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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공 신화, 현대 정주영 회장님, 성공 10훈, 한국석유공사, 일본 YKK, 한국 100대 CEO
성공시대 1
현대 고 정주영 회장님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
경제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바로 정주영이라는데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21만 임직원이 일하는 현대그룹을 일군 주인공, 미국 포브스지에 의해 세계 9번째의 부자로 뽑힌 정주영.
과연 그가 오늘의 성공을 이루게 된 것은 어떤 비결이 있었기 때문일까? 땀흘려 일궈온 그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땀의 가치와, 오늘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 보자.
1. 성공 비결 1 -"내 몸이 담보요"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16세에 가출, 막노동판을 전전 하다가 서울의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신용밖에 없다고 생각한 정주영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게 되고, 그 결과 쌀가게 주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스물 일곱 되던 해,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리게 되는데. 자동차 정비공장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화재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빚을 얻어 시작한 정비공장이 전소되자, 정주영은 빚위에 또다시 빚을 지게 되고. 다시 일어서야 할 그때, 정주영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은 쌀가게 시절 알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정주영이 다시 일어나 오늘 현대그룹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신용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2. 성공 비결 2 -"국 한 그릇, 반찬 하나"
현대그룹 총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30여년 전에 지은 그의 집엔 20여년이 넘은 소파와 10년이 다 된 17인치 TV가 전부다. 17년전 작업복을 아직도 입고 있는 정주영.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끼는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한국 제일의 부자 정주영. 짜디짠 냄새가 나는 왕소금 회장으로 불린다.
3. 성공 비결 3 - "새벽 닭을 깨우며"
정주영 회장의 성공비결 또 하나. 그 누구보다 부지런 했기 때문이었다. 쌀가게 시절부터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점포를 정리했던 청년 정주영은 자신이 사업을 하던 시절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그리곤 해가 빨리 뜨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곤 했다는데. 지금도 새벽 6시 기상, 7시면 회사로 출근 한다.
4. 성공 비결 4 - "빈대도 머리를 쓰는데…"
정회장이 부하직원을 야단칠 때 늘 하는 말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두 노동자 시절 몸으로 익힌 정회장의 철학이 담긴 욕설이라는데. 부두 노동자 시절, 몸에 기어 오르는 빈대를 피하기 위해 네 개의 물그릇에 상다리를 담궈 놓고 상위에서 잠을 자던 정회장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빈대에게 시달리게 된다. 살펴 본즉 빈대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정 위에서 몸으로 뛰어 내린 것인데. 빈대도 머리를 쓰면 되는데, 사람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주영.
그는 사업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멋지게 성공을 하곤 했다. 한겨울 보리를 심어 잔디를 대신 했던 부산 UN묘지 공사며, 폐 유조선으로 단번에 물길을 막았던 서산 간척지 공사. 그의 성공은 상식에 매달리지 않는 신선한 발상의 성공이었다.
5. 성공 비결 5 - "오백 원으로 빌린 사천만 달러"
정주영 회장의 별명은 불도저. 그것은 한 번 마음먹은 사업을 무섭게 밀어 붙이는 추진력 때문인데. 1970년, 울산 모래 벌판에 세워진 조선소는 모두가 불가능 했다고 말한 사업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던 시절, 그곳에 조선소가 세워지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오직 정주영 뿐이었다. 울산 모래 벌판의 사진 한 장을 달랑 들고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반에 해당하던 4500만불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 규모의 도크를 만들었던 정주영. 그는 조선소 도크 건설과 동시에 26만톤 짜리 두척의 배를 만드는 세기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30개월 후, 대한민국 최초로 만든 거대한 유조선은 한국을 세계 제 1위의 조선국으로 도약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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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성공10훈(十訓)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업환경 속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기업 경영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코노미스트지(10월 25일자)는 성공적인 기업 경영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 10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첫째, 높은 도덕성이다. 만약 기업 총수의 도덕적 기준이 낮다면 기업 전체의 도덕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에서 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재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둘째, 가끔씩 원치않는 의사결정을 과감하게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해결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경영자의 담력이 필요하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적으로 만드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거나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꼭 명 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기업 경영자가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셋째, 어려운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리기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기업 경영자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려내는 선별능력을 갖춰야 한다.
