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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다. 민족의 후예는 선조의 얼을 이어 새 역사를 창조해 간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오늘날 얼마나 사실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동북아시아를 웅비했던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9천년 역사는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고, 말살되었다. 인류의 시원사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한민족 9천년 역사가 언젠가는 정확하게 재조명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만주 대륙을 풍미했던 옛 고구려의 사라진 역사의 일편을 밝혀 보고자 한다.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해 온 거대왕국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했다. 그 동안 고구려는 동이족(東夷族)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양만춘(楊萬春) 등 불세출의 영웅들이 대륙을 호령할 때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백만 중국인의 뼈가 고구려의 산하에 묻혔다.
이러한 고구려(高句麗)가 연개소문(淵蓋蘇文) 사후 어이없게도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는 철저히 고구려를 궤멸시켰다. 고구려의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고구려 왕족들을 비롯한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하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900년 장구한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서기 670년 4월, 보장왕(寶藏王)의 외손 안승(安勝), 검모잠(劍牟岑) 등이 창과 칼을 들고 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大仲象), 대조영(大祚榮)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대진국(大震國)을 세웠고, 당(唐)의 세력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多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 보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자신들의 영역으로 쫓겨가야만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명의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사라져 간 고구려의 자손 가운데는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高仙之) 장군도 있었고, 무열(武列)의 명예에 봉해진 왕사례(王思例)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일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武將)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平爐節度使)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화북지역을 장악하자, 장안의 당나라 조정과 요동지역의 평로절도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李正己)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지역의 군사들은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해서 758년에 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동쪽에는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한 발해(渤海)가 있었기 때문에 이정기는 따로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중원대륙에 또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들로 편성된 2만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상륙하였다. 당나라는 1개 주에 수만의 병력을 배치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기가 거느린 2만 군사는 그리 많은 병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멸망 당시 강제 이주되었던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정기의 군대가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들고 중국 본토에 진격해왔다는 소식에 크게 고무(鼓舞)되었고 당나라 관헌에 저항하며 일어섰다.
이정기(李正己)의 군대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며, 당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치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이정기는 781년에 당군과의 일대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江南)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의 군대가 점령하자 장안의 당나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정기는 10만의 대군을 양성하여 장안으로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천명(天命)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치청번진(枝城藩鎭)의 고구려군이 변주의 당군 20만명을 무찌르고 성에 고립시킨 후에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命)이 다한 것이다. 당나라의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둘렀던 이정기(李正己)는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치청번진(枝城藩鎭)의 군사들은 비통함을 무릅쓰고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의 황제 덕종(德宗)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다음해에 이정기의 아들 이납(李納)은 운주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제(齊)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李劉), 덕주의 이사진(李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慶)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3천여척의 선박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왕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뒤를 이어 제왕(齊王)에 등극한 이사고(李師考)는 부국강병책을 써서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李師道)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齊國)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이사도(李師道)는 당나라 황제 헌종(憲宗)이 제국(齊國)을 침략하기 위해 200만섬의 군량미를 준비해 비축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불태워버리고 낙양성을 공격하여 궁궐을 파괴하였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유격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齊國)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국(齊國)이 쇠퇴기로 접어들자 헌종(憲宗)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군사를 일으켜 제국(齊國)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지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齊國)을 총공격하였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명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 유민들의 제국(齊國)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이사도가 부하인 유요에게 살해당함으로써 668년에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지 58년만에 이제 그 불꽃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齊國)이 붕괴한 뒤 장보고(張保皐)는 신라(新羅)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을 무대로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여 해상왕이 되었다. 중원대륙을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전함을 타고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그 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고구려 언어를 쓰며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이정기(李正己)! 어찌하여 이같이 찬란했던 민족의 영웅이, 민족의 정신이 1,200년 간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었던가? 고구려의 후예가 분명한 우리는 왜 이처럼 고증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제는 과거 사대모화사상과 친일 식민사관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에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밴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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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행복서비스 2007.07.0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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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 담아갑니다.
더욱 성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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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명주 2007.08.2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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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잘 읽고 담아갑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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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마고성 환인 환웅 환국 - 신라시대 충신인 박제상이 쓴 역사서 우리 민족의 창세 신화
우리민족도 엄연한 창세신화가 있습니다.
그 신화가 바로 마고신화로 마고신화의 주인공 마고여신은 천지창조를 한 대지모신입니다.
부도지라는 책을 보면 우리민족 창조신화가 쓰여져 있습니다.
신라시대 충신인 박제상이 쓴 부도지라는 책을 보면 우리민족이 세운 첫 국가가 고조선도 환국(桓國)도 아닌 마고가 세운 마고성 또는 마고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고의 나라가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6만 년 전인 짐세시대(우리가 살고 있는 선천시대 이전의 시대) 때 지금의 파미르 고원에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마고성은 8려의 음에서 나왔으며 8려의 음에서 마고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즉 마고여신은 음악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미르 고원에 있는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라고 합니다. 이 성의 주인은 마고라는 여성(혹은 여신)인데 마고에게는 궁희와 소희 두 딸이 있었고 이 둘이 겨드랑이로 출산을 하여 궁희는 황궁과 청궁 소희는 흑소와 백소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네 천녀와 결혼하여 12명의 자식을 낳는데 이 들이 인간의 시조라고 합니다.
이 때 사람들은 성품이 순수하여 능히 조화를 알고 땅 속에서 솟아나는 지유를 마셨으므로 혈기가 맑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또한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고 형상을 나타내지 않고도 능히 행동을 취할 수 있었으므로 수명은 한이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몇 만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마고성에는 인간의 수가 많이 늘어나서 사람들이 먹을 지유가 부족했습니다.
하루는 백소씨족의 지소씨가 다른 사람들에게 5번이나 자신이 먹을 지유를 양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가고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난간에 포도넝쿨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배가 고픈 나머지 포도를 먹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펄쩍 뛰어 일어나 "넓고도 큰 천지가 열렸다 참으로 좋구나"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포도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을 오미- 시고, 쓰고, 맵고, 달고, 짠맛-의 변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포도를 먹은 사람들은 이빨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빨에서 생기는 침이 독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억지로 다른 생명을 먹었기 때문인데 열매를 따먹은 것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어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의 눈이 밝아져서 올빼미 모양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살과 피가 탁해지고 심기가 모질게 되어 마침내 착하던 본래의 천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가 하면 가볍던 발은 무거워져 그 전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짐승같이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수명도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지소씨를 원망하였고 지소씨는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권속(가족)을 이끌고 성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포도를 먹은 사람도 떠나야 했습니다.
이 때 인간들의 우두머리이자 우리 한민족의 직계 조상인 황궁씨는 떠나는 사람에게 열심히 수도하여 성정이 맑아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복본에 이를 것이라며 격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을 떠난 사람들 중 일부는 복본을 하려고 했는데 방법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복본 방법을 성에서 나는 지유를 얻는 것이라 여기고, 지유를 얻고자 성을 팠는데 성토(마고성)가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들어 단단한 흙으로 변해 지유를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성 안 사람들은 배고픔은 못 이긴 나머지 포도등 열매와 살아있는 생명(짐승)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습니다.
