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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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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삼십육계] 제 19계 부저추신...
2008/09/23 오후 11:28 | 병법

不敵其力 而消其勢 兌下乾上之象
적의 힘을 상대하지 말고 적의 기세를 소진시켜라. 이것이 바로 주역의 태괘가 아래 있고 건괘가 위에 있는 형상이라.

태괘가 아래에 있고 건괘가 위에 있으면 리履 괘가 된다. 하늘이 위에 있고 연못이 아래에 있으니 마치 거울과도 같은 형상이라, 천의가 그대로 비치니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도 물지 않는 순리의 형통의 괘다. 다시 말해 기세를 소진시킴으로써 그 힘마저 아무 어려움 없이 상대할 수 있으니 호호탕탕 거칠 것이 없다는 뜻이다.

<회남자-본경훈>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以湯止沸 沸乃不止 誠知其本 則去火而已
뜨거운 물로 끓는 물을 그치려 해도 물은 끓기를 그치지 않는다. 참으로 근본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불부터 없애 버린다.

물이 끓으면 끓는 물을 더한다고 물이 식지 않는다. 물을 식히고자 한다면 물을 끓이는 장작을 꺼내 불을 끄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찬 물이 있으면 그것을 섞으면 그만이겠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리 뜻대로 되기 쉬운가. 그래서 찬물이 없으면 달리 장작을 꺼내 불을 끄는 방도를 찾는 것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일 수 있는 것이다.


후한말 태평도의 비밀결사에 의해 황건의 난이 일어나면서 황실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지고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나 할거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였는데, 초기 정국을 주도한 것은 공손찬과 원소와 원술이었다. 이 가운데 원소는 한복과 공손찬을 쓰러뜨리고 하북을 거의 장악하여 최고의 성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허창에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앞세우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천하의 제후를 호령하던 조조는 그래서 원소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원소가 거느리고 있던 병력이 대략 20여 만, 그 가운데 무려 10만을 동원해 조조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조조로써는 불과 몇 만의 병력만을 동원해 그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초전에서 절묘한 계략으로 원소군의 대장인 안량과 문추를 죽이기는 했지만 전황은 여전히 조조에게 불리하기만 했었다. 이대로라면 조조는 원소군에 패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천운이 조조군에 있었던 것인지 원소의 참모 가운데 허유라고 하는 이가 조조군에 투항해 왔다. 원래 허유와 순우경은 원소와 함께 조조와 친분이 있었는데, 원소가 일찌감치 세력을 떨치자 그 밑에 들어가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원소에게는 전풍과 저수, 심배 등의 많은 우수한 참모들이 있었고, 따라서 허유는 원소의 진영에서 크게 쓰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도 원소에게 계책을 올렸다가 그것이 무시당하면서 불만을 품고 조조를 찾아왔던 것이었는데... 허유가 가져 온 정보가 꽤 큰 것이었다.

당시 조조가 차지하고 있던 연주와 사례주, 옹주, 청주는 오랜 전란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피폐한 상태였다. 낙양은 불타버린 지 오래고, 연주와 청주는 한 차례씩 황건적이 쓸고 지나갔고, 옹주 역시 전란이 끊이지 않았으니 인구도 줄고 땅도 황폐해져 궁여지책으로 채택한 것이 병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병량을 대게 하는 둔전병제였다. 그에 반해 하북은 일찌감치 원소가 대두됨으로써 전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니 인구와 생산에 있어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하북의 원소가 조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한 인구와 생산이 받쳐주었기 때문이었고, 조조군은 부족한 생산에 전란까지 더해지면서 관도에서 원소군과 대치하면서도 상당한 보급상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 허유가 원소군의 군량이 집적되어 있는 오소의 정보를 가지고 왔으니,