넷째, 기업 경영자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이기주의적인 개인적 야망을 넘어서 후대까지 영속될 수 있는 기업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최고를 지향하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다섯째, 기업 경영자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자가 돼야 한다. 언론 애널리스트 주 주 등 외부 입김이 거세지면서 이 같은 소통능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 기업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직원들에게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설득력 있 게 불어넣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여섯째, 누가 어떤 자리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도 리더십 요건이다.
일곱째, 부하직원의 재능을 살려주는 것도 기업 경영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뛰어난 리더는 특정인의 재능이 어디에 가장 적합하게 쓰일 수 있을지 파악하 는 것은 물론 자신의 노하우를 부하직원들에게 전수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
여덟째, 기업 경영자는 자신감이 충만해야 한다. 자신있는 리더는 자신의 약점 을 인정하고 외부의 도움을 떳떳하게 받는다. 부하직원들에게조차 질투심을 느 끼는 지도자는 부하직원의 충성심을 유발할 수 없다.
아홉째, 적응력도 중요하다. 시장변화를 감지하는 것과 신속하게 종전과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을 택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열번째, 리더는 부하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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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창조1
'36인치의 승부'
흑사자 프로젝트의 영웅들
- 베트남 유전 15-1 광구 개발, 한국석유공사팀
흑사자 프로젝트팀의 끝없는 노력과 집념이 만든 장대한 드라마....
20여 년의 한국 석유개발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오일맨 1세대, 김성훈 소장, 그를 포함한 프로젝트팀은 국내 대륙붕 어디에도 없는 석유를 찾아 해외 유전에 눈을 돌린다. 1992년 베트남에서 프로젝트팀은 가스발견에 성공하고, BP, 엑슨 모빌 등 세계 메이저급 석유회사들과 경쟁하여 베트남 15-1 원유광구 입찰에 들어가는데...
국가적 위기 IMF를 넘어서...
그러나 한국은 3년여 걸친 입찰과정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고, 천신만고 끝에 최종 낙찰자로 선정되었지만 계약금 지불을 앞두고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석유를 찾아야 한다'는 기술적인 확신과 의지로 마침내 15-1 광구 개발권을 미국의 코노코사와 공동으로 따낸다.
흑사자 프로젝트 팀의 보이지 않는 희망, 계속된 도전...
국가와 회사의 운명을 걸고 시작된 베트남 해상 석유 탐사 작전! 제주도 두 배 크기의 해상에서 남자 허리 둘레 만한 36인치의 시추봉을 찍어 석유를 찾아야 하는 흑사자 프로젝트팀 (탐사팀장 곽정일, 탐사 팀원 장성진, 김병진....) 하지만 탐사팀이 시추점으로 정한 흑사자 구조는 20년 전 독일의 데미넥스사가 석유 발견에 실패한 바로 그 구조였다.
제 1차 원유 발견 성공
그러나 밤새워 자료를 분석, 미국기술진의 반대를 물리치고 프로젝트팀은 1차 원유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곧이어 닥친 위기의 순간들...
그런데 원유의 생산가치를 따지는 2차 시추.. 2차 시추에서 난관은 계속됐다.
기쁨도 잠시... 나와야 할 석유가 나오지 않은 것. 공동운영사인 미국과 베트남은 시추탐사를 포기했지만 흑사자 프로젝트팀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유전개발 성공! 흑사자 프로젝트팀의 노력과 집념의 결실
2001년, 8월, 5억 9000만 배럴이라는 2000년 이후 세계 최대, 자이언트급 유전을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그것은 한국 오일맨들의 끝없는 노력과 집념으로 찾아낸 한국 최초의 원유... 우리가 원한다면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우리의 석유였다. 그들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YKK 요시다 다다오(吉田忠雄)
▲ 요시다 다다히로는 `고객에게 좋은 것이 YKK에도 좋은것`이라는 경영철학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일본의 YKK가 어떻게 최고의 지퍼를 만들어 세계 경쟁사들을 꼼짝 못하게 했을까.
