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YG-1 와이지원
YG-1의 창업정신은 도전정신이었습니다. 한 경쟁 시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도전정신과 품질제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업이야기1 - 절삭공구 신사업 연수 창업계기 >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업 시작 미국서 고생하며 사회생활 시작 우연히 새사업 프로젝트 맡고 1년간 장기연수 영어 중요성 깨닫고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접촉... ‘와이지-원(구 양지원공구)’이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우리 회사가 코스닥시장에 등록하면서부터다. 물론 외국의 업계와 언론에는 더 일찍 알려졌지만 등록 전만 해도 기업을 애써 홍보하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보니 인터뷰를 마다하는 일도 많았고 사진 한장을 찍을 여유가 없어 젊은 시절에 찍었던 사진이 여태껏 신문에 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나는 50이 다 된 사람이다. 내 인생의 절반을 바쳐온 와이지-원 역시 20여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업원들의 땀과 밤샘작업을 바탕으로 자랐다.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안타까운 시행착오를 겪어왔기 때문에 세계정상을 바라보는 위치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와이지-원의 이름이 생소한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절삭 공구를 제조하는 업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절삭공구는 공작기계나 일반 기계에 장착해 주로 금속류를 깎는 구실을 하는 소모성 공구이다. 그 가운데 와이지-원의 주력 상품인 엔드밀은 금형이나 항공기 동체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절삭공구다. 하지만 나는 절삭공구가 무엇이고 와이지-원이 앞으로 얼마만큼의 매출을 올릴지에 대해 새삼 설명하려 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라는 사람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길을 걸어왔는가에 대해 쑥스러움과 겸손함을 잠시 접고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나는 세분화된 한 분야에서는 1등, 그것도 세계 제일이 될 수 있다 는 것을 믿었다. 또 막다른 벽에 부딪히더라도 노력에 따라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 이야기는 그런 믿음과 확신에서 부터 시작된다. 또 그것은 와이지원의 시작이자 발자취이기도 하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면서 땀 흘리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 혹은 나와 같이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꾸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업을 하거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혼란스러워 하는 그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이 하는 일에 미칠 정도로 몰두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훌륭한 농부가 되고 싶었다. 나의 소박한 포부에 선생님은 무척 감격해 하셨고 그래서 그 꿈은 내 마음 속에 오래 자리 잡았었다. 하지만 사업을 하시는 분들을 가까이서 보아 오면서 나는 좀 더 현실 적인 목표에 다가서게 됐다. 그들과 같은 시행착오를 피하려면 무엇보다 기술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또 사업이라는 것도 나를 끄는 무엇 인가가 있었다. 여하튼 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한 이상 장착 유학을 가서 경영을 겸한 산업공학을 공부할 셈이었다. 그런데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두고 나의 흥미를 끄는 기회가 왔다. 1977년 당시 부친께서 부사장으로 계시던 모 신발업체의 회장님께 세배를 드리러 부산에 갔다. 신발을 사양 산업이라고 판단한 그 업체는 이제 막 절삭공구를 생산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에게 이 사업부에 합류하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학자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일찍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 제휴를 맺고 있는 미국으로 나가 1년 정도 생활할 수 있다는 조건 역시 내 귀를 솔깃하게 했다. 나는 그해 3월부터 공장설 계와 자재감독 등을 맡고 이듬해 1월에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하필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던 사장님을 돕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영어실력은 수줍은 성격만큼이나 커다 란 고민이었는데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독해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지만 회화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어설픈 말 한마디로 인해 기술도 입계약과 차관계약, 혹은 현지 은행과의 거래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영어 하나 배우지 못하고 돌아가면 창피한 노릇이라는 압박감이 날 분발하게 했다. 남들은 TV를 시청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고 했지만 나는 무료하기만 할 뿐 별 효과가 없었다. 대신 밤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드러그스토어를 기웃거렸다. 그 시간이면 점원들도 무료하던 참이라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기꺼이 말을 걸어 주었다. 또 한국인 교회에 나가기보다는 지역 사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행여 계약을 맺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참을성을 시험해 가면서 계약조건을 두번,세번 확인한 적도 많았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영어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돼 갔다. <나의 사업이야기2 - 성공 비결은 자신감과 도전의식 > 공부는 억지로 했지만 일에는 재미 느껴 귀국 후수출주력 회사매출 80% 올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얻은 수확은 영어뿐만이 아니었다.머지않은 훗날 내가 사업가로 태어나는 데 기여한 결정적인 비결을 얻을 수 있었다.그것은 바로 내 속에 숨겨져 있던 도전 의식과 자신감을 발견했다는 사실이었다.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규범을 따르는 사람 '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통제가 없는 미국에서 그 규범을 상당 부분 무시하며 사는 동안에도 크게 잘못 되는 일은 없었다. 모든 일을 내 결정에 따라 원하는 대로 하면서 내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던 `활달함'이란 수식어가 내 성격 앞에 붙게 됐다. 일류 대학 에 들어가는 것이 세상의 끝인 줄 알면서 공부를 할 때면 억지로 한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내가 무엇인가가 재미있어서 몰두하는 능동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얻은 또 다른 수확 중 하나는 편견을 바로 잡은 일이었다.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나는 미국 사람이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적어도 사업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유능한 미국인 사업가의 검증을 거친 서류에서는 번번이 오류가 발견됐고 심지어 은행들마저 실수를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그것들을 매번 지적해내자, 나중에는 그곳의 부사장까지 날 찾아왔다.그들의 눈에는 내가 천재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보였겠지만, 사실 그것이 한국에서라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문제들이었다. 사실 나는 미국인들 생각처럼 굉장한 사람은 아니었다.그 일을 통해 서 결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능력이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신감의 충전, 그것이 깨달음의 보상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배울 점도 많았다.전화요금의 과금 체계만 보더라도 그들은 잘못 누른 전화번호나 끊어진 전화에 대해서는 결코 요금을 청구하는 일이 없었다.그들은 분명 합리적이고 소비자의 이익을 존중하고 있었다. 1년 9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 왔을 때 나는 나름대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포부와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은 좋지 않았다.