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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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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명성황후 표범 카페트의 행방은?


오늘은 중요한 호소성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지난 3월 명성황후의 집무실에 깔려있던 표범 50마리

가죽[정확히 48마리]으로 만든 양탄자가 한국 전쟁 중에
도난당해서
서울 인사 동 골동품 점포에 팔렸다가 이를 발견한
한 미군 병사가 구매해서
미국으로 보내졌다는 사연을 소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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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부탁이 있다.

전번 글에서도 글의 주제와 달리 다소 엉뚱하게도

명성 황후의 비난한 댓글들이 많았다.


그 분이 국정 운영에 판단을 잘못한 것도 있었고 외척도

지나치게 중용한 것도 맞으나 조선 판 달기나 포사로 몰고

간 일본의 농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명성황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시는 독자분들에게 부탁드린다.
이 글에서만은 무도한 왜적의 만행으로 비운에 간 그 분 대신
아래 인간을 잘 주목해주시기를 바란다.


비운에 가고도 험담을 받는 명성황후 대신 한민족 만고의

지탄을 받아야 할 인간이다.


타국에 공사로 와서 주재국의 황후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 공사 미우라 고오로[三浦 梧樓]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를 한 조우슈 출신으로서 장군까지 되었으나

다른 주도 파벌인 사쓰마 번과 갈등 끝에 퇴역하고 조선에

공사로 왔었다.


평소 불교에 심취해서 공사 업무보다 참선이나 경문 베끼기등에
몰두하고
승복을 입기를 좋아 했으나 불교가 가르치는 불살의
계율을 거스르고
상상도 못할 타국 황후 암실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자와 암살에 동원된 낭인들은 전부 일본에 소환 되었지만

물론 형식적인 재판만 받고 다 석방되었다.

세계 근대사에 외교관이 주재국의 왕비를 직접 암살 한
야만스럽고 야비한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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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용했던 라이프 지 기사와 사진이 표범 카페트에

대한 전체 기사가 소개된 것이 아니라 일부만 소개했던지라

내용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마침 보니 이 지난 1951년도 8월의 과월 호를

판매 한다는 안내가 있어서 이 책을 구입해서 전문(全文)을

다 본 뒤에 다시 글을 올리려고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역시 구제 불능의 내 게으름과 삶의 힘든 무게가
심적(心的)여유를
허락지 않았다는 변명밖에 할말이 없다.


그러나 몇 주 전 최 재웅씨라는 독자 분에게서
메일이 날아왔다.


구글을 통해서 보면 라이프 지의 그 표범 관련 화제 기사를

전부 볼 수가 있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관련기사의 URL까지

동봉해 주셨다. .


정말 그 것을 따라가 보니 표범 카페트에 관한 라이프 지의

전문 기사가 있었다. [그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반가웠던 것은 중요한 핵심인 표범 가죽 48마리로 만든
카페트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시 표범 등가죽만으로 만들었다는 설명대로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표범이 한반도에 시글시글하고 가축과 인명을 해치는 해수였던
시절, 잡은 표범의 등가죽을 모아서 만든 표범 양탄자.
이런 귀중한 모피 보물은 현대의 세계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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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카페트는 명성 황후 접견실을 다 덮은 것이 아니라

마치 영화제 시상식의 레드 카펫처럼 접견실 중앙에 길게

깔려있던 것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예를 보면 이 표범 카페트 위는
명성 황후 혼자만이
밟을 수 있는 지엄한 것이었으리라.


이 표범 카페트가 어떻게 미국으로 흘러 나갔는지 라이프 지의

전문을 옮겨와 보자


기사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미국 콜로라도의
푸에블로에
거주하는 식품 도매상 휴 길트너 집안에서 시작한다.


표범 카페트를 아들로 부터 선물받은 길트너 부부.
한국산 옻칠 장식장을 손에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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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트너 씨는 아마추어 골동품 수집가라서 집에 작은
갤러리를 꾸미고
비록 값비싼 물건을 아닐지라도 이집트의
피라미드 돌에게부터
콜로라도의 오래 된 성냥 곽들도
잡다한 것들을 수집해놓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올린다. 라이프지 그림 설명은 고 미술품을 사러
온 미군이라고 하지만 모두 위압적인 태도에 권총으로 
무장하고 장교[대위]가 인솔 한 것을 보면 쇼핑 하러온
미군들이 아니라 미군 CID대원들이다.
앉아서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고 있는 사람은 한국 경찰
외사과 직원 아니면 통역인듯.
.---------------------------------------------


그의 아들 27세의 에브른 중사는 한국에 파병 되어 있었다.

부모들의 골통품 취미를 아는 아들은 옻칠한 한국의 장식장을
사서
보내주거나 때로는 미군 맥주 깡통을 오려서 만든 램프를

보내 주기도 했다.


다시 올린다.그림이 도난 당했다는 명성황후의
접견실 외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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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아들은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주 괜찮은 한국 표범 가죽 카페트를 샀어요.
  보내 드리겠어요.”

그리고 1951년 6월16일, 길트너 집안에 군용 더플 백에 담긴
묵직한
물건이 국제 배송되어 왔다.

39.20불의 항공 배송료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표범 카페트를 사서 집에 보내준 길트너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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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에서 나온 것은 폭 8피트 길이 18.5피트의 기다란

표범 카페트였다.[가로 2.5미터 길이5.6미터]

사실 너무 길어서 길트너 집의 응접실에 깔 수도 없었다.


두 부부는 집안에서 보관할 곳 역시 마땅치 않아 일단

조셉 시몬스 모피 판매상에게 보관을 의뢰 했다.

모피상 시몬스는 이 한국에서 건너온 진귀한 보물을
언론에 공개했다.

[길트너가 팔아 달라고 위탁한듯하다.]


그러자 한국 뉴욕 총영사관에서 신속하게  반환을 요청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표범 모피는 경복궁 명성 황후 궁실에서 도난당한
국가 보물로서
값을 먹일 수가 없을 만큼 진귀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길트너 중사는 자신은 이 보물을 그 지난 4월 서울 길거리

리어카 행상에게서 십오만 환에 구입했다고 말했다.

그때 한국의 시장 환율로 바꾸면 25불 정도이다.

사실이라면 국가적 보물이 항공 운송료보다도 헐값에 팔린

이야기가 된다.


그는 그 뒤 그의 부대를 따라 여기 저기 전전하면서

이 부담스럽게 큰 표범 카페트를 가지고 다니다가 집으로 보냈었다.


길트너 씨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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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표범 카페트를 소유한 길트너 부부에게는
미국 법으로도
도둑질한 장물을 구입한 장물 취득 혐의가 적용된다.

그리고 길트너 중사는 이 표범 카페트를 집에 보낼 때
‘선물’이라고
세관에 신고했는데 이것 역시 허위 신고에
해당한다.

미 세관은 이 진귀한 표범 카페트를 압수했다.
세관 당국의 말에 의하면 이 표범 카페트는 수천 달라의
고가에 판매 될수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라이프 지는 이 표범 카페트가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기전

도난당한 것으로 추측했다.

더불어서 상황으로 보아 곧 한국의 명성황후 궁궐로 되돌려

질 것이라고 예견하는 말로 끝맺었다.


미국 언론이 크게 보도한 명성 황후 표범 카페트는

주한 미군에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다시 올린다. 명성황후 접견실. 다 도둑 맞고 아무 것도 없다.
뒤의 그림이 온전한 것이 다행이다.
----------------------------------------------

길트너 중사는 미 범죄 수사대[CID]의 조사에서 이 보물을

리어카 행상이 아니라 고미술품 상에서 샀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고미술품 점포에 CID대원이 파견되어

한국 경찰과 함께 조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 기자 팀과 CID 대원과 한국 경찰이 이 점포를 덮쳤을 때

주인은 세상 모르고 여전히 대궐에서 훔쳐 나온 값진 장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위의 사실로 명성황후의 접견실에서 사라진 표범가죽이 어떻게

미국까지 흘러갔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지난 2003년 미군이 바그다드에 진공했을 때
바그다드 시민들이
박물관에서 세계적인 유물들을
마구 약탈하는 것을 보았었다.


