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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블로거 울프독 (waterview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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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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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강 예비군- 대한민국 예비군,
                                                        

                                                                    --  제 1 편


한국 남성으로서 군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다 경험하는

예비군 , 왜 예비 군복만 입으면 X판을 치고 싶을까?


걸음 거리는 소 걸음이 되고, 복장은 되는대로 하고 싶고,

집합시키면 줄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싹  없어지고,

교관의 딱딱한 말에는 무조건 하품만 나오고--


그러다 보니 예비군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저히 군사 조직이

아니라 오합지졸들이라고 자평하기도 하는데--


내가 예비군에 막 편입 되었을 때 예비군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 50대 아저씨는 교육 시간에 몰래 소주 한잔 씩하고 얼굴이

불콰해서 차에 올라온 우리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 어이구! 인간들 ---- 그래도 군복을  입었으면 군인 흉내라도 내야지

   장개석 군대도 당신들 보다 나을 거야-- ”

알고 보니 그 분은 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


[그 무렵에 장개석 군대라는 말은 오합지졸 상태의 부대를
 일컫는
별명이었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영향인 듯하다.]


하긴 현역 때 칼 같은 군기 아래서 절도 있는 생활을 했던

우리 자신들도 꼴불견인 우리 너절한 모습을 보고 군기가

이렇게 없어 가지고  전쟁이 나면 예비군이 몇 백 만이 된들

어느 곳에 써먹을 것이냐고 마치 남의 나라 군대 보듯이 자조하듯이

뇌까리던 생각도 난다.


하지만 실전이 터지면 대한민국의 예비군들이 위에서 걱정하듯

정말 그런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일까?


그러나 ---그런 염려는 절대 없을 것이다.


전쟁 많이 해 본 이스라엘군에서는 예비역이 전투력의 중추다.

예비군의 진가는 특히 1973년 욤 키프르 전쟁 때 빛이 났다.

이스라엘 군 현역들이 아랍국들의 기습에 된통 얻어맞고 비틀거릴 때

새로 소집된 예비역들이 반격의 주역을 맡아서 전투의 양상을

거꾸로 바꾸어 놓았었다.


지난달 그 전투 성격에 논란이 많은 가자 지구 전투에서 예비군이

중요한 전투 후반에 투입되는 진행상황이 보인다.


욤 키프르 전쟁중 시나이 반격전. 수에즈  운하를 건너온
이집트 군을 이스라엘 군이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영토로
들어가서 이집트 3군을 포위하는 작전으로 소집된 예비군 기갑부대가

큰 역할을 했다. 1분 25초 쯤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가  소집된
맹장 아리엘 샤론 장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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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이전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면 그 기술은 몸에 붙어버려서

늙어 죽을 때까지 잊혀 지지가 않는 법이다.


패잔병 같은 차림새라고 복장을 말하고 군기를 말하지만 예비역이

군대에서 청춘을 보내며 몸에 익힌 전기는 조금의 교육으로도

금방 다시 되 살아 날 것이다.


예비군 한 사람 한 사람은 한 때는 그 내무반이나 부대에서 신병들에게

소 두목 의 카리스마로서 군림하던 조직‘원로’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 카리스마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 2년 넘게 익히고 닦은 전기와 리더십이 바탕이 되어 형성 된 것이다.


말 한바와 같이 사례 소개로서 한국 예비군의 숨은 실력을
증명해보이겠다.

여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되고 반년도 안 된 40년 전인 1969년 가을,

실전에 투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경상북도와

강원도 예비군의 대 활약을 소개한다.


말해 둘 것은 이들이 별다를 특수 훈련도 받지 않고 실전에

투입되었을 뿐더러 그들이 대적한 적들은 북한 군부가

북한군의 명예를 걸고 선발하고 육성해서 남파시킨

일기당천[一騎當千]의 특수 부대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드린다.


예비군은 한창 경제 개발에 몰두한 한국국민들에게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 도발했던 1.21사태가 방아쇠가 되었다.


124 부대의 김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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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습격조가 거의 소탕된 1968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천명하고 그 해 4월1일 향토 예비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6개월 조금 넘어 1968년 10월31일 김일성은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을 통해 백두대간인 태백산맥에

무려 120명의 무장 간첩들을 또 다시 풀었다.


이하 그 당시의 명칭대로 무장 간첩들을 공산비적,

즉 공비[共匪]라고 부른다.


즉각 태백산맥은 삼엄한 전시체제가 되고 대부대가 동원되어

간첩들 소탕에 들어갔다.


현역들과 꼭 같이 실전에 동원되었던 지역 예비군들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하자면 아래 전과표에서

무기라고는 기관총도 없고 심지어 수류탄도 없었던 예비군들이

단 M1 한 정으로 거둔 전과를 보시기 바란다.


정규군과 같이 당연히 상위에 당당히 랭크되어 있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최강 예비군 대한민국 예비군이라고

붙인 것에 이의가 없으실 것이다.


울진 삼척지구 부대별 전과 기록표.
------------------------------

이때의 산골 예비군 들이 펼친 대단한 활약은 같이 작전한 군부대나

언론, 기타 관계기관의 최고의 찬사를 받았을 뿐더러 언론과

전 국민들로부터 극찬과 열렬한 성원이 쏟아졌다.


이미 그해 초, 엉성한 기획으로 청와대를 습격하겠다고

31명의 김 신조 일당을 동원했다가 전멸 당하고도 아직도 유격대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북한은 10 개월 뒤인 1968년 10월 31일과

사이 11월 1일,이틀 간에 걸쳐 간첩 모선에서 발진했던

8척의 고무보트를 탄 15명 한 팀의 여덟 개 팀 120명 간첩들이

경북 울진과 그 바로 도 경계선 넘어 강원도 삼척군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으로 숨어들어갔다.


나는 이들 울진 삼척지역 간첩들은  김일성이가 직접 남파를
지시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다가 1.21 사태가 났고 그 도발도 대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도발은 절정을 이룬 울진 삼척의 공비 침투사건으로 이어졌다.


김일성은 그 절정을 이룬 도발을 또 다시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만주와 지형이 만주와 비슷한  태백산맥으로 겨냥했다.