앞서 귀국한 기술자들과 일행들이 사업의 기본적인 방향들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목표시장을 잘못 잡는 등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수로는 사업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회사 측은 나에게 해외 수출 업무를 맡겼다.그때 나의 심정은 말 그대로 막막했다. 손에 잡히는 것이면 일단 쥐어 봐야 했다.먼저 종합상사들과 접촉해 보았지만 그다지 소득은 없었다.이번에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주별로 분류된 엘로요 페이지를 모조리 열람했다.그곳에서 메모해 온 커팅 툴과 관련된 모든 회사 상호와 주소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 나의 다음 할일이었다. 또 지난 1년간 회사로 날아온 수출 관련 편지들도 모조리 찾아냈다.대부분 수출이 힘들 거라며 지레 겁을 먹고 도착하자마자 무시됐던 편지들이었다.나는 뒤늦게나마 모든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귀국 후 4, 5개월은 그렇게 정신없이 또 소득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귀국 후 곧 결혼을 했던 나는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미국에서 모아두었던 돈을 대신 아내에게 갖다 주어야 했다. 마침내 십몇만불 상당의 첫 오더가 들어왔다. 그 때의 심정은 `신났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다.나는 아래로 남녀 직원을 각각 1명씩 두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현재로는 수출 가격에 도저히 맞출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이 높은 원가를 줄이는 것이었다.우선 현재 책정 되어 있는 원가를 낱낱이 분석했다. 그 결과 원자재 가격이 가격 상승 기대치를 반영하면서 현시가보다 높이 책정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비싸게 구입하고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장비들도 원가를 터무니없이 부풀리고 있었다. 나는 그길로 새로 책정한 원가에 대해 사장의 결재를 받아냈다.사람들은 `내가 회사를 말아먹을 것이라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게는 자신이 있었다. 남들의 수군거림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회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2계급 특진이라는 행운을 안았다.나와 내 아래 직원 3명이 회사의 매출 80%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남들에게도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나에게는 만족감보다는 회의가 느껴지고 있었다.그것의 발단은 `엔드밀'이라는 품목이었다. <나의 사업이야기3 - ‘엔드밀’분야 세계 1위 도전 > 퇴근 후에는 밤 지새며 창업 준비 몰두처음부터 외국 전시회 참가해 시장개척 ‘엔드밀’은 금형을 만들거나 비행기 동체를 깎을 때 쓰이는 절삭공구다.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의 매출에서 엔드밀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 정도였다.내가 유독 엔드밀에 눈독을 들였던 이유는 원자재가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이만하면 욕심을 내어 볼만한 고부가가치 사업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렵게 받아낸 25만 달러의 주문을 당시 회사는 2년씩이나 납기일을 미루다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느낀 또 다른 회의는 회사의 비전이 갈수록 불투명하다는데 있었다.모두들 하루 종일 느긋하게 움직이다가 해가 떨어지면 으레 바이어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한 날짜를 미루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냈다. 싼 기계 하나만 구하면 일이 원활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미루어지기만 했다. 직원들에게서는 주인 의식이나 뭐든 찾아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고 나를 쳐다보고 뭔가 시켜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렇지만 작은 회사를 처음부터 차리는 것보다는 지금의 회사를 키우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쉽고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우연찮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진지해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81년 여름, 회사에서 떠난 남이섬 야유회에서 발을 부러뜨리고만 것이다.나는 8개월이나 병원과 집 신세를 지게 되었다. 물론 입원 초기에는 여전히 회사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회사에서는 한사코 쉬라고 했지만 난 바이어를 병원에 부를 정도로 열심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내 미련 속에 남아 있던 소경 엔드밀이 불쑥 머리에 떠올랐다.아직도 바이어에게 의사가 있다면 내가 직접 그 사업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의 회사와 사업을 두고 끊임없이 저울질하기 시작했다.그러다 욕심껏 일하고자 하는 내 꿈과 비전에 생각이 이르렀을 때, 내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병원에 입원하기 전, 나는 회사를 살려볼 생각으로 말레이시아에서의 사업을 기획해 상사에게 보고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사장은 도통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회사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칼을 뽑지 못하는 무기력함이 나는 안타까웠다. 또 대기업에 입사한다면 나도 오래 못가 소신을 잃어버릴 거라는 걱정이 자꾸만 들었다.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창업을 결심한 그 순간부터 엔드밀은 내 전부가 됐다.물론 회사는 나를 쉽게 놓아주려하지 않았다.나는 회사를 1년간 더 돌보고, 회사는 내 사업을 묵인한다는 조건에서 우리는 타협을 끝냈다. 81년 12월 나는 부모님 집에다 `양지원공구'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내고 이듬해 4월에는 공장을 샀다.이때부터 근무하는 회사를 퇴근하면 이곳 공장에 와서 밤을 보내는 이중의 고생을 시작했다.와이지원의 옛 이름인 `양지원공구'에는 사연이 있다. 부친께서는 사 업에 실패하시자 부동산을 팔아 경기도 이천에 땅을 사셨다.목장을 해보고 싶은 당신의 소망 때문이었다. 그때 아들들은 고민 끝에 농장 의 이름을 `양지원 농장'라고 지어 드렸다.그런데 막상 사업자등록을 하려고 보니 양지원이라는 이름만 머릿속에 맴돌았다.그렇게 해서 YG-1은 `뜻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의 양지원공구 공장이라는 묘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회사는 처음부터 수출에 주력했으므로 영어로 표기하기에는 양지원공구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첫 두 글자의 이니셜을 딴 `YG'에 다 세 번째 글자는 이왕이면 넘버원이 되겠다는 결의로 `1'로 정해 YG-1이라는 이름을 겸하게 됐다. 물론 이름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그것은 대부분 씁쓸한 것들이었다. 나는 기회란 꾸준히 나아가는 자에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1983년이 우리 회사에겐 그런 해였다.당시 무역 투자진흥공사(KOTRA)는 해외전시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그 기회가 우리 회사에는 다섯 번 주어졌다.그러나 첫 번째로 제품을 출품했던 `LA WESTEC'에 도착해 나는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전시를 준비해 온 코트라측에서 우리 회사 이름만 보고 전시장에 못만 몇 개 박아놓고는 준비를 끝낸 것이다.나는 당장 코트라에 항의했다. 그런데 그곳 과장이 되레 나에게 욕설까지 하며 반말로 화를 내는 것이었다.사실 그런 일은 곧잘 일어나곤 했다. 이름이 낯선 중소기업인데다 `공구'라는 말 때문에 우리를 대하는 관료들의 언행에는 무시하는 태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지금도 YG-1의 이름은 하나에 100달러가 넘는 손톱만한 앤드 밀에 찍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물론 그 명성을 쌓는데 까지 는 20여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나의 사업이야기4 - 공구상 명단만 갖고 美 건너가 > 슬리핑백에서 3시간씩 자며 회사일 몰두 직원들 이해하는 사장 되려 숙식 같이해 공구상 리스트만 갖고 미국시장 도전 사업을 한다고 하면 누구나 그 사업 밑천을 궁금해 한다. 그것을 말하기에 앞서 내 가정환경에 대해 잠시 얘기할까 한다.부친께서는 대기업에 몸담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재력의 척도가 자가용이었던 시절, 우리 집 차고에는 그 흔치 않은 물건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뭐든지 아끼는 분이셨고 그 영향 탓인지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용돈의 절반 이상을 적금에 넣어 모았다. 