그리하여 성 안 사람들도 마고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황궁씨는 마고 여신 앞으로 가 사죄를 한 후 반드시 복본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칡을 캐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천부의 신표를 나누어 준 뒤 각 권속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 나누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먼저 청궁씨는 자기네 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가 운해주(중원, 즉 중국)로 백소씨는 서쪽으로 나가 월식주(오늘날 중동과 유럽일대)로 흑소씨는 남쪽으로 나가 생성주(오늘날 인도와 동남아 일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황궁씨는 북동쪽으로 나가 천산주(천산산맥)로 나갔는데 천산주는 매우 춥고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황궁씨가 천산주로 가기로 한 이유는 복본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요 맹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황궁씨는 아들인 유인씨에게 대권을 넘겨주고 둘째, 셋째 아들에게는 각 주를 순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복본에 성공한 황궁씨는 천산에 올라 돌이 되어, 길게 조음을 울려 인간세상의 미혹을 남김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복본의 서약을 하며 장자 유인에게 대권의 증거인 천부삼인을 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인씨의 아들인 환인씨는 지금의 바이칼 호에 환국이란 나라를 세웠습니다.
마고성의 위치-오늘날 파미르 고원 일대가 바로 마고성이 있던 자리와 동시에 마고의 나라가 있었던 곳입니다.
마고성의 경제- 마고성 안 사람들이 성 안에서 솟아나는 지유를 마셨다는 점에서 마고성의 경제는 자급자족의 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고 성 안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진 이유는 마고성 안의 식량이 부족해지자 식량을 얻기 위해 각지로 흩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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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명주 2007.06.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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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스크랩해가도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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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하문명은 요하배달문명에서 나왔다.
◇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우실하 (한국항공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지음
동북공정 이후 본격 제기되는 ‘요하문명’을 분석한 책이다.
요하는 만주 남부 일대에 흐르는 강.
요하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중국이 자랑하는 황하문명보다 최소 2000년가량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서는 갑골문과 다른 도부(陶符)문자, 중국 신화와 연관성이 없는 여신상, 정교하게 조각된 옥귀걸이 등이 나와 중국 학계를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중국 학계는 기존 황하문명설을 뒤집고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해서
이 지역을 ‘삼황오제’의 전설에서 오제의 첫 왕인 헌원(獻轅)의 영역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저자는 중국 문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하문명의 유물을 근거로
중국 학계의 모순을 지적한 뒤 이 지역은 한민족의 시초인 동이(東夷)족의 활동 무대였으며
그들이 요하문명의 주인공이자 중국에 선진 문물을 전해준 선구자였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은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동이족과 그 후손인 한민족이 중국 문명의 원조라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어 상고사 논쟁의 새로운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안 오회분 4호묘에 그려진 복희-여와상과 삼족오.
삼족오는 중원과 요서 지역이 상고시대부터 교류한 흔적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동아일보 200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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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명주 2007.06.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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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내용이라 스크랩해갑니다 ^^ 행복한 주말 되세요 ^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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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 2007.09.16 00:33 [59.20.15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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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생각한다.어릴떄부터 국사는 싫었다.그러나 지금은...그리고 지금도 변치않는 하나는 우린 많이도 섞였다는 것이다.실제적인 국경의 의미도 모호하고,중국말도 들어보고,한국말도 들어보면 다들 그만한 논리가 있고,결국 울 땅이라고 생각코싶은 그것이 지금 우리것이 아니라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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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 2007.09.16 00:36 [59.20.15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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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지금 중한것은...8살떄부터 남살림을 헀던 나의 어머님...자갈치시장에서 행상을 하여 전화기와 냉장고를 사셨고,은행청소 일하러 새벽에 나가시다가 교통사고당하여 그분의 머리 뇌 반쪽에 죽은피가 모여있어서 그분이 항시 아픈 머리통증이 없도록 어떻게 내가 재롱을 떨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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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 2007.09.16 00:38 [59.20.15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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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에게 유일한 웃을수 있는 이유와,유일한 편함을 얻을수 있는시간은 그분과 이야기를 하며,손을 만지며 이야기하는 시간인데,아무리 생각해도 남들이 그분을 일컫듯 법없이도 사실,독일놈들보다 사리가 밝은분이고,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인데,내 젊은날 철없이 선택 잘못하여 이래 어려워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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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 2007.09.16 00:39 [59.20.15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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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며,후천적으로 개발되는 한계는 어떤 질적인 것보다는 양적인 것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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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符經解 孤雲 崔致遠천부경해 고운 최치원 천부경의 해설 고운(호) 최치원
천부경天符經
一始無始一析三極無 일시무시일석삼극무
盡本天一一地一二人 진본천일일지일이인
一三一積十鉅無櫃化 일삼일적십거무궤화
三天二三地二三人二 삼천이삼지이삼인이
三大三合六生七八九 삼대삼합육생칠팔구
運三四成環五七一妙 운삼사성환오칠일묘
衍萬往萬來用變不動 행만왕만래용변부동
本本心本太陽昻明人 본본심본태양앙명인
中天地一一終無終一 중천지일일종무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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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符經 八十一字
천부경은 81자로 된 경전이다.
[天符經解] 孤雲 崔致遠천부경해 고운 최치원
천부경의 해설 고운(호) 최치원
八十一字神訣 神訣字雖八十一 萬法具略
팔십일자신결 신결자수팔십일 만법구략
: 팔십일자로 신(변화)의 이치를 끝낸다
신(변화)의 이치를 비록 팔십일자로 밝히나,
만가지 법을 갖추고 다스린다.
一者 太極也 无始者 无極也 太極始于无極 故曰 '一始無始'
일자 태극야 무시자 무극야 태극시간무극 고왈 일시무시
: 一(일)이라는 태극을 말한다.
무시(시작이 없음)라는 것은 무극을 말한다.
태극은 무극에서 시작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태극은 무극에서 비롯된다"한다.
太極分而爲天 爲地 爲人也 故曰 '一析三'
태극분이위천 위지 위인야 고왈 일석삼
: 태극이 나뉘어져 하늘을 낳고, 땅을 낳고, 사람을 낳는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나가 셋을 낳는다."고 한다.
雖分三才 太極依舊自在也 故曰 '無極盡本'
수분삼재 태극의구자재야 고왈 무극진본
: 비록 세 개의 근본으로 나누어지나,
태극에 의지하여 오랫동안 스스로 존재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무극은 다함이 없다"
天得一而爲第一 地得一爲第二 人得一爲第三也
故曰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득일이위제일 지득일위제이 인득일위제삼야 고로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 하늘이 一(일,태극)을 얻어 一(일)을 만들고,
땅이 一(일,태극)을 얻어 二(이)를 만들고,
사람이 一(일,태극)을 얻어 三(삼)을 만든다.
옛말에 이르기를 천이 태극을 얻어 一(일)이되고,
땅이 태극을 얻어 二(이)가되고, 사람이 태극을 얻어 三(삼)이도니다
*천지인에 모두 태극이 있다.
无極 則金剛般若眞如之先天也 太極 則阿賴耶識 天地人物 皆因此識而落於后天 生生死死
무극 즉금강반약진여지선천야 태극 즉아뇌야식 천지인물 개인차식이낙어후천 생생사사
四生之道 不息 사생지도 불식
: 무극은 곧 쇠의 강함이 돌아오는, 선천의 원래의 생김 그대로와 같은 것이며(타고난 그대로), 태극은 곧 언덕(무극)에 의지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천,지,인의 물건이 모두가 후천에서 떨어져 이곳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낳고, 낳으며, 죽고, 죽는(목화금수) 네가지를 생성하는 도는 쉬지 않는다.
天一生水 地六成之 居北 地二生火 天七成之 居南 天三生木 地八成之 居東
천일생수 지육성지 거북 지이생화 천칠성지 거남 천삼생목 지팔성지 거동
地四生金 天九成之 居西 天五生土 地十成之 居中也 故曰 '一析十鉅'
지사생금 천구성지 거서 천오생토 지십성지 거중야 고왈 일석십거
: 천의 一(일)이 水(수)를 만들고, 땅의 6이 이루며 북쪽에 거주하며,
땅의 二(이)가 火(화)를 만들고, 하늘의 7을 이루며 남쪽에 거주하며,
천의 三(삼)이 木(목)을 만들고, 땅의 八(팔)을 이루며 동쪽에 거주하고
땅의 四(사)가 金(금)을 만들고, 하늘의 九(구)를 이루며 서쪽에 거주한다.
