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목적은 꼭 필요한 활동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일을 하기 전에 간단히 "이 일이 나를 향한 하느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까?" 라고 자문하면 된다.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어떻게 시간을 투자하고 자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근거를 잃게 된다. 그저 상황, 압력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기분에 따라 결정을 내릴 뿐이다.
사람들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뜻만을 행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만약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분명 하느님이 의도하신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더 단순한 삶의 방식과 분별 있는 계획을 갖게 한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인터뷰
LG 등 다른회사 부품 30% 가량 들여옵니다
윤종용(尹鍾龍·61·사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IMF 직전 때나 요즘이나 “지금은 최대 위기”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는 지난 96년 반도체 가격이 추락하면서 회사가 50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낼 때 삼성전자 CEO로 부임하면서, 강력한 위기의식과 혁신으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연간 수조원의 순이익을 기록하는데도 아직도 ‘위기’라니, 너무 엄살이 심한 것은 아닌지?
지난 16일 삼성 본관 25층에서 만난 윤 부회장은 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자만하다간 금방 위기에 처하는 게 인간사회 법칙이지요.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환경 변화에 둔감하여 방심하다가 나락에 떨어졌습니까. 게다가 전세계 경쟁업체들이 ‘타도 삼성전자’를 부르짖으며 우리의 방심과 실수를 기다리고 있지요.”
그는 올해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지난해(10조7867억원)보다 소폭 내려갈 것으로 전망했다.
“상반기에는 성적이 나빴는데 하반기에는 나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작년이 워낙 좋았다는 거지요. 작년에는 수출, 환율, 유가 같은 주요변수가 다 우리에게 좋았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반대지요.”
그는 위기의식이 전 직원에게 가장 잘 뿌리내린 회사로 도요타를 꼽았다. 항상 혁신과 개선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긴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기를 강조하면 직원들이 움츠러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상화되면 경쟁력이 됩니다. 그것이 초일류 기업의 요건입니다.”
지난 15일 그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LCD(액정소자)에 대한 투자를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 고 발언하자 국내 증시가 휘청거린 적이 있다. 이에 윤 부회장은 “LCD 시장의 전망을 놓고 너무 자만했거나 거품이 있다면 그런 자만과 거품은 꺼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 부회장은 위기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내 경쟁을 강조했다.
“우리는 반도체, 휴대전화, LCD를 모두 만들지만 부품은 꼭 삼성 것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대략 3분의 1은 다른 회사 것을 사용합니다. 외부 정보도 들어오고, 우리 내부에서 경쟁이 벌어집니다. LG에서 만들었든, 일본제든 좋은 가격에 좋은 품질이라면 적극적으로 사들입니다.”
실무자 시절 TV와 VCR의 기판 회로도를 눈감고도 그렸던 윤 부회장은 앞으로 “국내·외 최고급 엔지니어를 계속 스카우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미래는 ‘나노(10억분의 1)와 박막(薄膜;아주 얇은 막) 기술’에 있다고 설명했다. “나노 기술이나 BT(생명공학) 기술도 IT 기술 없이는 발전이 어려우며, 세 가지 분야 기술은 융합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 회사가 진출할 수 있는 BT(생명공학) 분야는 제한적입니다. 다만 우리가 나노 기술을 발전시키면 IT와 BT의 매개체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주 적자를 기록했던 생활가전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윤 부회장은 “생활가전은 부가가치는 낮지만 우리나라 생활에 적합한 토속성(土俗性)이 있어 결코 포기할 품목이 아니다”면서 “다만 전략적으로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3개 품목만 남겨두고 전자레인지는 해외에서 만드는 정도로 구조조정을 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묻자, “아직도 고정관념과 타성, 형식주의, 이기주의, 권위주의가 남아 있고 느린 스피드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샐러리맨으로 성공하기 위한 그만의 생활 철학을 소개했다.
“직장인은 세상을 얕게 보아 출세만 노리면 안됩니다. 맡은 일을 묵묵하고 우직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와 행복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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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사막에 가스불꽃을 피워라!