나는 이 한심한 작태를 보고 아는 외국인에게 자랑하듯이 말했었다.

“우리 한민족은 말이지요, 아무리 국난의 위기에 처했어도 저런

  뻔뻔한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 민족이 기본적 양심은 있는 민족이라고 믿어왔었다.

외국의 경우 폭동에 가까운 시위만 있어도 의례히 주변 상점들을

약탈하는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예로서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흑인들이

하필 코리아 타운에 밀려 들어와 상점들을 털고 방화까지
했던 일이
상기되실 것이다.


5.18광주 항쟁 때도 공권력이 실종했는데도 대규모 약탈이나

강절도가 없었고 일반 광주 시민들은 적어도 치안 면에서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몽진했을 때 한 맺힌 노비들이
 주동이 되어서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은 예외라고 치자.]


나는 6.25의 참변 중에도 바그다드 같은 대규모 약탈상태는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나 자신이 사돈 남말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무색하게 되었다.


훔친 절도는 물론이지만 이런 국가 보물격의 문화재를
외국인에게
팔아넘긴 인간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하여튼 도난당한 경위를 고마우신 독자분의 협조로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또 다른 독자분 들의 답 글로 이 표범 카페트가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에 반환 된 사실도 발견했다.

아이디 mikejunhyuk님,jamie3317b님,plains001님등이
이 반환 사실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모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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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Leopard skin Rug - Guiltner,Pueblo,Colorado- Returned to Korean Embassy, August 1951- February 1952 47frames Major Topic: Return of Leopard Skin Rug to South Korean Emba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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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트너 씨 부부가 아무리 욕심이 나도 입법 국가인 미국에서
장물로
들통 난 물건을 그냥 자기 소유로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 대사관에 돌려 주었다면 표범 카페트는 응당 국내로
돌아와 국가 보물로서 잘 관리 보존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귀중한 국가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이런 방면에 관심이 있다는
나 자신 살아 오면서 단 한번도
들어보지를 못했으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라이프 지에서 기사 전문를 읽고 사건의 전모를 안 이상

이 표범 카페트의 행방을 직접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나는 먼저 대전에 있는 문화재청 궁능[宮陵] 문화재과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 방면의 자료가 없으니 경복궁의
고궁 박물관에
연락해보라는 말이었다.


경복궁 안에 고궁 박물관이 있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생각해보니 명성황후의 표범 카페트가 경복궁에서 도난당했으니

그 곳으로 반환되는 것이 당연할듯했다.


그래서 큰 기대를 가지고 경복궁내에 있는 고궁 박물관에
전화를 했다.

그 곳의 연구 담당분과 연락이 닿았는데 자신도 처음 듣는
소리라며
한번 알아 볼 테이니 며칠 후 연락을 달라고 했다.

며칠 뒤에 연락을 했더니 맥 빠지게도 아무런 관련 정보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표범 카페트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없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국에서 반환된 표범 카페트가 반드시 거쳐서 들어왔을

외교 통상부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그 곳의 상담원은 뉴욕 영사관에 알아보라고 말했다.


본부가 이 지경이니 그곳 일선 외교 부서에서도 신통한 대답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라이프지에 민비[ 閔妃 -Queen Min]라고 소개된 명성황후 초상화.
담당자가 잘못 판단하고 관음보살 상을 게재했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아직 확실하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
-------------------------------------------

할 수없이 궁리를 하다가 당시 신문을 보면 무슨 단서나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국회 도서관을 찾아가 조선일보 아카이브에서

1951년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검색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의 동아일보 마이크로 필름 기사도 찾아보았으나

관련 기사 발견에 실패했다.


내 생각에 라이프 같이 세계적인 잡지에서 이렇게 큰 기사가
다룬
표범 카페트가 국내에 돌아왔다면 국내 언론에 분명히
보도 되었을 것이다.


좀더 집중적인 노력을 해보면 싶었지만 시간이 없던 것이
유감이었다.


문제는 응당 반환된 표범 카페트를 잘 관리 보관하고
있어야 할 경복궁의
관련 부서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분명 미국의 기록에 따르면 대사관에 반환이 된 것은 확실한데

이 뒤부터의 기록도 없고 이 표범 카페트의 흔적도 묘연하니

가능한대로 상상해보면 국내에 돌아와서  다시 도난당했거나

또는 우리 일반인이 모르는 사이 훼손되어서
몰래 폐기 했거나 일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 사이 장구한 세월동안 정권이 바뀌는
변혁의 시기를
틈타서 이 표범 카페트를 관리하던 당국의
양심 불량한 인간이 착복해서
사리[私利]를 채웠을 가능성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은 낮으나 이 표범 카페트의 진가를 모르는
관계자들에 의해서
어느 창고 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러기를 고대한다.]


이 진귀한 보물의 행방을 추적하던 나는 고민 끝에 나와
조금은
안면이 있었던 모 방송국 PD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담당한 프로에서 충분한 방영꺼리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해서 여론이 일어난다면 표범 카페트 행방의 수색이

본격적으로 되리라는 기대감도 있어서였다.


그랬더니 내가 아는 PD는 다른 부서로 가서 통화조차 되지 않았다.

대신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여성은 그런 것은 자기들 프로에

맞지 않는다는 무성의한 대답을 했다.


과거 한반도에 표범은 무척 많았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대한 제국이 한국관을 열고 
전시한 무관의 표범 복장[현대의 전투복]
------------------------------------------------
일반 서민인 나는 명성황후 표범 카페트의 행방은 찾는데
능력의 한계를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작년 3월, 내가 중국에 가서 만났던 전 북한군 출신
동포 할아버지의
수첩에 고별사를 남긴 국군 포로병
김 병덕씨의 신원을 찾다가 당국 책임자의
무성의한 태도에
아무 성과를 보지 못했던 사연을 하소연 삼아 포스팅
 일이 있었다. CLICK!


덕분에 이 글을 본 관계 부서에서 일하는 조 소영이라는
사무관이
나서서 크게 도와 주어 이 비운의 국군 포로의
신원과 그 아들을 찾아내는 성과를
올린바 있다.

[한심한 아들이 통화를 거절해서 더 이상 수색을 중단했지만.]


이 글도 비슷한 희망감으로 포스팅한다.

막연하나마 어느 고마운 분이 이 국보급 표범 카페트의
행방을
찾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기본 비련대 2009.11.22  15:50

작가의 끈기는 알아 주어야겠습니다. 찾을때 까지 전진해야지요...잘 봤습니다.

답글쓰기
기본 hahehiheho 2009.11.22  15:57

국보가 어서 회수되어 국보로서 우리 국가의 문화제로 보호받길 염원합니다.

답글쓰기
기본 **** 2009.11.22  16:13

[귓속말 입니다.]

기본 갈대의영혼 2009.11.22  23:17

울프독님의 당부 말씀 때문에 민왕비에 대한 비난은 자제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마디만 하자면 TV에서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에술입니다" 라고 광고 한 때문에 어리석은 국민들이 침대는 정말 가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처럼 TV드라마와 오페라 등에서 명성황후란 인물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 돈벌이 수단으로 미회시킨 때문에 명성황후를 영웅으로 착각하는 국민들이 대다수 인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나 구한말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명성황후 민왕비에 대하여 절대로 칭찬을 하지 않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만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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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2  23:17

갈대의 영혼님. 뒤돌아 살펴 보니 본의 아니게 님의 댓글을 비방 한것이 되었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답글쓰기
기본 갈대의영혼 2009.11.22  23:35

존경하는 울프독님 저는 전혀 비방으로 색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댓글이 울프독님의 본문에 누르 끼치는 점은 없었는지 생가해 보는 중입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를.....

