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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안경테가 박살났다. 발밑에 있는 것을 모르고 그만 밟아버린 것이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라고 느끼는 순간 안경테는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어젯밤 영화 한 편을 본 후 책을 읽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들었으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절대로 바닥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다행이 알은 그대로였지만 테 없는 안경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박살난 건 안경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회도 박살이 났다. 그러니까 미디어법 이야기다. 어떤 이는 ‘돔구장의 결투’이라고 표현했으니 그 재치가 놀랍다. 방송 때문에 찾은 돔구장 옆에 위치한 KBS 본관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업선언을 알리는 대형현수막이 입구계단을 휘감고 있었고 로비에서도 집회가 열리는 중이었으나, 아직 비장함이 감돌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격한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는 단단히 작심하고 시작한 파업임을 알려주었고 삼삼오오 모인 이들의 눈빛과 입가에서 다부진 각오와 무거운 침묵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일보》는 날치기 법안통과의 일등공신 중 하나로 쇠줄로 묶인 본회의장 문을 열고 야당의원 3~4명을 한 번에 메쳐버렸다는(국회의원의 괴력이 특종처럼 다뤄질 수도 있다니) 전직 대령 출신 국회의원 김성회를 띄워주면서 애써 기쁨을 감추는 모습이다. 아마도 그들은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처럼 어느 후미진 계단에서 브이 자를 내밀며 사진을 찍었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 지루했던 2008년의 초여름을 떠올리면서 연신 독주를 들이켰는지도 모르겠다.

미디어법이 통과된 다음 날, 류근일은 대표적 보수매체 《뉴데일리》에 기고한 칼럼에서 「정권이 교체 된지 1년 반 만에 진짜로 정권이 바뀌었다는 실감을 한 2009년 7월 22일이었다. 미디어법 통과가 그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이 구사해 온 기만적 국민선동의 나팔수들이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당하기 시작한 미디어계의 지각 변동이었다.」고 스스로 미디어법의 결사통과 목적을 자복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이틀 전만해도 매년 방송 인력이 3,000~4,000명이 배출되는데도 방송사가 3개뿐이라서 조속히 미디어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방송인력 적체현상을 해소시켜야한다고 주장한 그들이었다. 그렇지. 언론을 장악해야 진짜 정권이 바뀌는 것이지. 군부야 이미 93년 김영삼이 하나회 숙청 등, 군내 사조직을 발본색원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고. 언론만 휘어잡으면 광우병 촛불집회 같은 곤혹스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테고 나아가 3년 반 뒤 대선에 큰 역할을 할 터인즉, 오랜 세월 조선일보의 충복이었던 류근일 입장에서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인가. 어차피 세상사 그렇고 그런 것이고 이 바닥에서 뭘 기대하느냐는 자조감이 팽배한 시절이니 더 따져봐야 나아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박살난 테를 잡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려 보지만 복원시킬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안경알만 가지고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법. 박살난 국회, 벼랑으로 치닫는 민주주의가 깨진 내 안경만큼이나 참혹하다. 이제 나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 적어도 안경을 다시 맞추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내 눈도 점점 나빠지고 있고 정신 차려 눈을 부릅뜨지 않고서는 작은 글씨 보기가 어림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안경을 맞춰 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에서 답답함은 더해진다. 안경테 부숴먹은 날 쓰는 시답지도 않은 editorial. 평론가의 글이 정치사회부기자의 그것과 차이가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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