더 이상 주저할 것 없이 조조는 바로 군을 이끌고 오소를 기습해 들어갔다. 당시 오소를 지키고 있던 것은 순우경이었는데, 허유와 마찬가지로 조조와 친분이 있으면서 원소의 막하에서 종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워낙 후방이고 설마 조조군이 오소의 상황을 알고 기습해 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원소군으로 위장하고 쳐들어 온 조조군에게 오소의 군량은 모두 불태워지고 순우경 자신은 코와 귀가 잘려 원소의 진영에 돌려보내지는 치욕까지 당하게 된다. 후방의 그것도 병사들이 먹어야 할 군량이 한 순간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충격은 바로 원소군 전체로 전해졌다. 오소에서의 소식이 전해지고, 순우경이 코와 귀가 잘린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원소군은 물론 지휘부까지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조조는 자신의 병사로 하여금 그런 원소군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오소에서의 한 번의 싸움으로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10만의 병사는 순식간에 모조리 뿔뿔이 흩어지고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돌아간 원소의 곁에는 고작 8백 여 명의 병사만이 남아 있었으니.

결국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의 형세는 조조에게로 급격히 기울고 만다. 제아무리 인구가 많고 생산이 풍부한 하북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어도 10만의 병력의 손실은 단기간에 회복하기엔 너무 큰 것이었고, 더구나 패전의 충격으로 원소가 급사하면서 그 자식들마저 분열하여 마침내 원씨는 조조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원씨의 세력까지 모두 흡수한 조조는 더 이상 경쟁자가 없는 가장 강력한 힘을 손에 넣게 되었고. 사실상 이로써 모든 것은 결정났다 할 수 있었다.


한고조 유방을 말할 때 장량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은 한고조 유방이 한왕조를 여는 데 있어 그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싸움은 한신이 다 했다. 책략은 역이기나 진평도 열심히 짰다. 행정과 보급에 있어서는 소하 이상 가는 이가 없었다. 그 밖에도 팽월과 영포, 번쾌, 하후영, 조참 등등등...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발군이 바로 장량이었다.

사실 한중을 나와 관중으로 진출했을 무렵만 하더라도 유방이 항우를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항우 자신만도 수십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데다 항우에 의해 봉해진 왕들이 각지에 세력을 거느리고 항우를 지지하고 있었으니, 더구나 항우는 거의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당대 최고의 장수였다. 도저히 유방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것들 뒤집을 어떠한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장량은 길을 찾아냈다. 가장 먼저 한 것이 항우에 의해 죽은 초회왕의 제사를 지냄으로써 초패왕을 자처하는 항우의 명분을 빼앗는 것이었다. 원래 항우와 유방은 모두 초회왕의 신하를 자처했었으니 항우가 초회왕을 죽였다는 의혹에 대해 이것은 항우에게 상당히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다.

물론 명분이라는 것은 힘이 뒷받침된 다음의 이야기다. 그러나 명분이 명분인 이유는 그것이 때로 힘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명분이 없으면 마음이 멀어지고 마음이 멀어지면 이반의 가능성이 생긴다. 즉 적당한 핑계로 등을 돌리고서도 스스로 변명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이용해 장량은 항우에 불만을 갖는 세력들을 끌어들였다. 영포와 팽월을 끌어들이고, 각지의 왕들을 끌어들이고, 그래도 설득이 안 된다면 무력으로 더 이상 항우를 돕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싸우면야 항우가 이겼다. 역발산기개세라는 말 그대로 항우 앞에 그를 상대할 적이란 없어 보였다. 유방 자신도 매번 패해 쫓기고 포위당하고 그러다 끝내는 부모마저 인질로 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러나 항우가 그렇게 계속해서 승리하는 사이에도 중국 각지에서 항우의 지지세력들은 유방에 의해 멸망당하거나 이반하고 있었다. 전술적으로는 승리해도 전략적으로는 패배하는, 바로 그 상태였다. 실제 회하에서의 마지막 싸움에 이르면 항우와 유방의 세력은 완전히 역전되어 유방의 병력이 항우의 병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전략이라는 것이다. 최전선에 나가 직접 적을 무찌르지 않아도, 일일이 책략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려 하지 않아도,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적은 약해지고 나는 강해지고 마침내는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신의 위에, 소하의 위에 장자방이 있는 것은 그래서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영웅 윌리엄 셔먼 장군은 리델하트에 의해 "최초의 현대전 지휘관"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술적 능력은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몇 차례의 그가 지휘한 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잘 해야 현상유지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라면 남군의 리 장군이 더 뛰어나다 할 수 있었다. 그의 장점은 전술보다는 바로 전략에 있었다. 이른바 "초토화전술", 현대전을 정의하는 총력전에서 상대의 전투수행역량과 의지를 파괴하는 초토화의 전술이다.