일본 도쿄(東京)의 고만고만한 빌딩들이 빼곡이 늘어선 어느 구역에 작은 9층짜리가 하나 있다. 지퍼 제조업체 YKK의 본사다. 본사 건물만 보면 YKK가 세계 전역에서 사용되는 지퍼의 절반 정도를 생산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결은 동해에 면한 도야마현(富山縣) 도야마 인근의 ‘초효율적인’ YKK 복합단지 심장부 깊숙이 감춰져 있다. 트럭들이 플라스틱 사출 지퍼와 금속 지퍼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소재, 특수 합금을 단지에 반입한다. YKK가 세상의 모든 바지에 충분히 달 수 있는 연간 72억 개의 지퍼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유일한 자재들이다.
YKK에서 Y는 창업자 요시다 다다오(吉田忠雄)를 의미한다. 1993년 사망 이후 그의 아들 요시다 다다히로(吉田忠裕 ·56)가 YKK를 운영해오고 있다. 요시다 일가는 YKK 지분 31%를 보유하고 있다. 순자산 가치로 따지면 15억 달러에 이른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일본 내 불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회계연도 YKK의 매출은 30% 증가한 43억 달러, 순이익은 31% 늘어난 1억9,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과 동유럽에서 지퍼 매출이 급증하면서 북미겴?늉??EU)의 매출 감소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가장 큰 매출 증가는 YKK의 알루미늄 건자재 자회사에서 비롯됐다.
일본의 마천루 건축 경기가 장기 부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지퍼 및 알루미늄 창틀 수요 증가에 힘입어 앞으로 수년 동안 매출은 계속 급증할 전망이다. 요시다 다다오는 2차대전 중 미군의 공습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산설비를 도쿄 외곽으로 옮겼다. 그리고 43억 달러 상당의 세계 지퍼산업을 완전 장악할 수 있게 됐다. 20세기 일본 기업 창업자들이 흔히 그랬듯이 요시다도 어린 견습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20세에 중국산 도자기를 수입하는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34년 회사가 파산했을 당시 사장은 남은 사업들을 그에게 넘겨줬다. 그 가운데 수제 지퍼를 생산하는 작은 자회사도 포함돼 있었다. 호기심 많고 꼼꼼한 요시다는 지퍼 제조법을 현대화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공작기계 제조업체들은 그가 설계한 지퍼 기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기계를 직접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큰 실꾸릿대의 매듭이 자동 지퍼 기계에 계속 걸리곤 했다.
실 제조업체들은 매듭없는 실을 공급할 수 없다고 버텼다. 요시다는 실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50년대 후반 YKK가 외부에서 구매해야 할 자재라고는 플라스틱과 자체 조합한 합금뿐이었다. 60년대 들어 YKK는 일본 지퍼 산업의 95%를 점유했다. 그러나 수출을 시도하면서 관세 등 여러 무역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요시다는 자신만의 무역전쟁보다 해외 생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작은 일본 기업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오늘날 YKK는 세계 60개국에 132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40여 년 전만 해도 해외 진출을 꾀한 일본 기업은 거의 없었다.
요시다는 해외 파견 직원들에게 가능한 한 현지인과 융화하도록 당부했다. 네덜란드로 파견된 한 직원은 현지에 도착한 뒤 수개월 동안 네덜란드어를 공부했다. 공장 개소식에서 네덜란드어로 연설하기 위해서였다.
YKK는 일본인 관리자의 해외 주재 기간을 10~15년으로 연장하면서 자회사 현지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해외 자회사는 본사와 계속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현지 직원들은 일본 본사와 의사소통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회사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일도 거의 없다. YKK는 가능한 한 주재국의 민족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특수 생산 설비외 모든 요소를 현지에서 구매한다. 69년 요시다는 아들 요시다 다다히로를 미국에 보냈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72년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학의 켈로그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그는 “미국 MBA 과정에서 배운 것만으로 아시아계 회사를 운영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YKK 등 많은 일본 기업이 확고한 원칙에 따른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그의 아버지가 회사를 종교집단처럼 운영했다고 말했다. 요시다 다다오의 경영철학은 이른바 ‘선순환’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인에게 혜택을 베풀면 그 혜택이 YKK로 돌아온다는 생각이다.