기본 갈대의영혼 2009.11.22  23:30

미우라 공사가 승복을 입고있는 사진을 보니 코웃음이 나옵니다.
저 정도로 승복을 입은 걸 보니 그의 불교 숭배는 위선이 아니라 마음에서 진정 우러나는 행위 임을 알겠습니다.
원래 아시아의 불교국가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불교국가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대상국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하고 이어서 공산회 되는 과정을 겪었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일본만 제국주의의 반열에 냉큼 올라가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미우라 같은 인간처럼 마음으로는 불교를 숭배하면서 행동으로는 남의 나라 침략에 앞장서는 이중적 랭태를 보이는군요.
임진왜란 시기에 풍신수길의 6촌 동생인 가토 기요마사도 불교신자임을 표방하면서 깃발에 불경 문구를 써서 휘날리면서 조선을 짓밟고 지나 갔답니다. 경주 불국사를 태운 것도 그 놈의 짓이구요.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 보다 더 난폭한 인간이 불교를 표방한 그 놈이었다는 데서 이중적인 일본인의 이해 할 수 없는 심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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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피박 2009.11.22  23:35

어디 이 카페트 뿐 이겠습니까?
미국 스미소니안 박물관 지하 수장고엔 우리의 귀중한 유물 4천여 점이 아직도 세상 구경을 못하고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네요.
우리가 무지 했고 힘들었던 시절 우리의 곁을 떠나야 했던 너무도 아쉬운 우리의 것들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점을 악용해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뺏어 간 미국인들도 각성 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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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고락산성 2009.11.23  08:17

이런 내용을 추적해서 올리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활기찬 일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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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yadda 2009.11.23  09:54

이런 곳에서까지 민비를 옹호하려는 듯한 글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민비와 고종이야말로 한민족을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한 극악무도(하거나 무능)한 위인들인데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 기술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발 좀 이런 블로그에서라도 민비의 추악한 실상을 제대로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비참하게 죽었다고 생전의 죄가 모두 씻겨지는 걸까요?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 역시 민비처럼 성군이자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남아야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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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3  10:35

yadda님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명성황후보다 타국의 왕비를 함부로 살해했던
미우라의 가증스러운 범죄를 잘 새겨두자는 취지의말이었습니다.

기본 갈대의영혼 2009.11.23  12:51

내가 보기에 본문의 주된 내용은 일본인 침략자에 대한 평가를 독자들로부터 유도하고, 잃어버린 문화재에 대한 애정의 표현 이외에는 명셩황후에 대한 것은 객관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민비를 옹호- 같은 표현은 부적절 한 것 같습니다. 본문을 다시 잘 읽어보시지요. 어느 쪽으로 치우친 글은 아닙니다.
그리고 고종은 무능의 극치를 가진 왕이었지만 악하고 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선량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하면 적당 할 것입니다.

기본 울프독 2009.11.23  13:34

갈대의 영혼님 정확히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이 망실된 표범 카페트에
국민적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명성황후 나쁜x
이라는 댓글이 주를 이루니 겁이 안 날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근대사를 수십번이나 읽었는데 왜 조선 황실의 허다한
문제점을 몰랐겠습니까---
단지 일국의 황후임에도 왜적의 흉도에 비명에 간 그 분에게는 인간적인
동정은 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기본 황태 2009.11.23  12:58

흠... 결론을 보니 그 표범가죽 양탄자가 우리한테 반환은 되었는데 지금의 소재는 확인할수없다는 거네요.
이거 완전히 앞으로 나올 김진명의 인기소설을 몇년 앞당겨 읽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ㅎ.ㅎㅎ
잘 보고 갑니다. 후속편 얼릉 기대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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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the patriot 2009.11.23  17:19

꼭 좀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전대 임금들이 신하에게 밀려 세도정치에 나라가 거덜나고 엉겹결에 마지막 왕이 된 고종이 뭔 힘이 있습니까? 그런 한심한 남편과 뒤늦게 권력의 맛을 안 시아버지 사이에서 몸부림 칠수 밖에 없던 민비를 제대로 평가하는 사학자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일본에서 타국의 왕비시해에 대한 합리화로 민비를 나쁜여자로 몰았고 이를 따르는 식민사학자들이 민비를 부정적으로 보고 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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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dk3246 2009.11.24  15:05

표범 카페트의 행방은 울프독님이 가장 생각하기 싫어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한국 대사관에 왔는데, 그 다음부터 없어졌다.. 뻔한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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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simwonch 2009.11.25  01:06

미우라 저 지독한 놈, 중의 탈을 쓴 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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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최후로 격추된 공산기


3년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발효 되면서 끝장이 났다.


F86F 세이버 전투기
-----------------------

그러나 휴전의 발효는 그날 밤 12시부터 였다.

전선의 이곳저곳에서는 마지막 화력을 퍼붓는 포격전들이 있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 뒤인 1950년 6월27일 한국 전쟁의

최초로 북한기가 김포 공항 상공에서 격추 되었는데 한국 전쟁의

마지막 공산기가 전쟁의 마지막 날인 1953년 7월 27일
격추 되었다.


이날도 미 공군의 F 86부대는  출격을 했다.

아래는 한국 전쟁의 에이스 랄프 파 대위가 한국전쟁

최후의 공산 기를 격추한 글이다.

파 대위는 이미 적기를 9기나 격추한 에이스였다.


한국 전쟁중 적기를 10기 격추로
더블 에이스가 된 랄프 파 대위
19기중 8기는 단 나흘동안에 격추한 것이다.
대령 때의 사진이다.
--------------------

그날 우리는 압록강 공역에 사진 정찰 비행을 나가는 정찰기를

호위 비행 출격을 했다.


본부는 우리에게 북한이 휴전에 임박하여 중국 만주에 기지를 둔

미그기들을 얼마나  많이 북한 영내의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는지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니 이의 정밀 사진을 찍어 오라고 명령했다.


휴전협정이 자정을 기해서 발효되는데 휴전 협정에 의하면

어떠한 외부의 추가 무기도 양측 영내에 반입되지 않게 되었다.


협정에 의하면 남북 양측은  휴전 협정 전에 양측 영내에 있는

무기만 보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이 협정은 곧 문자 그대로 사문화(死文化)되었다.

협정이 정말 그대로 준수되었다면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은

지금도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하고 있어야 했다.

왜 이런 실현 가능성이 없는 협정내용이 생겼는지 의문이다.

------------------------------------------------

정찰기는 짙은 구름 때문에 기대했던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기수를 남으로 돌리고 귀환 길에 올랐다.

우리의 기지는 김포 비행장이었다.


우리가 북한의 작은 도시 남시[南市 ]남쪽 방항 저공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은빛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의 고도는 30,000피트였으나 그 은빛은 10,000피트

저공에서 날고 있었다.


나는 나의 윙맨[편대원]과 함께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급강하 하였다.


미확인 물체는 소련제 일류신IL 12 수송기였다.

은빛의 기체와 날개에 붉은 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격추 당한 소련제 IL 12 수송기 --미국 C47기를 복제 생산한    
Li 2기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수송기였다.
----------------------------------------------------

전에 만나 보지 못했던 기종이었다.

나는 우리가 현재 정말 북한 상공 어디에 있는지를 재삼 확인했다.

휴전 발효일인 이날 나는 정말 우리가 중국 상공에 있지
않기를
바랬다. 


우리는 거듭해서 분명히 압록강의 한참 남쪽에 위치했슴을 확인하였다.


나는 확실히 위치를 확인한 뒤 나의 윙맨[편대원]에게 이 적기를

격추 시키겠다고 알려주고 기수를 돌려 적기의 후방 사격 위치로
이동했다.

미그기에 비하면 이 덩치 큰 수송기는 쉬운 표적이었다.


나는 놓칠 수 없는 이 큰 수송기에게  기총탄의 긴 화력을  발사했다.

적기에 화염이 일고 한쪽으로 기운채 그대로 아래 산악지대로

추락해 버렸다.


나는 그 일류신 수송기가 그간 연합국 전투기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그 남시 쪽의 북한 비행장에 자주 왕래했다고 추측했다.

우리에게 걸려든 그날 그는 억세게 재수가 없었다고 하겠다.


휴전후 북한 공군 노 금석 대위가 김포 기지로 몰고온 미그 15기
----------------------------------------

기지로 돌아 온 뒤인 그날 자정에 휴전이 발효되었고
그 일류신 수송기에
대해서 격추한 적기중의 한기라는 생각 외에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는 실상도 있다.


