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스님 이야기 1천진난만(天眞爛漫).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과 행동을 지닌 한 스님이 있었다. 비록 세상의 나이는 해가 갈수록 더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정열은 식지 않았고 법(法)에 근거한 행동은 걸림이 없었다.
마치 아이처럼. 지난 1976년 10월 열반에 든 우화당(雨華堂) 도원(道元)스님이 바로 그 어른이다. 스님을 아는 도반과 후학들은 “아무 것도 꾸밈없이 일생을 오로지 불심(佛心)의 세계 속에 안심입명(安心立命)하다가 무상대열반(無上大涅槃)에 원명적조(圓明寂照)하신 큰스님”이라고 평한다.
우화스님은 지금부터 100년전인 1903년 4월7일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에서 태어났다. 스님이 세상과 인연을 맺은 고향 이름부터가 성도(成道)이니, 불연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혼자 앉아있기를 좋아해 어른들에게 “이상한 일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니, 참선수행의 근기를 미리 보여주었다. 홀로 있어도 울거나 보채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화 스님 비문에는 “그 모습이 원래 도승(道僧)의 골격으로 약간 울룩 불룩하지만 착하고 순하기 비할데 없어 사람들은 부르기를 부처라고 별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천진난만한 성품… 언제나 웃음꽃 "
“대오는 커녕 소오도 못해” 늘 겸손
스님이 불법(佛法)과 인연을 맺은 직접적인 동기는 15세 때였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무상(無常)을 느꼈기 때문이다. 출가인연에 대해 스님은 생전에 “조부의 별세하심을 보고 인간세상의 무상을 크게 느껴 마을에서 학문을 익히고 배우려는 뜻을 버리고 덕유산으로 입산하여 공부하게 되었다”고 밝힌바 있다.
불문에 들어 스승으로 모신 어른은 덕유산 영각사 영명(靈明)스님이다. 은사스님을 모시고 공부에 전념하던 스님은 이후 해인사 불학강원(佛學講院)에서 내전(內典)을 두루 공부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친 스님은 입선(入禪)하기 위해 금강산 마하연으로 주석처를 옮긴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용성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친 뒤로 우화스님은 오대산과 묘향산에서 화두참구를 위해 마음을 가지런히 했다. 이때 인연이 닿은 스님들이 만공(滿空), 혜월(慧月), 한암(漢岩), 용성(龍城)스님이다. 당대의 선지식으로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스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탁마(琢磨)했다. 우화스님이 수행정진하는데 있어 경지에 올라 자유자재의 길에 접어든 ‘의미있는 기간’이었음에 틀림없다.
우화스님은 법문을 청하면 “내가 뭘 알아야 법문을 하제”라며 손사레를 하면서 사양을 했다. “수좌는 참선에 들어 열심히 화두를 살피는 것이 공부”라고 강조했던 우화스님은 몸소 보여주는 수행으로 구도자의 길을 밝힌 어른이다. 하지만 ‘부처님 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스님이 말년에 노환으로 법체가 강건하지 못할 때 찾은 후학이 “건강을 회복하신 후 가르침을 달라”고 청하자, 스님은 “무슨 소리냐. 이까지 몸은 본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질 것인데, 젊은 스님에게 부처님 법이나 전하고 죽으면 영광이지”라며 장부의 기상을 보여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우화스님이 맛본 깨달음의 경계는 무엇이며, 불법의 진리는 어떤 것인가.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탈락신심(脫落身心)하고 신심탈락(身心脫落)이여, 운부청산(雲浮靑山)에 일봉(一峰)이 독로(獨露)로다.” 그러나 우화스님은 생전에 불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대오(大悟)는 커녕 소오(小悟)도 못했다”고 겸손하게 공부의 경계를 말했다.
하지만 우화스님이 도의 경지에 올라 후학들에게 지남(指南) 역할을 해 주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이는 없다. 우화스님은 천진한 미소가 유명하다. 도반이나 후학과 법담을 나누고, 재가불자들에게 법문이나 대화를 할 때면 언제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여보게,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진리에는 지름길이 없는게야”라며 경책을 아끼지 않으며, 마음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한 어른이 바로 우화스님이다. 자꾸만 각박해지는 요즘 세태에 더욱 그리운 스님이다.
