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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7/11
 




[첫 번째 편지]


I

 

술마신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지하철 5호선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빈 자리에 앉기 위해 잠깐 생기가 엿보이던 사람들의 얼굴은 다시 굳어지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자발적인 가사(暇死) 상태에 빠져든다.


깊은 우물 속에 가라앉은 돌맹이 같은 얼굴, 얼굴들,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왕십리역에서 내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번갈아 오르내린 후 기어이 어둠 속으로 빨려든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갑자기 내 자신의 삶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전철에서 내려 영화제목 ‘트레인 스포팅’을 떠오르게 하는 고가 전철 밑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철공소를 지나가야만 파견사무실이 있다.  나는 매번 그 앞을 지날때마다 쓸쓸한 두려움을 느낀다.


보행에 불편을 주는, 인도까지 나와있는 철물들을 피해가면서도 항의 한 번 못했다. 
항의는 커녕 그들과 눈 한번 제대로 못 맞추고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 까닭은 그들의 팔둑의 문신이나 담뱃불로 지진 자국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세상을 닮은 그들의 황무지 같은 얼굴표정때문이다.

 

출근시간을 조금 앞당기기 시작한 지난 해 여름부터 아침마다 마주치는 여자가 있다. 촌스러운 머리모양과 세련되지 못한 짙은 화장,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치마와 자전거, 그리고 자전거 바구니에 가득 담긴 프라스틱 보리차 병들.


그녀는 20대 중반쯤으로 선정적인 웃음과 차가운 보리차병을 문신과 담뱃불로 지진 팔둑의 사내들에게 건네고 사내들은 짖궂은 농짓거리와 빈 플라스틱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로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뒤쪽의 사내들을 향해 흔들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으며 문신의 사내들은 전과는 달리 기분좋은 미소로 일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에게 매료당했다.

 

그녀는 커피나 보리차만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선정적이기는 하나 친근한 삶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II


한낮이었다.그리고 머리위의 태양은 발밑의 아스팔트를 흐물거리게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울역 광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있었으며 나는 그때 그곳에 있었다.


내가 그때 그곳에서 본 것은 경이로운 충격이었다.


두 팔을 잃은 사람이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어진 지게로 업고 있었다.


두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었다.


완벽한 두 다리와 양팔이 그때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자세히 보지않으면 그들은 잃은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월남전이 한창 치열했던 때로 그들이 월남에서 부상당한 전우라는 것을 업힌 사람의 혀꼬부라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랑스런(?) 상이용사인 것이다.


그들의 두 팔중 왼쪽 손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스테인레스 스틸의 손,


그 갈꾸리 손에는 껌이 끼워져 있었고 그때 나는 껌을 팔아주고 싶었지만 몹시 겁을 먹고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도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내겐 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른들에게만 껌을 팔았다.


나는 그때(이제와서 생각이지만) 인간의 사지, 아니 모든 육체가 도구였다는 것을 알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생명이 육체의 도구 속에 싸여있는 인간의 모든 외모가 생명의 수단이 되는 도구의 모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의 목격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의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때의 감동을 대학시절에 작품(?)으로 나타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신체장애자의 복지회관 설계안]이 그것이다.

 

다리를 잃은 사람과 팔을 잃은 사람의 결합처럼 부분적으로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아서 서로 보완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축물 (휠췌어에 의지하는 하지장애자와 시각장애자와의 상호보완하는)을 설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의도를 건축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결합보다도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난자질당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건축공간이 사람을 위한다는 것이 여러가지 의미에서 서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것으로 대한민국건축전에서 입상까지 했지만 내가 설계한 그것은 ‘괴물’, 바로 그것이었다. 

 

 


III

 

지난 주 토요일 늦은 오후,

인사동을 지나다가 밀란 쿤데라의 ‘불멸’를 연상케하는 (쿤데라의 소설 ‘불멸’후반부에 주차차량들의 타이어를 상습적으로 펑크내고 다니는 대학교수가 철학적으로 묘사되어있음) 전시포스터를 보고 인데코 갤러리에 들렀다가 깜짝놀랐다. 


도취로서 이해되는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그곳에는 틀 안에 사로잡힌 그리하여 ‘박제된 공상’이 있었다.


