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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화면비의 스크린을 채우던 숭고한 얼굴

2009.11.01 14:27 | 필진 리뷰 | 우디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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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언젠가부터 영화의 화면비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현재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으로 쓰이는 1.85:1, 시네마스코프 2.35:1, TV 화면비로 잘 알려진 4:3.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나 4:3의 화면비를 가진 영화들을 볼 때면 저 영화는 왜 저 화면비를 택했을까를 영화 전체에서 찾으려 노력했고, 좋은 영화들은 어렴풋하면서도 또렷한 나름의 대답들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개인적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의 좋은 영화들은 금방 떠오르는데(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부터 우디 앨런의 <맨하탄>을 거쳐 2009년 한국 봉준호의 <마더>에 이르는 중구난방의 다양한 지형도를 그릴 수 있다.) 4:3 비율의 화면을 영화적으로 잘 구현해 낸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최근작들 정도만 떠올랐다.

그러던 중,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영화적 체험" 특별전의 상영작 목록을 보았다. 듣도 보도 못한 감독들의 1900년대 초 영화들로 가득한 목록에서 익숙한 이름이라고는 그레타 가르보, 이 전설적인 여배우의 이름뿐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 중 한 편인 <크리스티나 여왕>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클로즈업 된 얼굴이 4:3 화면의 스크린에 영사될 때마다, 황홀했다. 배우의 얼굴이 그토록 시네마틱(cinematic)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난 처음 깨닫고야 말았다.

유럽의 전쟁통 한복판에서 스웨덴의 여왕으로 취임한 크리스티나는 기품과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이면서도, 예술을 사랑하고 더 넓은 세계를 동경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개인이다. 왕실 각료들과 국민들은 그녀와 당시의 전쟁영웅인 장군과의 결혼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 이 와중에 그녀는 우연히 스페인에서 온 대사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스페인에 대한 여론이 점점 나빠지면서 이 스캔들을 들은 국민들은 분노하고, 각료들은 그녀에게 여왕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한다. 날 때부터 자신을 규정해 왔던 왕의 역할과 이제 막 눈을 뜬 사랑의 자아 사이에서, 크리스티나는 고뇌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의 격랑들이 오고간다. 가로변이 길지 않은 4:3의 프레임은 그녀의 얼굴로 가득 찬다. 흑백의 화면, 오래된 필름 입자들, 빛나는 하얀 얼굴. 여왕으로서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친구 같은 하인을 뒤로 하고 창 밖 눈 쌓인 풍경들을 보며 드넓은 바깥세상에의 갈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설렘과 불안, 희망과 체념이 교차한다. 스페인 대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후 여관에서의 마지막 날 밤, 침대의 기둥을 손으로 감싸 안고 어루만지던 그녀의 얼굴에는 사랑에 눈을 뜨고 피어나기 시작한 여성이 존재한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이 이끄는 대로 커다란 선택을 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와 위엄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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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사와의 결투에서 부상당한 대사는 왕관을 벗고 달려온 크리스티나의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둘이 함께 타고 바다를 건너기로 했던 배 위에는 이제 크리스티나만이 남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크리스티나는 돛을 올리라 명하고, 뱃머리에 가서 선다. 바람이 분다. 돛이 올라가고, 배가 움직인다. 눈물이 멈춘다.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로 빨려 들어가듯 가까이 간다.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흐트러짐 없이 한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는 늘 선택의 기로에 부딪친다. 그 선택이 주는 책임의 무게는 늘 무겁게 다가온다. 무게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다가올 새로운 앞날을 응시할 때, 인간으로서의 어떤 성숙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반영되던 그 성숙함을 잊을 수 없다. 스크린에 가득 찬 크리스티나를 보며 진심으로 그녀의 건투를 빌었다. 한 사람의 얼굴. 때론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진정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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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son Wells에 관한 두 개의 노트 ②

2009.11.01 14:19 | 필진 리뷰 | 우디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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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숙명론적 미궁- 개인과 세계, 그 내밀한 충돌


세계 영화사 혹은 영화 관련 서적들의 상석에 자리잡은 오손 웰즈의 데뷔작 <시민케인, Citizen Kane>(1941)은 기묘한 예지력으로 가득한 영화다. 마치, 웰즈의 또 다른 작품 <맥베스, Macbeth>(1984)가 이미 미래를 알아버린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시민 케인>은 웰즈의 그 이후의 삶을 거의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후적 해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론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김에 좀 더 멀리 나가보자면, 웰즈의 지나친 명석함은 자신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웰즈와 스튜디오의 불화, 그럼에도 스튜디오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했던 그의 프로젝트들. RKO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만들어진, 연극계의 신동이라 불렸던 젊은 감독의 데뷔작 <시민 케인>. 그리고 그 이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완만하고 어쩌면 필연적인 하락의 여정들.

