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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  | | | ▲ 한용덕 | | | ⓒ2006 한화 이글스 | 4년 연속 우승을 비롯해 모두 25년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열 번의 우승을 독점했던 김응용 감독을 제외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기록들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김영덕 전 이글스 감독이다.
그는 OB 베어스를 이끌고 그 뒤의 어떤 우승과도 바꿀 수 없는 초대 우승감독의 영예를 차지했고 또 5할9푼6리라는 페넌트레이스 최고 승률을 구가하며 최초의 통산 500승을 경유해 712승의 기록을 남겼다.
그뿐인가. 그의 휘하에서 박철순은 22연승의 금자탑을 쌓았고 이만수는 트리플크라운에 올랐으며 송진우는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역사에 유일무이한 기록들만 모아도 손가락이 심심치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의 무게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록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기록 때문이다. '비난은 잠깐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던, 기록에 대한 그의 비뚤어진 집념 때문이다.
타율부문 경쟁자인 홍문종에게 7연타석 고의사구가 던져지는 것을 보며 민망해했던 이만수가 그랬으며, 이기는 경기에서 선배 한희민을 5회에 밀어내고 마운드에 올라 승수를 챙겨야 했던 송진우가 그랬다.
기록에 대한 김영덕 감독의 집착은 그렇게 선수들의 자존심과 스포츠정신 그리고 팬들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에 얼룩을 남겼다. 그리고 절대 잊힐 수 없는 자랑스러운 최초의 대기록들에 '사실 이 기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말았다.
스포츠가 스포츠인 것은, 단지 '최선을 다해', '이겨야 한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논리 때문이다. 그 안에 복잡한 계산과 복선이 깔리고 그것이 승부의 논리를 흐리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스포츠가 아니다. 그래서 포스트시즌 상대를 고르기 위한 져주기 게임을 관전하는 것은 환멸 그 자체이며, 승리소감을 묻는 질문에 '당연히 이길 팀을 이겼을 뿐'이라며 이죽거리는 '타격천재'의 인터뷰는 꼴불견 그 자체다.
스포츠에서 승리의 희열이 고작 가학적 쾌감일 수만은 없는 것이며, 또한 기록이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아름다움을 새길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봉 600만원으로 시작한 프로 생활
그러고 보면, 북일고와 이글스에서 내내 김영덕 감독의 그늘에 머물렀던 한용덕의 행로가 '가꾸어진' 기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은 꽤나 역설적이다. 한용덕은 특이한 존재다. 그가 훌륭한 투수였음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무수히 많지만 딱히 한마디로 소개할 '타이틀'은 단 한 개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용덕은 39살까지 17년 동안 2,080이닝을 던지며 통산 10위에 해당하는 120승을 올린 투수다. 그 중에 기록한 16번이나 되는 완봉승은 통산 7위에 해당하며, 1291개나 잡아낸 삼진도 통산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가 던진 이닝수도 통산 3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개인타이틀을 얻어 본 적이 없었다. 다승은 물론, 방어율, 탈삼진, 어느 쪽이건 단 한 해도 정상의 자리에 서 본 적이 없다.
그는 화려한 투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투수였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였다. 그래서 그는 이기는 경기뿐만 아니라 여러 번 지는 경기에서도 던졌고, 118번의 패전으로 통산 최다패전 부문에서도 4위에 올라있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사를 통틀어서 장기레이스를 위한 투수진을 구성한다면, 선동렬과 최동원으로 구성될 '원투펀치'에는 끼어들 수 없을지 몰라도, 반드시 선발진에 한 자리를 만들어 끼워 넣어야 할 인물이다.
그리 특출 날 것 없는 선수였던 한용덕은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야구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에 어렵사리 이어왔던 선수생활이었지만, 무릎 관절염을 앓게 되면서 결국 야구를 포기하는 것과 함께 대학도 자퇴를 해버리게 된다.
딱히 운동으로 대성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선수였기에 야구에 대한 집념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트럭 운전 보조나 임시 전화선로 가설 같은, 야구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여러 가지 임시직들을 전전하며 술로 몸을 학대했다고 했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젊음은 오히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한 법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야구를 지우고 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나면 발길은 야구장으로 움직였고, 그 어느 날 그는 대전 야구장에서 북일고 시절 은사인 김영덕 감독과 마주치게 된다. 김 감독은 OB와 삼성을 거쳐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와 있었다. 한용덕은 김영덕 감독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졸랐고, 그 자리에서 배팅볼 투수로 입단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1986년이었다.