무명(?)의 청년작가 j의 첫 번째 개인전인 것이다.


그녀의 그림들은 로고스의 암호를 해독하려는 조광호의 예술세계와 닮아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색채는 밝고 가벼우나 내용은 다소 어둡고 무거웠다.


깊은 공허감, 심리적인 불안과 정신적 분열 그리고 추락의 공포감과 같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영상들로 가득차 있었다.


손에 잡힐 것 같은 비합리적인 영상들은 합리적인 맥락이 아니라, 애매한 초현실적 상태에서 제멋대로의 상상의 날개를 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관객을 기만하지않는 순수함이 배어 있다.


또한 그녀는 세기말의  혼돈속에서도 결코 꿈을 잃지않고 있다.  갇혀진 자아에도 불구하고  비상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기고 있으며 그림들마다 언뜻 무한한 자유가 엿보인다.


나는 그녀에게 매료당했다.


그녀는 현실의 우울함을 시각이 빚어내는 놀라운 이미지와 환상으로 뒤섞고 있으며 꿈과 현실, 의식과 잠재의식, 정상과 비정상간의 혼돈을 강한 이미지로 가식없이 표현함으로써 아직도 소진되지 않은 순수미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그녀의 첫번째 개인전을 관람한 지난 토요일 오후부터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러한 느낌을 무어라 말을 할까, 그만 둘까.

말을 할까, 그만 둘까. 몇 날을 망설였다.

 

 

처음의 개인전을 이와같이 발가벗겨진 채로 내보여 준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주제넘은 얘기이나 더욱 정진하여 창작활동에 큰 결실을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999. 04. 13.





[두번째 편지]

*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군인은 어이없게도 짜장면 생각을 한다. 이번 주말에 외박을 나가면 가장 먼저 짜장면을 먹어야 겠다고. 그것도 곱배기로 먹어야 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아직 보초 교대시간이 2시간이나 남아 있음을 확인한 군인은 또다시 계획한다. 
 ----- 그 다음엔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나 명륜동이나 신촌의 그 술집에서 꼼장어나 닭똥집을 안주로 소주를 마셔야 겠다고, 소주를 마시며 대학 다닐 때처럼 밤새도록 개똥철학이나 얘기해야겠다고.

 

그러나 군인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 ‘세검정 화실’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니 그 ‘세검정 화실’은 생각조차 나지않게 기억 속에서 지워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

 

21년전, 나는 신촌시장 골목의 어느 조그만 술집에서 난생 처음 사랑한 여자와 참담한 기분으로 술을 마셨다. 사랑하는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지만 희망없는 사랑이었고, 나는 원하지도 않는 전공의 학과를 다니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절망하고 있었다.


전공서적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싸구려 안주를 시켜놓고 술을 마시며 엉엉 울고 싶었다. 
그저 사는 게 구차하고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슬픔이니, 서러움이니, 초라함이니하는 어두운 빛깔의 감정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두서없이 가슴 저 밑바닥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밀려들었다.


그 무렵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선 심심치 않게 허무와 자기 파괴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 어두운 시절이 지나고 대학을 세번이나 옮기며 7년만에 기어이(?) 졸업했다. 
처음 사랑한 여자와는 희망없이 7년을 끌다가 세검정 그녀의 작업실에서 헤어졌다. 


나에게 남은 것은 싸늘히 식고 황폐해 진 엘리엇의 ‘황무지’같은 정신 뿐이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것들로 가득찬 것이 세상이었다. 

     

 


*

 

3공병대 건설공병으로 근무하던 군인은 술취한 고참병으로부터, 자기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심하게 구타를 당하여 흉골 골절로 피를 토하며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병원 생활이 익숙해 질 무렵부터 군인은 다른 사람들은 다들 꺼리는 정신병동의 K상병, P일병과 친하게 지냈다. 같이 바둑도 두고, 술도 마시고, 책도 서로 돌려가며 읽었다.


정신병자 딱지가 붙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처음에는 꺼름직했지만  3~4살 어린 그들은 군인을 친형처럼 따랐다. 
가끔 기이한 행동으로 군인을 당혹케 했지만 군인은 그들을 정상인처럼 대하며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얼마후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정신질환으로 더 이상 군생활을 할 수 없다는 군의관의 판정을 받고 의병제대를 하게되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제대하면서 한결같이 군인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형, 내가 진짜 미친 것 같애? 나는 멀쩡하다고! 형하고 헤어지는 건 섭섭하지만 나가서 편지 할께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군인은 정신과 군의관을 찾아가 따졌다.