어머니는 부지런함이라는 면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셨다. 새벽 5시 경 집안을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곧 어머니가 날 깨우실 것 같은 안타까움에 진작부터 잠을 설치곤 했다. 나는 집안이 특별히 부유하다는 것을 뽐내는 아이는 아니었다.오히려 그 사실을 친구들이 알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곤 했다. 학교에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로 늘 부모님과 다투었고 내가 한사코 고집을 피우면 `너라도 만원버스를 안타면 그 역시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라는 말로 어머님은 날 설득하시곤 했다. 혹시 자가용을 타고 가는 날이면 학교에서 멀리, 그것도 아무로 안보는 곳에서 몰래 내리곤 했다. 결혼을 하자 부모님은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사주셨다.그 이듬해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자 그 집은 더 이상 내 재산목록 1호가 아니었다.나는 출퇴근이 번거로운 비싼 아파트보다는 공장과 그 안을 채 울 기계가 절실해 이를 팔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걷잡을 수 없이 심했다.내게 사주신 아파트이긴 해도 부모의 재산인데 마음대로 팔 수 있느냐며 화를 내셨다.어머니는 사실 배수진도 없이 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아시고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게다가 배운 자식이 왜 굳이 그 고생을 하려는지 안타까워하셨다. 어머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나에게는 사업과 엔드밀이 전부였다.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문제되지 않았다. 한살인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다시 서울로 오자는 약속을 아내에게 하고는 아파트를 팔아 인천으로 내려왔다. 이곳 인천까지 오게 된 것은 있는 돈으로 공장을 사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였다. 기계는 공장을 담보로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먼저 다니던 회사일 까지 챙기면서 사업을 준비를 한다는 것이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약속한 1년은 못 채우고 8월 중으로 인수인계를 마쳤다.그 해 여름, 기계가 하나둘 들어오고 직원들도 12명쯤 모이면서 회사가 제법 모양을 갖춰 갔다. 그리고 1982년 10월 14일, 16명의 멤버가 모여 조촐한 창립기념식을 갖고 자축했다. 우리의 첫 프로젝트는 25만 불상당의 엔드밀 오더였다.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2년이나 미뤘다가 포기하는 바람에 놓쳤던 프로젝트였지만, 인플레이션 탓에 바이어도 마땅한 구입처를 찾지 못하고 있던 터라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다.나는 경험 많은 사람들보다는 공고 출신의 신입사원들을 우선 채용했다.하지만 그런 선택은 많은 시행착오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곁에서 함께 일해야만 했다. 직원의 저녁밥을 손수 짓는가 하면 새벽 2시에는 어김없이 연탄을 갈아야 했다.3시간씩 자고 일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식당이 마땅치 않자 직원들이 직접 밥을 지어 먹고 직원의 아내가 국을 끓여 날아왔다.밥솥을 누르는 것을 잊기라도 하는 날에는 점심도 못 챙겨먹기 일쑤였다. 나는 24시간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슬리핑백 속에서 잠이 들었다.기계 소리가 멈추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잠에서 깼다. 이즈음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자꾸만 맴돌았다. `과연 나 자신이 사람을 위아래 없이 존중하는 사람일까. 공고 출신의 직원들에게 혹시 작은 편견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시끄럽게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속에서 우리는 어울려 먹고 자며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서도 와이지-원은 서투른 출발을 하고 있었다. 공장을 세운 뒤 얼마 되지 않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미국의 바이어들이 1등석 비행기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최고급 호텔에서 머물다 돌아가는 걸 보면 그만큼 남는 장사를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미국에 가서 물건을 판다면 더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으로의 출장이란 경비 면에서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그것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중소기업이 미국 출장을 간다니, 누구는 쓸데없고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1982년 10월 16일 기어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어차피 우리가 공략할 시장이라면 직접 부딪히고 느끼고 싶었다.그나마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전역에 있던 약 15개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장비를 구입한 미국 거래처로부터 입수한 공구상 5,000개의 리스트, 그리고 내 동생이 시카고에서 유학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밖에 내가 가진 것이라곤 약간의 경비와 무거운 가방 속에 든 플이 전부였다.나머지는 체력으로 버티고 용기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업이야기5 - 선적제품 결함 발견 자진 회수 > 부친 집 담보로 융자 자금 위기 극복 45kg 공구샘플 가방 들고 미국 전역 누벼 제품 결함 발견하여 선적했던 물건 자진 회수 첫 미국 출장에서 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스웨스트 항공에서 제공하는 가장 싼 표를 샀다. 350달러 정도였던 이 표는 노스웨스트가 취항한 도시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또 보험료를 포함해 1주일에 99달러밖에 안 하는 렌터카를 빌려 10시간씩 자동차를 몰기도 했다. 숙박과 식사는 10달러짜리 모텔에서 잠을 자고 굶거나 패스트푸드로 해결했다. 배가 고프면 간혹 저녁 시간에 슈퍼에 들러 값싼 닭다리로 배를 채웠다.주말은 가급적 동생에게 신세를 지며 숙박료를 아꼈다. 하지만 나는 사업가였다.이익을 내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고 이를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올때 우리 회사의 소경 엔드밀만으로는 바이어를 만나고 주문을 수주하는데 한계가 있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관련 10여개 업체로부터 3%의 커미션을 약속받고 그들의 샘플도 함께 챙겨 왔다. 그것으로 출장 경비를 충당하고자 했던 나의 계산은 다행히 적중했다. 출장 중 겪은 또 다른 어려움은 가방의 무게에 있었다.카탈로그와 샘플이 제법 무겁다 보니 가방 하나의 무게가 80~100파운드(약 45kg)는 족히 나갔다. 부서진 여행 가방만 해도 지금까지 스무 개가 넘을 정도다. 당시 시애틀에서 만난 한 성공한 사업가는 자신이 벨 보이를 한 적이 있지만 그렇게 무거운 가방은 처음이라며 무척 놀랐다. 문제는 비행기를 탈 때 가방 무게가 제한에 걸린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궁하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항공사 노조에서 운영하는 건물 밖 체크인 카운터에 팁으로 10불을 쥐어주면 추가 부담 없이 체크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멕시코 국경으로 가는 10인용 비행기를 탈 때는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무거운 카탈로그와 샘플을 손에 들고 비행기에 올라타야 했다.그렇게 43일간 23개의 도시를 오가는 여정은 숨 가쁘게 진행됐다. 내가 가진 리스트에 올라 있는 공구 상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지난 56년간 코트라에 주인 없이 쌓여온 의뢰상담 사례를 모조리 뒤졌다. 거래처를 방문한 길에 그들의 경쟁사 카탈로그를 몰래 훔쳐보고 접촉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공구라는 간판만 보이며 무조건 들어갔고 전화번호부에 나온 공구 상에는 모두 전화를 걸었다. 물론 10군데 중 9곳은 대꾸조차 없이 박대를 했다.하지만 꼭 한군데씩은 오라는 곳이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공구 상에서 샘플을 보내 달라며 500달러짜리 수표를 건네받았을 때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500달러란 결코 큰돈이 아니었다.