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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의 대학살 - 1943 비스마르크 해전
비스마르크 해전 -------------------------
옛말에 틀린 말은 한마디도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남에게 악하게 하면 자기도 악하게 당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도덕군자라 해도 자기나 자기 가족이 흉악한 인간에게 흉악한 피해를 당하면 자신의 평소 인격이나 도덕은 다 집어치우고 꼭 같이 보복해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래서 칼로서 흥한 자 칼로서 망한다는 말이 나왔나 보다.
일본군은 러일 전쟁 때만해도 서구인들로부터 문명국으로 인정 받고 싶은 욕망에서 포로들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그러나 점점 교만해지고 자신들이 형편없는 후진국이라고 깔보던 중국과 전쟁을 하면서 그 태생적 잔인함을 유감없이 들어냈다. 일본은 영미 서구국가를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면서 남경 대학살 같은 잔악한 짓을 마음대로 되풀이 했다.
말레이 반도에서 잡은 포로들을 중노동에 내몰아 다수를 죽게 하기도 하고 탈주를 시도하는 포로들은 마구 처형하였다. 말레이에서 포로가 되어 학살이나 학대를 당한 병사중에 영국군이나 인도인도 있었지만 호주군도 상당수가 있었다.
필리핀에서 대량으로 획득한 미군 포로들에 대해서는 더욱 학대 사례가 많아 바탄 반도의 죽음의 행군에서 수없는 미군들을 죽게 했거나 역시 도주를 시도하거나 비협조적인 포로는 역시 학살하였다.
미 호군의 포로들이 이렇게 일본군에게 죽었으니 이들 국민 감정은 극도의 악감정으로 치달았고 이 복수심을 일선 전투 지휘관이나 병사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자국의 포로들에게 함부로 잔악한 짓을 일삼는 일본군에게 드디어 쌓였던 악감정이 그대로 폭발한 것으로 보이는 대 전투가 1943년 뉴 기니아 근해 비스마르크 해에서 있었다.
격침 된 선박에서 탈출하여 표류하는 수천 명의 일본군에 대한 미. 호 양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을 동원했던 조직적인 대 학살이 있었다.
1942년 12월말. 과달카날에서 반격을 시작했던 미군에 자신들의 능력을 생각지도 않고 정공법으로 맞섰다가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한없는 소모전에 휘말린 것을 뒤 늦게 깨달은 일본의 대본영은 과달카날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과달카날 행 보급선단 [도쿄 익스프레스]의 함선에 승선하는 일본군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해군이 진작부터 철군을 주장했지만 철수라는 것을 금기의 말로 알고 턱없이 사수를 주장하던 육군이 감당할 수없는 상황을 드디어 깨닫고 고집을 접었기 때문이다. [ 일본 군부의 황당한 패배 부정 인식은 원자탄을 두들겨 맞고도 계속 전쟁을 주장하던 1945년 8월 14일 까지도 계속되었다.]
과달카날에서의 참패 인정과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 가능성을 동시에 예견한 대본영은 깨달은 과달카날 일주일전인 1942년 12월 23일 미군의 대규모 반격의 주공 방향이 당시 일본군의 남방 침공의 베이스 캠프격인 라바울로 향하리라고 판단하고 라바울 방어선 외곽선에 위치했던 뉴 기니아섬의 라에에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기로 한다.  일본군의 남방 침략의 베이스 캠프 라바울 - 바로 옆에 활화산이 있었다. -------------------------------------------------
이 부대들은 중국 전선과 일본 본토에서 차출예정으로서 무려 십만 오 천명에 달했다. 대병력의 조기 증파는 병력을 축차 투입했다가 대패를 맛보았던 과달카날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대본영의 각오가 바닥에 있었다.. 그런 대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하는 것은 그 당시의 일본
해군능력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무리였다, 그러나 대본영은 그대로 밀어부쳤다.
