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은집 !!! 그 이름의 유래를 난 잘 모른다. "저항의 미학"이 안경너머 나의 시야를 지배하던 스무살의 그시절. 백양로를 따라 줄지어 정열해있던 백양나무가 최루탄으로 뒤덮히던 4월 19일 이땅에 태어났다는 이유하나로 느껴야 했던 울분으로 설움으로 대강당 구석에 자리잡은 탈반의 문을 두들겼다 그날 한 선배 - 사학과 82학번(동포라고 했지만 실지로는 똥포 혹은 똥퍼로 불리워진)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 데모한번 제대로 해볼라고 왔습니다" 한참 나를 처다보던 그선배가 밥이나 먹자며 이 "보은집"으로 데리고 가서 엄청 술을 먹였던것이 나의 보은집과의 처음 인연이였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혹시 내가 학내기관원이 아닌가 해서 술먹여 알아볼라고 했다는 ..^^ 당시 보은집은 신촌시장입구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문화연구회(탈반), 현대문화연구회, 상대, 이과대, 공대 학회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신촌시장 안에는 페드라라고 하는 또다른 운동권 단골집이 있었는데 주로 문과대, 성하, 목하회 친구들로 항상 붐볐었다. 당시 주인아주머니를 우리들은 다들 이모라고 불렀고 무지하게 인심이 푸짐하셨던 우리이모님은 언제나 매상보다는 우리의 건강과 끼니를 걱정 해주셨다. 당시 800원자리 감자탕 한대접이면 장정 4명이서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녹색프라스틱 대접에 한가득 감자며 뼈다귀를 담아주셨는데 다먹고나면 무한리필을 해주시곤 하셨기 때문이다. 3평쯤 되는 가게엔 테이블은 3갠가 4갠가가 전부였고 자리가 없으면 그냥 바닥에 신문지나 박스를 깔고 앉아 앉은뱅이 탁자위에 우리 손으로 직접 김치와 막걸리 통을 직접 날라다 앉아 먹곤했다. 낮에는 민주광장이나 가두시위에서 만난던 사람들이 다시 저녁이면 보은집에 모여 조국의 미래르 걱정하며 술잔을 비웠고 청자한개비를 나누어 피우며 잡혀간 친구가 아타까워 감옥에 있는 선배 후배가 그리워 목이 터져라 민중가요 부르고 또부르고... 그렇게 3년의 세월을 그속에서 보냈다. 당시는 동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체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혹시 잡혀가면 사진속의 친구들이 모두 고초를 격는다고 해서.... 그래서 그 3년동안 단 한장의 사진도 없다. 구로공단 공돌이 준비생활... 한참이 지나서 다시 찾은 보은집에 이모님은 과거 그대로 여전히 문간의자에 앉아 나를 맞아 주셨다. 이모님은 그동안 뇌수술을 받으셨다고 했다. 약간은 말이 어눌해 지셨지만 아직도 나를 알아보시고 "어 순돌이 왔네" 하셨다.거칠어지고 노인반점이 여기저기 생긴 이모의 손을 한참을 잡고 "이모 이안해 그냥 딴일좀 하느라고 못왔어"하고 한참을 같이 울었었다. 그때는 수술회복이 절되셔서몸이 많이 불편하셨는지 이모님을 꼭따닮은 따님과 아드님이 일을 도와 주고 계셨다. 다시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왠지 부드럽게 목넘김이 있는 생맥주가 더 좋아서 의사공부 바쁘다는 핑계로 잘 가지 못하던 차에 의사고시 합격한날 동기들하고 술한잔 하자며 다시 찾으니 이전을 했다고 했다 이전한 곳을 찾아가 보니 많이 넓어지고 깨끗해 지기는 했지만 이모님도 안보이고 왠지 어색해 주위만 맴돌다 그냥 집으로 왔었다 그리고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미 나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누구의 말처럼 나도 변절하고 훼절했다. 나 자신도 변절한 놈이지만 뉴스에 스쳐지나는 몇몇 군상들 그시절 보은집 구석에 모여 앉아 조국앞에 부끄럽지 말자고 맹세하던 그 군상들이 아집과 자기만족 그리고 야욕에 사로잡혀 조국의 이름을 더럽히는 현장을 목도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다시 보은집이 내 가슴속에 아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