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번 침투 공비들의 배낭 속에서 국군 육군 대위 계급장이 달린 장교 군복 1벌과 하사 복장 2벌이 나왔는데 대위 계급장은 엉성했으나 군복만은 겉으로 보기에도 국군 복장으로 착각할만큼 식별하기가 어려워 아군 복장인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군복 메이커에 검사를 의뢰했는데 북괴가 제 3국을 통해 구입해간 국산 군복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침투 간첩들은 소음 권총과 체코제 기관 권총 등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고 주요 시설들이 그려진 서울과 의정부등의 서울 근교의 상세한 지도를 갖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요인 암살등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남파 된 특수 요원들임이 확인되었다.
이 개구멍 같은 빈틈을 노리고 침투를 기획했던 북의 간부 는 그저 지도에서 이 개천을 보고 침투하면 발각되지 않겠지 하는 책상 물림 같은 착안을 했을 것이다.
남한 침투를 여러번 해보아 국군의 경계태세를 잘아는 배테란 북한 침투조원이라면 이런 유별난 지형을 절대 침투 코스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꾀도 지나치면 통하지 않은 다 읽힌 잔꾀가 된다.
6.25전쟁 뒤 북한이 30년 넘게 끊임없이 간첩들을 침투시켰기 때문에 국군들도 경계태세에 많은 노우 하우가 축적해 있었다. 전방에서 지켜보니 육군은 비가 오는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 취약한 날에는 더욱 경계를 엄하게 했었던 것이 생각난다.
개구멍 같은 취약 지점은 북한 간첩들 뿐만 아니라 울타리를 지키는 국군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국군이 개구멍 같은 침투 취약지인 문산천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북한은 80년대 전후 서부전선에서 임진강과 한강 침투 목적으로 특수 수영훈련을 받은 UDT같은 부대를 운영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1978년 광천에 침투해서 여러 겹의 경계망을 뚫고 북상한 간첩들을 김포 반도에서 영접해서 북으로 데리고 복귀 시킨 성공을 거두기도 했었지만 한강이나 임진강 수중 침투를 시도하다가 문산천 간첩처럼 사살당한 간첩들이 많았다.
임월교 바로 옆에 설치된 침투 방지 수중 철책 이 수중 철책에서 상황이 벌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나이든 동네 아저씨는 이 철책이 침투 사건 뒤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신문보도대로 임월교에서 사건이 터졌다는 것으로 했다. -----------------------------------------------------
그런 선례가 있었던 지라 국군은 이런 샛강에는 경계의 눈길을 더욱 강하게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산천 침투 미수 사건으로 간첩들의 수중 침투 능력을 내다본 당국은 1988년 올림픽 때 한강다리 교각의 폭파 가능성을 우려해서 강도 높은 경계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간첩의 수중 침투를 탐지해낸 병사는 광주C대학 재학중 입대 했던 사병으로서 이번 공로로 헬리콥터로 금의 환향하는 특전과 일년간의 휴가를 받았었다.
당시 사건은 다리에서 교전을 한 것이 아니고 제방둑에서 경계서던 초병에 의해 발견되고 간첩의 조짐이 보이자 소대장이 도착하여 병력들이 합세하여, 수류탄으로 끝장냈던 사건이고 이후 집중사격으로 3명을 사살하고 초병은 헬기타고 고향으로 가서 열렬히 환영받고 그랬습니다. 저의 집이 사건난 그곳서 문산천으로 20리 올라가면 나오는 추억어린 곳입니다,
65년도에는 임진강으로 침투하던 잠수정이 발견되어 이송할 때 트레일러로 싣고가던 그것을 집앞에서 보기도 했었으니 전방의 추억은 늘 기억합니다.
jamesju_usa 님. 역시 대간첩 작전본부의 발표에는 항상 미화된 무엇이 있군요.
이번에도 당시 두 신문을 검색했는데 두 신문 다 초병이 다리 위에서 발견했고
대화도 엿들었다고 했습니다. 수류탄도 한 발이 먼저 나갔고 이어서 집중 사격이
이어졌답니다. 다리 근처에서 부동산 하시던 분도 초병이 다리에서 발견했다고 하
였습니다만 선생님의 정보도 참고 하도록 많은 분이 보셨으면 합니다.
2인의 경계병이 조짐 발견즉시 스위치를 눌러 소대장에게 알리고 선임하사와 소대병력들이 소리없이 배치되고 철망 안쪽에서 들어올 곳을 찾던 공비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수류탄 투척과 사격이 있던 것입니다. 당시 기록을 자세히 찾아보시면 저와 같은 기록들이 있을겁니다. 시장터 사람들이 밤새 잠을 못잤을 정도로 콩볶아 대었고 잠수복을 입고있던 간첩들은 사살된 사건입니다. 강둑의 경계호에서 발견하고 교통호로 접근한 아군들의 분산배치가 완료된 상황서 이동하려는 그들을 그대로...