도대체 멀쩡한 애들을 정신병자로 만들어 제대시키면 그애들의 장래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거냐고.


군의관은 군인을 의자에 앉히고 차분히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친 척하고 싶을 때가 있다.  정상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판단 기준은 미친 척하고 싶을 때 미친 척하는 사람과 미친 척하지 못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나가서 편지하겠다던 그들은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

 

사무실 책장 유리에 붙여놓은 전시포스터, ‘오후2시경’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혼자 게면적게 웃곤한다. 또 ‘오후2시경’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과 이병주의 ‘철학적 살인’ 그리고 정신과 군의관의 ‘그 얘기’를 한꺼번에 떠올리게 한다.

 

이병주의 단편소설 ‘철학적 살인’의 주인공은 자신의 철학에 근거하여 살인까지 하지만 결국 “인간이란 이성이나 논리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보다 감성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대목이 내가 가끔 미친 척하고 싶어하는 상상을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되곤 한다.

 

오후 2시경(주차된 자동차를 송곳으로 긁고있는 장면의 그림)’은 다소 자극적이면서도 뭔가 후련한 느낌을 단순한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주차차량을 긁고있는 송곳을 잡은 사람의 하체가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상관없이 실행되지 않은 상상속의 행위임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나를 매료시키고 있으며 양식있는 화가로의 가능성을 짐작케하는 것이다.      

 

 

 

 

*

 

수도통합병원에서 퇴원한 군인은 3공병대로 원대복귀하였으며 그 前처럼 집합과 구타속에서 매일밤 보초를 서면서 외박을 꿈꾸며, 휴가를 꿈꾸며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외박을 나갈 때마다 술에 취해 밤늦게 집에 갔다가, 다음 날 늦게 일어나 허겁지겁 귀대하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그날도 어김없이 밤늦게 술에 취해 집으로 향하는 택시안에서 군인은 ‘세검정 화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차를 세웠다.


화실문은 잠기지않아 그냥 열렸고 수년간 익숙하게 오르내리던 작업실계단을 뛰어 올라간 군인은 당황했다. 
고호, 피카소, 달리, 프리다 칼로와 르 코르뷔제를 꿈꾸며 작업실을 함께 사용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낯선 여자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군인은 얼떨결에 자기가 그 화실의 주인인양 낯선 여자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놀란 눈을 잠시 껌뻑이던 그녀는 군인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전에 화실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 얼마 전부터 자신이 이 화실을 사용하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군인이 예전에 사용하던 소형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잔을 권했다. 
야간 통행금지로 집에 갈 수도 없게 된 군인은 밤새도록 그녀와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던 소주를 모두 비웠다.

                                                  ........계속



[두번째 편지 2]



*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또한 같은 시대에 속한 작가들일지라도 작가마다 그 대답은 다르다.

 그러나 예술이 인간의 감정이나 지각을 통해 인식되는 세계의 모습에 대한 인간의 반성을 감각적으로 혹은 형상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관계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공통점으로 남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인간활동의 특수한 영역이고 자기 목적적인 활동이라 생각된다.  

 

 몇해전 겨울, 나는 경주의 힐튼호텔에 묵으며 선재미술관에서 ‘페르난도 보테로’를 관람했다.

 그의 기법은 숙련되어 있지만 형상들은 서투름으로 위장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전체의 이미지를 느낀다는 점에 있어서는 알기 쉽지만 색채의 유희와 단계들의 변이, 거기에 퍼져있는 상징들을 약간이라도 분석하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복잡하고 교양이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묘사로 친숙함, 어색함과 동시에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나는 그때, 그의 작품을 형사 콜롬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그는 뒤샹 이래로 회화, 심지어 조각까지 죽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회화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페르난도 보테로, 모나리자, 1977]


*

 

하늘이 깨지고 산산이 조각나 군인의 철모위로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은 아직 술이 덜 깨어 몽롱한 상태에서 야간행군을 하는 군인의 발목을 지우고,  앞에 바라 뵈는 거대한 산을 지우고,  26세의 군인의 젊음을 지우고 있었다. 