침투 간첩들의 주어진 업무는 태백산맥에 주민들을 포섭해서

공산 혁명지의 근거지가 될 촌락들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의 이성이 있던 사람들이 들었다면 김일성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우둔해도 그 무렵의 남한 사정을 아는 대남 공작 책임자라면

이런 꿈같은 생각을 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인의 장막에 쌓여서 현실 감각이 둔해진 김일성만이 한국이

아직도 한국 전쟁 전후의 지리산 지역에서와 같이 빨치산 행동이

가능했다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명명백백한 물적 증거가 있다.


공비 작전 중이던 1968년 11월 8일 헬리콥터를 타고 작전하던

공수특전사 부대는 100미터 높이의 험한 절벽지대 천연동굴에서

은신하던 공비들의 심한 사격을 받았다.


즉각 교전에 들어가서 한 시간 동안 총격을 주고받다가

6명을 사살하고 이들이 숨어있던 접근 불가의 동굴 속에서

한 트럭분의 기관단총, 탄약, 식량, 옷가지 발견했다.


이것은 이번 침투를 하던 간첩이 아니라

이미 더 이른 시기에 다른 간첩들에 의해서 근거지가 마련되면

인원들을 무장할 목적으로 미리 운반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울진 삼척 공비 침투사건은 김일성이가 노망기가 발동해서

즉흥적으로 지시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남한 침투 계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남한 농민들을 세뇌하고 교도해서 사상을 바꾸어서 전략촌을

구축하고 이들을 모택동이 지도했던 팔로군이나 베트콩 부대를

만들어서 군사 봉기를 시도해보겠다는 흑심을 빤하게 보여주는

막대한 무기라고 하겠다.


이들의 시도가 얼마나 계산 착오였는지를 짐작 할만하다.

한국군은 김일성이가 빨치산이니 유격대니 하고 장난을 치던
물 좋았던
시절인 한국 전쟁 전의 빈약한 10만
군대  시절이 아니었다.

69년의 한국군은 세계 굴지의 60만 대군으로 확장되어 있어서
토벌 군사력이 비교도 안 되게 강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와 김일성의 침략,살육, 약탈,
개인 숭배, 일가 독재등의 못 된 행실머리가
모조리 폭로되어
남한 사회에서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평판은 엄청나게 나빠졌었다.


공산주의가 도저히 입에 댈수 없는 불량식품이라는 것을
그 최고 고객층이었을  남한 극빈층들에
까지 몸으로 가르쳐 준
인간이 불량식품 제조업자인  김일성 일당이었다.


공비들이 발을 못붙이게 하는 안 좋은 남한 상황들은 더 많았다.
매일 국내외의 정치판세와 북한과 공산주의 실상을 물처럼 쏟아내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산간 농촌 어지간한 집에 보급이 되었을 때니

아무리 시골 산간 마을의 화전민이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은 환하게

알고 있을 때이다.


그 무렵 시골의 여론을 주도하던 젊은 남자들은

전방에서 군복무하며 북한의 실상을 교육 받았기 때문에

웬간한 북한 선전이나 세뇌는 씨도 먹여 들어가지가 않았다.


이런 곳에 시대착오적인 늙은 김일성의 판단에 따라

무장 공비 떼가 풀어졌던 것이다.


인민이 물이라면 공비들은 물고기라고 모택동이 말했었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인민이 물은 물이었다.


김일성의 남한 적화 욕심에는 중국을 다 차지했던
모택동에 대한 콤프렉스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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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비들이 무얼 모르는 어미가 풀어놓은 순진한 올챙이였다면

남한 인민의 바다는 그 올챙이들이 당장 죽일 만큼
엄청나게 짜디 짠 짠물이었다.


물이라던 인민들이 그들을 거부하고 반기지 않는 물에
뛰어든 올챙이 떼 섬멸에 앞장섰다.

미리 밝히지만 사살한 간첩들의 90%가 바로 주민들 신고로

펼쳐진 작전에 의해 사살된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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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공비들의 침투를 살펴보자

침투 간첩들은 3차에 걸쳐 한국 동해안 경북 울진 삼척지구

강원도 삼척지구에 고무보트를  타고 침투했다.


삼척지역는 1군 산하인 38사단 지역이었고 울진 지역은 2군 관할로

36사단 지역이었는데 최초 침투조 30명이 한 개조 15명씩, 두 척의

고무보트에 나누어 타고 10월 30일 울진 북면 나곡리에 침투했고 

2차 침투조 30명은  11월1일, 역시 고무보트를 타고 같은

울진군 북면 나곡리에 침투했었다.


나머지 60명은 11월 2일 강원도로 바뀌어서 삼척군 원덕면 월촌리

고포 마을에 네 척의 고무보트를 타고 침투했다.


첫 두 번의 침투조는 초소가 없는 2군 지역이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았으나 삼척에 침투했던 마지막 조 60명은 초소에 발견이 되었으나

초병의 허위 보고와 중대장의 보고 묵살로 무사히 침투에 성공하였다.


공비들은 북한 민족 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군부대 소속으로서 부국장

지시로 평양 인근 비밀기지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고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다시 3개월간 강도높은 훈련을 더 받은 뒤에 10월 30일
간첩선을 타고 출발했다.


이 때 정찰국장 중장 김 정태가 배에 직접 올라와 격려와 지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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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는 앞에서 말 한대로 1.21사태 때도 출발하는 김 신조
부대에게도
작전명령을 전달했던 인간이다.


그의 책임 하에 1.21 침투가 주도되었으면 목이 열 개가 있었어도

부족했을 책임 추궁을 당했을 텐데 멀쩡했던 것은 누가 1.21사태를

주도했는지를 알만하다.


대남 공작의 일선 책임자가 김 정태인데 그가 1.21청와대

기습을 기획하였다면 그는 그렇게 처절한 실패로· 끝났던 그

책임도 지지 않고 그보다도 더 위험성 큰 이런 작전은 지휘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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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로 향하는 침투 부대에 내려진 지령은 이랬다.


1.지하당을 조직하라.

2.해방촌을 구축하라.

3.양민을 포섭하여 대동 월북하라.

4.각종 태업 및 유격활동을 전개하라.

5.민중 봉기를 위한 선전활동을 하라.


결과를 보면 위의 지령은 김일성이 꿈도 야무지게

꾸고 김칫국부터 마시고 작성했음을 알 수가 있다.


침투에 성공한 공비들은 며칠 뒤 남한 무대에 데뷔했다.

1968년 11월 3일, 무장 간첩 30명이 울진군 북면 덕구리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모아놓고 북한 찬양을 하고 김일성 사진이 들어있는

불온서적을 나누어 주었다.