3명의 무장간첩이 갯벌위에서 사살당한사건은 이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임진강결사대라고 부르는 당시 이부대에서 김범규이병과 황중해일병이 선조치 후보고 에 따라서 사살한 간첩들은 갯벌에서 무거운 잠수복을 입은채 변변한 대항도 못하고 사살됐고
그들의 시신에서 공통적으로 문신이 발견되었는데.. 수면위로 다이빙을 하는 남자의 모습이 새겨진것이었고 그것으로 수중침투만 전문으로 훈련받은 공작원으로 추측을 하는 방송이 나온것을 봤었습니다. 당시 저는 문산종고에 재학중이었지요... 참고로 저는 60년생입니다..
봉일천에 살았고요.. 그 공로로 두사람의 사병은 2계급특진에 6개월의 초상휴가를 받았는데
김범규이병은 성남시가 집이었고 단국대인가 .. 확실치않으나 대학을 다니다 온 사람이었지요 .. 그사람들 휴가 다녀와서도 각부대 돌아다니면서 강연하느라 실제 부대생활은 그걸로 거의 끝냈다는 후문입니다... 김범규이병은 성남에서 누군가 이층단독주택까지 사줬고 장가도 아주 잘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뒷말이 있었지요.. 대개 이병이나 일병이 동시에 같은조로 배치된다는것은 문제가 있다는것이었고 (당연한 말이지요) 대개 고참인 병장이나 적어도 상병과 신참을 묶어서 경계를 세우는게 일반적인 수칙인데 말이죠.
그리고 그로부터 몇년후에 다리밑이 아닌 흙벽아래에서 심야에 침투중이던 공비들은 역시 세명이라고 하는데.. 발견한 초병이 장옥동 병장인데.. 그사람 그공으로 인해서 하사로 진급을 했으며 하사이니 하후대로 가서 교육을 받아야 했고 ... 하사이니 당연히 군복무기간 길어졌다고 간첩잡아서 군복무 길게한 재수없는 (?) 사람이었습니다...
울프독님 제생각에는 jamesju_usa 님께서 올리신글이 바로 그 김범규이병과 황중해일병이 공을 세웠던 사건으로 확신이 되는군요. 상황이 딱 들어 맞습니다. 당시 공비들은 3명이었고 잠수복에 공기통까지 메고 있었으니 그 갯벌위에서 무슨 반격을 제대로 할수가 있었을까요. 당시 황중해일병이 김법규 이병을 소대장에게 보고하도록 보냈고 김볌규이병은 비상스위치누르면서 무장공비출현! 긴급지원바람! 단 두마디만 했답니다. 그리고 황중해이병은 어둠속에서 접근해오는 3명을 30미터앞까지 오도록 기다렸다가 M16으로 갈겼고 한명이 쓰러지면서 나머지 두놈이 뛰어 엎드리면서 피했고 반격으로 사격을 해왔으나 그때에는 이미 소대원들이 배치됐던 상황이고
투항을 권유해도 듣지않고 반항하니 조명탄이 터지고 .... 결국 사살되었는데... 나중에 이놈들의 시체를 벌겨벗겨서 엎어놓고 전리품과 함께 사진을 찍은것이 당시 신문에도 크게 나왔었습니다. jamesju_usa 님께서 답글 올리신게 바로 이사건인듯합니다.
김신조사건때는 당시에 그추운겨울에 늘로리사촌집에 아버지와 함께 갔었다가 총격전을 봤는데 공비들이 산의 공동묘지중간쯤에 파놓은 토치카로 들어가 결사항전하는것을 국군이 유탄발사기로 작살내더군요.. 시체를 끌어내는데 보니까 처음부터 신발이 없었던것은 아닐텐데.. 두놈 다 신발은 없고 발을 광목같은 헝겁으로 칭칭감고 있었으며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국군이 총격전을 하는데도 마을사람들은 건너편산위에 올라가 구경을 하던 기억도 나는데.. 위험하니 내려가라고 그렇게 경찰들이 마이크로 방송을 해대도 듣지 않고 구경을 했던게 강하게 머리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에는 툭하면 간첩, 무장공비 사건이 비일비재 했었지요...
잘 보고 갑니다.
저는 오늘 가까운 산악회원 4명이서 인근 지역산행을 하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모처럼 해수욕장 구경도하고 술도 한잔하구요.
땀네미 가족이 어제밤에 출발하고 오늘 산행을 하였더니 피곤이 겹친듯합니다.
오늘밤은 좀 쉬렵니다.
남은 일요일도 편안하시고 새롭게 시작하는 한주도 활기차시기 바랍니다.
