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10일 저녁 나주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극단 ‘예인방’의 ‘무어별(無語別)’공연을 관람하고 지역 공연문화에 대한 지원약속과 함께 연극인들을 격려했다.
시민과 문화애호가 등 4백여명의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이뤄진 공연을 관람한 뒤, 출연진과 관계자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한 유장관은 “척박한 지역 현실과 어려운 여건에서도 연극계를 지켜온 예술인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한다”며 박수를 보냈다.
유장관은 “지역 극단들이 어느정도 실력과 여건이 좋아진다 싶으면 서울로 가거나 흩어지는 현실에서 30여년을 지켜온 것은 연극인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라며 “앞으로 경제적으로 차이가 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같이할 수 있도록 공연시설이 된 곳은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안된 곳은 도서관을 비롯한 시설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신정훈 시장도 “나주의 문화와 예술진흥을 위해 대호동 대호저수지 일원에 다목적 소극장 건립과, 드라마세트장 활용방안 마련을 건의했다”며 “시민들이 함께 문화예술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에 나서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유장관의 공연 관람은 나주에서 전문 예술극단인 ‘예인방’을 이끌고 있는 김진호씨(48. 나주예총 회장)가 문화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지역 연극계의 어려운 사정과 애환을 가까이서 보고 활성화 방안을 찾아 달라”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돼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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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이 무어별 공연 관람 직후 무대에서 “지역에 대한 문화예술 지원을 늘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나주시 제공>
반남고분군 이번 남도여행 코스는 ‘남도답사 1번지’를 테마로 한 해안 지역 강진과 해남이다. 서울이나 광주 쪽에서 떠날 땐 13번 국도를 따라 황금벌 나주평야의 풍요를 한없이 누려도 된다. 영산강을 건너 나주와 영암의 구릉지에 일군 황토밭은 천연 모자이크로 채색되어 일본 홋카이도의 비에이(美英)처럼 온 들녘이 황홀하다. 빈 밭을 쟁기로 갈아 엎은 황토는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선홍빛 살을 드러내며 남도사람들의 의기처럼 일어선다. 반남면소재지를 지나 복암리, 덕산리, 대안리의 자미산 낮은 구릉에 분포된 반남고분군은 40여 기에 이른다. 이 일대의 고분군은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도굴 되거나 신촌리 6호 분은 1939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5 기의 옹관과 함께 토기, 유리구슬, 청동환이 출토되었다. 또한 9호분이 1917년에 발굴 조사된 것을 보면 12기의 옹관과 금동관 (국보 제295호), 금동신발, 금반지.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결과를 볼 때 백제가 들어서기 전 한반도의 막강 세력이었던 마한의 맹주국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신촌리와 덕산리의 고분이 고대 일본에서 유행했던 전방후원분 양식이며, 최근에 ‘倭’자가 발견되어 한일고대사 연구에 과제를 던져주고, 대형옹관 가마터가 이 근방에서 발견되어 반남고분군 연구의 실마리가 되고 있다. 반남고분군을 막 벗어난 지점에 자연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감나무 과수원, 유기농원을 찾아 먹단감 한입 베어 물고 강진으로 떠나자.