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으로부터 믿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내 자신을 감격시킨 것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겁 없이 좌충우돌한 그 43일간 23개 도시에서의 여정이 나의 사업 일기 중 가장 힘들고 흥미진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들뜬 마음으로 귀국길에 오르던 나는 사운을 위태롭게 할 만한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 줄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첫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자 예상치 못한 나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선적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엔드밀 수출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당시 수출 건은 3개사의 바이어가 관여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바이어가 우리가 보낸 샘플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품질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당시 우리 측에서는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여 채택한 공정이 일부 공정이 빠진 것으로 그쪽의 오해를 산 것이었다. 그렇게 쉽게 넘어가게 될 줄 알았던 그 건은 정작 우리 쪽에서 또 다른 결함을 발견하면서 진짜 화근이 되고 말았다.며칠 간 잠을 잘 수 없었다.모른 척하거나 가격을 조정하는 선에서 합의해 볼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결함이었다.만약 물건을 회수할 경우 회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게 불 보듯 뻔했다.게다가 물건은 이미 부산항에서 선적을 마친 뒤였다.결국 나는 약속을 지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그것은 나를 믿어 준 바이어와의 약속인 동시에 내가 회사를 세우면서 내 자신에게 내걸었던 약속이기도 했다. 세계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처음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까다로운 재통관 절차를 거쳐 제품을 모두 회수했다.하지만 막상 자 금이 막혀 버리자 나의 허탈감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부친께서 대단한 결심을 하셨다.당신의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주신 것이다. 순조로운 성공과 이윤 을 확신했던 나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직원들의 허탈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품 을 다시 생산하는 일이 시급했다.다시 지루한 밤샘 작업이 이어졌다. 9시 30분, 마지막 잔업을 끝내고 공장을 나서려던 직원들은 포장 작업에 여념이 없는 나를 보고 결국 발길을 멈추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비싼 수업료를 치르긴 했지만 직원들이나 나나 좋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같은 물건을 두 번 만들 바엔 한번 제대로 만들자는 각성을 직원들이 안할 리 없었다. 사장인 나조차 한두 개의 문제를 찾기 위해 모든 검사를 반복하는 일이 성가신데 직원들이야 오죽할까 생각하니 품질이라는 산이 새삼 높고 가파르게 느껴졌다.두 번의 배앓이 끝에 태어난 제품은 대신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로 한 원칙을 지켰다는 자부심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또한 바이어들의 변함없는 신뢰로도 지금까지 보상받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끼울 뻔했던 그 사건은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의 사업이야기6 - 12개국 발로 누비며 마케팅 > 하자있는 제품은 무슨 일 있어도 폐기21일 동안 1만2000km 돌며 상담 전문화를 통한 기술혁신 6개월쯤 지나서인가 바이어에게 제품 회수 사실을 얘기했더니 품질이 크게 문제가 안 된다면 지금이라도 싼값에 팔아주겠다고 제의해 왔다.제품에 마킹이 안됐다면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후 외국에서 만난 다른 바이어가 훨씬 싸고 질 좋은 한국산 물건이 있다며 우리 제품의 가격에 불만을 표시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처분했던 불량품이 바로 그 물건이었다.하자가 있는 제품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폐기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은 그때부터였다.이 일로 우리 회사에 뿌리박힌 전통은 품질 말고도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직원들과 회사 간의 신뢰를 확인한 일이었다.일주일에 60~70시간씩 일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은 다름 아닌 회사와 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다. 밤비행기에 몸을 실고 돌아와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고 부가가치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투자해 직원들에게 이윤을 돌리는 일이 나의 마땅한 소임처럼 느껴졌다. 와이지-원은 우수한 품질, 성실한 경영으로 세계 속의 와이지-원을 성취한다. 와이지-원은 사람을 존중하며 규율 있고 보람 있는 직장을 마련한다. 와이지-원은 강한 정신력, 정열, 자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 때의 교훈들은 지금 우리 와이지원의 경영 철학으로 남아 있다.여 기에 하나 더, 1983년 와이지-원은 25만 달러라는 첫 매출을 기록했다.“전 세계 공구업체를 1년 가운데 몇 개월 동안 오고가지만, 와이지- 원보다 경쟁력이 뛰어난 업체를 저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작년 몇 십 명의 고객들을 데리고 우리 회사를 찾은 한 독일 바이어의 말이다. 2천 평 규모의 안산 공장과 본사를 보여주는 나로서도, 또 나를 소개해 준 그로서도 어떤 손색도 없다고 자부했다. 나와 단둘이 남게 됐을 때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속삭였다. '내가 처음 송사장과 거래를 시작했을 시기에 우리 회사의 사장을 이곳에 데려왔다면 송사장이나 나를 미쳤다고 했을 거요.' 나 역시 그의 말에 동감한다.그가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 장비와 공장은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와 내가 만난 건 피차 행운이었고 내 생각엔 서로의 안목이 뛰어났던 것 같다. 우리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난 그가 장차 매출 6억 마르크의 독일 제일의 공구상과 거래하게 해 주리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고, 그 역시 우리 회사가 이렇게까지 성장하게 될 줄은 예측하지 못 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영어를 제대로 통역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83년 에서 한국공작기계전시회가 열릴 당시만 해도 참가업체 가운데 영어가 유창한 사람들을 찾는 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나는 전시장을 둘러보는 도중 의사소통에 애를 먹고 있는 한 외국인을 발견하고는 통역을 도와주었다. 그는 전시장을 둘러보는 도중 의사소통에 애를 먹고 있는 한 외국인을 발견하고는 통역을 도와 주었다. 그는 고작 2개의 샘플을 가지고 돌아갔을 때 나는 별다른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다음번에 30마르크어치의 물건을 사갔고 그 다음엔 500마르크어치를 구입했을 뿐이었다.하지만 2년 뒤 그가 주문해 온 물량은 무려 4~5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먼저 사간 1만 5,000개의 제품을 일일이 검사한 뒤, 허용치 이내이긴 하지만 공차의 경계선에 있는 3개의 제품을 되가지고 온 것이다.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제품의 품질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칭찬이자 인정이긴 했지만, 그들의 까다로움과 완벽함에 나는 더욱 분발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들로부터 인정받은 품질은 그 자체로도 유럽 시장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유레일패스 같은 것이었다.유럽을 본격적으로 겨냥한 87년 나는 21일 동안 12개국에서 1만 2,000km에 달하는 거리를 자동차로 달렸다. 아침은 불란서에서, 점심은 스위스에서, 저녁은 독일에서, 시저가 말을 달리며 느꼈던 정복감이 그 때 내 기분에 비할 수 있을까.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나는 발로 뛰는 마케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어차피 주어진 시간이 같다면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간을 쪼개 쓰는가가 마케팅의 관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서는 한 도시에 하루 이상 머물지 않으며, 단 10분이라도 바이어와 만나 그 들의 애로나 요구 상황을 체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하지만 같은 원칙이라 할지라도 그 곳에 유럽이냐 미국이냐에 따라 다르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직선적이고 빠른 일처리를 선호하고 그만큼 관계를 맺기도 쉬운 편이지만 유럽의 경우는 이와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시장을 쉽게 뺏고 뺏기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의 경우는 한번 맺은 관계는 틀림없이 오래간다. 