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고대사에서 미스터리로 불려왔던 백제 초기의 한성문제에 큰 분수령이 있을 듯 하다. 전에 뉴스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바로 서울 강동구 한강변 일대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의 10여개의 전방후원분 고분의 발견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작은 동산, 야산, 구릉 정도로 보아왔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 고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연대도 기원 4세기인 일본의 전방후원분 시기보다 더 빠른 시기인 기원 1세기다. 서울 한강변 전방후원분의 내부를 레이저로 매장물 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하 3미터 지점에서 돌로 만든 방, 즉 석실이 발견됐고, 그 안에는 유물이 확인됐다. 붉은 부분은 금과 동으로 만든 유물을 나타내고, 하늘색 부분은 토기나 자기 등의 유물로 추정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서울 강동구 한강변의 전방후원분(위성사진)

▲ 장고형무덤(전방 후원분)-원 안은 시체를 안치하는 곳이고 사각 안은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추정
이 전방 후원분은 그 동안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남 영산강 지역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16기가 발견됐지만 모두 일본보다 규모가 작고 나중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일본학계는 이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일본의 분묘 문화가 한반도로 수출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까지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서울 한강변에서 발견된 초대형 고분은 이같은 일본의 논리를 뿌리채 흔드는 결정적인 고고학적인 근거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 백제황족들이 건너가 살면서 일본왕노릇을 하며 백제본국의 통제를 받는 담로지역으로 백제의 영역이나 마찬가지 지역인 한반도 남부지역을 침략하여 점령할 자체 능력도 없었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은 마땅히 해당사항이 될 수 없다.
일본열도와 백제와의 관계성과 관련한 [일본서기]기록을 보자.
[일본서기 웅략23년에 보면 "4월 왕(백제 문주왕)이 죽었다.곤지왕의 다섯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유년에 총명하므로...군사500을 자기나라(백제)에 호위하여 보냈는데,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기록내용과 관련한 당시 한반도 백제본국의 상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백제 공격으로 父王 개로왕 전사=>웅진(공주) 천도.정치적 불안 끝에 호족반란으로 개로왕 동생 문주왕 피살▶ 정국 혼돈 상태=>개로왕이 죽자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개로왕의 황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여 무녕왕(사마)을 친아들처럼 키운다. 문주왕이 피살당하자 일본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은 자신의 친아들 동성왕 (479-501)을 왜군500명을 호위하게 하면서 한반도 백제본국의 황제로 보낸다.=>동성왕도 귀족에게 피살당하자 일본열도에서 자란 개로왕의 아들 사마가 역시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한반도 백제본국의 황제로 등극하니 바로 무령왕(501-523)이다. 이후 백제의 국력이 회복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를 보좌하는 백제황족의 나라였던 것이다.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과 그의 세력들이 살았던 오사카 간논즈카의 고분규모에 비추어 당시 곤지계가 규슈,오사카 일대를 무대로 야마토 왜의 주요 정치세력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녕왕은 백제가 파견한 왕자들로서 야마토 왜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본국 백제가 위험에 빠지자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 일본보다 시기가 늦은 전방후원분의 무덤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백제를 보좌한 일본의 백제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그래야 전남 영산강 지역의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의 분포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열도와 활발한 무역과 교류관계을 가지고 있던 서남해 지역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토착마한세력(토착 마조선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이동한 이후 제압하고 복속시켜야 할 세력이였다는 의미가 된다.