그들이 소련 수송기와 조우한 것은 중강진 부근이고

이 소련의 군 수송기는 여객을 싣고 중국 여순 쯤에서 이륙하여

한반도 북부를 잘못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톡으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재수없게도 한반도 전투 공역으로 들어와 버려서 변을 당한 것이다.

파 대위는 이 수송기를 여러 번 스쳐 가면서 확인을 했다는 것이다.

수송기는 피격당하고 겨우 기수를 돌려 만주 땅으로 들어가 추락했다.

소련 측이 노발대발할 이유가 있었단 것이다.


랄프 파 대위의 건 카메라에 찍힌 마지막 격추 공산기,
소련 공군의 IL 12 수송기
----------------------------------------

그러나 나는 휴전 후 곧 일본의 극동 공군 사령부의 호출을 받았다.

조사관은 어이없게도 압록강 북쪽 중국 만주 땅 100키로나
침입해서
수송기를 격추시킨 사건에 대해서 캐고 또 캐서 물었다.


모두 공산측이 주장하는 생트집이었다.

소련은 이 사건을 계속 물고 늘어졌다.


소련은 이 사건은 네델란드 헤이그의 국제 재판소에 제소했다.

미 공군은 국제 문제로 비화된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는 물론 그날 출격을 했던 모든 편대원이 모두 일본

미 극동 공군 사령부로 호출 당했다.

내 애기(愛機)의 건 카메라에 찍힌 필림은 수십 번이나

되풀이 돌려 보며 세밀히 검사되었다.


조사가 깊어지면서 되풀이 하며 묻는 말은 아래와 같았다.


“격추한 정확한 지점은? 격추기의 기종(機種)은? 식별 표시는 ? ”

그리고 그런 답답한 질문들에 우리의 답변들을 끝나고 나면 항상

“확실 해?”로 끝났다.


모든 조사와 증거가 꼼꼼히 조사 된 뒤에 미 공군은 내가 진술한 것이

다 진실이고 기종도 말한바와 같고 그 격추는  하등

교전 상태에 국제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 결론에 근거해 미 공군은 소련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제 재판소의 재판일이 가까워오자 세계 언론에서는 난리가 났다.

서방측 언론은 나의 주장을 맞는다고 옹호했고 공산측 언론은

나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하며 설전을 벌였다.


엄청난 큰 국제 사건이 될 뻔 한 이 사건은 결국 맥 빠지는

결론으로 끝났다.


미국 측이 국제 재판소에 제출했던 모든 확실한 증거에

반박할 자신이 없어져 버린 소련 당국이 소(訴)를 취하 해버렸기
때문이다.


적 수송기 한 대가 커다란 국제 사건으로 비화 할 뻔한 일화였다.

내가 격추했던 소련 수송기는 3년간 미 해 공 군과 유엔

동맹국들이 격추했던 각종 적기 976기의 마지막인 976번째의

적기가 되었다.



F 86 전투기
-------------------------


양쪽에서 제트기가 등장한 최초의 전쟁이었으면서도

최초에 격추된 공산측 전투기도 프로펠러 전투기였고

최후로 격추된 공산측 전투기도 프로펠러 항공기였다.


또 특징을 들라면 첫 격추를 기록한 미군기가 쌍발기라면

마지막으로 격추된 공산측기가 쌍발기라는 점이다.


IL12 수송기에 다시 개량이 이루어져 IL 14 수송기가 탄생하였다.

몇년 뒤 이스라엘의 야간 전투기가 아랍 IL 14 수송기를 지중해에서
격추
한 작전이 있었다.    
-> CLICK!

기본 jejado 2009.11.20  03:08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곳에 올때마다 많은것을 배우고 가네요. 이젠 우리주변에 다시 '반공'을 해야할것 같습니다. 다시금 '반공'의 중요성을 가르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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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촘스키 2009.11.22  01:01

반공--> 진보인사까지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여서 감방, 또는 사형시키기
이러니 EU와 같은 복지국가는 요원하지요 .

기본 투시야 2009.11.22  01:29

촘스키 이런 넘...나라망친 10년...절라 좌빨 돼중이 광신도..ㅋㅋㅋㅋ.

기본 돈키호테 2009.11.22  03:22

시대 착오적인 인사들이 남북에 넘 많아요.남북의 시대착오인사들이 함께 사라져죠야 통일이 될 것같아요.남한에도 문제지만 북한의 시키들은 도를 넘어요.복지국가 운운 하며 은근히 북한의 이런 늠들 비호하는 놈들도 문제구요.300만 굶겨죽인 북한 정권에 대해선 비판을 안해요.반미 친일이라면 회를 쳐요.그게 북한의 프로파간다라를걸 간과하는 이상한 사고방식의새퀴들이라는거뇨.인권외치면서 수용소 북한엔 넘신기하게 그럴 수 있다는거에요.그리고 반공 반공하지마세요.그런늠들이 상대적으로 함께 남북에 존재하건든요. 정말싫어.

기본 hotelssos 2009.11.22  11:34

진보가 빨갱이 아니던가

기본 dukewind0 2009.11.22  15:10

반공교육 제대로 받은 세대는 지금 반공타령하는게 아주 한심하게 보일겁니다... 70~80년대 반공교육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왜서 386세대일까..? 모르면 그때 반공교채를 찾아서 뒤져보시요.... 그 전세대와 그 후세대는 사실상 반공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 못했을겁니다....

기본 hahehiheho 2009.11.22  15:49

근데 무슨놈에 진보는 북한앞에서면 그잘난 인권과 민주주의는 안드로 메다 날려보내고 민족앞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나요??? 진보는 딴따라당 깔때만 진보라며 구태를 벗어난다며 수구꼴통과의 차별이라며 선전하고 북한앞에선 꼴통만도 못하게 비굴한 아부와 조공 그리고 비겁한 침묵으로 그리고 때론 안면 몰수로 북한을 옹호하나여??? 그딴것도 진보인가요??????

기본 촘스키 2009.11.22  23:34

투시야 이런넘, 나라 망친 40년,경상도 사대주의 박정희 광신도...친일파의 후손들..

기본 독사 2009.11.23  10:14

반공이 아니라 자주국방이죠? 반공이란 이데올로기는 구시대적 사고며 편협한 사고입니다

기본 cuba7973 2009.11.23  10:32

촘스키 님 이나라의 진보인사 란 무엇 인지요? 자기 기득권때문에 군사정권치하 에서 부르짓던 구호를되뇌이는게 진보 인가요? 진정한 진보는 누가 있을까요 EU는 우리나가같은 진보 가 있어서 선진국이 되었나요?
우리나라 같은 진보는 과거 아르헨티나,필리핀, 브라질,에 많았지요....

기본 다크임팩트 2009.11.23  11:42

꼴통아!! 공산주의는 부패되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상이다.. 자유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자신이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면 공산주의의 생기지도 않는단다....

기본 검나루 2009.11.20  08:54

아시아 동쪽끝에 자유진영을 두고있던 것이 매우 꺼림칙했을 중공 과 소련의 자존심이
얼마나 많이 반영된것인지 전투기의 댓수만 보아도 알것같습니다.

976대라는 것은 도시군읍면리 중 읍단위별 평균 한대씩 격추된 것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당시의 전투기 비용으로 볼때 참으로 대단한
전쟁이 6.25였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습니다 .