따라서 유럽에서의 일정은 항상 여유를 두고 결정하며 하루에 2명 이상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나의 사업이야기7 - 세계시장서 일본공구 대체 > 고객들의 일본제품 집착 떨쳐내고 자사상표로 세계 52개국에 수출 이제는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고 대만, 홍콩, 싱가폴, 방콕에 이르는 아시아권까지 내가 발로 뛰는 무대가 됐다. 현재 와이지-원의 자체브랜드로 수출하고 있는 나라만 해도 세계 52개국에 달한다. 전세계의 시간대를 모두 채우려다 보니 나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잠시의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의 불만 중 하나는 아침 근무가 너무 일찍 시작된다는 것이다. 동절기만이라도 출근시간을 30분만 늦춰 달라는 직원들의 성화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나는 7시 50분이라는 시간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객들이 세계 곳곳에 차침을 맞고 있다면 그들보다 조금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청계천 공구상가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절삭 공구들이 수입품, 그것도 일제 브랜드의 제품들이 상가를 가득 메웠다.그나마 국내 대기업들이 만든 제품들은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고 저가 시장 일부를 차지했을 뿐이었다.1985년부터 와이지-원은 국내 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때까지는 제한된 사이즈인 소경 엔드밀에만 제품 라인이 한정돼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일제 브랜드를 대신할 수 있는 고가 시장을 공략해야 했다. 이미 해외에서는 명성을 얻은 뒤라 상황은 와이지-원에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기간을 도매상들의 편견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우리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일부 도매상에서는 현금을 비싸게 줄테니 일제 브랜드를 부착하거나 아예 노마킹 제품을 공급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그만한 품질이면 일제라고 속여 더 비싼 가격에 팔겠다는 속셈이었다. 내 대답은 물론 `노!'였다.거기에 100% 현금 결제라는 까다로운 조건까지 덧붙였다. 간혹 사장이 자리에 없거나 현금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돈은 나중에 받아가라고 하면 나는 기어코 물건을 인천까지 다시 가져오곤 했다. 자동차도 없던 첫 일 년 동안 나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직접 공구상가 까지 물건을 배달해야 했기 때문에 손은 늘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존심을 떠나 와이지-원이라는 국산 브랜드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그로부터 얼마 뒤 와이지-원은 국내 절삭공구의 수입대체라는 목표를 이루어 냈다. 현재 와이지-원은 국내 엔드밀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한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일본 회사가 일부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내가 당초 일본 제품을 시장에서 몰아낼 것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는 사실 개인적이고도 묘한 감정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당시 사업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면서도 일본어만은 유독 배우기를 꺼렸다.일본에서 만큼은 주문자생산방식 대신 자체 브랜드 판매를 고집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적과 싸워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손자병법이 제시하는 최고의 전략. 결국 나는 일본을 배우기로 결심했고 83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일본에 가서 받은 첫인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일본 기업은 그때 이미 당일의 원가와 이익을 마케팅에 반영할 만큼 조직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더욱 나를 놀라게 만든 사실은 일본이 와이지-원이라는 한국 절삭 공구 업체에 대해 훨씬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데 있었다.우호적인 태도로 포장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공장조차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한국이 절삭공구를 만드는게 가능한가라고 노골적으로 반문하기까지 했다.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나는 일본 공구유통업체를 찾아가 노마킹 상태에서 일본산의 최고제품과 우리 제품을 테스트해 보자고 제의했다. 결과는 품질이 거의 동등한 것으로 나왔다.그러자 테스트한 담당 작업자는 `깎이는 맛이 틀리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끝내 우리 품질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는 일본 시장에 진출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독일 업체들에게도 철옹성으로 통한다는 일본 시장으로의 수출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철저하다시피 수입품에 대해 배타적인 일본의 벽은 여전히 실감할 수 있다.현재 10년이 넘게 거래를 계속해온 일본 에이전트들은 언젠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일본 공구업체들은 유통 과정에 있어서 철저하게 일본산 제품만을 선호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업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많으며 수입 제품을 열심히 팔 경우 심지어는 매국노로 오인받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장의 원칙을 믿었다.폐쇄적인 시장은 결국 고립돼 경쟁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일본은 결국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우수한 품질을 가진 제품은 시장을 차지할 것이고 와이지-원은 당당히 일본 시장을 두드릴 것이다. 와이지-원은 더욱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일본의 공구 시장이 문을 열면 우리는 그 시장을 차지할 것이다.그때 까지는 굳이 서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 나의 사업이야기8 - 英정부 파격 대우에 투자 결정 > 공장 완공 때까지 주정부사무소 무상제공 관료들 비즈니스맨화 우리도 배워야..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한 회사 지난 97년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와이지-원이 실린 적이 있다.벤처기업 란에 특집으로 취급된 것이다. 그 기사에서는 우리 와이지-원 이 한국의 대기업보다 앞서 미국과 영국 등을 포함한 선진국에 투자했으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한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 다뤘으며 다른 회사에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와이지-원이 영국에 투자를 하게 된 진짜 이유는 IMF체제 직전 인건비가 인플레이션을 앞지르는 당시 경제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는 물론 영국 정부가 제시하는 투자 조건이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는 95년 한국의 12개 중소기업을 투자사절단으로 초대했다.일체의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영국 정부가 내세운 조건은 더욱 재미이었다.투자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날짜가 임박해서 못 가겠다는 말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브리티시 항공권을 제공할 만한데도 굳이 대한항공의 비즈니스 좌석을 제공한 것부터가 의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들의 호의와 성의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영국 히트로 공항에 내려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의 짐을 찾아 호텔 룸까지 옮겨 놓는 동안 일행은 공항 귀빈실을 통해 시내의 리셉션장으로 안내됐다. 리셉션장에서는 영국 각 주의 대표들이 나와 술과 식사로 우리를 환대했다. 