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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기업 및 외식업 성공 경영을 위한 경영자의 십계명, 十誡命, 10계명, 고객서비스코리아
1. 고객서비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공부, 연구하고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라. (연구, 노력 없는 고객서비스는 퇴보하기 때문입니다.)
2. 초심(初心) 즉 시작할 때의 순수한 정신을 계속 유지하면서 단 한명의 고객님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말라. (무심코 소홀히 대함으로써 단 한명의 고객님이라도 적이 된다면 열명의 새로운 고객님을 창출하는 것 보다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3. 기업의 매출액을 직원들에게 시원하게 공개하고 확실한 영업목표와 목표달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라. (직원들에게 매출을 쉬쉬하며 감추는 것은 직원비리를 양산할 수 있으며, 자기 기업에 대한 신뢰감이 상실되어서 Motivation 즉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솔선수범하여 규정된 복장과 외모를 갖추고 고객님의 면전에 서라. (경영자에 대한 고객님의 관찰은 냉정하고 경영자의 오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제멋대로의 경영자를 직시하는 직원들의 자세 또한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5. 내 영업방침대로만 하면 된다는 아집을 버려라. (측근과 간부, 일반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한 경영자의 영업은 실패율이 낮을 뿐만 아니라 큰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6. 두 명 이상의 가족 또는 친척을 한 업소에 배치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한 업소에 일가친척이 모이면 고객님과 다툴 소지가 많으며, 고객서비스 조직이 허약해짐으로 인해 중간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7. 직원들의 고객서비스 교육을 강화하고 고객서비스 수준을 항상 점검하라. (매일 매일의 규칙적인 교육과 점검 없이는 고객서비스 자세가 금방 해이해지기 때문입니다.)
8. 고객님의 목소리를 늘 경청하고 고객님의 불평불만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라. (경영자의 적극적인 불평불만 해결은 더 많은 단골 고객을 확보하게 되고 영업의 성공을 기약하기 때문입니다.)
9. 후계자는 300명 이상이 근무하는 대규모 서비스기업에 5년 이상 근무시켜본 후 결정하라. (후계자의 말단 근무 경험은 추후 서비스 기업의 경영에 막대한 영향을 주며, 후계자의 시야가 넓어지고 사업가로서의 소양을 두루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경영자는 스스로 담배를 끊고, 흡연자는 채용하지 말라. (담배는 자신의 몸에 해로우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다수의 고객님에게 담배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 물론 지나친 조항도 있지만 위 조항들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면 서비스기업을 떠나야 한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어느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장사꾼으로 남느냐? 더 큰 사업가로 변신해 가느냐? 하는 것은 상기 계명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2006년 4월 17일
김현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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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이 찾아올 때, 나무를 한 그루 심으십시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곽재구 '포구 기행' 중에서 -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때로는 그 사랑으로 인해
더 큰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있습니다.
호젓한 시간에 찾아온 외로움을
삶의 깊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
영혼은 더 깊어지고,
불어오는 바람, 꽃잎 하나에도
작은 환희를 느낄 수 있겠지요.
행복하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사색의 향기]
,,,,,,,,,,,,,,,,,,,,,,,,,,,,
나무를 한 그루 심으십시오.
나무를 한 그루 심으십시오.
마당에 실제로 나무를 한 그루
심지 않으시겠어요?
나무는 아마 당신보다 더 오래 살 겁니다.
그 나무에 이름을 붙여도 좋습니다
"이 나무는 마사 스틸의 나무" 혹은
"이 나무는 알란 포인덱스터의 나무"라고.
혹은 그냥 당신의 나무로 지정하여
"이 나무는 내 나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무를 바라보며
동시에 조금씩 그러나 눈에 띄게
잎사귀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되거든
당신은 당신 자신도 조금씩 그러나 눈에 띄게
진보하고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나무를
정성껏 가꾸십시오.
- M. 메리 마고의《그대가 성장하는 길》중에서 -
나무는 마당에, 들판에, 산에 심기도 하지만
마음에 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무와 함께 마음도, 꿈도 자라납니다.
그대의 마음 밭에 꿈과 행복의 나무를 한 그루 심으십시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오늘도 외로움, 괴로움 모두 떨쳐버리고 힘차게 장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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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흑금(他山之黑金)“참으로 멋진 글을 많이 주셨던 존경하는 고 이규태 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삼가 가슴깊이 명복을 빕니다.”
이규태의 과학칼럼
* 사이언스타임즈에 글을 연재하던 이규태 조선일보 고문이 지난 25일 폐암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고문께서 본지에 보내 온 마지막 글을 소개드립니다.[편집자 註]
‘왜 천사는 모두 금발에 파란 눈의 백인이요, 대통령 관저는 왜 화이트 하우스인가. 악인의 명단은 왜 블랙리스트요, 마녀에게는 왜 검은 옷을 입히며, 검은 고양이는 왜 불길하고, 검은 거위는 왜 심술 사납다는 말인가.’
