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연무대에 잠시 머문 후, 우리는 다음 목적지 융 · 건릉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융릉은 수원에서 오산 방향(1번 국도)으로 버스로 30분 남짓 가면 된다. 이번 역사 탐방의 주제가 '정조의 꿈과 효심'이다. 그래서 먼저 정조의 꿈이 담긴 수원 화성을 탐방하였고, 이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깃든 융릉과 정조의 못다 이룬 꿈도 함께 묻힌 건릉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융 · 건릉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끊고 올라가다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이다. 어느 쪽을 먼저 가는 것이 좋을까? 물론 먼저 조성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으로 먼저 가는 것이 좋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애달픈 마음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융릉으로 가는 길에는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도 정조의 효심이 깃들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해, 융릉 주변에 심은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먹는 것을 보고, 정조는 손수 송충이를 잡아 입으로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어찌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먹느냐?"하고 꾸짖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헌경왕후 홍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즉위 후,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고 하였다가, 그를 장조로 추존한 후 능호를 융릉이라 하였다. 그래서 융릉은 능 조영에 정성을 들인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융릉을 다 둘러본 후에는 다시 입구쪽으로 돌아가지 말고 서쪽 언덕길을 따라 건릉으로 가면 된다. 입구의 안내도를 미리 보면 도움이 된다. 두 능 사이는 어는 정도 거리가 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를 갖고 둘러보는 것이 좋다.
융릉은 합장릉으로 동 · 서 · 북 3면에 곡장을 두루고 봉분은 모란과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다. 봉분 바깥으로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가각 2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游石,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제향祭享을 지내는 丁자 모양을 한 정자각을 비롯한 부속시설이 있다. 신문神門인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로 구분하였고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을 깔았다.
건릉은 정조(1776~1800 재위, 1752~1800)와 효의왕후 김씨가 묻힌 곳으로 정조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곁 가까운 언덕에 묻혔다. 건릉도 합장릉으로 융릉의 예를 따랐으나 곡장에 병풍석을 두루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아버지 능보다는 조금이라도 들 치장을 함으로써 정조의 효심을 반영한 배려라 할 수 있겠다. 정조는 재위 기간 학문적 소양에 터전한 적극적인 문화 정책으로 문화적인 황금 시대를 이루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조선을 개혁하려는 그의 꿈과 조선의 미래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묻히고 말았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은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 융릉 · 건릉 입구에 있는 고목 은행나무이다.
 ▲ 매표소 앞 융릉 · 건릉에 대한 설명과 안내도이다.
 ▲ 융릉으로 가는 길, 솔숲에서 문화해설사님의 안내를 받고 있다. 수원화성에서도 문화해설사가 계셨지만, 융릉 · 건릉에서 봉사하는 해설사 분이 훨씬 정열적이고 세심하게 말씀을 해주셨다. 한 달 전에 미리 관리소에 문화해설사 요청을 해두었다.
 ▲ 융릉으로 들어가는 신문(神門) 바로 앞 개울에 원대황교(元大皇橋)가 놓여 있다. 원대황교는 원래 화성군 태안면 황계리에 있던 다리인데, 헐리어 망가져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여기로 옮겼다고 한다.
 ▲ 융릉 입구 신문神門인 홍살문이 보인다.
 ▲ 저 언덕 위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장조가 잠들어 있다. 왕이 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지만,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죽은 후 어느 왕에 못지 않은 화려하면서 기품있는 능에 안치되었다.
 ▲ 융릉은 동 · 서 · 북 3면에 곡장을 두루고,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游石,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들을 배치하였다.
 ▲ 융릉의 봉분은 모란과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다. 합장릉이지만 혼유석은 하나이다.

▲ ▼ 융릉 앞 좌우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각 한쌍이 배치되어 있다. 추존 왕릉임에도 무인석까지 배치한 점이 중요하다. 위 사진은 융릉 동쪽이고, 아래 사진은 서쪽이다. 동쪽의 문무인상은 코가 멀쩡한데 비해, 서쪽의 문무인상은 코가 거의 깎여 있다. 떠오르는 동쪽 태양의 기운을 받는 서쪽 석상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훼손 된 것 같다.

 ▲ 언덕을 넘어 융릉에서 건릉으로 가고 있다. 길 옆 도랑에는 아직 살얼음이 보인다.
 ▲ 건릉의 전경이다. 신문(神門)인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이 보이고, 그 뒤로 언덕 위 정조의 능이 보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두 길이 나 있는데, 혼이 지나가는 신도(神道)와 임금이 지나가는 어도(御道)로 구분한 것이다.
 ▲ 제향祭享을 지내는 丁자 모양을 한 정자각이다.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을 깔았다.
 ▲ 건릉 정자각 내부 모습이다. 제향을 지낼 때 제상과 배치도 등이 있다.
 ▲ 건릉의 모습이다. 원래 능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다. 융릉은 문화해설사님의 감독 책임하에 특별히 올라가 보았지만, 건릉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