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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스크랩] [플래쉬] 사물놀이 연주

2009.09.26 17:12 | 일반폴더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3935 주소복사


사람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악기를 연주합니다.

[스크랩] 중국, 일본에서 보는 이순신

2009.09.26 13:17 | 일반폴더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3920 주소복사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리고 그 외 일본사관학교(육사.해사) 장교 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이죠.

이 책은 크게

-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 2권 .

-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 1500~1600년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 7권으로 나누워진 책입니다.

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장군님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것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등...

특히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겠지요...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님 탄생 때 온다는거....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건 한산도대첩때인데...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랄까 그런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 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죠.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 탄생일때 오는가 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장수였던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것이다..

더군다나 그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것이었다.

일본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수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 중

단 한명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제갈공명.손자.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것이다.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대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 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수밖에 없는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강의가 끝났을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중 한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징키스칸도 그러했고,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셧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7. 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한번 강력한 이순신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

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님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훗날 청나라)을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왕선조와 조정대신(이순신의 반대파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되고

비밀협약을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않았을까...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님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십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 장군님께 질문을 던져 봅니다

장군님 당신은 다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 거라는 걱정이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신건가요?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장군님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모든일을 주관 하셨지만

미약한 인간의 몸이셨던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당신 앞에서 한줄기 눈물을 흘립니다...장군~~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책이 총32권...


그것도 한국 학자가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된 책......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더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 었는지...

 

http://www.selffund.co.kr/community/board/BoardRead.asp?BoardID=1769&BoardInfoID=13&Page=23&SearchType=&SearchKey=

[스크랩] 탤런트 전원주 씨가 삶에 관해 언급한 감동적인 글입니다

2009.09.26 12:20 | 일반폴더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3905 주소복사

탤런트 전원주 씨가 삶에 관해 언급한 감동적인 글입니다

외모의 핸디캡을 뚫고 성공한 연예인으로서 원숙한 연기,
모범적인 사회활동을 전개 중인 66세의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나의 삶 / 전원주 (탈렌트)

너무 많은 것들이 힘들게 보이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연예인 세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 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 게 어릴 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
5학년 때부터였는데 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 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밥도 짓고 등등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 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 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 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 때도 뿌리 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생각해보라. 살짝만 힘을 줘도 금방 뽑히지 않는가?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했다. 떡도 팔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 싼 상태에서
"원주야~"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쥐어박고 꼬집고 꾸짖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서울 가면 너 하고 싶은 것 전부 해 줄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포목상을 내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을 만큼 수완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주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보았다.
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춰 보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뭔가를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주스를 마시는 사이 어머니는 옷감을 몇 마! "부~욱" 자르면서
이게 제일 좋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손님은 "어 어~" 하면서도 웃고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찬스에 강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무엇이든 간에 대접을
하면 반드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성격이 맞아야 뭐라도 잘 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목소리도 남자 같고 성격도 화끈 털털했던 반면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목소리도 여자 같았다. 어머니 같으면 손님이
최종 결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를 주도해서 옷감을 부욱 자르고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손님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꼼짝 않고
가위만 들고 서있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가 끝난 후에 물건을 다시 정리해서
가지런히 재진열하고 회계 정리를 하고 하는 일에는 특출하셨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칠 때면 어머니는 이미 이것 저것 따와서 점수가
나 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따와서 무릎 앞에
깔아 놓았던 오끗 짜리나 열끗 짜리 몇 장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을 가지런히 잡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의 순서도 큰 일을 먼저 해야 빨리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학 출신(숙명여대)이라고 하면
목젖이 보이게 놀라고, 이렇게 작은 전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보고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훈육선생이 그걸 보고 "너희들 똑바로 서
어금니 꽉 깨물어"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학생들도 뺨 정도는
다 때렸으니까.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어쨌거나 말은 인격이라고 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은 한결같이 잘해야 한다. 운전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곱게 말하다가
다른 운전자가 끼어 들기라도 하면 바로 험한 얘기가 튀어나온다.
그걸 애들이 배우는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만
자녀에게는 산 교육이 되는 것이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인 세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흐지부지 목적없이 살면 절대로 좋은 길로 못 가고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 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여러분들의 계약 활동하고 똑같지 않느냐.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세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통상적으로 남자가 더 떨었던 것 같다.
밥을 씹으면서 연기하면 대사를 까먹을까 봐 씹지도 않고 얘기하다
밥알이 다 튀기도 하고...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가지 외우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과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나절에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김을동 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전원주 = 가정부, 김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 날락 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 나게 놓아야
하는 등,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를 켜면 안 나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맞고는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 2초면 사라진다..."등등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이 년아 다 괜찮은데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 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마라톤의 원칙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목표를 정하고 속도 조절하면서 꾸준히 뛰는 것.
둘째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셋째 합창의 원리이다.
사람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
노래방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인가? 마이크 독점하는 사람,
남이 노래 부르는데 꼭 끼어 들어서 노래 망치는 사람,
악만 바락바락 쓰는 사람. 흥겨운 분위기에 처진 노래 부르는 사람.
넷째 등산의 원리이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 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 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중얼중얼 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할 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순간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마 귀신 나올 거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 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 때를 기다려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하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 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깊게
남아있다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이다'라는 의견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죽을 힘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 내신 분이셨는데
막상 본인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셨다. 수금하러 갔다가 언쟁 중에
쓰러지셔서 중풍을 맞고 13년 8개월을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당뇨,
실명까지 와서 별세하셨다. 어머니 상을 치를 때 극중 내 남편역인
김인문 씨가 와서 마치 사위처럼 모든 일을 다 치뤄 주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바뀐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헌신적인 도움을 받고 나는
"이것이 사람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도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여러분도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시원한 웃음과 노래가 제격이다. 아울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돕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 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 강연 2번, 녹화 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이 없을 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 보인다. 얼굴이 이뻐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이쁘면 양귀비로 보인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난 꿈이 또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66세이지만 80세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이 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스크랩] 터키사람들은 왜 한국을 사랑할까??

