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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도 어민들의 고래 납치[?]작전
 한국 근해에 자주 나타나다가 요즈음은 보이지 않는 귀신고래 고래 사할린 고래 연구소가 근해에서 촬영한 사진 ------------------------------ ----------------------
해양수산부는 한반도 삼면의 바다를 연한 해안 거주 주민들의 모든 삶을 조사했던 결과를 2002년 '한국의 해양문화'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했다.
많은 조사원들이 낙도와 오지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니며 수많은 남녀 어민들가 인터뷰하고 채록한 내용을 8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 정성에 비해서 제본 상태가 [예산 관계 인 듯]너무 허술하고 사진이 많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쉬운 점이지만 조사원들의 정성이 느껴지는 귀중한 한국 해안 주민의 기록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인터넷에 올리면 여러 향토 사학자들이나 민속학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는 1998년 6 22일, 나 승만 조사원이 완도와 고흥 반도 중간에 위치한 전남 완도군 금당면 금당도 거주 송 군섭 씨 [당시 69세]를 인터뷰해서 얻은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내용은 섬 근처 낮은 물가로 올라와서 오도 가도 못하던 고래를 금당도 주민들이 수십 척의 작은 낙배[낙싯배]들을 몰고 가서 섬으로 끌고 오면서 겪은 모험담을 기록한 것이다.
다 금당도 어민의 다시마 말리기 --------------
이 이야기는 대화자 송씨가 20대였던 1940년대에서 1950년대의 이야기 인 것 같다. 아래는 한국 해운조합의 사이트에서 소개하는 금당도의 역사이다.
-금당도는 고려시대 이후 장흥에 속해오다 1896년 완도군이 신설되면서 현재의 완도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6년에 평일면, 생일면과 함께 금일읍으로 합병되었고, 1986년에 금당면으로 승격되었다. 금당이라는 지명이 붙게된 유래는 금일, 금당, 생일도의 금곡 등 금자의 지명이 붙은 것으로 보아 금이 산출된 고사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한다. 즉 금댕이가 금당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고장에서는 정계, 법조계, 학계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문화재로는 열여 죽산 안씨 경주 정씨 비각과 열녀 천안 전씨비가 있으며, 농신제비, 상하당 설화 등이 전해진다.
동제로서는 상ㆍ하당제가 성대하게 지내지고 있다.
관광자원으로서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금당팔경이 있으며 문어, 멸치, 미역, 다시마, 김, 톳 등의 특산물이 난다.
99년통계 - 가구 562호, 인구1440명, 보건소2, 선착장10 해안선 연장28.2Km ------------------------------------------------  알래스카 이누이트 족의 [에스키모]고래잡이 -------------------------------
우리들은 낚시질을 자주 다녔다.
옛날에는 이 바다에 고기가 많았다. 저 위 육지 가까이까지 갈치도 올라오고 조기 같은 것도 올라오고 갖가지 고기가 다 올라왔다.
물이 깨끗하고 고기도 많았기 때문에 돌고래가 수백 마리씩 떼지어 다녔다.
그리고 고래도 있었다.
내 젊을 때 15미터 정도 되는 고래가 돌고래한테 쫓겨서 물가로 밀린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썰물로 물이 빠져 버리자 그만 몸뚱이가 뻘에 얹혀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그놈을 잡아다가 집집마다 나누어 먹었다.
그런 일이 있고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또 새끼 고래가 밀렸다. 그래서 이놈을 잡아서 부락 앞으로 데려와서 잡아먹자고 의논했다.
그리고는 1톤 정도 되는 작은 낙배들 20여 척을 끌고 가서 줄로 고래를 얽어서 매가지고 물만 들어오면 소 몰고 가듯이 끌고 가려고 했다.

서남해안의 낙배- 전마선 ------------------
물이 들어서 끌고 가는데 고래가 새끼라고 해도 컸다. 어미 고래는 한쪽에서 보면 반대쪽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새끼는 좀 덜한 편이다. 물이 들어서 그 놈을 몰고 갔다.
딱 매가지고 배 스무 척으로 힘센 사람들이 한 배에 노 하나를 더 설치해서 두 사람이 노를 저어서 ‘어야 디야 ’하며 저만치 부락이 보일 정도까지 끌고 왔다.