구단이 그에게 제안한 연봉은 300만원이었지만, 김영덕 감독의 배려로 600만원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배팅볼을 던지는 일이었고, 글러브를 비롯한 개인장비는 직접 마련해야 했다. 20년 전의 일이었다고는 해도,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생활이었다.
원래 북일고 시절 그의 수비위치는 유격수였다. 그런 그가 프로에서 투수가 된 것은 배팅볼을 던질 것이 아니라면 팀에 굳이 연습생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수백 개의 공을 던졌지만 뭘 알고 던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친절하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배팅볼에 다양한 구질과 묵직한 구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누구도 걱정해주지 않는 어깨의 통증을 견디기 위한 나름의 투구요령을 터득해가며 우직하게 직구를 뿌려댔을 뿐이다.
그래선지 그의 투구폼은 독특했다. 신인 시절의 박찬호처럼 왼발을 높게 차올리는 '하이키킹'을 하고서도 정작 공을 던지는 상체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그 시절 투수부문의 모든 타이틀과 기록을 독식하던 선동렬이 오른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온 몸을 던지던 동작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서 보기에 얼핏 무성의해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역동적이기보다는 여유만만하고 능글맞은 것에 가까웠다.
불운의 사고는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고
 | | | | ▲ 괭이로 마운드를 다듬고 내려오는 한용덕 코치 | | | ⓒ2006 한화 이글스 | 그것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경로를 걸었던 해태의 송유석이 그랬듯 하루 수백 개의 배팅볼을 던지면서도 어깨와 몸을 버텨내기 위해 체득한 그만의 비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딘가 어설픈 동작으로 구속은 빠르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공을 꽂아 넣었다는 것도 두 투수의 닮은점이었다. 그것은 저마다 거친 세월에 다져진 굳은살 같은 여유와 힘이었다.
그렇게 미숙한 공이나마 하나하나 허투루 던지지 않았기에 2년 뒤 그는 정식선수로 등록될 수 있었다. 여전히 던질 줄 아는 공은 거의 없었지만 오로지 묵직한 직구 하나만으로도 쓸모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90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전지훈련에서 변화구를 배우면서 투수로서 눈을 뜨게 된다. '사토'라는 일본인 인스트럭터가 가르쳐준 변화구들은 묵묵히 다져온 잠재력에 드디어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 시즌 그는 곧장 13승을 올리며 당당히 주축투수로 진입했다. 그 뒤로 94년까지는 그의 전성기였다. 91년에는 17승을 올렸고, 94년에는 16승을 올렸다.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승수였다.
한창이던 94년 시즌 중에 겪었던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는 조금 더 인상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면서 그 자신이 입은 부상도 문제였지만 거의 다리를 잃을 지경에 놓인 아내를 간호하는 일이 급했다. 그로부터 몇 년 간 정돈되지 못한 몸과 마음 탓에 제대로 마운드에 집중할 수 없었고, 이미 서른줄을 넘어선 한용덕에게 그것은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는 사고 이전의 성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온실이 아닌 거친 들판에서 밟히며 자란 들꽃의 생명력은 역시 좋을 때보다는 어려울 때 확인되는 것이다. 한용덕은 그로부터 10여 년간 그야말로 이글스 마운드의 마당쇠로 활약했다. 정상의 자리를 바라보며 힘을 내는 것은 사실 많은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내내 한 순간도 주저앉지 않고 분투하는 것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95년은 한용덕 뿐만 아니라 '페넌트레이스 최강' 이글스의 슬럼프가 시작된 해였다. 타선에서는 장종훈의 홈런신화가 이어졌고 마운드에서는 정민철이라는 특급 선발과 구대성이라는 특급 마무리가 나타났지만 팀의 성적은 바닥권이었다. 95년부터 98년 사이 이글스는 두 번의 6위와 한 번의 7위로 주저앉았다.
한용덕은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았고 이기는 경기와 지는 경기를 의식하지 않았다. 비록 구위는 이전만 못했고 해마다 승수보다 많은 패전 수를 쌓아가야 했지만 그는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선발로 던지다가 후배 이상목의 컨디션이 회복되면 다시 계투로 물러앉았고 그러다가 구대성에게 고장이 생기면 마무리로 출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지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서기도 했다.
