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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경애드 (ttej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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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가지 주제
개설일 : 2005/01/12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중에서


시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마당이 있는 집 한켠에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가 서있는 풍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일상처럼 그리 낮 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매우 친숙한 나무여서 아마 은행나무를 모르는 분들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럼에도 오늘 굳이 은행나무를 꺼내는 것은 이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함입니다.

먼저 제가 은행나무를 만난 이야기부터 하나 들려드리지요. 옛날 우리집 마당에도 커다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어느 날 그 밑을 지나다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세히 보니 살구색의 쪼글쪼글한 열매가 떨어져 있는데 거기서 나는 냄새 같았습니다. 열매를 몇알 주워다가 수돗가에 가서 과육을 벗겨보았더니 그 속에 딱딱한 껍질이 나타나는데 전에 시장 같은 데서 본적이 있던 은행이었습니다.

“아, 이게 은행이구나!”

저는 그길로 은행나무 밑으로 가서 보이는 데로 그 열매를 주워서 고약한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만큼 했을까 한움쿰의 은행알을 챙기고 나서 수돗물에 손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은행의 껍질을 벗기던 제 손의 껍질이 온통 하얗게 일어나 벗겨져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집으로 들어가 로션과 바셀린도 발라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보내고 서야 ‘문둥이 같은’ 손은 비로소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은행의 과육 속에는 옻나무의 옻과 비슷한 물질과 은행산이 들어있는데 이들 물질이 피부염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의 기억 속에 이처럼 ‘냄새나고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있는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과에 속하는 큰키 떨기나무(낙엽 교목)입니다. 은행나무과에 속한다고 했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1속 1종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나무자체가 하나의 과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의 특징 중의 하나는 암수딴그루 나무라는 점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은행나무는 암나무 수나무가 따로 있어 암나무에만 열매가 열리고 수나무에는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암나무 혼자 있다고 열매가 열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가까운 거리에 반드시 수나무가 있어 꽃가루를 날려줘야 암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일정기간 커서 열매가 맺기 전까지는 확실히 암수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옛날 사람도 이를 궁금하게 여겼던지 문헌에 의하면 은행 열매 중 두 줄난 종자를 심으면 암나무가 되고 세 줄난 종자를 심으면 수나무가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아직 없다고 합니다. 예전 사람들에겐 아무래도 열매 맺는 암나무가 더 가치 있었던 듯 지금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는 대부분 암나무라고 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그래서 ‘천대받던’ 수나무가 필요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최근 들어 은행나무가 공해에 강한 수종으로 알려지고 가로수로 각광받게 되면서입니다. 냄새나는 은행열매가 길에 떨어져 썩으면 퍽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은행나무 수형을 보고 암수를 구분해서 심기도 하는데 수형이 펑퍼짐하고 가지가 안쪽으로 휘어진 것은 대개 암나무이고 수나무는 이와 반대로 날씬하고 가지가 곧게 뻗는 것이 보통인데 이렇게 구별할 수 있는 것도 나무가 어느 정도 큰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어서 어려서부터 꼭 암수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는 종자 대신 꺾꽂이(삽목)의 방법으로 증식시킨다고 합니다.

은행나무를 흔히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모순 어법과 같은 이 말이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은행나무와 같이 살았던 동식물이 모두 화석으로만 발견되는데 반해 은행나무는 화석 속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은행나무는 고생대, 그러니까 공룡이 살기 훨씬 전부터 세상에 존재했으며 중생대에 번성하다가 빙하기를 여러 번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렇게 끈질긴 생명력 덕분일까요? 우리나라 각지에는 수령이 몇백년씩 된 은행나무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나무는 수령1100년으로 추정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로 알려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여기에 꽂은 지팡이가 싹이 터서 자란 것이라는 이 나무의 내력에 대해서 몇 번 들은 적이 있지만 실재로 가서 보게 된 것은 대학 때 학술답사 차 용문산에 갔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커다란 나무 앞에 서면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지는 바, 낯선 곳을 지나다가 이따금씩 만나게 되는 수령 2~300년 정도의 정자나무를 보고도 감탄하던 저는, 과연 1000년이 넘은 나무는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얼마나 거대할까 생각하며 내심 기대를 가지고 가본 용문사 은행나무 앞에서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지요. 나무의 둥치만 굵을 뿐 1000년을 살아온 나무로서의 기품이랄까 모양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나무는 정말 ‘못생긴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본 지 한참 후 저는 책을 읽다가 용문사에서 본 그 은행나무를 떠올렸습니다.

중국의 큰 사상가 장자에게 한 선비가 찾아왔다.
이 선비는 장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자의 사상이 크고 높은 줄은 알겠지만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비가 장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크고 높지만 쓸모가 없어요.
마치 저 앞에 있는 나무 같아요.

저 앞의 못생긴 나무는 크긴 하지만 온통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여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거든요." 장자가 대답했다.
"거꾸로 생각해 보게. 그 나무가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오히려 목수들한테 잘리지도 않고 그토록 오래 살아 큰 나무가 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쓸모가 없는 건 없는 거죠." "왜 쓸모가 없나? 햇빛이 쨍쨍한 날 그 나무의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쉴 수 있는데….

" 장자, <쓸모없는 나무이야기> 中에서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킵니다!

yengts 2009.09.26  07:29

정말 좋은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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