권투시합 중에 무엇을 그렇게 떠벌리느냐는 물음에 대한 왕년의 명선수 알리의 명답이다. 이렇게 뇌까림으로써 스스로 증오심을 북돋워 시합을 승리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왕조 때 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이 비극일 때는 검은 깃발을 걸어 표시했다.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집시나 주정뱅이, 부랑자, 좀도둑에게는 가슴팍에 검은 휘장을 달게 하여 식별했다.
동양문화권에서도 검은 색은 부정적이다. 흑사(黑蛇) 흑승(黑繩) 지옥은 가장 가혹한 지옥인데 중죄인을 묶는 오랏줄이 흑승이다.
전·현세의 가장 가혹한 업보를 흑업(黑業)이라 한 것이며, 들어앉아 근신해야 하는 날을 흑일(黑日), 아편을 흑반(黑槃), 광풍을 흑풍, 꿍꿍이속을 흑막이라 함도 그것이다.
투기나 모략이나 부패·부정한 마음을 검다 하여 흑심(黑心), 그 같은 행위를 검은 손이란 뜻인 흑수(黑手)라 했으며, 그런 못된 행위로 취하는 이득을 흑심(黑心)이라 했다.
대만에서 이 흑심으로 오가는 돈을 흑금(黑金)이라 하고, 조직폭력을 흑도(黑盜)라 한다. 흑금은 본래 쇠(철)란 뜻인데 검다는 부정형용사와 만나 썩은 돈이 되고만 것이다. 이전 있어왔던 부패선거들에서 패배한 이유로 정권과 연계된 흑금에 대한 염증의 표출이 지적되었다.
‘키르히호프의 암상자(암상자)’ 법칙이 생각난다. 검은 융단으로 속을 댄 암상자 겉에 들여다 볼 시공을 뚫는다. 그 구멍 둘레를 하얀 베로 둘러놓고 속을 들여다 볼 때 그 속이 가장 검게 보인다는 것이다.
곧 정반대 색을 거쳐야 진짜 본색이 나타난다는 이 법칙이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번 대만 선거에서도 국민당 정부의 검은 상자 속이 청렴한 야당 후보자의 하얀 시공 때문에 더 검게 보였을 것이고 그것이 성패를 갈랐음직하다.
지금 우리나라뿐 아니라 후진국의 유세장마다 흑금 오가는 흑수 사진이 보도되고 있다. 그래서 타산지석이 아닌 ‘타산지흑금(他山之黑金)’이란 말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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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죽이는 사회[KBS]
새해가 된 뒤에도 황우석 파동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황우석 교수가 2004년,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잘못된 배경에 미즈메디 측 연구원들이 줄기세포를 바꿔치기 한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의혹을 기자회견에서 제기하자 국민들의 여론은 또 다시 술렁거렸다.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처럼 논문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자신도 피해자라는 황 교수의 기자회견은 황 교수를 동정하는 국민들의 여론에 다시 큰 파문을 그려, 여론조사에서 황 교수의 발표를 믿는다는 여론이 80% 가까이 나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황 교수 논문의 문제를 제기한 젊은 과학자들은 황 교수가 다시 국민들을 향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어찌됐든 황 교수에 희망을 걸었던 국민들이 그만큼 많았던 듯 여론이 황 교수 쪽으로 기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여론형성의 기저에는 기자회견에서 보인 황 교수의 뛰어난 언변과 화술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한 시간 10분 동안 계속된 회견문 낭독과 일문일답에서 감정을 절제한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의 책임에 대한 인정, 국민들에 대한 사죄, 그러면서도 왜 바꿔치기 의혹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잘못을 추궁하더라도 연구성과를 인정하고 연구원들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호소력 있게 전달함으로서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물론 황 교수의 발표가 조작을 인정하지 않았고 또 다른 검증되지 않은 연구성과로 국민들을 호도하려 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황 교수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점들은, 이제 검찰이 수사를 시작했으므로 그 진실여부가 밝혀질 것이다. 그 수사결과에 따라 황우석 교수가 논문의 조작자인지, 아니면 자신이 주장하듯 세포 바꿔치기의 피해자인지가 가려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국제학계에 발표한 논문이 완전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흠결이 있었던 점에서 논문의 대표저자인 황 교수가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바꿔치기의 진실여부를 떠나서 기자회견 말미에 언급한 황 교수의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바로 '불광불급'이란 말이다.
