의 범람을 목도하게 된다. 세계화의 부산물로써의 홍대와 청담동문화가 주류대중문화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던 동안 규모의 경제학이 영화산업으로 전이되어 만들어낸 기형적 성장모형은 흥행지상주의라는 괴물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홍대도 변했고 한국영화도 변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영화의 침체만큼이나 홍대문화가 눈에 띄게 쇠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고나면 업소 간판이 바뀌는 것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 많던 언더그라운드 클럽들은 몇몇만 명맥을 유지하기 급급한 실정이다. 이처럼 홍대문화의 쇠락에서 위기의 한국영화산업을 찾아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된다. 소위 된다하는 카페나 클럽을 열기위해 줄지어 달려갔던 이들은 그 옛날 서부를 향했던 골드러시 행렬을 떠오르게 하고, 하나 둘씩 발을 빼는 모습에서 한국영화자본의 이탈이 오버 랩 되기 때문이다. 자본을 축적한 예술가가 홍대문화에 불을 다 지피기도 전에 예술에 문외한인 자본가의 탐욕이 침투해버린 탓이다. 다만 한국영화가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지금에도 홍대가 다양한 문화부산물들을 받아들이며 실험중이라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생산자와 수용자가 대중문화라는 자장 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키치가 되고 컬트가 되며 또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본과 사적욕망의 결합이 주인처럼 버티고 있기 마련이다. 개별적 대중문화란 경제적 의미에서 완성된 상품이지만 문화적 의미에서는 끝없는 의미의 재창출이 시도되어야 할 미완의 그 무엇이다. 한국영화가 혼란의 시기를 맞은 이유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상품으로서의 잉여가치에만 전력투구함으로써 문화 예술적 의미와 시대적 소임에 소홀히 한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적 의미가 퇴색해지기 시작한 홍대문화는 한국영화산업의 시금석이 되기 충분해 보인다. 그러니까 잉여가치의 하락을 맞았을지언정 문화적 의미를 재창출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홍대문화는 여전히 유효할 터이고, 어느 즈음엔가 한국영화계가 주목할 만한 지표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현실과 꿈이 도무지 구분되지 않아 스크린 속으로 침잠하기를 밥 먹듯 한 적이 있다면, 하룻밤 동안이나마 화려한 뒷골목의 우울증을 맞보고 싶다면, 당장이라도 홍대로 나가볼 일이다. 어둠이 찾아들고 알아듣기 힘든 언어들과 메케한 땀 냄새와 화장품냄새가 한데 뒤엉켜 무국적 진공지대가 되어버린 밤의 뒷골목으로 말이다. 갖은 멋을 부리고는 방금 이곳에 도착한, 한눈에 보아도 작심하고 나온듯한 어설픈 소녀로부터 소위 홍대유전자를 타고난 듯한 스타일리시한 숙녀들의 아찔한 옷차림까지, 이정도 쯤이야 지겹도록 보아왔기에 아무 감흥 없이 흥정에만 몰두하는 장사치부터 말만한 계집애들의 봉곳한 가슴에 넋을 잃고는 힐끔힐끔 욕망을 곁눈질해대는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넥타이부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군상들을 살펴볼 일이다. 어둠사이로 빚어지는 그들의 몸짓과 표정은 영화보다 액티브하고 애절하며 또 드라마틱하다. 그것은 영화의 또 다른 형상이다. 기의(記意)의 소비에서 기표(記表)의 소비로 뒤바뀐 영화적 이미지를 만날 수 있는 곳, 기표들의 유희가 넘실대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천국인 홍대를 지척에 둔 곳에 내가 살고 있다.
이 영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총천연색 레이저를 연발하며 등장을 관객에게 부각시키는데 여념이 없는 우리의 슈퍼히어로, 그의 이름은 ‘차이니즈 인프라맨’. 시작부터 주의를 끌던 히어로의 오프닝 시퀀스는 갑자기 자연의 재해로 위장한 외계인으로 이동되고,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관객에게 미션을 내던진다. ‘자, 이제부터 나는 히어로와 싸울 악당이다. 끝내 패할 것을 알지만, 되는대로 해보련다.’ 이름도 ‘데빌’로 불려지는 엘지법 공주는 조촐하고 조악한 등장과 함께 결말을 시작부터 예견하고 싸움을 시작한다.
