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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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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들쥐 굴 다이빙 습격

미국 엘로우 스톤 공원에서 영국 BBC 방송이
잡은 장면이다.
올해 4월에 유튜브에 포스팅 되었다.




미국의 붉은 여우가 쌓인 눈 밑에 숨은 쥐굴을
문자그대로 '여우'같이  발견하고 '독수리' 처럼
덮쳐서 잡아낸다.

쌓인 눈 밑의 쥐가 쥐굴에서 나와서 눈밑에서 숨을 쉬는
순간에 습격했다.

들쥐 호흡 흔적이 눈 표면에 표시는 되지만
깊은 눈밑의 들쥐 움직임을  미세한 소리로만
알아내는 재주가 신통하기만 하다.

정숙 보행을 해서 접근하는 그 치밀함과 교묘함은
보시는 바와 같다.

호랑이가  곰이나 멧돼지에 비하면 하찮게 보이는
참새를 잡을 때도 맹수 사냥에 쏟는 최선의
접근과 민첩함을 발휘하는 모습은 감탄스럽다 못해
경이스럽다고 한다.

[ 이래서 호랑이도 참새를 잡을때도 최선을 다 한다는
   처세훈이 나온듯하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 하라는 교훈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실이다.]

이 여우도 '먹기 살기 위해서' 그런  극도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기본 decasonic 2009.12.02  14:31

ㅋㅋㅋ 뭐야 허공에 다이브 했는데 땅이 푸욱 꺼지잖아 ㅋㅋㅋㅋㅋㅋㅋ

답글쓰기
기본 decasonic 2009.12.02  14:31

그리고 나오니까 뭘 씹고 있네 우와 ㅋㅋㅋㅋㅋ

기본 고락산성 2009.12.02  17:28

잘 보고 갑니다.
사이버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 산행을 하고 이제 귀가 했습니다.
모임이 있어서 급히 나갑니다.
내일 다시 뵙지요.
편안한 12월 2일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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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격추왕, 지오라 이븐.


지오라 에벤.

1967년 첫 격추한 수호이 7기.
지오라가 발사한 30mm 아덴 기관포탄 전부가 수호이 분사구에
빨려들듯 명중하고 기체는 공중 폭발했다,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스라엘 산
샤피르 미사일 보다도 기관포 사용으로 적기를 격추했다.
--------------------------------------------
1
947년 주변 아랍국들에게 둘려싸인 불리한 입장에서
아주 약한 국력으로
독립한 이스라엘은 독립선언이후 
여러 번 민족 사활을 건 전쟁을 했었다.


지금은 국력이 강해지고 주변 정치적 역학관계도 변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학대하는
폭력 국가의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지만 10월 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치룰 때까지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들과 크고 작은 생존의 싸움을
버티어내야 했다.


이스라엘 국방의 전위에 섰던 이스라엘 공군은 다른 어느 나라의

공군보다도 그 국방에 기여했던 공로가 크다.


미라주 3
----------------
공군의 공헌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스라엘 조종사의
활약이 지대했다.


이스라엘은 1947년 독립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6일 전쟁등
여러 전쟁을 치뤄서 적 전투기와 공중전도
많아 적기를 다수 격추한
에이스[적기 5기 이상 격추]들도 많았다.


이스라엘 제 미라주인 네세르- 아르헨티나에 수출되어 포크랜드
전쟁에 동원되었었다.
----------------------------------------------------
그러나 아랍 권과 치열한 열전과 냉전을 거듭하는 동안
테러의 위협에
무수히 노출 되었던 이스라엘은 테러 가능성

때문에 그런 에이스의 신원을 다년간 비밀로 했었다.


서울 올림픽 무렵에 내가 읽었던 미 군사관계 잡지에 이스라엘에

적기를 15기나 격추한 에이스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상당히
궁금했었지만
더 이상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아랍 제국들과 관계도 많이 부드러워 지고 테러의
위협도 줄어들자
점차 이스라엘 공군의 에이스들 신원도
공개 되게 되었다.


나는 몇 년 전 그간 항상 궁금해오던 이스라엘 격추왕의 실체를

비로소 아는 기회를 가졌다.


지오라 에번, 총 적기 격추기 수는 17기다.

