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자연과 순수함 그리고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즐겨찾기 추가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8750)
방명록
타국 생활
나의 앨범 새 글이 있습니다.
간추린 사진
접사사진
앨범정리
진도개 (송천, 강산,대발)
사냥
진도개
천연기념물
서울, 서울.
일반폴더
원 적외선
영어
일본어
번역 모음
편리한 모음
젊은女의美
음악
JAZZ
좋은글
편지지
사랑,편지.글
동영상
사진
그림
자연
식물
조류
동물
황토
건축
인테리어
서각
목공예
도자기
그 시절
한국의미
국보, 보물
한국사.유물.유적
불경//불교음악
고대문명.
심령,예언
여행을 떠나요
세상에 이런일이....
웃고 삽시다
생활의 지혜
건강
약재
민간요법
윈도우 활용
블러그 사용방법
표지
2009 12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오늘 전체
방문자 98 616040
구독자 0 292
댓글 0 1446
참조글 0 306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야자나무
- x04ji
- 백만돌
- kmstar71
- UCC조아
최근 댓글 전체보기
접사는 배경을 잘 잡아..
사진을 좋아하다보니 좋..
선명함도 좋구여&quo..
감성적인 마음이 아니시..
감사합니다. 미흡한점이..
최근 참조글 전체보기
엔니오 모리코네 아레나..
Daphne rosen..
Rape porn pi..
Brutal facef..
Xxx brutal c..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개설일 : 2004/03/30
 

[스크랩] 아시안의 서부 개척사 -사건 후 애국자들의 뒷이야기-

2009.11.30 22:31 | 그 시절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4122 주소복사



전명운(
1884 6월 25 1947 11월 19)

서울 태생이고 1903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1904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하였다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 회원으로 그날 공립회관에서 스티븐스를 처치하겠다는

소리를 지르고 훼어모트 호텔에서부터 사진을 가지고 스티븐스를 미행하였다

스티븐스는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어 쉽게 구별 할 수 있었다



스티븐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즉시 손수건을 감싸고 있던 리벌보 권총을 발사 하였는데

불발로 그쳐 버려 내침 김에 권총 손잡이로 면상을 갈기고 피신하려는데 등이

득끔하더니 어깨 힘이 빠지며 쓰러지게 되었다


곧이어 두 방의 총성이 귓전에 들려 왔다

 

장인환이 쏜 총에서 발사 된 소리였다

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을 한 적이 없이 각자 민족의 원수를 처단하려던 것이다

 

장인환 (1875 3월 30 1930 5월 22)


평안남도 대동군 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고아로 자라다 1905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여 한인사회에 나타나 대동보국회에 가입하고

망국의 길을 걷는 나라를 걱정하다 분연히 스티븐스를 처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방을 같이 쓰고 있는 친구에게 총을 구입하고는 그자리에 나온 것이다

 

장인환 의사가 아니었으면 그 거사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스티븐스와 전 명운은 병원에 실려가고 장인환은 보석조건 없이 시 경찰국 감옥에

수감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서로 연행된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사살하게 된 동기를 한글성명서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1865년부터 발간된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큰 신문사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발표되었다.

 

한국인 수백만이 그의 모함에 빠져 죽었는데

내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누가 죽이겠소

그는 죽어 마땅한 자 입니다 그가 만약 살아있다면

또다시 수백만의 한국인은 죽음을 당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포의 넋을 달래고

동포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그에게 총을 발사 한 것입니다

그 것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죽을 장소와 때가 언제인 것을 아는 사람이 할 일입니다

그를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 것이 나와 나의 나라의 영광이며 행복인 것이지요






<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여러 신문들은

장인환과 전명운을 애국자, 스티븐스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언론보도의 대부분 논조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의거를 정당하고 애국적인 것으로 사건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기사까지 등장하였다.