2009.09.26 11:13 | 일반폴더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3899 주소복사





'터키'라는 국가를 말하면 우리는 이스탄불, 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 여러 수식어를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나라와 터키가 왜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 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느냐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6.25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파병 된 15,000명이 넘는 터키군 대부분이 자원병이였으며 그중 3,500명이 사망(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할 정도로 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요..


 


터키에 가면 관공서나 호텔의 국기대에 터키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터키인들 역시 한국인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 라 부릅니다.
또, 한국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은 헝가리 사람들 역시 한국이랑 헝가리랑 sister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여기, 한 아침 라디오방송에서 나온 이야기를 잠시 참고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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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6.25 때부터가 아니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 10월 16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대전지역 98.1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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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유럽인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고반점도 있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고구려 멸망 후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됩니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가 됩니다.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 즉 실크로드(서안) 부근까지가 영토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까지(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된 민족입니다.


돌궐족은 중국의 대부분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서지방은 수나라에 점령되고 돌궐은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영토를 잃고(소수민족 모두 독립) 지금에 터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와...터키 원래 좋아하던 나라였는데 이 글 읽고나서 정말 터키에대해서 좀 알게 되었네요 ㅎㅎ


 


유익한 것 같아서 퍼왔어요 ㅎㅎ

[스크랩] 간만에 정말 재밌는 플래쉬 게임

2009.09.26 11:05 | 일반폴더 | 바람

http://kr.blog.yahoo.com/sd961219/13898 주소복사

http://armorgames.com/play/2919/sin-mark

활을 이용해서 적들을 죽이는 게임 입니다.

룬들의 조합으로 스킬을 만들 수 잇구요,
또한 뭐 또 줍는게 있는데 그걸 착용함으로써 기본적인 능력들을 조금 업 시킬수있습니다
(예 데미지업, 크리티컬업, 레어 룬 획득 확률 업)

빨간 글씨(?)가 써져 있는 바위에서 스페이스를 누르시면 룬을 획득하실 수 있고
아까 줍는거라고 설명 드렸던 것은 움직이면서 주으시면됩니다. ㅋ

활 쏘는건 다른 게임이랑 비슷하게 마우스 클릭으로 힘을 조절하시면되고

a,d 키를 이용해서 왔다갔다 움직이시면되요~



스킬 조합이 정말 재미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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