황 교수는 기자회견 말미에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지요?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뜻일텐데...."라면서 “우리는 일에 미쳤었습니다. 일에 미쳐봤습니다. 눈 앞에 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 연구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없을까 그거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라며 자신을 포함한 연구원들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졌다”는 사생활까지 밝히면서 ‘이혼한 것도 학문적 열정 때문’이었음을 알렸다. 이렇게 사생활까지 언급하면서 일에 미처 열심히 연구했다는 황 교수의 발언으로 황 교수 뒤에 도열해 있던 연구원들은 한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매일 오전 6시5분이면 어김없이 연구 핵심요원들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험실에 모여 실험과 연구를 했다는 황 교수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구는 황 교수 팀들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전국의 많은 실험실에서 매일 이뤄지는 일이다. 많은 연구원들이 새벽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연구와 실험을 하고 그러다가 밤을 새기도 하는 그런 현장을 그동안 우리가 너무 잊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근래에 급성장한 데는 바로 우리 젊은 연구원들의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에 대한 처우도 형편이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는 황우석 교수의 이 말이 전국에 있는 연구원들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불광불급'이란 말은 지난 2004년 4월에 발간된 "미쳐야 미친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언급된 이후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옛 역사기록에서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의 면면을 새롭게 발견했는데, 특별히 이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열정과 광기가 숨어 있었음을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정민 교수는 불광불급( 不狂不及)을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로 풀었는데, "미치지 않으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루지 못한다"의 뜻으로 쓰고 있다.
정민 교수는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처럼 벽에 들린 사람들, 즉 마니아적 성향에 자못 열광했다고 말한다. 너도나도 무언가에 미쳐보려는 것이 그 시대의 한 추세였다는 것이며, 그러한 현상은 이전 시기에는 결코 만나볼 수 없던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그 이전까지 지식인들은 수기치인 곧 자기를 닦는 공부에만 몰두했고 사물에 몰두하면 뜻을 잃게 된다고 하여 금기시했다. 이런 흐름이 18세기에 오면서 허물어지고 지식의 패러다임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왔는데, 그것이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의 문예부흥이라는 것이다. 이덕무는 책에 미쳤으며, 바다 생물에 미친 정약전은『현산어보』를 남겼다. 자신들이 세운 뜻을 위해, 송곳으로 귀를 찌른 이도 있었으며 심지어 굶어죽은 천재도 있었다. 사실 이때 쏟아져 나온 그 방대한 저작들, 정약전의 《현산어보》 김려의 《우해이어보》, 정약용의 그 엄청난 저작들은 모두 벽의 추구, 곧 미칠 정도로 열심히 한 방면을 추구하는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의 산물이었다고 정민 교수는 설명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고달프고 신산한 삶을 이어갔다는 것이 특징이다. 천대와 멸시 속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데 대한 좌절과 분노 속에, 그렇게 잊혀져 갔다. 남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 이리 재고 저리 재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성실과 노력으로 일관한 삶의 태도, 신분과 나이와 성별을 잊고 이름 밖에서 그 사람과 만나고자 했던 진실한 사귐,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고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 그러나 이들은 세상의 인정을 받기보다는 죄인으로, 역적으로, 서얼로, 혹은 천대받고 멸시받는 기생과 화가로 한세상을 고달프게 건너갔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민 교수가 발굴해 이 책에 소개한 이러한 인물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굶어죽은 천재 천문학자 김영이다.
김영(金泳)은 인천 사람으로 신분은 미천했다. 용모 또한 꾀죄죄했고, 말은 어눌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7,8세 때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해서 12세 때는 이미 연립방정식의 해법 및 평방근과 입방근의 풀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완전히 해득했을 만큼 수학과 기하학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스승이 없이도 《기하원본(幾何原本)》 1책을 독학해서 익혔다. 이에 흥미를 느끼고 그 뒤 15, 6년 간 역상, 곧 천체의 운행연구에 더욱 몰두하여 마침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할 당시였다.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정남방에 보이는 별인 중성(中星)의 위치가 거의 1도 이상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이 실제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김영은 궁에 들어가 새로 천문의기를 만들고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누주통의(漏籌通義)》등 별자리의 운행과 시간과의 관계를 정리한 책을 찬하여 바쳤다. 김영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특례로 역관(曆官)에 발탁되었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정조에 의해서였다. 정조는 "김영과 같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상례에 따를 수 없다"며 특명으로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관상감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시기하여 격렬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를 역관에 임명했을 뿐 아니라 아예 관상감의 관원들을 그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출신도 불분명한 미천한 농군의 아들이 과거도 거치지 않고 관상감에 관직을 얻은 것은 조선조를 통털어 달리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나라에 일식이 있거나 혜성이 나타나면 관상감에 불려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였다. 정조가 승하하자 벼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1807년 혜성이 나타나더니 1811년 다시 큰 혜성이 나타나자, 나라에서 관상감에 명하여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 했는데, 아무도 이를 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 들였다. 또 1813년 겨울에 역법상의 문제로 중국 흠천감(欽天監)에 가 자문을 청할 적에도 관상감에서는 그 외에 달리 적임자가 없어 그때 연경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만년력》 몇 권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로 역법 상의 해묵은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후원자인 정조가 죽은 뒤라 관상감원들은 이제 무서울 것도 없어 거리낌 없이 김영을 못살게 굴었다. 