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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쇼킹 고필헌과의 메가순결한 만남

2006.11.13 15:50 | 퍼나르기 | soulramp

http://kr.blog.yahoo.com/soulramp/1493 주소복사

순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 굴비이다. 순결한 인터뷰가 TV와 관계없는 사람과 인터뷰해보기는 처음인데 내가 워낙 당신의 팬이라 한번 인터뷰해보고 싶었다.


고필헌
오 그런가, 고맙다.


순결 먼저 가장 잘 알려진 당신의 작품 <애욕전선 이상 없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어쩌다 그렇게 퍼포먼스하러 가는 바바리맨의 스텝 같은 발랄한 작품을 그리게 되었나?


고필헌
처음에 신문사에서 <아색기가> 같은 성인 코드의 만화를 요구했다. 연재 시작하고 처음 3개월 동안은 반응이 꽝이어서 잘릴 위기가 있었는데 동료 만화가가 ‘넌 대사로 웃기는 게 더 웃겨’ 하고 충고를 해줘서 그대로 따랐더니 반응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왔다.


순결 나도 가끔씩 무단으로 빌려 쓰는 주옥 같은 대사들은 어떻게 나오는 건가? 그렇게 끊임없이 쏟아지다 보면 한계가 올 법도 한데.


고필헌
대사는 머릿속에서 나오는 게 반이고 나머지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나 읽은 책 등에서 영감을 얻어 쓴다. 한계는 매번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통장을 본다. 돈이 없으면 저절로 열심히 일하게 된다. 특히 공과금의 압박이 무섭다.


순결 나는 한계가 올 때면 방대한 스케일의 카드값을 보는데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취미도 B급 공포영화를 좋아하고 분유를 즐기는 등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데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고필헌
<이블데드>를 권하고 싶다. 워낙 호러 영화를 좋아해서 대학교 때는 친구들과 직접 찍어보기도 했다. 학교 화장실을 가짜 피 범벅으로 만들어놓고 촬영했는데 청소하는 아줌마한테 걸려서 엄청 혼났었다.


순결 혼날 만하다. 그런데 분유는 씹어 먹나 녹여 먹나? 본인은 숟갈로 퍼서 씹어 먹는 걸 즐기는데.


고필헌
난 노멀하게 물에 타 먹었다. 요새는 좀 건방져져서 분유 끊고 우유 마신다.


순결 나도 이빨에 자꾸 껴서 끊을까 생각 중이다. 하여튼 이렇게 무얼 하든 특이한 당신인데 만약 만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은가?


고필헌
스물아홉 살까지는 요리사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려 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별 흥미도 없는 학교 기왕 가는 거 여자 많은 과 가자 그래서 식품영양학과를 택했었다. 덕분에 군대도 취사병으로 복무하고 졸업하고 나서도 쭉 요리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이건 아니다’ 싶어 때려 치우고 원래 하고 싶었던 만화의 길로 입문하여 지금까지 왔다.


순결 와, 정말 멋진 일대기인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숙성발효하여 만든 작품들이라 독자들의 반응이 더 좋은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리플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고필헌
음, 웹상에 오르는 응원이나 답 글 들은 모두 내 에너지의 근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리플은 ‘작가님 잘생겼어요.’


순결 참으로 감동적인 리플인 것 같다. 그런 리플 계속 받으려면 앞으로도 잘해야 할 텐데, 앞으로의 계획은?


고필헌
12월 25일에 친분 있는 만화가 서른일곱 명이 모여 공연을 가질 생각이다. 사실은 전부터 해오던 거였는데 이번에 내가 총연출을 맡게 되어 좀 바쁘게 일하고 있다. 또 영화 작업도 준비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만화가를 기본으로 두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하고 싶다.


순결 그렇게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당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감명 깊게 본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나?


고필헌
지금은 아니고, 예전의 팀 버튼을 좋아했었다. 그도 애니메이터 겸 만화가 출신으로 영화감독이 된 사람이라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명까지는 아니고 재미있게 본 작품으로는 <멋지다 마사루> <짱구는 못말려> 같은 작품이 있는 것 같다. 원래 강풀 만화처럼 이야기가 연재되는 시리즈를 싫어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만화처럼 단편으로 이어지는 게 좋다.

순결 엇, 싸이에 들어가보니 강풀 씨와도 친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도 되나?


고필헌
친하기보다는 친한 척하며 서로 묻어가는 사이다. 특히 요새 강풀이 좀 유명해져서 내가 좀 많이 묻어가고 있다.