임월교 작전은 제가 알고 있는것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어 댓글을 씁니다. 1사단이 아니고 그당시에는 101여단 3대대 9중대가 임월교쪽에 경계근무를 했지요. 지금 101여단은 해체되어 원래대로 9사단 으로 편입되었고요. 101여단 자체가 9사단 섹터중 일부를 9사단 1개 대대, 1사단 일개 대대, 그라고 각사단에서 차출된 인원으로 편성되어 1982년에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조선대 3년을 마치고 입대한 이등병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네요?, 검은색 뿔테안경끼고 1년 휴가후 여단 본부중대로 가서 거기서 제대 하였는데) 과 하사 가 다리위 초소에서 근무를 서던중 간첩 3명이 호흡용 빨대를 이용하여 참투하다가 다리밑에 설치된 철망에 걸려 돌아갈까, 침투할까등을 속삭이는데 이소리를 이등병이 듣고 소초에 연락하여 소대장, 소대 선임하사가 다리에 온후 선임하사가 수루탄을 투척 하자고 하여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 하여 그때 무장공비 2명이 즉사하고 한명이 물결에 떠내려가사 바지소대에서 보트로 추적 사살 하였다고 하는데 3번째 무장 공비 시체를 회수 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전여단에 비상이 걸려 거북고지에거 오두산 전망대 까지 전체가 밤새로록 사격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이등병은 헬기타고 1년 휴가 갔고 분대장 등 많은 분이 훈장을 탔지요. 그당시 여단장 님은 이후 50사단으로 영전 하여 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있던 11중대도 경운기가 한대 하사되어 작업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저는 84년 6월에 11중대로 전입되어 그당시 얘기를 고참들에게 들었습니다. 제가 들었던 내용과 조금 다를수도 있겠지만 제가 아는 임월교 대건첩 작전 내용은 쓴바와 같습니다.
이 글을 보니 참 반갑군요. 당시 5분 대기조 출동자입니다.SCJKKM 도 그 때 거기 근무하셨군요. 그 이등병 이름은 보성에서 광주 조선대에 진학한 김 이식 이지요.ㅋㅋ
그리고 같이 근무한 초병은 하사가 아닌 병장이었습니다. 실탄은 나중에 지적 사항이었지만 40000발 사격 했구요. 당시 초병 병장은 도망가다가 동초 선임하사를 만났지요(숨겨진 비화) 그래서 김이병은 화랑무공훈자을 받았구요. 도망갔던 병장은 한급 아래인 을지 무공훈장을 받았답니다.ㅋ 나머지는 거의 다 맞습니다.
scjkkim 이분 말씀이 거의 맞아요 전 문산이 고향이구요 운좋게 101여단 소속인 275포병대대 "B"포대 군 복무했는데요 군 고참이나 간부들 글고 울 동네 어르신네들 말씀 거의 똑같네요 나중에 한명도 죽어서 발견된걸로 아는데요 파주시에 있는 군부대 에는 전설같은 이야기죠
저두 1사단 전역했는데요, 물론 근무도 임월교 초소에서 했습니다. 근무 해보신분들은 아시겟지만 상황발생시 제일 중요한 >>>누르고 던지고 쏴라 <<< 입니다.간첩이 강위로 아니 하천위로 부유했을때 확인한 결과 총에 맞은 흔적이 없었답니다. 사망원인은 장파열 수류탄에 의해서 사망했다는군요. 아직도 반구정에서 근무하던때가 생각이 나네요
글이란게 참 묘하지요
pulcci100 님~ 1개 소대 병력이 소대장 포함 31명 입니다
전시에 1기수의 소총탄을 지급받지요~ 1기수 실탇포 어깨에 둘어보셨습니까
얼마나 무겁 던가요? 105발씩 소대병력이 이 탄을 전부 소화해도 3,000발 정도 입니다,
1개 중대병력이 출동하여도 40.000발은 사용할수가 없습니다
군생활을 그쪽에서 하셨다니 동감은 하지만,너무 과장된 내용이 들어있네요.
참고로 저는 1979년 대암산침투 무장공비 작전에 실전 투입된 M60 사수 였습니다
10~26 터지면서,잔단 소탕 못하고 철수 했지만...
참고로 재미있는 무용담으로 듣고 가겠습니다..
pulcci100님, 파주사나이님, 무적 반갑습니다. 저보다 고참이신군요. 아! 김이식 이병 이제 이름이 기억 납니다. 아후 경계근무 투입시 "무적 3마리 잡자" 가 투입구호가 되었지요. master83님 - 사소한 것이지만 그때 40,000 사격 실제 입니다. 그당시 소대 인원이 36명 정도인것 같고 투입시 받은 105발만 사격을 하는것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기에 소대 탄약고를 열어 목재로 포장된 탄약 (200발 탄통 5개인가?)상자을 무제한적으로 공급이 되었고 종료후 탄피 반납도 없었다고 합니다.
