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왕조의 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의 리더십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문신으로,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걸출하여 명 태조 주원장이 국교 단절을 선언했을 때 직접 남경에 가서 명 태조와 회담, 국교를 회복하는 외교적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무 겸비한 걸출한 역량 보여
그가 가진 강점은 시대의 변화를 읽을 줄 아는 식견이 있다는 점이었다. 명나라의 창업 과정과 영락황제의 집권 과정을 지켜보며, 실력과 힘을 갖추지 못한 군주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이방원과 정도전이 이복동생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넘기자 왕권의 약화와 창업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아직 고려의 구신들이 호시탐탐 왕씨 정권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고 태조를 둘러싼 외척과 정적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 때 과감하게 일어나 형제와 외척들까지 축출하고 정종을 임금으로 세웠다가 다시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18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그는 안으로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 명나라 및 여진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국방력 키워 다음 세대 준비한 미래파 그는 국방개혁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태종은 고려가 망한 이유를 부패 관료의 등용과 귀족들이 사병 보유, 부패한 권력의 남용 등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정종 2년 권력의 중심에 서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모든 귀족, 권문세도가들의 사병들을 다 뽑아내버렸다. 왕권 강화에 치명적인 적이 사병이었으니, 이들을 모두 국가 소속으로 변환시켜버린 것이었다. 국방력은 커지고 귀족들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을 놓지 않을 정도로 국방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하고,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눠 장악하게 했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했다. 1409년에는 11도에 도절제사를 파견하고, 영진군 수성군을 정비했다.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속선을 10척씩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고, 1415년에는 거북선을 개발했다.
태종은 이에 앞서 혁신적인 국방 기획안을 제시했다. 한 사람은 지키고 두 사람은 군사를 돌보게 하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호패제로 이 제도는 전국의 인구를 조사한 후에 3정1호의 국방군제를 편성하고 현역군인으로 입역하는 사람을 정정(正丁)이라 하고, 1인은 솔정(率丁)이 되어 농사를 짓고, 1인은 여정(餘丁)이 되어 군사로 나간 가정을 돌보도록 한 것이다. 조선 국방 체계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태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려 최고의 무기전문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군기시에 특채했다.
최해산은 아버지 최무선의 화약 제조 비법을 전수받은 유일한 화포전문가였다. 그는 1395년에 아버지의 저서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을 익혔고 그 비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재임동안 화차·완구·발화·신포 등 신화기(新火器)를 개발해, 1400년 화약 4근 4냥, 각궁과 화기가 각각 200여 병(柄)이던 것을 태종 18년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 발사군 1만 여 명으로 군비를 확장해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409년 10월 18일에 태종은 창덕궁의 정자 해온정으로 나가 새로 개발된 화포의 시험 발사를 참관했는데 그것이 신기전의 원형이었다. 실록은 이 대포에 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에 넣어 발사했다고 기록했다. 철로 만든 화살 수십 개를 한 번에 장전한 후 화약으로 발사하는 움직일 수 있는 자주식 무기였다. 태종은 이런 신무기들을 해전과 육전에서 화통을 통해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기본 무기로 활용토록 해 왜구의 출몰이 잦은 울릉도 등 섬 지역에 먼저 실전 배치했다. 1416년의 9월의 일이었다. 세종 원년(1419)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 크게 왜구를 응징했다. 이후 왜구의 출몰이 크게 줄어 조선의 변방이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민심은 자연스럽게 보위에 있는 세종에게로 돌아갔다.
세종 위해 모든 걸림돌 제거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쫓아내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과 견제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세종만이 조선을 제대로 안정시킬 수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여 세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모든 부정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407년에는 불충이라는 죄명으로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했고, 1415년에는 역시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서인으로 폐했다가 이듬해 사사했다. 왕자의 난에 힘을 보탠 이숙번을 축출하고, 1414년에는 나머지 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일제히 은퇴시켰다. 이로써 그의 말년과 세종 초기에는 더 이상 왕권을 위협할 모든 반대 세력들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내치에도 힘을 기울여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해 의정부제를 확립하고 간쟁을 맡은 문하부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이는 전제정치를 견제하려는 효과적인 견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는 충신 황희를 세종 앞에서 불러내 세종의 오른 팔로 추천하는 등 인재를 선택하고 추천하는 남다른 역량도 보여줬다.
태종은 당시 비만 오면 물난리를 겪었던 시내 하천을 정비해 지금의 청계천을 만들었고 경인 운하와 태안반도 운하를 준비하기도 했던 전방위적인 개혁 군주였다. 이토록 치열하게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는 그가 있었기에 세종의 안정적인 치적과 문화정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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