순결 흐흐, 나도 우리 PD에게 좀 묻어가려고 하는데 잘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인터뷰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가장 메가쇼킹했던 에피소드 하나만 이야기 하고 끝내자.


고필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군대를 취사병으로 복무했는데 가끔은 내무실에서 샤워하기 싫어서 식당에서 샤워하기도 했다. 그날도 조리실에서 샤워하던 중 알몸으로 비누칠 하고 있었는데 대대장에게 딱 걸렸다. 덕분에 나체로 군장 매고 연병장을 돌았던 기억이 난다. 쇼킹했다기보다는 시원했던 기억이다.


(글) KMTV 제작진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한용덕
ⓒ2006 한화 이글스
4년 연속 우승을 비롯해 모두 25년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열 번의 우승을 독점했던 김응용 감독을 제외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기록들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김영덕 전 이글스 감독이다.

그는 OB 베어스를 이끌고 그 뒤의 어떤 우승과도 바꿀 수 없는 초대 우승감독의 영예를 차지했고 또 5할9푼6리라는 페넌트레이스 최고 승률을 구가하며 최초의 통산 500승을 경유해 712승의 기록을 남겼다.

그뿐인가. 그의 휘하에서 박철순은 22연승의 금자탑을 쌓았고 이만수는 트리플크라운에 올랐으며 송진우는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역사에 유일무이한 기록들만 모아도 손가락이 심심치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의 무게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록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기록 때문이다. '비난은 잠깐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던, 기록에 대한 그의 비뚤어진 집념 때문이다.

타율부문 경쟁자인 홍문종에게 7연타석 고의사구가 던져지는 것을 보며 민망해했던 이만수가 그랬으며, 이기는 경기에서 선배 한희민을 5회에 밀어내고 마운드에 올라 승수를 챙겨야 했던 송진우가 그랬다.

기록에 대한 김영덕 감독의 집착은 그렇게 선수들의 자존심과 스포츠정신 그리고 팬들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에 얼룩을 남겼다. 그리고 절대 잊힐 수 없는 자랑스러운 최초의 대기록들에 '사실 이 기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말았다.

스포츠가 스포츠인 것은, 단지 '최선을 다해', '이겨야 한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논리 때문이다. 그 안에 복잡한 계산과 복선이 깔리고 그것이 승부의 논리를 흐리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스포츠가 아니다. 그래서 포스트시즌 상대를 고르기 위한 져주기 게임을 관전하는 것은 환멸 그 자체이며, 승리소감을 묻는 질문에 '당연히 이길 팀을 이겼을 뿐'이라며 이죽거리는 '타격천재'의 인터뷰는 꼴불견 그 자체다.

스포츠에서 승리의 희열이 고작 가학적 쾌감일 수만은 없는 것이며, 또한 기록이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아름다움을 새길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봉 600만원으로 시작한 프로 생활

그러고 보면, 북일고와 이글스에서 내내 김영덕 감독의 그늘에 머물렀던 한용덕의 행로가 '가꾸어진' 기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은 꽤나 역설적이다. 한용덕은 특이한 존재다. 그가 훌륭한 투수였음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무수히 많지만 딱히 한마디로 소개할 '타이틀'은 단 한 개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용덕은 39살까지 17년 동안 2,080이닝을 던지며 통산 10위에 해당하는 120승을 올린 투수다. 그 중에 기록한 16번이나 되는 완봉승은 통산 7위에 해당하며, 1291개나 잡아낸 삼진도 통산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가 던진 이닝수도 통산 3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개인타이틀을 얻어 본 적이 없었다. 다승은 물론, 방어율, 탈삼진, 어느 쪽이건 단 한 해도 정상의 자리에 서 본 적이 없다.

그는 화려한 투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투수였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였다. 그래서 그는 이기는 경기뿐만 아니라 여러 번 지는 경기에서도 던졌고, 118번의 패전으로 통산 최다패전 부문에서도 4위에 올라있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사를 통틀어서 장기레이스를 위한 투수진을 구성한다면, 선동렬과 최동원으로 구성될 '원투펀치'에는 끼어들 수 없을지 몰라도, 반드시 선발진에 한 자리를 만들어 끼워 넣어야 할 인물이다.

그리 특출 날 것 없는 선수였던 한용덕은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야구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에 어렵사리 이어왔던 선수생활이었지만, 무릎 관절염을 앓게 되면서 결국 야구를 포기하는 것과 함께 대학도 자퇴를 해버리게 된다.