어쩌면 2차대전 이후 남은 무기가 전부 동원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작가님 즐거운 주말되시길 바라며 , 사실감 넘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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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금오산 2009.11.20  15:23

항상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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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갈대의영혼 2009.11.21  21:40

제가 알기로는 한국동란 중에 북괴 측 항공기 조종사는 소련군이 직접 참전 했고, 그 소련군 조종사가 유엔군 지역으로 추락하면 소련의 참전 사실이 들통 나기 때문에 소련인 조종사는 절대로 접전지역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또 일본의 만주 주둔 관동군으로 있다가 일본 항북 후에 소련으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소련군 조종사가 되었는데, 그 조종사는 동양인이기 때문에 중공군으로 위장하여 전투기 조종사로서 참전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는 전투기를 몰고서 귀순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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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몰러 2009.11.22  10:28

이런거보면 참 분단된현실이 아쉽기만하네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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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qwerty 2009.11.22  10:56

6.25 직후 소련비행기 200 대 전차 180 대를 남침에 사용하엿다라는 보도는 거짖이엿나? 참일텐데, 그렇나 북 전투기는 경기일원아래로는 접근하지못햇다, 비록 낙동강전선이 한창인때에도 제공권의 위력은 대단하엿다, 날마다 북지역을 강타하엿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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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팬텀 2009.11.22  11:21

6.25에대한 자료가 나오면 항상 가슴이 뛰는것은 어린 나이에 격었지만 너무 기억에서 지울수없었던 기억들이라서 가슴이뜀니다 항상 울프독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낙동강 최후 보루선의 전장에서 그것도 겨울전쟁속에서 육신의 조각들을 생생하게 목격한 저로서는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릴것같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 그리고 그때의 그기억을 정리하는 저에게는 참으로 구하기 힘든 자료들이라서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건강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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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빅베어 고사리 2009.11.22  11:26

언제봐도 울프독님의 글은 재미있군요.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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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alpinrosee 2009.11.22  11:55

이런 자료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뼈아픈역사를 되네이게하지요 사상이란게 참으로 무서운것인가봅니다 목숨바처 이나라를지켜주신 국군장병과연합국 군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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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공간지배자 2009.11.22  12:03

좋은 정보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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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공간지배자 2009.11.22  12:06

이북빨갱이 김정일 늑골을 <,시간과 공간.>지배법으로 자근자근 부수며 강제로김정일 종자 [몸에서] 혼을 뺴다가 잠시 커피한잔하며 쉬는 사람이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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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어르신 2009.11.22  12:20

친북좌빨의 괴수 개대중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이니 이북한테 맨날 당하는것입니다.
전라도민도 정신 좀 차립시다.
개대중이의 햇빛정책은 명확한 친북정책입니다.
현금 수십억불의 지원은 북의 핷개발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습니다.
미국의 부시가 개대중이한테 이사람 어느나라 대통령인가라도 말했다는것은 사실입니다.
개대중이는 한국군인을 사상케한 개자식입니다.
이런자가 현충원에 묻히다니 통분할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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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wkqsmaemf 2009.11.22  19:16

개대중이도 문제라면 수구꼴통 친일잔재들도 확실히 처단해야 합니다.. 특히 개정희는 일제시대때 일본육사를 나왔고, 만주에서 독립군들 잡으러 다녔으며, 남로당까지 가입한 빨갱이중의 빨갱이지요,, 이런 작자들의 확실한 역사적 평가를 해야 공평한 거지요, 그렇죠?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좋게 이야기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야비하게 비판하는 것은 더러운 친일 쪽바리들이나 하는 것이죠,,

기본 haemoya 2009.11.23  00:15

김대중 이전에 개정희 쪽발이 이 색휘는 민족보수의 이름으로 무덤을 파헤쳐 일본 전범신사에 고이 묻어줘야 할 것입니다. 혈서까지 쓸 정도로 아주 일본에 대한 충심이 가득한 친일파이였더군요..

기본 쐐주한잔 2009.11.23  05:38

그럼 당신은 쪽발이 첨 자식이요
당신 무식하니 빨리 죽으시요

기본 bjhong5150 2009.11.23  10:54

아직도 현금으로 수십억불 줬다고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네.. 제발 거짓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한날당의 정치수순에 놀아나고 있거나 당신은 알바에 불과합니다.

기본 다크임팩트 2009.11.23  11:44

박정희가 배신때려 동료 1000명을 죽게 했다지요..
배신자의 말로는??

기본 레미 2009.11.23  13:03

그러고싶니'?

기본 anyoung 2009.11.24  16:20

김대중이 북한에 돈을 줬다고 폭로한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노무현정권 입니다 거짓말이란 말은 확인을 제대로 해보고 사용 하세요

기본 anyoung 2009.11.24  16:25

김대중이도 젊은날에 조선신민당(남노당 전신)에 있다가 목포에서 폭동의 배후로 잡혀 장인의 설득으로 전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정희도 비숫한데 김대중은 용서가 되고 박정희는 용서가 안되는건 뭡니까?

기본 anyoung 2009.11.24  16:32

박정희가 손가락으로 혈서를 쓰는것은 그 사람 개인적 사정입니다 그런데 과연 친일이라면 당시 조선사람을 괴롭혔습니까? 친일파의 기준은 조선인을 괴롭히고 일본에게 충성을 하는것인데 박정희는 언제 조선인을 괴롭혔는지? 충성을 했다면 군인으로서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 그런 근거가 있으면 하나만 공개를 하고 욕을 하시요
그러나 김대중은 어떤일을 했습니까? 대통령이란 작자가 연평해전에서 아군이 전사를 하자 그는 뭐햇습니까? 일본으로 건너가 월드컵 축구경기 밖에 더 봤습니까 그게 군통수권자가 할짓 입니까?

기본 최진규 2009.11.22  13:22

흐흐흐 !!!!!! ../// 힝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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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taeinluck 2009.11.22  14:27

본문 내용 중에 1853년이 아니고 1953년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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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2  14:30

죄송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기본 수호천사 2009.11.22  15:39

동영상 배경음악이 누구인지 궁금해요~
이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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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newdaum111 2009.11.22  19:34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곳에 올때마다 많은것을 배우고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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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빵솔이 2009.11.22  20:12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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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diddntjrsla@Y 2009.11.22  23:31

김정일 집단에게 돈ㅍ주고 뺨맞고도 그쪽ㅃ갱이한태 뭘 얻어 먹고 그 김정일 찬양하는벌래같은 인간들과 잘되고자뭐한다고 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만 부르짖어대는 개들과 간첩들...
우리나라엔 간첩 소탕한번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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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훈이대사 2009.11.23  01:21

과연 놀라운 역사이자, 슬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그 자체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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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pjj8976 2009.11.23  07:52

부엉이 바위도 격파시켜부러야 하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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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wonshin59 2009.11.23  08:57

F-86 을 동영상으로 보니 750 Tail no 가 나오는데 제가 공군에 있을때 정비한 비행기라서 새삼스럽네요. 정비사에겐 힘든 기종이지만 (진공관 통신장비 + 오래된 기종) 조종사에겐 안정감도 있고 운행하기 편한 기종이라 알고 있습니다. 80년대 초까지 우리 영공을 지키던 Take-off 이빠르고 기동이 우수한 기종인데, 아무래도 현대전엔 어렵겠지요. 지금은 전쟁 기념관 및 전시관에주로 퇴역해 있지만 다시 한번 만져보구 싶네요..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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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rryconan 2009.11.23  09:19

아직고 이북두둔하며 진보니 뭐니 개지랄하는 것들을 내버려두는 이명박 정부 정신좀 차리세요. 나라 청소부터 하시고 정치하란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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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3  10:40

wonshin59님. F86이 고철이 다 된 말년에는 우리 공군장병들이 X개라고
불렀지만 항공 전문가에 의하면 역대에 나온 전투기중에 가장 우수한 전투기 중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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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레미 2009.11.23  13:01

구하기힘든 이런자료보고나면 주인장에게 고마움을 표하던가, 아님 그냥 보고가면될것을, 꼭 좌니 우니 하는댓글로 싸움을 부추기는 모자란 인간들이 있군.....그것이야말로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고정간첩이 아닌지 궁금하다..지금은 2009년이다 한심한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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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또보기 2009.11.23  16:47

빨리 개정일과 전쟁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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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anyoung 2009.11.24  16:41

이런일도 있었군요 많은 배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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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kwagpeter 2009.11.24  23:31

south korea gains time to develop more economically.
don,t blame Mr kim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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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이언트 2009.11.25  00:46

아 ㅋㅋ 울프독님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
저는 유학왔지만 ㅋㅋ 여전히 울프독님 글을 읽고 있답니다 ㅎㅎㅎ
가끔 인터넷이 끊기고 느린점이있긴 하지만 ㅋㅋㅋㅋ
글 잘 읽고 갑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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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5  01:05

어이쿠 해외로 가셨군요.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금의환향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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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최초로 격추된 공산기


F82 쌍발 야간 전투기 기체 아래에 붙은 것은 레이다이다.
-------------------------------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거주 미국인 긴급 피난을 위해서

미공군 수송기가 서울 근교 김포 비행장에 파견되었다.