하늘의 五(오)가 土(토)를 만들고, 땅의 10을 만들며 중앙에 거주한다,
그리하여 옛말에 이르기를 "하나가 나뉘어 십을 크게 한다"고 했다.
已落后(天) 三才萬物 生成不息 變化無窮也 故曰 '无櫃化三'
이락후천 삼재만물 생성불식 변화무궁야 고왈 무궤화삼
: 후천에서 떨어진 삼재의 만물은 낳고, 이루는 것을 쉬지 않는다.
변화는 끝이 없다. 옛말에 이르기를 무극이라는 궤는 삼(삼재, 만물, 천지인)으로 화한다.
二 陰數(也) 三 陽數(也) 天地人 皆有陰陽也 故曰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이 음수야 삼 양수야 천지인 개유음양야 고왈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二(이)는 음수이고 삼은 양수이다,
천지인이 모두 음양(二,三)을 가지고 있다.
: 옛말에 이르기를 "하늘도 이삼(음양),땅도 이삼9음양),사람도 이삼(음양)을 가지고 있다"한다.
后天乾坤配合 (化)生一白水 二黑土 三碧木 四綠木 五黃土 六白金 七赤金 八白土 九紫火 후천건곤배합 화생일백수 이흑토 삼벽목 사녹목 오황토 육백금 칠저금 팔백토 구자화
: 후천의 건(하늘)과 땅(곤)이 서로 짝이 되어 합하여, 一(일)의 흰 수를 만들고,二(이)의 검은 토를 만들며, 三(삼)의 푸른 목을 만들고, 四(사)의 초록 목을 만들고, 五(오)의 누런 토를 만들고,六(육)의 흰 금을 만들고,七(칠)의 붉은 금을 만들고, 八(팔)의 흰 토를 만들고, 九(구)의 자주 빛의 화를 만드는 것으로 변화한다.
批鋪九宮 運化無窮也 故曰 '大乾合坤 生七八九'
비포구궁 운화무궁야 고왈 대건합곤 생칠팔구
: 구궁으로 밀쳐서 펴놓아, 운행하여 변화는 끝이 없느니라.
옛말에 이르기를 "큰 건과 곤이 합하여 6,7,8,9를 만드느니라."한다.
氣具大略 以上 (上述之道 要略言之 氣具一統 運化所成也) 三才萬物 分裂之像也
기구대략 이상 상술지도 요략언지 기구일통 운화소성야 삼재만물 분열지상야
: 기운은 각기 큰 다스림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 도의 지음은 말로써 요약하면, 기가 하나의 큰 줄기를 갖추어서, 운행하고 변화하여 비로소 이루어지느니라.)
삼재(천지인)만물이 나뉘어져 형상을 이루게 되느니라.
歸根復命 眞一之道(也) 運三木之日 四金之月 入中結丹 五土 七火 一水 妙合(而)凝 無量廣劫
귀근복명 진일지도야 운삼목지일 사금지월 입중결단 오토 칠화 일수 묘합(이)응 무량광겁
: 근원으로 돌아가서 원래의 명(천명, 본성)으로 돌아오니, 참된 하나(태극)의 도이니라. 三木(삼목)의 해와 四金(사금)의 달을 운행하여 中(중)에 들어, 단(붉음,밝은 마음)을 맺으니, 이를 五土(오토)라 한다. 七火(칠화)와 一水(일수)는 묘하게 합하여져 응결되어, 무량광겁동안
得大自在也 千千萬萬世 長生不死之大道 成仙成佛之眞訣 惟此一法 更无他術也
득대자재야 천천만만세 장생불사지대도 성선성불지진결 유차일법 갱무타술야
: 크게 얻어 스스로 존재하느니라, 천천만만세 동안 오래 살며, 죽지 않는 대도를 만들며, 仙(선)을 만들고 佛(불)의 진결을 만든다. 이 하나의 법을 생각해보면, 고칠 것이 없는 그 이치니라.
故曰 '運三四 成環五 七一妙衍'
고왈 운삼사 성환오 칠일묘연
: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삼사(木(목)金(금))를 운행하여 五(오)를 만들고, 칠일(水(수)火(화))묘하여 넘쳐흐른다.
訣中秘旨 口口相傳 不記于文 故 不遇眞師 莫能知之 欲聞秘旨者 正心修戒 至誠發願 心有眞師
결중비지 구구상전 불기우문 고 불우진사 막능지지 욕문비지자 정심수계 지성발원 심유진사
: 중을 잡고, 아름다움을 숨겨서 입과 입으로만 서로 전하여 오고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다. 고로 진짜 스승을 만날 수 없어서 능히 알지를 못하였다. 숨겨진 선미(아름다운 맛)를 듣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계를 지켜서, 지극한 정성으로 원하는 것을 발하면, 마음이 진짜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下敎矣 以上 (上述之道) 誠意 正心 修身等事也 故曰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하교의 이상 (상술지도) 성의 정심 수신등사야 고왈 만왕만래 용변불동본
: 아래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하면, 성의(뜻을 성스럽게함), 정심(마음을 바르게 함),수신(모을 닦는 것) 와 일(범사, 정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만사가 가고, 만사가 오듯이 그 쓰임은 변하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
"만 가지 일이 내 마음이 조화를 벗어나지 않는다." ,"조화는 일어나나 근본(중)은 변하지 않는다."
'本心本太陽 昻明' 以上 (之道) 齊家 治國 平天下等事也
본심본태양 앙명 이상 지도 제가 치국 평천하등사야
: 원래의 마음은 크게 밝은 것이 근본이니 밝은 것을 우러러 보라.
이상의 도는 제가(집안을 돌보고), 치국(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세상을 편하게 하는것)과 것과 같은 일이다.
至戌亥之會 天地人物 莫不壤滅 無終者 惟此眞一也 故曰 '人中天地一一終 無終'
지술해지회 천지인물 막불양멸 무종자 유차진일야 고왈 입중천지일 일종 무종
: 술해(토수,토(중)에서 처음으로 수(1)이 생긴다.)의 모임에 이르면 천지인의 물건이되고, 흙(토)이 멸망하여 없어지는 아니한다(토는 사라지지 않는다). 무종(끝이 없다는)는 것은, 생각해보면 이것이 참된 하나(태극)이느니라.
옛말에 이르기를 중(토)에 들어가면, 천지가 하나이고, 하나(태극)으로 끝나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道家之守中抱一者 此也 佛家之萬法歸一者 此也 猶未乃也 至於三年乳哺 九年面壁 至於無極
도가지수중포일자 차야 불가지만법귀일자 차야 유미내야 지어삼년유포 구년면벽 지어무극
: 도가의 일(태극)을 안고 중을 지키는 것이 이것이고, 불가의 만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이것이니라. 지금도 아직 이르지 못했느니라.
삼년 간 젖을 먹이는 것에 이르고(선도수련), 구년간 벽을 바라보면 (구년면벽,불도수련) 하면, 무극에 이르게 되고,
以後 了當也 이후 요당야
: 이후에 마침내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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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우주이니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나뉘어도 근본은 변함이 없고
하늘 땅 사람은 모습은 다르되 근본은 같으니라.
하늘의 정기가 충만해지건만 담을 상자 없어 사람으로 변하노라
삼극이 돌고 돌아 24절기를 만들고
삼극의 조화로 기가 몸과 마음을 감싸노니
하늘의 움직임은 묘하도다. 삼라만상이 가고 오는구나.