무위사 무위사는 월출산국립공원의 남쪽, 강진 땅에 자리한 선비풍의 신라 고찰로서 단아한 맞배지붕의 극락보전과 불가사의한 벽화로 유명하다.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은 조선 초기 대표적 목조건축의 하나로서 주심포식 맞배집인데 1430년에 건립되었으며, 1476년에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 극락전 목서명>에 새겨져 있다. 이 절의 불상 뒤 탱화로 그려진 ‘수월관음도’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당나라의 오도자가 그렸다고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고 무위사 수학여행 때 들었던 전설 만 남아 있다. 법당이 완공되어 스님들이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루한 차림의 노승이 찾아와 법당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차림보다 기품이 있어 보였던 노승은 주지에게 49일 동안 법당 안으로 사람을 들여 보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이후 49일이 다 되어도 인기척조차 없어 주지가 창구멍을 뚫고 법당을 들여다 보았더니, 노승은 보이지 않고 파랑새가 붓을 물고 관음보살의 눈을 그리려는 순간 인기척에 놀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전설이다. <신동국 여지승람>에 의하면 무위사가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돼,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면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신앙배경이, 극락전 건립과 아미타 삼존도와 아미타 여래도 벽화가조성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랑생가 강진 사람들은 탐진강을 끼고 널찍이 펼쳐진 군동평야를 따라서 완도 바닷물과 만나는 구강포를 무던히도 사랑하고, 강진의 지리풍수가 ‘소가 여물 먹는 형상’이라 하여 소머리 부분인 우두봉과 구유에 해당하는 읍내 한가운데의 방죽도 지켜야 옛명성 그대로 ‘부자가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도사람들은 “동여수, 서강진에서 돈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곧 잘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토박이의 서정을 읊은 시인 영랑의 생가가 바로 강진들녘이 한눈에 들어 오는 읍내 북산자락에 수수한 차림으로 서 있다. 뜰에는 그의 시상을 말해 주듯이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엔 모란이 그득히 피어나고, 뒷뜰 대울타리의 사각거림이 도란도란 정겹다. 영랑이 1903년에 여기서 태어나 6·25동란 중 은신하다 포탄을 맞고 서울 망우리에 묻힐 때까지 47세의 ‘찬란한 슬픔’을 되새김 해 본다. 영랑이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며 가슴을 살포시 적실 강진. “오메 단풍 들 것네”
강진 고려청자도요지 청자도요지가 있는 대구면으로 가는 답사길은 들과 강과 바다가 조화된 남도답사 1번지의 풍광답게 서정시의 고향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영랑생가를 나와 읍내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목리에서 탐진강을 건너야 한다. 이곳 목리(牧里)마을을 초지(草地)라고도 부르는데 소가 풀을 뜯는 지형의 강진지리 풍수에서 나온 지명인데, 강진 사람들은 우스갯 말로 “강진 옴천면장할래, 목리 이장할래?” 물으면 “목리 이장!” 한다는 것이다. 그 만큼 옴천면이 작은 반면 목리가 큰 마을이라는 뜻이겠지. 탐진강에 가로 놓인 다리 옆에는 초라한 비석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는데, 이곳에 첫 다리를 놓게 줄을 댄 어느 정치인의 공덕비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만 해도 자동차는 군동면 석교를 건너 20여 리를 돌아야 했고, 작은 농선에 의지하여 강너머 너른 들녘을 일구어 왔는데, 선거 때마다 ‘미끼’로 내세워 침튀기다가 주민의 숙원이 해결되었다는 우리네 정치문화의 단면을 보노라니 입맛이 쓰다. 강진만으로 불어 오는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칠량면소재지와 대구면소재지를 지나면 마량항에 닿기 못미쳐 왼편으로 청자박물관이 보인다. 고려청자는 9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1세기 말에는 은은하면서 맑은 비색과 유려한 형태, 화려한 문양이나 삼강기법에서 고려 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였는데, 강진 대구면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일대에 관요형태의 대규모 가마가 설치 되었다. 강진산 고려청자가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것만 하여도 국보와 보물급에서 40여 점이 넘어 우리나라 도자기 생산의 본바닥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곳에 고려청자 가마가 설치된 자연환경은 청자를 실어나를 바닷길에 직접 닿고, 풍부한 흙과 연료가 제공되었으며, 사회적 환경은 코 앞에 있는 청해진의 장보고가 동북아 해상을 장악하였고, 호남지방의 광활한 평야와 바다에서 얻은 경제력, 그리고 신라말 강진 무위사, 장흥 보림사,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 등 선종불교의 차문화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청자도요지에서는 옛가마터와 청자의 몸매를 감상한 다음에 반드시 흙을 주물러 천년을 거스르는 나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 청자의 신비를 재현하고 있는 청자사업소에서 곱게 구워 집으로 보내주면서 당부한다. “청자는 진열장의 보물이 아니라, 밥그릇, 물잔, 술잔으로 쓰다가 금가고 깨어지는 생활용기”라고.