북한 공군기는 이 C-54수송기를 지상에서 공격해서
염상(炎上)시켰다.


북한기의 공습으로 불타는 미공군 C 54 수송기
----------------------------

이에 미군은 일본에서 수송기를 호위할 호위기를 파견했다.

그런 임무를 받고 일본에서 날아온 전투기 중에 우리가

잘 보지 못하던 이상한 모양을 한 쌍동의 전투기가 있었다.


F 82 G 전투기로서 F 51무스탕 전투기 2기를 옆으로 연결한
쌍발에
쌍동의 전투기였다.


승무원은 두 명이다.

야간 영격이 주 임무였다.

큰 레이다가 기수 아래 달려있고 조종사중 한 명이

이 레이다 조작을 담당했다.


미공군 C47, 민간형 DC 3 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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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우슈의 이다쓰케 기지에 주둔해 있었는데 한국에

긴급히 파견하는 느려 빠진 C 47 수송기를 한국 김포까지
장시간 동반 호위 할 만큼 항속 거리가 긴

마땅한 전투기가 F82 빼고는 없었다.


그래서 이 독특한 모양의 전투기가 김포까지 날아왔다가

공중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날 고공은 F80이 초계하고 저공은 F82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F80 슈팅 스타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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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 전쟁에서 최초로 북한 전투기를 격추한 F82의

레이다 조작 담당 조종사 칼 프레이저 중위의 회고이다.


우리 기(機)가 교민 철수를 위해서 파견한 수송기 호위를 위해서

김포 비행장 상공을 초계 비행하고 있을 때 낮게 깔린 구름 속에서

북한 전투기 야크 7B기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찰리 모란과
프레드 라킨스가
조종하는 같은 편대의 다른 F82 G에게 덤벼들었다.


그 북한기의 사격 솜씨가 상당히 좋아서 찰리 전투기의

꼬리를 명중시켜 파편을 여러 곳으로 비산시켰다.


내 비행기의 조종사 허드슨은 미끄러지듯 기수를 돌려 도전해온

북한 편대 편대장기의 후미를 물었다.


우리가 자신의 꼬리를 물은 것을 알아 챈 북한 기는

옆의 구름 속으로 도피를 시도했다.

우리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는 불과 몇 십 미터 뒤에서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름 속에서도 적기를 잘 볼 수가 있었다.


우리의 첫 발사는 적기의 기체 후미 파고 들어 사방으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적 야크기 조종사는 오른쪽으로 선회하면서 힘든 상승을 시도했다.


우리는 뒤쫓아 가며 적기의 우측 날개의 연료탱크 부분을
조준하고
다시 한 번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 사격으로 연료 탱크에 불이 붙었다. 

오른쪽 날개의 후랩과 보조익이 떨어져 나갔다.

보기에도 적기는 더 이상 조종 가능 상태가 아니었다.


적기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후미를 따르던 우리 기는 적기를

충돌 일보 직전까지 근접했다,


나는 적기 조종사가 후방석을  뒤돌아보며  뒷 조종사에게
뭐라고
고함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다 틀렸으니 탈출하라고 했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최초로 격추된 야크 7B형-복좌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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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 조종사는 캐노피를 뒤로 밀고 날개 위로 기어 나왔다.

그는 다시 뒤로 기대듯 돌아보며 후방석 조종사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후방석 조종사는 너무 겁을 먹었던가 부상했던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적 조종사는 날개에 선채 낙하산의 고리를 당겼다.

펴진 낙하산은 그를 잡아채듯 기체에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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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북한 조종사를 포로로 잡았다는 한국군 기록은

있지만 그의 운명에 대해서 기술한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군복무시 한국군이 철수하면서 이 조종사를 사살했다는
풍문을 나이 많은 부사관에게  잠깐 들은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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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탈출 직후 기체는 뒤집어 지면서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공중전은 불과 300미터 이하 상공에서 벌어졌다.


허드슨에게 격추되는 야크기가 옆 편대원에게 꼬리 부분만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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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로 돌아온 뒤에 편대원 모란이 적기 한기를 격추시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미에 붙은 적기를 따돌렸지만 실속에 빠졌다.

그가 겨우 기체를 바로 잡았을 때 바로 정면에 다른

야크기가 날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서 그 적기를 격추시켰다.


F82 야간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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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두기만 적기를 격추한 것이 아니었다.

적 야크기를 격추했던 다른 편대기인 F82기가 또 있었다.


북한 공군의 액운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않았다.

그날 늦은 오후 피난민들을 태우고 이륙하려고 했던 수
송기들을 공습하러
나타났던 8기의 북한 IL-10 공격기들은
출현한 적기를 보고
고공에서 급히 강하한 미 공군 F80
슈팅 스타기들에게 4기가 격추당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격추된 북한 IL-10 공격기
북한은 이 우수한 대지 공격기가 60기나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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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 김포 비행장에서 수행했던 피난 민간인 구조 작전은

한명의 민간인 피해도 없이 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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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에게 격추된 북한기가 야크 7B형이라는 기록도

있고 야크 11형이라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 다른 편대기가 격추한 북한 전투기가 LA-7형이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북한이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전투기를
혼성 편성해서
출격시킬 리가 없다.

격추기 조종사들이 적기들을 혼동한 듯하다.

여기서는 격추기의 기록자인 프레이저의 말대로

야크 7B형으로 포스팅한다.

그래도 북한이 정찰기도 아니고 공격편대에 복좌 전투기
[연습기]를
섞어
보낸 것은 특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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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기술했던 적 야크 7B기 한국 전쟁 3년 동안 유엔군
해공군기에게 격추당했던 공산측 976기의 첫 전투기였다.


북한 공군은 개전 일부터 서울 상공에 나타나서 활개를 펴고
시설이나
국군 병력들에게 기총 소사를 가했다.


그들의 큰 수확은 개전 당일 여의도 기지에 [주기駐機]해 있던

한국 공군기 10기에 기총소사를 해서 7기를 파괴시킨 것이다.

한국 공군사는 이들이 L 4 정찰기라고 말하고 있다.

 

L 4 정찰기 - 파이퍼 커브라는 민간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알래스카에서 사용하는 개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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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장부터 이 정도로 성과를 올렸다면 북한 공군의 간도
커질만큼 커졌을 것이다.

대공 사격도 미미하고 한국 공군의 저항도 없어졌으니
이들이 마음 놓고
떼거리로 날아다니다가 박살났다고 하겠다.


6 25사변 발발 때 나의 집안 어른은 구직 운동 차
서울에 올라가 있었다

전황을 지켜보고 틀렸다는 생각을 한 그 분은 서둘러
한강 다리를
건넜다.

암담한 기분으로 도보로 안양쯤 왔을 때 느닷없이 전투기들이
하늘에
나타나서 오르고 내리며 치열한 공중전을
하더라는 것이다.

[공중전이 저공에서 벌어져 잘 보였던 것같다.]


그 분은 북한기의 기종은 몰랐지만 미군기의 기종은
P38 라이트닝이었다고
술회하였다.[같은 쌍동체라
혼동하신듯하다.] 

두 전투기들이 몇 번 어울리는가 싶더니 “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북한 전투기가 시꺼먼 연기를
뿌리며 추락했다.


주위에 공산군을 피해서 서울을 떠나 남으로 가는 피난민들이
많았는데
적기가 추락하자 “와!”하는 커다란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집안 어르신은 말로만 듣던 미군이 직접 참전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크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수원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군의 실력을 너무 과신했던 터라 김일성 부대는
금강선에서
저지 되리라 믿고 방심 했었다.


