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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아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 하나가 도저히 먹고 살기가 힘들어 방송작가나 해 볼까 하고 폼을 잡았었는데...
면접장에서 직원이 그랬다더라.
"20대 중반 넘고 남자면 웬만하면 그냥 집에 가라."
그만큼 대우가 박하다는 거다. 급여도 적고 근무여건도 최악이고 대우도 안 좋다.
여자야 적당히 하다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남자는 나중에 가족도 부양해야 하고 하니 할 일이 못 된다는 거다.
물론 여기에는 남자보다는 그래도 여자가 막 대하기 쉽다는 것도 작용한다. 일단 남자는 잘못 건드리면 맞잖아?
그래서 그 인간 결국 방송작가 포기하고 게임시나리오 쓰다가 얼마전부터는 만화시나리오 쓴다고 하는데, 그 뒤로는 모르겠다.
이쪽 일이라는 게 말이 프리랜서지 거의 백수라. 만화시장도 쫄아들고 있는데 과연 밥이나 먹고 사는지.
하필 죽은 방송작가 나이가 24, 그리고 여자, 마음이 안 좋다.
하긴 방송작가만일까? 만화시나리오든 영화시나리오든 하여튼 이쪽 계통이라는 게 죄다 그렇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다. 워낙 인간이 궁상이라 아는 인간들도 하나같이 죄다 궁상덩어리들이거든.
아무튼 별로 사람 할 짓은 못 된다.
젊을 때 잠깐 경험삼아 하는 거라면 모를까,
뭐 아주 운이 좋다면 대단하게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자면 돈 잘 버는 배우자 만나는 게 급선무다.
일단 성공하기 전까지는 돈이 안 되거든.
뭐 힘들지 않은 일이라는 게 어디 있겠냐만 아예 앞이 보이질 않으니.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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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장 처음 사용한 금속기가 무엇인가는 확실치 않다. 역사시대 이전의 일이다 보니 기록도 없고 남아 있는 유물도 얼마 없고,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유물로만 본다면 가장 오랜 금속기는 철이다. 기원전 3000년 무렵의 철기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발굴되고 있으니. 그러나 이때까지 철은 도구라기보다는 상당히 희귀한 귀금속에 가까웠다.
사실 청동기는 도구로 쓰기에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특히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이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이었는데, 아다시피 조선만 하더라도 구리가 생산되지 않아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구리를 대부분 수입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매장지역이 편중되어 있었고 그래서 널리 보편적으로 쓰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무역이 발달하기도 했었다. 필수적인 구리를 확보하기 위한 무역이었다.
구하기 힘들다는 점 외에도 만들기가 까다롭다는 점도 청동을 도구로 쓰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었다. 무르고, 약하고,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짓거나 아니면 무기를 만들어 싸움을 하거나, 그 어느것에도 구리 그 자체로는 전혀라고 할 정도로 쓸모가 없었다. 제대로 쓰자면 합금을 만들어야 했다. 청동기라는 말 그대로 주석과 아연 등의 다른 미량원소를 섞어 그나마 쓸만한 수준으로 기계적 성질을 개선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구하기 힘든 구리였다. 그런데 여기에 주석과 아연, 그밖에 여러 미량원소가 또 들어가야 한다. 그것들은 구하기 쉬울까? 더구나 그렇게 여러 금속원소를 모아 합금을 만들어야 한다. 합금이라는 게 그냥 섞기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최적의 비율을 찾아내야 하고 또한 그것을 가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불순물을 최소화하는 기술은 필수적이다.
더구나 구리합금은 주물로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주조라는 게 결코 만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쇠를 녹이는 것도 녹이는 것이지만 그보다 기포 없이 균일한 조직을 유지하며 주물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도 상당히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고,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기술을 확보한 나라나 사회는 얼마 없었다. 조선에서 구리를 녹여 대포를 주조해냈던 것과는 달리 유럽에서도 아주 최근까지 철판을 두드려 말아 대포를 만들곤 했을 정도였다.