- 세계최대 가스 플랜트 프로젝트 -
지난 2005년 4월 20일 이란 -
하타미 이란 대통령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최고의 가스 플랜트 탄생을 축하하는 성대한 준공식이 펼쳐졌다.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 거대한 가스플랜트를 탄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현대 건설의 기술자들이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노동력뿐이었던 한국이 세계최고의 가스 플랜트를 순수 우리 기술력으로 건설한것이다.
▶세계 최대규모 이란 사우스파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98년 3월 - 이란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경제 개발 프로젝트의 하나인 사우스파 가스플랜트 공사 입찰공고가 났다. 이 공사는 페르시아만 공해상에 매장된 천연가스를 뽑아올려 도시가스, LPG등 우리가 사용가능한 연료료 바꾸는 시설로, 총 25단계로 건설될 계획이다.
입찰공고가 난것은 2-3 단계 가스 플랜트로, 공사 금액만 10억 2천만불 규모에 달한다.
현대는 이 공사를 따내기위해 STAS라는 팀을 꾸리고 본격준비에 돌입했다.
이번 공사는 현대외에도 모두 3개 업체가 참여했다. 두업체는 현지기업과 콘소시엄을 꾸렸는데 반해 현대는 단독으로 입찰에 응했다.
그러다 당시 상황은 현대 건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발주처인 프랑스 토탈사는 현대건설에 대한 기업을 모를뿐더러 기술력의 정보도 전무했다. 게다가 경쟁사에서는 입찰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팽팽한 경쟁을 뚫고 단 3%의 가격차로 1위를 차지했다.
계약이 결정된 후 설계작업에 곧바로 착수했다. 설계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3D로 작업함으로써 오차를 줄여나갔다.
문제는 공사현장! 사막 황무지 허허벌판, 지역 인프라 제로상태에서 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숙소를 짓고 자재를 운송할 접안부두까지도 직접 만들어나갔다.
▶이란 현지문화에 적응하라
공사를 진행시키면서 맞닥뜨린 또다른 문제는 인력부족!
특히 숙련된 기능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공채를 통해 기술자를 모집했지만 합격율은 5%!
결국 트레이닝센터를 만들어 현지인들을 직접 교육시켜가며 현장에 투입할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건설현장의 복병은 날씨, 35도가 넘는 날씨에 사람도 기계도 지쳐갔다.
매일아침마다 얼음물을 공급하고, 콘크리트 타설작업시도 냉각수를 사용했다.
무더위와 씨름하며 가스플랜트를 완성해갈즈음, 예상치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란의 현지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것.이른바 9.3사태..
뒤이어 9.11테러까지 일어나면서 중동지역엔 전운이 감돌고, 노동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공사를 멈출수는 없는일!
현지소장의 진심어린 호소와 현지노동자들의 화합노력으로 다시 일을 진척시켰다.
그리고 5달 후... 이란 아쌀루에 사막 한복판에 우리의 기술과 손으로 만든 가스플랜트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 건설역사를 다시쓰다!
2-3단계의 성과를 바탕으로 4-5단계 가스플랜트 공사도 현대건설이 맡게됐다.
하지만 4-5단계 공사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24개월만에 가스인할것, 36개월만에 완공할것. 완공일을 맞추지못할경우 계약금의 5%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것이었다.
결국 2-3단계 공사보다 더 빠르게 4-5단계 플랜트를 완성해야 하는 것인데, 이 조건에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대건설 기술진들은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완공일을 맞추기위해 돌관공사가 시작됐다. 2-3단계때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시간을 줄이기위한 갖가지 아이디어들이 동원되는가운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이 이뤄졌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잠시..착착 올라서는 건물들을 보며 직원들은 노고를 달랬다. 그렇게 해서 24개월만에 플레어스택(폐가스 소각처리시설)에 불을 밝히는 가스인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가스인이 되었다는것은 모든시설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완공을 눈앞에 둔 어느날, 플레어스택에 화재가 발생, 결국 4호기 철탑이 무너져내렸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또다시 이어진 2차 진동사고까지..