그대로 병력증파는 추진되어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꼬리를 말아들고 완전 철수했던 1942년 2월 말, 동원된 육군 20사단과 41사단병력이 무사히 중간기지인 뉴기니아 섬의 웨왁에 집결시킬 수가 있었다. 
비스마르크 해에서 고공폭격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구축함 그러나 치명타를 벌써 입은 듯, 수면 정지중이다. -------------------------------------------------------- 이에 자신을 얻은 대본영은 과달카날 철수 결정전 본래 과달카날에 증파하기로 했다가 작전 중지로 12월부터 라바울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던 51사단을 가장 먼저 위험한 항로를 건너 라에로 보내기로 하였다. 
뉴 브리튼 섬의 라바울을 출발한 수송 선단은 결국 뉴기니아의 라에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모두 격침된다. 포트 모레스비와 다른 기지들에서 출격한 연합국측 항공기들의 출격 비행 항로가 표시되어 있다. 공습을 조금이라도 더 피해보고자 뉴브리튼 섬의 북방 항로를 택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
이 사단의 수송은 아주 위험한 작전이었다. 라에 까지 가는 해로는 문자 그대로 연합국의 미 호의 두려운 공군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호[美 豪] 항공기들은 수송선단이 통과하여야할 비티아즈 해협 상공을 제집 나들이 하듯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들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51사단을 라에로 보내야 할 만큼의 급박한 전황이 있었다. 과달카날을 완전히 석권한 미군의 다음 창끝이 어디로 향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무라 마사도미 [木寸 昌福 ]소장이 지휘하는 제 81호 작전이 발령되었다.
커다란 카이젤 수염을 기른 기무라 소장은 그해 7월 28일 미 함대가 완전 봉쇄한 알류샨 열도의 키스카 섬에서 악천후와 행운을 빌어 일본군을 완전 철수 시키는 대공로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런 행운이 따르지를 않았다.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 - 해군 병학교[해사]를 거의 꼴지로 졸업했지만 누구보다도 풍부한 해상근무와 실전 경력으로 해군 중장까지 진급했다. 패전후 염전 경영 사업가로 성공을 했지만 1960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키스카 섬의 철수 작전 성공의 영웅으로도 잘 알려졌지만 해군에서 제일 긴 카이젤 수염으로 유명했다. -----------------------------------------------------
그해 2월 28일 편성을 끝낸 수송선단은 라바울의 심슨 항에서 출항하였다..
목적지 라에 도착 예정일은 3월 2일이었다.
51사단을 운반할 수송 선박은 총 8척. 여기에 같은 동수인 제 3 수뢰전대 8척의 구축함대가 호위 함대로 붙었다. 호위 함대에 더해서 지역에서 가용 가능한 일본 육해군 전투기 100여기가 총 출동하여 공중 엄호를 하기로 하였다. 51사단장 나카노 히데미쓰 [中野英光] 중장은 구축함 유키가제에 승함했고 호위하는 제 3 구축함대 사령관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은 구축함 시라유키 [白雪]를 기함으로 삼았다. 
호송함대 기함 시라유키 - 1928년 취역. 당시 세계 최강의 구축함으로서 각광을 받았지만 이번 호위 작전에서 격침했다. -------------------------------------------------------------- 대본영과 라바울의 사령부는 이 정도의 해공 호위라면 수송 선단이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가 어떻게 해서라도 라에에 도착 할 줄을 알았었다.
반면 이들 수송선단을 막아 설 남서 태평양 지역에서 작전했던 미 육군 항공대의 5 공군 사령관 조지 케니는 역시 뉴 기니아의 연합군 확보 지역에 기지를 두고 있으면서 이런 증파 움직임을 내다보고 준비를 해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5 공군 사령관 죠지 케니 장군-1차 세계대전 참전 전투기 조종사로서 2기 격추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2기중 한기는 나중에 나치 정권에서 히틀러 다음의 실권을 휘두른 루프트바페 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조종했었다. 케니 장군은 4성장군으로 은퇴하였다. ------------------------------------------------------------
이들 항공대의 중형 쌍발 폭격기 B25기의 승무원들이 개발하고 집중적으로 연습했던 특수한 적함 공격 전술이 있었다.