원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제대로 가공하기도 힘들고, 그만큼 아무나 만들 수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만들자면 많은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청동기였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 청동으로 만들 수 있던 것들은 종교적인 목적의 도구들이거나 아니면 전쟁을 위한 무기들이었다. 종교든 전쟁이든 결국 지배자의 권력을 위한 것이니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권력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청동기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청동기시대에는 사실 이렇다할 획기적인 변화는 없었다. 농업혁명이야 이미 신석기시대 들어서면서 시작되고 있었고, 청동기시대의 농기구 역시 신석기시대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돌로 만들어 쓰고 있었다. 청동기시대라지만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전쟁을 할 때를 빼놓고는 그다지 큰 변화랄 것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데야 굳이 청동이 아니더라도 돌만으로도 충분했으니, 예전에는 청동기문명이 시작되고서야 국가형태의 사회가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겼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신석기문명에서도 국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구리의 단점과는 달리 철은 첫째 구하기 쉬웠다. 운철이든 사철이든 노천광산이든 지구상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금속원소가 바로 철이었다. 매장량도 많고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구해 쓸 수 있었다. 청동기가 쓰이기 이전에 이미 철로 만든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때문이었다. 그만큼 구하기 쉬웠으니 어떻게든 가공해 쓸 수 있었으리라.
사실 철은 만들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굳이 합금을 하거나 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른 미량원소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합금비율을 찾아내고 맞추느라 머리를 싸맬 일도 없었다. 특히 철이기에 가능한 단조는 그저 잘 두드려 형태만 만들면 되었기 때문에 주조에 비해 높은 수준의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단조를 하자면 주물을 뜰 때처럼 높은 온도를 장시간 유지해 줄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쇠를 다룰 줄만 알면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만큼은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철이었다. 다만 한 가지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철기의 사용을 늦추는 이유가 되었다. 바로 강의 제련이었다.
구리도 마찬가지지만 철 역시 순수한 철 상태로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금속이었다. 무르고 약하고 더구나 녹도 잘 슬었다. 구리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도구를 만들어 쓰자면 그러한 기계적 성질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더 강하고 더 튼튼하고 또한 가공하기 쉬운. 바로 강이었다. 문제는 이 강을 만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단 강은 용융점이 높았다. 900도 정도에서 녹는 청동과는 달리 강은 무려 1550의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 이만한 고온을 내기도 고온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초기의 철기는 산화철 상태의 철광석에서 추출해낸 보다 용융점이 낮은 순철이나 연철에서, 탄소함유량을 높여 보다 녹는 온도를 낮춘 주철로 먼저 발전이 이루어졌다. 강은 철기의 발달에서 가장 마지막에 그 정점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강은 1550도에서 녹는다. 당연히 그 온도를 내기도 유지하기도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연상태에서 구할 수 있는 철이란 강이 아닌 산화철로써 이것을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환원시켜 연철을 만들어 썼다. 연철 다음에 만들어진 주철은 여기에 숯등을 통해 탄소를 추가함으로써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강을 만들자면 그렇게 만들어낸 연철에 탄소를 추가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기술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최초의 철기가 만들어진 이래 히타이트에서 제강법이 나타나기까지 무려 1000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청동기란 제대로 강이 만들어지기까지 보다 낮은 온도에서 상대적으로 연철이나 주철보다 우수한 기계적 성능으로 그 사이를 메꾸었던 과도기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몰론 일단 강이 만들어진 뒤로도 여러문제가 남아 있었다. 먼저 히타이트인들이 고안해낸 침탄법은 연철에 숯 등을 사용해 탄소를 첨가하는 것으로 그 기술적 한계로 말미암아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었고 표면만이 겨우 강의 성질을 띄고 있었다. 그냥 쓰자면 아무렇게든 별 불편없이 쓸 수야 있었겠지만 워낙 초기기술이다 보니 손이 많이 가고 그 완성도가 높지 않아 효율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을 직접 용광로에서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1550도의 높은 온도를 유지하는 용광로를 만들어내던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기술을 고안해내든가.