발주처에서조차 완공일을 맞춘다는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다시한번 힘을 모았다.
그리고 3개월뒤, 다시는 올라갈것 같지않던 플레어스택이 세워지고 완공일을 한달 앞당겨 35개월만에 4-5단계 가스플랜트를 완성했다.
기적이었다.
현대건설이 세계 건설역사를 다시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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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페라의 증인 김자경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의 주역, 5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공연, 68년, 한국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 창단, 87년, 일흔이라는 나이로 가진 뉴욕 카네기홀 초청 독창회, 94년 10월, 국내 첫 야외 오페라 무대 공연 실현 등 '한국 오페라 반세기의 산 증인' 김 자경의 이력이다. 올해 나이 83세의 김 자경. 촉망받는 소프라노에서 김자경은 오페라와 동의어처럼 됐다. 그녀가 남편과의 사별 이후, 쉰이 넘은 나이로 처음 오페라단 창단을 말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만류와 핀잔뿐이었다. '오페라를 하면 망한다.'는 게 이유였다. '오페라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섰지만, 불모지와도 같은 국내 무대에서 자리 잡기란 쉽지 않았다. 직접 표를 들고 팔러 다니며, 새벽시장의 1만 원짜리 옷을 입으며 검소하게 산 그녀였지만, 적자 공연으로 창단 3년 만에 문을 닫을 뻔했던 때도 있었다. 절망감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던 김 자경. 그러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일년에 한 번도 힘들다는 오페라 공연을 매년 봄, 가을로 두 차례씩 해오고 있는 데에는 물러설 수 없는 '사명감'같은 것이 있다. '한국 오페라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꿈이 그것. 첫 무대에서의 열정과 설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오페라계의 원로, 김 자경. 그녀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를 통해 성공비결을 듣는다.
성공 비결 1 : 말이 씨가 된다.
프리마돈나라는 화려한 타이틀 뒤에 그녀를 오늘에 이르도록 지탱시켜준 말들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 불렀던 김 자경은 개방적인 가정에서 무남독녀로 주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났다. 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철학으로, 어머니의 올곧은 사랑으로 김 자경은 세계적인 성악가로서의 꿈을 키워왔다. 운동이든 공부든 못하는 것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끼로 우여곡절 끝에 이화여전 음악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음악공부에 여념 없던 대학시절, 어머니의 죽음, 김 활란 선생님과의 만남, 남편과의 만남, 48년 춘희공연의 프리마돈나, 줄리아드 대학의 유학시절의 고뇌와 방황, 여러 가지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한국인 최초로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성공 비결 2 : 김경은 없다.
남편과의 사별이후 그녀는 오서방과 결혼했다. 성은 '오' 이름은 '페라'이다. 62년 김 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면서부터 김 자경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48년 최초의 춘희공연, 68년 '김 자경 오페라단의 최초의 공연 '춘희' 이후 그녀를 오페라 무대에서 볼 수 없었다. 제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민간 오페라단을 만들고 여러 가지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발로 뛰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표를 팔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갔고, 이것에 대한 불만도 한점 부끄러움도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자실을 기도하기도 하지만 다시 재기. 목숨을 내놓고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데....오페라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그려진다. 남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는 검소한 김 자경 모습에서 또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성공 비결 3 : 열정
그녀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그녀를 지탱시켜왔다. 무대에만 들어서면 아픈 것을 잊어버리는 그녀, 83살의 나이에도 독창회를 준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서 오페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아직도 새벽부터 성경을 공부하는 모습에서 삶 자체가 오페라인 그녀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본다.
인성정보 원종윤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연 매출 5백억 원대 벤처기업 신화를 이룬 <인성정보>의 원 종윤 사장. 창업 첫 해 흑자부터 시작하여 3년 연속 매출 100%성장이라는 기염을 토한 정보통신업계의 기린아. 컴퓨터가 전공인 다른 벤처기업인들과는 달리 '컴맹'이었던 그가 독학으로 '컴퓨터 엔지니어'에서 우리나라 '정보통신업계의 대표주자'로 우뚝 서기까지...그의 성공비결을 조명한다.