이스라엘 공군에 1963년부터 1997년까지 34년간 근무했다.

격추한 적기는 전부 이집트 공군 기로서 미그와 수호이
전투기들과
M-8 헬리콥터 등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한국전 최고 에이스인 멕코넬 대위가 16기,

월남전의 에이스들,리치 대위[공군],와 커닝햄 대위[해군]의
기록이
5기임을 새겨보면 대단한 기록임을 알 수가 있다.


미라주의 천적 미그 21 비스형 [폴랜드 공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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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8년 이스라엘의 시골에 위치한 네그바 키부츠에서
태어나서
평범한 시골 어린이로 성장하였다.
[키브츠는 협동형 집단 농장]


어린 시절 이름은 지오라 엡스테인 이었다.

그는 소년기 때부터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그는 영국 전투기 에이스들의 무용담을 읽으며 꿈을 키워갔다.


그는 수에즈 전쟁이 끝난 1956년 입대 가능한 나이인
18세가 되자
이스라엘 국방군[IDF]에 입대했다,


지오라는 군복무중 조종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고자
비행학교에 지원했지만 입학 신체검사에서 심장계통에
작은 이상이 발견되어 단념해야 했다.


열이 오른 그는 대장에게 가서 비행학교가 불가능하다면

꿩 대신 닭이라고 비행할 수 있는 공수 부대라도
보내 달라고 졸랐다.

대장은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공수부대에서 그는 실력을 발휘하여 낙하 시범 팀

[스카이 다이버 팀]에 선발되었다.

지오라는 덕분에 700회에 가까운 낙하 기록을 세울 수가 있었다.

해외에서 열리는 스카이 다이버 대회에도 자주 참가했는데 그는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1959년 군의 방침에 따라 성을
엡스타인에서
에벤으로 개명했다.

[에벤이란 히브리어로 돌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 정서나 개념으로 잘 이해가 안 되지만 하여튼
그는 그 뒤
지오라 에벤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는 공수부대에서 3년간 잘 복무하고 제대했다.


제대 장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답답한 시골과 농사일이
그에게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기회를 보다가 재복무를 신청하고 군으로 돌아왔다.


지오라가 조종했던 미라주 3전투기- 1973년 하트조르 기지의
113 비행단
-------------------------------------


그러나 비행에 대한 열망은 너무 컸던지라 군복무를 하면서

다시 비행학교에 지원했다.

당시 이스라엘 공군에는 공군 사관학교가 없었고

단지 2년제 비행 학교만 있었다.


재차 시도한 비행 학교 신체검사에서도 그의 심장 계통의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군의관은 한편 그의 심장이 정통 훈련을
받은 직업선수
처럼 대단히 튼튼한 것을 발견하고 일단 합격을
허락했다.


지오라는 꿈에도 그리던 조종사가 되는 기회를 가졌을나  
장애물을 아직도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의 동기 중에 최우수 후보생으로 졸업했지만 그는
다시 심장 계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라
헬리콥터 조종사의 길만 허락되었다.


그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하면서도 전투 조종사를
향한 열정을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지오라는 기회를 타서 미공군 군의관이자 심장 전문의에게
그의 신체 검사의 모든 기록과
엑스레이 사진을 보냈다.



한참 뒤에 그 미 공군 군의관에게서 그의 모든 것을
다 검토했는데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발견할 수가 없다는 회신이 왔다.


지오라는 의기 백배하여 이 회신을 들고 상부와 다투면서
전투기 부대로
전출시켜 달라는 투쟁을 시작했다.


갖은 장애물을 다 겪으면서 그는 드디어 전설적인 공군 참모총장

에제르 와이즈만 장군과 독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야망과 그가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준 미 심장 전문 군의관의 소견서를
보여주며 역동적으로 전투기 부대 전출 희망을 피력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의 경력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억지를 부렸다.

“총장님. 총장님으로부터 확답을 받을 때까지 앞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를 달래서 돌려 보낸 와이즈만은 밤새 숙고 해보고 다음날

지오라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 이 골치 아픈 넘! 당장 보따리를 싸서 전투기 부대로 떠나!