매일 삼사십 킬로미터의 행군 끝에 숙영지를 옮기는 혹한기 훈련기간내내 눈이 내렸다.


지칠 대로 지친 군인은 훈련 마지막 날 밤, 차디찬 참호 속에서 라이타 불에 비추어 편지를 읽었다.  저녁 식사때 부식지원차량을 타고 온 인사계 선임하사로 부터 건네받은 세검정에서 온 편지였다.

 

戰場(?)에서 받은 여자의 편지는 하나의 감동이었다.

 

편지는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 兄이라 稱해야겠다”고 시작되어 尹東柱의 詩 ’사랑스런 追憶’으로 끝냈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 ---- 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22년전, 대학입시에서  내가 원하지 않은 대학에 합격했다.

사실 그 시절의 나는 삶 자체를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수할 생각도 없이 데모 구경하는 재미로 학교에 나갔다.


그 무렵, 나는 ‘알베르 까뮈’에 심취하여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가지려고 노력했다.


데모구경하면서 몇 달을 무의미하게 보내던 어느 날, 최루탄과 데모진압대에 쫓겨 홍대앞까지 갔다가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살던 형의 친구가 하는 화실에 올라갔다.


마침 그 형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는 내가 들어간 것도 모른 채 그림그리는 데만 열중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의 그림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형이 고등학교때(나는 중학교때), 매년 성탄절이 임박해서, 친형도 나가고 없는 우리집에 와서는 그리스마스 카드를 수십장씩 그리곤 하던 생각을 했다. (아마 그 카드들은 여학교앞에 펼쳐놓고 팔았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물을 떠다주며 그림 그리는데 심부름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보고 ‘그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자신의 발가락 사이에 피던 담배를 끼워놓고 그림을 그리다가 담배가 다 타들어가 발가락을 불에 데여서야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을 의식할 정도로 몰입할 수 있는 일, 그림그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한 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불연듯 하였다.

                                                    ......계속



                                                 [두번째 편지 3]

*

 

1984年初,  제대한 군인은 전에 다니던 건설회사에 복직을 하여 곧바로 사우디로 파견되었다.

28명의 노무자를 인솔(?)하고 제다공항에 내린 군인은 헤어 드라이기를 코에다 대는 듯한 그곳의 기후에 기가 질렸다. 


기가 질린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설계기사’사령장을 받고 간 군인에게 현장소장은 자신의 조카를 현장설계사무실에 배치한 채 그를 사무실 밖으로 내몰았다.


군인은 자신의 적성과 경력등을 이유로 귀국하는 날까지 현장소장에게 항의했으나 결국 7개월 만에 ‘현지부적격자’라는 도장이 찍혀 비행기에 올랐다.


군인은 3공병대보다 더 무식한(?) 그곳 현장에 아무 미련이 없었다. 다만 친 동생처럼 대해주던 몇몇 노무자들과는 헤어지기 섭섭했다.

 

군인이 제대하기 2~3개월 전에 파리8대학으로 유학간 세검정 그녀를 만나기 위해 군인은 파리를 경유했다.


그러나 결국 군인은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대학기숙사에 있던 그녀는 얼마 전 아파트를 얻어 나갔으며 학교기숙사에서는 그 아파트가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침 또 방학이라 군인은 그녀가 파리에 있는 지, 서울에 있는 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3일간 홀로 파리시내를 헤매던 군인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 화가가 되지않은 게 천만다행이다”라고.  




*

 

나는 家出했다. 아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듬해, 미대에 합격한 직후, 집에서 좇겨났다.


그 형의 화실에 기거하며 미대에 입학한 나는 새로운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내가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그림을 좋아하게 된 까닭은 똑같은 대상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이다.  이 발견은 적어도 내게는 엄청난 세계의 발견에 속했다.