백련사 백련사로 갈려면 청자도요지에서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넘실대는 구강포를 지나야 한다. 남도의 소박한 서정이 속살처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좋을 때 해창을 지나 만덕산으로 접어든다. 백련사 만경루에 올라 서면 방금 다녀 온 청자도요지길이 꼬불꼬불 해안을 끼고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진다. 백련사는 강진 사람들에게 만덕사로 입에 올라 있는데 839년(신라 문성왕 1년) 무염선사가 창건할 때의 이름이 만덕사라 한다.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가 백련결사의 터전으로 중창하면서 백련사는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귀족불교에 대한 서민불교 운동이 한창이던 1236년에 요세가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켰는데 1천여 명의 주민과 도반 300여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백련사는 조선시대에 8명의 대사를 배출하였으며, 여덟번 째 혜장선사가 이웃 다산초당에 유배된 정약용과 교우하였다.
정다산 유적지 다산초당으로 가는 강진만 해안길이 잘 닦여있지만, 백련사 오르막에서 하늘을 덮는 늙은 동백숲을 지나 오솔길을 걷는 즐거움이란 대단하다.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떡갈나무들이 잎을 내린 계절에 한발 헛디딜라치면 쌓인 낙엽에 목까지 묻히기 일쑤다. 다산 정약용(교명 요한)이 1801년 천주교 박해 때 강진에 유배되어 그를 멀리하던 백성을 피해 강진읍 동문밖 샘거리 오두막에서 기거하다가, 우두봉자락의 고성사나 군동면 탐진강변 석교마을 등을 전전하며 가련한 귀양살이를 8년이나 한 다음, 찾아든 곳이 윤씨의 산정이던 이곳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이 18년 동안 강진 유배에서 해배될 때까지 11년간 다산초당에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당시 다산의 온 가족이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유배길을 떠났는데 형 정약전은 강진 땅이었던 신지도 송곡리에 유배되었다가 동생 약용이 장기에서 강진으로 이배됨에 따라, 나주에 속했던 흑산도로 이배되어 ‘자산어보’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성인 정하상 바오로가 다산의 조카이다.
대흥사 해남 대흥사가 근래에 이름을 대둔사로 바꾼 뒤 관광객들이 혼돈스러워 하기에 대흥사 측의 책임있는 스님에게 물었더니 ‘대흥사’로 못을 박았다고 대답한다.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께서는 “해남 한듬절에 다녀오마”하고 사립을 나섰는데 말이다. 대흥사의 산문에서부터 두륜산도립공원 구림숲길 10리를 황홀경에 빠져 걷는 동안 순례자는 이미 일상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만다. 514년(신라 법흥왕 원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집.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과 처영 스님에게 “삼재가 들어 오지 않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라 이르며 당신의 의발(衣鉢)을 이 절에 봉안하라고 유언한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대흥사는 1천 좌의 불상을 모신 절집으로서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하며 조선 후기 불교를 중흥시킨 대찰이다. 당우마다 걸린 당대의 명필을 만나고 일지암에 올라 초의선사의 동다송을 접한다면 이 또한 격조있는 답사가 될 것이다.
미황사 미황사로 가는 길은 대흥사 초입에서 금쇄동 쪽으로 좌회전 하여 지방도로를 조심스레 달리다가 해남에서 완도로 가는 13번 국도를 타고, 다시 월송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미황사를 찾아야 한다. 공룡 등줄기처럼 기암괴석이 하늘을 찌르는 12km의 능선 아래 웅장하거나 그렇다고 기죽지도 않은 모습으로 미황사는 당당하게 앉아 있다. 우리나라 육지의 절 중에서 가장 남단에 있는 덕분인지 여느 절집에서 볼 수 없는 남방불교 흔적이 뚜렸하다. 대웅전의 초석에 바다거북이나 게가 새겨지고, 이 절집 답사의 가장 큰 묘미인 부도밭에서도 부도마다 새겨진 거북, 게, 새, 두꺼비, 연꽃, 도깨비 얼굴, 용머리 등을 발견할 때마다 작은 흥분을 경험할 것이다. 불상이나 경전이 바다를 건너 전해졌다는 설화가 많다. 우리나라 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거쳐 북쪽지방에 전파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서남해안지방에는 “돌로된 배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소리를 울리며 땅끝(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고 시작되는 사적비(1692년)의 미황사 창건 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되었음을 말해 주목거리이다.