만물의 쓰임은 변해도 근본은 변치 않고
근본 마음이 본래 밝은 빛이니
사람을 우러러 비추어라. 천지간에 으뜸이니라.
우주는 끝남이 없이 끝나는 우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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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한자의 뜻 그대로 풀어보면 "一은 시작되지 않고 시작된 一이며" 라는 뜻이다. 이 一이 무엇인가를 놓고 많은 학자들이 온갖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는데, 시중 책들에 나열한 것만 해도 십여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몽땅 다 틀린 것이 전부 다 지맘대로 추측해서 쓰기 때문이다. 이 一이 무엇인가는 지레짐작할 필요도 없이 천부경의 다음 문장에 나와있다. 즉,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이라고 천부경에서 밝히고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이 문장의 뜻은 글자 그대로 읽으면 된다. 황당무계한 학설을 동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하늘[天]의 수는 一一이요, 땅[地]의 수는 一二요, 사람[人]의 수는 一三이다." 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즉, 一은 하늘을 뜻하는 수이다. 천부경에서 사용된 모든 一이란 수는 하늘이고 二란 수는 땅이며 三이란 수는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한문을 아는 중학생도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써진 것이 천부경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후학들이 황당한 장난을 친 탓에 마치 난해한 기문둔갑술의 주문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첫째 문장 '一始無始一'의 뜻은? 어려울 것도 없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하늘이니." 라는 뜻이다. 이런 문장이 해석이 안 되어서 어려울 게 뭐 있노 이말다. 이거 못 읽는다 하면 빙신들이다.
이 천부경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한문으로 번역할 때 시적인 멋을 조금 부린 데가 있다. 즉, 당시의 한시의 형태를 따서 시종대귀법을 사용했다. 첫장과 종장을 대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해석을 위한 목적에서는 천부경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붙여서 읽어야 한다.
'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자 설명 안해도 총명한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하늘 즉, 우주는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고 끝남이 없이 끝나니라' 하고 이 우주의 생성원리를 한마디로 짤라서 말하고 있다.
천부경의 첫 문장은 우주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요, 결론이요, 정의이다.
천부경의 이 여섯 글자가 바로 전체 동양의 우주론의 핵심이고 골자임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시작이 없는 우주, 끝이 없는 우주. 이것이 고대의 우리 선인(先人)들이 이미 밝혀놓은 우주의 실체이다. 스티븐 호킹은 일만년이 지난 지금에사 이 우주는 시작이 있을 수 없다, 고로 우주의 종말은 없다고 하는 유치한 우주론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훗날 석가의 우주관이 여기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저 문장을 보면 누구나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불가의 반어법이 천부경에서 나왔음이다. 석가는 이 문장을 바꾸어서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 말했고, "이 세상은 나는 곳이 없으므로 돌아가는 곳이 없느니라." 라고 말했다. "가장 큰 것은 가장 작은 것과 같고, 영원은 찰나와 같으니라." 불가의 비장의 보도인 반어법은 모두 천부경에서 베낀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가 이 천부경을 알고 있었는가? 답은 그렇다. 이다. 유불선이 천부경에서 비롯된 내막들을 설명할 차례이다.
석가모니 자신의 혈통이 아리안[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인종을 통틀어 이르는 말. 본디는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나 이란에 이주한 고대 민족으로, 언어를 포함한 문화상의 공통성으로 보아 이들이 서진한 것이 그리스인, 로마인, 게르만인, 슬라브인, 켈트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이 아니었고,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모든 초상화의 특징이 그것을 보여 준다. 천부경을 만든 환인 천제의 인연이 그대로 불가로 전해졌음이다. 천부경은 불경보다 5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析三極 無盡本 (석삼극 무진본)
이 문장은 학자들이 대충 '3극(三極)=3태극(三太極)=음양중(陰陽中)=천지인(天地人)'의 뜻으로 여기서 쓰인 三은 사람[人]의 상징이 아닌 3[三]의 뜻이다. 이 문장은 여기에서 말하는 3가지의 극(極)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 밑의 문장을 먼저 해석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이해하기 좋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이 문장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천부경이 사용할 수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은 문장이다. 하늘을 一이라는 수로, 땅을 二라는 수로 사람을 三이라는 수로 대치해서 설법하겠노라 하는 말이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왜 천지인에 각각 一이라는 수가 하나씩 더 들어갔느냐 하면 여기에 천부경의 기막힌 압축법 (즉, 여든한 글자를 가지고 우주를 설명하는 놀라운 비결)의 요체가 있다. 이 극도의 압축을 시도한 천부경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의 황당한 궤변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 얘기했지만 천부경은 대구법을 쓰고 있으므로 같은 형태의 두 문장을 찾아 한꺼번에 보지 않으면 뜻이 숨어서 안 나타난다. 이 문장과 같은 형태의 문장을 찾아보면 바로 네 번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이 그것이다. '一始無始一'과 '一終無終一'을 붙여서 읽고 해석하듯이 이 두 문장도 붙여서 해석해야 한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같은 형태의 두 문장을 나란히 붙여놓으면 무언가 보일 것이다. 천지인에 각각 네 개씩의 숫자가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天]에 사용된 수 : 一一二三
땅[地]에 사용된 수 : 一二二三
사람[人]에 사용된 수 : 一二三三
천지인은 각각 자기 고유의 수를 두개씩 가지고 있다. 하늘[天]은 一을 두개 가지고 있고, 땅[地]은 二를 두개 가지고 있고, 사람[人]은 三을 두개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천지인은 자신의 고유 수 외에 나머지 둘의 고유수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즉, 하늘은 땅의 수 二와 사람의 수 三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땅은 하늘의 수 一과 사람의 수 三을, 사람은 하늘의 수 一과 땅의 수 二를 가지고 있다.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은 각각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나타내고 있지만 각각은 나머지의 성질을 부분적으로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즉, 하늘은 하늘이면서 땅이고 사람이요. 땅은 땅이면서 하늘이고 사람이며, 사람은 사람이면서 하늘이요 땅이라는 말이다.
뭔가 번쩍하고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천지인의 3극에 음과 양과 중을 대입시켜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것이 음양학의 제 1 원리이고 기본 법칙이다. 이런 이야기는 평소에 관심이 있는 분이면 재미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머리 아픈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에서 삼청궁 선녀를 만났을 때가 아니면 죽어도 못 듣는 이야기이다. 어느 누구한테서도, 어떤 책에서도 이건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천부경에 숫자가 사용된 이유는 난해한 주문이거나 뜻을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백, 수천의 단어로 설명해야 할 것을 극도로 압축하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각각 모습이 다르게 보여도 천지인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하면 아마 수십 페이지는 족히 필요할 것을 단 두 문장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넘어갔던 앞의 문장 '析三極 無盡本 (석삼극 무진본)'으로 돌아가자. 한자 뜻으로 풀어보면 "세 극을 나누어도 그 본(本)은 다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3극은 천지인의 삼신(三神)을 뜻한다. 이 천부경에서 나온 한 단어 "3극"에서 한(韓)사상의 '삼신사상'이 나왔고, 하늘을 양, 땅을 음, 사람을 중으로 보는 음양사상이 나왔다. 무진본(無盡本)은 무진장과 같은 뜻의 단어이다. 엄청나게 많아서 결코 마르지 않는, 다하지 않는, 다함이 없는 그런 뜻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나뉘어도 궁극적인 근본은 다함이 없다.[변함이 없다]의 뜻이다. 천지인과 음양중의 3극이 비롯되는 이 다하지 않는 본(本)을 우리는 태극이라 부른다. 불가의 진아일여(眞我一如). 우리 한(韓)사상이 지향하는 삼신합일(三神合一)의 상태가 우주 본래의 자리, 그대로의 본 모습인 태극이다. 곧 무진본인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천부경에서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한 구절과 만나게 된다.