   그리고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


에제르 와이즈만 총장. 나중에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었다.
-------------------------------


그가 그토록 원하던 전투기 조종사가 될 때까지 그는 수없는
난관과 싸우며 
7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었다.


지오라는 조종 훈련생 때부터 너무 시력이 좋아서
매눈[HAWK EYE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 24마일의 원거리에서도 적 전투기를
발견했는데
이는 전투기 레이다 탐색 거리 밖애 있는
적기도 발견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통 조종사가 8내지 12마일거리에서나 적기를 발견할수 있다는
점에 비하면 그의 시력은 두세배 좋은 시력이었다.


지오라는 1963년 대망의 전투기 조종사가 된 뒤에
여러 전투기들을
조종하였다.


프랑스제 다쏘 우라강, 슈페르 미스테르, 그리고
미라주 3 C 등의 프랑스제
전투기를 조종했고 미라주의
이스라엘 생산 복사품인 네세르와 미라주 파생품인
크피르  전투기도 그의 손을 거쳤다.


미라주 전투기에 격추 당하는 이집트 공군 미그 21기
---------------------------------------------


서두에서 밝힌바와 같이 그는 적기 17기를 격추한
이스라엘
최고의 에이스였다.


격추한 첫 이집트 공군기는 수호이 7기로서 6일 전쟁이
발발했던
1967년 6월 6일 시나이 반도의 엘 아이리쉬 시
상공에서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대패했던 이집트의 나세르가 시도했던
1969년-1970년동안의
소모전[WAR OF ATTRITION]에서
미그 17기 한 기와 수호이 7기 한기,

그리고 이집트 최신형 미그 21기 두 기를 격추하였다.


17기중 12기는  1973년 발발했던 욤 키프르

전쟁 때 거둔 전과이다.



이스라엘 미라주 파생형 - 크피르 전투기
-------------------------------------------


놀라운 것은 12기중에서 8기는 단 26시간동안 거둔 것이다.


추측해보면 그가 최대의 전과를 거둔 이유는 이집트가 개전 직후
기습의
우세함을 활용하기 위해서 전투기 부대를 대량으로
동원했었기 때문이다. 

수호이 7
------------------

개전 3일 동안 [1973년 10월 18일부터 20일 까지 그는 M-8

헬리콥터와 9기의 적 제트 전투기를 격추하였다.

이것들은 두 기의 수호히 7기, 두 기의 수호이 20기,
4기의 미그 21기들이다,


그리고 1973년 10월 24일 그레이트 비터 레이크 상공에서 3기의

미그 21기를 격추해서 토탈 적기 격추수를 17기로 늘렸다.


미그 17기
-------------------------

그가 거둔 전과 중 8기는 미라주 3로 거둔 것이고

나머지 9기는 미라주 5기의 이스라엘 생산 복제품이
네세르
로 거둔 전과이다. [모두 델타 날개의 전투기들이다.]


전후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무공훈장인 메달 어브 아이디얼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한국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에 해당한다.


그는 미라주 전투 비행단장과 크피르 전투 비행단장을 역임했었고
1988년 대령 계급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1997년까지 현역과 예비역으로 이스라엘 공군에 복무했고
그의 60세 나이 생일날
  미 제네랄 다이나믹 사의 F16 조종을
끝으로 조국 수호의 일선에서
은퇴를 했다.

아래는 2007년도에 방영되었던 히스토리 채널의 동영상으로서
편집한 글 앞의 것과는 달리 6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이스라엘 미라주기들이 시나이 상공에서 이집트 수호기들을
추격해서 격추시키는 장면이다.

뒤에 지오라가 글 앞에서 소개했던 수호이 7기의 후미를
잡는 장면이 있다.
 
 





아래 동영상을 더 첨부한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지오라가 조우했던 이집트의 미그 21기와의
공중전 동영상이다.[미라주 아니면 네세르 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성능이 비슷했던 미라주와 미그 21기 대결을 CG로나마 
볼 수있는 드문 기회이다.


 

중공군의 첫 대패배 - 수동 전투


1950년 10월 압록강을 은밀하게 건너와서 매복했던 중공군은

군우리와 운산등의 초전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멋모르고 무작정 북상하던 유엔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매복과

기습, 그리고 차단 전술을 유동적으로 구사하는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긴 후퇴를 해야 했다.