☞ 성공 비결 1 : 전화위복은 내가 만든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 다니던 원 종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교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중 불의의 사고로 집에 불이 나자 학업을 포기한 채 이삿짐센터 인부, 신발장사 등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이후 군대에 가서 진로를 걱정하던 그가 선택한 길은 컴퓨터. 그 때부터 그의 컴퓨터 인생은 시작되고 첫 걸음을 현대전자에서 내딛는다.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던 그였지만 독학으로 컴퓨터를 정복했고 베테랑들이 2,3년 걸려도 하지 못했던 프로그램을 단 3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개발하는 저력을 발휘하여 주위를 놀라게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될 것같은 운명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여 더 큰 성공의 길로 도약한 원 종윤. 그의 전화위복은 그가 결정한 것이었다.
☞ 성공 비결 2 : 성공확률을 높여라
현대전자라는 대기업에서 성공을 꿈꿨지만 현실의 벽은 영원히 그에게 높게만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옮긴 유망 중소기업에서 역시 마음껏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한 원 종윤은 결국 창업을 결심한다. 창업을 위한 우선 과제..."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한 모든 요소를 끌어들여라!" 신용 있는 투자가, 실력 있는 창업멤버가 그것이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여무리하게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창업을 하는 우는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투자가 중 신뢰할 만한 대기업을 자본가로 택하고, 이전에 몸담았던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유능한 동료를 끌어들여 창업을 했고 결과는 성공! 창업 첫 해부터 엄청난 흑자를 기록한다. 뛰어난 기술로 창업 첫해부터 한국 IBM의 공식지정업체로 선정되고 여러 대기업 경쟁업체와의 1년여의 사투 끝에 대한생명의 16억 9천만 원짜리 계약을 채결하게 된다. 또한 3년 연속 100%성장이라는 경이로운 기록과 함께 세계적인 기업 쓰리콤과 제휴하여 아시아 최초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 파트너 상]을 수상하는 등 이젠 경쟁업체가 거의 없는 정보통신업계의 기린아로 군림한다.
☞ 성공 비결 3 : 나는 참을 수 있다
계속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버려진 배춧잎을 주워서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로 가난했던 어린시절.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게 되자 부모님께 반항까지 하지만 결국 반성하고 가난은 자신이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적이 우수하여 중학교 때부터 같은 중학생의 과외아르바이트를 하고 허름한 동네 독서실에서 입시준비를 할 때 밤에는 독서실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자고 쉰밥까지 먹으면서 공부할 때도 그는 묵묵히 학업에 매진한다. 그의 인생의 모토는 참는다는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신고 다니는 오래된 신발에서도 그의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컴맹으로 시작한 평범한 말단사원에서 중견기업의 사장이 되기까지 그가 변하지 않은 하나! 어려웠던 시절을 묵묵히 참고 앞을 향해 걸어온 것...그것이 그의 성공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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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성공사례9.-디자인, 아이레보의 하재홍 사장
마케팅은 생각 전환에서부터
게이트맨, 열쇠 없이 마술처럼 들어가다
멋지게 차려 입은 여자 두 명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다. 내린 곳 역시 같은 6층이다. 알고 보니 서로 맞은편에 사는 이웃이다. 한 여자가 핸드백에서 열쇠를 찾는 동안 다른 한 여자는 열쇠구멍도 보이지 않는 현관문 어딘가에 손목을 슬쩍 대기만 한 것 같은데, 마술처럼 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열쇠를 찾던 여자는 이미 닫혀진 상대편 아파트 문에 코를 박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부럽다!’를 외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디지털 도어록 ‘게이트맨’의 TV CF 장면이다. 그때까지 디지털 도어록 광고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CF는 곧 많은 사람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문단속도 디지털로 한다는 ‘디지털 도어록’에 대한 개념도 널리 알릴 수 있게 한 신호탄이 되었다. 게다가 기존의 열쇠가 가진 통념을 확 뜯어고친 쌈박한 디자인은 소비자를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이후 게이트맨을 만들어 낸 (주)아이레보는 ‘디지털 도어록 = 게이트맨’이라는 화려한 이름표를 달고 쾌속 질주했다.