그가 관상감에 들어간 뒤 일이 끝나면 그 능력을 질투하여 왁자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혹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다 욕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더러운 꼴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벼슬을 걷어치우고 나온 그는 집도 절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아이들 서당 선생 노릇으로 근근히 연명하며 지냈다. 아무도 늙고 병든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주역》에 대한 공부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주역》외에 율려(律呂), 즉 음악 방면에 대해서도 그의 관심은 확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공부한 것을 〈역설(易說)〉과 〈악률설(樂律說)〉로 정리해 두었고 다른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아깝게도 지금 전하는 것은 없다. 양식이 없어 사실상 굶어 죽기 전, 그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초를 해둔 난고(亂稿)가 상자에 가득한데, 반드시 훗날 책을 이루어 내려 했으나 이제는 글렀구나. 내 죽은 뒤에 삼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말고, 가서 삼호(三湖)의 서유본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부고를 들은 서유본이 그 집에 사람을 보냈을 때, 그의 원고가 가득 차 있던 책 상자는 관상감의 생도가 이미 훔쳐가 버린 뒤였다. 살았을 때 면전에서 그를 욕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자들이 그가 죽자마자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글을 다 훔쳐가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필생의 저작들은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김영의 죽음은 세상이 결코 재주 있는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김영을 발굴한 정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그리고는 슬쩍 남의 것을 훔쳐다가 제것인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시대는 바로 그러한 지식인들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 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완전히 잃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18세기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열정과 광기의 지식인들, 그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천재 천문학자 김영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그의 학문적 업적까지도 없애버린 그런 사회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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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장자(莊子)님의 가르침
장자(BC 355~약 275)의 성은 장莊이고 이름은 주周이며 송(宋)나라의 몽(蒙;河南省 商邱縣) 출신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 즉 전국 시대인 BC300년 무렵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몽이라는 곳에서 칠원리를 지냈다 (‘칠원’은 지명이라는 설과 오늘날의 국립공원과 같은 동산이라는 설이 있다. ‘몽’은 오늘날 중국 허난성 상추시 동북지역에 있다.). 장자는 이렇듯 칠원(漆園)의 말단관리가 된 적이 있긴 했지만 대개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논리학파(論理學派)의 혜시(惠施)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대성시킨 사람이라고 하여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라고 일컫기도 하나, 노자의 사적(事績)과 연대(年代)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노자의 현실적인 성공주의와는 달리 장자에서는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自己中心說)과 전병(田騈)의 귀제설(貴齊說;萬物平等說)의 영향을 받은 사변적(思辨的) 경향이 강하다. 그는 생전에 공자를 비롯한 유가로부터 공공연히 비난을 받은 사람이지만, 공자가 중국 북부의 도덕적이고 현실주의에 가까운 사상의 특질을 가졌다면, 그는 남방 지방의 자유롭고 유연한 상상력의 소유자로서 비유를 동원한 우화적 진술에 능한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청년시절에 몹시 곤궁했으나 학식이 깊고 넓어서 명성이 멀리까지 미쳤다. 무릇 장자를 아는 사람치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재능, 고상한 인격과 낭만적인 기질을 지닌 그에게 끌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일화로 본 장자의 인품
장자는 이 일화 속에서 개인의 안락함이나 대중의 존경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예측불허의 괴팍한 성인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의복은 거칠고 남루했으며 신발은 떨어져나가지 않게 끈으로 발에 묶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천하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친한 친구인 혜시(惠施)가 부인의 상(喪)을 당한 장자를 조문하러 와서 보니, 장자는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장자에게 평생을 같이 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의 죽음을 당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내가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내에게는 애당초 생명도 형체도 기(氣)도 없었다. 유(有)와 무(無)의 사이에서 기가 생겨났고, 기가 변형되어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다시 생명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이제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4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지금 우주 안에 잠들어 있다. 내가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멈췄다."
장자의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려고 의논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장자는 "나는 천지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로 연벽(連璧)을, 성신(星辰)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弔喪客)이니 모든 것이 다 구비되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하면서 그 의논을 즉시 중단하게 했다. 이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매장을 소홀히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속의 벌레와 개미의 밥이 된다.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준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위와 같은 장자의 기괴한 언동은 그의 숙명론에 대한 깨달음과 직결되어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 즉 도(道)로 통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장자의 도관(道觀)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사람들은 이 상태가 저 상태보다 낫다는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는 관리생활의 번잡함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나라의 재상직을 거절했다. 그의 인식에 대한 철저한 상대성은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나비의 꿈'(胡蝶之夢)에 잘 나타나 있다.