그는 기록과 타이틀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감독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때로는 팬들을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마운드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며 최대한 많은 상대 타자들을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플레이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내 단순하고 담백했다.
야구선수 다운 모습 보인, 한용덕
| |  | | | ▲ 은퇴식에서 김인식 감독과 함께 | | | ⓒ2006 한화 이글스 | 그의 등번호는 40이었다. '40세까지 선수로 뛰겠다'는 그의 소박한 목표를 담은 숫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겨울 만 서른 아홉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구단은 그를 방출해버렸고 한 해 더 뛰고 싶은 마음은 결국 그쯤에서 접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값지게 이어온 선수생활이었고 돌아보면 완전 연소시킨 열 일곱 시즌이었다.
이듬해 구단은 방출되는 과정에서 은퇴경기도 갖지 못했던 한용덕을 위해 은퇴식을 열어주었고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그 자신, 타고난 재능과 조건 대신 하나에서 열까지 몸으로 부딪히며 터득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이제는 그의 일이 되었다.
올 시즌 이글스는 상당히 매력적인 마운드를 구축했다. 신인 류현진과 고참 문동환이 구성한 8개 구단 최고의 '원투펀치'와 그들을 뒷받침하는 '살아있는 역사' 정민철과 송진우로 구성된 선발진 그리고 '재활선수' 조성민과 지연규를 통해 이어지는 또하나의 국보급 마무리 구대성. 최고는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채 분투하는 흥미롭고 또 끈끈한 라인업.
물론 그것은 마운드 운용의 귀재 김인식 감독과 역대 최고 투수중 하나인 최동원 코치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어쩐지 그 잡초냄새 가득한 진용에서 한용덕의 분위기를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야구장에서마저 흑막이니 음모니 혹은 학연이니 무어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피곤한 시절. 한용덕이라는 단순한 사내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느끼는 것은 묘한 청량감이다. 기록과 타이틀을 위한 플레이가 아니라 혼신을 다한 플레이 끝에 남은 땀 배인 기록들을 보는 신선한 감동 말이다.
야구는 역시, 야구다워야, 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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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ussian Blue, 채도가 있는 모든 색 중에 가장 명도가 낮은, 가장 진하고 어두운 파란색. 파란색이라곤 하지만 프러시안 블루는 짙은 초록이 많이 포함된, 불순한 남색이다. (색 구성비 Cyan 63, Magenta 35, Yellow 14, Black 72) 1704년 독일의 색 제조업자인 디즈바흐가 강렬한 붉은색을 만드려다 우연한 사고로 생성된 정반대의 파란색이 바로 이 프러시안 블루였다. 독일 태생의 고유한 파란색이었던 까닭에 "베를린 블루"라고도 불린다. (당시 18세기 독일에 세워진 왕국의 이름이 프러시안이었던 까닭에 다른 유럽 지역에서 모두 프러시안 블루라고 부름.) 파란색 계열 중 가장 우울하고 어둡고 차가운 빛을 띠며, 과거 청사진을 인쇄하기 위한 염료로, 오늘날엔 화가들을 위한 유화 물감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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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하는 가치 | | Veritas, 虛無主義, 통찰 |
철학 | | "인간은 악하다. 인간이 착하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없다." - 순자(荀子) B.C. 298~238 |
이상형 | 투덜이 스머프 의 독설과 X 파일의 멀더의 냉소를 겸비한 자.  
| 심리적 기반 | 가끔, 이 인생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궁금해 한다. 인생은 비극이고 계속하면 할수록 더 큰 비극만이 찾아올 텐데, 왜 계속해야 하는가. 이런 태도는 낭만주의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면도 있다.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외로운 영웅의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으니까. 인생은 정말로 비극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 비극이기에 사람들은 고귀해진다.
| 라이프 스타일 | 마음 속은 어두울지라도 겉보기에 남들보다 특별히 더 비관적인 삶을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편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경향이 있다. 당신의 어둡고 우울하고 쓸쓸한 모습한 ‘치열한’ 지적 노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당신은 남들보다 더 정확히 현실을 이해하려 하고, 목사님들이나 주부들 대상 아침 라디오 방송의 미사여구에 기만 당하지 않으려 한다.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은 “비록 내가 지금은 이런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진심은 따로 없다. 그저 자신이 현재 보여주고, 살고 있는 삶이 당신의 진심일 뿐이다.
| 이 유형에는 노숙하고 음울한 남성의 비율이 많다. 인터넷 폐인들의 주류집단이다.