1991년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장년리 장고산 마을에서 전체 길이가 70m에 이르는 대형 무덤이 발견됐다. 이 마을 사람들은 무덤을 장고 모양의 산이라 여겨 장고산이라 불러왔다. 이런 이유로 이와 구조가 같은 무덤의 명칭이 ‘장고형 무덤’이라 정해졌다. 해남 지역의 장고형 무덤은 공식 측량 결과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불리는 무덤과 같은 양식으로 밝혀졌다. 전방후원분은 글자 그대로 앞은 직사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무덤이다.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장고형 무덤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반대로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 일본 고대사의 핵심 유적으로 본다. 일본에게 전방후원분은 왕의 무덤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호남지역의 영산강유역에선 일본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많이 발견된다. 영산강 유역에선 장고형을 비롯한 삼각형, 원형, 타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어 장고형 무덤의 원류가 한반도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무덤은 일본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만일 일본에서 전해진 무덤이라면 영산강 지역을 일본의 지배지로 해석할 수도 있어 한일 고대사의 논쟁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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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영산강 일대에 나타나는 장고모양의 고분군들(14기)의 기원과 그 주인에 대한 문제는 한.일 양국의 논쟁거리다. 일본은 이 무덤양식이 일본의 보편적인 양식인 전방후원분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을 들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고대사 문제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2. 일본 측의 주장
1) 형태
전남 함평의 신덕 고분을 비롯한 영산강 일대의 장고형 무덤은 일본 고대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전방후원분과 형태 면에서 유사하며, 그 규모로 볼 때 거대국가권력인 4세기 후반의 야마토조정과 연관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또한 내부가 붉은 색인 것도 일본고분의 주요특징이다.
2) 출토품
한국 검보다 20 센티 정도 긴 일본형 대도가 발견되었고, 1994년 발견된 광주 명화동 고분의 경우 일본 하니와 토기의 특징인 몸체에 구멍이 난 원통형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본의 이 지역 지배의 흔적으로 볼 수 있고,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이다.
(* 임나일본부설:2000년에 경남 고성의 송학동 고분이 발굴되었다. 그 모양과 내부의 붉은 칠, 그리고 출토된 토기가 일본 고분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는 사슴뿔재료로 만든 칼자루 또한 발견되자, 일본은 이를 근거로 일본이 옛 가야시대에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 일본 교과서 중에는 임나일본부설을 채택한 것들이 적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송학동 고분은 옛 가야의 고유한 무덤 형태인 삼봉 형식의 무덤이 가운데 부분이 주저 앉으면서 전방후원분의 형태로 변형된 것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3)무덤의 주인
고분전문가 동지사 대 모리 고이찌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한(마한)'이라는 지역이 영산강 일대였을 것이며 이 지역은 백제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구역으로 일본인들이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중간기착지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덤의 주인은 막강한 세력을 가진 독자적 성격의 외래 일본인이었다는 주장이다.
3. 한국 측 반론
1) 형태
일본사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유한 고대무덤양식인 방형주구묘의 영향을 받은 일본만의 독특한 무덤형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주구묘의 오래된 형태가 한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고 있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서 발굴된 주구부 석관묘(도랑이 있는 석관묘) 15기의 경우 삼각만입석촉, 이단경식석촉 등 유물로 보아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된 일본 효고(兵庫)현의 주구묘(기원전 445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도 최대인 것으로 밝혀졌다. 주구묘는 주위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봉분을 쌓기 위해 흙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덤 주위의 흙을 파낼 수 밖에 없는데 이 때 도랑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구묘가 일본 무덤 만의 특수한 형태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2) 출토품
위의 일본측의 주장처럼 일본의 특성을 지닌 물건들이 출토된 것이 사실이나, 백제산 금관과 장신구들도 발견되었다. 이 물건들은 백제에서 봉신이나 제후에게 하사했던 물건들이었다.
3) 무덤의 주인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무덤을 축조했던 사람들은 일본에서 온 외래무장세력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의 관계성이 없는 독자세력이기 보다는 일련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미 4-5세기에 백제인들이 일본에 진출했다는 증거들이 있다.
일본의 나라와 오사카 인근에 소재한 와카야마 시 주변에는 백제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이 전체 450기 무덤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발굴된 토기와 기와들은 영산강 일대의 출토품들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일본 서기에는 '기 씨'와 '시나노 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러한 언급 중에 백제의 벼슬인 나솔, 시덕, 덕솔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벼슬이 나타내는 신분은 최고 귀족과는 거리가 있는 일반적인 성격의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가?