"언젠가 나 장주는 나비가 되어 즐거웠던 꿈을 꾸었다. 나 자신이 매우 즐거웠음을 알았지만, 내가 장주였던 것을 몰랐다. 갑자기 깨고 나니 나는 분명히 장주였다. 그가 나비였던 꿈을 꾼 장주였는지 그것이 장주였던 꿈을 꾼 나비였는지 나는 모른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은 틀림없다. 이것을 일컬어 사물의 변환이라 한다. "
〈장자〉에서 모든 경험이나 지각의 상대성은 '만물의 통일성'(萬物齊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자는 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받자 장자는 개구리와 개미, 또는 그보다 더 비천한 풀이나 기와 조각, 더 나아가서 오줌이나 똥에도 도가 깃들어 있다고 단정했다. 도가 어디에나 있다는 단정은 그 뒤에 중국불교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이와 유사한 예를 들어 아무리 미천한 것에도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장자야말로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도를 깨친 위대한 사상가였다
장자의 주요사상
<도는 한계나 차별이 없다(道未始有封)>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상대적인 이 세계에서는 어떤 사물도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만한 <불변의 절대적 기준>은 없고 더 나아가 만물은 모두 하나〔齊物〕라는 주장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오직 도(道)의 절대성에 의해서만 현실세계의 대소(大小)· 장단(長短)· 시비(是非)· 선악(善惡)· 생사(生死)· 귀천(貴賤)이라는 모든 대립·차별의 상(相)들이 지양될 수 있고, 개체는 개체로서의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여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절대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이다.
1. 자연과 나는 하나'라는 물아일체 사상을 주장
인생관을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절대무한의 경지에 소요(逍遙)함을 목적으로 하였고, 또한 인생은 모두 천명(天命)이라는 숙명설(宿命說)을 취함
노자에 비해 탈속한 정신적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
의 논설집으로, 기발한 우언(寓言)과 비유로 문명을 날카롭게 비평하였는데, 인위(人爲)를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복귀할 것을 설파함.
2. 도(道) 사상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 버린 것."
천지 생성의 원인이며 이끌어 가는 원리
현상 세계의 유한성과 모순 대립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
3.「제물론」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7편 중의 제2)
'만물을 제일(齊一,하나 같이)'하게 보는 이론
모든 만물은 하나이다.(萬物齊同) : 제물(齊物)
道의 관점에서는 선과 악, 미와 추, 나와 너 등의 차별은 무의미.
모든 사물을 차별하지 않는 정신적 절대 자유의 경지
정저지와(井底之蝸)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비유
4. 좌망(坐忘)과 심재(心齋) :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
좌망(坐忘) - 조용히 앉아 우리를 구속하는 일체를 잊어버리는 것.
《장자》의 대종사편(大宗師篇) -> 좌선
심재(心齋) - 마음을 비워서 깨끗이 하는 것.(《장자(莊子)》의 인간세편(人間世篇))
5.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일체를 잊고 마음을 비울 때 절대 평등의 경지에 있는 도(道)가 마음에 모이게 됨.
물아일체 :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절대 자유의 경지
지인(至人), 진인(眞人) - 도를 지녀 물아일체적 경지에 이른 인간
6. 문제점
일체의 사회 규범, 제도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요소를 지님.
7. 장자의 명문
彼出於是, 是亦因彼., 是亦彼也, 彼亦是也.(피출어시,시역인피.,시역피야,피역시야.) : '저것은 이것에서 나왔으며, 이것 또한 저것에서 나왔다. 이것이 또한 저것이오. 저것 역시 이것이다.'
<指物論(지물론)>과<白馬非馬論(백마비마론)>/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천지이지야, 만물일마야) : '천지는 한 손가락이오.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
天地與我竝生,而萬物與我爲一(천지여야병생, 이만물여아위일) : 천지와 나는 함께 생겨났으며,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
<胡蝶之夢(호접지몽)>-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주지주지몽위호접몽, 호접지몽위주여): <호랑나비의 꿈>-'장자가 꿈속에 호랑나비 된 걸까? 호랑나비가 꿈속에 장자가 된 걸까 알지 못하겠네.'
丘也與汝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 (구야여여개몽야, 여위여몽역몽야): '공자와 너는 모두 꿈이오. 내가 너에게 꿈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또한 꿈이로다.'
無用之用(무용지용-쓸모없는 것이 쓸모있음) : “사람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을 모른다”라고 한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篇)>의 말에서 유래한다.
蝸牛角上爭(와우각상쟁):원래 달팽이 뿔 위에서의 싸움이란 뜻으로,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칙양편(則陽篇)>에 나오는 말이다. 끝없이 광대한 우주 속의 조그마한 지구에서, 더구나 그 한 모퉁이에서의 싸움이란 참으로 보잘것 없다는 뜻.
螳螂拒轍(당랑거철):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과 대적한다는 뜻으로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 나온다.
無病自灸(무병자구):병도 없는데 스스로 뜸질을 한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쏟아 화를 부른다는 뜻으로
제물론(齊物論) 개요
1. 천뢰를 듣다.
남곽자기는 책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하늘을 우러러보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 온 몸에서 생기가 사라져 버리면서, 혼이 나간 빈껍데기처럼 변해갔다. 곁에서 모시고 있던 안성자유가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살아 있는 몸뚱이가 마른 나무처럼 굳어 버리고, 마음 또한 불꺼진 재처럼 되어 버리다니...... 지금 책상에 기대앉은 사람은 앞서 책상에 기대앉은 선생님이 아니로구나."
이때 남곽자기가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언을 불렀다.