부락 사람들도 고래 끌고 오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전부 갯가에 나와서 굿을 보고 있었다.

북 유럽 파로 제도의 밍크 고래 --------------
그러나 우리가 물이 깊은 곳을 지나게 되자 고래가 큰 꼬리를 내 저으며 한번 꿈틀하더니 배를 끌고 물속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다.
배가 많으니까 배들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20척이나 되는 배를 끌고 빠르게 도망갔다.
배 20척이 전부 총알이 날듯이 끌려가게 되었다. 무섭게 달리는 배위에서 다들 겁을 먹고 이제는 우리 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고래에 끌려가는 우리를 보고 놀란 동네의 다른 분들도 배를 저어서 우리를 쫓아왔다.
그 때 물 때는 아침 열시쯤 만조가 되어있을 때였다. 고래가 물을 차고 노 젓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내뺐다.
청산도라는 섬의 앞바다까지 우리 동네 낙배 떼가 단체로 끌려갔다.청산도를 지나면 제주도나 일본으로 빠지는 망망대해가 나온다.
한나절을 끌려서 그곳에 까지 가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하늘의 별들이 총총히 떴다.
점심 준비도 하지 않아서 배가 고팠다.
밤이 깊어지자 고래도 힘이 약해져서 배들을 끄는 속도가 슬슬 느려졌다. 그러더니 정지를 하고는 잠시 후 물에 뜬 고래는 배를 하늘로 내놓고 벌러덩 누워 버렸다. 우리는 그제야 마을에서 두 쫓아온 배들과 그들이 섬을 출발 하면서 준비해온 밥을 나누어 먹었다.
탈진한 고래를 슬슬 끌고서 밤새 노를 저어 마을에 돌아오니까 다음날 점심 때가 다 되어 있었다.
마을로 돌아와 죽은 고래를 도끼로 찍어 고기를 나눴다.
 서영 사람들은 고래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지만 다 그런것이 아닌듯하다. 아이스랜드 레이캬빅 식당의 고래고기 요리. -----------------------------------------------------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고기를 제일 먼저 먹은 사람이 며칠 후 죽었다. 고기를 제일 먼저 썰어서 먹은 사람이 죽었는데 몸집도 좋고 건강했었다.
그 고래 고기를 먹고 죽었는지 너무 먹어서 위장병으로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고래 고기를 다 나눠 먹은 동네 사람들 모두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일본의 고래잡이 배들 --------------------
이웃 일본만 해도 작은 배들을 타고 고래를 잡는 해안 형 포경업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조상들의 고래잡이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반구대 암각화 여러 고래들과 이를 잡는 작은 배와 주민들이 보인다. -------------------------------------
그러나 그 후, 특히 조선에 들어와서 포경업은 쇠퇴하고 말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고래를 잡아도 관청에서 무조건 압수해 가버리고 또 몰래 고래를 잡아 먹으면 심하게 닥달을 당하기 때문에 어민들은 눈앞에 고래가 오가도 잡지도 않았을 뿐더러 해변에 밀려온 죽은 고래를 다시 바다로 밀어 내버리기도 했었다.
그래서 금당도 어민들이 고래잡이 작살이니 뭐니 하는 고래잡이 어구도 없었고 고래를 잡은 경험도 없었으니 고래를 결박해서 동네까지 끌고 오는 순박한[?] 어법(漁法)을 사용 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지금은 믿어지지 않으나 고래가 1960년대까지 고래가 서해에서 포경선들에게 잡혔으니 그때는 이런 표류 고래와 어민들이 만나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윗 모험담에서 송씨가 자기들이 납치 해온 고래가 새끼 고래라고 했지만 고래는 거의 다 성장할 때까지 어미 고래와 같이 다니는데 새끼만 따로 잡은 것은 드문 일이다. 다른 고래 종류인지도 모르겠다. 몸집이 작은 밍크 고래일 수도 있다. 고래의 힘이 어느 정도 센 것인가는 모비 딕[ 백경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밍크 고래 --------------------
그래도 작은 고래가 낙배들 20여척을 이끌고 점심부터 그날 밤까지 달렸다는 것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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