(저도 같군요. ㅋㅋ)
| 프러시안 블루와 비슷한 족속들 | 슈렉은 그의 영토에 쳐들어온 동화 속 주인공들과 완전히 차별되는 인물이다. 꿈과 낭만, 권선징악, 순수함과 선의 따위는 그의 영혼에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혼자만의 어두운 삶을 되찾기 위해 공주를 구하러 갔다가 사랑에 빠지는 ‘비운’을 겪는다. 영화의 결말이야 어찌됐든, 슈렉은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 가져야 할 모든 성격을 갖췄다. 음울하고 외롭고 냉철하며 과감하며,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는. |  |
| | 태종 이방원 1367∼1422. 조선 3대 국왕. 재위 1401∼1418. 역대 조선 임금 중 가장 냉혹하고 비범한 정치력을 발휘했던 천재 정치인.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로 조선 개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나 왕위 계승은커녕 공신 대접도 받지 못했고, 이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다. 정권 장악 과정에서 정도전을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뿐 아니라 세자를 포함,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과 그의 친척까지 살해한다. 이후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권 강화를 명목으로 쿠데타에 공을 세웠던 공신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특히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던 처남 등 외척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남김없이 숙청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태종은 신하들을 철저히 손에 쥐고 흔들며 자신의 뜻대로 정책을 밀어 붙여 왕권 강화와 새 국가의 기틀을 닦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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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 압박 있습니다. )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KTF의 협조(?)로 차비만 부담하며,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을 관람할 수 있었다. 작년보다 하루가 늘어난 4일간(21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이번공연에 본인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주말을 이용해 23일 토요일, 24일 일요일 공연을 다녀왔다. 23일 조이스 쿨링 그룹과 24일 자비눌 신디케이트 공연은 각각 지연도착과 조기 귀가로 인해 관람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둘을 제외한 다른 공연들이 매우 만족스러워 그에 대한 아쉬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9.23 SAT 조이스 쿨링 그룹 , 스테파노 볼라니 트리오, 빅터 우튼 밴드, 메시오 파커
9.24 SUN 임미정 퀄텟, 에릭 트루파즈 그룹, 닐스 란드그렌 펑크 유닛 , 자비눌 신디케이트
주말공연은 4시에 시작해 12시가 넘어서야 끝나는 긴 공연이었다. 해가 지지 않아서인지 오후시간에 배정된 팀들의 공연은 계속해서 공연장에 입장하는 관객들과 입장한 관객들이 자리를 잡는과정에서 형성되는 산만한 분위기로 인해 연주자에 대한 몰입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ECM에서 솔로음반이 나온다는 스테파노 볼라니 트리오와 임미정 퀄텟, 에릭 트루파즈 그룹의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작년 같은 경우에는 거의 같은 시각에 시작했던 팀들이라도 음악이 역동적이어서 몰입이 쉬웠던것에 반해, 올해 같은 경우는 작년에 비해 정적인 음악의 팀들이 많아서 몰입이 쉽지 않았던거 같다. ( 어쩌면 내가 공연 관람보다는 싸온 음식에 더 관심을 둔 사람 근처에 자리잡은 죄 때문인듯.... ) 그럼 주말공연에 있어 가장 뜨거웠던 3팀의 공연에 대해 후기를 써보겠다.