북 5사단의 기습적인 호남 우회 전략에 그 분은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적 치하에서 죽을 고생을 헸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전쟁이 발발하고 단 이틀째 되던 날 이날 북한 공군은
무려 7기나
격추 당했다.


이날 이후 북한군은 그들이 소련으로부터 미그 15기를
공여
받을 때까지 한번도 유엔기에 도전해오지를 않았다.




기본 갈대의영혼 2009.11.17  21:01

집안 그 어르신의 공중전 구경은 진귀한 경험이었겠습니다. 적치하에서의 도피는 무조건 살던 집을 떠나야만 살 수가 있었다지요. 왜냐하면 한 동네 살던 인간 중에서 붉은 완장 차고 다니는 인간이 가장 무섭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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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hehiheho 2009.11.19  18:29

지금도 인터넷 상에 빨간완장 찬것들을 심심치 않게 볼수 있습니다.

기본 갈대의영혼 2009.11.19  19:21

예 마르크스 레닌의 죽은 시체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꿈을 가진 인간들이 많습니다.

기본 울프독 2009.11.17  21:16

갈대의 영혼님 감사합니다. 정확히 맞는 말씀입니다.
생각치도 않은 인간들에게 배신당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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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명동백작 2009.11.19  21:54

일일 수만명의 손님이 방문하는 기적의 불로그
울프독님 !
대단하십니다.
얼굴좀 보여주실수 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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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 2009.11.19  22:06

[귓속말 입니다.]

기본 검나루 2009.11.20  09:00

L 4 정찰기 웬지 친근감이 간다했더니 어렸을적 국군의 날 행사때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면 꼬리에 (경축 제00회 국군의 날)이라는 후랭카드를 달고 저공비행을 하던 기종입니다.

얼굴은 뵌적이 없으나 어린 마음에 손이라도 흔들면 기체를 좌우로 흔들어 답례를
해주었던 정감 넘치는 조종사께서는 7순이 넘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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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sundukgi 2009.11.20  22:24

개인적으로 밀리터리히스토리 매니아로서 울프독님은 지존이라고 인정합니다. 정말 님의 글을 보면서 삶의 즐거움을 찾네요.....개인적으로 부탁이 있는데요...한국전쟁 최대승리한 전투 용문산전투와 최대실패전인 현리전투에 대한 case도 부탁드립니다...둘다 그때 사단장들 모두 박정희 대통령과 긴밀한 인연이 있는 장도영,최석장군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현재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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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sundukgi 2009.11.20  23:21

그리고 30세 전후의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들로 구성된 한국전쟁시 한국군을 보면 지금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전쟁을 수행했는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점이 군사영어학교출신 들에대에 연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외할아버지도 육사8기 출신으로 근무중 숙군에 걸려 무척이나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그당시 경상도 출신 젊은군인들이 남로당에 많이 가입했다고 하네요.. 이념보다는 지역적인 정서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가담정도가 경미하여 6.25때 백선엽장군 휘하에서 평양을 수복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어 무공훈장을 받고 중령으로 예편하시고 모공기업에 취직하셔서 잘사시다가 몇년전 작고하셨습니다. 제가 대학생때 할아버지는 내가 너나이때 대대장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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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조은희 2009.11.21  14:05

조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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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조은희 2009.11.21  14:07

조인희;;;;;;;;;;;;;;;;;;;;;;;;;;;;;;;;;;;;;;;;;;;;;;;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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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1  18:59

sundukgi님 언젠가 현리 전투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자료는 이미 수집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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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qwerty 2009.11.22  11:14

군사영어학교는 현 육사의 전신이며 그당시에는 99 % 가 일군출신장교들이엿다, 단 몇명이 독림군출신, 총 2개반 100 여명이고 일군위관들이 대부분임, 뭐 더연구해봣자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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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qwerty 2009.11.22  11:19

홈주님 포항 안강전투[육박전]그리고 다부동전투 이런걸실어주세요, 한국군의 용맹사가 그곳에 살아있다네요, 부탁합니다, 어린 학도병들이 마지막보는 처절햇던 포항시가지를,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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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울프독 2009.11.23  00:24

qwerty님 주문들이 많아서 차근 차근해나가겠습니다.
기억 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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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 2009.11.23  11:39

[귓속말 입니다.]

기본 황태 2009.11.24  13:01

파이퍼라면.... 60-70년대 조선동아 같은 언론사에서 취재용으로 사용하던게 파이퍼기였는데.. 거기에 군용도장을 한게 L-4라는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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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日軍 장교의 30년 나 홀로 전쟁


태평양 전쟁기간 일본은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넒은 지역에서 작전을 했다.


그러나 미군의 항공력과 해상력이 너무 막강 했던 터라

넓디넓은 해역에 흩어진 부대들과 보급은커녕 통신마저
단절되어
고립된 부대들도 많았었다.


오노다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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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항복하고 고립된 부대들은 그런대로 연결이 되어

귀향할 수 있었지만 원격지에서 연락 두절된 소수 인원들이나
전투가 휩쓸고 간 전장의
패잔병들은 밀림에서 방황하다가
몇 십 년의 세월을 두고 한두 명씩
숨어있던 밀림에서
새 세상으로 나왔다.


50년대에 수 십 명이 귀환하였고[이들 중에 한국인도 있었다.]

수가 격감했지만 60년대에도 일본을 떠들썩하게 하던
귀환자들이 있었다


1972년 1월 24일, 메스컴에 크게 각광을 받았던 요코이 쇼이치

[橫田 庄一]가 28년 만에 괌 섬에서 발견되어 귀국했다.


발견당시의 요코이 오장.옷은 자신이 식물에서
섬유를 뽑아 직접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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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코이보다 더 일본국민을 놀라게 하는 일본 군인이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발견 되었다.


명령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게릴라전을 수행하라는 상관의 명령에

악착같이 충실하며 29년 동안 싸우던 일본군 소위가 중늙은이로

생환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필리핀 루방 섬에서 발견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小野田 ?? 1922년 생]소위다  


그는 1923년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생으로서 고등학교 졸업 후

중국에 있는 일본 무역회사 중국 지사에서 근무했었다.


사회에 나왔을 때의 오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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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격화 되자 그도 징집되었다.

그는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한 덕분에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유명한 일본 정보학교인 나카노[中野]학교에 입교하여
졸업과 동시
1944년 12월 26일 필리핀의 루방 섬으로 파견되었다.

루방 섬은 마닐라로 들어가는 마니라 만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위치의 섬이었다.


항복 당시 그는 총과 실탄과 군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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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루방 섬에서 적의 비행장이나 항구의 부두 시설 파괴등,

적의 공격을 방해할만한 모든 군사행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별도의 철수 명령이 없는 한 

항복하거나 쉽게 자결하지도 말라는 엄명도 받았다.

그 철수 명령은 30년 만에 떨어졌다.


오노다 소위는 섬에 상륙해서 전에 미리 파견해놓은

일본군들과 연결을 했다.


이 부대원들을 지휘하는 장교들은 계급이 높아서 혈기 높은

오노다의 행동에 자주 제동을  걸었다.


오노다가 명령 받은 게릴라 행동이 제대로 실시를 하지 않아

그 다음해 1945년 2월 28일 미군과 필리핀군의 합동 군이 쉽게

상륙을 하게 만들었다.


미-비 연합군이 상륙하자 일본군들은 오노다와 그의 다른 동료

세 명을 제외하고 전사하거나 항복해버렸다.


오노다 소위는 부하 3명과 함께 루방 섬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지휘관이 된 오노다는 명령에 따라 세 명의 부하들, 아카츠 유이치

[赤津 勇一]일병, 시마다 쇼치[島田 庄一]오장,

코즈카 긴시치 [小塚 金七]상등병등과 게릴라 전투를 개시했다.


그들은 섬에 자리 잡은 미군 레이다 기지를 기습해서 기지장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하고 보급소를 약탈하거나 했다.

