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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8/06/22
 

자라투스트라 or 조로아스터교에 대하여

2009.11.23 22:08 | 지식창고 | 바냔나무

http://kr.blog.yahoo.com/ssj0122/2246 주소복사

[?몄쭛]DSC02767.JPG

자라투스트라(Zaraθu?tra) 또는 조로아스터(Zoroaster)는 이란 북부지방에서 태어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을 딴 조로아스터교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600년까지 의견이 매우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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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이 조로아스터이다. 여기서 ‘자라투스트라’는 낙타를 가진 이 라는 뜻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여러전설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가 성인이 되어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그 해답을 얻으려고 방랑의 삶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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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내가 흥미롭게 본 리빙채널에 의하면 현재 이란의
야즈드 산속에 조로아스터 교도가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란 야즈드의  조로아스터 사원
배화교, 혹은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약 1800년경에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에 의해 세워진 종교이다.
기원전 600년 경에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 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르아스트교의 神 아흐라마즈다.
 
조로아스터의 기본 가르침

이 세상에는 한 분의 참신이 있는데 , 그가 바로 아후라 마즈다로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다. 아후라는 ‘주’라는 뜻이고 마즈다는 ‘지혜’라는 뜻이므로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다른 잡신은 모두 거짓 신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주위에 있던 모든 종교가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였음을 감안하면 이렇게 철저한 유일신관을 선포한 것은 당시로서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조로아스터가 한 일은 이렇게 최고신이지만 잊혀진 신 `데우스 오티오수스‘를 다시 전면으로 모시고 나와 이 신만이 참된 신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 종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유대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에서 발견되는 유일신관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 (Ahura Masda)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게 특징으로, 이러한 이원론적 교리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악령
조로아스터에 따르면 아후라 마즈다에서 두 영이 나왔는데 하나는 선한 영 스펜타 마이뉴이고 다른 하나는 악령앙그라 마이뉴이다. 악령 앙그라 마이뉴는 몇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은 샤이틴 혹은 사탄이다. 그의 주위에는 악마의 무리가 있어 명령에 따라 사람을 시험하거나 괴롭히는 일을 수행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최초로 악마에 대한 계보를 체계화한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있어서 종교사적으로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경전<아베스타Avesta>에 의하면, 세상은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싸우는 대쟁투의 현장이다. 인간은 이 두 세력 중에서 어느 한 쪽에 가담해야한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선한 길을 택하므로 이 생애에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결국 이런 이분법적 양자택일에서 어떤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조로아스터와 페르시아인들은 인간이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의 편에 서면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되길 기원했다. 


훗날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샤의 국교로 위력이 있었으나
그후 이슬람의 영향으로 교세는 아주 쇠퇴해버렸다.
현재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과 그 이웃 키르키스탄에
약간의 신자가 있을 뿐이다. 
 
(인도 뭄바이 조로아스터교 입구에서 찍은 사진)

 조로아스트 교인들의 장례가 치러지는 침묵의 탑 언덕 입구

조로아스트교는 이란의 사산(the Sasanian) 때 국교였으나 무슬림에게 정복 당한후,핍박을받아 교인들이 인도로 망명하여 뭄바이에 정착 하였다. (8C-10C) 인도인들은 이들을 페르시안이라는 뜻의 '파르시' 라 불렀다.
배화교 사람들은 정직하며 교육에 힘 쓰고, 사회 복지를 위해 많이 베푼다. 현재 5만명 정도가 뭄바이에 거주 하며 부유하고 정결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신전에는 외부인의 접근이 불가능 하며 사제는 꺼지지 않는 불을 계속 지피고 있다. (뭄바이 가이드에게 들음)

 (키르키스탄의 배화교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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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배화교 침묵의 탑)
 
캘리포니아주의 산호세에서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사원을 건립했다. 그들은  불을 숭배하며, 천사의 존재를 믿고, 계절로는 초봄을 중요하게 여긴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가 하얀 종이 위에 무릎을 꿇고 그의 입은 하얀색 스카프로 덮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이제 기도하세요. 그러면 입에서 불이 나와 입을 가린 스카프가 불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흰색 면조끼를 입고, 허리는 양모로 된 천으로 3번 둘러싸고 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정화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불의 의식은 이란, 인도, 파키스탄 뿐 아니라 미국의 조로아스터교 사원에서 늘 행해진다. 북미주에도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1만 5천 명에 이른다.
 