1. Victor Wooten Band
Victor Wooten, [Live in America] - Are You Ready, Babe (performed by Bootsy Collins)
- Member : 빅터 우튼 (베이스, 보컬), 엘리자 레지날드 우튼(기타, 보컬), 안소니 웰링턴(베이스, 보컬), 산드라 윌리암스(보컬), 데리코 왓슨(드럼), 칼튼 테일러(키보드)
기대는 어느정도하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이야....... 정말 기대이상이었던 공연이었다. 관객을 이끌줄 아는 빅터의 무대매너에 자리에 있었던 모든 관객들은 완전 매료되었다. 밴드의 공연시작이 알리는 자막이 나오고 무대에 등장한 빅터 우튼 밴드는 연이어 펑키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공연장 분위기를 점점 가열시켰다. 어느순간부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치며 음악에 몸을 맡긴체 이리저리 흔들대는 관객들을 찾는일이란 그다지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이날 이들의 공연중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몇가지 이야기 해보면 어떤곡을 연주하면서 갑자기 중간에" It's Family Affair"를 다같이 합창한 부분과 기타를 맡고 있던 엘리자 레지날드 우튼의 솔로 퍼포먼스 뒤에 이어진 "Kashmir" 연주였다. 엘리자 레지날드 우튼이 "Kashmir"의 귀익은 전주를 연주하자, 많은 관객들이 자리잡은 공연장은 더욱더 열기와 함성이 커졌다. 그 당시 분위기는 몇마디 말로는 다 표현못할정도다. 지미 헨드릭스와 비교한다는건 많은 실례가 되겠지만 이날 분위기에서 엘리자 레지날드 우튼의 연주는 지미를 떠올리게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공연이 마무리될 시점에 연주된 최근 앨범[Soul Circus]의 수록곡 Bass Tribute는 낯익은 연주자 Stamley Clark, Jaco Pastorious, Larry Graham, Bootsy Collins의 이름이 불려져서 개인적으로 매우 감명깊게 들었던 곡이다. 그리고 마무리는 앞서 연주했던 "Victa"(Soul Circus의 수록곡)의 후렴구를 다시 연주하며 끝냈는데 이곡은 관객과 서로 호흡하기에 최적인 노래였던거 같다. 빅터가 "My Name is?"라고 관객들에게 물으면, 관객들은 "Victor!!!"라고 대답해주는식으로 연주되었던 곡인데 공연 말미에 또다시 연주되면서 관객들을 일치단결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빅터 우튼 밴드의 전경

이날 환상적인 연주를 들려준 엘리자 레지날드 우튼 (기타를 멘체로 한바퀴 돌리는 묘기(?) 도 선보였다. )
2. Maceo Parker
p.s. Maceo는 메시오~ 로 발음한다는걸 본토발음으로 확인하고 왔음. ㅋㅋ

정통 소울 보컬을 라이브로 듣는 기회가 그리 자주 생기지 않았는데 정말 시원한 노래를 들려주셨던 여성보컬. (이름을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

레이찰스를 재현하며 You don't know me"를 부를때.

뒤에 있던 남자 백보컬... 이름과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아들인듯????
3. Nils Landgren Funk Unit
MLB디트로이트 저지를 입은 마그넘 프라이스는 랩 못지 않게 노래도 잘했다.

11명이 뿜어내는 연주는 가히 일품이었다.
2007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은 올해보다 하루 늘어난 9월 12일부터 9월 16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내년엔 또 어떤 뮤지션들이 라인업을 이룰지 사뭇 궁금하면서 1년을 열심히 살아 내년에도 가야겠다는 다짐을 괜히 하게된다. 올해보다 더욱 멋진 내년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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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이고 까다롭고 콧대 높은 자의 전형, 아테나 여신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 미네르바(Minerva)의 또 다른 이름. 제우스의 몸에서 태어나 어머니 없이 자란 아테나, 지혜는 물론 무예와 용맹성에서도 무서운 발군의 실력을 보인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신. 무적 방패 아이기스(Aegis)의 주인이기도 한 아테나는 거인 팔라스를 죽인 후 그의 가죽을 벗겨 자신의 방패에 씌웠으며, 페르세우스에게 청동 방패를 빌려 주어 괴물 메두사를 죽이도록 도왔다. 아름다움과 지능, 무예를 두루 갖춘 아테나는 모든 여신들 중 가장 강한 자존심을 지닌 여신이기도 하다. | |
동경하는 가치 | | hubris, 傲慢, 자신감 |
이상형 | "캔디"의 테리우스 와 "X 파일"의 스컬리를 뒤섞어 놓은 인물.   |
철학 | | "세상엔 현명한 엘리트와 우둔한 대중이 있으며, 엘리트가 우둔한 대중을 이끌 때 이상향이 구현된다." 플라톤의 철인 정치("philosopher kings" from "Republic") |
역사 | | 자신감(hubris, 傲慢)은 6세기 영국의 성 그레고리 대왕에 의해 7가지 가장 중대한 죄악으로 명시됐다. 신에게, 교리에, 계급에, 대중적 믿음에 도전하는 이들을 수용할 만큼 중세 사회는 개방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감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기 위한 중요한 가치로 인정 받았으며, 오히려 귀족적이고 예술적이며 고급스러운 취향을 위한 성격적 기반으로 인식되고 있다. |
심리적 기반 | | 당신이 동경하는 아테나의 자신감은 지적인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한다.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참신해야 만족하는 아름다움, "전에 하던 대로…"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름다움이다. 멍청한 사람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해도 용서될 수 없으며, 망하더라도 똑똑한 사람과 망하는 쪽을 택하는 도도함이기도 하다. 아테나의 자신감은 크리스토퍼 말로의 "닥터 파우스투스(Dr. Faustus),"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미스터 다아시 등에 의해 극적으로 묘사된 바 있다. |