셔먼의 전쟁에 대한 입장은 매우 확고했다. "전쟁은 곧 지옥이다." "전쟁을 찬미하는 놈들은 미친 놈들이다." "전쟁의 고통을 빨리 끝내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을 하루빨리 일찍 끝내는 것이다." 이름하여 "셔먼 장군의 행군" 다른 말로 "바다로의 행군" 애틀랜타에서 조지아, 서배너로 이어지는 셔먼 장군의 진격로는 남군에게는 지옥 그 자체였다. "북부의 악마" "파괴자 양키" 그에게 붙여진 저주섞인 별명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군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승리의 축제이기도 했었다.

당시 셔먼에 의해 남부가 입은 피해가 무려 1억 달러, 현재 화폐가치로 치면 100억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복구에만도 남북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걸렸다던가? 그야말로 다 부쉈다. 철도, 전신, 창고, 항만, 심지어 민가까지, 대포를 동원해 부술 수 있는 것은 다 부수고, 필요하다면 약탈까지 했다. 남부의 전쟁수행능력을 파괴하고 더불어 전쟁의 참혹함을 남부의 백인들에게 보임으로써 전쟁에 대한 어떠한 의지나 용기도 갖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공포와 절망과 체념, 그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전쟁에 대한 환멸과 지독한 패배감 뿐이었다. 그리고 셔먼에 대한 증오와.

사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든 북부든 아니 유럽에서든 전쟁이라 하면 어떠한 낭만적인 환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로서 용기를 가지고 전쟁에 참가해 무훈을 세우고 명예와 영광을 얻는다, 후방에서는 전장에서의 치열하고도 매혹적인 영웅담을 안주삼아 모여 화기애애하게 수다나 떨고, 원래 당시 전쟁이라는 것이 그랬다. 그래서 남부가 그렇게 쉽게 북부와의 전쟁을 선택했던 것이었고, 또 유럽에서 그렇게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셔먼은 그러한 환상 이면의 전쟁의 실상을 보았고 앞으로 펼쳐질 지옥도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남부인들이 말하는 그대로 미래의 지옥에서 나타난 악마인지도 모른다.

셔먼의 이러한 초토화전술이 더욱 빛을 발한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토벌에서다. 강간과 학살과 파괴와 추방, 그야말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의 기반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파괴하고 이주라는 명목으로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그 대부분을 쫓아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에 반대했다는데, 그래봐야 가장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죽이고, 그들의 물적 정신적 토대를 파괴한 이가 셔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남북전쟁에서는 백인이라고 상당히 봐주며 상대했달까? 역시 당시 미국의 백인에게 백인만이 인간이었던 것이다.


