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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그를 만들며 스크랩과 직접 찍은 사진들이 있지만 여기는 직접 찍은 사진들을 시간 나는대로 재 정리하고자 한다.
쉔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부터 멸망하기까지 영고성쇠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600년 역사가 간직된 곳이다.)
오스트리아의 숲과 도나우 강을 끼고 있는 빈(Wien)은 아름다운 전원 도시이자 제국주의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국제적인 도시이다. 인구는 약 160만 명이며 시내는 23구로 되어 있고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 도로 주위로 도나우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음악의 도시인 빈은 멋진 볼거리들이 많은데, 그 중 오스트리아 빈 서역에서 남서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는 쉔브룬 궁전과 프라터(Prater) 공원이 유명하다.
쉔브룬 궁전은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의 여름 별궁으로 계획했는데 공사 도중 사망함으로써 중단되었다가, 50년 후 테레지아 여왕에 의해 재건축 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다. 쉔브룬이란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 Schö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하는데, 이 궁전은 16세기에 황제의 수렵장으로 시작하여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녀는 18세기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서 전제군주이긴 했지만 그 성격은 매우 소탈했다. 16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았던 그녀는 가정주부와 같은 전제군주였다. 그녀의 통치 스타일은 계몽주의적 통치의 좋은 본보기였으며, 따라서 프랑스적 취향이 짙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러한 가정주부적 성격과 프랑스적 취향은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이 쉔브룬 궁전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고전적 아치가 있는 주랑, 정자를 중심으로 기교를 부린 프랑스풍의 궁전 정원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지배자의 왕궁과의 거리가 멀 만큼 유연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전제군주적인 딱딱하고 점잖은 분위기가 그 당시 빈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오스트리아에 테레지아 양식이라는 건축 양식이 있었는데 이는 후기 바로크로서 남부 독일이나 프랑스 로코코 양식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쉔브룬 궁전의 외관이 바로 바로크 양식이나 내부의 가구 및 기타 설비 등은 그 당시 최신 유행이었던 로코코풍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바로크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테레지아 옐로우라고 불리는 황색의 외벽으로 된 거대한 3층 건물은 1,400개가 넘는 방들이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으로 화려하면서도 따스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 궁전 건물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서면 영화와 부귀의 상징인 궁궐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황제가 손님을 맞았다는 호두나무로 벽을 장식한 방, 중국 도자기로 장식하고 황금으로 테를 두른 거실, 남아메리카에서 수입한 장미나무 뿌리로 치장한 방들은 사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연회실로 프레스코화가 압권인 그레이트 갤러리,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실인 비외 라크롬, 그리고 침실, 식당 등 39개의 방만을 공개하고 있으며 곳곳에 금박의 장식용 틀로 꾸민 흰색 패널벽이 장관이다.
그 중 16번 '거울의 방(Spiegelsaal)'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의 공연 장면이 유화로 그려져 있는데,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배석한 가운데 모차르트가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에 대형 피아노가 놓여 있는 이 방에서 6세 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경탄케 했으며, 당시 어린 모차르트는 피아노의 뚜껑을 열 수 없어 요제프 1세가 손수 뚜껑을 열어 주었고 의자가 높아서 안아서 앉혔다고 한다. 연주가 끝난 후 모차르트는 같은 또래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딸이자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놀면서 자신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허영심이 강했던 그녀는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38세의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최후의 황제인 카를 1세가 퇴위 선언에 서명했던 곳도 이 궁전이었다. 즉 이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성기부터 멸망하기까지 영고성쇠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며 합스부르크가의 600년 역사가 간직된 곳이다.
이밖에 궁전 내의 궁정 마차 박물관(Wagenburg)에서는 1690년부터 1918년까지의 마차들을 볼 수 있다.
쉔브룬궁전의 넓은 프랑스식 정원과 분수
궁전 건물을 지나면 화단의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과 '넵튠의 샘'과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움 샘' 등 많은 분수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 열대 식물원, 로마의 폐허, 조각상 등이 한데 어우러진 멋진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끝에는 1747년 프러시아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해 세운 건축물인 글로이에테(Gloriette)가 있다. 정문 우측에 있는 궁전 극장(Schloβtheater)은 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바로크양식 극장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지휘를 한 적이 있으며, 현재는 여름철에 콘서트가 열리는데 런던의 하이드 파크 보다도 넓은 정원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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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우 강 주의의 야경,
도나우강 (-江)
요약
⇒ 다뉴브강
설명
볼가강 다음가는 유럽 제2의 강. 영어로는 다뉴브, 독일어로는 도나우(Donau),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루마니아어로는 두나리아(Dunărea), 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 이다. 독일 남서부에서 발원하여 중·동유럽을 동서로 흘러 흑해로 들어가는 국제하천이다. 전체길이 약 2860㎞. 유역면적 81만 7000㎢. 유역폭은 평균 280㎞. 수원은 독일 바덴지방 슈바르츠발트산지이다. 유로는 남독일, 오스트리아 북부,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을 동진하고, 부다페스트 북방 약 35㎞에서 남으로 굽어 유고슬라비아로 들어가고,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다시 동류하여 불가리아·루마니아 국경을 흐른다. 하류부에서는 왈라키아평야를 북상해서 루마니아·몰도바 국경을 남류하는 프루트강과 합류, 양국 국경을 동진하며 흑해로 들어간다. 지류수는 3000에 가깝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을 관류한다.