우화스님 이야기 2
‘천진도인(天眞道人)’ 우화스님. 스님은 늘 보통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은 경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주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겼던 우화스님은 보시받은 돈을 알뜰하게 절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후학들은 이에 대해 “우화 큰스님은 인과법에 근거한 경제관을 갖고 계셨다”고 평한다.
하지만 돈을 쓰는데서도 스님은 보통사람의 상식을 과감하게 깨트렸다. “큰스님 돈을 좀 빌려주십시오”라고 하면 두말없이 빌려주었다. 그리고는 이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이 말속에는 부처님 인과법의 지중함이 담겨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으며,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이 된다는 인과법을 알고 있기에 돈을 빌리면 이번 생이 아니라도 다음 생에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과법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에 우화스님은 당신 스스로는 ‘알뜰한 살림’을 살았지만 무엇을 빌려주는데 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 스님이 나주 다보사에 주석하던 시절 도둑까지 감복시킨 스님의 일화는 유명하다. 오랫동안 다보사 해우소 불사를 위해 권선(勸善)을 하고 시주금을 모으고 있던 어느 날이다. 밤늦은 시각. 흉기를 든 밤손님이 스님 요사채에 숨어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우화스님이 “무슨 일로 왔느냐”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깜짝 놀란 도둑이 “돈이나 귀중품이 있으면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스님을 협박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알았는지 “변소 지으려고 모은 돈을 내 놓으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스님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화장실 지으려고 돈을 모은 게 있기는 하지만, 왜 가져가려고 하느냐”며 거절했다.
" 도둑과 실랑이… 감화시킨 일화 유명 "
은사 운봉스님 “우화가 가득하구나”
흉기 앞에서도 당당한 스님의 모습에 도둑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당황한 도둑이 “돈을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어찌할 수도 있다”고 협박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우화스님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화장실 지어줄거냐, 나는 절대 못준다” “돈만 내놓으면 해치지 않겠다” “그래도 못준다” 스님과 도둑은 밤새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 보니 날이 밝았다. 스님에게서 돈을 받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한 도둑이 “스님처럼 지독한 사람은 내 처음 본다”면서 가려고 하자, 그때서야 우화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냥 돈을 줄 수는 없고, 빌려줄 수는 있다.
” 어안이 벙벙해진 도둑은 스님의 뜻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답했다. “그러면 빌려주시오” 도둑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아무 말 없이 해우소 불사를 위해 모은 돈을 내놓았다. 도둑은 “달랄 때는 안주고 빌려주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스님에게 돈을 전해 받고는 되돌아갔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스님에게 돈을 빌려간 밤손님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우화스님을 찾아와 “빌린 돈 갚으러 왔습니다. 받아주십시요”라며 돈을 갚았다고 한다. 천진난만한 스님에게 감복을 받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천진도인’ 우화스님의 성품을 잘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나주 다보사에 있는 스님 비문에는 이렇게 스님의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스님은 과묵하시고 단순 담백하시니 스님의 모습을 보는 이나 음성을 듣는 이가 누구나 마음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니 사람들은 모두 천진도인 스님 천진불(天眞佛)뵈러 간다고 하였다.”
스님은 1937년 천성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서 조실 운봉(雲峰)스님에게 우화당(雨華堂)이라는 법호를 받고 법제자가 되었다. 당대 선지식이었던 운봉스님은 우화스님이 다른 스님과 법거량을 하는 것을 보고 “금일 도원(道元) 정상에 우화(雨華)가 만지(滿地)로다”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도원은 우화스님의 법명이다.
평소에도 참선공부을 소홀히 않던 우화스님은 운봉스님의 법제자가 된 후 더욱 매진하여 화두를 놓지 않았다. 이 같은 인연은 해방 후 나주 다보사에 주석할 때 제방선원의 수많은 납자들이 운집하는 근간이 되었다.