셔먼의 이러한 군사전략은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의 근간을 이루는데, 그것이 가장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전략폭격이다. 당시 세계에서 미국과 영국만이 보유하고 있던 4발 중폭격기, 많은 양의 폭탄을 탑재하고 긴 항속거리로 적의 후방으로 날아가 폭탄을 떨구어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파괴하는 전략폭격이야 말로 셔먼의 전략이 현대전에 와서 구체화된 예일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일본에서, 한국전에서도, 베트남전쟁에서도, 이라크전쟁에서도, 코소보 전쟁에서도, 적의 핵심을 타격하여 전쟁수행능력과 민간의 의지를 파괴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한결같은 미국의 전략이었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지역에 대한 융단폭격은 워낙 당시 북한의 군사적 역량이 소련에 대해 의존하는 바가 컸기에 별 효과가 없었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북베트남의 산업시설이랄만한 게 별로 없다 보니 소리만 요란했을 뿐이라는 점이 한계랄까? 이라크 전쟁에서도 아무리 폭격을 해봐야 이라크인의 증오를 씻어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수많은 항공기를 동원하고 수많은 지역을 초토화시켰어도 사상자만 늘렸지 오히려 상대의 적의만 키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즉 장작을 꺼내 불을 끄는 건 좋은데, 엉뚱한 아궁이의 엉뚱한 장작을 꺼내봐야 별무소용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초토화전술은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상화된 전술이었다. 특히 국경을 소란스럽게 하는 북방의 유목민족에 대해 토벌을 나설 때는 아예 뿌리를 뽑으려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하고는 했었는데, 강희연간에는 오이라트부를 토벌하면서 무려 인구의 3분의 1을 학살하기도 했었다. 북방의 유목민족이 강성할 때는 어쩔 수 없어도 중국의 왕조가 더 힘이 강해지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진에 대한 군사적인 우세를 달성하고 조선군은 시시때때로 두만강을 넘어 예방전쟁 차원에서 여진족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할 때 철저한 초토화 전술로써 여진족을 말살하려 했었다. 집을 불태우고 밭에는 소금을 뿌려 작물이 자랄 수 없도록 만들고,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울부짖었다고 했었다. 병자호란 때 꽤 심하게 당하기는 했지만 조선 역시 여진족에 대해 결코 마음좋은 이웃은 아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반 조선군의 저항을 그야말로 녹여버리고 파죽지세로 한양과 평양을 점령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일본군의 기세를 꺾은 것은 조선의 수군이었다. 한산도의 협수로를 막아 더 이상 서쪽으로의 진출을 막은. 그로써 육로를 통한 보급의 부담은 더 커지게 되었고, 그 보급로상에 여전히 남아 있는 조선군과 조선의 의병들이 압박을 가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일본군에게는 익숙지 않은 조선의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순신이 원래 바란 것은 그보다 더 큰 것이었다. 육상과 해상으로 동시에 진격하여 부산포의 적 선단을 파괴함으로써 아예 상륙한 일본군을 가두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순신 자신도 부산포로 직접 진격하기도 했거니와 수륙병진의 계책을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했었다. 다만 당시 조선군의 사정이 그러한 이순신의 전략적 기도를 뒷받침할만큼 여력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협수로통제라는 소극적인 전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했던 것이었다.


구한말,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의병과 만주의 독립군을 토벌할 때 일본군이 사용한 전술도 바로 이 초토화전술이었다. 의병, 혹은 독립군을 지원하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고, 공포로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의병과 독립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군에 복무했던 조선인 장교들에 의해 해방 이후 빨치한 토벌에 그대로 이용된다. 적 게릴라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한국인인 인근의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고 강간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도대체 제주도에서, 또 지리산 인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고 얼마나 많은 마을이 파괴되어 사라졌는가는 기록이 없어 아무도 모른다.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가 그런 점에서 초기 대한민국 정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49년 이승만정권에 의해 단행된 토지개혁은 두 가지 목적에 의해 추진되었다. 하나는 공산주의가 농촌사회에 침투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지주로 이루어진 한민당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였다. 아다시피 토지개혁은 특히 대지주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는데, 이승만이 한민당을 깨고 나와 자유당을 만들게 되었던 것도 이들 친일지주들이 그 힘을 앞세워 이승만을 누르고 정치를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 했던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한국전쟁 이후 야당이야 말로 친일의 본산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장면이나 조병옥이나 윤보선이나 면면을 따져보면 거물은 대개 야당에 많이 모여 있었다 할 수 있다.

아무튼 결국 이 토지개혁으로 인해 그나마 농민들의 불만이 해소됨으로써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공산주의의 농촌사회에 대한 침투가 쉽지 않게 되었는데, 국공내전이나 베트남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한국전쟁이 진행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있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을 깨고 나와 자유당을 만들고 국정의 주도권을 쥐고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장차 야당이 될 한민당의 친일지주들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린 덕분이었다. 이래저래 일석이조였달까?