ㅎㅎ 파주사니이님 부라보 계셧군요 전차리포대잇어는데요
방가워요 86년도 전역해어요 전 그리고 자대가기몃달 전에 이사건이일어나죠
위 내용 거의맞다고보고요 당시 엄청난 소총사격은 확실하고 간첩들은 소총에죽은것이아니고 수류탄에의한고막터지고 장파열로사망하것으로 암니다 그많은 소총사격을하엿어도 맞지않아 나중에 재실험해고요 실험결과 소총이 물속30센치 이상 통과를못해다나 머이런애기잇어죠 당시 엄청난 조명탄을 쏫아다는 선임병들애기들어고 이글보니 275포병생활하던 추억이 나는군요 참고로 여단장은투스타로 진급해고 경계근무잘한 사병덕에 별하나추가해더군요 ㅎㅎ
군복무중에 들은 101여단 임월교사건 뒷이야기...침투중인 무장공비를 사살한 공을 세운 두 사병에게...군지휘부가 소원을 한가지씩 말하라고 했다네요...이등병은 서울에 있는 모대학으로 편입을 시켜달라고해 편입이 이루었졌고...전역을 앞둔 사병은 "기차역에서 표을 찍는 역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군지휘부가 "무장공비를 때려잡은 용사가 역무원이 뭐냐"며 대기업에 취업을 알선했다고합니다...그러나 결국 회사에 적응을 못하고 몇달만에 나오자...또 대기업체 근무를 알선해주었는데 그곳에서도 얼마만에 사표를 쓰자...결국 지방 철도역 역무원으로 취업을 시켜주었다는 유명한 뒷이야기가 있습죠....진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댁같은 인터넷 캐찌질아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고 영웅대접받을 자격있는 사람들임. 그런 사람들에 대한 처우가 미흡하니 길거리에 나오게 된거지 민주화운동가들 보상받은 정도라도 대우를 해줬다면 뭐하러 나왔을까? 엄한 사람들 욕먹이지말고 군대 안갔으면 군대나 쳐가서 병역의무를 마치고 갔다왔으면 몸성히 갔다온거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하며 살아라
와~~ 나 여기서 군생활 했는데 이렇게 사진 보니 정말 오랜 만이네여. 아마 지금 비가 많이 와서 수문이 휘어져 있기도 하겠네여.. 정말 가보시면 섹터 정말 넓어서 관리하기 힘들었는데... 사목리, 반구정 쪽 그립구나 맨날 걸어 다녔는데 .............왜 난 간첩 못잡고 왔을까나 ㅋ미안 하다 부사수야 다시금 니가 생각나게 만드는 구나 ㅋ
황천(황천)국이란 옛부터 대정천왕이 찾고있던 호로족의 비밀지하기지로서 해인사의 서쪽으로 쭉 들어가면 황매산이 있지만 이상하게 매화는 없고 철쭉만 가득함, 주변에는 황강이 있음. 이 철쭉은 한자로 척촉, 한자를 풀이해 보면 [옛부터 정씨들이 서성거리던 곳의 꽃] 이란 뜻임. 정상은 키가 낮고 뿌리가 짧은 식물만 있어 대머리산 처럼 보임. 밑에 뭐가 있는 것임. 이해?
다니엘서에 남쪽은 이집트 북쪽은 시리아 라고 나와 있지만 시리아는 동쪽이며, 이내용에 나온 지하비밀기지가 바로 황천국임. 북한이 남쪽으로 지하터널을 뚫고 들어온 목적이 바로 이 황천국에 있는 것임.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발가락이 넷임. 그들의 발가락의 숫자는 444인 것임. 그들이 비빌기지와 신분관리의 허점이 필요한 것이며, 그들사이에 생긴 문화가 친족결혼임. 이해? 바로 예수의 집안인 것임. 고로 가족들이 서로 다른 성을 쓰기를 즐기는 것임. ^*^
>"In the City of Babylon there will be a great thunder,
>
>Two brothers torn apart by Chaos, while the fortress endures,
>
>the great leader will succumb,
>
>The third big war will begin when the big city of Babylon is burning"
>
>- Nostradamus 1654
여기도 황천국이 나와있는 것임.
북한 김정일 놈아! 매번 간첩들을 남한에 몰래 풀어놓다가 억울하게 개죽음(?)당하게 해놓고선, 말로만 지상락원이니 뭐니하면서, 여전히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 항상 1960년대에 머물러 놓는 놈아. 다른 인민들은 쫄쫄 굶겨놓고, 평양 인민들만 제 인민아냥 배불리 먹여논 김정일 놈아. 얼른 췌장염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7살때부터 술을 빨아온 후계자 김정운도 간경화로 일찍 등지길..... 그게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한민족의 안녕을 위해서 네가 다해야할 사명이다.
죄송한데요 - 원래 임진강 결사대는 9사단 백마부대이며 - 오두산전망대는 9사단 사단전망대 였지요 - 1982년 9사단 28연대 1대대와 1사단 1개연대 그리고 나머지 를 합쳐 101여단을 창설 - 그래서 101여단 병력이 백마신병교육대에서 위탁교육 받았지요 - 101여단은 2007년 12월 9사단 백마부대로 다시 편입 되었습니다.
저도 이 당시 방송을 봤던 기억이 나염. 뿔테 안경을 쓴 이병이었죠?
강에서 물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와서 (수중 침투 방지 철책을 자르느라고)
같이 있던 일병인가? 상병인가? 에게 말을 했으나
겁이 많은 고참은 처음엔 아니라고 부정했었져.
그리고 철책을 잘랐을때 철책 부순물이 떨어지면서
압력으로 인하여 물기둥이 일자 그제야 보고를 하죠.
그런데 소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간첩들이 그 지역을 벗어날 것을 우려한 겁없는 이병이
고참의 제지를 무시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합니다.
그러자 고참도 덩달아 총기를 발사하고요.
잠시 후에 소대원들이 도착하여 모두 강밑을 향하여 난사를 합니다.
후에 헬리콥터를 타고 간 휴가를 간 사병은 이등병이었는데 영웅이 되다시피했고
그 당시 같이 근무했던 고참이 안 나온것으로 보아 같이 휴가를 간 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정확하진 않지만 제 기억은 위와 같습니다.