디지털시대의 디지털 열쇠. 무척 당연해 보이는 일이지만 게이트맨 이전의 디지털 열쇠는 생각만큼 그리 쉽게 대중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몇몇 특별한 곳을 제외하고는 일반 가정집, 아파트 등에서 디지털 열쇠를 사용하는 곳은 흔치 않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한 집 두 집 달그락거리는 열쇠를 집어던지고 열쇠 없이도 마음대로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디지털 열쇠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처럼 디지털 열쇠가 대중화된 데에는 게이트맨의 등장이 결정적이다.
언뜻 보면 누구라도, 어느 업체라도 쉽게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아이템 같았지만 의외로 쉽게 열리지 않았던 그 시장을 3년 만에 활짝 연 아이레보. 어떻게 그 단단한 시장 문을 열었을까. 무슨 수로 시장의 절반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마법의 마케팅 카드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신기한 이력을 거슬러 올라 가봐야겠다.
■ 그저 그런 평범한 디자인 출시
힘없는 마케팅이 첫 게이트맨을 쓰러뜨리다
아이레보의 하재홍 사장은 복제가 불가능한 ‘플로팅(Floa-ting)ID’라는 첨단 기술을 개발, 험난한 자금난을 거쳐 1999년 디지털 도어록 ‘게이트맨 1’을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대단한 기술이던 것에 반해 제품은 시장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모두 놀랄 만한 기술이지만, 이를 상품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 기술은 다시 무덤 속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더는 또 다른 기술을 개발할 수 없었기에 어찌됐든 일단 빨리 ‘제품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실패를 자초한 것이다. 기술을 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너무 큰 힘을 쏟아 부어 정작 제품 자체에 기술과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불어넣지 못했다는 게 큰 실수였다. 소비자들의 눈에는 열 때마다 암호가 수시로 변경되는 첨단 기술은 보이지 않고, 현관문에 붙어 있는 그저 평범한 잠금 장치로만 보였던 것이다.
함께 출시한 MP3, 인터넷 인증 시스템 등의 제품도 시장에서 신통치 않았다. 직원 27명 중 13명이 사표를 낼 만큼 가라앉았다. 기술력만 믿고, 마케팅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뜨거운 시장에 뛰어든 벤처기업의 전철을 밟았던 것이다.
■ 디자인 전문 회사와 손잡은 제2의 마케팅
쌈박한 디자인으로 매출이 쑥쑥
게이트맨1의 핵심 기술을 더욱 갈고 닦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독창적인 기술로 일단 1차 마무리해 놓은 후 아이레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디자인 전문 회사. ‘마케팅 능력 부족’이 시장에서 참담하게 쓰러진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판단한 하 사장은 성공적인 마케팅은 제품 출시 후에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기획단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기술’이야 이미 인정받았으므로 ‘디자인’이라는 주사위를 마케팅 승부수로 띄우기로 결정했다.
디지털 기능이니만큼 외관도 편의성도 디지털스럽게 시도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내부적으로 디자인을 직접 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일렘디자인과 인연을 맺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고, 규모가 큰 곳은 아니었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아이레보의 생각을 명확히 이해했기 때문에 파트너로 결정했다.
그러나 디지털 도어록이라는 제품 자체가 마음먹은 대로 디자인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제품 특성상 반드시 문에 부착해야 한다는 게 첫째 이유였고, 문의 한쪽만이 아닌 문을 사이에 두고 앞뒤에 장착해야 한다는 게 둘째 이유였다. 게다가 제품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문과의 조화도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마음에 들면 문에 부착하는 기술적인 과정이 따라주지 않고, 부착하는 기술이 해결되면 심미성이 떨어지니 그야말로 산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렘디자인과 아이레보는 6개월이 넘도록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2001년 2월 드디어 ‘게이트맨 2’를 시장에 내놓았다. 말로만 듣던 대박이 터졌다. 첨단 기술과 디자인의 조화가 성공 요인이라는 외부의 평가가 쏟아졌다. 이는 아이레보가 세운 작전이 주효했음을 입증하는 평가이기도 했다.