딱히 운동으로 대성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선수였기에 야구에 대한 집념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트럭 운전 보조나 임시 전화선로 가설 같은, 야구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여러 가지 임시직들을 전전하며 술로 몸을 학대했다고 했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젊음은 오히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한 법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야구를 지우고 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나면 발길은 야구장으로 움직였고, 그 어느 날 그는 대전 야구장에서 북일고 시절 은사인 김영덕 감독과 마주치게 된다. 김 감독은 OB와 삼성을 거쳐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와 있었다. 한용덕은 김영덕 감독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졸랐고, 그 자리에서 배팅볼 투수로 입단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1986년이었다.

구단이 그에게 제안한 연봉은 300만원이었지만, 김영덕 감독의 배려로 600만원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배팅볼을 던지는 일이었고, 글러브를 비롯한 개인장비는 직접 마련해야 했다. 20년 전의 일이었다고는 해도,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생활이었다.

원래 북일고 시절 그의 수비위치는 유격수였다. 그런 그가 프로에서 투수가 된 것은 배팅볼을 던질 것이 아니라면 팀에 굳이 연습생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수백 개의 공을 던졌지만 뭘 알고 던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친절하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배팅볼에 다양한 구질과 묵직한 구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누구도 걱정해주지 않는 어깨의 통증을 견디기 위한 나름의 투구요령을 터득해가며 우직하게 직구를 뿌려댔을 뿐이다.

그래선지 그의 투구폼은 독특했다. 신인 시절의 박찬호처럼 왼발을 높게 차올리는 '하이키킹'을 하고서도 정작 공을 던지는 상체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그 시절 투수부문의 모든 타이틀과 기록을 독식하던 선동렬이 오른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온 몸을 던지던 동작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서 보기에 얼핏 무성의해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역동적이기보다는 여유만만하고 능글맞은 것에 가까웠다.

불운의 사고는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고

 
▲ 괭이로 마운드를 다듬고 내려오는 한용덕 코치
ⓒ2006 한화 이글스
그것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경로를 걸었던 해태의 송유석이 그랬듯 하루 수백 개의 배팅볼을 던지면서도 어깨와 몸을 버텨내기 위해 체득한 그만의 비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딘가 어설픈 동작으로 구속은 빠르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공을 꽂아 넣었다는 것도 두 투수의 닮은점이었다. 그것은 저마다 거친 세월에 다져진 굳은살 같은 여유와 힘이었다.

그렇게 미숙한 공이나마 하나하나 허투루 던지지 않았기에 2년 뒤 그는 정식선수로 등록될 수 있었다. 여전히 던질 줄 아는 공은 거의 없었지만 오로지 묵직한 직구 하나만으로도 쓸모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90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전지훈련에서 변화구를 배우면서 투수로서 눈을 뜨게 된다. '사토'라는 일본인 인스트럭터가 가르쳐준 변화구들은 묵묵히 다져온 잠재력에 드디어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 시즌 그는 곧장 13승을 올리며 당당히 주축투수로 진입했다. 그 뒤로 94년까지는 그의 전성기였다. 91년에는 17승을 올렸고, 94년에는 16승을 올렸다.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승수였다.

한창이던 94년 시즌 중에 겪었던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는 조금 더 인상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면서 그 자신이 입은 부상도 문제였지만 거의 다리를 잃을 지경에 놓인 아내를 간호하는 일이 급했다. 그로부터 몇 년 간 정돈되지 못한 몸과 마음 탓에 제대로 마운드에 집중할 수 없었고, 이미 서른줄을 넘어선 한용덕에게 그것은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는 사고 이전의 성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온실이 아닌 거친 들판에서 밟히며 자란 들꽃의 생명력은 역시 좋을 때보다는 어려울 때 확인되는 것이다. 한용덕은 그로부터 10여 년간 그야말로 이글스 마운드의 마당쇠로 활약했다. 정상의 자리를 바라보며 힘을 내는 것은 사실 많은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내내 한 순간도 주저앉지 않고 분투하는 것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95년은 한용덕 뿐만 아니라 '페넌트레이스 최강' 이글스의 슬럼프가 시작된 해였다. 타선에서는 장종훈의 홈런신화가 이어졌고 마운드에서는 정민철이라는 특급 선발과 구대성이라는 특급 마무리가 나타났지만 팀의 성적은 바닥권이었다. 95년부터 98년 사이 이글스는 두 번의 6위와 한 번의 7위로 주저앉았다.