요시다 다다오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책으로 남겼다. 사실 그가 말한 선순환이란 끊임없이 제품의 질을 높이고 가격은 낮춘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는 YKK를 절대 상장하지 않고 종업원 및 핵심 파트너들과 공유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YKK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증시 투자자들에게 공유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MBA 과정에서 글로벌 시장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아버지가 자신을 YKK의 미국 내 사업 책임자로 임명했을 때 특히 그랬다. 60년 YKK가 뉴욕 의류상가 지역에 점포를 열었을 당시 요시다 다다히로에게는 아무도 생산하려 들지 않는 희귀한 모델이나 색상 주문만 들어왔다. 당시 지퍼 산업은 지퍼를 발명하고 개선해나간 미국의 탤런(Talon)과 독일의 옵틸론(Optilon)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 다다히로는 끈질겼다. YKK의 사시(社是)는 ‘선납품’이다. 요시다 다다오가 강조한 제조의 효율성은 주문에 맞춘다는 의미다. 봄 지퍼는 봄 옷 출시에 맞춰 대고 가을 지퍼는 가을 옷에 맞춰 납품한다는 식이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소량 주문도 점차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납품하자 더 큰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탤런을 보유하고 있는 태그잇 퍼시픽(Tag-It Pacific)의 조너선 마카일스(Jonathan Markiles) 부사장은 “YKK가 태그잇 퍼시픽의 모든 특허들이 만료될 때까지 기다렸다 독자적으로 제품에 개선과 수정을 가했다”고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탤런은 미국 의류산업의 해외 이전이 활발히 전개될 때 함께 움직이지 않아 시장을 YKK에 빼앗기고 말았다. YKK는 59년 해외 진출에 나서 뉴질랜드 ·미국 ·말레이시아 ·태국 ·코스타리카 같은 직물 생산 국가로 진출했다.
YKK가 계속 성장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경쟁사들은 YKK를 반덤핑 혐의로 제소하고 특허 소송도 제기했다. 일본인 기술자에 대한 비자 발급이 제한돼야 한다는 로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YKK는 지퍼 업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탤런과 옵틸론이 세계 시장을 각각 7~8% 점유하고 있는 데 비해 YKK는 45%에 이른다. 나머지 대부분은 1,000개 이상으로 추정되는 중국 업체들이 차지하고 있다.
효율적인 납품과 첨단 자동화기술이 무기
일본 내 한 경쟁사는 YKK가 많은 공장과 매우 다양한 제품군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YKK와 일본 내 극소수 경쟁사를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일본 내 경쟁사들은 사업 확장을 엄두도 못내고 몇몇 가죽 제품 메이커의 긴급 주문만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다. YKK 공장만 방문해보면 YKK가 어떻게 경쟁사들을 꽁꽁 묶어놓을 수 있었는지 알게 된다. 세심하게 유지 ·보수되는 기계들이 원자재를 수천 가지 색상과 사이즈의 지퍼로 자동 제조한다. 각 부품을 기계가 테스트해 결함이 있는 것은 자동으로 걸러낸다. 모든 공정이 사람의 개입 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경쟁사들도 YKK와 유사한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맞춤형 소프트웨어를 비롯해 YKK가 가진 비장한 노하우 같은 것은 없다.
YKK가 자체 제작한 생산설비는 극비에 속한다. YKK를 방문한 언론인에게도 공개되지 않을 정도다. 66년 YKK에서 근무한 바 있는 어느 재일 한국인이 YKK 기계 한 대를 한국으로 가져가 한국지퍼㈜를 설립했다. 한국지퍼는 이후 번창일로를 걷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부도가 나고 말았다. 또 다른 한국 업체 YPP정우지퍼는 장기 소송 끝에 2002년 결국 YPP라는 브랜드를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요시다 다다히로가 중책을 맡게 되면서 아버지와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일례로 요시다 다다히로는 창업자 숭배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요시다 다다오는 “일본은 골프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회삿돈으로 골프를 치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골프를 금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모든 직원이 골프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시작했다. 93년 요시다 다다오가 84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다다히로가 경영권을 승계했다. 그리고 어느날 다다히로는 골프를 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후 “골프를 좋아하는 직원들이 벽장 속에라도 숨어 있다 튀어나온 듯 이곳저곳에서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아버지가 안고 있던 또 다른 문제가 가까운 친구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갖고 있던 문제와 똑같다고 이야기했다. 요시다 다다오는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였을 당시 YKK가 조지아주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서로 알게 된 것이다. 요시다 다다오와 카터는 뛰어난 소집단 지도자였다. 하지만 모든 세부사항을 일일이 챙긴다는 것은 일정 수준만 넘으면 불가능해진다.