그래서 과도기적으로 나온 기술이 탄소함유량이 낮은 연철과 탄소함유량이 높은 선철을 함께 가공함으로써 만들어진 제품 안에서 탄소함유량이 평균을 이루도록 하는 기술이었다. 연철이나 선철은 강에 비해 용융점이 한참 낮으니 보다 낮은 온도에서 연철과 선철을 만들고 그것을 또다시 낮은 온도에서 가열하여 두드려 가공함으로써 굳이 1500도 이상의 온도를 내지 않고서도 강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패턴 웰디드나, 중근동의 다마스커스강이나, 용광로가 만들어지기까지 강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고, 또 이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강을 생산해 쓸 수 있었기에 이 기술은 아주 최근까지 거의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과도기를 넘어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중국인에 의해 용광로가 만들어지고 최초의 강이 생산된다. 그 원리는 아주 단순했다. 어차피 선철과 연철을 섞어 두드리면 강이 나온다면, 이 둘을 함께 녹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선철과 연철은 그 녹는 온도가 낮으니 그 녹은 온도만 맞춰준다면, 아니 약간의 기술적인 조작으로 녹는 온도만 조금 낮출 수 있다면 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강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관강법으로 5세기 이후 한반도에서도 바로 이 기술로 강을 만들어 사용했다.
물론 초기의 강은 불순물이 많아서 그대로 쓰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그래서 일단 강을 만들고서도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단조는 형태를 만들고 강도를 높이는 과정인 동시에 충격을 통해 불순물을 강의 표면으로 배출하는 과정이었다. 상대적으로 철의 품질이 낮았던 일본의 경우엔 그 단조의 과정이 더 중요해져서 칼을 만들 때면 그렇게 두드린 쇠를 몇 번이고 접어 다시 두드리곤 했었다. 그것이 일본도의 높은 강도의 비밀이라 일컬어지는 접쇠의 원리다. 반면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보다 질좋은 철광석을 사용할 수 있었고, 제련기술도 발달하면서 불순물이 적은 강을 생산해낼 수 있었기에 굳이 접쇠까지는 필요 없이 쇳물로 형태를 뜨고 그것을 다시 적당한 단조와 열처리로서 가공해 만드는 생산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뒤로도 강은 무척 비싼 물건이라 - 선철과 연철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한 데 녹여 강을 만드는 게 그리 간단할 리 없으니 - 고구려의 유물을 보면 강을 아끼기 위한 많은 노력과 아이디어들이 엿보인다. 화살과 같이 대량으로 소모되는 무기류는 보다 값싼 주물로 만드는 것이나, 도끼를 만들 때 그 속은 주물로 만들고 그 겉에 강을 씌워 강도를 보완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일본도를 만들 때도 그래서 연철을 같이 섞어쓴다. 접쇠로 만든 칼날이 경도가 높은 대신 취성이 강해 쉽게 깨질 수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는데, 결국 비싼 강을 아끼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강이 대량으로 생산되기까지 이렇듯 많은 시간과 노력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사실 일상에서 쓰이는 도구란 적당한 강도를 지닌 연철로도 크게 무리는 없었다. 연철이라지만 적당히 열처리를 가하고 숯으로 탄소를 가미하면 어느 정도 강에 준하는 기계적 성능을 얻을 수도 있었기에 무기와 같이 높은 강도와 경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농기구나 기타 일상의 도구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연철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그리 높은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니 철광석을 가공하는 단계에서 연철이나 선철을 철괴의 형태로 만들어 유통시키게 되니 도구를 만들고자 할 때는 그렇게 이미 만들어진 연철을 적당히 다룰 수 있기만 해도 되었다.
따라서 생산량도 적고 비용도 비싸 종교적인 목적이나 무기로서 제한적으로 생산되어 쓰이던 청동기와는 달리 철기에 이르면 일상에서도 철기가 널리 쓰이게 된다. 특히 생산에 직접 관련되는 농사에서 철로 만든 농기구가 널리 일반적으로 쓰이면서 돌을 갈아 만들 때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보다 강하고 보다 정교한 농기구를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증가가 가능하게 된다. 생산도 늘고 인구도 늘고 그에 따라 사회도 보다 고도화되고 다양화되고, 싸움질 하는 것 말고 크게 발전한 것이 없던 청동기와는 달리 철기시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혁신적인 변화가 이로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혁명이라 할 만한 큰 변화는 대충 세 번 있었다. 신석기 혁명과 철기혁명과 산업혁명, 청동기시대는 말하자면 그 과도기다. 신석기 혁명에서 철기혁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철기와 같은 기층민중을 아우르는 근본적인 변화는 될 수 없었으니. 그래도 역시 이후의 역사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니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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類以誘之 擊夢也 비슷한 것으로 유혹하는 것이 어리석은 이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포전인옥의 출전은 송나라따 씌어진 <전등룍>에 수록된 당나라의 시인 상건과 조하의 시를 짓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조하는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었다. 그가 지은 시를 따서 따로 조의루라 불리울 정도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소주의 시인 상건이 그를 무척 흠모하여 그의 시를 얻기를 갈망했었다.