한용덕은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았고 이기는 경기와 지는 경기를 의식하지 않았다. 비록 구위는 이전만 못했고 해마다 승수보다 많은 패전 수를 쌓아가야 했지만 그는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선발로 던지다가 후배 이상목의 컨디션이 회복되면 다시 계투로 물러앉았고 그러다가 구대성에게 고장이 생기면 마무리로 출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지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서기도 했다.

그는 기록과 타이틀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감독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때로는 팬들을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마운드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며 최대한 많은 상대 타자들을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플레이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내 단순하고 담백했다.

야구선수 다운 모습 보인, 한용덕

 
▲ 은퇴식에서 김인식 감독과 함께
ⓒ2006 한화 이글스
그의 등번호는 40이었다. '40세까지 선수로 뛰겠다'는 그의 소박한 목표를 담은 숫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겨울 만 서른 아홉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구단은 그를 방출해버렸고 한 해 더 뛰고 싶은 마음은 결국 그쯤에서 접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값지게 이어온 선수생활이었고 돌아보면 완전 연소시킨 열 일곱 시즌이었다.

이듬해 구단은 방출되는 과정에서 은퇴경기도 갖지 못했던 한용덕을 위해 은퇴식을 열어주었고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그 자신, 타고난 재능과 조건 대신 하나에서 열까지 몸으로 부딪히며 터득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이제는 그의 일이 되었다.

올 시즌 이글스는 상당히 매력적인 마운드를 구축했다. 신인 류현진과 고참 문동환이 구성한 8개 구단 최고의 '원투펀치'와 그들을 뒷받침하는 '살아있는 역사' 정민철과 송진우로 구성된 선발진 그리고 '재활선수' 조성민과 지연규를 통해 이어지는 또하나의 국보급 마무리 구대성. 최고는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채 분투하는 흥미롭고 또 끈끈한 라인업.

물론 그것은 마운드 운용의 귀재 김인식 감독과 역대 최고 투수중 하나인 최동원 코치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어쩐지 그 잡초냄새 가득한 진용에서 한용덕의 분위기를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야구장에서마저 흑막이니 음모니 혹은 학연이니 무어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피곤한 시절. 한용덕이라는 단순한 사내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느끼는 것은 묘한 청량감이다. 기록과 타이틀을 위한 플레이가 아니라 혼신을 다한 플레이 끝에 남은 땀 배인 기록들을 보는 신선한 감동 말이다.

야구는 역시, 야구다워야, 야구다.




정몽준..... 쌈 잘하나 보네...

다 큰 어른끼리 막말이네. ㅎㅎ

"시련 있어도 포기 안해" 최익성의 도전

2006.09.06 15:47 | 퍼나르기 | soulramp

http://kr.blog.yahoo.com/soulramp/1148 주소복사


  최익성(34)은 5일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환송을 나온 사람도, LA에서 마중을 나와줄 사람도 없는 외로운 비행이다. 다시 떠난다고 했을 때, 그에게 많은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야구를 하러 갑니다" 가 전부였다.

최익성. 그는 국내 프로야구에서만 6개 팀을 옮겨 다닌 '떠돌이 외야수'다. 좀 멋있게 '저니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뭐가 다르랴. 1994년 삼성에 데뷔해서 99년 한화, 2000년 LG, 2001년 KIA, 2002년 현대, 2004년 다시 삼성, 그리고 2005년 SK 유니폼을 입었다. 두산과 롯데만 빼고 전 구단의 유니폼을 다 입어봤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이 팀을 옮긴 선수다.

그는 "전생에 무슨 방랑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해가 바뀌면 팀이 바뀌는 통에 아직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다. 정 붙일 만하면 보따리를 싸야 했고, 그래서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는 "그래도 어딘가 나를 필요로 하는 팀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나를 인정해 준다는 것 아니었겠느냐"고 자신을 달랜다. 그런 주위의 관심도 2005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SK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그는 시선을 외국으로 돌려야 했다.

처음엔 최향남(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과 함께 운동을 하며 대만 프로야구에 테스트를 받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3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 진입을 타진했다. 그러나 그것도 4개월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7월 말 귀국해서 다시 몸을 만들었다. 그때 친분이 두터운 이승엽과 함께 바벨을 들기도 했다. 이번에 다시 LA로 간다. 시즌을 마친 마이너리그 구단의 문을 두드려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다. 안 되면 도미니카건 멕시코건 베네수엘라건 겨울에 야구 하는 팀을 찾아볼 생각이다.