거칠게 이야기해서, 웰즈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개인과 세계의 접경지역, 그 지점들에서 벌어지는 격렬하며 내밀한 마찰과 충돌의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스튜디오의 의도에 맞추어서 만들어 졌다는 <이방인, The Stranger>(194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웰즈는 비범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부딪히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여준다. 나치 전범인 찰스 랜킨 Dr. Charles Rankin / Franz Kindler은 종전 후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중의 자아,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드러나 있고, 또 하나는 자신만이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전쟁 중의 동료가 찾아온다.

자신이 묻어버린 과거 속의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혹은 과거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 이러한 주제와 이야기 구조는 <아카딘 씨, Mr. Arkadin>(1955)에서 더욱 강화되고 반복된다. 숨기와 찾기라는 추적의 형식은 웰즈의 거의 모든 영화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스크린 속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위에서 벌어진다. 영화사적 맥락에서 웰즈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필름 느와르의 세계를 창시했다. 웰즈의 <악의 손길, Touch of Evil>(1958)은 필름누아르 장르의 완성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과, 세상이 알고 있는 나 자신 사이의 틈새. 그 사이에 웰즈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그의 영화는 나를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다. 과연 나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세계의 광장 한 가운데 인가? 아니면 가장 깊은 자신의 내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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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케인>은 케인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대의 언론 재벌이자 뉴스의 중심이었던 케인의 사망은 기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들은 케인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로즈버드’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생전에 케인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케인에 관해 증언하지만, 증언자들의 기억은 케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로즈버드 라는 이름의 어릴 적 케인이 타고 놀던 눈썰매를 보여주는 것을 끝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드러냄으로 인해 진실에 대한 혼란은 더욱 가중될 뿐이다. 톰슨의 말: ‘그건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야.’

종종 웰즈의 인물들은 숙명론에 심취한 고집쟁이처럼 보인다. 웰즈 자신이 직접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한 <심판, The Trial>(1962)의 주인공 K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K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게 세상과의 불화는 이미 준비 되어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용감하지만 무모한 돈키호테인가? 아니면 현명하지만 비극적인 자살자인가? 기관원들이 흘려버리듯 도망치며 던져 넣는 다이너마이트로 죽음을 맞이하는 K의 모습은 마치 폭사하는 시지푸스 같다.

그러나 웰즈는 인물들을 단순히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이거나 입체적이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충복인 번스타인은 전형적인 대중영화 화법의 조연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러나 케인 재단을 운영하는 그의 늙은 모습을 보며 그가 혹시 현명한 광대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웰즈의 진정한 깊은 심도 deep focus는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은 종종 인물들의 내면이 거꾸로 뒤집혀 바깥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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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이의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손길>에서 웰즈 자신이 연기한 퀸랜 Hank Quinlan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손에 묻은 피를 씻으려고 강물에 손을 담근다. 그런데 강물에는 오물이 가득하다. 손에 묻은 피를 지울 수는 있겠지만, 정말로 그 손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손을 씻고 또 씻는다. 비대한 몸집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절룩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압도적으로 위압적이지만, 마치 덩치만 커다란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랜만에 그를 만난 타냐 (무성 영화 시절의 스타 마를렌느 디트리히가 연기했다.)는 그를 보고 '사탕과 초컬릿을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찐 것 아니냐'고 말한다. 퀸랜이 동료에게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는 마치 심통이 잔뜩 난 젖먹이 아이 같다.