근무서던 초소와 간첩을 발견한 곳이 조금 떨어져 있었고, 근무중에 소변을 보려고 늘상 소변보던 장소에서 소변을 보는 데 그 날따라 이상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되어 가만히 아래를 보니 간첩 서너명이 오줌을 그대로 맞고 있으면서 대화를 하는것을 보고 조용히 초소로 돌아 와서 후속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 임월교 담당이 101여단에서 1사단으로 넘어갔습니다. 1사단의 파워가 컸던거죠.
울프독님의 기술이 정확하다면, 시기적으로 무장간첨 사건은 별개의 것입니다.한강 하류로 침투한 무장간첩 건은 1979년에서 1981년 군복무 기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라 분명히 기억합니다.침투지점 4~5 키로미터 동쪽에 저희 부대가 있었고 한 밤중에 비상이 걸리고 난리도 아니었죠..통상 그렇듯이 무장간첩을 사살한 날은 잔뜩 흐린 날이었는데 건너편 김포엔 고성능의 탐조등 포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구름에 반사된 탐조등 빛에 그 간첨들이 발견되었습니다....간첩들로서는 지극히 운이 없었던 거죠...그 전 해, 몇 개팀인가 무장간첩들이 한반도 남쪽을 유린하고 북으로 도주한 적이 있었습니다...엄청남 병력과 예비군들이 동원되었고 만만찮은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던터라 졸병들이 무장간천 3명을 잡은 사건은 군으로서는 엄청난 홍보자원이었습니다.1 억 정도의 포상비에(?) 기업에서 주는 각 종 후원금, 상품 등..굉장했죠...가물거리기는한데 문산천 간첨 침투 사건은 제대 후에 들었는지 기억에 남아 있군요..
한 10년정도 전에 이야기인데요..전 부산사람이고 낮 2시쯤인가 부산에 자갈치시장 앞길을 걷고 있는데 왠 수상한 남자 2명이 저보고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하면서 밥을 사달라고 하는 겁니다..키는 둘다 165cm정도 되고,둘다 배낭을 매고 있었고,자기들은 지리산에서 왔다면서 밥을 사달라고 했습니다..말씨는 부산말씨는 아니고 윗쪽지방 말씨인데 정확히 어디말씬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돈이 없다고 하니까 짝 쬐려 보더군요..! 지리산에서 온사람들이 돈한푼없다는게 말도 안되고,말씨도 부산말씨가 아니고,하여튼 좀 수상했습니다..
정확한 사건 경위를 모르시네요! 저는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했던 사람인데요,
당시 간첩침투의 시기와 지역에 대한 사전 첩보를 입수하고 임월교 지역에 특별 집중 경계령을 내리고 없던 철책(물속에)을 설치하고 기다렸던 것이죠! 간첩이 침투하다가 기존에 없던 철책이 나와서 물 밖으로 나와 서로 의논하던중 발각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그냥 우리가 사전에 첩보를 입수해서 지키고있다가 잡았다고 발표하는 것과, 국군초병이
눈깔 부릅뜨고 지키고 있다가 발견하여 잡았다고 발표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국민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그렇게 발표하는 것입니다. 기관 전문 용어로 보안조치라고 하죠!
다대포 사건도 똑같이 사전에 첩보를 입수하여 지키고 있다가 잡았지만, 발표는 어덯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실겁니다.
생각이 나네요.그때가.상병때엿지요.밤에 자는데 실비상이라고 목진지 점령하러 갓지요.철책에서 해가뜰때까지 조명탄이 뜨고 비상 해제 하면서 간첩 3마리 잡앗다고 하더군요. 그 공로로 임이병은 헬기타고 광주 조선대학교까지 가서 환영 받앗고.. 간첩은 잡앗는데 시체에 총알 자국이 없어 나중에 부대에서 실험을 했는데 총알이 흐르는 물에는 비산을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수류탄 수압으로 두명 죽엇고 당시 철책근무 나갈때 수류탄을 두개씩 가지고 나갔던 생각이 나네요. (원래는 하나씩 가지고 )한명은 도주하다 소총소대 중대장님이 단정타고 들어가 골통에다 한방 ....그 중대장님 나중에 저희 지원중대장님으로 오셨죠.임이병이 처음 발견했고 지난일이기에 애기하지만 그때 오병장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철모 바닥에 깔고 고향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그당시 101여단 전체에 평일날 하루 휴일을 주었고 그날 개인당 통닭 한마리 맥주한명을 하사품으로 받고 하루 체육대회하면서 잘 놀앗지요.간첩잡고 얼마 지나서 다대포에서 갑첩을 생포하는 바람에 부대에서도 한마리 잡자는 구호가 생겻죠. 무적 한마리 잡자. 임이병은 1년포상 휴가
공동경비구역 근방에서 일어났던 북 침투조 3명과 조우했던일이 92년도인가 있었죠..
보통 비무장지내에는 램벨이라고 하나? 그런게 쭉 깔려 있습니다..
해마다 그걸 보수하러 나가기도 했어서 자세히 보면 풀처럼 만들어 놓은게 보일겁니다..
그게 사람이 건드는거랑 동물이 건드는거랑 차이가 나는데..
저희같은경우엔...페트롤 나가는 경로가 램벨이 많이 울리는곳으로 정해졌었죠..
