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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은데 - 나 역시 감정에 이끌리는 인간이므로 -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 가장 처음 본 얼굴이 있다. 어떻게 생각할까? 때리고 욕하고 굶기고 괴롭혀도 가장 처음 본 얼굴이고 가장 가까이 있는 모습이라면 어느새 부모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건 본능에 관련된 것이다.
태어났다. 아니 겨우 사물을 인지하고 인식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 어딘가 임시정부라는 게 있지만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학교에 가도, 관공서에 가도 보이는 것은 일본제국과 조선총독부 뿐. 현실을 지배하는 힘도 그것이 전부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우고.
묻는다. 과연 저 아이는 자신의 조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망해버린 조선을 조국이라 생각할까? 아니면 생전 보도듣도 못한 -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임시정부를 자기 정부라 인식할까? 그도 아니면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일본제국을, 조선총독부를 자신의 조국, 자신의 정부로 인식할까?
흔히 프랑스의 예를 든다.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점령되었던 기간은 기껏 3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선은 그 무려 열 배의 시간을 일제의 식민지로 있었다. 한 아이가 태어나 자라 심지어 자식이 결혼해 아이를 갖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일본의 지배 아래, 일본을 자기 나라라, 자기 정부라 배우며 자랐다. 3년이라는 시간과 36년이라는 시간, 과연 같을까?
친일이라 하지만 그 안에서도 차등을 두어야 하는 것이 그런 부분이다. 있지도 않은 나라, 가져 본 적 없는 조국을 위해 과연 현재를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참 멋지기는 하겠지만 그런 피비린내나는 선택을 하기엔 인간의 일상은 너무 가볍고 연약하다. 그것도 이미 열강의 대열에 들어가 있는 일본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도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능성도 희박한 독립보다는 일본의 지배 아래,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식민지의 현실을 보다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세기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랬었다. 그들이 처음 바랬던 것은 아일랜드의 독립이 아니었다. 자치였고, 아일랜드의 인민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었다. 아마 영국정부가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에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면 스코틀랜드나 웨일즈와 마찬가지로 영연방의 한 부분으로 지금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아일랜드의 독립을 부추긴 것은 영국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조선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근대화 어쩌고 하지만 학교도 부족했고, 그나마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은 전무했다. 겨우 경성제국대학이 하나 세워졌는데 그조차 조선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제국에 협력하는 조선인을 위한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아예 조선에는 공장이랄만한 것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약탈까지 더해지며 조선의 인민들은 더욱 굶주리게 되었다. 딸을 유곽에 팔아야 하고, 지식인들은 하릴없이 룸펜이 되어 인생을 허비해야 하고, 그렇다고 현실을 개선시키려 해도 조선인에게는 조금의 참정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런 현실을 무시하고 과연 일본과의 투쟁에 모든 것을 걸어야겠는가?
그래서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는 그같은 일본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지배에 협력하되 일본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내고, 조선의 인민들의 삶을 개선시키자...
보통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조선은 망해 사라졌고, 현실은 일본의 지배다. 그렇다면 그 현실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모두가 투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열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분들이야 훌륭하다는 걸 알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다면 굳이 그런 분들을 떠받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니 대단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까지 모두 뭉뚱그려 친일파라 해야 할까?
선을 그어야 한다. 물론 프랑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선이다. 일본의 지배 아래 태어나서 살아갔던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철이 들 무렵 이미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나치독일의 지배 아래 놓였을 때 역시나 레지스탕스에 참가하지 않았던 수많은 프랑스인들처럼 방관자로 있었던 사람들. 과연 그들까지 친일파라 해야 할까?
즉 친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구일본제국의 지배에 순응할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구일본제국이 조선을 지배하고 약탈하는 데 동조했던 이들을 뜻하는 것일 게다.