그옛날 아기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16th century, Bengali)


참고자료 : 위키피디아, 리빙 채널, 교육방송 채널,
 페르시아유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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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farland2004 2009.11.23  23:21

조로 아스터 교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니체가 자신의 저서의 제목으로 차용 했다는 것을 보면 지식인들은 알고 있었던 종교 이군요. 기원전 수천년 전에 한 선지자가 그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웠다니 웬지 아득한 느낌 입니다. 짜라 투스트라가 그런 의미 인것을 역시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그저 철학적 상징어 정도로 알고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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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farland2004 2009.11.24  00:32

미술 박물관을 모아 놓은 페이지를 잊었습니다. 알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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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몄쭛]DSC00463.JPG
 
사적 제 236호 충렬사. 임진왜란이 끝난 7년후 선조의 명으로
지었다.  이순신장군을 추모하고, 신위를 봉안하고 연중 5회의
제사를 모신다. 음력 2월 춘계 향사, 음력 8월 추계향사, 양력
4월 28일 공의 탄신제와 음력 11월 19일 기신제, 지방문화
행사인 한산대첩 기념제전에 고유제를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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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루, 1840년인 헌종 6년에 지었으나 큰 비로 무너져,
1988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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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동백나무는 수령 370년의 거목으로 충무공의 붉은
충절의 표상이다.
 
[?몄쭛]DSC00468.JPG
 
그러나 동백꽃이 피지않은 이철에 역시 향기와 눈길을 사로
잡는건 금목서 였다. 이 사당 경내에 이렇게 금목서 은목서가
많은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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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꽃이 핀  은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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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내삼문. 현판은 1663년 현종 4년에 임금이 사액하고, 문정공 송준길 선생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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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를 모신 사당 1606년, 선조 39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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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7대 통제사 신관호가 채색화로 그린 '팔사품도'병풍
 
보물 제 440호인 '명조 팔사품 진품'은 임진왜란 마지막해
조선과 명나라 연합 작전시, 충무공의 인품과 전략전술에
감복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주청하여 충무공에게 내려준 8가지 물품을 말한다.
(도독인,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종류는 8가지지만 개수는 15가지를 명조 팔사품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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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목 가지와 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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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묘비, 지방유형문화제 제 113호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7년인 1681년에
제 60대 통제사 민섬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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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광해군 6년, 1614년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항복이
지어 여수 좌수영에 대첩비를 세웠다. 6년후 이곳에 비를
건립하면서 원문 그대로를 송시열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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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충렬사 관광을 끝으로 서문시장에 삼삼오오
흩어져 먹고 싶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등산대장이 일인당
오천원씩을 주었는데, 복국집으로 간 사람들은 7천냥, 장어집, 매운탕집 모두 달랐다.
나와 몇사람은 서호시장의 유명하다는 '시락국집'으로 갔다.  4천냥. 너무 좋아서
추천하고 싶다. (food 폴더에 올리겠음.)
귀경길에 들리기로 계획했던 사천 다솔사는 빼버리기로 하고 3시 40분 버스는
서울로 향했다. 운전하는 정기사를 빼곤
모두 골아떨어졌다. 통영구경 쎄게 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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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中사는 이복동생 부부와 ‘5분 상봉’

2009.11.22 20:50 | 뉴스 스크랩 | 바냔나무

http://kr.blog.yahoo.com/ssj0122/2243 주소복사

오바마, 사는 이복동생 부부와 ‘5분 상봉’

은데산조 “아내는 지금도 감동에 떨어”



 “피는 못속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그의 이복동생인 마크 오코스 오바마
은데산조 씨. 눈매와 코가 비슷해 보인다. 형제는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해후했다.
베이징=AP 연합뉴스
 