이기사는 한국에 까지 전달 되어
대한 매일신보가 계속 기사를 실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타의에 의하여 조국 땅을 떠난 독립운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훗날 만난 두 애국자들



부상을 당한 전명운 의사는 장인환 의사가 재판을 받는 도중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되고 나서

당시 안중근의사를 포함하여 조선에서 쫓긴 의병장이나 의병, 독립 운동가들이 두만강을 넘어 상당수가 망명하여 살고 있는 시베리아 동남쪽
블라디보스토크, 포크라니티나, 노보케이프스크 
도시 등 연해주에서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한동안 살았다

그는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멕 휠즈라고 개명을 하고 1920년 결혼 후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세탁소를 운영하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딸 둘을 고아원 맡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인동포들에게 애국 강연을 하면서 후원금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항일 운동을 하다 조국이 해방 된 194711월 사망하였고 로스엔젤스

위티어 묘지에 안장 되었다


장인환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 되어 재판이 진행되자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

한인단체들이 성금을 모아 3인의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남가주 대학에 유학중인

신흥우는 통역을 맡았다

일본과 피해자 측도 변호사를 선임하여 장인환의사가 극형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그의 재판을 맡은 변호사 네이던 코플랜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애국적
정신병(patriotic insanity) 이론을 근거로,

"이 사건은 지독한 애국의 환상 속에서 저지른 정신적병 문제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

변호하였다

 

배심원의 판결은 그 변호내용을 일부 인정하여 장인환의사에게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25년의 형을 받게 하였다

장의사는 샌퀸틴(San Quentin)형무소에서 10년간 복역 후 1919 1월 가석방되었다


장인환 의사가 출옥하고 전명운의사와 함께 감리교회 앞에서
앞줄 가운데 (머리가 좀 벗겨진 두분 )

그리고 1927 4한국에 일시 귀국한 뒤, 평양에서 결혼을 하였으나 일제의 강압 속에

견디다 못해 홀로 미국으로 들어 와 외롭게 살다 1930 522일 자살로 생을

마치었다

 

두분 의사들은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어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스크랩] 아시안의 서부 개척사 -한국인 유학생-

2009.11.07 10:55 | 그 시절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4080 주소복사

1882년 조선은 구미 제국 중에 최초로 미국과 수호 조약을 체결 한 후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탈피하고 신생 자주 독립국가로 세계 사회에 일원이 되어
국호를 대 조선국(
大朝鮮國) 이라 선포하였다

미국과 상호 수도에 전권 공사를 상주 시킨다는 협약에 따라 미국은 서울 정동에 상주
공사관을 세웠으나 조선은 청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문제였지만 워싱턴에 상주 공사관을 
운영할 재정적 능력이 없어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절단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워싱턴에 간 보빙사는 한국 전통의 의식으로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였는데 서양인의
눈에는 색다른 모습으로 비춰지었다


이 사절단을 보빙 사절단이라고 하는데
단장은 당시 조정 안에 실세였던 민영익이 되었고 그를 따라 간 수행원들 중에 첫번째
미국 유학생이 태어 난 것이다


미국으로 떠날 때 일본에 들려 기념 사진을 찍었다
뒤에 좌측 부터 현홍택 ,궁강 항차랑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앞줄 좌측 부터 퍼시발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개화파로 지칭되는 이들은 이렇게 함께 미국길을 떠났으나 급진 개화를 원하는
젊은 층과  후에 청나라로 기운 단장 민영익과  정치 색갈이 서로 달라 일년 뒤
갑신 정변이라는 서로 목숨을 앗아가는 참극을 벌이게 된다 
뒷줄 왼쪽 네번째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

유학길을 떠날 때는 조선의 국민으로 떠나 왔으나 국호는 대한 제국으로 바뀌었고
대한 제국의 국민으로 떠난 유학생들의 귀국길에는 돌아 올 내나라가 없어 진 것이다

유학생 일부는 없어진 나라에 돌아 와 일본인들의 통치 속에 적당히 어울려 살았지만   
대다수의 신 문물을 접하고 배운 유학생들은 조국을 잃은 무지한 한국인 미국 이주
노동자들을 깨우쳐주고 이끌며 함께 조국을 찾기 위한 험하고 긴 여정의 애국의
길을 걸었다 


유길준
(1856-1914)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
(1856-1914)


1882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유길준은 민영익을 수행하여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여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훗날 유럽을 방문하고 서유 견문이라는 책을 썼다


보스턴 대학


변수

변수의 묘비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행으로 미국으로 간 변수(1861-1891) 갑신 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91
년에 매릴랜드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졸업자가 되었지만 안타갑게 졸업 4개월 후 1891년 교통(열차)사고로
숨졌다
.