세계 최강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중공군은

기세를 드높이며 추격을 해서 서울까지도 재점령했다


그러나 화려한 한국전 참전 개막의 팡파레 속에서
모택동 정부가 중국인민들이 알까봐 쉬쉬하며 감춘
창피스러운 대패배의 전투가 중공군이 참전한지  
단 2주 뒤에 있었다.

서부전선의 초전에서  8군 산하 미군들과 유엔군들이 중공군의
매복
기습에 큰 타격을 입은 반면 동부 전선에서 있었던
미군과  중공군의
첫 대결에서 중공군의 한개 사단이
미 해병대에게 거덜 날 만큼의
대패를 당했었다.


철수중 콜세어기가 전방의 중공군에게 가하는 네이팜
공격을 지켜보는 해병대
--------------------------------------------

이 전투는 미 해병대가 흥남과 장진호 중간에 자리한 수동[리]

마을 남쪽 언덕에서 중공군을 격멸했던 전투로서
장진호 탈출의 혈전들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군이 중공군과의 초전에 이를 박멸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전투이다.


1 해병사단은 10월 중순, 사단이 배속되었던 미 10군단장

아몬드 중장이 먕형 했던 대로 장진호를 따라 서진하여
서쪽 평안도 쪽에서 북진하는 미 8군과 같이
합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몬드 중장 - 불같은 성미가 그의 카운터 파트너 송 시륜과
비슷하다. 한국 전쟁중 공과 과가 같이 있는 작전 지휘를
했는데 장진호 전역에서는 해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좁은 길로 몰아넣고 무턱된 진격을 독려하여
후세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 
--------------------------------------------

아몬드는 해병 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리첸버그의 7연대를

해병 1사단을 선도해서 장진호로 먼저 향하도록 지시했다.


리첸버그는 해병대의 또 다른 연대장 풀러 대령
[과달카날 전투에서
대대장을 한 사람으로 해병대의 전설이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후위연대였기 때문에 큰 전투를
하지는 않았다.]처럼
나이는 들었지만
‘나의 진정한 부하 해병은 단지 퍼플 하트

[purple heart-상이기장]를 받은 해병뿐이다’라고 하는 진짜

해병대 기질이 넘쳐흐르던 사람이었다.


10월 31일 아침 7연대는 좁고 먼지 나는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걸어 북쪽 산길로 접어들었다.


도로를 따라 물이 거의 마르고 바위투성이인 개천이 뻗어 있었다.

주변은 해발 1,000피트에서 1,500 피트의 산들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거대한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 시륜
미군이 장진호반을 따라 서진해서
평안북도에서 북진중인 미 8군과

합류하리라고 미리 내다 본
모 택동은 이 시도를 분쇄하고자

송 시륜 휘하 6 만 병력의 병력을
장진호에 투입했다.






송 시륜 - 대장정시 20대 나이로 연대장을 했다.
아몬드 중장과 같이 만용스러운 저돌성이 있었다.
-------------------------

[모택동은 이 장진호 전투에 과대 개입을 해서 6병단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결과에 한몫을 했다.

모택동은 다음해 봄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도 이 짓을
되풀이해서 전 부대가 붕괴 일보직전까지 가게
하는 큰 피해를 입게 했다.


국가 지도자가  과다하게 전투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이 점, 2600년 전의 손자가 지적했다-
히틀러나 모 택동,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은
시시콜콜한 일선 작전에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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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연대가 1사단의 앞장을 선 것과 같이 6병단의 선도를
위 우이린이
지휘하는  42군이 했었다

군 휘하에 124사, 125사,126사등이 있었다.


중공군 42군 사령 위 루이린
---------------------------

이 42군은 1950년 10월 16일 만포진 건너 중국 땅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한 쪽으로 왔다.

도하 후 부대를 정렬한 중공군들은 한국 참전 중공군이 다

그리했듯 도보로 강계를 지나 장진호 호반에 위치한 작은 동네인

유담리로 쪽으로 왔다.