보통 15명1개조로 나가게 되는데....낮에는 분대장책임하에....밤에는 소대장 책임하에 실행되었습니다..
92년경 새벽 작전수행중... 매복을 하고 있었더랬죠...
지금은 모르겠으나....그때는 서로를 오공줄이라고 하는줄로 끈으로 묶어서 서로의 위치를 파악했었죠... 물론 개인 야시경이 있긴했으나.. 청음초에 집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복은 보통 원형으로 많이 하긴했으나... 지역 특성상 반타원...즉.. 초생달처럼 한쪽방향...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매복시작 30분이나 지났을까...
서로의 몸을 묶은 오공줄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야시경으로 위치를 확인하니...매복 중간부분...분대장쪽이었고...
분대장의 손짓을 보니...손으로 전방을 가르키며... 괴물체가 접근중이라는 수신호를 하는거 본후... 숨을 죽이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죠..미세하게 나마...나뭇가지가 흔들리는것이 보였습니다... 잠시후...20여미터 전방에 북한 침투조로 보이는 3명이 낮은 자세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걸 확인하는 동시에 머리카락이 쭈삣서는걸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소대장의 외침이 들립니다..
" 이지역은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이다.. 무기를 버리고 일어나라 "
순간...침투조3명은 재빠르게...흩어서 엎드린다...
하지만...너무나도 매복 정면에 제대로 걸린 상황이라..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한 상황..
소대장의 외침은 3번 반복됐고..
마지막으로 열을 셋다..
10..
9...
8...
7...
6...
5...
4...
3...
2...
그순간... 쾅~~~~~~~~~!!!
그들은 투항하지 않고 갖고 있던 수류탄을 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날일 밝은후 시체를 확인하니...수류탄을 쥔 한쪽팔은 날라가서 형체가 없었고..
수류탄을 배에대고 있었는지...복부 부위가 아작이 난상태....
적이지만....
발각되면 자폭한다.. 이런 지시가 있었겠고...그걸 충실히 이행하는 북한군이라는걸
확인하게 되니..소름이 끼칠정도였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있으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겨울비, scjkkim, 짱님의 증언이 정확합니다. 101여단은 당시 임진강결사대로 불렸고, 경례구호와 정식부대명은 무적부대였지요. 저는 당시 14중대 출신인데 간첩소탕 후 지급되었던 통닭과 맥주가 생각나는군요. 101여단이 없어졌다니 아쉽고, 함께 고생했던 옛 전우들이 그립군요. 참 한 가지 부기하면 당시 선임하사님은 문산에서 한 잔 걸치고 귀대하다가 상황이 벌어지자 수류탄 하나를 까넣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한가지 사건을 두고도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어느 것을 봐도 실감나고 살 떨리는 순간들이었을 듯 합니다.
한가지, 남파 간첩들을 개구멍 드나드는 광견으로 비유하셨던데요, 문제는 남한에서도 수 많은 간첩들을 북쪽으로 보냈다는 점이죠. 북파요원들이 리무진 타고 당당하고 세련된 걸음으로 북에 들어갔을리는 만무하고, 결국 경계가 소홀한 경로를 통해서 몰래 들어가다가, 또한 적지 않게 목숨을 잃기도 했죠. 남쪽이든 북쪽이든, 우리가 통일을 희망하는 한민족인한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멍 드나드는 광견을 먼저 언급하신 것이 마치 70년대에 가르치던 늑대얼굴에 뿔달린 공산주의자식의 반공교육을 떠올리게 해서 씁슬했습니다.
임월교 사건당시에, 저는 101여단 포병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밤 저의 포반에서 임월교 상공으로 조명탄을 발사했습니다. 그래서 105mm 포 앞에 있던 식당의 유리창이 모조리 깨어졌습니다. 조명탄의 빈깡통이 문산지역에 떨어지구요... 최초에 발견한 초병이 수류탄을 던졌는데, 안전손잡이을 걸고 있는 안전고리(클립)을 제거하지 않고 안전핀만 제거하고 던져서 불발... 도착한 선임하사가 제대로 던져서 현장에서 2명을 사살..... 그 이후에 교육시간에는 수류탄 클립을 제거하는 교육이 있었으며, 역시 군대는 밥그릇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후 한명이 도망쳐서 보트로 추격해서 잡았다는 말이 전우신문에 났으나, 사실은 강변으로 기어오를 때, 아군이 사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일날과 다음날 까지 강안 근무지에서 쉴새없는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그후 그곳 보병이 저희 부대에 왔을 때, 자기는 60사수인데, 그날 저녁에 600발 정도 쐈다는 말을 했습니다. 헬기로 귀향하는 것도 보았고, 그날 어느 분 말씀대로 통닭도 먹었습니다.