열이 난다고 얼음으로 열만 식히려 했다가는 자칫 병을 키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간단한 감기라면 열을 식히는 것만으로도 자체치유력으로 얼마든지 나을 수 있지만 만일 다른 더 큰 병이 있다면 괜히 병을 키워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을 치료할 때는 증세만이 아닌 그 원인을 찾는 노력과 능력이 필수적이다. 무엇이 원인인가? 그 근원에는 어떠한 것이 숨어있는가?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원인을 찾고 나면 치료법도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그대로 현실에서 그 근본이란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하는" 바로 그 물적 토대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먹어야 살고, 아무리 대단한 기업도 돈이 있어야 장사를 하고, 정치를 하려고 해도 지지자와 정치자금이 있어야 정치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바로 그 물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을 최우선 전략으로 썼다. 전쟁에서든, 정치에서든, 장사에서든, 일단 당하고 나면 알아도 막지 못하는 것이 제 19계 부저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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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삼십육계] 제 18계 금적금왕...
2008/09/11 오후 9:12 | 병법

手+崔基堅 奪基魁 以解基體 龍戰于也 基道窮也
적의 견고함을 꺾어 벌리고 적의 우두머리를 빼앗아 그들의 몸체를 흩어 놓아라. 용이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그것들이 갈 수 있는 길이 곤궁하기 때문이다.

출전은 두보의 <출색시>로

挽弓當挽强활을 당기려면 당연히 강하게 당겨야 하고,
用箭當用長화살을 쓰려면 당연히 긴 것을 사용해야 한다.
射人先射馬사람을 쏘아 맞추려면 말부터 맞추어야 하고
擒賊先擒王도적을 사로잡고자 한다면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

당나라 현종 때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인 안록산과 사사명은 조정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름하여 안사의 난이다. 이때 안록산의 아들인 안경서가 그 부장인 윤자기에게 병사 10만을 주어 저양을 공격하도록 했었는데, 마침 저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장순이라는 장수였다.

워낙 초기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이라 장순은 그 기세가 사뭇 거센 것을 보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때를 노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윤자기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스무 차례에 걸친 공격을 모두 격퇴함으로써 윤자기의 군으로 하여금 지쳐 물러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윤자기가 군사를 물려 휴식을 취하자 장순은 북을 치고 징을 치며 마치 공격이 있을 것처럼 소란을 피워 윤자기 군을 긴장토록 만들었다. 한 번, 두 번, 여러 번 그것이 계속되자 그렇지 않아도 낮의 전투로 지쳐 있던 윤자기군은 더욱 지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반응조차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장순이 노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순은 명령을 내려 성을 나서 군사를 몰아 공격에 들어갔다. 지쳐 있던 윤자기군은 미처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틈을 타 수천의 적을 섬멸한 장순은 대장인 윤자기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장순의 휘하에는 윤자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혼전중이라 누가 윤자기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윤자기를 잡아야 하는데 윤자기가 정작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장순은 꾀를 냈다. 볏짚으로 화살을 대신하여 쏘도록 한 것이다. 마치 화살이 다 떨어진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날아오는 화살이 화살이 아닌 볏짚이라는 것을 깨닫자 반란군의 병사들은 앞다투어 윤자기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이런 중요한 정보는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공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윤자기의 모습과 위치가 밝혀지자 장순은 신궁으로 이름 높던 남제운이라는 장수에게 윤자기를 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윤자기는 한쪽 눈에 화살을 맞고 눈을 감싸쥔 채 도망치고 말았다.

대장이 도망치고 나니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장인 윤자기가 도망치고, 그것을 본 다른 장수며 병사들이 도망치고, 대오를 잃고 어지러이 도망치는 반란군의 뒤를 쫓아 장순은 그들을 크게 섬멸했다. 대장인 윤자기를 잡음으로써 10만의 대군은 한 순간에 쫓아버린 것이었다.