나중에 알려 졌지만 이 작전에 투입한 공군력을 대단한 규모였다. 39기의 중[重]폭격기[B17 B24]와 41기의 중형(中型) 폭격기 [B25기, A20기] 그리고 34기의 경폭격기[보파이터]와 54기의 전투기가 전투에 투입되어 이 선단을 두들겨 팼다,
이 공격 전술은 특수하게 개조한 미 공군 B25 폭격기와 A 20 중폭격기가 사용되었다. 이 새로운 폭격 방법은 'SKIP BOMBING''이라는 기술이었다.
도약 폭격, 또는 반도 폭격이다.
좀더 우리말다운 번역은 물 수제비 폭격이 되겠다. 공격기는 해면 불과 수 미터 위를 나는 저공비행으로 적 함선에 돌입하면서 최 근접거리에 도달하면 폭탄을 해면에 투하한다.
해면에 투하한 폭탄은 해면에서 튕겨져서 적함선의 측면을 때리거나 또는 함저 수중에서 폭발하거나 함상으로 튀어 들어 폭발한다. 그래서 B25 폭격기가 고공에서 폭격하는 것보다 폭격 성공률이 엄청나게 높았다.
물론 적함의 대공화기를 무릅쓰고 물수제비가 뜰만한 최단거리까지 저공 접근해야 하고 역시 적함의 상공을 통과해야 되기 때문에 폭격기 승무원의 목숨을 보장하기가 힘들었다.
출항한 일 수송단은 수송선들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인 7노트의 속도로 바다를 달렸다,
누구나 미군과 호주군의 가공할 공군력에 불안한 예감을 떨쳐 버리기 힘들었으나, 그래도 전 수송선단 전멸이라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릴 줄은 아무도 생각지를 않고자 했다.
선단은 2월 27일부터 3월 1일 까지 솔로몬 군도와 비스마르크해에 몰아 부친 스콜[열대성 호우] 덕택에 며칠간 미 항공 정찰에 발각되지 않고 별로 무리없이 항해했다.
그러나 그런 초기의 행운은 도착 예정 하루 전에 곧 끝장이 났다. 뇌격기 보포트- 이 영국 브리스톨사의 공격기는 호주에서 라이센스 생산되었다.- -------------------- 스콜이 끝난 3월 1일 오후 2시 25분, 선단은 케이프 홀만 북쪽 해상에서 적 장거리 정찰기에게 발견되었다.
발견기는 미 육군 항공대 중위 왈터 E.히긴스 주니어가 조종하는 중(重)폭격기 B24 4발 폭격기였다. 
정찰했던 B24기 -------------------
긴급 무선 보고를 받은 미군은 일 수송 선단이 발견된 지점으로 중 폭격기들을 보냈지만 접촉에 실패하여 그냥 돌아왔다.
다음날 3월 2일 아침 10시 다른 B24기가 선단을 발견하였다. 날씨는 쾌청하였다. 수개 편대의 B17 폭격기가 출격하였다.
일 선단의 재앙은 시작되었다. 고공에서 4발 폭격기 퍼붓는 수백발의 폭탄에 8척의 수송선중 3척이 대파되었다. 세 척중 한 척은 표류하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침몰한 일 수송선은 교쿠세이 마루[旭盛丸]였다. 이 배에는 450킬로 그램의 대형 폭탄 두 발이 명중했었다. 그러나 미 폭격대에서도 한 기의 손실이 있었다.
일본 해군의 제로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B17 한 기가 격추 되었던 것이다. 추락하는 B17 승무원들은 낙하산 탈출을 하였다.
그런데 제로 전투기는 낙하산으로 하강중인 승무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죽이고 이미 해상에 착수한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도 기총 소사를 하였다.