도착 다음날부터 우리 일행은 4명씩 한 팀을 이뤄 원하는 지역과 업종 내의 투자 환경을 시찰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필요한 통역이나 교통편은 물론 정부 측에서 모든 것을 제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영국 정부는 투자자 한 사람 당 약 1만 5,000만 달러에 달하는 경비를 소모했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왜 그 많은 돈을 들이면서까지 투자를 유치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시사한다. 영국의 훌륭한 복지제도가 영국인들로 하여금 골치 아픈 기업 운영을 꺼리게 만든다는 데 첫 번째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외국 투자자를 끌어들여서라도 부고용률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또 기계와 땅을 저렴한 가격으로 투자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는데 이 역시 합리적인 이유에 근거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공장이나 기계는 설사 우리가 망한다 하더라도 영국에 도로 남을 수밖에 없고 반대의 경우라면 이익까지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영국 정부는 실업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세금 수익까지 낼 수 있는데다 어느 쪽이든 q부고용률을 줄이는 제 역할을 다하는 셈이 된다.이는 한 영국의 관리가 한 말처럼 투자한 회사가 4년만 버텨주면 일단 손해는 면한다는 손익분기(Break-even)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를 정말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영국 정부 의 지원이 너무나 `기업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었다.영국은 이미 400평을 기본단위로 공장을 대략 지어 놓은 상태에서 투자자가 규모와 용도를 결정하면 1, 2개월 내에 원하는 크기의 공장을 완성시켜 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토지와 공장은 전기시설까지 갖춰 입주가 가능한 시점으로부터 시가 의 반값에 제공됐을 뿐만 아니라 주정부의 보증 아래 은행 빚을 10년 동안 나누어 갚을 수도 있었다.사업을 확장할 때마다 터무니없이 높은 땅값과 세금 때문에 큰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너무나 딴판이었다.뿐만이 아니었다. 공장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주정부 사무소가 제공되고 이에 따른 편의시설 예를 들면 전화나 기사, 차량 등도 100% 무상 제공됐다. 기계 역시 싸게 구입할 수 있었고 직원들의 고용이나 트레이닝에 대해서도 보조금이 지불됐다. 또한 사업이 자리 잡기까지의 2년간은 전시나 카탈로그 제작 등 마케팅 활동도 지원해 주었다. 이 같은 영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노력은 4년째 영국 공장을 운영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당시 개업식에 한국 대사를 초대하자 주정부는 와이지-원을 대신해서 대사에게 영국 여왕이 머무는 저택을 제공했고, 한국공작기계협회 이사 10여 명을 초청했을 때에도 주정부가 직접 나서서 2박 동안 최일류 호텔과 버스, 식사를 책임지고 제공한 바 있다.최근 엘리자베스 여왕의 요트가 인천을 방문했을 때에는 대기업 임원들조차 못 앉는 상석에 초대받기까지 했다.한번은 영국 대사를 초청 해 한 시간 동안 강의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사로 있던 브라운 씨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23시간이라도 시간을 내 줄 수 있다며 모든 요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관료적인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브라운 씨는 오히려 자국의 이익을 위한 비즈니스맨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96년 10월 와이지-원은 영국의 북아일랜드에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의 사업이야기9 - 독일공장 인 수후 노사분규로 포기 > 유럽 공구업체 불매운동 전개 와이지-원 브랜드 알리는 계기 국경 없는 글로벌 경영을 통한 가치 창출 영국에 투자를 결정하고 공장 입주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당시 유럽에 가장 권위 있는 매체인 파이낸셜타임즈(FT)가 와이지-원의 투자 사실을 보도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시작됐다.영국 공구조합을 선두로 해 독일 공구조합과 유럽의 공구조합까지 합세해 유럽연합(EU)측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상원 의원들까지 동원됐다.항의 내용은 자신들보다 제조원가 등에서 경쟁력이 뛰어난 한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불한다면 결국 자신들의 시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이 일로 당시 북아일랜드의 주정부 대표 EU본부가 있는 브뤼셀에 두 번이나 불려가야 했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한국의 조그만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당시까지 영국 내에서 그렇게 심한 항의 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의 반발은 영국 내에서 와이지-원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불매운동으로 인해 첫 일 년간은 영국 내에서의 판매가 부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좋은 측면도 있었다. 불매운동을 계기로 와 이지-원의 이름은 유럽 내에 더욱 알려지게 됐다.전혀 뜻밖에 돈들이지 않고 대외 홍보를 톡톡히 하게 된 셈이었다.하지만 몇 가지 시행착오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현지인들을 경영인으로 참여시키고자 했던 지방화 전략이 여의치 않은 데 있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현지인들을 영입하기 위해 유력한 매체를 통해 여러 차례 광고했다. 그러나 인터뷰까지 마친 사람들은 와이지-원이 한국 회사라는 것을 알고 나면 채용 의사를 번복했다.한국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북아일랜드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핵심요원들은 모두 한국으로부터 데려와야 했다. 더 고약한 실패는 독일에서 있었다.통독 후인 97년 와이지-원은 동독 절삭공구회사를 싸게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막상 인수를 결정하고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그 중에서도 힘을 남용하는 노조와의 갈등은 결국 업무의 비효율만 초래했다.그런 식이라면 경영은 노조에 의해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결국 6~7개월 만에 나는 독일 공장을 포기해야 했다.미국에 공장을 세운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92년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주지사로 있던 때, 알칸소주의 동종업체로부터 기계를 팔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우리는 초창기 때 미국의 경매장에서 매매 되는 기계를 종종 구입하곤 했다.대부분의 경쟁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는 이미 감가상각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새 기계를 구입해서는 비용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매라고 해서 무조건 싸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요령이 필요했다. 제일 중요한 일은 농부를 가려내는 일이었다.농부란 단 한대의 기계만 사고자 나온 경매 참여자를 말한다. 그들이 원하는 기계는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그걸 방해하면 농부들은 매번 경매에 끼어들어 기어이 가격을 올려놓는다. 또 대부분의 기계들이 중고이다 보니, 정보를 얻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그것은 경매 하루 전에 경매에 나온 기계의 주인들을 만나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20~30년간 작업을 해 온 그들은 팔려고 내 놓은 기계를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여긴다. 심지어 자신도 함께 그 기계가 팔리는 곳에 가서 일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심하다.그들이 바로 기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칸소주에 방문한 것도 원래는 기계를 구입하려는 목적에서였다.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이번 기회에 미국 공장을 세우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미국은 특히 제품에 원산지를 부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미국에서 생산한 제품(MADE IN U. S. A)인 제품의 경우 판매에 유리한 보이지 않는 조건들이 많다. 마침 주정부 측도 지원과 혜택을 제공할 것을 약속해 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와이지-원은 상공회의소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다.시장과 지역경제인, 그리고 언론들이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는 즉석연설을 제의받았다.