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1884년 6월 25일 ∼ 1947년 11월 19)

서울 태생이고 1903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1904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하였다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 회원으로 그날 공립회관에서 스티븐스를 처치하겠다는
소리를 지르고 훼어모트 호텔에서부터 사진을 가지고 스티븐스를 미행하였다
스티븐스는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어 쉽게 구별 할 수 있었다

스티븐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즉시 손수건을 감싸고 있던 리벌보 권총을 발사 하였는데
불발로 그쳐 버려 내침 김에 권총 손잡이로 면상을 갈기고 피신하려는데 등이
득끔하더니 어깨 힘이 빠지며 쓰러지게 되었다

곧이어 두 방의 총성이 귓전에 들려 왔다
장인환이 쏜 총에서 발사 된 소리였다
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을 한 적이 없이 각자 민족의 원수를 처단하려던 것이다
장인환 (1875년 3월 30일 ∼ 1930년 5월 22)

평안남도 대동군 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고아로 자라다 1905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여 한인사회에 나타나 대동보국회에 가입하고
망국의 길을 걷는 나라를 걱정하다 분연히 스티븐스를 처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방을 같이 쓰고 있는 친구에게 총을 구입하고는 그자리에 나온 것이다
장인환 의사가 아니었으면 그 거사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스티븐스와 전 명운은 병원에 실려가고 장인환은 보석조건 없이 시 경찰국 감옥에
수감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서로 연행된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사살하게 된 동기를 한글성명서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1865년부터 발간된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큰 신문사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발표되었다.

한국인 수백만이 그의 모함에 빠져 죽었는데
내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누가 죽이겠소
그는 죽어 마땅한 자 입니다 그가 만약 살아있다면
또다시 수백만의 한국인은 죽음을 당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포의 넋을 달래고
동포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그에게 총을 발사 한 것입니다
그 것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죽을 장소와 때가 언제인 것을 아는 사람이 할 일입니다
그를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 것이 나와 나의 나라의 영광이며 행복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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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여러 신문들은
장인환과 전명운을 애국자, 스티븐스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언론보도의 대부분 논조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의거를 정당하고 애국적인 것으로 사건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기사까지 등장하였다. 이기사는 한국에 까지 전달 되어 대한 매일신보가 계속 기사를 실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타의에 의하여 조국 땅을 떠난 독립운동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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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만난 두 애국자들
부상을 당한 전명운 의사는 장인환 의사가 재판을 받는 도중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되고 나서

| 당시 안중근의사를 포함하여 조선에서 쫓긴 의병장이나 의병, 독립 운동가들이 두만강을 넘어 상당수가 망명하여 살고 있는 시베리아 동남쪽 블라디보스토크, 포크라니티나, 노보케이프스크 도시 등 연해주에서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한동안 살았다 그는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멕 휠즈라고 개명을 하고 1920년 결혼 후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세탁소를 운영하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딸 둘을 고아원 맡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인동포들에게 애국 강연을 하면서 후원금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항일 운동을 하다 조국이 해방 된 1947년 11월 사망하였고 로스엔젤스 위티어 묘지에 안장 되었다 |
장인환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 되어 재판이 진행되자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
한인단체들이 성금을 모아 3인의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남가주 대학에 유학중인
신흥우는 통역을 맡았다
일본과 피해자 측도 변호사를 선임하여 장인환의사가 극형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그의 재판을 맡은 변호사 네이던 코플랜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애국적
정신병(patriotic insanity) 이론을 근거로,
"이 사건은 지독한 애국의 환상 속에서 저지른 정신적병 문제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 고
변호하였다
배심원의 판결은 그 변호내용을 일부 인정하여 장인환의사에게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25년의 형을 받게 하였다
장의사는 샌퀸틴(San Quentin)형무소에서 10년간 복역 후 1919년 1월 가석방되었다

장인환 의사가 출옥하고 전명운의사와 함께 감리교회 앞에서
앞줄 가운데 (머리가 좀 벗겨진 두분 )
그리고 1927년 4월 한국에 일시 귀국한 뒤, 평양에서 결혼을 하였으나 일제의 강압 속에
견디다 못해 홀로 미국으로 들어 와 외롭게 살다 1930년 5월22일 자살로 생을
마치었다
두분 의사들은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어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