달마산(도솔봉) 달마산 등줄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지점, 땅끝 소재지인 송지면 산정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달마산 송신탑 방향으로 더듬더듬 도솔봉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도솔봉으로 오르는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짙은 갈색바탕에 흰색글씨로 통일한 관광안내표지판 역시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산정리 마을 어귀에서 만난 트럭운전사에게 도솔봉 길을 물었더니,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고 자랑삼아 오른쪽 왼쪽 삿대질 하며 친절을 보이지만 서울에서 김서방집 찾기다. 운전솜씨 좋은 소형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만한 비탈길을 오지탐험대원 심정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하늘이 훤해지는 순간 송신탑 앞에서 집총한 초병을 곁눈질 하며 자라등 만한 봉우리를 걸어 오르면 바로 도솔봉! 완도 군외면에서부터 백일도, 흑일도, 땅끝을 지나 제주도와 경계한 보길도, 노화도, 진도, 벽파,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신비의 바닷길 해역이 발아래 엎드린다. 400고지 정도의 별로 높지도 않은 봉우리에서 이처럼 넓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다니, 도솔봉은 바다에서 뜨고 지는 해와 다도해를 거느린 소대장 쯤 되는가 보다. 한라산을 보았느냐고 묻지 말라, 도솔봉에 올라 보라.
해남 땅끝 전망대 땅끝으로 가는 남도여행객들 대부분이 달마산을 숨가쁘게 빠져 나와 머나먼 여정을 재촉하는데, 여기에선 어란진항으로 살짝 비켜서 숨을 골라야 한다. 어부들의 지순한 삶을 엿볼 수 있고 살오른 생선횟집이 즐비하다. 송호해수욕장을 지나 발걸음을 빨리하면 땅끝전망대가 ‘한라산도 보인다’며 시선을 차단하고 나선다. 최근에 아파트 8층 높이로 선 전망대의 자태, 예술성이나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자봉 돌계단을 따라 땅끝 절벽을 흠집내고 세운 땅끝탑을 돌아 나오면 바닷가에 옹기종기 이마를 맞댄 갈두마을, 보길도행 뱃고동이 우는 부두에 서면 까닭 모를 설움도 밀려온다. 땅끝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국토종단 순례의 시발점이며 중심점이다. 분단된 조국에 태어나 깨어있는 함성이 메아리치고, 한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축제’도 성스럽다.
강진고려청자도요지
입장시간 : 09:00 ~ 18:00 입 장 료 : 어른 청소년 어린이 기타 ---------------------------------------------- 개인 1,000 500 400 65세이상 무료 단체 800 400 300 (30명이상) 주차요금 : 무료
대흥사
입장시간 : 09:00 ~ 18:00
입 장 료 : 어른 청소년 어린이 기타 ---------------------------------------------- 개인 2,500 1,500 1,000 단체 2,500 1,200 800 주차요금 : 대형(3,000원), 중형(2,000원), 소형(2,000원)
▣ 반남고분군 찾아가는길 광주시청에서 출발하여 5.18기념공원앞에서 우회전한다음 상무지구입구에서 우회전하여 상무로입구를 통해 22번국도를 따라 극락교를 지나 공항입구를 지나 직진하여 송정파출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13번 국도를 타고 노안삼거리에를 지나 나주방면으로 온 다음 장사고가교에서 우회전하여 13번국도를 타고 장산사거리를 지나 박포삼거리를 지나면 주위에 반남고분군들이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