그런데 마침 조하가 소주를 방문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소주를 방문한다면 반드시 명승의 하나인 영덕사를 방문할 터였다. 상건은 기회다 여겨 조하가 찾기 전에 영덕사에 먼저 가서 자신이 지은 시 두 구절을 적어 그 앞에 걸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하는 시인이었다. 시인이 시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조하는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르는 시 두 구절을 보고는 시심을 일으켜 나머지 두 구절을 지어 채워 넣었다. 마침내 상건은 그 뜻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조하의 시구는 과연 훌륭했다. 상건이 쓴 앞의 두 구절에 비해 조하가 쓴 뒤의 두 구절은 더 훌륭했고 그래서 조하에 의해 한 편의 멋진 시가 완성될 수 있었다. 한참 못 미치는 시구로 한참 더 훌륭한 시를 얻어낸 것이다.
결국 이를 두고 많은 문인들이 이르기를 돌(상건의 시구)을 던져 옥(조하의 시구)을 얻었다고 일컫게 되었으니, 서툴거나 작은 의견이나 문장으로 고견이나 훌륭한 작품을 얻어내는 관용구로 여기게 되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포전인옥이다.
<백전기략>의 <이전편>에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무릇 적과 싸우고자 할 때 그 장수가 어리석어 변화를 모른다면 이익으로써 그를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이익을 탐내어 그 불리함을 모른다면 복병으로써 그를 무찌른다. 그러므로 병법에서 말하기를 이익으로 적을 유인한다고 하는 것이다."
초나라가 이웃한 교나라를 공격하자 교나라는 강대한 초나라와 직접 맞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판단하고 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기 시작했다. 험준한 지형과 굳건한 성곽에 의지해 버팀으로써 초나라 군대가 물러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나라의 전략을 맞아떨어져 초나라는 무려 한 달 넘게 이렇다할 성과 없이 교나라의 성곽 아래에서 시간만 보내게 되었다. 그때 대부 막오굴하가 초나라 왕에게 건의했다.
"성을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니 작은 이익으로 적을 유혹하여 승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초나라 왕이 그 방법을 묻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교나라 성안은 한 달 가량 포위당하면서 나무를 할 시간이 없었스니다. 사병을 보내어 나무꾼처럼 나무를 하게 하면 적은 반드시 성문을 나와서 나무를 약탈하려 할 것입니다. 우선 며칠간은 그들로 하여금 작은 이익을 얻게 한 뒤에 그들이 큰 뜻을 잊고 많은 병사을 보내어 성을 나와 나무를 빼앗으려 할 때에 먼저 아군의 병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의 뒷길을 끓어버리고 군사를 모아 그를 공격한다면 승세를 타서 적의 성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척 훌륭한 계책이지만, 그러자면 먼저 상대가 그 계략에 넘어가 주어야 한다. 과연 교나라 왕이 그러한 이쪽의 의도에 넘어가 줄까? 초나라 왕의 의문에 막오굴하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교나라가 비록 작으나 경솔한 경향이 있습니다. 경솔하다는 것은 생각이 얕은 것이니 꾀하고 꾸미는 바가 적다는 뜻입니다. 이같은 달콤한 미끼가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속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나무를 대신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으니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 할 수 있겠지만 고대의 나무는 건축자재이면서 무기를 만드는 재료이면서 또한 연료였다. 아니 밤에 불을 밝히려 해도 나무가 중요하게 쓰였다. 그런데 성안에 나무가 없다? 이것은 요즘 석유 없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초나라의 대부 막오굴하가 노린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나무가 없으면 어떻게든 구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무를 구할 수 있도록 해주자.