웰즈는 인터뷰를 통해 찰스 포스터 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마 그는 이들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케인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비열한 악당이기도 하며, 매우 위대한 인물인가 하면 별볼일 없는 하찮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를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이렇게 다르다. 그는 한 작가의 객관성에 이해 판단되지 않는다."   - 앙드레 바쟁, 『오손 웰즈의 영화미학』 (p.88 현대미학사 1996)

웰즈에게 인간이란 고정된 개념과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일하고 항상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평생에 걸친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해석 될 수 있었던 생명력은 바로 끊임없는 갈등과 번민의 상황 속에 내 던져지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변절자, 제왕, 음모자, 가련한 희생자, 폭군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그 나름의 자리에서 아주 격렬한 갈등과 번민을 겪는다. 이들은 마치 아주 짧은 구간을 눈이 볼 수 없는 속도로 왕복 운동을 일으키는 진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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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는 인물들을 숙명론적인 미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 안에서 갈등과 번민을 겪는 인물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껏 드러나지 않고 있던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 웰즈에게 비극의 탄생은 곧 인간 존재의 새로운 탄생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웰즈라면 둘 모두 가능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의미가 확실하고 고정된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종종 멈춘다. 너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바라보거나 혹은 방관해도 될 것처럼 생각한다. 웰즈는 바로 이 순간, 진짜와 가짜, 믿음과 의심, 슬픔과 기쁨, 용감함과 무모함, 비천함과 고귀함을 한 자리에 슬쩍 놓아둔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명확하다고 생각될 때 관객은 그저 스크린 밖에 방관자로서 게으르게 남겨진다. 웰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따분해서 견디지 못한다는 투로 모든 익숙한 것들을 슬쩍, 장난꾸러기처럼 흔들어 놓는다. 웰즈의 영화는 대단히 전형적인 인물 구도와 이야기 구조를 가졌음에도 흔한 전형성의 인력권을 너무도 가볍게 훌쩍 벗어나 버린다.

웰즈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숙명론적 미궁 저 건너편에서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왕과 협잡꾼, 비천한 거렁뱅이와 위대한 도망자들의 세계 그 안쪽으로 넘어오라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라며 당신에게 낮고 설득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 바로 이 지점에서 웰즈의 영화는 언제나 새롭게, 다시금 시작된다.

[상영회] 네오이마주 4주년 상영회 및 파티 참가신청 받습니다

2009.10.23 14:39 | 그리고... | 우디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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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을 신청하실 분은, 번거롭더라도 네오이마주 본판
자유게시판에서 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11월 10일 신청 마감합니다.


부산 바다만큼, 빛나던 영화들

2009.10.17 22:19 | 필진 리뷰 | 우디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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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부산에 온 지 4일째가 되어 가는데, 매일 세 편의 영화씩을 챙겨 보느라 미처 글로 정리할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햇살을 머금은 바다가 반짝이고 어두운 밤바다 위의 오징어 배들도 반짝이는 부산, 열심히 즐겁게 보고 있는 영화들도 흥분하리만치 반짝이는 영화들이 많다. 어제는 처음으로 하루 네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네 편 다 형식의 새로움과 가슴이 움직이는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어 놀랐다.

김정(김소영) 감독의 <경> 과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쓰기에는 내게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당장 쓰고 싶어지는 영화는 지난 5월 전주영화제에서 발견한 감독 라야 마틴의 <인디펜던시아>와 로카르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탬버린, 드럼>이었다. 다음 영화까지 남은 한 시간, 짧게나마 정리하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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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시아>

근원을 알 수 없는 총탄의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어머니와 아들은 숲 속으로 도망친다. 아들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려 살아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 이야기하며 두려워한다. 때때로 숲은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이상기후를 보이는데, 감독은 이 폭풍우를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음산하고 폭발적으로 연출해 낸다. 그 비바람의 강도가 너무나 거세고 그 분위기를 표현해 내는데 많은 쇼트들을 할애하기 때문에, 이건 뭔가 다른 거대한 현상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린 아들은 잠시 사라졌다가 집에 돌아와서 금빛 머리와 빛나는 몸을 가진 무서운 남자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마지막 대 폭풍이 불어 닥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어갈 때, 드디어 관객의 눈앞에 노란 머리의 백인 군인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어린 아들이 도망치자 그에게 총을 쏜다. 흑백으로 진행되던 영화는 아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리자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끝이 난다.