유량·삼각주
알프스의 습곡산지를 2개소에서 횡단하고 알프스·카르파티아산맥, 트란실바니아 알프스·발칸산맥을 나누는데, 빈 근처부터 하류는 평야부를 흘러 경사가 완만하며, 경사가 큰 산간하천으로서의 유로는 짧다. 다뉴브강의 평균유량은 계절적 변동이 적고, 빈과 하류부의 브라일라에서의 하황계수(河況係數;최대유량과 최소유량의 비)는 빈이 4.0 이하, 브라일라가 30.0 내외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량은 지극히 안정하다. 모든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약 750㎜, 유출률은 32.5%, 매년 공급되는 용해량은 2억 2500만t, 부유량은 5000만t이다. 이 물질들은 주로 하구 부근에 퇴적되기 때문에 삼각주의 끝을 매년 약 40m씩 전진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하구에서 상류 300㎞ 부근(루마니아의 칼라라시)까지는 삼각주 모양을 보이고 그물처럼 생긴 형상을 띠며 물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흑해에 들어가기 수십㎞ 앞에서 부채꼴로 열려진 3개의 지류(支流)는 북쪽부터 킬리아(Chilia)·슐리나(Sulina)·스핀투 게오르게(Sfintu Gheorghe)라고 불린다. 강폭은 100∼130m 전후이다. 킬리아지류를 다뉴브강의 본류로 치며, 현재 루마니아와 러시아연방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 삼각주지대에는 무수한 호수(발타라고 한다)가 있고 수로로 연결된다. 삼각주 거점은 루마니아의 툴체아(Tulcea)이다.
항행
삼각주가 발달해서 하류부의 수심이 가장 깊은 곳에서도 5∼10m로 얕고, 더구나 하상의 변화, 유로의 변전이 현저하므로, 흘수(吃水)가 깊은 배는 하구에서 160㎞ 상류의 브라일라까지밖에 못 간다. 브라일라와 그 하류 갈라티는 루마니아의 중요한 밀[小麥(소맥)] 수출항이다. 소형선박이면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지방의 울름까지 항해가 가능하며, 남독일에서 지류 알트뮐강을 거쳐 라인강 지류 마인강으로 연락하는 마인 다뉴브(루트비히)운하를 통해서 북해 쪽으로 항행이 가능하다. 흑해로 흐른다는 것과 소형선박이면 흑해와 북해간을 연결·항해할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항행하기에 가파르고 험한 곳은 유로 변화가 심한 삼각주지대와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와 발칸산맥을 가르는 계곡인 철문(Iron Gate) 근처의 협곡이다. 빈과 린츠 사이도 협곡을 이루어 운항하기가 쉽지 않다. 이 협곡 풍경들은 모두 세계적 경승지로서 유명하다. 하류부 삼각주 지대는 1984년 다뉴브-흑해운하(전체길이 64.2㎞)의 개통으로 다뉴브강과 흑해간이 약 400㎞ 단축되었고, 또 슬로바키아 중부에서 다뉴브·오데르운하가 완성되어 흑해와 발트해도 연결되었다.
국제하천 다뉴브강
다뉴브강은 관개와 발전에 이용되고 국제하천으로서 동유럽문화와 교역상 중요한 기능을 해 왔다. 통과국은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에 이르며 예부터 항행권을 둘러싸고 유역 여러 나라 사이에 중대한 관심과 분규를 일으켜 왔다. 그러나 통과국수가 많은 것이 대규모의 인공적 변화를 막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나라에만 흐르는 내륙하천으로 세계 제일인 러시아연방의 볼가강과 비교할 경우, 볼가강은 운하·수문·저수지의 연속으로 인공적 변화가 심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현저하게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그리스의 헤시오도스와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이미 다뉴브강 유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황제(재위 BC 27∼AD 14)는 제국판도의 북쪽 한계를 다뉴브강 기슭까지 확장하였다. 그 뒤 수세기 동안 다뉴브강은 로마제국과 이민족과의 경계선이 되었다. 그 결과 연안에 요새가 만들어져서 현재의 연안도시 기반이 되었다. 4세기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게르만족을 비롯하여 슬라브족·마자르인이 이 강 유역으로 이동·침입하였다. 14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강의 중·하류를 지배하에 넣었다. 18세기 베오그라드 주변지역은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군사·상업상 교통로로서 중요성이 증대하였고, 연안 여러 민족은 항행의 자유가 큰 관심사였다. 1856년 크림전쟁을 종결시킨 파리조약으로 드디어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고,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등 열강을 중심으로 한 다뉴브항행위원회가 창설되었으나 연안 여러 민족은 제외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도 연안 여러 민족의 다뉴브강 관리 주장은 베르사유조약으로 기각되었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진출로 다뉴브항행위원회는 해산되었다. 1948년, 사회주의정권하의 연안제국(동유럽)은 베오그라드에 모여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 무장의 자유, 관리위원회를 연안제국에 한정시킨다는 취지의 협정을 체결하고, 다뉴브강 관리위원회를 창설했는데, 하천공동개발이 활발하며,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가 협력하여 완성한 철문댐은 양국에 많은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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