오노다 패는 잡은 야생 들소의 건포와 야자열매로 버티면서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미군이 철수하자 섬의 산간에는 게릴라 전투를 할만한

군사 목표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적국'인 필리핀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소도 죽이고 농작물을 태우기도 하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쏘기도 했다.


그들이 일본이 항복했으니 하산하라는 권고 삐라를 본 것은

1945년 10월이었다.
그들은 상의 끝에 이 삐라는 거짓이라고
결론을 냈다,.


1945년 말 필리핀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제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 奉文]대장의 명의로 전쟁은
끝났으니 빨리 항복하라는
명령서의 삐라가 또 살포되었다.


그들이 근 일년간 산 생활을 하면서 처음 접한 최고 사령관의
지시였다

오노다 부대원은 삐라를 면밀하게 검토해보고 이것 역시 자신들을

속이려는 꾀임 수라고 결론을 냈다.


세월이 한참 흘러간 1950년 오노다 소위 대원 중 아카츠 유이치가

조직을 이탈해서 6개월간 혼자 방황하다가 필리핀 경찰에 투항했다.


오노다와 부하들의 신원과 여러 활동 정보가 그들을 찾고 있던

‘적’에게 넘어 가자 그들은 더욱 조심을 하며 행동에 신중함을
가했다.


필리핀 경찰을 태평양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무장대를 조직해서

농민들에게 해꼬지를 해대는 이들을 추적했었다.l.


요코이가 괌 섬에 숨어 살던 땅굴-그는 손재주가 좋아 여러
생존의 도구와 방법을 개발했었다. 일본 귀국후 내핍생활의
인기 강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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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들 오노다 대원들에게 보내는 각 대원들의 일본 가족들

사진과 편지가 인쇄된 삐라가 뿌려지며 투항이 권고되었다.


그러나 오노다와 그 부하들은 이것들이 모두 자신들을
유인하는
미끼라고 무시해버렸다.

1953년 7월 대원 시마다는 지방 어민들과 벌린 총격전에서

다리 부상을 입었다.

오노다는 그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여 정상적인 건강을
찾게 해주었다.


그러나 시마다는 일년 뒤 1954년 5월 7일 그들을 추적하던

수색대에게 총격을 당해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 명 만 남은 오노다 패는 이곳저곳으로 피신과 은신을
다니면서
필리핀 경찰 수색대의 추적을 빼돌렸다.


놀랄 일은 이들이 미군 부대에서 훔친 라디오를 통해서

가끔 외부의 소식을 접했다는 것이다. 완전한 정보 두절상태에서

그런 고집스러운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국 일본인 항복한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은 미국의

괴뢰 정부이고 진짜 정부는 만주로 망명하여 암약 중에 있다고
믿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알았으나 그것은 만주에 망명했던
진짜
일본 정부가 미군에게 반격하는 것이라고 추리해 버렸다.

[일본 나가노 정보학교의 무서운 정신 교육이 놀랍다.]


그 사이 이들을 귀환시키고자 일본의 가족들까지 루방 섬에

찾아와서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이들을 불러냈었다.


오노다는 그의 형이 루방 섬을 찾아와서 방송을 하는 것을

먼 발치로 보았지만 괴뢰정부가 그 형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가지 않았다.


오노다의 아버지까지 현지에 와서 아들에게
항복하도록 확성기 방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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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9일 그들이 ‘명령 받은’ 게릴라 활동의

일환으로 필리핀 농민들이 추수한 쌀 노적가리에 불을 지르다가

필리핀 경찰에게 습격당하여 대원 중 한 명인 고즈카가

총탄 두 발을 맞고 사망했다.


이제는 오노다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일본에서 오노다는 1959년 사망한 것으로 정리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필리핀 경찰은 수색대를 더 보강하여 도주한 오노다 수색들
했지만
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2년 뒤 1974년 오노다에게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다.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중퇴생 스즈키 노리오[鈴木 紀夫]가
먼 일본에서
오노다를 찾아 온 것이다.



스즈키와 오노다 .
----------------------

그는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였던 듯하다.

일본을 떠나 세계 여행에 오를 때 그의 목표는 중국의 판다,

히말라야의 설인, 그리고 72년 총격전으로 일본에 그 생존이

알려진 오노다 소위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루방 섬을 방문해서 오노다 소위를 만나서 함께 지내며
친해졌다.


스즈키는 오노다에게 전쟁은 이미 끝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야기 해주며 투항하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오노다는 자기에게 끝까지 투쟁하라는 마지막 지시를 내린 그의

직속 상관이 찾아와서 투항을 명령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스즈키는 일본에 돌아와서 그와 오노다가 같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일본에 돌아 와서 언론에 오노다와의 만남과 그의 투항 조건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즉각 오노다의 상관이었던 다니구치[谷口  義一]소령을

찾아냈다.  그는 서점을 하고 있었다.


스즈키가 찍은 오노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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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는 즉시 필리핀 루방으로 날아가 접촉 노력 끝에

드디어 1974년 3월 9일 오노다를 만났다

오노다는 깍듯한 경례로 옛 상관을 영접했다.


다니쿠치는 원래의 직책인 제 14방면군 참모부 특별 정보 반장의

이름으로 임무 해제와 귀국 명령을 내렸다. 실로 29년만의

명령이었다.


항복시 오노다는 손으로 만든 일본 군복을 입고 군도와 99식 소총,

실탄 500발, 그리고 몇 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방 필리핀 군기지에 가서 군도를 내놓고 고전 방식의

항복 신고를 했다.

해프닝에 놀란 필리핀 군 기지 사령관은 그 군도를 돌려주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바치는 항복의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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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의 대원들은 1945년부터 1974년까지 30여명의
농민들을 살해했다.

오노다 패들에게는 명령 받은 대로‘전쟁’을 하면서
적을 살상한 것이지만
전후 독립한 필리핀 입장에서 보면
이는 엄연한 양민 학살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는 오노다의 충성심과 군인 정신을

높이 사서 특사를 발표하였다.[경제적으로 일본 의존이 컸던

필리핀으로서 일본에 일기 시작한 오노다의 인기를 의식한듯하다.]


오노다는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의 귀환을 NHK가 한 시간 동안 생중계했고 방영의

전국 시청률은 45%가 넘었다.

[요코이의 귀국 때도 생방송이 있었지만 시청률이 41.2%였다.]


귀국하는 오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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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기는 매우 높아서 그는 주변에서 중의원 출마를
권유 받기도 했다.

오노다는 그의 홀로 전쟁을 담은‘나의 루뱅 섬 30년 전쟁’

[미국에서는‘항복은 없다. 나의 30년 전쟁’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오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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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했고 또 전후 일본 정신과 애국심이

사라지고 타락해가는 전후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1975년

그의 형 다다오가 사는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브라질로 간 다음해 목축업을 시작해서 1976년 결혼도 하고

활발한 교민회 활동도 했다.

1980년 10대의 일본인이 부모를 살해한 것을 보고 결심 끝에
1984년
귀국해서‘오노다 자연숙’이라는 젊은이 교육 캠프를
개설했다.

이 캠프는 인기를 끌어 일본 내 여러 곳에서 지소를 열었다.

오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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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다는 1996년 자기가 전쟁을 했던 루방 섬을 방문하여

지방 학교를 위해 10,000 달라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죽임을 당한 농민들의 유족들이 그에게 격렬히

항의하는 데모를 하기도 했다.


1996년 자신의 나홀로 전쟁터였던 루방섬을 찾은 오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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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브라질과 일본을 오가며 살고 있다.


오노다가 영웅이 되어 일본에 돌아 온 마지막 일본군은 아니다.

그가 귀국한 후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정글에서 피해 다니며

구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났다.


나카무라 데루오[
中村 輝夫]라는 사병으로서 이름은

일본식 이름이지만 대만인 이 광휘[李 光輝]였다.

그는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연합군이 섬을 점령 한 뒤
밀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974년 12월 27일 발견되어
대만으로 돌아갔다.


발견 당시 너무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일본어도 중국어도
전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대만인이었고 오노다만큼 극적인 사회 귀환의 일화가 없어서

일본 대중의 별다른 인기를 끌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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