유담리는 한 달 뒤 미 해병의 2개 연대가 장진호

최북단까지 전진했던 동네로서 이 일대에서 포위한 중공군과

탈출하려던 미 해병대 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어서

역사에 그 이름이 자주 나온다.

----------------------------------------------

남북으로 기다란 장진호를 왼쪽으로 보며 덕동 고개[이 고개에서

미 해병 F 중대가 치러 낸 엄청난 전투 기록은 조만간 소개한다.]

역시 나중에 유명해진 장진호의 꼬리 지역에 있는
하갈우리로
들어왔다.


하갈우리는 그 산골에서 보기 힘든 제법 넒은 개활지였다.

나중에 미 1 해병 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철수 작전을
총지휘했었다.

이곳에 급조된 야전 비행장이 철수 작전에 큰 역할을 했다.


미 해병 1 사단의 대 탈주 - 진흥리 밑의 수동리를 다시
통과해서 흥남으로 철수했다.
-----------------------------------------

하갈우리 남쪽 길로 계속 남진했던 42군 전위 부대는 10월 25일,

이 계곡을 따라 장진 호 쪽으로 북진했던 한국군 3사단

26연대[연대장 :이 치업 대령]를 기습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


피해를 입고 철수하고 있던 한국군을 추격하던 중공군은
진격해오던
미 해병 1사단 전위 7연대 병력과 조우했다.


해병 1 사단 7연대 휘장

------- -----
첫 격돌은 북한군 패잔병이 주동을 한 야습으로서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따라 장진호로 가는 초입에 들어와서

야영을 하던 해병 7연대 1대대를 기습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이 전투에서 공산군은 격퇴 되었다.

이 날 밤 획득한 포로로부터 중공군 대부대가 참전한 것을

알게 된 해병들은 극히 주의를 하며 전진했다.


수동 전투의 개전 전황
------------------------


아래는 수동 전투에 참전했던 한 미군의 기록이다.



---※-----------※-----------※-

1951년 11월 2일 날씨는 맑고 온화했다.


해병 1 사단의 전위인 해병 7연대는 도보로 장진호로 가는

수동 계곡에 들어섰다.

수동 계곡은 수동리 마을에서 함흥 쪽으로
2킬로 정도 남쪽에 있다.

그들은 남쪽으로 도주해오는 한국군들과 조우하였다.


후퇴하는 한국군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중국 놈들! 중국 놈들! 하고 말했다.

중공군이 패주하는 한국군을 추격해올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선두 중대장은 전방의 중공군이 선점하고
있을 698고지를
점령하도록 명령 받았다.

-------------------------------------------------

한국전 내내 접적할 때는 주변 고지부터 선점하는 것이

기본 전술로 되어있었다.


백 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다부 동 전투가 시작 전에도
다부동 일대
고지부터 점령했던 작전 전개를 보여준다.

-----------------------------------------------

이미 상당히 고도가 높은 이 고원에서 698고지야 별로

높아 보이지 않은 언덕 같은 곳이지만 대단히 가파른
급경사로 이루어졌다.


해병들이 고지를 공격하자 아니라 다를까 고지에 먼저와서
점령했던
중공군은 기관총을 동원해서 반격했다.

산의 급경사는 공격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해병의 공격은 하루를 다 보내고 이른 저녁까지도 계속되었다.

중대에 사상자가 급증했다.

탄약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황혼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해병이 할 것은 두 가지 방법뿐이었다.

철수하던가 교체하던가 하는 것이었다.


사상자 속출로 이미 전력이 밑바닥까지 왔던 D중대는 후방으로

철수하고 아직 싱싱한 병력인 E중대가 D중대를 교체했다.


D 중대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급경사진 산을 내려오는 것은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부대원들은 걷기보다 미끄럼 타기로 하산했다.


중대는 전원 산 아래 도로가에 도착해서 부상자와 전사자
후송을 하고
근처 과수원에 적의 기습을 대비한 호를 파고
밤을 보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야간은 아무런 상황 없이 지나갔다.


아침이 되었다 .


대대 정보 장교는 우리가 교전한 고지의 적이 북한군이 아니라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가 짐작 한 대로였다.

다음날 11월 3일 아침은 너무 빨리 왔다..