一積十鉅 無櫃化三 (일적십거 무궤화삼)
이제는 여러분도 한자의 뜻만 알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대로 풀이하면 "一이 쌓여서 十이 되는데 상자가 없어서 三으로 변(變)한다" 이다. 일이란 하늘이다. 三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해석된 뜻은? 하늘의 정기가 쌓이고 충만해지는데 그것을 담을 상자[櫃]가 없으므로 사람으로 변(變)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 동양사상의 오직 하나의 외침이 나온다. 인간은 하늘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사람을 창조함과 일맥상통한다.
동학에서 주장한 인내천(人乃天)이 바로 천부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하라 했던 유교의 인본주의 사상이 여기서 발원되었음이다. 공자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불가의 자재불성, 중생이 곧 부처란 사상이 여기서 나왔음이다. 하늘이 있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변(變)한 것이 사람이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궁극의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일만년 전 고대인의 종교관이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우리 민족의 종교적 차원은 태양신을 섬기거나 창조주를 찾던 타민족들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유불선을 포함한 동양사상을 단 하나로 압축하면 바로 "인간"이란 두 글자가 된다.
하늘의 기(氣)가 쌓이고 충만한 과정을 거쳐 인간[혹은 생명이란 말로 대치해도 되겠다]으로 화(化)한다는 이 말은 이 우주에서 생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원리를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현대과학이 생명의 탄생을 밝히게 되는 날, 과학자들이 이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하늘을 담아놓은 그릇[상자]이다.' 그 그릇을 함부로 하고 가벼이 대해서야 되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하늘인 것이다. 서양이 신본주의라면 동양은 인본주의이다. 서양의 신과 인간이 대립관계요 종속관계라면 동양은 일체관계요 수평관계이다. 사람이 곧 하늘인데 어찌 사람 밖에서 신을 찾을 것인가? 마음 밖에 부처가 있겠는가?
천부경의 전체 문장은 그 뜻이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한 귀절도 없다. 모든 것을 가장 명료하게 분명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는 경전이다.
이제 우리는 천부경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하나의 흥미로운 수수께끼와 마주친다. 바로 이 문장이다.
大三合六 生七八九 (대삼합육 생칠팔구)
대삼합육(大三合六)은 글자 그대로 큰 3개를 더하면 6이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큰 3개란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천지인의 3극이다. 즉 하늘[天]의 수 一이고, 땅[地]의 수 二와, 사람[人]의 수 三을 합하면 六이 된다는 말이다. 이 당연한 덧셈을 왜 하고 있을까? 앞에서 하늘의 수가 4가지였다. 一一二三, 땅의 수는 一二二三, 사람의 수는 一二三三, 여기에서 천지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수 하나씩을 빼면 1+2+3은 모두 6으로 같다는 말이다. 즉, '천지인은 동본이상(同本異象)이다.' 이 말이다. 하늘의 수도 6이요, 땅의 수도 6이요, 사람의 수도 6이다. 따라서 천지인의 3극이 모여 있는 합일된 상태인 태극의 수가 바로 '666'이다. 3극이 한자리에 모인 대삼(大三)의 수인 것이다.
천부경 여든한 글자를 3개의 숫자로 압축하면 '666'이란 수가 나온다. 많이 본 것 같은 수일 것이다. 맞다. 요한이 묵시록에서 짐승의 수로 지칭했던 바로 그 숫자이다. 동양사상을 숫자로 상징하면 '666'이 나오는데 환상을 보고 있던 요한의 혼돈된 뇌리에 왜 이 숫자가 떠올랐을까? 그렇다, 말세에 기독교의 가장 커다란 적이 바로 동양의 정신이라는 것을 요한은 예언적인 환각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기독교를 붕괴시키고, 멸절시킬 거대한 힘의 상징을 이 숫자로 보았다. 그리고 요한은 그 정체를 사탄을 추종하는 짐승으로 적었던 것이다.
이 요한의 계시록과 우리 한(韓)민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두개의 대립되는 예언서 《요한계시록》[신약 성경의 마지막 권. 신자들의 박해와 환난을 위로‧격려하고 예수의 재림과 천국의 도래 및 로마의 멸망 따위를 상징적으로 예언하였다]과 《정감록》을 대조분석하면 미래세의 방향을 알 수 있다. '666'이란 숫자에 얽힌 동서양이 대문명의 충돌과 그 종말....
그건 일단 뒤로 미루고, 뒤 구절을 보자. 생칠팔구(生七八九), 789가 생긴다고 했는데, 이 789를 더하면 천하의 절기가 스물네 개이다. 일년의 운행이 24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물론 훗날에 하루의 시간 역시 24로 나누어진다. 3극이 존재하면서 우주의 운행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서 천지가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666'이란 숫자를 본 김에 잠깐만 옆길로 새자. 경문 풀이만 하니까 지루하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잠깐 분위기 바꾸는 거다. 물론 천부경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기독교의 최후의 적을 '666'으로 상징되는 동양의 정신으로 보았고 그 화신인 짐승들로 보았는데, 그 짐승들은 누구이겠는가? 천부경으로 이어진 한(韓)사상의 아들들, 그 옛날 환인이 통치하던 천계(天界)의 후손들. 바로 우리 민족이다. 배달민족의 이마에는 이 한(韓)사상이 지울 수 없게 각인되어 있다. 우리들의 이마에는 '666'의 표상이 찍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누구도 지우지 못한다. 설사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그의 영혼은 한(韓)사상이 출렁거리는 삼신의 세계이다.
運三四成 環五七 (운삼사성 환오칠)
한자 그대로 읽으면 '三이 움직여 四를 이루고, 五와 七을 덮는다.' 이다. 三이 움직인다는 것은 析三極, 즉 천지인 또는 음양중의 3극으로 나누어진 태극은 고정되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상생상극(相生相剋)하며 돌게 되는데 이것은 천지의 운행이고 음양의 회전이다. 3극은 움직인다.[運] 이 3극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成] 것이 4[四]이다. 이 四가 바로 기(氣)이다. 기(氣)의 부실함은 바로 3극의 움직임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기(氣)가 5와 7을 둘러싼다.[環] 5는 오행, 즉 모든 물질과 제반현상이고, 7을 7기(七氣) 즉, 7정(七情)인 마음이다. 태극이 나뉘어 3극[三神]이 되고 이 3극이 조화로 운행하면 기(氣)가 생기며 이 기(氣)가 몸[物質]과 마음[情神]을 같이 둘러싼다고 하는 음양오행의 이론적 시원이 여기서 나왔다.
一妙衍 萬往萬來 (일묘연 만왕만래)
하늘의 움직임은 묘하고도 묘하여라. 삼라만상이 가고 오는도다.
用變 不動本 (용변 부동본)
세상만물이 그 쓰임[형태, 모습]이 변해도 근본자리는 바뀌지 않음이니.
本心 本太陽 (본심 본태양)
근본 마음이 본래 밝은 빛이니
그리고 이 다음에 천부경의 결론이 되는 구절이 나온다.
昻明人 中天地一 (앙명인 중천지일)
사람을 우러러 비추어라. 천지 중에 으뜸이니라. 이 지구상에 이보다 더 인간을 존중하는 종교나 사상은 찾아볼 수 없음이다. 해서 석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다. 한 생명이 우주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일종무종일 (一終無終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우주는 끝남이 없이 끝이 나니라."