"언아, 방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는데, 너도 그것을 알고 있었더냐?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너는 인뢰(사람의 음악)는 알고 있어도 지뢰(땅의 음악)는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설령 지뢰를 들어보았다 하더라도 천뢰(하늘의 음악)를 듣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자세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당이 토해내는 숨결이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이 일지 않으면 별일 없지만, 일단 바람이 일면 땅 위의 모든 구멍들이 소리를 내게 된다. 너는 혼자서 긴 바람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느냐? 그 바람이 산 숲을 뒤흔들면 백 아름이나 되는 거목의 갖가지 구멍, 즉 우리 몸의 코나 입이나 귀, 혹은 병이자 절구나 같은 물건 모양, 혹은 땅의 연못이나 웅덩이처럼 모양과 같이가 가지각색인 구멍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구멍에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나오는 소리, 들어가는 소리, 외치는 소리, 곡소리, 아득히 먼 소리, 새우는 소리, 휘잉 하고 울리면 휘익하고 받으며 바람의 힘에 따라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자연의 교향악ㅇ르 연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큰 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모든 구멍들은 일체히 울음을 그친다. 그러나 아직도 하늘거리는 나뭇가지와 잎들에서 방금 지나간 바람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뢰라는 것은 땅 위의 구멍들이 바람을 받아 울부짖는 소리로군요. 모든 구멍이 소리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인뢰는 인간이 불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되겠습니다만...... 천뢰란 어떤 것입니까?"
"지뢰든 우뢰든 간에, 우는 것은 천차만별이지만 각각 제 소리와 제 음색으로 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이처럼 성난 듯 소리체 만드는 것은 무어이겠느냐?"
2. 참된 주인은 누구인가?
인간의 지식이나 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포괄적인 인식, 분석적인 탐구, 간결한 표현, 번잡한 잔소리 등 사람과 경우에 따라 여러 모로 다른 형태를 가진다.
인간이란 그 어느 경우에도 지식과 말에 의존해서, 꿈속에서도 바깥 사물을 추구하고, 잠이 깨어서는 온 정력을 다 기울여 투쟁에 몰두한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세심하게 불안에 떨고 절망에 몸부림치며 서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사직에서 판단하는 것과 흡사하고, 끝내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맹약에 얽힌 제후들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가을과 겨울 냉기에 시들어 떨어지는 초목과도 같이 육신의 건강은 나날이 쇠약해져만 가고, 숨을 제대로 못 쉬는 노인처럼 정신도 날로 제 기능을 잃어가는 것이다.
기뻐하는가 하면 어느 덧 성을 내고, 슬퍼하는가 하면 어느 덧 즐거워하는 것과 같은 인간 심리의 모든 형상은 대관절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들의 심리는 빈 것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나 습기 찬 땅에서 생겨나는 곰팡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무엇이 그 궁극의 원인인지 ㅇ라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보면 역시 무엇인가가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바깥 사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자기라고 의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의 변화란 바깥 사물과 자기와의 교섭에 의해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말은 일면 타당하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을 인정한다 해도 심적 기능의 근원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심적인 기능의 근원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심적인 기능이 부여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부여한 그 무엇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즉 참다운 주재자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존재를 명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보더라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인체는 백 개나 되는 뼈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창자로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에 의해 이것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전부를 사랑할 수 도 없고, 그 어느 하나만을 특별히 돌보아줄 수도 없는 것을 보면 그것들은 모두 나를 섬기는 신하와 종이 아닌가?
그러나 주재자가 없으면 몸은 몸으로서의 전체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주재자도 되고 종도 되어 서로 번갈아가며 지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시 우리들의 지각을 초월해 존재하는 진군이 우리 몸을 통괄한다고 생각해야만 설명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인체가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다.
일단 인간의 모습의 갖추고 태어나면, 몸에 딸려 있는 모든 감각기관은 죽는 그 순간까지 바깥 사물을 배척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는 작용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즉 바깥 사물과의 갈등을 반복하면서 죽음을 향해 줄달음친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한평생 아등바등 하며 몸과 마음을 괴롭혀도 그 보람을 얻지 못하고 지치고 시달릴 뿐, 평안을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투쟁이야말로 삶의 표시다'라고 말하지만, 이 얼마나 무의미한 설명인가? 살아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바깥 사물과 싸우고 스스로 소멸해 간다는 이 거대한 모순은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생의 불가사의를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간에는 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 있다. 성심 자체에는 슬기롭다거나 어리석다는 구별이 없다. 그러나 이 성심은 살아가는 동안에 바깥 사물과 대립하면서 변질되어 간다. 그리하여 오늘 월나라로 떠나면서 어제 도착했다고 말하는, 있을 수 없는 명제까지도 낳게 만든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논증하는 인간의 지혜는 마침내 우왕의 신지도 미치지 못하는 경제에 도달한 것일까?
말이란 빈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뜻이 확정된 것이 아니면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 만일 성립한다면, 말이 새 울음소리와 다르다고 해보았자 실상 둘 사이에는 별다른 구별이 없을 것이다.