우리는 차디찬 C 레이션을 까 먹고 장비를 걸친 뒤 도로
양쪽으로
산개한 이열 종대로 북쪽을 향하여 행진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전방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7연대 1대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행진을 시작해서 50미터도 가기 전에 앞 북동쪽 산에서

기관총의 집중 사격이 쏟아져 내려왔다.


해병들은 모두 길가 도랑으로 뛰어 들어 적의 사격을 피했다.

중대장 헐 대위는 우리에게 도로의 서쪽 언덕을 넘어서
계속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적의 화력으로부터 엄폐된 도로 서쪽 언덕을 넘어서서 행진은

2킬로 정도 적의 저항 없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언덕의 반대편 사면을 내려와 다시 도로에서
진격을 계속하였다.

도로에 올라서서 행진한지 수분도 안 되어 개울 건너
정동쪽의 산에
수많은 중공군들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중대장 헐 대위는 공중 지원을 먼저 요청하고 이어 후속하는

포병대대에 화력 지원도 요청했다.

도로에 기관총이 거치되고 우리 중대는 기관총 엄호아래

개울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의 공격은 화력지원을 받아가며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저녁 땅거미가 지기 전 우리 중대는 목표를 점령했다.

중대는 밤이 되면 꼭 올 것이라고 생각한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참호를 팠다.


수동 전투 한달 뒤 고토리에서 수동쪽으로 철수하는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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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 들어앉은 우리는 달빛 아래에 공습을 받아 네이팜에

시커멓게 타서 여기저기 널 부러진 적의 시체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중대가 공격을 개시할 때 중공군들이 들어앉아서 저항하던
참호에는
검게 탄 중공군의 시체가 그득했다.


다음날 11월 4일 새벽 중공군의 치열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대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그들은 해병의 주저항선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

중대장 헐 대위는 산꼭대기로 잠시 후퇴하였다.

해병들이 정신없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휘둘러서 그들을 물리쳤다.

한 기관총 사수는 철수 명령을 듣지도 못해 기관총을 휘두르며

쇄도하는 중공군을 수없이 쓰러뜨렸다.


그러나 기관총이 잠시 작동불량이 되자 한 중공군이 기어 올라와

기관총 양각대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안 빼앗기려고 해병은 기관총 손잡이를
잡아 다녔고
중공군은 양각대 다리를 잡아 다녔다.


이 줄다리기 같은 쟁탈전은 기관총 사수가 허리의 권총을

빼서 중공군을 쏴 죽이자 끝장이 났다.

중공군 동료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자 그는 고장 난 기관총을
버리고
부대가 피신한 산꼭대기로 줄달음쳐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3일 밤의 야간 전투와 다음 4일 주간 전투에서 우리 7연대는

중공군 124사단의 적병 696명을 사살했다.


나중에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124사 소속
중공군만 3,000명이 넘었다.

승리한 7연대 3대대는 1대대와 2대대를 추월하여 장진호
방향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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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지역의 전투는 3일 더 계속되어 11월 7일 상황이 끝났다.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리첸버그의 연대는 적 124사단을

완전히 궤멸 시켰다.


이 전투로 대 타격을 입은 적 124사단은 다시는 한국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동에서 전사한 중공군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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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첸버그는“나의 진정한 부하 해병은 단지 퍼를 하트
[purple heart-상이 기장]를
받은 해병뿐이다.”라고 말하던
진짜 해병대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공군의 참전을 알고 첫 대결에서 적에게 최대의
패배를
안겨 주자고 결심했었다.


과연 그의 계획대로 첫 대결에서 중공군은 문자 그대로

궤멸되어서 편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어 후방으로 철수하고

이 사단은 한 반도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다.


미 해병과의 첫 대결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한 6병단장
송 시륜은
치를 떨었다.


성질 과격한 성질의 그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미 해병을

서전에서 박살 낼 야심에 넘쳤었는데 그만 대패를 해서 스타일을
형편없이
구기게 되었다.


이 굴욕감에 부채질 한 것은 서부 전선에서 싸웠던 그의 동료들이

미 8군과 한국군에 연타를 안겨주는 승전고 소리였다.