밝혀지는 역사라는 영화의 주인공과 결말
인류사라는 서부극에서 두 주인공의 이름은 유대민족과 한(韓)민족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고, 정해진 신의 계획이다. 두 민족은 주인공만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을 완전히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두 민족은 지구상에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최초의 인류였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은 이 두 민족으로부터 뻗어나간 방계가족들이다. 물론 상고 시대에 이 두 민족은 지구의 지배자였다. 한 쪽은 아프리카와 남미와 대서양을 지배했고, 한쪽은 아시아 전체의 지배자였다. 두 민족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들의 방계인 민족들의 강성함에 눌려 역사의 조연으로 전락하게 된다. 유대민족은 이집트와 로마, 배달민족은 황하유역의 황토인들에게 일시 그 주인공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액션 영화가 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꼭 악당들에게 잡혀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비참함에 빠진다. 그러나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로 해서 스토리가 이어져 가야한다. 두 주인공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이유로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건 복수를 위해 주인공이 잠깐 도피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사라진 뒤, 세계사는 그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움직여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 이 세계는 그들 두 민족이 움직여온 역사이다. 유대민족의 기독교가 지구의 절반쪽 역사를 결정지었고, 배달민족의 한(韓)사상이 나머지 절반을 유불선으로 움직였다. 군사력, 경제력, 기술력을 앞세운 주인공들은 반짝 연기로 사라졌지만 이 두 주인공의 힘은 시종일관 세계를 움직였다. 두 주인공 민족의 정신이 세계를 움직인 두개의 축이었던 것이다.
양대민족은 종교적으로 "선민사상(選民思想)"이라는 공통의식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은 이 두 민족만이 보이는 특질이다. 그들의 신은 아브라함[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하나님의 부름으로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만큼 신앙이 두터워, 바울은 신앙의 아버지로 숭상하였다]의 신이고 모세[기원전 13세기 경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민족의 지도자. 시내산에서 십계를 비롯한 신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전통을 확립하였다]의 신인데 반해 우리의 신은 환인이요, 환웅이며 단군으로 이어졌다. 이 두 민족만이 신이 지정해준 땅을 가지고 있는 시오니즘[유대인들의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그들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함으로써 실현]의 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의 신이 지정해 준 땅은 가나안[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쪽 지역의 옛 이름. 기원전 13세기 경, 먼저 거주하던 가나안족을 정복하고 고대 이스라엘이 정착한 지역으로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이요, 우리의 환인[하늘님]이 지정해 준 땅이 신시(神市)[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밑에 세웠다는 도시. 상고 시대에, 신정(神政) 사회에서 신성하게 여긴 도시 부근의 장소]로부터 발원한 한반도였다. 이 두 민족만이 상고 시대부터 바꾸지 않는 유일한 가치를 유지시켜 왔다. 유대사상과 한(韓)사상이다. 이 두 민족만이 고등한 이념과 교리의 체제를 담고 있는 경전을 가지고 있다. Bible과 三大聖書[天符經, 三一神誥, 參佺戒經]가 그것이다. 이 두 민족 만이 세계에서 유일한 예언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것은 《구약》과 《모든세기》이며 우리의 것은 《신지》와 《정감록》이다. 이 두 민족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류사의 마지막에 대한 개념과 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그들과 우리는 비슷한 기간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왔다. 그들은 땅을 잃은 채 역사[Bible]에 의지해 고난을 견뎠고, 우리는 역사를 잃은 채 땅[한반도]에 의지해 고난을 견뎠다.
이 두 주인공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직전에 최후의 위기를 똑같이 맞는다.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해 말살의 위기를 맞았고, 우리는 왜인들에게 말살의 위협에 직면했다. 두 민족은 똑같이 최후의 시련을 견뎌냈으며 이제 악당들에게 빼앗겼던 그들의 무기를 찾고 있다. 유대인들은 잃었던 땅을 찾았고, 우리는 잃었던 역사를 찾고 있다. 『땅을 잃고 영혼만으로 대지를 방랑하는 자가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을 잃고 땅에 뿌리박혀 울던 자가 영혼을 찾으면 그것이 개벽의 시작이리라.』고 한 신지의 예언이 적중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바야흐로 두 주인공이 역사의 무대에서 단 둘이 마주설 날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쪽이 정의이며, 어느 쪽이 불의일까? 다음 역사가 그것으로 결정되리라.
유대민족에서 발원된 기독교 정신,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씨앗으로 해서 마침내 열매를 맺은 서양의 문화를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무엇이 될까? 나는 그것을 '자유'와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유의 정신은 근세 이후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꽃피었다. 평등의 사상은 필연에 따라 사회주의를 잉태하여 공산주의를 낳고, 반세기에 걸쳐 평등의 아들이 지구의 반을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초기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창시자들이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음과 공산주의를 만든 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천부경으로 시작된 한(韓)사상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되고 있는 동양문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조화'와 '질서'였다.
아마겟돈은 자유와 질서의 전쟁이고, 평등과 조화의 전쟁이다. '자유와 평등'이 승리하면 말세요, '조화와 질서'가 승리하면 개벽이 될 것이다. 남녀가 평등한 사회와 남녀가 조화하는 사회간의 전쟁이요, 아버지와 아들이 자유로운 사회와 부자지간의 질서가 엄정한 사회간의 전쟁이다.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계와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간의 전쟁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자유로운 문명과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문명 간의 충돌이다. 아마겟돈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조화와 질서', 이 둘 중에 앞으로의 인류가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종말이다. '자유와 평등'은 인류를 몰락으로 인도할 것이고, '조화와 질서'가 인류를 질곡에서 끌어내는 구원의 밧줄이 될 것이다.
다음 세기의 개벽은 인류를 '조화와 질서'의 세계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음이 양을 지배하여 둘로 가르면 후천개벽의 징조이다.』 신지의 이 예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음의 인류, 서양인들이 양의 인류의 적자인 한(韓)민족을 지배해서 둘로 갈라놓는다는 말이다. 오늘의 분단상황이다. 반은 평등의 이름으로 지배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자유의 이름으로 지배하고 있다. 『양이 음을 초극하여 하나가 될 때 새로운 하늘이 열리리라.』 이 예언은 '통일한국'이 남쪽의 '천민 자본주의'와 북쪽의 '교조 사회주의'를 동시에 극복해 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유에 의한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와 평등에 따른 강제행복의 공산주의, 어느 쪽도 아닌 '조화와 질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있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국가의 형태가 후천사의 세계 인류의 따라오는 바가 될 것이다. 타골이 말한 동양의 횃불이 불확실한 인류의 미래를 밝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감록》이 말하고 있는 "개벽"의 요체이다. 우리가 세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를 따라오게 될 것이다. 다음의 세기는 찬란한 동양정신, 한(韓)사상의 세기이다. 한(韓)민족은 인류사의 주인공으로 찬란하게 복귀하게 될 것이다.
천부경 사상
천부경은 그 내용이 길지 않으면서도 우주와 신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200여 글자로 압축한 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이 반야심경의 내용을 여든한 글자로 압축하면 천부경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반야심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心'이다. 천부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人'이다.