북쪽 노래를 불러주고 이북의 발전상을 선전하면서 위조지폐를
뿌려주며
입당원서, 유격대 지원 청원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무지한 촌민들에게 써먹던 유치한
선동 방식을  
비교도 안되게 정치 사회적으로 세련 된  
남한 주민들에게  읊어 댄 것이다.


주민들은 무슨  잠고대냐고  하면서도 겁을 먹고 움츠려 들었다.

주민들이 생각만큼 고분고분하지 않자 공비들은 화를 내고
한 주민을 
칼로 찌르고 돌로 때려죽였다


김일성이가 꿈꾸던 인민혁명이건 해방촌이건 주민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야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데 데뷔 무대가 주민들의

냉대 속에 살인으로 시작되었으니 그들 계획은 초장부터

이미 백일몽임이 들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제 2 편으로 이어집니다.   CLICK!

세계 최강 예비군- 대한민국 예비군, 제 2 편.

2009.03.26 20:05 | 세계 최강 예비군 - 대한민국 예비군 | 울프독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809 주소복사

 세계 최강 예비군- 대한민국 예비군,
                              
                                    -- 제 2 편.

해안선 초병과 간부들의 허위 보고로 침투 간첩들이  퇴치되었다고
방심하고 있던 당국은 공비 출현 신고가
들어오자 난리가 났다.

비상이 걸리고 병력들이 출동하기 시작했다.


육군과 해병대, 공수 특전단과 전투 경찰대에 공군과 해군이

출동하고 미군의 헬리콥터 공수 지원이 있었다.

토벌에 동원된 국군 병력은 일개 군단 규모였다.


여기에 더해서 가공할 공비 소탕력이 합세했다.

김일성이 남한에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했던 모택동의

팔로군 같은 강력한 농민 부대가 남한에 출현했던 것이다.


남한 판 농민 팔로군은 김일성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을
  죽이겠다는 결의를 가진 것이 달랐다.


울진 삼척 침투 공비들의 기본 무장 - 소련제 수다에프 기관단총
7.62mm 구경의 권총탄을 발사했다.
1.21 사태때에도 공비들이 사용 되었다.
어떤 총기 전문가는 2차세계 대전 최고의 기관단총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새로 신편 된 향토 예비군이 그 것이다.

예비군이 숨겨진 가공할 공비토벌의 전투력이었다는 사실은

북한의 작전 수립자들이 전혀 계산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공비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비군이라는 노련한 전투원의 대병력이 촘촘한 밀집 방어를
하고 있는 곳에 그런 대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모두 쉽게 발견되고, 추적되고, 죽임을 당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향토 예비군 대원들은 그 무렵 근무하기 힘들었던 한국군에서

참을성 있게 3년간 복무한 경력이 있는데다가 농촌 지방, 산간지방,

해안 지방에서 농사일과 산(山)일,바다일로 생업을 하면서 다져진

강인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더해서 월남전에서 실전을 겪고 돌아온 파월장병 출신들도
다수 있었다.

낮과 밤이 멀다하고 침투하는 북한 간첩들과 전투를 경험한

휴전선 근무를 했던 예비군들도 많았다.


그리고 예비군 편제상 같은 소대원들도 학교 동창, 동네친구,

그리고 형제나 사촌 등의 일가들도 많았으니 작전의 호흡이 더 이상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예비군 용사 대부분이 태어난 뒤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아왔었기에

주변 지리에 대해서는 눈 감고도 훤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을 다시 표현하자면 공비들이 자기 지역에 나타났다면 어디에

숨었을 것이고 어디로 도주할것이고 생포하려면 어디에 목을 잡아야

하는 것쯤은‘감(感),으로 알고 있었다.


지리에 훤한 예비군들은 예비군 단독 전투뿐만 아니라
군이나 경찰 작전에
참여하여 길 안내를 하고 수색과 도주로 차단에
대한 조언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비군들은 공비 발견에 지역의 감시

능력을 한층 배가 시켰다.

아들 동생 남편들이 총을 들고 나서자 지역의 대 간첩 의식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전에는 대충 넘겨보던 수상한 사람이나 이상한 발자국이나 취사흔적,

유류품등에 대한 신고가 발 빠르게 이루어졌다.


작전에 참가한 가족이 있는데다가 자연히 높아진 경각심에다가 전화가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 신고를 위해 몇 키로 씩 지서를 왕복하지 않고도

이미 가동되고 있는 예비군 지휘라인만 통하면 금방 군부대까지

연결이 되니 신고도 극히 쉽게 할 수가 있었다.


수상한 흔적을 발견하고 귀찮아서 모른 체했던 심리도  없지 않던 터에 

수없는 정보가 예비군 지휘라인을 통해서 접수되었다.


나중에 생포된 공비 정 동춘은‘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었다.‘라고 실토했었다.


공비 노획품중에 위의 접는 개머리 판을 가진 AK 소총도 소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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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했지만 소탕당한 백여 명의 공비들은 군의 수색이나

항공 정찰로 발견 된 것이 아니라 90%가 주민 신고에 의해 발견되어

끝장이 난 것이다.


더해서 어느 군 보고서도 예비군의 중요한 한 역할을 언급치 않았는데

예비군은 공비들의 소탕에 중요한 한 가지 역할을 했다.


공비들의 생존에 절대 필요했던 간첩들의 식량보급 루트를

차단했다는 사실이다.


예비군들은 주간에도 길안내 수색이나 전투를 했지만

밤에는 부락 주변 도로와 예상 접근로 등에 초소를 설치하거나

잠복조를 배치해서 공비들의 식량 조달을  차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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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공비들은 식량 확보를 위한 민가털이를

보급투쟁[補給鬪爭]이라 불렀다.

보급투쟁은 사실상 식량 강도질로서 공비들은

활동 노력의 태반을 여기에 소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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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은 사람 사는 곳에서 구해야하는데 이 예비군들의

야간 잠복은 사람으로서 먹고 살아야 할 간첩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들은 항상 손쉽게 털 수가 있는 인구 밀집 마을을 건너뛰어서

찾기 힘든 외딴 집을 찾아다녀야 했다.