도대체 도에 참과 거짓의 구별이 생기고, 말에 옳고 그름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무엇일까? 원래 도는 만물에 두루 편재해 있는 것이고 말은 도와 형제와 그림자가 서로 ㅇ럭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지식으로 구속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가와 묵가 학파간의 논쟁도 결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제각기 다른 설을 내세워 논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결국 말이라는 수단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하여 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이러한 잘못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다운 지혜, 즉 밝은 지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3. 만물제동
모든 존재는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저것 쪽에서 보면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된다. 즉 저것은 이것이라는 개념과의 비료 대립에서 비로소 성립되고, 이것은 저것이라는 개념과의 비교 대립에서 비로소 성립된다.
그러나 상대적인 것은 저것과 이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등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물은 서로 의존하는 동시에 서로 배척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속박됨이 없이 생성, 변화하는 자연에 순응할 뿐이다.
이것 또한 어떤 입장에 근거한 판단임에 틀림없으나 이 입장에서 보면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이 아니며, 양자는 동시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즉 양자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같이 하여 나와 다른 것의 대립립을 해소시키면 개별적인 존재를 초월하여 도추의 경지에 이른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문짝의 지도리가 고리를 축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끝없이 변화하면서 그 무궁한 변화에 대응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도추의 경지에 이르면 옳고 그른 것의 대립이 해소된다.
손가락의 개념을 분석하여 그 말이 존재로서의 손가락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고, 말(馬)이라는 개념을 분석하여 그 말이 존재로서의 말(馬)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논증한 사람이 있다.
만일 이들 궤변론자들이 이러한 논리로 우리들의 인식 능력이 불완전함을 강조하려 한다면, 그 방법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다. 개체를 초월하면 손가락이라는 존재는 손가락이면서 손가락이 아니고, 말(馬)이라는 존재는 말이면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상대성을 초월한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손가락 하나도 천지라 할 수 있고, 말한 마디도 만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말에 있어서 옿고 그름의 구별이 명확하다. 도는 무한히 변화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되지만, 그것이 나타난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해서는 그 각각에 해당되는 말이 필요하다.
즉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하듯이, 그 뜻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으면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말의 표현 대상인 사물은 원래가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풀잎과 기둥, 문둥병자와 미녀 서시를 예로 든다면, 전자는 그 크기에, 후자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각각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역시 동일한 것이다. 또한 아무리 상상을 벗어난 기괴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도의 견지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형식뿐만 아니라 운동에 있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일면 파괴로 보이는 현상도 다른 면에서 보면 완성일 수 있고, 반대로 완성이 곧 파괴일 수도 있다. 즉 일체의 존재는 형식과 운동을 막론하고 어더한 구별도 없는 것이다.
이 만물 제동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사물을 선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사물을 떳떳함, 즉 자연의 현상에 맡길 뿐이다. 떳떳하다는 뜻의 용(庸)은 쓴다는 뜻의 용(用)과과도 통하고, 자연의 작용에는 무리함이 없다. 통(通)은 또 얻는다는 득(得)과 통한다. 무리가 없는 작용을 통해서만 사물은 존재로서의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인식은 만유의 실상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도와의 일체화란 자연에 맡기려는 의식마저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4. 자연에 맡겨라.
그러나 우리들은 이 도리를 깨닺지 못한 채 자기의 선택만 고집해 마음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다. 원숭이를 키우는 저공이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아침에는 세 공기, 저녁에 네 공기씩을 주기로 하겠다." 그 말에 원숭이들은 일제히 성을 냈다. 그래서 저공이
"그럼 아침에 네 공기, 저녁에 세 공기를 주겠다."라고 말하자 원숭이들은 금방 화가 풀어졌다고 한다.
사실은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성을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역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른 것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일체의 자연의 조화, 즉 천균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이라고 한다.
태고 적에 최고의 지혜를 지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자연 그대로의 존재였고, 그들의 의식은 주객이 아직 나눠지지 않은 이른 바 혼돈 상태였다. 그런데 이 혼돈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었으나, 객체로서의 사물에 구별을 두지는 않았다. 다시 시대가 내려오자 사람들은 사물의 구별을 의식하게끔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가치 관념은 생겨나지 않았다. 이윽고 가치 관념이 생겨나자 도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간에게 집착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도에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성휴의 구별이 있는 것일까? 금의 명수인 소문의 연주를 생각해보자. 소문의 연주는 분명히 신묘한 가락을 이루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연주되지 않은 무수한 가락들을 잃게 되었다. 소문의 연주, 즉 인간의 작위가 성과 휴의 구별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비단 소문의 금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사광(진나라의 악사)의 작곡이나 혜자의 논리학은 모두 인간 능력의 최고 단계ㅖ 도달하였기 때문에 불후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은 위대했다. 그러나 자기의 재주나 지혜의 힘을 과시하고,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도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그 결과 혜자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한낱 궤변에 그치고 말았다. 소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기술에 얽매여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소문, 사광, 혜자 세 사람이 성취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는 일 모두 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휴에 불과하다고 단정해 버린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물론 사물의 변화마저 휴 아닌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념무상의 상태를 최고의 지혜로 알고, 선택하는 일 없이 자연에 맡길 뿐이다. 바로 이것이 밝은 지혜에 따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물에는 본래 구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나의 주장 역시 옳고 그른 것을 따진 것이라는 견해도 성립된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든 따지지 않든, 그것이 판단인 이상 양자의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에 항상 있게 마련인 한계를 염두에 두고 다시 인식 문제에 대한 고찰을 더 해볼까 한다.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운동(시간)과 형식(공간)의 두 범주로 크게 구별된다.