라이프 스타일 | 당신은 언제나 똑똑한 사람을 알아보고, 고급스러운 생활이 뭔지를 안다. 같은 일을 해도 좀더 완벽하고 멋있게 하려는 욕심이 있으며, 같은 물건을 골라도 보다 아름답고 세련된 제품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당신은 백화점에 들어가 가격표를 보지 않고 옷을 고르고, 최신 디지털 기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며, 자동차를 살 때는 최고 옵션과 디자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 | 전체 네티즌들 중 당신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주류집단이다. 당신 타입에 속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젊은 편이며,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약간 많다. |
아테나 여신과 비슷한 족속들 | | 프리스트 오브 문(Priest of the Moon) 블리자드 사에서 출시한 워크래프트 III 나이트 엘프 종족의 우두머리. 나이트 엘프 군대의 사령관이자, 그들이 섬기는 신 엘룬의 사제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를 그대로 본뜬 캐릭터. 단호하고 용감하며, 높은 자긍심을 가진 존재다. (아테나의) 부엉이, 그리고 프로스트세이버 호랑이와 함께 전투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궁극기로는 엄청난 광역 피해를 주는 스타폴(Star Fall)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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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토스(Protoss) 블리자드 사에서 출시한 스타크래프트의 외계 종족.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초능력을 갖춘 존재로 영겁의 세월 동안 스스로를 은하계에서 가장 발달된 종족이라 자부해 왔다. 인구가 많지 않은 대신 "리버" 같은 로봇형 전사와 "사이오닉 스톰" 같은 초능력을 이용해 효율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 특징. 시나리오 상의 종족 특성은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며 자긍심이 높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  |
| | 미스터 다아시(Mr. Darcy)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남자 주인공. 겉보기에 시건방지고 무례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으나, 알고 보니 현명하고 사려 깊으며 진실한 인간성을 지닌, 요즘 트렌디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남성상. 여신 아테나와 마찬가지로 높은 지적 능력과 자긍심을 가진 존재로, 취향이 지극히 까다롭고 인간의 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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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All That Jazz 협찬으로 지난 9월 19일 LG 아트센타에서 열린 | Brad Mehldau Trio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 평일에 단 한번으로 내한공연을 한다는 것으로 추측해보아, 이번 메스니 & 멜다우 신보 프로
모션차 급하게 스케줄을 조정해서 내한한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간간히 빈 자석도 보였다. ^^;
우선 공연시작 1시간 30분 전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와 만나려 공연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는 책상에 이번 공연 포스터가 쌓여있었다.
살짝 고민하다가 어느 남자가 당당하게 포스터를 말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친구 몫까지 포스터를 4장 당당히(?) 챙겼다.
(하지만 오는길에 많이 구겨져서 고민 중....)
작년 PMG공연으로 처음 방문하게 되었던 LG ART CENTER는 이번이 두번째이긴 하지만,
사석이 많지 않다는 점에 내게 상당히 호감가는 공연장이다.
작년 방문때는 1층에서 관람하고 이번 공연은 2층에서 관람하였는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편안함도 꽤 괜찮다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생동감은 1층이..^^;)
사실 Brad Mehldau 앨범을 거의 듣지 않은 상태로 본 공연이고
게다가 평소에도 트리오 편성곡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은 터라
공연 초반부에는 조금 지루했다.
(연주된 곡 중에서 알아 들은 곡은 첫곡으로 들려준 " Oasis의 Wonderwall "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연이 조금씩 무르익으면서 후반부 몇곡에서 들려준 Brad의 솔로 연주는
Keith Jarrett을 연상시킬 만큼 환상적이였다.
그 덕분에 이제 정말 가을이라는 감상에 빠지기도 했다.
끝으로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공연장측에서 공지했던 공연시간에 Curtain Call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평일인데다가 싸인회까지 하는 일정을 가만하면 전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아님에도 조금 서운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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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soulramp/trackback/8/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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