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의였다. 막상 연설을 시작했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라 말이 몹시 빠르고 서툴게 나 왔다. 나는 `어떻게는 간다.'라는 말로 얼버무리고는 서둘러 연단을 내려왔다.나의 서투른 모습이 오히려 그들의 호감을 샀는지 그 날 뉴스에서는 와이지-원의 투자 소식이 톱뉴스로 전해졌다. 와이지-원은 현재 안산과 광주, 인천에 상당 규모의 공장 시설을 갖추고 있다.앞으로는 미국과 영국 공장 외에도 세계 곳곳에 공장을 늘리고 영업을 확대해 갈 생각이다. 그것은 회사의 규모가 커서 좋다가 보다는 작아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존 원리에 따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후, 와이지-원은 10억 달라 규모에 이르는 회사로 거듭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의 사업이야기10 - 바이어 신뢰로 IMF위기 넘겨 > 외부환경 어려움은 두렵지 않아 내부문제 해결능력이 최대 관건 97년 여름부터인가 나는 한국 경제에 이상이 생긴 것을 직감하기 시작 했다. 은행 자금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혹시라도 국가적인 부도를 맞게 되는 경우 원자재를 100% 수입하는 우리 와이지-원으로써는 치명적 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무엇보다 현금의 확보가 중요했다. 그 날 저녁 유럽과 미국에 있는 모든 바이어들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그들이 아침을 맞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제껏 외상으로 구매해 오던 방식 대신 이자를 낮춰줄테니 지불 조건을 현금으로 송금해 달라고 했다. 나의 부탁에 바이어들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내 왔다.지금껏 내가 그들을 도왔으니, 이제 자신들이 나를 도울 차례라는 것이었다.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다. 이틀째 같은 일에 매달리자 아내는 왜 세상이 끝날 것같이 혼자만 야단이냐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나라 전체가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라고 대답하고 2~3개월만 두고 보면 내 뜻을 알 거라고 설명했다. 불행히도 나의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다.하지만 그 같은 마음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IMF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장 원자재를 구입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한국계 은행이 발행한 신용장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유럽은행의 보장을 받은 신용장을 받기는 더욱 불가능 했다. 외상으로 들여오던 원자재를 이제는 미리 돈을 보내주어야만 구입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은행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은행과 증권회사들은 이전에 신용으로 제공했었던 위험자산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주거래 은행들이 퇴출당하자, 은행이 보증 했던 30억 원이 당장 목을 죄어왔다. 하지만 기존 은행을 인수한 새 은행은 인원 부족 등을 이유로 이 문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상상해 보았다.하지만 한번 쓰러지고 나면 다음에 더 쉽게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와이지-원의 저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다행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와이지-원은 98년 40% 매출 성장이라 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그 같은 매출 신장이 가능했던 것은 X-POWER라는 신제품의 활약이 매우 컸다. 엔드밀은 홀더에 끼워져 회전을 하게 되는데 그 회전 속도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나는 그 당시 일본과 스위스에만 보유하고 있던 기술을 벤치마킹해 고속가공에 적합한 엔드밀을 개발해 냈다. 절삭유 없이도 사용이 가능한데다가 가격도 경쟁사의 절반 수준으로 보급했다.IMF가 계속됐지만 주문은 늘어만 갔다. 내수 시장에서는 아예 제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99년 2월 템플턴으로부터 투자 제의가 들어왔다. 사실 이전에도 외국의 투자제의는 많았지만 투자를 결정하기까지에 드는 시간과 노력이 번거러워 항상 거절했었다. 우리는 6주 안에 결론을 내달라는 조건을 걸고 템플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실로 까다로운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템플턴 측은 불과 4주간의 검토 끝에 90억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전환사채 60억 원과 회사채 30억 원. 템플턴이 그토록 어마어마한 금액을 이 작은 중소기업에 투자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와이지-원의 품질이 세계 최고라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템플턴 측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의 주요 해외 거래 선에 일일이 연락을 취해 철저한 조사를 했다고 한다. 강력한 판매력과 경험 많은 경영진, 핵심 분야에 사업이 집중돼 있다는 사실도 충분한 동기였다. 여기에 신중하고 진실한 기업가 정신 역시 그들의 신뢰를 이끌어 낸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된다.와이지-원은 불경기 때마다 항상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런 시기에는 사람을 구하기 쉽다거나 하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나는 외부환경의 어려움은 좀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에 달려있다. 내부문제 해결능력은 다름 아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자신감이다.앞이 캄캄해도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인다는 믿음이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그것이 와이지-원이 IMF를 극복해 낸 저력이었다. <나의 사업이야기11 - 마케팅은 바로 ‘고객 감동’ > 잇속만 챙기는 장사꾼 외면당해 고객에게 철저하게 관대해야.. 성실한 경영으로 세계 최고 경쟁력보유 마케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기업광고의 카피처럼 `고객 감동 '이다.목적만 잊지 않으면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객들은 무엇을 원할까. 좋은 품질의 물건을 값싸게 사고 싶어 하고 간혹 변덕을 부리거나 투정을 해도 적당히 받아주길 바란다.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 잇속만 아는 철저한 장사꾼을 고객은 싫어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객 앞에서는 바보스러워 보일 만큼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모른 척 양보해 주는 미덕이 나의 비즈니스에서는 지금껏 놀라운 힘을 발휘해 왔다. 91년 대만의 에이전트가 우리 제품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 왔다.90%는 품질이 우수한 데 반해 10%는 사소하나마 결함이 드러났다는 것이다.나는 원인을 규명하고자 기술자를 데리고 바이어를 방문했다. 실제 우리 회사 엔드밀에 의해 깎여진 공작물 가운데 간혹 표면에 줄 이 간 제품들이 발견됐다. 기술자는 절삭유에 의해 버(Burr)가 제대로 제거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나는 새로 샘플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못 믿는 눈치였다. 샘플만 잘 만들고 제품은 여전하면 어뜩하냐는 것이었다.나는 5,000개 제품을 먼저 만들어 줄 테니, 그것들을 테스트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금을 안 받겠다고 제안했다.그 같은 조건을 그들이 마다할 리 없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새로 만들어진 제품 모두를 바이어는 대단히 만족해했다.우리의 호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직원들을 데리고 바이어의 재고 창고를 찾아가 식사까지 걸러 가며 이틀간 꼬박 그 곳에 머물렀다. 우리 쪽에서 자청해서 보관된 재고를 모두 꺼내 스티커를 떼어내고 이상이 있는 제품을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남은 직원들은 일주일간이나 같은 작업에 매달렸다.그 모습을 지켜 본 바이어는 결국 우리 와이지-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불과 몇 십만 달러이던 주문량이 그 이듬해에는 100만 달러로 늘어났다.실수도 대응하기에 따라 상대를 감동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와이지-원은 또한 팔리지 않는 제품에 대해서도 환불을 원칙으로 삼았다.