금적금왕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병자호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삼궤구고로써 항복의 예를 취할 당시에도 조선에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다. 함경도 기병은 아직 싸움에 참가하지도 않고 있었고, 남도의 병력 역시 제대로 동원되고 있지 않았다. 청이 밀고 내려 온 평안도 방면에서도 격파당한 병력 만큼이나 성에 고립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병력이 적잖이 남아 있었다. 버티자고 한다면 임진왜란에서처럼 청의 배후를 끊고 유격전과 지구전을 펼치며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인 선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던 인조는 도망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오로지 조선의 왕 하나 잡자고 빠르게 남하한 청군에 의해 남한산성에서 포착되어 고립고 말았다. 그리고 외부의 지원 하나 없이 겨우 버티다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왕인 인조가 항복하자 남아 있던 병력이나 전력은 그대로 왕인 인조와 함께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재빨리 도망쳐서 일본군에 사로잡혀 항복하는 것만은 피했던 선조야 말로 구국의 영웅이라 할 만 하다.


백제의 성왕은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을 고구려에 함락당한 이래 쇠퇴를 거듭하던 백제를 부흥시킨 걸출한 왕이었다. 그는 신라의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함께 고구려를 물리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부단히 노력을 했었는데, 그러나 결국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 좋은 일만 시켜주고 말았다. 비로소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제껏 변방에 머물러 있던 신라가 비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다.

결국 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자인 여창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여 구타모라에 성을 쌓도록 했는데, 그것을 지원하러 가는 도중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혀 목을 베이고 만다. 어이없게도 제대로 싸움도 해 보기 전에 한 나라의 왕이 적에게 잡혀 죽은 것이다.

왕이 죽자 백제는 급속히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의 세력이 강하던 백제였다.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잡혀 죽고 더욱 귀족의 세력이 강해져 있던 백제였다. 그런데 다시 왕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나섰다 목숨을 잃었다. 동서고금에 정적의 실수는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자산인 법이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을 - 그렇지 않아도 왕이 전장에서 죽어 혼란스럽고 약해져 있던 왕권을 귀족들은 기회다 싶어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무왕이 나타나 그것을 수습하기까지 백제는 긴 혼란에 빠져든다. 왕 하나 죽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도 아직 고구려에는 많은 성과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거나 항복한 성들은 대개 요동과 대동강 이남의 성들이었고, 그 동쪽,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의 성들은 여전히 나당연합군의 손에서 자유로운 채였다. 심지어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로도 당나라 군대는 이쪽 성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더 이상 연장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것도 바로 이곳의 성들의 지지를 얻어서였었고.

그러나 아무리 성이 남아 있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지 않고 자주성을 유지하고 있었어도 일단 왕인 보장왕이 사로잡히고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당한 이상에는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기란 어려운 것이다. 누구 하나 왕이 되고자 해도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고, 오히려 누군가 왕이 되려 한다면 그것이 내분의 원인이 되기 쉬웠다. 더구나 그 세력은 전성기의 고구려에 크게 미치지 못하니, 강성한 당과 신라에 맞서 고구려를 계승할 것을 주장하기도 버거운 상황인 것이다.


북송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 인구와 군사력에서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여러가지 난맥상이 겹치면서 주위에 동네북으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싸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고, 금의 침략에 대해서도 그것을 최소한 저지할 군사적 역량은 되었다. 그만한 군사가 있고 그만한 기술이 있고 그만한 전술이 있었다. 악비와 한세충과 같은 명장들은 그러한 역량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금군에 의해 두 번이나 개봉을 포위당하고, 그로써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금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자 북송의 통치체제는 급속히 붕괴되게 된다. 하긴 황제가 사로잡혀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자리부터 채워넣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급히 채워 넣은 황제라는 것이 제대로 권위를 갖추기도 힘들었다. 고위직에 있던 인사들마저 모조리 포로로 잡혀갔으니 국가체제를 정비하려 해도 한참은 혼란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래서 마침내는 임안마저 금군에 함락당하고, 그럼에도 그에 아무런 대처를 못하고, 결국 진회같은 이가 정권을 되면서 악비가 그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휘종이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뭔가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휘종이 금군을 피해 남하할 수 있었고, 그래서 휘종 자신이 임안에 남송의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면 아마 역사는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수뇌부가 남아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1560년, 즉 에이로쿠 3년 오와리의 오다가는 긴장에 휩싸이게 된다. 쓰루가의 이마가와가 죠라쿠를 명분으로 2만 5천의 병력으로 오와리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다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가 3천 명, 10대 1에 가까운 비율이니 어떻게 보아도 승산은 없었다. 그러나 앉아서 멸망할 수는 없기에 오다 노부나가는 그 진격로상에 여러 성을 쌓고 농성토록 한다. 그리고 때를 기다린다. - 혹은 뭘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린다.