뒤에서 자꾸 엉뚱한 부채질을 해서 전황을 엉망으로 만든

모택동과 함께 그는 수동 전투 후 장진호 지역에 들어온
1해병사단을 몇 겹으로
포위해서 섬멸시키려는 야심에 불탔었다.


그래서 그는 뼈까지 얼어붙은 날씨에 휘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부쳤음에도 미 해병대를 섬멸하기는커녕 되려 해병대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고 동장군이라는 제 3의 적에게도 엄습당해
살아남은
부하들 조차 거의 동상 환자로 만들어 놓았다.


해병들이 결사의 의지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뒤에
송 시륜은
대다수가 죽고 병신이 된 이 부대를 더 이상 전선에
내 몰 수가 없어서
함흥 평야에 주둔하면서 그해 오월 춘계
공세 때 까지 치료와 재정비에만
몰두해야 했다..


모 택동의 참견에 송 시륜의 앙심 섞인 명예 회복심이 9병단을

초상집과 환자 집단으로 만든 것이다.


리첸버그의 7 연대는 최 전방의 유담리까지 진격했다가
포위되었으나
무사히 탈출해서 다른 1사단의 부대들과 함께
길고 긴 후퇴를 감행,
 드디어 12월 14일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하고 흥남으로
철수했다.





 

이 범석 장군의 생녹용[生角]체험
 -생녹용 먹고 일 주일간 장님 되었던 기록
 


나는 이 블로그에서 동양의 삼보(三寶)인 인삼과

녹용과 해구신[海狗腎]들 중에 인삼과 해구신 두 보약의 신기한

약효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바있다.

녹용의 약효만 소개만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고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철기 이 범석 장군은 아직 20대일 때 일제의 추격을 피해서

북만주 할라수 인근에 피신해서 몇 년간 사냥으로

호구를 이어가며 은신한 일이 있었다.


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철기 이범석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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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흥안령 남쪽과 내몽골에서 했던 사냥 체험은 1969년
주간 조선에 ‘원야[原野]의 낭만[浪漫]‘이라는 제목으로
인기리에 연재되었다가
그 분의 작고 전 출간했던 우둥불이라는
자서전에 재 수록되었었다.


지도 중앙 왼쪽에 사냥하던 흥안령 남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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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겨울 엄동설한에 이 재하, 강 병도라고 하는 그 지방

동포 사냥꾼들과 함께 몽골 영토에 몰래 잡입해서 했던
동 아시아판
사파리 이야기는 한국 아웃도어 스토리중의
백미(白眉)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녹용 자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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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이 사냥동료인 이 재하 씨와 먼 흥안령까지 가서 했던

녹용 사슴 -생각(生角사냥-에서 경험했던 녹용의 놀라운
효과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 전재(轉載) 한다.


그가 사냥했던 흥안령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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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용이 제철이라면 음력 6월 중순 말에서 하순까지로 본다.

이때에는 사슴의 연령에 따라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여덟 가지

까지 될 것이다.


이것은 녹용의 철이 저물음에 따라 패기 때문이다.[팬다는
것은 먼저
벌어진 뿔끝이 마르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그때까지는 좀 이르긴 했으나 만주 각지에서 사냥꾼 수백이 와서

북적대면 사슴이 멀리 달아난다.

우리는 많은 사냥꾼들이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서 사슴을
잡기로 했다.


이 재하 씨는 덫으로 잡는 수달 사냥에 집중했는데 그는

근처의 개천에 수달들이 별로 없다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말사슴 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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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어느 날 나는 새벽에 사냥을 떠났다. 단 숨에 40여리를

달렸는데 맑고 상쾌한 아침 바람결 따라 향기가 코로 스쳤다.

영난화(鈴蘭花)초원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고 바람을 거슬러
길을 재촉했다.


꽃사슴 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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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짙은 향기 때문에 나는 녹용 사냥이라는 일마저
잠깐 잊었을
정도였다.

이윽고 높은 산등에 올라 바라보니 너머 쪽 산비탈은
마치 눈에
덮인 듯 했다.

그것이 바로 영난화의 초원임을 나는 망원경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이범석 장군은  장거리 사냥에 혹한에 잘 버티도록 특수 훈련된
'왓샤'라는 몽골말을  사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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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숨에 말을 몰아 어느덧 영난화 밭에 들어섰다.