그렇게 허술하게 사람들을 보내 죽게한 김일성부자 참 나빴다고밖에 할말이 없으면서 박정희는 또 어땠을까 어땠나하게 되는것으로 그렇게 비슷한 인간들이 그런 분위기를 굳힌 20여년이었던것으로 모두 다 물려서 관계복원을 해야하는 숙제가 우리한테 남겨진것으로 북힌시람들은 남한 사람들도 자기목숨들을 좀 소중히하고 아껴주었으면 하게된다. 우선 그래야 무모한 행동을 반성하여 책임추궁하면서 살아야 통일이 제대로 빨리되는것으로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머리좋은 남북한사람들이 이대로 반세기를 넘겼으니 부끄러운것으로
북한에 가 죽은 북파간첩들의 숫자가 훨씬 적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렇다는데 서로 경쟁햘 사안은 아니었던 휴전협정을 위반한 사례들로 남겨 그들 소수에 책임을 떠념겨야한다. 쌍룡자동차도 경영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으로 노동자들이 힘들게 된 부분이 클것으로 고통을 분담했다면 한다면 저렇게 사생결단않고 해법을 찾았을텐데 사람이니까 그랬을텐데..... 그런데 대부분 회사가 크건 작건 망하면 아니 기울면 그에 따라서 사원들이 고통을 분담하게 되지않았겠는가. 스스로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하고 무급으로 버티기도 하고 대우자동차는 그렇게 회생시킨 부분이 있었지않았던가. 빚내다가 월급주는 회사는 정말 웃겨서 말이 나오지않던데.............안재환도 마직막날전까지 5천만원 빚내다가 직원 월급도 주고 비용도 계산했다던데 그게 도무지이해가 안가는것으로 빼돌리지않는것을 알면 회사사정봐가면서 거취를 정하고 인내하면서 더 열심히 일할것같은데 ....
그런데 한국에서는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시절에는 간첩조작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여러차례 있었던것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소개되어있지않은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것으로 얼굴을 알아보지못하게 짓이겼다던가 하는 소문같은 이야기도 한마디 언급이 없으니 차라리 재미가 없는것같이 현실감이 떨어지는것같은데 그런 부분도 좀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대남방송 들으면서 성장하였지만 문산보다도 오히려 더 잘 들렸을수도 있게 제대로 남북으로 마주한 아주 가까운 동네랄 수도 있는것인데 .....
ㅎㅎㅎ 글쎄요. 간첩 조작사건이 많이 있었다고 하더구만요. 전두환씨가 스스로 대통령자리를 침탈하고 선서할 때 하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본인으은~~~ 절대 북한을 이용한 조작사건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어~~~...................그렇게 말했던가 아무튼, 박정희정권시절에 많은 조작사건들이 있었음을 은연중 밝힌바가 있습니다. 당시의 선서내용을 잘 살펴보삼..ㅎ...아무튼 극한 갈등외의 평화적인 방법이 있다면 좋을텐데... 워낙 호전적인 자들이라 그것이 잘 돼야말이지요. ... 에혀.
나 그때 83년 6얼 23일 제대했는데 제대 3일 남겨두고 개구리복 입고 쉬원한 목간에서 쉬고있는데 갑자기 새벽2시 비상걸렷어 (우리부대 조명탄 180발 발사 천지를 대낮같이 밝혔는데) 우리부대 근처 간첩3명 내려왔다 2명 잡고 1명 놓쳤슴 실탄 109발 들고 2틀간 수색 경계 했슴 그 당시 이러다 잘못하면 제대 이틀 남겨두고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하며 굉장히 긴장 하며 이틀간 밤새워 수색 경계 정찰 했는데 이틀후 6.22일 썰물에 떠내려같던 시신 발견 그 소대원 훈장받고 특진하고 헬기타고 휴가가고(그 부대 창설 1년 6개월 정도 된 특공여단 경사났지) 나는 그 다음날 개구리복입고 휘바람 불며 민통선을 걸어 내려와 버스타고 기차타고 집에왔슴. 가끔 생각난다 그 당시 긴장했던 것 나 솔직히 기관촐에 실탄36발 장전후 자동에 놓고 그리고 109발 어께 허리차고 내앞에 나타나 내가잡고 훈장받을까 생각은 않았슴. 그냥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에 돌아갈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했슴. 이곳 미국에서 가끔 아주 가끔 그얘기 함 처음으로 그당시 내용을 이곳 미국에서 접하고 기억나 몇자 적어봄 워싱턴의 날씨는 현재 꼭 초 가을 비슷하고 하늘을 보니 고향 생각이나네..
쥐새끼들이 호시탐탐 노려여..정신차려야되여..글고 클린톤이 무신 뒷담화를 했는지...
이거 대한민국 국민들 꼭 알아야 될 권리가 있어여..왜냐..대한민국의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나오니까..
문산천 ..위 사진 참 잘보았는데여..특히 5월 하순에서 8월말까지 특별히 경계를 강화해야..
쥐새끼들은 원래 빈구멍만 노리거든여..ㅎㅎ
음... 내 기억에는 결정적으로 간첩 잡는데 기여한 것은 김이병이고, 병장은 다리 초소에서 잠을 자다가 동초 서던 단기하사에게 김이병이 다리 아래 이상한 소리를 알린 후에야 일어나서 수류탄공격에 합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 내가 그 때 같은 여단에 근무하고 있었거든...