■ ‘입소문’이 또 하나의 마케팅 지원군
소비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 TV 광고도 효과
매출이 점점 늘어가자 아이레보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개발하는 데 착수했다.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시장을 바짝 당기는 한편 더욱 힘을 실어주고자 2002년에 TV 광고를 실시했다. 업계 최초의 디지털 도어록 TV CF였다.
자금도 여의치 않은 중소기업이 무슨 TV 광고를 하느냐고 회사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실시한 TV 광고가 전파를 타자 점차 확대되어 가는 시장에 기름을 쏟아 부은 양 활활 타올랐다. ‘게이트맨’을 알리는 것 외에 디지털 도어록이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실시된 TV 광고는 소비자들이 ‘게이트맨’을 선택하는 데 쐐기를 박게 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소문’ 마케팅도 가세했다. 직접 써 본 고객들이 다른 사람에게 좋다며 추천해 주는 사례가 점점 늘어났다. 게이트맨 달기 붐이 일어난 것은 이 같은 소문에 힘입어서였다. 실제 앞집이 설치하면 며칠 뒤 그 옆집에서도 연락이 오는 경우가 소비자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매출액은 209억 원에 달했다.
■ 디자인을 내세운 빨간색 보조키로 회사 진입 안착
성공 성장 위해 입소문 마케팅 주력
지금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방패처럼 생긴 빨간색 보조키 ‘게이트맨 로즈’의 디자인 개발 과정은 드라마에 가까울 정도로 극적이었다. 빨간색이라는 색상 자체도 모험에 가까운데다, 외부에 노출되는 제품이어서 색이 바래지므로 이를 보완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러저러한 난관을 뚫고 몇 개월에 걸친 디자인 작업을 마친 후 양산을 앞둔 시점에서 모두 뒤집고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출시된 로즈가 바로 슬라이딩 휴대폰 방식의 위로 밀어 올리는 빨간색 방패형 보조키였다. 게이트맨 하면 빨간색 보조키를 연상할 만큼 로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이레보는 TV 광고에 이어 신문, 잡지 등 각종 인쇄매체는 물론 드라마, 영화를 통한 PPL 광고 등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또 소문 마케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A/S에도 세심한 공을 들였다. 이는 2003년 매출 361억 원, 코스닥 등록이라는 결과를 안겨주었다. 이제 TV 광고는 더는 하지 않을 계획이며, 소문 마케팅 확산을 위해 고객 위주의 서비스 마케팅에 주력할 것이라는 아이레보는 앞으로 건설회사를 주요 타깃으로 한 마케팅과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해외 마케팅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도어록을 넘어 홈 시큐리티 시장을 겨냥하는 아이레보가 앞으로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우리 모두 눈여겨보자.
■ TIP 아이레보의 성공 마케팅 기법 한눈에 훑어보기
▷ 디자인 마케팅 : 독보적인 첨단 기술이 뒷받침되었지만, 여기에 탁월한 디자인을 덧입음으로써 마케팅에 성공한 케이스. 제품 기획단계부터 디자인에 초점을 맞췄다. 비용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이는 더 큰 이익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확신했고 디자인 전문회사에 맡겼다. 디자인을 아웃소싱할 경우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디자인 회사에 분명하고 확고한 컨셉트를 주문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레보의 귀띔.
▷ 입소문 마케팅 : 직접 써 본 고객들이 다른 고객들에게 추천해 주는 것만큼 훌륭한 마케팅이 없음을 증명해 준 경우. 아이레보와 같이 기술은 물론 제품 전반에 걸친 자신감이 제품에 녹아 있어야만 가능한 기법이다. 소문 마케팅의 핵심 포인트는 사후관리, 고객관리라는 것이 아이레보의 노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