이제 우리는 저 폭풍우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알 수 있다. 라야 마틴은 영화 중간, 필리핀이라는 국가를 설명하는 오래된 뉴스릴 필름을 모방하여 삽입한다. 필리핀이라는 커다란 숲은 적에 의해 어두운 강점기를 겪었다. 필리핀의 영 제너레이션 (Young Generation) 라야 마틴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그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태도가 그를 진정한 영 제너레이션으로 우뚝 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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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 드럼>

이 영화를 일컬어 ‘가난한 어른들의 초상’ 이라 부르고 싶다. 경제적으로 너무도 궁핍한 90년대의 러시아에서 중년여성 카티야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살아간다. 냉소적인 면모의 그녀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때때로 도서관의 책들을 훔쳐 기차역의 사람들에게 내다 팔고 그 돈으로 빵과 감자를 사는 것. 어느 날 그녀에게 우연처럼 ‘또 다른 가난한 어른’인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카티야의 집에서 함께 지낸다. 하지만 남자는 카티야의 비밀을 알고 난 후 그녀를 떠난다.

줄거리 나열로는 이 영화의 매력과 성취에 대해 반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가난한 어른들은 시종일관 속내를 털어놓기 보다는 매사에 냉소적이다. 이 냉소는 비판적으로 날이 선 냉소가 아니라, 오랜 세월이 그들에게 새겨놓은 체념에 가깝다. 감독은 문어체적이고 앞뒤 문맥이 잘 맞지 않는 대사들을 인물들에게 부여하는데, 때때로 그것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직접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동시에 이 영화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이루어 낸다. 영화는 잔인하다. 현실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 중년의 어른들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묘하게 연극적인 프레임이 인물들의 뒷모습을 따라 길게 트래킹할 때, 그들의 뒷모습은 고독하며 불안하다. 무엇보다, ‘변명하지 않는’ 카티야의 모습들이 한없이 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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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금요일, 하루 업무를 마치고 KTX를 타고 부랴부랴 부산엘 내려갔다. 부산에 내려서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부산역에는 기념 삼아 사진 촬영을 하는, 아마도 부산 국제 영화제를 보기 위해 내려온 듯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이동했다. 서울의 지하철 보다 조금 폭이 좁은 편이라 자리에 앉으면 건너편의 사람의 무릎이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해운대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숙소로 들어갔다.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딱 한 작품 때문이었다. 바로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프레스 카드로 아침 일찍 티켓을 구해야하는데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온라인으론 예매가 끝난 상황이고, 현장에도 얼마나 티켓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영화는 못 보아도 <카페 느와르> 만큼은 꼭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내려왔지만, 볼 수 있을지 어떨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결론 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어코’ <카페 느와르>를 볼 수 있었다.

이번 부산에서 본 영화는 순서대로, <경>, <낙원은 서쪽이다>, <카페 느와르>, <익사일> 이다. 뭐랄까 굉장히 불균질한 컬렉션인 것 같다. 사실 영화제를 여기저기 쫒아다니면서 영화를 챙겨 보는 성격은 아니다. 지금 꼭 보지 못하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것에 억눌린 기분 그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성격 탓인 것 같다. 그저 게으른 것일지도 모르고.

김 정 감독의 <경 Viewfinder>은 영화평론가인 김소영 교수의 장편 데뷔작이다. 집을 나간 (혹은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난) 동생을 찾아 나서는 여자의 이야기를 축으로, 낡은 휴게소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보게되는 상징 같은 것들은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난 채로 제시가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언니의 이름은 전경이고, 동생의 이름은 후경이다. 휴게소에서 전전하는 남자의 이름은 창(window)이다. 남자는 자신을 디지털 퇴마사, 또는 디지털 탐정으로 소개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인터넷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모든 영화는 탐정영화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장르로서의 탐정이 아닌 행동과 결과로서의 탐정영화 말이다. 거의 모든 영화의 내러티브는 상실로 시작되고 그 상실을 수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그 수복의 결과를 제시한다. <경> 역시 동생을 찾아 길을 떠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사실 이러한 탐색의 과정은 이 영화의 맥거핀에 가깝다. <경>이 보여주려는 것은 언니가 기어코 동생을 찾아 내고 서로의 관계를 수복했다. 는 결론이 아니다. <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시간의 퇴적층 같은 것들이다. <경>에서 ‘중첩’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 이 모든 것들이 남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휴게소를 동심원처럼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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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 가브라스의 <낙원은 서쪽이다>는 로드무비 형식의 블랙 코미디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소재들을 다루어 왔던 노장 감독의 신작 치고는 어쩌면 말랑말랑한 영화일 수 있겠지만, 국내에 코스타 가브라스의 이름을 알려준 의 기묘한 유머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낯선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치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영어는 못하고, 불어를 아주 조금 알고 있는 주인공은 대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걸지만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유머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