모택동의 팔로군 전력이 결전에서가 아니라 후방교란, 보급방해,

소모강요와 같은 게릴라 활동에서 발휘했듯이 남한의 농민군인

예비군도 위의 소프트웨어적인 전력(戰力)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수더분한 농민 차림에 구식 엠원[M 1] 소총을 메고 산을 오르는

이들을 보고 이렇게 강한 전투력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자동화기를 휘드르는 공비들에게 예비군들이 들고 맞섰던
M1- 8 발 반자동  소총- 근거리에서는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예비군들은 이 구식총을 가지고도 공비들과의  
치열한 총격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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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보기 민망한 요란한 외국 군장으로 으쓱대는 미리타리 메니어들,

또는 서바이발 게이머들이 눈에는 이 수더분한 용사들의 농사꾼

옷차림을 보았으면 무어라 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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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삼척에서 대활약을 했던 예비군의 전사의 기록을 찾기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선진국 같았으면 예비군의 작전 활동에 관한 책자 한권쯤은 이미

출판되었거나 예비군 교육용으로 전투 사례집이 이미 만들어져 정리가

되었을 법한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며칠간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공비들이 침투했던

1969년 10월 30일부터 그 해 12월까지 마이크로 필림에 담긴 일간

신문을 모두 검색했다.


그러나 예비군에 대한 찬사와 국민들의 성원은 많았지만 의외로

간첩을 사살한 전과와 연결된 전투 상보는 얼마 되지 않았다.

토벌 작전의 진행 상황과 전과가 군부대를 통해서 발표되다보니

군부대 활동 위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같다.


그래서 아래에 신문검색으로 겨우 발견 할 수 있었던 울진 삼척

공비 침투사건의 예비군 활동 기사를 본보기로 몇 개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1968년 4월 1일 향토 예비군 창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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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형제 예비군의 공비 2명 사살


공비가 침투하고 2주가 지난 뒤 15일 강원도 명주군 대대소속

부분대장 박 성훈[ 31;병장]씨와 그의 형 영훈[35:병장]씨는

같은 동네 한 영식 씨와 [27]함께 동네 앞 돌담 밑에서

잠복근무 중이었다.

0시 45분 쯤 이들은 앞의 oo재를 넘어오는 세 개의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긴장했다.


분대장인 동생의 명령에 따라 적이 10미터 앞에 왔을 때

‘정지! 누구냐?!’ 하고 수하 했다.

대답이 없자 예비군들은 즉시 사격을 했다.


그들은 공비였다.

M1 총과 칼빈 소총이 불을 뿜자 공비들은 당황하여 허리를 굽히고

이들이 엄폐한 돌담에 기관단총을 연사하였다.

돌담에 바짝 엎드린 형제들과 한 영식 씨들도 사격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사격전은 10분이나 지속했다.

다급해진 공비들은 수류탄 두 개를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들은 돌담을 맞고 폭발 아군피해는 없었으며 오히려

폭발의 환한 불빛이 공비들의 위치만 노출하였다.


이때 불빛을 이용하여 동생 성훈 씨가 칼빈 총으로 공비 한 놈을

정조준으로 거꾸러뜨렸다.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공비는 [악!]소리를 내며 큰 길 한가운데에

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2명은 응사를 계속하며 길 왼편 도랑치려다 형 영훈씨의

사격에 또 한 놈이 도랑에 쓰러졌다.


마지막 한 놈은 핏자국을 내며  도주했다.

사살된 공비들은 그날 초저녁 인접 다른 초소에서 지체 장애자로서

군복무를 하지 않았지만 자원해서 예비군에 협조했던 최종성씨를

사살하고 도주했었던 자들로 밝혀졌다.


교전 중에 동생 영훈 씨의 바지에 단 두 개의 총알구멍만 났을 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살된 2명의 시체는 도립병원 시체실로 옮겨졌는데 그중 1명의

몸에서는 문서 등이 나와 조장으로 추정되었으며, 또 1명의 팔뚝에는

문서 연락병이라는 국군 완장이 끼어 있었고 왼쪽 다리에는 고무줄로

무릎 밑을 매어 지혈을 하고 있어 아군에게 상처를 입고 도망치던

잔당으로 보인다.


성훈 씨에게 사살된 간첩의 몸에서 발견된 수첩에서 그들이

양민 두 명을 학살한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또“ 정찰기와 직승기-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쫓고 지상에서는

군경이 쫓아와 견디기 어렵다”는 것도 적혀있었다.


2.육박전으로 간첩 정 동춘 생포


무장공비 정동춘의 생포는 향토 예비군이 세운 또 하나의 수훈이었다.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향군 61대대 장성중대 6소대 1 분대원
박 중근[ 37],
전 주호[32],김 대규 씨등 3명은 9일 오후 3시 30분쯤
001리 00골과 00골
사이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001리 0반
김 모씨의 부인 황모[30]
여인으로부터 ‘옆집에 공비가 들어왔다.’는
신고를 받고 즉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한 예비군들은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간첩 정이 마당에서 부엌을 들여다보며 보면서 여주인에게

‘밥 좀 빨리 주세요!’

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정이 부엌을 향해 있는 동안 박 씨등 예비군 3명은 공포를 쏘고

‘손들어!’하고 고함을 치면서 마당으로 뛰어 들었다.


공비는 뒤돌아서면서 먼저 김 씨에게 덤벼들었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30여분을 계속하다가

박 씨와 정 씨가 양팔을 잡고 김 씨가 빨래 줄을 걸어 정을

꼼짝 못하게 묶었다.


정은 곧 예비군 3명에게 연행, 철암지서를 거쳐 찝 편으로

장성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공비 정은 지난 10월 30일 울진에 침투 매봉산 줄기를 봉화군00
산속에서
불침번을 서다가 낙오병이 되었다. 일행은 15명이었다.


침투할 때 각 공비들은 기관단총 1정, 수류탄 4발,

실탄만 4백발을 소지했었다..

일행에서 낙오되자 00리 산악지대를 방황, 옥수수 가루등으로

연명하다가 배가 고파 부락을 찾아 내려왔다.


철암0리 양 모씨 집에 들어섰을 때 부인 유 씨는 처음

국군이 들어온 줄 알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 여인이 부엌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공비는 추운데 방에

들어가도 좋으냐라고 물었다.


유여인은 비로소 그의 말투를 보고 의심을 가졌다.

유 여인이 이상한 눈초리로 자기를 훑어보고 딸 옥녀[17]양이

대문으로 나가자 ‘연락하러 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 말은 들은 유여인은 사투리며 말투가 공비에 틀림없다고
직감하였다.