우화스님 이야기 3지금부터 40여 년 전 나주 다보사 마당 한쪽에서 졸고 있는 스님이 한분 있었다. 동그란 방석을 깔고 앉아 천진한 표정으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잠을 자다, 가끔씩 깨어 자리를 이동한다. 이유는 볕이 들어오는 곳을 따라 조금씩 옮기기 때문이다. 이 스님이 바로 천진도인 우화스님이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좌가 “스님 뭐하요”라고 슬며시 물으면, 화들짝 깨어서는 “화두 들고 있는 거야”라면서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스님은 호미나 괭이도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울력을 했다. 자갈도 고르고 잡초도 뽑고, 상처투성이인 우화스님의 손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 상좌들이 도구를 사용하라고 해도 우화스님은 묵묵부답, 오로지 맨손으로 도량을 가꾸었다. 때문에 우화스님을 아꼈던 고암스님, 도광스님, 전강스님 등 어른들에게 상좌들이 혼쭐이 난적도 여러 번이다.
본 비구니 스님들이 “큰스님, 손이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라면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 우화스님은 깜짝 놀라 손을 떨치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째 여자가 손을 잡는다요.”
다보사에 도인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수좌들이 찾아와 울력하고 있는 스님을 보고는 열의 아홉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저.. 여기 주지인 우화 큰스님 어디 계신가요” 그러면 우화스님은 얼굴조차 들지 않고 “여기 주지 없소.” 나중에서야 허름한 행색을 하고 풀을 뽑는 어른이 우화스님임을 알고 인사를 드리면 얼굴이 빨개지면서 “주지는 무슨……. 주지가 아니고 일꾼입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맨손으로 울력 ‘상처투성이’
“주지는 무슨… 난 일꾼입니다”
우화스님은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스님이나 재가불자가 찾아오면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몸을 45도 정도 틀고 대화를 할 정도. 그나마 대화도 끊기길 일쑤였다. 양치질도 당신 방에서 하는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했을 정도. 오랫동안 스님을 시봉한 일륜스님(현재 다보사 주지)이 문틈으로 보고는 문을 열면서 “스님, 뭐하세요”라고 부르면 역시 깜짝 놀라 “왜 몰래 쳐다봐”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일륜스님이 “스님 양치질은 밖에 나가서 하세요”라고 청을 하자, 우화스님은 “밖에 나가서 하면 다른 사람이 보잖아”라며 그 까닭을 설명했다. “수행자는 상대편에게 불쾌감을 주면 안 되는 거여. 어떻게 승복을 입고 남에게 양치질 하는 모습을 보여줘.” 우화스님은 상좌를 내보내고 문을 잠가 버린 후 양치질을 계속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모시는데 있어 우화스님의 정성은 극진했다. 대웅전 부처님께 올릴 향을 사기 위해 나주에서 부산까지 당신이 직접 손수 갔다. 교통도 불편해 부산까지 다녀오려면 새벽 일찍 출발해도 밤늦게야 돌아올 수 있다. 상좌들이 “스님 연로하신데, 그런 것은 저희들에게 시키세요”라며 말하면 우화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부처님께 올릴 공양인데 내가 직접 가야제.” 그런데 문제는 절 밖에서는 절대 공양을 하지 않는 스님이 하루 종일 굶는다는 것이다. 지친 몸으로 다보사에 돌아온 우화스님은 일주문 기둥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배고파.”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났던 우화스님. 하루 종일 눕는 법이 없었다. 혹 피곤해서 몸을 눕게 되면 등을 바닥에 붙이지 않고 옆으로 누웠다. “스님 편하게 누우세요” “아녀, 부처님이 옆으로 누우셨는데, 제자가 따라해야지” 겨울이 오면 스님은 이불도 안 덮고 방석으로 다리만 가릴 뿐이다.
다보사 모기는 행복했다. 특히 우화스님 방에 들어선 모기는 실컷 포식을 했다.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고자 했던 우화스님이 절대 모기를 잡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좌 일륜스님의 기억이다. “모기가 피를 얼마나 빨아 먹었던지, 모기의 배가 빵빵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만 지켜보니, 스님이 모기를 잡을 생각은 안하고 입으로 조심스럽게 훅 불더라구요.
그러면 배가 터질 듯한 모기가 굴러서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보면 스님의 온몸이 모기가 물어 빨갛게 되었습니다.” 일륜스님은 “당시에는 은사스님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생활 속에서 빈틈없이 계율을 지키려 했던 스님의 뜻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화스님 이야기 4
우화스님은 오도송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 비문에 실려 있는 오도송은 평소 우화스님과 절친했던 일타(一陀)스님이 우화스님과 전강(田岡)스님의 법거량을 소재로 삼아 재정리한 것이다.
