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부터 일자리를 찾아 먼 중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온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
부두 근처에서 임시 켐프를 짓고 그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고 그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이나 타운이 건설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
서부 개척과 함께 생기는 새 도시 변두리에는 어김없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중국인들의 정착지가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은 그 곳을 차이나 타운 이라고
불렀다
처음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은 특히 타운이랄 것도 없이 그저 도시 변두리에
모여 사는 임시 집단 거주지였다 도시가 커지면서 상업지역으로 발전을 하는 곳도
있지만 도시의 경기가 바닥을 치고 사람들이 떠나 텅 빈 고스트 타운이 되면
차이나 타운도 하던 장사를 털털 털고 장소를 옮겨 갔다
1900년대 초에 아시안의 서부지역 이주가 50년이 되었지만 켈리포니아에는 중국인 입국금지법이 1882년 발효된 이후 20년 동안 중국인 인구는 4만 오천으로 줄어드는
반면에 일본인은 하와이에서 건너 온 이주자들이 중국인들의 인구 숫자를 상회 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일본인들도 LA 차이나타운 옆에 리틀 도쿄라는 재팬 타운을 건설하였다
리틀 도쿄 LA
한국인의 최초 집단 거주지는 어디에서 시작하였을까
1904년 LA는 지금과 같이 미국 제2의 도시가 아니었고 지금 최고 부자들이 사는
고급 주택지 베버리 힐스도 그저 석유를 채굴하는 언덕이라고 생각 하던 때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는 의외로 LA 한인 타운에서 약 100키로 나 멀리 동쪽에 위치한
리버사이드라는
도시에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위의 오래 된 지도가 보여주듯 산타아나 강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오랜지 농장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여들고 군소도시가 생성되었다
1906년 서부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지진이 나고 이어 화재로
도시가 파괴 되자

샌프란시코 대지진과 화재 후 폐허가 된 모습

폐허 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 흔적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살 곳을 찾아 기후 좋은 남쪽으로 이주 하여 지금의 LA가
큰 도시로 발 돋음 하게 되기 전 그 때는 오히려 대규모의 오렌지 농사를 짓고 사는
리버사이드가 소득도 좋고 더 잘사는 도시였다고 한다

리버사이드 오랜지 농장들은 배꼽 오랜지를 개발하여 히트를 쳤다고 한다

현재 오랜지 밭은 주택이 들어 서고 남은 곳은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 되어 있다
이곳은 여름의 기온은 섭씨 40도를 훨신 웃도는 지역이라 일교차가 심하여 과일
농사에는 제격이었으나 주택이 들어서고 물줄기가 끊기자 농토로서는 더이상
활용가치가 없어졌다 사막속에 물줄기가 흐르는 오아시스 같은 지역이었다
1903년부터 조국을 떠나 온 하와이 한인들은 노동 계약이 끝났거나 또는 계약을 파기하고 하와이 보다 조건이 나은 일자리를 찾아 본토에 들어 왔지만 특별한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쉽게 얻은 직업은 오렌지 농장 노동일이었다

오랜지 밭에서 일을 하는 이주 노동자
처음 오랜지 밭에 온 한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일자리를 얻어 살아 갔다
물론 피곤하니 청소도 안 했을 거고 색시도 없는 홀아비 신세에 냄새도 나고 더럽기
그지 없는 생활을 하는데
더구나 사람들이 새로 나타나 일자리를 얻자 동포끼리 서로 헐뜯고 싸움질까지 하여
남들에게 눈총을 받고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일본인들은 저희들끼리 똘똘 뭉쳐 직업 알선소도 2개나 운영 하며
나가무라 상은 오늘부터 케이트씨 농장에 가서 일하세요
야마구찌 상은 화이트씨 네로 가시고요 아주머니는 병원 청소부로 가세요
하며 일자리 알선 교통정리를 척척 하였다
우리 민족은 혼자 있으면 잘 헤쳐나가는데..
그때도 여럿이 있으면 문제가 생겼나 보다.. 여럿 중에 골통도 나오고..
역시 한국인은 위기 때 마다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을지문덕 장군, 강감찬 장군, 이순신 장군 등 위기 때 마다 나타나 나라를 구하는
무장들이 있는 반면에
정신적인 주춧돌 역할을 하여 민중을 깨우치게 하는 분들도 우리 선조 중에는
상당히 많은 것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그 분들 중에
리버사이드에는 우리가 교과서를 통하여도 잘 알고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나타났다


이사진은 주립공원 겸 역사 박물관 시트러스 공원 박물관에 들어 가면 입구 벽을 한면을 장식한 사진이다
젊은 청년 이었던 도산 선생의 특징은 민중에 들어가 솔선수범하며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민중을 일깨워 주는 스타일이라 리버사이드 농장에서도 더럽게 사는
동포들의 집을 손수 청소하여 주기도 하고 수시로 민족의 정기를 세우는 열변도 토하였다
"우리가 민족을 돕고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 중에 지금 눈 앞에 있는 오랜지 한 알을
정성껏 따는 것도 애국입니다"하며 한인들을 깨우쳤다
그분 덕분에 리버사이드의 우리 한국인들이 정신을 버썩 차린 것이었다
1년 즘 지나니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깨끗해지고 일을 잘하기 시작하니까 농장 주들이
한인이면 오케이 였다
거기에 Alta Vista오랜지 농장주 Rumsey가 도산 선생에게 1천5백불을 빌려주고
직업 알선 에전시를 차리라는 것이다
Korean Labor Bureau 한국인 직업 소개소를 차리고 직업을 알선 하여 주었는데
하와이 월 임금이 16불인 반면 리버시아드는 직장에 따라 다르지만 30-40불이나
되었다
하와이에서의 수입 보다 2배나 되자 많은 한인들이 리버사이드로 계속 찾아 들어왔다
직업의 종류는 오랜지 밭 노동 외에 도로 공사장, 수로 공사장 철로공사장 등의
잡역부와 요리사, 가정부 같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
이런 관계로 켈리포니아에 만 약 1천명의 이주한 한인들 중에 3백명의 한인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동네를 이루게 되자 그 곳을 한국인 정착민 촌으로 부르게 되어
미국 한인타운의 시초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직업이 안정되자 수입의 10퍼센트를 한인회비로 내어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보냈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감동적이다
그나마 그 것을 내지 않으면 나라가 없는 시절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까워
였을 거다

1908년에 제작된 당시 지도를 보면 1532 Pachappa Avenue 코너에 약 3500평 되는
부지에 2층 건물 1채와 16개의 단층 건물이 보이고 한인 정착 지역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 곳은 지금의 리버사이드 다운타운 14가와 인접하여 동쪽으로 한 두 블럭 떨어진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LA가 대도시로 발전하자 리버사이드의 한인들은 좀더 나은 삶을 찾아 LA로 이주하여
1937년 리버사이드 오랜지 밭의 한인촌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한인 정착민들을 함께 모아 놓고 사진을 찍고 있는 도산선생

리버사이드 시청 건너 편 도심 한복판에는 도산선생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