이 지역은 고야산 금송으로 유명하였으며 이는 황족 목관 제조에 사용되었다. 또한 나가노 지역은 시나노 씨의 본거지로서 전 일본 말 사육지 40개 중 20개가 여기 분포할 정도로 말생산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말 사육형태가 백제식이었음이 밝혀졌고 발견된 시신에 대하여 인골 유전자 감식을 시행한 결과 50세 전후의 한반도 도래인임이 밝혀졌다.
한반도에서 건너갔던 외계백제관료들이 이미 이 시기에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야마토조정과 백제 사이를 매개하면서 일본의 특산품을 백제에 공급하는, 백제의 이익을 위한, agent 역할을 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벼슬명과 금동관 및 장신구 등 백제의 하사품 발견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일본이 아닌 영산강 지역에 자리를 잡고 무덤을 축조하였는가?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의 한반도의 정세를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고구려의 남하정책(475년)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밀려나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그 때 영산강 지역에는 백제에 저항하는 마한(한반도 토착마한세력)의 잔존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분발굴 시 전방후원분 외의 다른 형태들이 발견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 때 백제는 고구려와의 경쟁 외에 마한세력으로부터의 위협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본에 있던 백제계 유민들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영산강 일대를 제압 관할하게 하였던 것이다.
3.종합분석(윤복현의 견해)-장고무덤의 실제 주인은 토착 마조선(마한)인들이다.
백제가 영산강이남까지 통합한 시기는 백제가 서울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4-5세기로 봐야 한다. 영산강지역 전방후원분 무덤에서 백제관료들의 장식구가 출토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4-5세기 이전에는 충청도이남은 마한지역이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여기서 마한이라고 할 때는 중국 요서지역에 위치한 기자조선이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세력이 해로를 따라 남쪽(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내려와 스스로 한왕(한반도 왕)이라 칭하고, 개국한 마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래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 마한세력 기자조선세력에 밀려서 일본열도로 이주했다고 봐야 한다.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장고무덤양식은 바로 이들 토착마한세력의 무덤양식이라고 해야 맞다. 일본열도의 초기 장고무덤은 쿠슈지역에서 발견된다. 쿠슈지역은 일찌기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던 토착마한 해상세력이다. 이들을 [후한서]에서는 한반도3한과 경계를 하고 있는 한반도 남부해안지역의 <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한반도 서남해 해상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역적으로나 거리상으로도 일본문명은 한반도문명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의 하나의 네트워크공동체로 단군3조선 중 평양을 왕검성으로 삼는 마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단군3조선이 붕괴되기 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해상을 통하여 문화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중에서도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교류했고, 가장 먼저 영산강문화가 직수입되는 곳이 바로 큐슈(구주)지역이다.
따라서 단군3조선이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활발히 교류하다가 단군조선이 붕괴되고 마한(한반도)통치체제도 자체 붕괴되면서 중국 요서지역에서 최씨 낙랑국이 북한 평양으로 이전하였고, 옥저도 함경도지역으로 이전하였고 기자조선세력도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전하여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고 마한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마한으로 개국하고 54개 소국(읍단위:총 인구 50-60만 정도)이 분포된 한반도 서부지역을 장악했다. 이 때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마한세력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장고무덤은 일본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일본전역에 확산되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기준세력은 대가 끊어져 다시 마한인이 진왕이 되었다고 기록된 점으로 마한토착세력은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韓傳>에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한 후 남은 무리 수천인과 같이 바다 길로 도망하여 (한지로 가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 후는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결국 기자조선세력은 토착마한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일본열도는 오래전부터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세력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제를 도왔던<왜>로 기록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토착마한세력은 바다를 지배하는 강력한 세력이였음이 분명하다.