메릴랜드 대학



이강

1900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 이강은 2명의 시종을 대동하여 버지니아주의
로아노크대학에서 수학중 의친왕에 책봉되고 1905년 귀국하여 적십자총재를 역임하였다



버지니아 로아노크 대학의 옛사진


하워드 대학의 유학생들 1896년


가운데 뒷줄에 여학생도 보인다

임병구, 이범수, 김현식, 안정식, 여병현 등이
서광범 공사의 도움으로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에 유학.

하워드 대학

서광범

서광범은 보빙사절단 종사관 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유럽등지를 시찰한 후
돌아가 개화파에 가담하여 주동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계속된 정부의 추적을 피해 1885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정부
기관지에서 글을 쓰며 어렵게 살았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받고 연방정부 공무원이되어  교육국 인종 학과에 번역관으로
일하기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연루자 사면령이 내려지고 그의 능력을 인정한 조정에
발탁되어 법무대신이 된 그는 박영효와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에 밀려 미국
워싱턴 주재  전권공사로 나오게 되었다
결국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 앉아 망명생활로 일생을 마치었다

윤치호



윤치호 는 일본에 유학 중 영어를 배워 초대 미국 주한 공사 후트의 통역으로 1883
귀국하였다가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도미 유학하여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
년간 수학하였다


에모리 대학

밴더빌트 대학


서재필
1884년 김옥균과 시도한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1885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9년 워싱톤대학에 입학하고 1892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의사

되었고 1890
년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독립운동가


조지 워싱턴 대학


김규식

1896
년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버지니아의
로아노크대학(BA) 1904년 프린스톤대학원(MA)을 마치고 귀국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프린스턴 대학


안창호

오랜지 농장에서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미국 선교사 밀러의 주례로 결혼하고 다음 날 부인 이혜련과
같이 1902년 도미유학
.
도산 선생의 학력은 특이 하다
미국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고 성년의 나이에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무지한 한국 이민 노동자들 속에 직접 들어가 정신적인 교육을 시켰다


이대위


1903년 도미하여 오래곤의 포트랜드학교와 UC Berkeley, 태평양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로서 안창호와 같이 친목회, 공립협회, 흥사단, 국민회 창설에 이바지하고
상항감리교회 목사, 신한민보 편집국장 역임, 한글 인터타입식자기 발명,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청원하여 한일합방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한국 망명객 451명을 미국에
망명 유학생 자격으로 여권도 없이 오도록 하였다. (미주 100년 주년 발자취에서 발췌)

UC Berkeley

이승만
특별히 설명이 필요 없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1904년 유학, 1907년 죠지와싱톤대 졸업 1910년 하바드대 석사, 1910
프린스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화려한 경력을 소유하였다
두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의 정치 철학이 서로 다른 것 처럼 
학력도 정 반대이다


하버드 대학

박용만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이 세운 상동교회의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5년 도미하여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군사학(BA)을 전공하고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시키며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북경에서 암살 당했다 


네브라스카 대학 옛 건물



신흥우

신흥우는1904 USC재학 중 LA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졸업 후 귀국하여 배재교장 역임.


남가주 대학USC


 
당시 유학생들은 유학을 떠나고 나니 을사 보호 조약과 뒤이어  한일 합방등 
급변하는 세월 속에 내 나라가 없었졌다 그들에게는 그저 태어 난 강산 만 있었을
뿐이었다



갑신 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을 떠난 젊은이 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그들의 모습은 무슨 비밀 결사대 같이 보인다)


대한제국의 여권과  나라가 없어진 후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한 여권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다음 페이지 다음 10번째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