요시다 다다오는 다른 업체와 협상할 때 변호사 등 전문가들을 대동하지 않았다. 금붕어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배설물 같다는 이유에서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전문가를 대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YKK와 합병 협상을 벌이던 한 기업이 마지막 순간 협상에서 손을 떼고 경쟁사로 넘어갔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계약 위반으로 그 기업을 고소했다. 요시다 다다오는 그런 방법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부자간 갈등은 다다히로의 숙부의 알루미늄 건자재 자회사를 둘러싸고 더 격화됐다. 요시다 다다오는 그 자회사를 지퍼 업체와 똑같은 방식으로 경영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요시다 다다오의 경영방식은 먹혀들지 않았다.
YKK 산하 수십 개 소규모 건자재 자회사가 특수 부품을 찾느라 서로 전화하는 데 몇 시간이나 허비하곤 했다. 혼란은 한동안 계속됐다. 지퍼 회사의 경우 원청 의류업체 인근에 작은 공장을 세우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러나 건축 현장 인근에 소규모 알루미늄 건자재 공장을 신축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소요 제품이 표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별 건축 현장에 필요한 건자재의 양도 적었다. 이런 제품을 주문생산하는 것은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90년 요시다 다다히로가 알루미늄 건자재 사업을 맡게 됐다. 그는 몇몇 지역에 유통센터를 세우고 재고관리 전산 시스템도 도입했다. 그 결과 자재를 주문생산해 건축 현장에 신속히 납품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알루미늄 건자재 사업은 YKK의 매출 ·수익 가운데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일본 ·싱가포르 ·홍콩을 주요 생산거점으로 삼고 있는 건자재 자회사들의 경영은 매우 견실하다. 하지만 YKK의 핵심 사업은 여전히 지퍼 제조다.
알루미늄 건자재 사업도 번창
요즘 YKK에 가장 큰 위협은 중국 업체들이다. 중국 지퍼 제조업체 가운데 1% 정도가 YKK의 80년식 자동화 기술을 역으로 분해해 활용하고 있다. 지퍼의 품질은 양호한 편이다. 따라서 YKK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과거 결코 해본 적이 없는 일까지 시도했다. 품질보다 낮은 가격이 우선되는 중국 시장을 겨냥해 새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값싼 지퍼 생산에 따른 이익 감소를 중국의 건축 붐에서 만회하고 있다. 상하이(上海)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등지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서 YKK의 알루미늄 창호 매출은 급증하고 있다. 최고의 최첨단 빌딩에는 고품질 제품이 필요하지만 중국의 경쟁업체들은 아직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레비 스트라우스 ·아나이키 같은 다국적 의류업체에 대해 갖고 있는 YKK의 독점적 지위까지 위협하지는 못하고 있다. YKK가 글로벌 기업고객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아디다스 사장이 요시다 다다히로에게 YKK의 구로베(黑部) 공장까지 날아와 스포츠 의류용 지퍼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YKK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디다스가 진출한 40개 이상의 나라에 똑같은 지퍼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디다스의 주문에 맞추려면 YKK의 88개 해외 공장과 일본 내 몇몇 공장을 모두 현대화하고 형판(型板) ·합금도 표준화해야 했다.