솔직한 말로 나는 고아론을 처음 내놓았던 이광수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인정하고 있다. 어차피 조선은 없고, 일본의 지배 아래 살아갈 것이라면, 아예 뿌리까지 일본인이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한국에 방문한 외국인들에 대해 한국의 문화를 인정하라, 한국만의 관습을 받아들이라, 한국인이 되라 강요하는 많은 한국인들처럼. 외국인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남아 한국을 바라볼 때 그렇게 싫어하는 게 한국인 아니던가? 그대로. 그것도 어쩌면 당시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조선의 인민들의 처지를 보다 낫게 할 수 있는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광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주장과는 달리 철저히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과 조선의 인민에 대한 약탈에 철저히 방관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아니 나아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조선의 인민과 물자를 동원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었고, 그의 선동에 실제 넘어가 전장으로 나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책임은 어찌하는가?
그런 것이 친일인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인민과 물자를 약탈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인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게 만든 심지어 주범이거나 최소한 공범이었다는 것이. 식민지 백성의 입장에서가 아닌 철저히 침략자의 입장에서 그들에 동조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것이. 제국주의 침략이 비난받듯 그 협력자들도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다. 단지 그 시절에 순응했다는 이유로 엉뚱한 사람들까지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도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현실에 순응해 살아갔다.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것은 프랑스인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였다. 36년이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느새 부모가 되고, 또 손주를 볼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살아가는 것이 죄가 되는가?
나는 박정희를 싫어한다. 아주 끔찍히도 싫어한다. 그러나 그의 친일전력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대에, 충성해야 할 조국은 사라지고 일본제국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한 상황에, 아마 박정희 같은 성격이라면 차라리 일본인이 되어서라도 새로운 조국에 충성하려 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활동하던 곳도 조선인과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만주국이었고. 아니 오히려 당시 만주국은 조선인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통하고 있었다. 과연 비난해야 할까?
비난하자면 오히려 당시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여 조선의 인민들을 약탈하던 지주, 자본가들이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거나, 지식인이거나, 실제 조선총독부의 지배와 약탈에 영향을 주고 기여를 했던 이들. 그들보다 박정희가 더 비난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통령이라서? 전직대통령이어서? 아니면 독재를 해서?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건 이거, 그건 그거다. 독재를 했다는 것과 과거 친일을 했다는 것은 별개다. 친일의 크기나 책임도 그와는 별개다. 세상에 없을 독립운동을 했어도 독재를 했다면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이고, 친일을 했어도 과거를 반성하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면 칭찬을 들어 마땅한 것이다. 고작해야 만주군 소좌따위.
말하자면 박정희는 친일파 가운데서도 피라미다. 과연 그것을 친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지엽말단에 불과하다. 대체 왜 그것이 지금에 이리 문제가 되어야 할까? 더 큰 친일도 있는데. 식민지 치하에서 굳이 한 자리 하지 않고서도 지주로서, 자본가로서, 조선의 인민들을 착취하며 일본의 지배에 협력한 이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들이 더 큰데.
내가 박정희 친일논란에 냉소적인 이유다. 최소한 친일문제에 있어 박정희는 꺼리도 못되는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이리 떠들어댄다는 것이... 아직도 우리가 유신체제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겠다. 애써 박정희를 까대려는 인간들이나, 그 박정희를 감싸려 발악하는 무리들이나... 언제쯤에나 우리는 유신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은 원래 나약하다. 나약하기에 항상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가장 악독한 전제왕조의 지배 아래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리고 때로 잘못도 저지르고 죄도 짓곤 한다. 인간인 때문이다. 먼저 그것을 인정하고... 모두가 애국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투사가 될 수도 없고, 모두가 열사가 될 수도 없고. 친일에 대한 평가도 그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냥 무작정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았으니, 순응했으니 친일파가 아니라.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당시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창씨개명했으면 다 친일파지!"
물이 너무 맑으면 어떤 고기도 살 수 없다. 사람은 더욱 살지 못한다. 세상은 그리 맑지 않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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