이러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난, 그리고 같이 미대에 입학한 애들에의 환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의 가난이라고 해봐야 다음학기 등록금이나 당장 오늘 저녁끼니 걱정 정도였지만 같은 과 애들에게서 느낀 환멸이란 철저한 쟁이기질도 없는 애들과 함께 가출까지해서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해 가을, 나는 화실로 찾아오신 아버지와 난생처음 술집에 마주앉았다. 나는 그때 아버지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요약하면  ‘당신은 내가 그림그리는 것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당신께서 가진 돈이 많아 내가 평생토록 먹고사는 데 지장없을 정도로 해줄 수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게 놔두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림만 그려가지고는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서양철학에 보면 8대예술중 건축이 한 가운데 위치한다. 내가 정 그림을 그리고싶다면 당신이 보시기에 내 적성은 건축쪽이 더 맞는 것 같다.(그 때 중동건설붐으로 우리나라 건축경기가 가장 호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 잘 생각해보고 집에 들어와 다시 의논하자’라고 나를 설득하셨다.

 

나는 한 달정도 가슴앓이하다가 첫 눈오는 날, 짐을 꾸려 오랫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먼저 다니던 대학에 복학했다가 그 이듬해에 건축과로 편입학했다.

 

 

*

 

모르는 거리의 모르는 헤메임, 날개죽지 찢기운 채 그리하여 군인은 돌아왔다.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리는 기분으로 다니던 건설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설계사무실에 새로이 취직했다.  그러나 급여가 건설회사의 절반도 되지않아 가난한 군인은 설계사무실을 계속해서 다닐 수 없었다.   

 

건설회사에 또다시 취직했으나 그때는 이미 건설경기가 하향 길에 접어든 때라 필리핀등 동남아시아에 파견나갔던 직원들과 함께 군인은 입사와 동시에 대기발령으로 출근하면 책상에 앉아 신문보다가 하품하다가 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마침 같은 회사에 있던 분이 그룹사 계열 보험회사 인사담당임원으로 영전되면서 군인에게 같이 갈 것을 권유했다.


군인은 망설였다.


건축기사가 보험회사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내 것을 버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아 일주일 휴가를 얻어 설악산에 갔다. (남의 것이나 새것을 얻는다는 것은 기존의 내 것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청봉에 오르다가 군인은 사이비 도사같은 스님을 만났다.

고목의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스님은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군인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넓은 바다 한 가운데 가랑잎 하나 떠 있거늘, 그게 이리 쓸린 들 저리 쓸린 들 무슨 상관있으리오?”

  
군인은 놀란 눈으로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다.

  
“넓은 바다 한 가운데 가랑잎 하나 떠 있거늘, 그게 이리 쓸린 들 저리 쓸린 들 무슨 상관있겠냔 말이오.”

  
군인은 두 말없이 돌아서 서울로 왔다.

  
그리고 보험회사로 간 그 분을 따라 보험회사로 자리를 옮겨 올해로 15년째 자동차보상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박제된 공상]의 전시포스터(오후 2시경)를 우연히 보게 된 군인은 깜짝놀랐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결재하는 자동차보상서류에 한,두건씩은 꼭 끼여있는 ‘가해자 일체불상의  주차차량 흠집사고’가 작품으로 전시된 것이다.

 

 

*

 

‘남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이니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 말 한마디를 횡설수설해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라더니 내가 J畵伯의 편지를 받고 내가 왜 그림에 애착을 갖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이 정말 횡설수설하고 만 느낌입니다.

 

그리고 덕분에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모자이크된 나의 정체성을 다시한번 정리할 기회가 되어 기뻤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1999. 05. 10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세번째 편지]

 

미모의 여인으로 부터 편지를 받는다는 것은 놀라움을 동반한 기쁨이다.

그것도 답신이 필요없는 넋두리에 대한 답장은 하나의 감동이다.

 

얼마 전, ‘테마사진여행(사진찍는 사람들끼리 테마를 정해 사진여행을 하는 모임)’을 따라 태안반도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는 여전히 좋았다. 오랫만에 떠난 여행이라 더욱 그랬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강한 NOSTALGIA를 느끼곤 한다.


여행을 떠나보면 안다. 우리가 얼마나 삭막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를.......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실로 3,4개월 만인데도 물리적으로 바깥을 흐르는 시간과 精神으로 內部를 흐르는 시간과에는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마음속에도 外彼와 ‘안’이 있어 그 바깥에서 수많은 풍랑을 겪고 새로운 것을 생각했으면서도 ‘안’에서는 ‘뿌리’를 바꾸지 않는 느낌...