격침된 교쿠세이 마루의 1,500명 승선자중 800명은 일 구축함 유키카제[雪風]와 아사구모[朝雲]에게 구조되었다. 유키카제의 구조자중에는 51사단장 나카노 히데미쓰 [中野英光] 중장도 있었다.
속도가 빠른 두 구축함은 구출 병사들을 싣고 호위 함대를 이탈하여 그대로 목적지 라에도 직진하였다. 전속으로 달린 두 척의 구축함은 그날 일몰후에 병력들을 라에에 상륙시키고 다시 전속으로 달려 3월 3일 함대로 복귀하였다.
다음 날 3월 2일 다시 항해는 계속되었다. 다행히 수송선 노지마[野島] 한척만 손상을 입었을 따름이다. 구축함과 한척의 수송선이 그날 오후 다시 공습을 받았다.
밤이 왔다. 모두 폭격에서 자유로워 졌다고 생각하고 한숨을 놓았지만 제 11 호주 공군의 PBY카타리나 비행정의 미행은 집요하였다.
밤새 이 비행정들은 수송선단을 따라오며 때로는 폭탄을 투하하였다. 
PBY 비행정 정찰 수송 폭격 뇌격등 만능 비행정이었다. ---------------------------------------------------- 3월 3일 연합군의 방해가 없었으면 당일 도착예정이었던 이날 일본 수송선단은 최악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박명이 동쪽 하늘에 스며들 무렵인 03시 25분에 선단은 밀른 만의 합군의 항공기지 내의 출격 거리 내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주 공군 제 100비행단의 보포트 뇌격기들이 기지를 이륙하였다. 그러나 다시 악화된 아침 기상 때문에 대부분의 뇌격기들은 아무 성과없이 뒤돌아오고 두기의 보포트기가 선단을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수송 선단이 후온 반도를 돌아 남진할 때 날씨가 훨씬 쾌청해졌다. 포트 모레스비의 미국과 호주 공군기 90기가 발진해서 케이프 와드 헌트로 향 하였다.
동시에 22기의 호주 더그래스 보스톤 기가 출격하여 라에의 일 해군 항공기지를 폭격하였다.
일 수송선단의 항공 엄호를 방해 할 목적 때문이었다. 라에 기지 폭격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  호주군 보스톤 폭격기- 선단을 폭격했던 A20과 다른 버젼의 같은 폭격기이다. -------------------------------------------------------- 아침 열시 13기의 B17기가 수송선단을 중고도 폭격을 하였다. 명중한 일본 함선은 없었지만 이들이 폭격을 피하느라 함 대형을 깨고 산개했다가 다시 항해 선단을 짜느라 일정이 지연되었다.
겨우 다시 선단을 짜고 항해를 계속 할 무렵 호주 30 비행대대 소속 13기의 브리스톨 보파이터들이 저공으로 공격해왔다.
마치 보파이터와 비슷한 보포트 뇌격기가 어뢰 공격을 하는 것처럼 잘못 판단하기 좋은 형태였다, 
뉴기니아 스탠리 산맥을 넘어 비행하는 보파이터 보포트기를 전투기 형으로 변형한것으로서 야간전투 대함공격등으로 오스트라리아 공군에서 1960년까지 사용했었다. -------------------------------------------------
선단의 수송선들과 구축함들은 어뢰 공격으로 정말 판단하고 일제히 선수를 저공 접근하는 보파이터 공격기 쪽으로 돌렸다.
목표 면적을 줄이고 어뢰 발사의 조준을 어렵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이런 기동은 보파이터의 막강한 기총 화력을 선체 앞에서 뒤에까지 남김없이 모두 뒤집어 쓰게 만드는 짓이었다.
보파이터에는 기수에 네 개의 20mm 기관포와 날개에 장비된 6문의 구경 303구경의 기관총들이 있었다.
