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꼽만큼의 옛 건물 자취는 남기지 않고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그 이름 하나만큼은 풍성하게 남겼던 옛 서대문의 사진이 그중에 있었던 것이다.
도성 한양에 개설된 네개의 대문중에서 제일 컸다고 하니 대단히 웅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사신들을 의식해서 그렇게 크게 짓지 않았나 하는 추리도 해본다.독립문 자리에 있었던 영은문도 있었으니 만큼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서대문은 1915년 일제가 마포로 가는 전차 선로를 까는데 방해가 된다고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진은 극소수만 전해온다. 내 평생 본 서대문 사진은 두서너장 밖에 안된듯하다.
전차가 통과하는 유일한 서대문 사진이다. 일제가 이 전차 철로를 복선으로 확장하면서 서대문을 없앴다. ------------------------------------------------ 이번에 후릭커즈에 올라온 사진은 그 질이 아주 깨끗했다.
다음은 후릭커즈에 올라온 사진이다. 현판이 안보인다.현판은 대문 밖에만 거는 것이다. 사진은 성안에서 찍은 것이다.
행군하고 있는 병사들은 구한국군이다. 발에 의식용 흰 각반을 하였다. 이화여고 쪽에서[남대문에 병영이 있었다.] 나와서 궁궐로 임무 교대를 하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깨에 담요를 맨 것을 보니 야간근무를 하고 다음날 교대하는 팀으로 보인다.
후릭커스의 서대문 사진. 성밖의 산을 보면 현재의 도로 진행 방향보다 약간 북쪽을 보고 서있던듯하다. 신식군대를 바라보는 성의 수문장이하 구식 군인들의 표정이 어쩐지 안 좋아 보인다.앞에 가는 두 사람은 양반계급이 아니라 중인계급 직업인들이다. -----------------------------------------
동대문- 흥인문 -------------------------- 귀한 사진을 본김에 서대문의 역사적 배경을 들여다보자
서대문은 이성계가 천도했을 때 건설한 한양의 여러 대문과 같이 건설되었다. 남대문 -숭례문 --------------- 그러나 풍수지리설때문에 1413년 폐쇄하고 사직 터널위에 서전문을 건설해서 썼으나 너무 가파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여론이 드세서 1422년 이 문을 헐고 폐쇄한 돈의문을 수리해서 다시 쓰게 되었다. 한북문 - 홍지문, 다른 북문인 숙정문과 자주 혼동된다. 숙정문이 북대문이었으나 풍수지리설때문에 폐쇄하고 쓰지 않았다. 숙종때 홍지문을 건설해서 북대문으로 사용하였다. --------------------------------------- 그 뒤 문루가 파괴되어 볼품없는 상태로 오래 지내오다가 숙종 1711년 크게 개축하였다.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달리 서대문은 문루가 단층이다.
세간에서 통상 서대문이라 불렀지만 돈의문이 정식 명칭이다.
[한양 구 서울처럼 유교의 교리에 충실하게 지어진 도시는 중국에서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유교의 다섯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한양의 심벌들인 4대문의 명명에 이용되었다.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한북문), 사대문에 덕목들을 다 쓰고 마지막 남은 신(信)은 대문이 아니라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에 붙여서 균형을 맞추었다.]
숙종때 새로 짓다시피했던 서대문은 한양거주 백성들은 새문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도 불렀다.
서대문의 다른 명칭인 '새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며 그 명칭을 '서대문'이라는 명칭과 함께 남겼다.
오늘날 신문로라는 거리 이름은 새문을 한자로 쓴것이다.
새문안이라는 대문 안쪽 명칭도 남겼다. 새문안 교회라는 역사깊은 신문로의 교회가 새문을 이어 받은 이름이다. 서대문이 있던 자리- 성균관 의대 부속병원의 길 건너편에서 본 모습. 길건너 왼쪽은 기상대로 가는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오른쪽은 경향신문 건물 앞. --------------------------------------------------------- 많은 분들이 서대문이 지금의 서대문 네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계실듯하다.그러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대문은 비스듬한 오르막 길의 위에 건축되었다.현재 서대문 네거리는 그런 지형이 아니다.
서대문은 지금 그 이름을 물려준 서대문구가 아니라 종로구 인 신문로 중간의 오르막 고개 마루에 있었다.
지금 구 문화방송 빌딩인 경향 신문사 바로 앞 신문로의 대로 중간에 있었다.문 양쪽은 동서쪽으로 가는 내리막길이다. 서대문이 있던 추정자리에서 비스듬히 본 경향신문 건물 - 구 문화 방송- --------------------------------------------
이곳은 북쪽에서 인왕산을 타고 내려오던 성벽이 지나가던 곳이었고 여기 서대문을 지난 성벽은 다시 서소문으로 이어졌다.
서대문 네거리- 일반인이 생각하는바와 달리 서대문은 이곳에 없었다. -----------------------------------------------
서대문 자리에서 본 길건너 기상대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옛날 성벽 안쪽에 났었던 길이 발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에서 이화여고로 향하는 길은 북쪽의 성벽길보다는 좀더 성안으로 들어와서 형성되어있다.
이것은 평지인 도성안이라 성벽을 따라 일찌감치 민가들이 들어섰었고 그 앞으로 도로가 있었기 때문인듯하다.
어렸을때 서대문 살았는데 그당시 기억으로 서대문 사거리에서도 문안에 다녀 온다고 하던 말이 많았다 문도 없는데 도데체 왜 문안 문안 하는지 몰랐는데 추정으론 즉 서대문 사거리도 문밖이었던것 기억이 잘 않나지만 당시 어른들께 들은기억도 같은데 서대문자리는 옛 MBC 약간위 고개마루부분으로 들은 기억이 나는것도 같다...사진 가져갑니다
60년대 그 당시 80대 이신 외 조부님께 이조 말 일제시대 해방후 어느시대가 살기종은 세상인지 여쭈어 본일이 있음니다.이조 말에는 땔감이 없어 산은 황폐되었고 남산에 있는 잔디 뿌리까지 다 파 갇다니, 지방에 따라 차이야 있겻지지만. 일본 사람이 들 와서 정치를 하니 산이 푸려려 졋다고 하셨스며 해방이 되니 또 산이 면 둥성이 되었다고 하셨음니다.
놀람 그 자체입니다.....각 산마다 산주 내지는 산지기가 있어서 조선 말에는 산림이 어느정도는 푸를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서대문 아치로 뵈는 북한산?이나 북문 배경의 산은 경악 자체입니다.....위에서 568님 께서 증언 하시다 시피 조선의 본격적인 근대화는 왜적들에 의해서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철도 거의 모든 근대국도 항만 공단 교육 의료 미신타파 전국 측량,,등등 당시 잠수함에 엘레베타 항공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던 왜적은 조선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영은문!! 이란 대표적 예가 말하듯 영원한 강대국으로 착각하는 중국파 쓰래기 양반놈들의 발호는 민중을 강탈해 제 배 채우기에 혈안이었죠....일제 땐 일본만이 젤.....지금은 미국만이 젤....그러다 보니 식민지 희생의 늪에서 허우적.....우쨌든.....바로 아는 게 민주주의의 힘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