한국 프로야구 12년 통산타율 0.267, 홈런 60개. 주전으로 뛴 기간은 2년밖에 안 되는 대타 전문 최익성이 30대 중반의 나이에 새 팀을 찾아 나서는 건 뭔가. 고집인가, 무모한 도전인가.

"난 지금까지 안 된다는 말만 들어왔다. 야구도 남들보다 늦은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했고, 프로에도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익숙한 나다. 그러나 '끝'이라는 말은 내가 하고 싶다. 지금 그만두는 건 포기다. 포기는 미련을 낳는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후련하지 못할 것 같다. 내 안에 불꽃은 남아 있다. 내 힘으로 그 불꽃을 태우고, 다 타고 나면 그때 내 입으로 '끝'이라고 말하겠다. 그러고 나서 다른 길을 가겠다."

그의 캘리포니아행이 황금을 캐는 '골드러시'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금을 캐지 못하더라도 '난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을 것이다. 도전은 왜 아름다운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부산야구의 혼, '작은 탱크' 박정태

2006.09.06 15:32 | 퍼나르기 | soulramp

http://kr.blog.yahoo.com/soulramp/1147 주소복사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부산이 아닌 곳에서 박정태라는 이름은 그저 괴상한 모양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던, 제법 성적이 괜찮던 타자에 대한 짧은 기억을 끌어낼 뿐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그 이름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신나고, 흥분되고, 끓어오르고, 또한 안타깝고 애잔한 단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은퇴를 했을 뿐 아니라, 멀리 태평양 건너로 떠나버린 그가 있을 리 없는 부산 사직경기장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아직도
박정태의 얼굴이 큼직하게 박힌 플래카드가 내걸리곤 한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라는 그의 투박한 명언이 적힌 채로 말이다.

"신은 부산에 최고의 야구팬과 최악의 야구팀을 주셨다."

부산 사람들은 가끔 농담 삼아 이런 한숨 섞인 이야기를 한다. 정말 롯데 자이언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약한 프로야구팀이다. 물론, 원년의 꼴찌 신화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어 기억 속에 두드러지지 않을 뿐이지, 롯데가 쌓은 성적도 만만치는 않다.

01년부터 04년까지 기록한 초유의 4년 연속 꼴찌를 비롯해 25년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무려 여덟번의 꼴찌가 롯데의 것이었다. 물론 84년과 92년, 두 번 우승을 하기도 했지만 유별난 부산 팬들에겐 98%쯤 부족하다.

그러나 그 초라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벌어지는 야구경기는 언제나 전쟁터고, 축제고, 또 성스러운 의식이다. 내 어릴 적, 야구를 단순한 구경거리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 롯데 자이언츠 응원석 풍경이었다.


전정터 혹은 축제... 부산의 응원석 풍경

봉황기 결승에서 선린상고 '노준 오빠'의 발목이 으스러졌을 때 울먹이던 여고생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멀쩡한 아저씨 아줌마들이 스탠드에서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광경을 처음 보여준 것이 부산이었다. 때로는 불타는 쓰레기통이 날기도 했고, 자기 팀과 상대 팀을 막론하고 팬들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선수단 버스가 제멋대로 드나들 수 없는 것이 부산, 혹은 마산 야구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동원윤학길이 강호의 모든 방망이를 무릎 꿇리던 시절이나, 4년 연속 꼴찌에 허덕일 때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열기는 언제나 부산으로 원정 가는 팀들을 주눅 들게 했고, 롯데 자이언츠도 홈에서만큼은 언제나 강팀이었다. 올 해만 하더라도 7위 위로 올라오기 어려워 보이는 성적이지만 홈에서만큼은 3위권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자이언츠다.

앞으로 10년쯤 연속으로 우승을 한다 하더라도 팬들의 성원에 다 값하지 못할 자이언츠가 부산팬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마도 박정태일 것이다. 박정태는 단순히 독특한 타구폼을 가진 선수가 아니며, 단순히 야구를 꽤 잘 했던 선수도 아니다. 그는 '자이언츠, 아니 부산 야구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사나이다.

'탱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키는 173cm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프로야구 전체를 통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단신이었다. 게다가 단신의 선수 치고는 다리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파워나 스피드, 어느 쪽도 특출날 것 없는 선수가 박정태였다.