당장 몇 만 달러의 손해를 보더라도 향후 십년 간 그 고객을 통해 얻게 될 몇 천만 달러의 매출에 비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수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제품에 대한 어떤 클레임에 대해서도 모두 접수하고 고객이 원한다면 교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안해서라도 두 번 다시 같은 요구를 하지 않으며 우리의 호의를 결코 잊지 않는다. 같은 원칙이 회사 내에서 적용되면 사장과 직원들 간에도 원만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사장이 회사와 직원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직원들 역시 사장을 믿고 따르기 마련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대만 출장을 하루 앞두고 현장 간부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일부 직원이 노조를 결성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출장을 미루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은 당시 장기 근속자들을 대상으로 일본 연수를 실시했는데 여기에 참가 못한 직원 하나가 불만을 품었다. 그 직원은 사장이 연수 참가자들로 하여금 어용노조를 만들려는 술책을 펴고 있다고 비난하고 백지에 서명을 받아 그것으로 노조를 결성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약속된 출장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나는 예정대로 대만으로 떠났다.돌아왔을 때에는 당사자가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문을 제출한 뒤였다.현장 근로자들은 급기야 마음 약한 내가 그 직원의 사직서를 받지 않으면 자신들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그 뒤 직원들의 모임에서 노조를 결성하자는 의견이 또 한 차례 나왔다. 하지만 회사의 대우에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노조가 필요 하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어서 이 역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일 년에 4~5개월을 해외에서 보낸다.직원들은 나의 부재에 익숙하며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주요 간부들 대부분이 장기 근속한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들이기에 이는 가능하며, 나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하지만 직원들에 대한 신뢰 이상으로 나는 사장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에서라면 사장의 적극성은 소폭 성장을 할 지 그 이상의 성장을 할지를 좌우하는 변수로 자리 잡는다. 외국의 유수 기업들 가운데 사장이 업무를 잘 알고 많이 움직이는 기업들이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도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분명한 것은 오너가 그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리고 오랜 시간 발로 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앞으로 시행착오를 줄이고 시장 흐름을 읽고 예측하는 사장의 제 역할을 다해나가는 동시에 직원들과 우리 사주를 나누어 모든 사원 들을 와이지-원의 주인으로 만들 생각이다. 사장과 직원이 함께 움직일 때 이상으로 더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사업이야기12 - 사업도 자신감에 달렸다 > 적절한 벤치마킹으로 획기적인 R&D인간존중 정신과 도전의식이 중요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나는 무척이나 싫어했다.수업 시간에 합창을 하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조차 입만 벙긋거렸다.남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는 묻힐 게 뻔한데도 말이다. 관광버스에서는 늘 자는 척을 했고, 약혼식에서는 남모르는 연습 끝에 에델바이스를 불러 간신히 체면을 세웠다. 하지만 사장이라는 자리는 한두 가지의 예외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어디를 가든지 제일 먼저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했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치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선천적인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감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모든 노력과 가능성이자 신감과 믿음에 달려 있다. 그래서 나는 큰 꿈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말을 신입사원들 에게 잊지 않는다. 호랑이 꿈을 꾸는 자는 최소한 고양이는 될 수 있다.하지만 평균을 꿈꾸었다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세상은 결국 1등이 아니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1등이 된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힘든 일일까. 올림픽이라면 나 역시 금메달을 딸 자신이 없다.하지만 사업의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뭐든지 세분화해서 한우물만 열심히 파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사업을 할 수 있는 일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돈벌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면 경쟁력은 쉽게 잃어버리고 만다.와이지-원이 회사의 이윤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쉽게 돈을 벌다 보면 사업 열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진정한 경쟁력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야 한다. 결국은 정신력의 문제다.일에 미쳐야 하고 24시간 일한 끝에 1~2분간 휴식하는 상쾌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저력이기도 하다.비교도 안 될 만큼 축구 인구가 많은 일본을 그래도 우리가 이기는 것은 일본만은 꺾겠다는 정신력 덕분이다.일본의 조직력, 미국의 기초과학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한국은 신바람 나는 경영과 같은 한국적인 발상이 발전의 근간이 된다. 적절한 벤치마킹을 통해 획기적인 연구개발(R&D)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하지만 갑자기 잘 되는 일은 없다. 뭐든지 한발 두발 단계를 거 쳐야 한다.와이지-원은 그 같은 계단을 밟아온 끝에 현재 엔드밀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갖게 됐다. 품질경쟁력 최우수 50대 기업 선정(국립 기술원), 정밀 기술 1등급업체 선정(산업기술시험원), ISO9001 인증 획득(TUV CERT), 기술 경쟁력 최우수 기업(중소기업청)으로 지정받는 등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부상한 것도 그동안 꾸준했던 연구개발의 결과다.현재 와이지-원은 유럽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경우 Europa라는 자체 브랜드를 통해 한국 와이지 브랜드와 경쟁을 꾀하고 있다.한 브랜드가 시장을 차지할 수 있는 한계를 딛고 각각 1,2위를 차지함으로써 시장 점유율을 보다 확대해 나가기 위한 전략이다. 앞으로도 와이지-원은 글로벌화와 연구 개발이라는 두 축을 통해 12년 후에는 10억 달라 규모에 이르는 회사로 태어날 전망이다.일하는 즐거움이 그 첫번째 명목이라면 두번째 이유는 거기에 얻어진 이윤을 사회와 직원들의 몫으로 되돌리는 데 있다. 96년 영국에서 주최한 세계 청년 기업가상을 한국대표였던 내가 수상 한 적이 있다. 그러잖아도 북아일랜드에 투자를 한 뒤라 오해의 소지도 많고 해서 내가 상을 받을 확률은 매우 낮았다. 게다가 대만의 에이서컴퓨터 등 우리 회사 매출의 적어도 10배가 넘는 회사들은 무명의 한국 기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턱시도도 안 입은 채 무심하게 잡담 중이던 나는 내 이름이 불리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상을 받기 전에 가졌던 인터뷰가 심사위원들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나는 다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이라는 말과 함께 이윤을 직원들과 공유하겠다는 나의 신념을 밝혔을 뿐이었다. 회사는 사람이 모인 것이다.따뜻한 인간 존중의 마음가짐 없이는 결코 회사를 움직일 수 없다.요컨대 인간 존중이라는 바탕 아래 도전의식을 가지고 세계 시장의 한 분야를 파고든다면 초일류 기업이란 더 이상 대기업들에게 한정된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비록 몇 회에 걸쳐 짧게 실리긴 했지만 작고 초라하던 공장이 세계의 공구업체들을 위협하는 작은 거인이 되기까지는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작은 시작으로 큰 꿈을 키우고 있을 경영인들에게서 지나간 내 모습을 확인하듯, 그들 역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데 내 이야기가 작은 보탬이 됐으면 한다. 끝으로 오랜 세월 가족처럼 서로 아끼고 동고동락해 온 직원들에게 이자리를 빌려 마음깊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