만공(滿空)스님이 열반에 들던 1946년 전강스님과 우화스님이 전화로 주고받은 대화에서 비롯됐다.
“만공스님이 열반하셨으니 한마디 하소” “나는 도(道)도 못 깨쳤는데, 어찌 큰스님 열반을 놓고 뭐라고 하요” “우화스님이 도인인줄 다 아는데, 왜 한마디 안하려고 해요” “무슨 소리 하요. 나는 할말이 없어요”
계속해서 우화스님이 뜻을 접지 않자, 장난기가 발동한 전강스님이 “정 안할려면 다보사를 내놓으시오”라고 농을 했다. 그제야 우화스님은 못이기는 척 하고 “그럼 내 한마디 하지요”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설부청산(雪浮靑山)에 일봉(一峰)이 독로(獨露)로다” 푸른 산에 함박눈이 내리니 한 봉우리가 길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전강스님이 “그거는 도인이 하는 소리인데”라면서 탄복했다고 한다.
신식 학문이나 경전공부를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한 우화스님은 평생 화두참구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졌다. 불법의 향기가 몸과 행동에 훈습(薰習)되었던 우화스님은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할 때 공부를 점검받았다.
하루는 정진대중을 불러 모은 만공스님이 대중들에게 “용맹정진한 것에 대해 한마디씩 하라”고 했다. 수좌들이 한철 공부한 바탕을 드러냈다. 이때 성철스님은 “미륵불을 보고 왔지요”라고 답했고, 우화스님은 “본래 무생(無生)인데, 용맹정진이 어찌 따로 있으리요”라고 경계를 보였다.
만공스님은 그날 공부 점검을 끝낸 후 “성철수좌가 1등이고, 우화수좌가 2등이다”라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우화스님 상좌인 일륜스님(현 다보사 주지)이 해인사 선방에 방부를 드리겠다며 은사 스님에게 인사를 했다. “스님, 해인사 갈라요” “거기가 뭐하게” “선방 갈려고요” “선방 가서 뭐 하려고” “선방에 가서 화두 들고 참선하지요” “화두가 뭔지 알어” 선원에 가는 상좌에게 공부 방법을 일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일륜스님이 “몰라요, 스님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질문 하자, 우화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화두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고, 또 배우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해야 돼”
" 만공스님 회상에서 용맹정진 "
“화두는 문자 맞추기가 아니야”
우화스님의 공부 경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일륜스님이 해인사에서 한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인사드릴 때의 일이다. “선방 공부 어떻게 했어”라며 우화스님이 공부한 내용을 묻자, 일륜스님이 일화를 들려주었다.
1972년쯤 해인사 선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해인사 선원에는 성철스님, 일타스님, 지월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이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용맹정진 마지막 날 대중방에 수좌들이 정좌하고 있었다. 성철스님이 장군죽비를 들고 수좌들 사이를 거닐면서 “밥 값 내놔”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장군죽비를 수좌들 어깨에 내리쳤다.
순간 해인사 선방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일촉즉발의 위기감마저 돌았다. 생사를 건 한철공부를 끝내고 진검승부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한 젊은 수좌가 게송을 읊어 정적을 깼다.
그 소리에 뒤돌아선 성철스님 한걸음에 달려가 “으악”하면서 장군죽비로 내리쳤다. 젊은 수좌가 지지 않고 또 다시 게송을 읊고는 “한대 더 때리세요”라며 큰소리를 치자, 성철스님 역시 큰소리로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 “안 때려 임마”
또 다른 수좌 앞에 선 성철스님이 “밥값내”라며 죽비를 내리자, 그 수좌는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열반에 드셔서…….”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성철스님은 “집어쳐, 죽었어”라고 죽비로 쳤다. 그 수좌가 또다시 말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부처님 이야기’를 하니 성철스님은 한마디 던졌다. “죽었다니까, 임마”
위와 같은 일화를 이야기하는 상좌 일륜스님의 말을 우화스님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일륜스님이 “스님,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드리자, 우화스님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맞지 않았느니라” 이어 우화스님은 “화두는 문자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우화스님 이야기 5천진 도인 우화(雨華)스님. 어린 아이처럼 백설(白雪)같은 언행을 지녔던 스님으로 당대 선지식인 운봉(雲峰)스님의 법맥을 이어 받아 현대 한국불교의 주춧돌을 놓았다. 비록 강단의 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는 못했지만, 스님의 마음 속에는 늘 참선화두를 지니고 간절히 수행하겠다는 원력이 가득했다. 또 마음속 원력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직접 실천했던 어른이다.