그러나 뻔히 가망 없는 타구를 날리고도 매번 죽자 사자 사지를 흔들며 달리는 모습은 덕아웃에서건 관중석에서건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뿐인가. 덩치가 배는 됨직해 보이는 포수를 부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돌진하는 격한 홈 슬라이딩에는 브라운관 밖의 상대팀 팬들마저 끓어오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1993년 5월 23일. 그 때만 해도 프로 3년차 박정태는 잘 치고, 또 열심히 하는 기특한 선수에 불과했다. 그 날 1루에 나가 있던 박정태는 후속 타자가 병살타성 땅볼을 날리자 언제나와 같이 '죽자 살자' 달려서 '죽일 듯한' 슬라이딩을 날렸고, 태평양 유격수 염경엽과 충돌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경기장 밖으로 실려 나갔다. 발목뼈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복합골절'. 선수생활은 커녕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 때까지의 타율이 3할5푼9리. 한창 방망이에 불이 붙던 시점이었다.

사람들은 유망한 젊은 선수 하나가 그대로 사그라진다고 했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날은 오히려 진정한 '박정태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부서져버린 발목을 세우느라 숱한 철심을 박아 넣는 다섯 번의 수술 그리고 당연히도 눈물겨웠을 초인적인 재활치료가 이어졌지만 그는 끝내 일어섰기 때문이다.


박정태 신화의 시작

  그는 침대 위에서마저 배트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도 그라운드에서 뛰지 못하는 자신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995년 5월 16일, 그러니까 1주일이 모자라는 만 2년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LG트윈스와의 경기였고, 절대적인 운동량 부족 때문에 '짝짝이'가 되어버린 두 다리로 돌아온 그는 첫 타석에서 거짓말처럼 안타를 때려냈다. 2년 전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신화'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그 날의 성적은 4타수 3안타였고, 그 해 시즌 성적은 3할3푼7리였다.

그러나 박정태 신화가 단순히 눈물겨운 인간승리의 재활스토리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신화의 결정판은 1999년 10월 20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플레이오프 7차전이었다. 양대 리그로 치러진 그 해, 드림리그 2위 롯데는 매직리그 1위였지만 승률이 부족했던 삼성과 4선승제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1승 3패까지 몰렸던 5차전에서 터진 호세의 역전 끝내기 3점 홈런과 6차전에서 박석진의 7이닝 퍼펙트로 회생해 최종전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0-2로 끌려가던 6회, 1점을 만회하는 홈런을 날리고도 관중석에서 날아든 물병에 급소를 맞은 호세는 흥분해서 관중석으로 방망이를 집어던졌고, 곧장 퇴장을 명령받았다.

뒤진 상황. 중심타자는 퇴장 당했고, 흥분한 관중석에서는 끊임없이 오물이 날아들었다. 암담한 순간. 그 때, 주장 박정태는 선수들에게 짐을 싸자고 했고 선수들은 짐을 쌌다. 그 순간 김명성 감독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선수들의 경기거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뻔 했다. 감독의 간곡한 설득에 다시 주저앉아 맥없이 글러브를 꺼내 드는 선수들에게 박정태는 한 마디를 던졌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한다."

30분의 경기중단 뒤에 나선
마해영은 퇴장당한 호세와 이어지는 '백투백'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7회에는 비록 전날에 이어 무리하게 등판한 박석진이 똑같이 김종훈과 이승엽에게 연속홈런을 내줘 재역전 당했지만, 이번에는 8회에 임수혁이 투런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10회말 만루 위기를 넘긴 그림 같은 호수비의 주인공 김민재가 연장 11회 초 때려낸 결승타와 11회말 주형광의 그림 같은 3연속 삼진 마무리까지.


푸른 유니폼에 자긍심을...


  비록 그 날, 박정태는 한 개의 홈런도 날리지 못했고, 역사적인 결승타나 호수비를 보여준 것도 없었다. 그러나 부산 팬들이 그날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박정태다. 구슬을 꿰듯, 선수 하나하나의 가슴에 불을 붙여 롯데라는 하나의 불덩어리로 만들어낸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롯데 자이언츠에서만 뛰었던 열세 시즌동안, 통산 2할9푼6리의 타격. 한 때 최다였던 31경기 연속안타와 5번의 골든글로브. 98, 99년 2년 연속 올스타전 MVP. 훌륭한 성적이지만 '최고중의 최고'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초에 그의 가치는 안타 몇 개와 홈런 몇 개가 아니라, 푸른 유니폼에 자긍심을 실어놓은 선수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이언츠라는 이름에서 가슴 떨림을 느끼게 해준 선수라는 점에 있다.

그가 뛰는 경기를 보고 난 다음에는, 항상 가라앉지 않는 흥분에 한참 넋을 놓아야 했던, 박정태. 한 번 떠올려 글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을 노곤해지게 하는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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