그러다가 마침내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는 기요스를 나와 출격하게 된다. 이때 그를 따르던 것이 고작 200, 이때는 이미 마루미와 와시즈의 두 성채가 함락된 다음이었다. 탄게로 들어간 노부나가가 병력을 결집하는 사이 나카지마에서 삿사와 센슈 두 장수가 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연이은 패전, 그러나 노부나가는 도리어 나카지마로 군을 이끌고 진출할 것을 명령한다. 지형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나카지마로 진출한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에 적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그에 공격을 가할 것을 명령한다. 이때 노부나가의 병력은 2천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오케하자마에는 이마가와의 전위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위부대 뒤에는 이미가와의 본대가 있었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는 그것을 몰랐고, 단지 그동안의 전투에 지친 이마가와의 부대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불어온 폭풍우로 이마가와군 역시 오다군의 위치를 놓치고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가운데 오다군의 공격으로 기습은 성공할 수 있었다. 여러 우연이 겹친 정면공격에 의한 기습이었다.

전위부대에서 시작된 혼란은 본대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퇴각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때 오다 노부나가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그곳에 있음을 보고받는다. 오다 노부나가는 병력을 그리로 집중시키기 시작한다. 대장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만 잡으면 싸움은 끝나게 되는 것이니. 결국 300명의 하타모토들의 호위를 받으며 퇴각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죽임을 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일단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으면서 다케다와 호조의 쓰루가에 대한 야심이 더욱 노골화되자 이마가와는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할 힘을 잃게 된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는 이때 이마가와의 진중에서 빠져나와 미카와의 본거지로 돌아오게 되고, 미카와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는 더 이상 이마가와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 되면서 미노 공략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장차 전국의 혼란을 정리할 오다 노부나가의 행보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안데스 고원을 중심으로 수백 년을 이어 오던 잉카제국의 멸망은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었다. 고작 수백의 에스파냐군에 의해 황제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힘으로써 한 순간에 그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으니. 아무리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고, 그 기술수준이나 군사력이 에스파냐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당시의 머스켓이라는 것은 수십 배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사로잡힘으로써 잉카는 그 저항의 구심점을 잃게 되었고, 결국 잉카제국은 해체되고 그 영토와 백성들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고래로 성공한 반란은 항상 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났다. 멀리에서 일어난 반란 치고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물다.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반란이 항상 성공하고, 권력에서 멀수록 항상 실패한다. 조선에서 성공한 반정과 실패한 반란의 예를 보면 더 확실하다. 한 차례의 정난과 두 차례의 반정과, 그러나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농민혁명이나 이징옥의 난은 모두 진압되었다. 너무 멀리에 있었기에 조선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될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뱀을 잡을 때는 머리를 눌러 잡는다. 어차피 뱀의 독니는 머리에 있으니 아무리 꼬리가 날뛰어봐야 머리를 잡고 있는 이상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일 때도 머리를 자르고 나면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무력해지게 된다. 머리가 뛰어나면 손발이 편하고,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바쁘고, 작지만 가장 큰 것이 그래서 머리다.

금적금왕이라는 것은 뱀을 잡을 때 머리를 잡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죽일 때 단번에 목을 쳐서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 무리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