 
18일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앞서 중국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이복동생과 그의 아내를 만나 ‘핏줄의 기’를 살려줬다. 더타임스 온라인판 등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16일 베이징에서 자신의 이복동생인 마크 오코스 오바마 은데산조 씨(43)와
그의 중국인 부인을 만났다. 스케줄상 겨우 ‘5분’밖에 허락되지 않았지만, 은데산조 씨는
매우 흡족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형은 다양한
목적을 갖고 중국에 왔지만 내 목적은 오로지 형에게 아내를 소개하는 것이었다”며 “형의
빅 팬인 아내는 지금도 (흥분으로) 떨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만남은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 공항에서 이뤄졌다. 은데산조 씨는 “공항에 내려 옷을 갈아입은 뒤 바로 우리 앞에
나타난 형은 우리 부부를 꼭 껴안아 줬다”며 “주로 가족에 대한 추억 등을 화제로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그는 1월 대통령 취임식 때 백악관에 초대돼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으며,
당시 중국에 오면 아내를 만나주길 부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은데산조 씨는 오바마 대통령의 아버지가 1964년 대통령의 생모인 스탠리 앤 던햄과 이혼
뒤 하버드대 재학 시절 만난 세 번째 부인 루스 은데산조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다. 미국
국적이며 스탠퍼드대에서 물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 중국에 정착한 뒤 지난해 허난
성 출신의 부인과 결혼했다. 그는 선전에서 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며, 지역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


은데산조 씨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 뒤에도 외부 노출을 꺼려 왔으나, 4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나이로비에서 선전까지’를 출간하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알코올의존증 환자에 폭력적인 가장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도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건 숨길 일도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의 수경원 터

2009.11.21 12:39 | Histort&silk road | 바냔나무

http://kr.blog.yahoo.com/ssj0122/2242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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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한쪽 마당에  캠퍼스와 연고가 있는 綬慶園 터와 광혜원 터를 한곳에
보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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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원은 영조의 빈이었으며, 사도세자의 모친이었다.
영조의 오랜 총애를 받았던듯 슬하에 1남 6녀를 낳았다고 한다. 외아들이 사도세자로
불우하게 죽은후, 영빈의 묘는 이곳 연희궁 ( 왕실의 액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은 이궁) 가까운 곳에 묘역을 만든 모양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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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영빈 이씨의 수경원이 서오능으로 옮겨간후에도,
정자각과 비각은 이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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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들의 얼굴이 몹시 슬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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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子石: Player symbol for wishfull male off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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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 Civil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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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탑 :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옮겨온 고려시대 선사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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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옮겨다 둔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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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 아닌 이름모를 두 괴수가 받쳐든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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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의 정자각 어처구니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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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석등이 정자각 옆에도 따로 놓여 있다.
같은 쌍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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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의 봉분이 있었던 자리에는 1974년 오른쪽의
루스채플을 세웠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연희궁[ 衍禧宮 ]의 역사 
조선 초기 이궁(離宮)의 하나. 후일에 한자가 연희궁(延禧宮)으로 바뀌어 오늘날 연희동(延禧洞)의 동명이 되었다. ≪궁궐지 宮闕志≫에 “도성 밖 서쪽 15리 양주(楊州)에 있는데 정종이 왕위를 선양하고 나서 이 궁에 머물렀다.”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궁터는 찾을 수 없다.
연희궁은 왕실의 액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은 이궁으로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1420년(세종 2)에 중건하였고, 세종 자신도 왕 8년에 잠시 머무르다가 그 이듬해에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등 자주 이곳에 들렀다. 그러나 당시에 이 궁은 해충과 독사가 많아 신하들이 어행 또는 어거를 만류하였다.

세종은 연희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고, 그 뒤 세조도 이곳을 서잠실(西蠶室)이라 하고 상의원(尙衣院) 소속의 정5품 별좌(別坐) 2인을 배치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한편, 연산군이 1505년(연산군 11)에 연희궁을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꾸며놓고 놀이를 하게 되자 ‘연희궁 까마귀골 수박 파먹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연희궁은 이로부터 이궁으로서의 지위는 상실되었다. 전각들이 어느 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 수경원(綏慶園)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宮闕志
≪참고문헌≫ 서울六百年史-文化史蹟篇-(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87)
≪참고문헌≫ 朝鮮前期의 蠶室都會(朴慶龍,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1985)
-Nate 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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