아름답고 깨끗한, 이곳이야 말로 선경(仙境) 그것이었다.

[영난화는 영난 꽃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가요 홍콩 아가씨에도

등장한다.우리 말은 은방울꽃이다.]


수니아 님이 대단한 접사실력으로 찍은 은방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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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후좌우가 하얀 영난화 밭 가운데 선채로 영난화에
관한 전설,
전에 읽었던 책등을 연상하며 한 동안 황홀감에 취했다.

그러면서 종이에 담배를 말아 불을 붙여 물 때였다.


무엇이 내 안경에 비친 듯 그림자가 얼씬 한 것

같았다.

나는 곧 망원경으로 사방을 살폈다.


이 장군이 쫓았던 말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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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멀리 넓게 뻗혀나간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등덜미가 검은
사슴이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심호흡이라도 하듯 서 있는게
보였다.

이것을 두고 사슴이 소풍을 한다는 것인데 아침에 날이 청명하면
흔히
사슴들이 나온다.


나는 참으로 뜻하지 않았던 곳엣 사슴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을 달래고 말을 산 뒤로 돌아 가만가만 다가갔다.

바위가 뻗쳐 나간 언덕아래에다 말을 매놓고 나는 바위를
안고 돌아
사슴 뒤쪽으로 갔다.

그래도 사슴은 못 알아차린 것 같았다.


1백 50미터 가량 떨어진 곳까지 다가간 나는 모젤 총을 바위에
잘 의탁하고
사슴의 심장부에 한방 놓았다.


총소리와 함께 사슴은 펄쩍 뛰면서 아래 절벽으로 떨어졌다.

뿔이 절단 났는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면서 나는 40분간
가량 걸려
절벽 아래로 갔다. 사슴은 가슴이 쪼개지고
오장은 거의 터져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비참하기
이를데없었다.


말 사슴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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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머리는 바위에 부딪쳐 뿔은 두 가지에서 세 가지가
나려는
것이었는데 한 쪽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매화록[꽃사슴]- 녹용은 말사슴 녹용 보다 더 비싸게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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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것은 무사했으므로 얼핏 완전한 녹용의 반값을
받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실은 한쪽 것만으로는 10분지 1 밖에
값이 나가지 않은 것이다.


바위에 부딪쳐 여기저기 흩어진 새빨간 핏덩어리 뿔 조각을
그대로
버려두긴 아까웠다.


이 때의 뿔은 말랑말랑해서 고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밤톨만한 것 세 덩어리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성한 것과 상한 것을 아울러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텐트 속에서 저녁을 해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흥안령 - 산세가 순한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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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가 하루를 지나고 나니까 눈이 몹시 아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더욱 고통이 더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계곡을 흐르는 찬 물에 눈을 씻어도 소용이 없었다.

고통의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는데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눈두덩이
부어오르기 까지 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유격전의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내 주변의

일상품은 늘 잘 정돈해두고 있었다.


이때도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손을 뻗치면 닿을 곳에 물건들을

잘 정돈한 다음 하나하나의 위치를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눈이 완전히 안 보이고 또 지독히 아팠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 찬 물가에 가서 눈을 씻는 걸로 날을

보낸 것이 6-7일 동안은 완전한 실명 상태였다.

영원히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초조 속에서

나는 자연히 나아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일주일 정도 지나자 차츰 원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의 사냥 동료인 이 재하씨가 수달3짝을 잡아가지고 돌아왔고

다후리 족[만주의 소수민족]도 널널이 차로[사람이 끄는
작은 수레]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의 일시적인 실명을 전해들은 이씨는 녹용이란 약성이
그토록 강한
것임을 강조했다.

내 눈 앓이도 내가 생 녹용을 먹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삼스레 녹용의 강한 약성을 느끼긴 했지만 덕분에
그 뒤
3-4년 동안은 엄동에도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흑룡강성 일대에서 항일군을 이끌고 2년 동안을

격전하는 가운데서 엄동의 추위에 이 길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생 녹용 때문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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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효과에 대한 글은 '백년 묵은 산삼은 없다'

해구신의 효과에 대한 글은 '1857,독도의 호박, '


위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