지난 13일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서옹스님처럼 우화스님도 1976년 입적에 들 때 같은 모습을 보였다. 1976년 우화스님 입적 당시 나주 다보사에서 스님을 시봉했던 일륜스님의 기억이다. “우리스님은 말년이 되자, 몸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또렷하셨지요. 평소에도 ‘내 공부하는 자세로 가련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우화스님은 열반에 드는 날 당신이 주석하던 방으로 상좌를 부르고는 “나를 앉히거라”라고 당부했다. 뜻을 따른 상좌 일륜스님(나주 다보사 주지)은 은사스님 곁에 무릎꿇고 앉았다. 우화스님은 고개를 약간 떨어뜨렸지만, 평소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 그대로 움직임이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을 뿐이다.
평소 화두 참구하듯 ‘좌탈입망’
갈수록 그리운 ‘평생 천진도인’
그리고 몇시간 흘렀을까. 스님의 숨소리가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렇게 우화스님은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다른 이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듯 고요한 열반을 맞이했던 것이다. 우화스님의 입적 당시 일화를 설명하는 일륜스님의 눈에 이슬이 송송이 맺혔다. “우리 스님은 돌아가시는 최후의 순간까지 화두를 놓지 않은 어른이셨습니다.
우리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부고(訃告)를 제방선원에 알리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수좌들이 찾아와 큰스님의 입적을 추모했습니다.” 비문에는 우화스님의 입적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스님은 평소에 좀처럼 편찮으신 일이 없더니 1976년 병진(丙辰) 10월 1일에 이르러 시자(侍者)를 돌아보시며 금성산(錦城山)에도 해가 저무는구나 하고 미소(微笑)를 지으시더니, 이내 미질(微疾)을 보이시고 문도들에게 각자 노력(努力)하라 하시며 할운(喝云)하되 방하주장변와거(放下柱杖便臥去)하니 강성오월낙매화(江城五月落梅花)로다 하시고, 귀적(歸寂)하시니 세수는 74요, 법납은 60이시다.”
좌탈입망한 우화스님의 법구는 정사각형 관에 모셔졌다. 일반적인 관으로는 법구를 안치하지 못해 좌탈입망한 그대로 모시기 위해 별도의 관을 제작했다. 우화스님의 다비장도 최근 입적한 서옹스님의 다비장처럼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다비장을 조성했다. 연화대 불이 꺼진 후 땅밑에 묻었던 항아리는 법당에 안치했다가 이후에 사리를 수습했다. 스님의 사리탑은 별도로 조성하지 않았고 다보사 경내에 비(碑)만 세워놓았다.
우화스님과 가까운 사이였던 일타스님은 비문에 우화스님의 덕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금성산(錦城山) 그림자는 나주(羅州)를 덮고 다보사(多寶寺) 종(鍾)소리는 영산강(榮山江)에 흘러가네. 스님의 크신 도덕(道德) 무엇으로 나타내나 일편영(一片影) 뒷모습을 엿보고저 하노라. 무무무(無無無)여, 평생(平生)을 무자(無字)밖에 또 있는가. 대도(大道)는 무형(無形)이라, 본무명상(本無名相)이 아닌가. 입차문내(入此門內)하여는 막존지해(莫存知解)하시니 무지역무애(無智亦無碍)으로 무가애(無加碍)를 보시(布施)하옵소서.”
우화스님이 열반에 든지 30여년이 가까워 온다. 평생 천진도인으로 대중을 제접했던 우화스님의 향기가 더욱 그리운 때이다.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대중들을 미소와 하심(下心)으로 맞이했던 우화스님이 참선화두에 대한 치열한 구도심이 배여 있음을 다시 한번 느껴야 할 시기이다. 그래서 더욱 그리운 어른이 우화스님이다.
Posted by 해인(海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