유 여인은 정에게 빨래터에 간 것이라고 안심시켜 놓고는
뒷밭에 가는 척하면서 30미터 쯤 떨어져있는 반장
이 모씨에게 연락했다.

이 모 씨가 예비군에게 연락해서 예비군이 올 때까지 유여인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3,예비군이 혼자 잡은 공비


지난 23일 오후 7시 20분 정선군00면 00리 산골짜기에는
공비잔당을
소탕을 위해 마을의 예비군들이 저마다 잠복초소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예비군00파견대 00소대 0분대장 박명환[31;하사]씨는 오후6시 30분

저녁상을 물리고 파견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난로에 나무가 떨어져 가는 것을 본 박 씨가 사무실을 나와 00교를
향해
약 150미터쯤 걸어 왔을 때 짤막한 키에 다리를 절면서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고 힘없이 걸어 나오는 괴한의 모습이 보였다.


이 동네에서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몸에선 이상한 악취가 풍겼다.

괴한은 작업복에 국방색의 잠바를 입고 농구화를 신고 텁수룩하였다.


아무래도 수상쩍다고 생각한 박씨는 10미터쯤 지나쳤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괴한의 뒤를 천천히 밟았다.

박 씨는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왼손만 흔들며 배낭을 멘채
절룩거리는
괴한에게 바짝 따라 붙었다.


괴한은 초소 5보 앞까지 이르자 보초를 발견했는지 멈칫하였다.

‘이때다! ’싶어서 박 씨는 괴한에게 달려들어 팔을 비틀면서

너는 누구냐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괴한은 못내 침착한척 숨을 들이쉬곤

“나다! 나를 모르느냐?”

하면서 반항하였다.

박 씨는 "공비가 나왔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전 규만 씨가 달려와 총구를
괴한의 가슴에 들이댔다.


공비의 잠바 속 왼쪽 가슴에서 수류탄 4개가 나왔다.

그리고 기관단총 탄창 5개를 허리춤에 감고 있었고

배낭에는 나침반, 옥수수, 엿, 고춧가루, 양재기등이

들어있었다.


왼쪽 팔목에는 일제 시계를 차고 있었다.

반항을 체념한 공비는‘나를 풀어주면 다른 동료 1명을 데려 오겠다.’

라고 예비군을 속이려 들었다.

이름이 김 광춘[25]으로 밝혀진 공비는 이날 밤 정선 경찰서로

후송 되었다.


김광춘을 생포한 박명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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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박 씨는 일요일이면 꼭 교회에 나가 어린이

주일학교의 강사일과 교회 사무를 돌보는 총각 늙은 어머니와

남 동생등 세 식구를 거느린 착실한 가장이기도 했다.


4.적 4명 사살을 유도한 예비군


예비군과 공수특전단 그리고 보병들의 합동작전으로 적 4명을

사살 가능케 했던 전투다.

이 작전에서 예비군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번에 적 4명을 사살한 25일의 전과는 예비군의 발견과

보병부대의 몰이 작전,그리고 검은 베레공수 특전단의

공수 작전 등의 치밀하고 입체적인 작전의 성과였다.


이날 새벽3시쯤 정선군00고지에 잠복근무 중이던 예비군

이 동근[34] 씨등 2명은 샘터 골 산중턱에서 인기척이나 포복으로

접근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공비00명을 발견하였다.


이씨등은 곧 인근 예비군의 지원을 받아 약 20분간 교전하면서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았다.

전투에서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예비군은 즉시 공수특전단에
신고하였다.


예비군은 견제 작전을 펴면서 공수 특전단이 투하할 수 있는
새벽까지
적의 위치를 지켰다.


날이 새면서  백 중기 상사가 이끄는 공수 특전단 기동 타격대가
헬리콥터로 제일 먼저 현지에 도착했으며 이어 박 승윤 중령이
지휘하는 지원대가 계속 투입되어 해발 1천 미터가 8부 능선에
포위망을 쳤다.


약 한 시간 동안의 능선을 따라 추격하던 백 상사 팀은
농구화 자국을 발견하고 계속 추격 끝에 막 능선을 넘으려는
적0명을 발견,
50 미터까지 접근했다.

적이 사거리 안에 들자 검은 베레는 일제 사격을 가해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는데 적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수류탄을 내리 굴리며 미친 듯이 기관총을 난사해댔다.


이러는 동안 보병부대는 적의 퇴로를 끊기 위해 반대편에서

고지를 향해 몰이작전을 펴며 올라갔다.


적의 위치를 완전히 파악하고 마치 독안에 든 쥐처럼

궁지에 몰아넣은 아군은 작전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공수 특전단 전방 지휘소에 헬리콥터에 의한 지원을 요청했다.


마침 CP에는 국회 조사단이 도착, 공수특전단장 정 병주 준장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는데 전투 상황을 연락받은 정 장군은

국회의원들이 타고 온 헬리콥터로 박 찬욱 중령이 지휘하는

지원 병력을 수송했다.


박 중령 팀은 공중 투하하면서 적에 일제 사격을 가하며 7미터

앞에까지 접근, 적 4명을 사살해버렸다.


5.예비군과 공수 특전단의 공비 김 정명 생포 합동작전.


28일 오후 나무꾼이 발견한 7명의 공비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린 끝에
공비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날 공수 특전단에 생포된 공비는 키가 1m 60cm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의 김 정명[27]이었다.

공수 특전단은 이날 정선군00리에서 공비 수색전을 끝마치고

정선군에서 500미터 떨어진 주둔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원들은 실은 차량이 주둔지에서 300미터 떨어진 지점을

막 들어서는 커브 길에서 7명의 공비들이 주둔지 대기 중이던

특전사 대원들의 추격을 받고 분산 도주하는 것을 발견했다.


전 대원은 트럭에서 하차, 가슴까지 잠기는 차가운 시내 물을 건너서

공비들을 추격 하였다


신 현도 대위가 이끄는 중대는 재빨리 헬리콥터을 불러 타고

공비들의 퇴로를 막기 위해 공비들이 도주한 방향의

산 너머 능선에 투하했다.


그리고 잠복한 특전단원들은 숨을 죽이며 넘어오는 공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공비 2명이 배낭을 집어 던진 채 총만 들고 앞 능선을 넘어왔다.

잠복 대원들의 총구에서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2명의 공비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런데 뒤따라 넘어올 5명의 공비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대원을 정렬해서 수색전을 전개, 어느 민가가 근처에서

수상한 옥수수 깡다리 짚이 수상했다.