현재 56세인 요시다 다다히로가 YKK를 더 이끌어갈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YKK가 영원한 가족 기업으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네 딸 가운데 아무도 YKK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엄청난 상속세는 분명 네 딸의 YKK 소유권을 위축시킬 것이다. 요시다 일가는 모든 직원을 가족처럼 생각한다. 요시다 다다히로는 YKK 소유권이 전직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다 가족이 YKK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면 앞으로 Y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요시다 다다히로는 YKK가 변함없이 대가족처럼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퍼의 역사
1891년▶ 미국인 휘트콤 저드슨이 운동화끈 대신 사용하기 위해 지퍼를 발명했지만 초기의 지퍼는 고장이 잦았다.
1893년 저드슨과 발명가 루이스 워커가 유니버설 패스트너(Universal Fastener)를 설립했다.
1905년 저드슨이 현재의 지퍼와 유사한 모델로 개량했다.
1921년 지퍼라는 이름은 BF굿리치(BFGoodrich)가 덧신용 이동 잠금쇠에 사용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1927년 일본에서 최초의 지퍼가 만들어졌다.
1940~50년대 스위스의 발명가 조르주 드 메스트랄이 개 털에 달라붙은 가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벨크로(Velcro:일명 찍찍이)가 만들어졌다. 지퍼 업계로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많은 개량 지퍼에 대한 탤런의 특허권이 소멸됐다. YKK는 현대식 공장을 건립하고 개량 제품도 여럿 선보였다. 1960년대 듀폰이 처음 개발한 나일론을 소재로 이용한 지퍼가 등장했다. 나일론 지퍼는 금속 지퍼와 달리 빨리 열었다 다시 채울 수 있다. YKK는 나일론 지퍼 제조기를 생산했다.
1969년▼ 달나라 우주비행사의 우주복에도 YKK 지퍼가 달려 있었다.
1970년대◀ 레비 스트라우스가 일부 청바지에 지퍼를 달기 시작했다.
1980년대 YKK는 미국과 유럽에서 벗어나는 섬유 제조업체들을 좇아 이전하면서 세계 지퍼 시장 장악에 성공했다. 탤런은 시장점유율에서 YKK에 밀리고 말았다.
2003년 YKK가 세계 전역에서 소비되는 지퍼의 절반 정도를 판매하고 있다. 나머지는 1,000개가 넘는 중국 업체들의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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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움직이는 100大 CEO
1위: 국민은행 김정태
2위: 휴맥스 변대규
3위: 삼성전자 윤종용
4위: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5위: 포항제철 이구택
6위: 하나은행 김승유
7위: LG전자 구자홍
8위: 휠라코리아 윤윤수
9위: 태평양 서경배
10위: 엔씨소프트 김택진
(이하 가나다 순, 63명)
GE코리아 강석진
컴팩코리아 강성욱
두산 고종진
S-OIL 김선동
유한양행 김선진
커민스코리아 김종식
한국알카텔 김충세
로커스 김형순
다산인터네트 남민우
풀무원 남승우
LG화학 노기호
동양제과 담철곤
유한킴벌리 문국현
풍산 유진
LG건설 민수기
삼성코닝 박영구
두산 박용오
하이닉스반도체 박종섭
국순당 배중호
LGCI 성재갑
제일제당 손경식
하나로 통신 신윤식
한국아이비엠 신재철
핸디소프트 안영경
쌍용정보통신 염정태
신도리코 우석형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
한국정보공학 유용석
한국바스프 유종열
ING베어링증권 윤경희
우리금융지주 윤병철
한국중공업 윤영석
웅진닷컴 윤석금
현대캐피탈 이계안
현대백화점 이병규
농심 이상윤
한국전기통신공사 이상철
삼성화재해상보험 이수창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롯데쇼핑 이인원
신한은행 이인호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
LG캐피탈 이헌출
삼성전기 이형도
소니 코리아 장병석
존슨앤드존슨(아태지역) 장정훈
터보테크 장흥순
노텔네트웍스코리아 정수진
한섬 정재봉
SK텔레콤 조정남
효성 조정래
한국타이어 조충환
비트컴퓨터 조현정
PwC컨설팅코리아 최영상
한국휴렛팩커드 최준근
한미은행 하영구
나이키스포츠 하윤도
녹십자 허영섭
한국수출포장공업 허용삼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홍성원
남양유업 홍원식
메리츠증권 황건호
삼성증권 황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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