현장에서 즉사한 것은 침투조 2명이고, 줄을 끊고 달아난 것은 베테랑 안내요원이었는데, 통상 안내요원은 일정 선까지 침투에 성공하면 침투조보다 상당 부분 뒤에서 따라 왔기 때문에 집중적인 수류탄 세례에 의해서 심각한 내상은 입었겠지만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고. 도망친 안내요원을 잡기 위해 임진강에 이상한 부유물만 보이며 마구잡이로 사격을 했는데, 공식발표는 2,000발이지만 실제로는 수만발의 소총탄과 기관총탄을 쏟아부었었지. 군대의 공식기록은 사실은 별반 믿을 것이 못돼거든. 얼마나 많이 쏘았는지 실탄이 강물에 다 튀겨 장단반도 맡은편 타 부대에서 경계하던 철책이 다 끊어졌었지. 도망친 안내요원은 어느 총알에 맞아 죽었는지도 몰라.
100명이 수개의 조로 나뉘어서 작전을 수행한다면...
우리측의 사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할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북한의 게릴라전은 다수의 나라에서 인정하고 있고..
실제파견 교육을 받고 있지않습니까..
우리도 특수전 요원들이 있긴하나..수적으로 많이 밀린다는 말씀을 한것입니다..
마지막으로...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명칭은 카투사이구요...
흔히 카투사라고하면..전투력이 상당히 떨어지는자원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거구요....행정인원과 전투병력을 혼동하셔서 그럴겁니다..
많지는 않지만....경비대대급인원들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90년중반까지는 그랬는데...지금은 모르겠네요...
그리고 60년대면...알려지지않은 교전들이 상당히 많았다고합니다..
미군또한 많이 전사했죠...
사진 고증이 틀렸슴니다
간첩잡은 임월교는 노후로 부셔버리구
새로 만들었슴니다
올리신 사진은 새로 만든 임월교 구요
위치도 약 30-50m 정도 인가 이동 했슴니다
전에는 내포리방면 뚝방에 전공비가 있었는데
그것두 없애버린것 같구요 안보이네요
다리에서 옆에 보시면 다리있던 흔적이 잘 안보이지만 있슴니다
jsa203님. 동해안 잠수정 침투때 정말 100만 넘게 작전투입됐어요? 우리나라 전군 합쳐봐야 60만인데 육해공 전군 다투입돼고 예비군 40만명을 투입했군요. 그때 저는 강릉에 편성됐던 예비군이었고 동생은 인제에서 복무하던 현역이었는데 동생은 부대 경계병력으로 작전에 투입돼지 않았고 저도 동원 소집돼지 않아서 뉴스로만 상황을 보았는데 어디서 그 만은 병력을 투입했을까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에요. 그리고 공군,해군은 앞서는데 육군은 절대적으로 밀린다고요? 지금 병력숫자와 장비숫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엄청나게 딸리죠. 하지만 북한군 수많은 장비중 쓸만한 장비가 있다고 보세요? 대부분이 6.25때랑 비교해서 크게 나아진게 없는 장비들이고 그나마도 기름이 없어서 제대로 못 굴려요. 얼마전 어떤 군사전문가가 쓴 글을 봤는데 북한군은 지금으로선 전시 이동배치만 해도 보유하고 있는 유류가 바닥난다는 군요. 그러면 이동배치만 하고 전투에는 투입못하죠. 기름이 있어도 저런 장비들로는 선진화된 우리 장비들을 못 이깁니다. 그래서 미군이 없어도 북한 우리 못건드려요. 같이 죽자고 핵미사일 발사한다면 모를까.
대대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격연습 잘했다고 하셨습니다....사단까지 비상이 걸렸었어요....
일월교 분초소에 근무하면서 지금까지 잊혀지지않는 사연이 있습니다.문산여상에 다니는 고적대 학생이 있엇죠.이쁜 여학생이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일월교 앞에 문방구가 있었는데 아가씨 두분이 있었어요...그분들도 생각나네요....
김기님... 일시에 백만명이 작전수행을 한건 당연히 아니죠..
작전기간동안 총투입된 횟수인원을 말하는거겠죠.. 저도 자료를 읽고 말씀드린겁니다..
그리고.. 모든 전쟁은 육군이 투입되어야 끝을 볼수있습니다..그만큼 육군의 전력은 중요합니다... 단적으로 특수부대원의 수치로만봐도...10배가량 차이가 납니다..
북한군관련 책을 읽어보면 전체적인 무기가 낡은면은 있으나...6.25때 무기를 그대로 쓰는것이 아니라..계속 개량해서 쓰고 있습니다..그리고 무기생산또한 한 공장에서 다 만들수 있기에..굉장히 위협적이죠... 그리고 북한군은 전면전개시후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는 생각이기에 6개월동안 쓸 유류는 있다고 합니다..
전쟁발발시 핵과 미사일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북한 특수부대원 13만을 막을만한 전력이 없습니다..
적은 수십년동안 전쟁준비만 해왔습니다...
전쟁과 발발과 동시에 한반도는 피로 물들고 민주주의는 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과적으로 미군개입으로 인해 승리할수 있을지는 모르나..
대한민국은 없어지는거죠...
황장엽씨가 그랬다죠...북한의 핵이 무서운게 아니라 특수부대원들이 무섭다고...
특수부대원을 잡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전력이 투입되야하는데...그 숫자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전쟁억제력을 위해선 우리도 핵을 가져야하고...
미군전력철수를 대비해서 협상을통한 탄도미사일 거리제한과...전략적핵개발에 박차를 가해야한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