신 대위는 대원 5명에게 5미터 높이로 쌓아 올려놓은 옥수수

대에 일제 사격을 하도록 명령했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1명의 공비가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고

뛰쳐나오다가 거꾸러졌다.


이어 또 다른 공비가 오른 손에 배낭과 기관총을 들고

뛰쳐나와 도주했다.

대원들은 즉각 이를 추격하였다.

쫓기던 공비는 배낭과 기관단총까지 버리고 도주하다가

뒤에서 덮친 신 대위와 격투를 벌였다


공비가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뽑아 들었지만 신 대위가 이를
탈취하여
멀리 던져 버려 수류탄이 터지게 하였다.


뒤따라온 예비군 2명과 대원 2명이 합세하여 생포한 공비 김정명은

왼쪽 팔목과 겨드랑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 3 편으로 이어집니다. CLICK!

세계 최강 예비군 - 대한민국 예비군, 제 3 편

2009.03.26 19:56 | 세계 최강 예비군 - 대한민국 예비군 | 울프독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808 주소복사

 세계 최강 예비군 - 대한민국 예비군,
                                    
                                      -   제 3 편

 

예비군들은 모두 생업이 있고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불 안 가리는 미혼의 젊은 현역 전투원들과 달리 나이도

있고 가정도 있어서 전투를 사리는 경우가 있었다.


맹렬한 전투력을 과시하던 일본군이

전쟁 후반에 동원한 나이 먹은 예비군[후비보병]들은

이스라엘 예비군들과 달리 영 시원치 않은

작태를 보여 주어서 일본 군부를 한숨 쉬게 하였다.


그러나 울진 삼척공비침투 소탕작전에 동원된 예비군들은

공비들과의 전투에 몸을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임했다가

전사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1.전사한 예비군 소대장


예비군 소대장이 공비와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이야기다.

6일 오전 11시 30분 명주군 00면 향토 예비군 제 1 소대장

전 병국[38세;농업]씨는 대원 8명과 함께 00산 계곡에서 공비들을

수색하다가 공비 1명과 격투 끝에 전사했다.


전 씨는 이날 오전 8시쯤 이웃부락 최 모[49]씨 집에 공비 1명이 침입

담배 성냥 닭 등을 훔쳐 갔다는 신고를 받고 부근 계곡 일대에
수색전을
벌였는데 낙엽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공비와
격투 끝에 기관단총에 맞아 전사했다.


전 씨는 농업에 종사하는 예비역중사로서 부모와 아내등 아홉

식구를 거느리고 있다.

전 씨는 상사로 진급되어 예비군 역사에서 최초의 진급자가 되었다.


2.총격전 끝에 전사한 예비군.


13일 정선군 00면00산 중턱에 무장 공비가 숨어있는 것을

박 요주 소대장이 지휘하는 예비군이 발견하고 교전 끝에

적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 1대, 라디오 1대, 의약품등을 노획했다.


적은 아군의 격심한 집중 사격을 받자 부상자를 끌고

산속으로 달아났다.

이 교전에서 예비군 김연근[30]씨가 전사했다.



3.파월 장병출신 예비군의 죽음


15일 밤 11시 12분 삼척군 장성읍 000리, 향토 예비군 00소대의

정문 보초를 서고 있던 서 영남 [26]씨가 무장괴한 2명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복부 관통상을 입고 장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서씨는 4개월 전 월남전에서 돌아와 제대했었다.

군경 수색대는 일대를 포위 수색전을 벌이고 있다.


4. 아들의 오인사격에 희생당한 아버지


공비들은 자식의 총에 아버지가 희생되게 만들기도 하였다.

14일 밤 9시40분쯤 삼척군00면 00리 변 용섭[50]씨는

1킬로 떨어진 마을에 다녀오다가 예비군 초소에서 공비로

오인 발사된 자기 아들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날 변 씨의 장남 명득 씨는 5,6명의 예비군과 동네 변두리초소에서

잠복근무 중 수 미상의 공비가 나타나 10분간 교전 끝에 격퇴시켰는데

얼마 후 아버지인 변 씨가 갑자기 초소 앞에 나타나 공비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시신을 확인하고 명특 씨는 "공비 때문에 죄 없는 아버지를

죽였다.”고 시체를 안고 발버둥 치며 눈시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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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비군들에게 아쉬웠던 것은 빈약한 무장이었다.

공비들이 전원 기관단총이나 접는 AK 소총등의 자동화기로
무장했는데
예비군들은 8발 반자동의 M1소총밖에 없었다.


간부급들이 가진 칼빈 소총도 반자동이었다.

예비군 전투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근접
야간전투에서
필수였던 수류탄도 지급되지 않았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일선의 예비군들이 합창하듯이 요청하는
이 무장 보강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었다.


공비출현을 가장 빨리 알아채고도 즉각 이를 사살하지 못하고

군경의 지원을 얻어야했던 것은 장비가 허술한 때문이라고
예비군들은
안타까워했다


예비군에게 지급된 실탄부터 수량 제한되어 있어
충분한 사격도
하지 못했다.

근접 야간 전투의 필수무기인 수류탄은 절실하게 필요한 무기였다.


앞서 공비들을 사살했던 형제 예비군들은 몰려든 기자들에게

수류탄만 있었으면 모두 몰살시켰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평창군에서 5인 가족이 공비들에게 참살되었을 때였다.

공비들이 만행 후 달아나는 것을 예비군 수색조가 골짜기 50미터쯤
뒤에서 발견하고도 수류탄이 없어 전멸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이들이 휘두르는 기관단총에 엠 원 소총으로 대결하다가 대원 한 명만

중상을 입고 공비들은 헬리콥터로 기동해온 공수 특전단이 전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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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물론이고 북한의 공작지휘자들도 며칠 못가서 자기들이
짜디찬
소금물에 던져져서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올챙이 신세라는
것을 알아챘다.


공비들이 북한과 교신 한 내용을 감청한 것을 보면 비명과 절망에

찬 것들이 잡혔다.


“사방이 뚫기 힘든 벽이다!”

“복귀는 절망적이다!”


공비들이 가져온 식량이 다 떨어진 10일 이후부터 이들은

민가 근처를 얼씬거렸고 발견되고 토벌 당하는 횟수도 훨씬
증가하였다.


15명 일개조로 움직이던 이들은 신고가 급증하고 토벌도
가열해지자
일개조가 3-5명 수준으로 격감하였다.