마한54개 속에 백제국이 들어 있다. 이 때 백제는 어하라(비류백제)지역에서 마한지역으로 들어와 마한왕에게 거주할 땅을 분양받은 고추모 아들 온조세력의 <십제>라 할 것이다. 나중에 어하라지역에서 비류세력이 온조세력에게 통합되고, 한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요서지역에서 고구려 고추모세력과 전쟁을 벌이던 고두막후예 중 구태세력이 100가족을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평안도 지역(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백제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잔>으로 기록된 구태세력은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잔>으로 기록된 온조의 십제를 통합하는데, 그 시기가 국가의 기틀을 잡은 고이왕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문헌에는 백제시조는 구태이고 구태가 동이강국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삼국사기-백제본기>에 온조는 아버지 동명성왕(고추모)과 국모 소서노를 시조로 제사지냈다. 제사의 대상인 시조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권력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구태세력이 온조.비류세력을 완전히 통합하고 백제를 개국하고 제사의 대상을 구태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비문에 부여의 주인자리를 놓고 고구려와 구태백제(백잔)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일 때 백잔을 보좌하는 세력이 <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왜>라고 할 때는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열도의 토착마한세력을 의미한다. 한나라 군대와 전쟁할 때 번조선지역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의 조선유민들과 연합하여 승리로 이끈 고두막후예인 구태세력은 마땅히 한반도 마한지역으로 이주해 온 기자세력과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당시 일본열도세력을 후원군으로 삼고 있던 서남해 해상세력은 구태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왜는 백잔의 보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왜>는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세력으로 단군3조선 당시 마조선인들 중에서도 한반도 해상세력을 의미한다. 단군3조선 당시 마조선은 한반도전체와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영역이였다. 단군3조선 붕괴이후 마조선 지역(한반도)으로 이주해 온 북방 기마.유목세력들(진조선.번조선인들)이 유입되기 전까지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역이였다. 그러나, 한반도지역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난 북방 기마.유목세력의 이주지가 되어 버리자, 유순했던 마조선인들은 일본열도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방 유목.기마세력이 차지한 한반도는 마조선인들로 채워진 일본열도와 구분되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구태세력은 이 <왜>세력을 등에 업고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온조세력과 혈통적으로 친척인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서울 한강변(강동구)에는 10여기의 세계 최대의 장고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구태백제세력이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 토착무덤양식을 변형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방후원분의 특징은 주구묘다. 주구묘는 주위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데, 전방후원분이 바로 주구묘의 형태다. 주구묘는 한반도무덤양식으로 일본열도보다 시기가 앞선다. 문화재청은 조속히 서울 강동구 한강변의 세계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을 발굴하여 백제사의 진실을 고고학적으로 밝힘과 동시에 전방후원분을 사용했던 일본천황가의 뿌리가 백제라는 역사적 진실을 만 천하에 공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 피라미드(물론 고대 한국인들이 건설의 주역)처럼 관광상품화함으로 우리 민족문화유산을 세계에 소개해야 할 것이다. 오직 민족주의 권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친일권력은 할 수 없는 중대한 민족양심의 문제이다.
그러면 결국 장고무덤(전방후원분)의 실제 주인은 전방후원분의 전신인 주구묘를 변형시킨 토착 마조선인들의 무덤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수의 구태세력은 엘리트집단으로 지배층을 이루고, 서남해 해상세력은 백제의 기반세력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구태세력과 서남해 해상세력이 권력적으로 융합하다 보니 친척이 되고 가족이 되어 결국 마조선의 영역이였던 일본열도도 백제의 담로가 되어 버렸다고 본다. 그리고, 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며 22담로를 설치할 정도로 대백제로 성장한 기반에는 항해술과 선박술에 뛰어난 서남해 해상세력(왜)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초토화면서 무기력해진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이전하면서 협력공존세력이였다고 볼 수 있는 호남지역의 토착마조선세력은 무기력해진 한반도 백제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백제내부에서 느껴졌을 것이며, 결국 백제를 보좌하는 일본열도의 백제담로군대(왜)를 동원하여 토착마한세력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영산강 주변지역으로 주둔시키는 과정에서 전방후원분이 생기고 전방후원분에 일본열도에 거주한 백제계 관료가 묻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후기 백제수도였던 공주지역에서도 일본식 무덤은 발견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며, 당시 백제의 담로지역에 불과한 일본이 침략하여 지배했다는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의 지배를 받는 담로지역이기 때문에 일본자체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하여 지배할 수도 없는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