보파이터는 구축함을 겨냥했다. 보파이터는 구축함들에게 정면으로 접근하여 함수부터 꼬치로 꿰듯 연달아 화력을 퍼부으며 함교와 대공 포좌등를 파괴하고 함미로 빠져나갔다. 제대로 맞은 구축함은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호주기의 꼬치꿰기 식 기총 소사 공격이 지나기지 선단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이 난리 중에 미첼 B25기의 13기가 접근해와 750미터 상공에서 폭격을 했다. 일본의 제로 전투기들은 이들을 영격하느라 모두 고공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 틈을 타고 B25 12기가 바로 해면에 착 들어붙은 저공 비행으로 돌입해왔다. 언뜻 보면 어뢰 공격을 하는 대형이었지만 앞에서 소개했던 도약 폭격이 개시되는 순간이었다. 
B 25 폭격기 ---------------------- 간발의 차이를 두고 미군 A20기 12기와 B25기 6기 도약 폭격 세례가 연달아서 지나갔다.
도약 폭격은 전율할 명중률을 기록했다. 1파의 폭격대가 20발중 11발의 명중탄을 냈고 2파의 폭격대가 37발중 17발이나 명중 시켰다.
7척의 수송선 모두가 화재가 일어나고 운행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구축함 세척[白雪,荒潮,,時津風]도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호위 함대의 기함 시라유키는 피격 두시간 뒤 함미의 탄약고가 폭발하자 함체가 두쪽으로 동강나고 폭침하고 말았다.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부상을 입고 라바울로 긴급 후송되었다.

A20 공격기 -----------
도약 폭격의 처절한 아비규환이 지나고 나서도 연합국의 공습은 계속되었다.
 도약 폭격의 순간 ----------------------------- 다시 고공으로 다가온 B17기의 폭격이 이어졌다. 이 폭격이 의외의 성과를 발휘하여서 다섯 발의 명중탄을 냈다. 파도 같이 몰려오는 미국 호주 공군기의 공격을 받은 선단들은 마치 집단 폭력에 당한 일단의 무기력한 걸객과 같은 신세였다, 
B 17 폭격기 -------------------------
항공기들의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28기의 P38기가 적기 내습에
대비한 항공지원을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제로기들도 수송선단이 이 지옥에서 돌파하고자 하는 것을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비명 섞인 구조 요청에 제로 기들이 급거 출동했지만 P38기들이 고공으로부터 영격해왔다.
대규모 공중전이 뒤따라서 제로기 20기가 격추 당하고 P38기 3기가 역시 격추됐다. 미 육군 항공대에 유감스러웠던 것은 격추된 조종사들중에 밥 파로와 호이트 이슨이 전사했다. 두 사람은 각각 5기 이상 격추한 에이스들이었다 
P38 전투기 ---------
만신창이가 된 선단에 미군 미첼기와 호주 공군 A20 폭격기가 다시 내습해서 연타를 먹였다.. 이 정도의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고도 만족을 못 했던가 , 제로 전투기들을 쫓아낸 11기의 P38기까지 급강하 하여 기총소사를 하고 도주하였다.
그날 저녁 해상의 폭연이 가시고 난 해상에 아침에 있었던 수송선 7 척중 오후 5시 30분 격침된 데이요 마루를 끝으로 모두 해저로 사라졌다. 해상에는 중상을 입은 오이시가와 마루가 표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로 전투기 ---------------------
구조 작업을 하던 구축함들도 [雪風, 敷風 浦波,朝雲] 적의 공격이 너무 드세어서 죽을힘을 다하여 롱 섬 쪽으로 일시 피신하였다.
일본 선단 궤멸의 위치는 뉴기니아 핀쉬하우펜의 남동쪽이었다.
기적같이 생존했던 구축함 네 척은 저녁이 되고 연합국 공군기가 철수하자 다시 돌아와서 가능한대로 많은 표류자들을 구조해서 라바울로 총력 후퇴하였다. 
A 20 공격기 ------------------- 3월 4일 다섯 번째 구축함 아사시오는 다른 구축함 아라시오의 승무원들을 구조하고 있는 동안 공습을 받고 격침되었다.