<슈퍼 인프라맨>은 초반 10분 내에 급격한 상황 발전과 함께 모든 사건사고를 축약시켜 서술한다. 그리고 이 사건사고가 매우 동시다발적이고 정신없이, 빠르게 진행되리라는 걸 관객은 애초부터 알고 있다. 시작과 결말이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중간과정. <슈퍼 인프라맨>의 진행이 얼마나 스릴있게 움직일 것이며, 영화 속 슈퍼 히어로가 어느 정도까지 기질을 발휘해 팬들을 위한 멋진 신고식을 치를지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된다.
슈퍼맨이 보면 배를 잡고 웃을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슈퍼 인프라맨’은 태생부터 히어로가 되기를 타고난 인물이 아니다. 또한 그는 여타의 히어로가 그렇듯 어떠한 치명적인 우연에 의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청천벽력같이 나타난 빙하시대의 악당들,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땅 속에 묻혀있다가 돌연 지구의 표면에 나타나 인류를 멸망시킬 것을 꾀한다. 아무 것도 대비하지 않던 인간들은, 뜻밖의 재앙에 ‘급조된’ 히어로를 창조한다. 인프라맨의 탈을 쓴 레이마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 스스로를 희생할 것을 결정한다.
<슈퍼 인프라맨>의 구조는 크게 토너먼트와 부족싸움, 두 가지로 나뉜다. TV히어로물의 전형적인 절차를 밟는 <슈퍼 인프라맨>의 관습을 견뎌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빨간색 갑옷을 입고, 자신을 일정부분 기계화시켜 인프라맨으로 변신한 레이마는, 단 몇 초간의 드라마도 허용되지 않은 채 곧바로 싸움에 투입된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악마들을 소탕하고, 지구의 평화를 되찾는 것이다. 간접적인 존재들부터 시작해서, 인프라맨의 행보는 점점 우두머리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감초 역할을 하는 숨은 복병이 있긴 하지만 그도 졸개에 불과하다. 인프라맨의 행진은 비교적 안정적이게 진행된다.
뻔하디 뻔한 토너먼트의 마지막엔 당연하다는 듯 악당들의 제왕이 지키고 있으며, 인프라맨은 반드시 제왕을 쓰러뜨린다. 하지만 이 직선적인 스토리는, 인프라맨이 만나는 악당들의 속성을 가능하게 만들며 주의를 끌기 시작한다. 한번 칼질이라도 할라치면 훌러덩 벗겨질 듯한 악당들의 분장은, 생각보다 정교하게 꾸며져있으며 그 능력 또한 다양하다. 파워레인져나 독수리 오형제와 같은 집단 히어로물이 매회 꾸준히 긴장을 일으키고 사랑받는 이유도 이러한 기대감 때문이다. 모든 적들의 강약을 조절함과 동시에 부속성을 다르게 만들어 주인공과 대결시킬 때, 관객들은 일정수준 자신이 모르는 히어로 능력의 발현에 관심을 품는다. <슈퍼 인프라맨>의 경우에 이것은 마지막 대결을 통해 관객을 충족시킨다.
인간과 기이한 모습의 악당, 두 계급간의 대립은 막판에 이르러 거대한 패싸움을 연상시킨다. 딱히 언어라고 할 것이 없는 악당들과 비명을 지르며 지구를 지키는 인간과의 ‘건전한’ 혈전은, ‘1+1=1’의 공식을 떠올리게 하는 원시부족의 사투를 방불케 한다. 특별한 무기도 없이, 맨 손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무시한 외모의 악당들은 기승전결에 맞게 철저하게 무너진다. 때문에 <슈퍼 인프라맨>의 막판에 다다르면, ‘인류는 인내를 통과한 후 밝은 햇살을 맞이할 것’이라는 엔딩이 너무나도 분명히 읽힌다. 보통의 히어로가 고통과 고뇌의 드라마를 소유한다면 <슈퍼 인프라맨>은 능력만을 가지고 발현된 독특한 캐릭터다. 어린 시절, 말도 안되는 주인공의 능력에 열광하고 추종한 기억이 있다면 이 영화는 딱 그때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 적당한 영화다. TV 히어로와 파워레인져가 아른거린다면, 주저할 필요가 없는 영화, <슈퍼 인프라맨>. 인프라맨의 속수무책 망연자실 매력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완벽하게 소환시켜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