천부경의 가르침은 크게 세가지이다. 하나는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 현재 우주물리학은 시작이 있는 세계, 즉 "Big Bang"이라 말하는 대폭발 이론으로부터 그게 전부가 아니다하는 쪽으로 가고있다. 즉 "Big Bang"이 우주의 시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대폭발설 이후에 거품우주, 다원우주이론 등이 폭넓은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중이다. 현대 우주물리학은 결론의 가닥을 "시종이 없는 우주" 쪽으로 잡아가고 있다. 천부경이 대개 종교적인 경전으로 생각하는데, 이 천부경에 신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 불교의 가르침도 신은 종속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내세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구원의 희망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은 하늘, 즉 우주 그 자체이다' 라고 말하고 있고,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이 없이 영원하는 우주이다.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태양과, 달과, 염소와, 독수리와, 뱀을 신으로 받들고, 신들의 기쁨을 위해서 인간의 심장을 바쳤던 때에 한(韓)민족은 이러한 졸렬유치한 종교관이나, 신관으로부터 훨씬 높은 차원에 가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은 우상을 세우지 않았던 민족이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불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신성한 장소인 소도는 그저 평평한 마당에 작대기 하나[솟대] 세워 놓은 것이었다. 그 제사의 성격은 신에게 봉행(奉行)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늘님을 모시고 산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잔치였다.
인간을 벌하는 신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계의 모든 민족은 신 앞에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두려운 심정으로 나아갔다. 한(韓)민족은 원래 신 앞에서 더욱 명랑한 민족이었다. 신을 공경했지[敬天]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에 대한 공경은 인간에 대한 사랑[愛人]의 다른 방법이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밝은 마음이 우리 민족의 종교관을 형성한 것은 환인 천제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져 온 천부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이 우주건 사람이던 간에) 무엇인가를 만드는 신, 질투하는 신, 시험[test]하는 신, 분노하는 신, 복수하는 신, 편드는 신, 파괴하는 신, 벌주는 신이란 개념은 우리 민족에게는 황당하고 우스운 것이었다. 우리 민족이 알고 있는 신은 그렇게 촐삭거리는 신이 아닌 것이다.
우주의 본질 다음으로 천부경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하늘의 기(氣)가 형상으로 나타난 것, 이것이 인간이다.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이라 말하고 있다. 인간을 신을 위해 봉사하는 피조물로 여기는 대부분의 종교들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천부경으로 시작된 하늘의 개념이 지배한 고대 동양에서는 신을 위한 건축물을 짓지 않았다.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사원이나 탑들은 부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들이다. 부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쁘기 위한 것들이다.
신은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삼신(三神)이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천지인의 삼신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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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호태왕비 전문{펌}
아래 자료수집은 한국고대금석문 사이트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 입니다.
연대 : 414년(장수왕3년)
유형/재질 : 비문 / 응회암(凝灰岩)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 높이 6.39m/
아래부분 너비 1면 1.48m, 2면 1.35m, 3면 2.00m, 4면 1.46m/
기단길이 3.35m, 너비 2.7m
출토지 :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
소재지 : (중국)-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
서체 : 예서(隸書)
찬자/서자/각자 : 미상 / 미상 / 미상
개요 :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3)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있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조선시대에 광개토왕릉비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황제의 비로 이해하였으며, 1880년 무렵에 이끼와 넝쿨을 제거하고 능비를 새롭게 조사한 결과 광개토왕릉비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능비는 높이 6.39m의 웅장한 화강암으로 서체는 예서(隸書)이다. 글자는 1775자를 새겼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의 판독이 어렵다. 비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성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적에 관하여 기술하였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 일대에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세번째 부분에서는 능비를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의 숫자와 출신지, 그와 관계된 법령을 서술하였다. 현재 능비에는 광개토왕대의 영토확장과 5세기 고구려의 천하인식, 그리고 삼국과 왜와의 국제관계 등에 관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어 고대사 연구의 일급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신묘년조(辛卯年條)의 기사는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하여 한일 역사학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글 :한국고대금석문
가. 비의 상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는 장수왕 3년(414)에 세워졌다. 능비(陵碑)는 중국의 길림성 집안시(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서있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태왕릉(太王陵)이 있고, 동북쪽 약 1.3km에 장군총이 있다. 비석은 자갈돌이 중간 중간에 박혀 있는 응회암(凝灰岩)인데, 별로 많이 가공치 않은 자연석 그대로의 장방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는 6.39m이며, 윗면과 아래면이 약간 넓고 허리부분이 약간 좁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부분의 너비로 계산하면, 제1면(동남방향)이 1.48m, 제2면(서남방향)이 1.35m, 제3면(서북방향)이 2.00m, 제4면(동북방향)이 1.46m이다. 비의 기단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화강암으로서, 여기에 홈을 파고 능비를 세웠다.
비석 각 면의 외곽에 홈을 파서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다시 그 내에 세로선을 그어 각 행을 표시하였다. 1면이 11행, 2면이 10행, 3면이 14행, 4면이 9행으로 모두 44행이며, 글자는 1,775자로 여겨진다. 이중 150여 자가 판독 불능 상태이다.
비문의 서체(書體)는 예서(隸書)이다. 그러면서도 초(草)·해(楷)의 각체(各體)가 부분부분 반영되어 혼합(混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형(字形)은 정방형(正方形)을 견지하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균등하지 못해서 큰 것은 길이가 16cm, 작은 것은 약 11cm 정도이다. 다수의 글자는 14~15cm 정도이며, 배합과 간격은 비교적 균등하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고구려국의 기원 전설 및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에 대한 간략한 기술로 되어 있다.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 일대에 행해진 정벌 활동을 담은 훈적(勳績)을 기술하였다. 셋째 부분에선 능비의 수호(守護)를 위한 수묘인(守墓人)의 숫자와 그 출신지 및 그에 관계된 영(令)을 새겨 놓았다.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비문의 성격을 훈적비(勳績碑), 신도비(神道碑) 또는 수묘비(守墓碑) 등으로 규정하는 등 설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형식의 비는 여타의 예가 알려진 바가 없다. 세 요소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이며, 그 성격 또한 그러하다.
능비의 비면은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후 이끼와 넝쿨을 제거키 위해 지른 불에 의해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 뒤 거듭된 탁본과 석회를 발라 문자(文字)를 보수(補修)하는 등의 작위(作爲)에 의해 적지 않은 글자가 훼손되었다. 비신(碑身) 자체도 천수백년의 오랜 풍우(風雨)와 화재(火災)로 풍화(風化)되고 균열이 생겼다. 정상부에 균열이 있고, 비신 내부에도 균열이 생겨, 두드리면 궁궁하는 소리가 울려 온다고 한다. 곧 비신 내부에 공동(空洞)이 생긴 것이다.
능비의 보호를 위해 1928년 목조 비각(碑閣)을 세웠는데, 그것을 허물고 다시 1983년 새로 비각을 세웠다. 그리고 1965년 중국문물보호연구소(中國文物保護硏究所)에서 비신(碑身) 정상부의 균열부위를 통해 합성수지 에포킨 등의 접착제를 주입하였다. 그러나 비신의 밑부분에서 공음(孔音)이 여전히 들려 균열된 부분이 완전히 접착되지 못한 상태라서, 1976년과 1979년 두 차례 더 접착제를 주입하였다. 1961년 이래 「광개토왕릉비」를 포함하여 집안평야의 고묘군이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오고 있다.
나. 능비에 대한 옛 기록
능비가 우뚝 서 있는 국내성(國內城)지역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별도(別都)로서 정치·문화의 주요 중심지였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의 영역이 되어 이곳에 항주(桓州)가 설치되었고, 집안(集安)지역의 고분 중에는 발해시대에 축조된 것이 적지 않다. 그 후 이곳은 금대(金代)에는 동경도(東京道)의 파속부(婆速府) 관할 아래 있었고, 원대(元代)에는 동령로(東寧路)에 속하였는데, 변경의 벽지에 불과하였다. 고려측의 기록에도 이곳에 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주요 무대에서 벗어나 산간 오지로 되어갔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 공민왕 18년(1369) 12월에 조정에서 일만오천의 군사를 보내 원의 동령부(東寧府)를 공격케 하니, 이듬해 정월 이성계(李成桂) 등이 우라산성(于羅[五女]山城)을 공략하였다. 국내성지역은 일시 고려군의 장악 하에 들어갔었다.