북한의 우두머리들은 그때서야 꿈에서 깨어나 해방 촌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활로를 찾아서 북으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했던 공비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방향을 알게 된 군경과 예비군들은
토끼 몰이 식으로
이들을 몰아 쳤다.

병력이 태백산맥을 따라 집중적으로 배치된 것을 무선 감청으로

알게 된 북한은 공비들에게 태백산맥을 벗어나 다른 루트로
북상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공비들의 태백 산맥 도주로 -  주민들의 감시와
예비군과 군경의 차단으로 산맥 이탈 귀환을 지시 받고도
벗어나지 못하고 거의 산맥을 따라서 소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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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실정을 모르는 지령이었다.

태백산을 벗어나는 일 자체가  쉽지가 않았다.

산간지방을 벗어나 인구 밀집지구로 들어가 복귀하라는 지시인데

이것은 그들이 두려워했던 노출을 자초하라는 것이었다.


막판까지 갔던 공비들의 말로를 닷새간 같이 생활하며 지켜보던

남한 주민이 있었다.


작전의 막바지인 11월 29일,

강원도 상원사에 침입해서 식량을 약탈했던

공비들이 그 절에 와서 공부하는 최 재기라는 재수생을
납치해서
대동 월북하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최 군은 닷새 만에 탈출해서 공비들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그가 말하는 공비들 다섯 명이 총상을 입은 상태였고 한명은 중상을

입은 위독한 상태였다는 것

그들은 위장 땅굴을 파놓고 낮에는 숨어있고 매일 밤 두 명이

뒷산에 올라 북한과 교신했는데 무선을 끝내고 내려와서

“ 어떻게 해서라도 넘어오라는 지시인데 아무래도 살아 돌아 갈
   가망이
없지 않겠느냐 '" 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는 정보를
조사 당국에 주었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예비군을 포함한 민관군이 한 달간 얼마나
거세게
이들을 압박하며 몰아세웠는지를 짐작케 하는 정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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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했던 공비들은 물론 남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반정부 혁명에 참가하도록 유도하라는 지령을 받았음을 앞에서 밝혔다.

그러나 씨도 먹히지 않자 잔인한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이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은 무려 양민 11회에 걸쳐 23명이나 된다.

민간인 살해는 이들이 자주 신고당하고 군경에 쫓기면서

점점 더 대담하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살해 행위는 남한 농민들에게 첫 선을 보이던

날부터 자행되었다.

출현 첫날 첫 주민 집합에서 한 명을 죽이고

그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산촌에 우편을 배달하던 배달부를

사살해서 개천 물속에 매몰했다.

유가족은 열흘 뒤에야 유해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때의 집배원 복장이 경찰과 비슷해서 사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든다.


전 병두라는 사람을 해병대에서 복무했다는 이유로 학살했고

또 한 곳의 주민 집합에서는 공비들 말을 못 알아들어서 머뭇거리는

벙어리를 학살하기도 했다.


공비들의 일가족 몰살의 잔인함은 일가족 몰살에서 볼 수 있다.

11월 14일 삼척군 하장면 산골짜기 외딴집에 사는 최 찬석[80],

며느리 [52], 손자 최 동학 [15] 집에서 100미터 떨어진

야지로 끌고 가서 전원 살해했다.


11월 20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고 영일 [60]씨, 부인 이 형녀[61]씨,

며느리 [32], 장녀 [6],차녀 상금[3] 전 가족을 집 앞의 개울가로

끌고 가 발가 벗기고 칼로 난자해서 살해했다.

아들 고 원식 씨[36]는 출타해서 무사했다.


11월 25일 자정께 강원도 영월군에서 우 태봉 [27]씨 집에

공비 4명이 출현, 집에 들어서자 말자 무조건 각자에게

기관단총을 4-5발씩을 쏴서 사살, 우 씨만 탈출하고 우 씨의 어머니

박 옥순, 이복 동생 김 생규[12세], 장녀 영자[4세]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부인 안 분남[24]씨는 중상을 입혔다.


12월 9일 공비들은 유명했던 이 승복 어린이 집안

몰살의 학살 사건을 자행했다.

이 사건은 토벌의 막바지에 몰린 공비들이 저지른 잔인무도한

일가족 몰살 사건이기도 했다.

많이 알려진 사건이라 부언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잔악한 학살이 있었던 이승복 어린이 집 - 철거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집이 현장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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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복 어린이의 아버지 이 석우 씨는 출타했다가 학살의 현장에

돌아 왔다가  낌새를 채고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지만 

칼로 30여 곳이나 찔리고 두엄자리에 버렸던 이승복의 형 이 승권 군

[나중에 학관으로 개명]만 3일후에 의식을 찾고 살아남았고 

이 석우씨의 부인과 승복의 두 동생들인 승자와 승수는 죽임을 당했다.


나중에 군경이 출동해서 발견했던 현장은 참혹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었다.

살육을 자행한 공비들은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연속 살해범으로 잘 알려진 유 영철이나 강 호순 부류와 같은

싸이코 패스라고 볼 수밖에 없는 비인간들의 만행을 저질렀다.


알려 진대로 공산당이 싫다고 했던 이 승복군의 입을 찢은 것은
물론이고
그의 형 이 승권 군을 칼로 무려 30여 번이나 난자한 것도
상상을 초월한
만행이었다. 


그러나 이 승복 군의 죽음은 그의 여동생 선자양의 죽음에

비하면 그래도 잔인함의 정도가 낮은 것이었다.


공비들은 아직도 어머니 품속에서 어리광이나 부려야 할 네 살짜리

여아를 두 다리를 들고 벽에 패대기를 쳐서 살해했다.


사건 후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들은 온 집안에 퍼진 피 냄새와
핏자국,
방안 여기저기 뿌려진 선자양의 터진 뇌수를 보고
몸서리를 쳤다는
후일담이 있다.


이 잔인한 사진을 가지고 몇개월을 망서렸다.
그러나 오늘 공개하고자 한다. 공비들이
칼로 오른쪽 뺨을 찢은 이승복군의 참혹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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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사건의 정황이 이랬는데도 이승복의 이야기가

날조되었다고 떠들어냈던 인간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를 향하여 그렇게 대담하게 시비를 걸고 싶었으면

필자처럼 하루라도 투자해서 도서관에 가서 자료 수집이라도 해서

판단을 하는 양심과 조심성이 있어야했다.