실제 교나라 왕은 그것이 초나라의 계략이 아닌가 조심하면서도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몇 차례 초나라 병사들이 해 놓은 나무를 수월히 약탈하게 되자 마음을 놓고 자주 더 많이 나무를 약탈하려 하게 되었다. 당장의 이익이 눈앞에 보이자 초나라의 위협을 잊게 되고, 몇 번의 성공으로 그 실패가 치명적일 수 있음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초나라가 노리던 바였다.
교나라 군사가 더 이상 아무런 조심성 없이 나무를 하던 초나라 병사들을 공격하게 되자 초나라왕은 마침내 엿새째 되는 날 나무를 하던 병사들로 하여금 교나라 군사를 유인하도록 했다. 교나라 군사들이 나무를 빼앗으려 하자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는 나무꾼들의 모습에 그들을 쫓기 시작한 교나라 군사들은 결국 초나라 군사들의 매복에 걸려 퇴로마저 차단당한 채 대부분 괴멸되고 말았으니,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초나라는 교나라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전국칠웅의 세 나라인 위와 조와 한은 원래 삼진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로써 서로 인접해 있는 탓에 사이가 안 좋으면서도 서쪽으로 강대한 진을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때때로 서로 협력하여 대항하던 미묘한 관계에 있던 나라들이었다. 그래서 진은 위를 공격하기에 앞서 이들 삼진이 서로 단합하지 못하도록 조를 꾀어 업성을 댓가로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것은 진과 조 사이에 위치한 위에게 있어 양면으로 적을 맞게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계책을 논의해 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국칠웅 가운데 최강인 진과 삼진 가운데서도 군사력에서 가장 앞서는 조의 협공을 막아낼만한 힘이 위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두려워하는데, 유독 장군 묘망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원래 조와 진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익을 나눠가질 계산으로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익으로 유혹한다면 서로 갈라서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번 전쟁은 진이 주도하는 것으로 조는 단지 한 손 거들 뿐이니 그 이익이 매우 적어 이익으로써 유혹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면서 묘망은 사신으로서 당대의 세객으로 이름높은 장의를 보낼 것을 천거했다.
묘망의 예측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장의가 위왕의 사신자격으로 조왕을 만나 업성을 양도할 뜻을 내비치자 조왕은 냉큼 장의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업성은 지키기가 무척 어려운 곳으로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적에게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어차피 지키기도 힘든 땅, 대왕께서도 진과 손을 잡고 위를 공격하려는 뜻이 땅에 있으니, 저희 왕께서 만일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땅을 양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명분이야 훌륭했다.
"전쟁은 참으로 흉험한 것이라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많은 생명이 죽어나갑니다. 그래서 장수가 있는 곳에는 가시나무만이 자라고,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고 합니다. 저희 왕께서는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는데 백성이 그런 고난을 겪는 것을 어찌 보고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평화로써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도 더없이 바라던 바였다.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진과 손을 잡고 있지만 진이야 말로 조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적일 터였다. 위를 멸망시키고 그 땅과 백성을 차지하게 되면 더 강해지게 될 터인데,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공짜로 땅을 얻을 수 있다면 - 더구나 그 땅이 진과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켜 얻게 될 것이라면 전쟁을 않고 얻는 것이 최선일 것이었다. 물론 조나라의 계산에서 그랬다.
정작 조왕이 진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약속한 대로 업성을 접수하고자 장수와 병사를 파견했을 때 위의 장수 묘망은 군사를 배치하고 진영을 굳건히 하여 조나라 장수와 병사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약속한 대로 업성을 받으러 왔습니다." "내게는 이 성을 지킬 책임이 있는데 어찌 함부로 성을 넘겨줄 수 있겠는가?" "귀국의 왕이 허락한 일입니다." "그런가? 그러면 증거를 보이시오!" "비밀스런 약속이라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귀국의 사신으로 왔던 장의가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장의라고? 그러면 그에게 가서 물으시오. 나는 그런 말을 들은 바 없소!"
그러나 이미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으로 진왕은 분노하여 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거꾸로 위와 동맹을 맺고 조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으니 이미 조로서는 발등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