이때 고려인이 이 지역에 대해 알게된 지식은 뒷날 용비어천가에 반영되어졌다. 즉 조선왕조 세종대에 왕실 조상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는데, 그 39장에서 이성계의 동령부 원정의 공적을 찬송하면서 그 주해(註解)에 집안(集安)지역에 황성(皇城)이 있고 그 북쪽 7리 되는 곳에 큰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414년 이후 처음 확인되는 능비에 대한 기록이다.
이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이 지역을 황성평(皇城坪)이라 하였고, 장군총을 황제묘(皇帝墓)라고 하였다. 또한 성현(成俔), 심광언(沈光彦) 등과 같은 조선 사대부들이 만포진에 들러, 강건너 집안지역의 성(城)과 고비(古碑) 및 석총(石塚) 등을 바라보며, 황성(皇城)의 폐허와 국경(國境)의 정경에 대한 감회를 담은 시(詩)를 남기었다.
그러나 그 유적을 여진족의, 금(金)의 것으로 여기었다. 당시 15세기 이후 여진족의 건주야인(建州野人)들이 이 지역에 옮겨와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서북계(西北界)에 관한 각종 지도에서도 이곳의 지명을 황성평(皇城坪)이라 하였으며, 계속 금(金)의 고도(古都)로 여겼던 것 같다.
다. 능비의 재발견(再發見)
17세기 이후 청의 봉금정책(封禁政策)에 따라 이 지역은 사실상 주민이 살지 않았다가, 19세기 후반 이후 인구의 유입과 개간이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1876년에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었다. 이어 1880년 무렵 「광개토왕릉비」가 재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능비의 표면은 두터운 이끼로 덮혀 있었는데, 이를 소똥을 발라 불을 질러 태워서 제거하였다. 그에 따라 비면(碑面)에 큰 손상이 가해졌다.
능비의 재발견 이후 탁본(拓本)이 행해졌으나, 비면의 요철이 심하고 탁본 재료와 기술의 부족으로 원석(原石) 정탁(精拓)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행해진 것은 비면에 종이를 붙이고 가볍게 두드려 글자의 윤곽을 뜬 뒤 글자가 없는 자리에 먹을 칠하는 이른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거나, 또는 글자의 윤곽을 모사(模寫)한 뒤에 빈 자리에 묵을 칠하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었다. 이러한 것은 자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글자에 대한 오독(誤讀)이나 조작이 가능한 것이다.
그 뒤 북경의 금석문 애호가들에게 능비의 존재가 알려져, 1880년 후반 전문 탁공(拓工)을 북경에서 파견해 원석탁본(原石拓本)을 뜨게 하였다. 현재 알려진 원석 탁본 중 그 제작년대를 명기한 발문(跋文)이 있는 것으로서는 임창순(任昌淳) 소장본이 유명하다. 1889년 이운종(李雲從)이 탁본한 것이다. 그 뒤 언젠가부터 능비에 석회(石灰)가 발라졌고, 그런 상태에서 탁본이 행해졌다. 20세기 이후의 것은 이러한 석회탁본(石灰拓本)이었다. 한편 1907년에는 일본군이 능비를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라. 능비 연구사
능비의 내용 자체에 대해 먼저 본격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은 일본측이었다. 1880년 청에 파견된 일본 육군의 스파이 주구경신(酒勾景信) 중위가 집안지역으로부터 능비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라기도 하고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라기도 하는 것을 가지고 1883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어 약 5년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비문에 관한 연구가 비밀리에 진행되어, 1888년 그 결과를 세상에 공포하였다. 그 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이어졌다. 그 주된 관심은 신묘년조(辛卯年條)를 중심으로 한 고대한일관계사의 측면이었고, 능비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강조되었다. 한편 중국학계에서도 능비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으나, 역사연구와 결부된 본격적인 논의는 미미하였다.
우리 학인들의 능비에 대한 거론은, 1910년대에 신채호(申采浩)의 현지답사와 간략한 언급이 있었다. 그 뒤 아마도 1930년대 말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정인보(鄭寅普)의 연구가 이에 대한 본격적인 첫 시도였다. 정인보(鄭寅普)의 연구는 신묘년조(辛卯年條)의 기사를 일본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재해석하는 것이었고, 이른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 능비연구는 당분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일본학계에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대한 연구를 위시한 전전(戰前)의 일본고대사연구에서 보인 문제점들에 대한 광범위한 자체 비판이 있었으나 「광개토왕릉비문」은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고 일본 고대국가 발달과정을 증언하는 부동(不動)의 지표(指標)로서 간주되어, 그 존재와 그리고 비문의 내용에 대한 기존의 일본학계의 통설이 더욱 강조되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이 능비의 판독을 정밀히 한 「호태왕비고(好太王碑考)」를 발표하여(1959), 능비 연구에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그 뒤 60년대 중반 북한학계에서 정인보의 학설을 계승한 박시형의 능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발표되었다. 이는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을 촉구하는 김석형의 『초기조일관계사』와 함께, 능비에 대한 재론을 촉발하였다. 그런 면은 이진희의 비문조작설의 발표에 의해 증폭되었다. 특히 이진희의 설은 능비 연구의 출발점인 비문 판독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광범위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능비의 발견 경위, 각종 현전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 비문 조작여부, 판독상의 문제, 비문 해석상의 문제 등등 능비에 관한 여러 측면이 재론되게 되었고, 그리고 현장답사와 능비의 재조사, 각종 원석 탁본에 대한 검토 등이 행해졌다. 그에 따라 왕건군(王健群), 무전행남(武田幸男) 등의 저서와 많은 논문들이 남북한, 일본, 중국, 대만학계에서 발표되었다. 현재까지 능비에 관한 논문과 저서는 수백 편에 달하며, 그 연구사만으로도 단행본이 출간되고 있다. / 글 출처 : 韓國古代金石文
第一面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鄒牟王爲我連?浮龜應聲卽爲」
連?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
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大王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
弔?有九寔駕棄國以甲寅年九月?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
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城阿旦城古利城▨」
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城於利城▨▨城豆奴城沸▨▨」
第二面
▲ 여기서 문제의 사진입니다. 저도 잘못 판단해서 광개토호태왕비가 왜곡됐는줄 알았습니다.
오른쪽 사진이 문제의 사진인데 잘못 된 것이 아니고 오른쪽 측면 사진입니다.
저도 확실히 알아보지 못하고 글을 올린 죄로 오늘 다시 고대 금석문사이트에서 조사한 것입니다. 몇달전에 알았으나 게으른 탓에 이제야 올립니다...
잘못 된 자료 링크 http://blog.naver.com/tnr2wk2/150004840495 를 고쳐 포스팅합니다.
(第二面)
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
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穰」
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
歸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
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戌兵新▨▨▨▨其▨▨▨▨▨▨▨言」
第三面
▨▨▨▨▨▨▨▨▨▨▨▨▨▨▨▨▨▨▨▨▨▨▨▨▨▨辭▨▨▨▨▨▨▨▨▨▨▨▨▨潰」
▨▨▨▨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
▨城?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社婁鴨盧肅斯舍鴨盧▨▨▨」
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
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連二家爲看烟俳婁」
人國烟一看烟?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
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城韓穢國烟三看烟?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
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第四面
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
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二古牟婁」
城國烟二看烟八?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穰城?四家爲看烟散那」
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
家爲看烟國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掃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家慮」
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看烟三百都合三百?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
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해석문)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王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首都)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帛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永樂) 9年(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 : 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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