피격당하여 표류하던 아라시오[荒潮] 그리고 도키쓰카제[時津風]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격침한 시라유키와 아사시오, 아라시오, 그리고 도키카제. 총 네 척의 구축함이 호위 함대에서 사라졌다. 라에 항진은 커녕 수송할 병력도 다 사려졌으니 작전은 취소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송선단이 가지 못했던 목적지 . 뉴기니아 섬의 두번째 큰 도시 라에 --------------------------------------
막강한 연합국의 공군력때문에 구조도 힘들었다.
머지막 구조를 한 네 척의 구축함들이 눈물을 삼키는 수병들과 구조자들을 태우고 라바울로 도주 한 뒤에 해상에는 구조되지 못한 수많은 일본병들과 선원들이 기약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밤이되자 출현하기 시작한 PT정들은 표류하던 오이시가와 마루[大井川 丸]에게 어뢰를 발사하여 마지막 수송선을 격침했다.
알려지기는 미 5 공군 사령관 케니는 함대 공격 첫 날 격추된 B17기 승무원들이 낙하산 탈출을 한 동안 기총소사를 했던 일본 해군 항공대의 만행에 보복하기위기 위한 조처로 해상에 표류하는 모든 생존자들을 쓸어버리도록 암묵적으로 지시했다고 했다.
3월 3일 저녁부터 3월 5일 하루 종일 미군과 호주군의 공격기들은 계속 되어 구조선이나 구명정에 탔던 인원들 그리고 바다에서 구명의를 입고 수영을 하는 모든 일본군들을 기총 소사로 전멸시켰다.
항공기들만 이 살육에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해군 기지에서 출동한 8척의 PT들이 이 해상 살육에 참가하여 기관포로서 구명정들을 사정없이 쏘아 타고 있는 일본군들을 죽였다. 지옥의 불비가 내리는 죽음의 바다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서 해변으로 상륙했던 일본군들은 식인종이나 다를바 없는 뉴기니아인 원주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무기도 없었던 일본군 생존자들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했다.
해상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단지 18명으로서 PT정들에게 격침당한 오이가와 마루 민간인 선원들이었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을 했기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후에 비스마르크 해전이라고 불린 이 해전은 일본군에게 큰 재앙이 되었다. 라에에 파견하려고 했던 6,900명의 병력 중 단지 800명만이 라에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호주 전쟁기념관은 나중 분석에서 무려 2,890명의 일본병들과 선원들이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전사했다고 발표했었다. 
강운함 [强運艦 ]유키가제 [雪風]는 8척의 수송선단과 4척의 구축함이 격침된 죽음의 작전에서도 살아 남았다.
일본 해군 강운함 유키가제의 포스팅을 보실 분은 CLICK!
-------------------------------------------------- 해상의 살육전은 후에 미군 당국에 의해서 구조된 일본군 병사들이
전선에 투입되면 미군들을 살상하는 전투력이 되기 때문에 조기에 제거했던것이 타당했다는 이상한 논리로 정당화 되었다.
그러나 이런 해상 학살은 그 상대가 흉포한 일본군이라 해도 엄연한 제네바 협정의 위반이었다.
그러나 이 학살에 대해서 상대방인 일본의 범죄적 학살 행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인가 그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글들이 간간히 눈에 띄지만 대체로 묵살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날 스트레스 풀 듯 일본군 구명정에 기총소사를 가했던 미국과 호주군 조종사나 수병들은 거의 20대의 젊은이였다.
감수성 강한 이들에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것은 단지 일본군들이 포로가 된 전우들에게 저지른 잔악한 학살 사실과 이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그 증오심은 일본군 해군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B 17승무원에게 가했던 기총 소사라는 비 기사도적인 행위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일본이 좀더 문명화된 개념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더라면, 아니 좀더 인간적인 배려로서 미군이나 호주군 포로들을 대했더라면 과연 미국과 호주 양국 부대가 총 출동한 조직적인 해상의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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