더구나 슬픔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승복군의 아버지와 형이라는
유가족이  생존해 있는데도 그런 매명[賣名]을 위한 공명심은
지각없는 짓이었다.


이 승복 집안을 박살낸 공비들은 며칠 뒤 토벌대에 의해서

모두 사살되었다.

 위의 이승복 어린이 집은 1972년 철거되고 새로 다시 지은 집이다.
이런 소박한 가정에서 유영철의 살인 현장에서나 볼 수있는 피바다
가 연출 되었으니 공비들을 사이코패스라고 밖에 부를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구미의 인기 블로거 마두님이 보내 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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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후 1.21사태에 이어 두 번째로 북한 대부대의 침투를 당한

한국군은 이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전력을 다해 공비들을 소탕 했을 뿐더러 군대내의 실수와 무능에

대해서는 사형이라는 최고형을 적용하여 엄벌했다.


그 때의 공비침투 사태를 한국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만하다.     

극형에 처해진 세 사람은 공비들이 침투했던 지역의 초소에서

근무하다가 허위보고를 했거나 초소나 위치를 비웠거나

허위 보고를 한 장병들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장병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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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림 일병 [38사단]- 침투 공비 최초 발견자.

 사형- 수소이탈 허위보고

-김 남출 하사 [38사단]-초소장 

 사형- 수소이탈 허위보고 

-이 기택 중위 [11사단] -중대장

 사형 -작전지역 무단이탈, 작전 실패

        허위보고 및 이적행위


이외에도 토벌 작전 중에 비겁행위를 하거나 근무태만을

수십명의 장교 부사관 사병들이 [모 대대장까지] 가차 없이

법의 적용을 받아 계급을 박탈당하고 군 형무소로 보내져서

형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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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에 대한 국민들과 현지민들의 성원을 대단하였다.

그 무렵의 언론은 예비군의 기대치 않은 활약을 보도함과

또한 성금과 위문품의 쇄도도 자주 보도하고 있다.


남편이나 아들이 예비군으로 근무하는 지역의 현지민들

성원은 오늘날 월드컵 대회에 출전했던 한국 축구팀에 쏟아지던

성원과 비슷했다.

동원 근무에 수고하는 예비군에 식사와 잠자리 제공은 물론 추운 날

야간 근무하는 예비군들에게 간식과 뜨거운 보리차들을 제공하였다.


한국 역사에서 군사 작전이 이렇게 대대적인 국민의 성원 속에

진행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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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삼척지구 공비 침투 소탕 작전에서 군과 경찰은

여러 새로운 작전 형태를 선보였다.

예비군이 큰 성과를 본 케이스이다.


여기에 월남전에서 실전 경험했었던 공중 강습작전을

큰 규모로 활용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공수 특전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자주 투입되었고 공비들에게 큰  공포를 주었다.


비정규전에서 헬리콥터의 위력을 알게 된 군은 그 뒤 공비침투

예상 지역의 산 정상을 수평으로 깎아내고 헬리콥터 착륙장을
만들었다.


지금도 등산객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산 정상에 올라가면 ‘H'라고

써진 헬리콥터 착륙장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울진 삼척 공비

침투 사건 뒤에 본격화 된 공사의 일환으로 만들어 진 것들이다.


지금의 세대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편의대[便衣隊]가

작전 동안 운용되었다.

편의대는 사복을 입은 특수부대로서 농부로 변장해서

의심지역에 투입해서 정찰과 수색을 했고 필요하면 전투도 했다.


당국 발표에 의하면 울진 삼척지구 침투 공비들은 120명이며

이중에 114명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살아서 북으로 귀환한 공비 숫자가 여섯 명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들 중
중상을 입고 며칠 버티다가 죽어서 동료 공비들이 

매장한 수미상의 공비들의  것도 포함했을 가능성도 높다.


결국 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농민 봉기를 꿈꾸고 남파했던 공비들은

거의 전멸해버렸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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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북의 김일성은 모택동식의 농민 중심의 농촌

유격거점 전략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소련식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꾀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70-80년대 도시의 근로자 사이로 파고들고자 시도했던 간첩들이

심심치 않게 체포 되었던 것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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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공산주의가 첫 도입 되었을 때 이 입삼, 왕명등은 소련을

흉내내어 도시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꿈꾸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농민이 전체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에서는

농민이 중심이 되어한다는 노선을 추구했었다.

결과적으로 모택동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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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그러나 며칠간 오래된 신문의 마이크로 필림을 이리저리 뒤적였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예비군의 활약을 보도했던 기사를 모두

발견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내가 기억하는 것 만해도 깊은 골짜기에서 일대일로 조우했던 공비가

안전핀을 뺀 수류탄으로 위협하는데도  엠 원 총으로 맞서며

끝내 그를 생포 한 예비군의 일화라던가.자동 화기를 휘두르며

저항하는 세 명의 공비를 구식이지만 사거리가 긴

장거리에서 엠 원으로 사살한 예비군 분대의 활약등은 신문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1969년 경북과 강원도의 산간 농부들로 구성된 예비군들이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의 수준의 훈련을 북한의 특수 부대와 맞서

이들을 궤멸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재삼 강조한다.


나의 글 앞머리에서 말했듯 이들이 올린 전과는  예비군들에게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수여함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지금 우리의 예비군이 현역과 비교해서

군기가 해이하다해도 염려 할 것이 없다는 것은 허름한 농부 행색으로

엠원 총을 들고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 부대와 맞서 섬멸했던 이들

농사꾼 선배들이 몸으로서 보여 주었다.


지금 소집된 젊은 예비군들 복장 상태가 노숙자형이건, 두발 모양이 

장발족이건, 군화대신 슬립퍼를 신었건 ,그리고 열[列]과 오[伍]가

콩가루 꼴이건 아니건, 그들의 유사시 전투력 발휘에 대해서

걱정 할 것이 없다.


세계에서  전쟁을 가장 많이 했다는 미군들이 아세아 최강 군대라고

크게 평가하는 한국군의 전투력이 어디 가겠는가?


실전이 부딪히면,  그리고 적절한 리더십과 동기부여만 잘 된다면

이 너절한 행색만 골라서 보여주는 우리 예비군 용사들은
울진과 삼척의
선배들이나 이스라엘 예비군과 같이 왕년의
내재된 전투력을 순식간에
복원해서 폭발적으로 발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