먼저 운동을 살펴보면, 어떤 운동이든 처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처음이 없으면 운동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처음은 모든 운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처음이 전제되고, 일단 '처음이 있다'라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면, 이에 대해 '아직 처음이 없었던 때'라는 무정 판단이 성립된다. 이러한 부정 판단이 성립되면 다시 계속해서 '처음이 없었던 때도 없었던 때'라는 이중 부정 판단이 성립된다.
다음 형식을 살펴보자. 어떤 형식에서든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존재하지 않으면 형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ㅎ여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되고, 일단 존재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이것에 대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라는 부정 판단이 성립된다. 다시 계속해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없었던 상태'라는 이중 부정 판단과,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없었던 상태마저 없었을 때'라는 삼중 부정 판단이 성립된다.
이같이 모든 사물이 일단 인식의 영역 속에서 판단을 형성 하면 즉시 극서에 대한 부정 판단이 성립된다. 그리고 부정은 다시 부정의 부정을 끌어내고, 다시 또 부정의 부정이 이끌려온다. 이렇게 부정의 무한한 연쇄 반응은 끝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나 나름대로의 판단을 말해 왔다. 그러나 이 판단 역시 긍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초월한 도의 세계에서는 큰 것을 대표하는 태산도 짐승의 잔털보다 작으며, 8백년을 살았다는 팽조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어 버린 갓난아기보다 명이 짧다. 천지와 나는 한 몸뚱이요, 만물과 나는 하나인 것이다.
이 하나, 즉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되는 주객일체의 세계에서는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라고 판단한다면 벌써 거기에 하나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거기에 하나의 세계와 하나라는 개념에서 둘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 둘이라는 개념과 하나라는 개념으로부터 셋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이렇게 수 개념이 끝없이 늘어나게 되면, 아무리 계산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밝혀낼 도리가 없다.
무에서 유를 행해 내딛는 그 순간에 벌써 셋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유에서 유를 행해 나가는 경우에 어떻게 분화되어 갈 것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차별과 혼돈의 세계를 지향하지 말고 자연의 본 모습인 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도를 본디 무한한 것이기에 말(개념)에 의한 구분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말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사물을 구분하는 관념이 생긴다. 그 구분에 대한 관념을 검토하려 한다.
먼저 사물을 비교, 대립시키기 때문에 왼쪽과 오른쪽 따위의 상대적인 구분이 생긴다. 이 구분을 바탕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이 질서는 필연적으로 선택과 경쟁을 인간 사회에 초래하였다. 인간이 사고를 통해서 얻은 수확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천지 밖의 현상은 내버려둔 채 논하려 하지 않으며, 천지 않희 현상은 논하기는 하나 세세히 캐어들지 않는다. 또 옛날 선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춘추에 대해서도 사실을 자세히 따지기는 하나 시비를 가리려 들지는 않는다. 결국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구분하는 것이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구분을 두지 않고,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듯인가?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일반 사람들은 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서로 시비를 가린다. 이처럼 말을 절대시하는 것은 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위대한 변론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한다. 대인은 사소하게 어질지 않으며, 진정한 겸손은 작은 일에 겸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는 그것이 드러나면 이미 도라 할 수 없다. 말을 변론하면 사물의 실상에서 멀어진다. 인은 특정한 대상에 고정되면 인이 될 수 없으며, 겸손이 지나치면 거짓이 된다. 또한 용기를 믿고 남을 해치려 하면 용기라 부를 수 없다.
위에 말한 다섯 가지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둥근 것을 더욱 둥글 게 하려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고 노력이다. 그러나 둥근 것을 더욱 둥글게 하려는 노력은 결국 둥근 것을 모나게 만들고 만다. 즉 인간의 최고의 지식은 앎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표현하지 않는 변설과 도가 아닌 도를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것을 체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 경지는 한없는 천부에 비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내주어도 마르지 않으나, 왜 그런가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것이 밝음을 의식하지 않는 밝음, 즉 보광인 것이다.
5. 꿈에 나비가 되다.
어느 날 장주(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기가 장주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눈을 떠보니 자기는 틀립 없는 인간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는 것인가? 그 모양으로 볼 때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만물의 무한한 변화 속에서는 한 양상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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