이 영화에서 남들에게 통용되는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적당한 옷을 입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영화의 처음에 밀입국자들은 신분증을 모두 찢어서 바다에 버린다.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누드 비치로 떠밀려 살아난 엘리야스는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자신을 위장한다. 리조트 직원의 옷을 갈아입고 직원 행세를 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여자가 사다준 옷을 입고 리조트의 손님행세를 한다. 목적지인 파리까지 가능동안 엘리야스가 갈아 입는 옷은 일종의 여권 Passport처럼 기능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옷은 그저 몸 위에 걸쳐질 뿐이다. 옷은 사람의 본질을 바꾸어주지는 못했다. 샹젤리제 거리에 선 엘리야스에게 마술은 이루어졌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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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는 개인적으로 작은, 그러나 충만한 위로 같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쓰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짧게 언급할 것이지만, 고다르의 <국외자들>의 카페 댄스 장면을 차용한 것이 분명한 정유미의 춤 장면 하나 때문이라도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의 쾌감이 마치 혈관에 천천히 차오르는 것 같은 정유미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를 기다렸던 시간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다.

두기봉 감독의 <익사일>은 국내 개봉했을 때 너무 작은 상영관에서 거의 끝물에 봐서 아쉬움이 남았던 영화였다. 이번 PIFF에서는 CGV 스타리움 관에서 상영하다고 해서 보았는데, 결과적으론 그다지 만족 스럽지 못했다. 화면 크기만 키우고 정작 영사기의 세팅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화면 밝기가 고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얼룩 같은 느낌이 묘하게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닮은 이 영화의 분위기에 약간의 플러스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만 놓고 보자면 두 번 세 번 지치지 않고 다시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시! 였다.

두기봉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총을 마치 칼처럼 사용한다. 오우삼이 춤을 추듯 총격을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이퀄리브리엄>의 건카타 처럼 요란한 액션은 아니다. 인물들은 마치 총알을 ‘찔러넣듯’ 발사하는데,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액션은 특히 <익사일>처럼 어두운 공간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는 누가 누구를 겨냥하고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마지막 호텔에서의 총격전에서 인물들은 거대한 하나의 절멸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대사로 미루어 보건데, 홍콩 반환 이전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익사일>은 그저 철지난 소재를 끌어들인 회고조의 영화라기 보다는, 이미 홍콩 반환 이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어디선가 잠자고 있다가 발견 된 것같은 느낌을 준다. 그만큼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생생하게 말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번 PIFF에 참석 했던 이유는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 단 한 작품 때문이었다. 분명히 상영시간과 대중적인 부분 때문에 개봉은 불확실한 부분이고, 그렇다고 해서 영화제나 특별전 형식으로는 언제 볼 수 있을지 어려운 상황이었고, 물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볼 수 있었겠지만, 정말 따끈따끈한 그 대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영화를 봤다. 뭐 이런식의 등수놀이는 거의 무의미 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질 않았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사무라이 픽션>이 PIFF에서 공개 되었을 때, 그것도 출장 길에 시간이 남아 본 것 빼고는 이번이 정식으로 참가한 것은 처음이다. 그저 시간이 맞아 <사무라이 픽션>을 보고선 턱이빠져 달아날 정도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PIFF에는 막상 내려가 정말 ‘별처럼 많은’ 영화목록들을 보니 그 예전에 교보문고를 처음 찾았던 중학생 꼬마의 설레임이 다시 살아났다. 밥벌이의 압박만 아니라면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영화제를 즐기고 싶었다. 영화라는 것이 시간 속에서의 작은 탈주라고 한다면, 영화제는 그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인 탈주행위다. 그러고보니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은 ‘탈주’라는 주제로 엮어 볼 수 있을 법한 영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러한 공간과 시간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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