人間에게 있어 ‘時間’이라는 것과 ‘空間’이라는 것의 意味를 생각하게 합니다. 

 

검게 그을린 팔을 걷어붙이고 PC방 내부벽화작업을 하는 모습이나 한여름에 도서관 열람실에서 분주하게 논문준비를 하는 모습은 속세에 찌들어 축처진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귀여운 모습이 담긴 유효기간이 지난(?)엽서, 특히 삼계탕과 보신탕은  압권이었습니다.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의 기획전에 참가하게 되었다니 기쁘고, 반갑고 그리고 정말 축하합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캔버스에 유화, 165*119CM]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화, 190*130CM]
 [마네는 티치아노의 유명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주제로 사용하면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창녀 올랭피아를 그려넣고 그 옆에 흑인 가정부를 등장시겼다]





 [장 미셀 바스키아, 무제(올랭피아에서 하녀를 중심으로), 1982, 캔버스에 콜라주, 아크릴, 흑연, 유채,  76*123CM]
 


몇년 전, 사간동 갤러리현대(아니면 금호미술관)에서 그 유명한 바스키아의 그림을 실제로는 처음 보았다.


파리나 뉴욕의 지하철역 낙서같은 그의 그림에서 사실 그 어떤 감동도 받지 못했지만 모더니즘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주제로 그린 ‘올랭피아의 사분의 삼에서 하인을 뺀 것’과 ‘올랭피아에서 하녀를 중심으로’의 두 작품에서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네가 ‘올랭피아’에서 티치안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주제로 사용하면서 비너스 대신 창녀 올랭피아를 그려 넣었다면 바스키아는 마네의 ‘올랭피아’가 흑인을 하녀로 등장시킨 것에 주목하여 흑인여자를 주제로 그리면서 DETAIL OF MAID FROM “OLYMPIA”라는 문구를 삽입시킨 것이다.


그 두 그림들을 보면 그가 마네의 그림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으며  ‘나는 검은 얼굴의 올랭피아를 좋아한다’의 래드 리버스보다 한 수 위임을 실감케 한다.

 

 

 나는 가끔 시간이 날때마다 새로운 전시를 관람하기위해 사무실 직원들에게 같이 갈 것을 권하면 하나같이 NO!하며 ‘그림을 잘 몰라서’라고 덧붙이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씁쓸하게 웃지않을 수 없다.


사실 현대 미술은 미리 여러 페이지에 이르는 팸플릿을 공부하지 않고는 전시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J畵伯이 보내준 엽서에 실린 바스키아의 사진를 보고 누군지 알아보거나 심지어는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수십명의 같은 사무실 직원중에 단 한사람도 없다. 


이렇듯 현대 미술이 일반인들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는 내용도 없이 얄팍한 효과만을 노려 대중을 기만하는 작가나 이를 부추기는 평론가들에게 있다고 본다. 


물론 예술을 특별한 사람들의 특수한 영역으로 생각하여 이해해 주는 자기네들끼리의 특수 목적적인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할 얘기가 없다.


그러나 존재는 항상 상황과 함께 실존적 현실을 수반한다.  존재가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상황 또한 존재를 규제하는 것이다.

 

미술평론을 하는 김광우氏는 “나는 예술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라면 그것은 예술가가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라고까지 극단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이는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의 에프라임 키숀과 脈을 같이한다.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위의 두 사람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양심은 있지만 의식이 없거나 양식은 있으나 양심이 없는 작품들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진정한 미술인은 ‘의식을 가진 기술자’이어야 하며, 그리고 ‘양심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끊임없는 변화와 모색’으로 새롭게 창작하려는 예술가의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겁하거나 무지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임)

 



[앙리 마티스,댄스,1910, 캔버스에 유화, 258*390Cm] 


몇년 전, 나는 그전까지 별로 좋아하지 않던 HENRI MATISSE의 화집을
뒤적이다가 깜짝 놀랄만한 문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면 비겁하게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는 내 생활신조가 되었으며 세상 모든 사람이 이렇게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세상 모든 것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JEAN MICHEL BASQUIAT의 작업에 대해 얘기를 한다는 것이 엉뚱하게 비약된 느낌입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운이 함께하여 하는 일 모두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1999.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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